기원전 49년 1월 10일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넜다. 이탈리아 북부에서 루비콘 강을 건너면 원로원이 있는 로마 중심지로 진입하게 된다. 당시 군법은 누구든지 이 강을 건너려는 자는 사전에 무장 해제를 하라고 강제했다. 카이사르는 중무장 군대를 이끌고 물을 건넜다. 반란이었다.
무장을 해제한 채 입성하면 반대파에게 죽임을 당할 처지였으니 어쩔 도리도 없었다. 그 이후 “루비콘 강을 건넜다”는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되었으니 앞으로 전진할 수밖에 없다는 뜻을 나타내는 세계적 관용어가 되었다.
1388년 위화도 회군이 카이사르의 도강과 비슷한 예일 것이다. 중국 사례로는 기원후 9년 1월 10일 전한을 무너뜨리고 신新을 건국한 왕망을 거론할 만하다. 왕망은 고관대작 가문 출생이었는데 고모가 황후에 오른 이래 부침을 겪은 끝에 드디어 실권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그는 중국사에서 흔히 ‘찬탈자’로 거론된다. 그렇게 몰린 데에는 자신이 세운 새 왕조가 불과 15년 만에 막을 내린 탓이 제일 크다. 재건국된 후한 이래 그를 좋게 기록해줄 사가는 없었다. 근래 일부 학자들 사이에 “세 번의 황하 범람이 없었으면 신 왕조는 오래 지속되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왕망에 대한 역사의 시각은 달라졌을 것”이라는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을 따름이다.
유교 논리로 권력을 집행한 왕망은 사리사욕 없는 사회개혁가라는 평판을 얻기도 한다. 법 집행에 엄격해서 아들 세 명, 손자와 조카 한 명씩을 처형했다. 왕망이 대권 장악을 꿈꿔 ‘권력의 루비콘강’을 건넜을 때 이미 범죄자들 앞에는 ‘죽음의 루비콘강’이 예고되었던 셈인데, 어리석게도 세 아들 등은 그것을 헤아리지 못할 만큼 아둔했다.
1986년 1월 10일 세상을 떠난 체코슬로바키아 노벨상 작가 야로슬라프 사이페르트는 “그녀는 ‘너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아’ 하는 낯빛이었지만 / 나는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중략) / 쉿, 귀를 문에 바짝 대고 / 주위를 찬찬히 살펴보아 / 사랑은 문 뒤에 숨어 있느니”라고 노래했다.
사이페르트는 또 “내 시들이 귀뚜라미 소리보다 나을 게 없다는 것은 나도 안다(중략) / 그래도 변명은 않겠다 / 아름다운 표현을 찾는 일이 / 사람을 죽이고 다치게 하는 짓보다는 /한결 나은 일이니까”라고도 했다. 만약 그대의 루비콘강 도강이 남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라면, 결심에 앞서 문 뒤에 잠복해 있는 사랑, 그리고 아름다운 말들을 찾아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