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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경기남부지역녹색평론모임 원문보기 글쓴이: 무소의 뿔
지금 여기 <녹색당>이다(草) 주요섭 1. 가을의 공모 2. 녹색당사람들 3. 탈원전·탈성장 녹색전환플랜 4. 떡갈나무 혁명 5. 녹색전환2012 덧붙임: 한국 <녹색당>에 대한 몇 가지 생각들(草)
“채식주의만으로 공장형 농업 시스템을 바꿀 수는 없다.”- 반다나 시바
“자본주의의 한계를 넘어서는 생태적, 사회적 또 문화적인 혁명을 위하여”- 앙드레 고르
“탈성장사회의 핵심목표는 소득의 증대가 아니라 사람들이 인간적인 보람을 느끼고 자기를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 클라이브 헤밀턴
“두리반 싸움이 보여주듯이 자본의 권력과 싸워 이길 수 있는 힘은 ‘삶’의 힘에서 온다. 친구들이 있어서, 잠잘 곳이 있어서, 먹을 게 있어서, 노래와 춤이 있어서, 농성장에 깃들어 사는 사람들이 있는 한 ‘돈만 아는 저질’들이 쉽게 점령하지 못한다. 화염병과 짱돌 대신, 투서와 항변 대신 옥수수와 벼, 고추와 토란으로 나는 삶과 돈의 전쟁에 뛰어들었다.”
- 위클리 수유너머
1. 가을의 공모
그야말로 이심전심입니다. 강화도의 대안학교에서도, 부산의 환경운동단체에서도, 지리산 어느 명상학교에서도, 부안의 에너지자립마을에서도, 과천의 풀뿌리단체에서도, 산골 유기농생산자공동체에서도, 이러저러한 생활협동조합의 조합원들 사이에서도 작당(作黨)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다.” “더 이상 늦출 수도 없다.” 사회도 경제도 생태계도 지속가능성에 물음표가 던져집니다. 생명의 위기, 지속가능성의 위기입니다. 성장숭배, 경쟁숭배, 속도숭배로부터의 전환을 결단하는 속삭임과 수다와 토론이 메아리가 되어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초록=녹색의 공명(resonance)이라고 할까요?
가을의 공모라고 말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성장의 시대를 지나 성숙의 시대로 넘어가는 문명의 가을을 은유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당장 2011년 가을은 녹색의 작당을 예감케 합니다. 공모(共謀, conspiracy)의 원래 뜻은 con(=with)+spire, 함께 숨을 쉬는 것이라고 합니다. 뜻이 모아지고, 기운이 통하고, 결이 맞아야 사단(事端)이 일어납니다. 약속이나 한 듯 비온 뒤 대나무순처럼 녹색의 열망이 솟아나고 있습니다.
이제 깨달았습니다. 반다나 시바의 말대로, 채식만으로는 공장형 축산 시스템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우리 집 건강한 밥상은 결국 우리 사회의 건강성 회복으로 온전히 차려질 수 있다는 점을 절감합니다. 수행은 삶과 사회의 결을 변화시키지만, 수행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지구적인 녹색공명은 이미 진행형입니다. 독일 녹색당은 지난 3월 경기도 크기의 바덴-뷔르템베르크에서 최초로 주 총리를 배출했습니다. 정당지지율이 사회민주당을 넘나들면서 연방 총리의 탄생도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원전의 완전폐기를 이끌어냈습니다. 다른 나라들에서도 새로운 바람이 일고 있습니다. 영국에서는 지난해 녹색당 최초로 하원의원을 당선시킨 데 이어 올해 5월에는 브라이턴이라는 지역에서 제1당이 되었습니다. 캐나다 녹색당도 지난 5월 연방의회에 진입했습니다. 이미 작지만 단단하게 정치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는 호주와 뉴질랜드의 녹색당을 비롯해 몽골, 필리핀, 파푸아뉴기니 등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녹색정당도 만만치 않은 기세로 활동 폭을 넓히고 있습니다. 일본의 경우에도 후쿠시마 이후 탈원전 투쟁에 앞장서며 全일본 녹색당을 탐색하고 있습니다.
이제 때가 되었습니다. 더 이상 늦출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목소리로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내 손으로 직접 다른 세계를 그려보고 싶습니다. 녹색 삶을 사는 사람들의 정치공동체가 그립습니다. 지금 녹색자치 공화국을 만들고 싶습니다. 남들의 정치, 그들의 정치, 대의의 정치가 아니라 우리의 정치를 하고 싶습니다. 내일의 정치, 미래의 정치, 그날의 정치가 아니라, ‘지금 여기의 정치’가 절실합니다. Now Here의 에코토피아를 만들고 싶습니다.
2. 녹색당 사람들
“녹색으로 행동하라.” “물질주의·성장주의와 결별하라.” 다른 삶을 결단하는 사람들이 있어 지금 여기 녹색의 작당이 시작됩니다. 단지 이슈나 의제에 대한 문제제기와 토론의 결과가 아닙니다. 더 이상 왜라는 질문이 불필요합니다. 2011년 녹색당이 여전히 정치적 논쟁의 대상이거나 정치세력 사이 합의와 절충의 산물이라면 당장 접어야 합니다. 열망과 결단이 없으면 지금 여기 녹색당은 없습니다. 결단하고 열망하는 사람들이 있어 지금 여기 녹색당이 있습니다.
5년 전 혹은 10년 전과는 사뭇 다릅니다. 아마도 후쿠시마가 결정적인 충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사는 게 뭔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했을 것입니다.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의 전환을 결심하게 했을 것입니다. 당위가 아닙니다. 변화는 후쿠시마 이전에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홍수와 가뭄과 냉해가 반복되는 기후변화의 고통을 겪으며 농민들을 이미 절감했습니다. 구제역과 신종인플루엔자는 도시 소비자로 하여금 생명과 삶의 근본을 되묻게 하였습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IMF의 상처가 되살아나고 이제 ‘다른 삶’을 직관적으로 알아차렸습니다. 인간은 상품이 아니라는 것을, 생명은 매매와 흥정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지금 당장 돈과 출세에 질식되어가는 아이들을 벗어나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물과 공기, 그리고 이웃사촌이 진정한 삶의 질이란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녹색입니다. “모든 생명과 교감하라.” 돈이 아니라 삶·생명(life)의 길입니다.
여기 녹색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논평하고 토론하기에 앞서 직관적으로, 감각적으로, 본능적으로 결단합니다. 광우병과 후쿠시마에 전율하며 안전하고 살아있는 먹을거리를 구하는 어머니, 폭력을 내면화하는 군대에 자식을 보내고 싶지 않은 어머니, 수백만 마리 소·돼지에 대한 살육을 목격하며 한편으로 연민하고 또 한편으로 분노하는 어머니가 있습니다. 대기업을 내려놓고 농촌으로 떠납니다. 오늘 아침 채식을 시작합니다. 아토피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도시를 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동차를 버리고 플러그를 뽑는 사람들이 있어 녹색당이 태어나고 자랄 수 있습니다. 이들이 지금 여기 녹색당을 준비하고 구성합니다. 탈원전을 위해 전기와 석유 없이 살기를 작심한 사람들. 텃밭농사가 즐거운 사람들. 수행하는 사람들. 2012년 생태위기, 에너지위기, 식량위기를 걱정하는 사람들. 탈물질주의와 소셜네트워크를 연결짓는 사람들. 함석헌 선생과 장일순 선생을 따르는 사람들. 그리고 백화제방(百花齊放)하여 모두 제 각각 아름답게 피어나는 촛불소녀들. 자동차 없는 마을에서 블레이드를 즐기는 아이들. 아파트 평수를 줄이고 자동차를 없애고, 무엇보다 노동시간을 줄입니다. 돈으로 아이들을 맡기지 않고, 돈으로 어머니를 간병하지 않고 임금노동을 줄이고 내가 직접 아이들과 부모님을 돌보는 사람들...
전환하는 사람들, 이들이 곧 녹색의 무리들, 곧 녹색당입니다. 세계관의 전환, 생활양식의 전환. 녹색당 사람들의 열쇳말은 한 마디로 전환입니다.
녹색의 전환이란 곧 다운시프트(downshift, 축소전환)입니다. 삼소(三少) 혹은 3S. 적게 일하고 적게 벌고 적게 씁니다. 느리게(Slow), 조그맣게(small), 유연하게(soft). 그리고 세 개의 S를 아우르는 단 하나의 S가 있습니다. Simple, 단순 소박하게 사는 것이 우리 시대 행복의 길입니다.
다운시프트는 새로운 풍요입니다. 돈은 적게 삶을 풍요롭게. 삶의 전체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영성·문화적인 삶과 생태적인 삶, 사회·공동체적 삶이 어우러지는 전일적인(holistic) 삶. 녹색당사람들에겐 자연과 사회적 관계와 자기실현이 바로 진정한 풍요입니다.
이들을 연결하는 하나의 끈이 있습니다. 또 다른 우주가 있습니다. 생태주의, 혹은 생명의 세계관. 에콜로지(ecology)와 생명사상이라고 말해도 좋습니다. 녹색당사람들의 사상과 철학은 프랑스 철학자 가타리의 환경생태학과 사회생태학과 정신생태학의 지평 안에 있고, 동아시아의 오랜 생명사상인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의 세계 속에 있습니다.
오늘의 20대들은 88만원세대, 오갈 데 없는 半백수이지만 이미 다른 삶을 선택하기 시작했습니다. 정규직이 될 수도 없고, 금속노조 혹은 전교조나 공무원노조원이 될 수 없는 청년들이 다른 선택을 결단하고 있습니다. 정치는 체계(system)와 제도를 바꿈으로써 이들의 새로운 선택을 도와야 합니다.
녹색당은 곧 이들의 필요(needs)와 열망(aspiration)입니다. 살림하는 주부들의 마음이 모여 녹색당이 됩니다. 다른 삶을 꿈꾸는 청년들의 미래가 곧 녹색당입니다. 녹색당은 생명의 양식을 길러내는 농민들의 그루터기입니다. 인생의 황혼을 성찰하는 노인들의 친구가 곧 녹색당입니다. 그리고 이미 지금 여기, 시장의 지배로부터 자유롭고 한없이 투명한 영혼을 지닌 한국의 종교인들이 있습니다. 시인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열망과 결단은 전환의 기획으로 이어집니다. 다시 반다나 시바의 경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금 바꾸어 말하면 이렇습니다. “개인의 결단만으로 체제를 바꿀 수는 없다.” 녹색당은 체제 전환의 상상력입니다.
3. 탈원전·탈성장 녹색전환플랜
진보정치에 진보집권플랜이 있다면 녹색정치에는 녹색전환플랜이 있습니다. 전면적이고 다차원적인 전환의 기획이 있습니다. 녹색으로의 전환. 물론 목적이 집권은 아닙니다. 집권 후에만 목적을 이룰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녹색전환플랜에 따르면 녹색당도 녹색정치도 녹색전환의 한 과정일 뿐입니다.
전환은 세 개의 차원으로 구성됩니다. 첫째 세계관의 전환, 둘째 생활양식의 전환, 셋째 체제의 전환. 지금 여기 세계관의 전환과 생활양식의 전환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삶을 정의하고 구속하고 틀 지우는 시스템과 제도의 전환을 꾀해야 할 차례입니다. 체제의 전환입니다. 다른 선택은 다른 체제를 이 땅의 현실로 만드는 기획과 전략으로 새롭게 펼쳐집니다. 급격한 기후변화와 구조적인 경제위기와 사회적 양극화와 일자리, 빈곤한 영혼 등등 오늘의 현실은 체제전환 없이는 막을 수도 변화시킬 수도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녹색당의 존재이유가 있습니다.
감히 문명의 전환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기후변화와 글로벌 경제위기는 한편으로 생활의 위기이기도 하지만, 문명의 위기를 반증합니다. 산업·자본주의 문명의 “기술ㆍ사회ㆍ 경제 등 구조와 시스템”에 근본적인 변화가 요청되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인류의 생존 자체가 의문시되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자본도 국가도 전환을 모색합니다. 지속가능하기 위하여. 신자유주의 이후 자본주의의 변신과 진화의 시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제3의 길’ 이후 진보의 새로운 전환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청색의 패러다임과 적색의 패러다임을 넘어서 녹색·생명의 패러다임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프랑스 혁명의 삼색 깃발, 즉 자유, 평등, 박애의 재구성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자유의 정치경제학’과 ‘평등의 정치경제학’을 넘어 ‘박애(호혜)의 정치경제학’을 논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즉 자본주의·시장경제와 사회주의·국가경제의 대결구도를 넘어서 생태주의·사회경제로의 중심이동을 기대합니다.
올해 초 2011년 2월 아프리카 세네갈에서 열린 <세계사회포럼>의 주제는 “시스템과 문명의 위기(The Crisis within System and Civilization)” 였습니다. 금융위기에서 시작된 지구적 수준의 경제위기와 치명적인 양극화를 목격하면서 결국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가 문제임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산업문명과 자본주의가 야기한 인간과 공동체, 그리고 생태계에 대한 야만적 파괴를 지켜보며 문명의 위기를 부인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체계와 제도의 문제, 다시 말해 체제를 바꾸지 않고서는 해법을 찾기 어려울 지경이 되었습니다.
“생명은 혼돈의 가장자리에서 생겨난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위기는 분명 기회이기도 합니다. 생명의 위기, 문명의 위기는 새로운 질서가 창조되는 또 하나의 기회이기도 합니다. 후쿠시마의 위협은 일본사람들의 생명감각, 생존감각을 되살렸습니다. 삶과 사회에 대한 근본적 성찰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거대한 전환이 시작되었습니다.
전환의 방향은 물론 녹색입니다. 생태적 지혜와 생명감각을 되살리고, 석유와 원자력발전을 떠나 태양으로 복귀합니다. 에너지와 식량과 물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높이고 영혼의 자유, 혹은 자기실현을 돕는, 이를테면 좋은 삶(good life)을 위한 프로그램을 만듭니다. 상호부조와 호혜의 그물망을 통해 자립적 삶, 협동적 삶, 순환적 삶을 돕는 게 녹색정치입니다. 녹색의 척도는 성장이 아니라 순환입니다. 직선이 아니라 둥근 원입니다. 태극이며 소용돌이입니다.
우리 시대 녹색전환의 핵심은 탈(脫)원전·탈(脫)성장입니다. 체제전환과 녹색정치의 기준도 탈원전·탈성장입니다. 원자력발전은 생명세계의 절멸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경제성장 제일주의는 인간성과 공동체와 생태계를 뿌리째 파괴했습니다.
탈원전은 무엇보다 죽임의 기술로부터 탈출입니다. 후쿠시마는 증언합니다. 판도라의 상자이며 꺼지지 않는 불인 원자력발전은 인류와 지구생명공동체의 생존과 지속가능성 자체를 위협합니다. 우라늄의 채취와 원자력발전소의 입지선택과 건설, 그리고 송전시스템 구축과 핵폐기장 설치까지 일련의 과정을 살펴보면 원자력발전은 경제성에 있어서도 탄소감축 측면에서도 모두 거짓입니다. 원자력발전의 숨은 목적이 핵무기가 아니라면, 자본의 냉혹한 요구가 아니라면 절멸의 줄타기를 하며 지속할 이유가 없습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독일은 2022년까지 원전을 완전 폐기하기로 했습니다.
탈성장은 거짓을 밝히고 삶의 진실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인간은 상품이 아닙니다. 돈이 인간의 운명을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2011년 오늘 성장은 거짓말입니다. 생활수준 향상은 더 이상 없습니다. 구조적 경제위기에 대해 대규모의 경기부양과 양적완화로 화폐를 남발하지만 추락은 불가피해 보입니다. 국가생산총량(GNP)도 수출도 생활의 질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소득증대와도 무관합니다. 국가생산총량(GNP)은 4대강을 막아도 GNP상승하고 다시 헐어도 GNP가 상승합니다. 태안앞바다의 기름유출을 치우는 오염처리 과정도 모두 GNP로 계산됩니다. 그나마 해마다 10%씩 고도성장을 했을 때는 서민들이 떡고물이라도 먹을 수 있었습니다만, 2~3%의 저성장은 물가상승률과 이자를 고려하면 그저 숫자놀음에 불과합니다. 최근 3년간에는 실질임금마저도 오히려 떨어졌으며, 미국의 경우에도 노동자의 실질임금이 30년 전보다 오히려 떨어졌다고 보고됩니다. 하물며 생활의 질은 말할 필요도 없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그렇게 돈을 벌기 위해 장시간 노동, 경쟁의 스트레스, 가족과 공동체의 해체와 내면의 빈곤과 상처를 참고 견뎌야 합니다.
우리가 가야할 길은 명백합니다. 돈의 길(money based path)이 아니라 삶의 길(life based path)입니다. 탈원전·탈성장 생명·평화세상입니다. 진정한 웰빙소사이어티입니다. 우리의 척도는 돈이 아니라, 삶이며, 경제가 아니라 생명이며, 성장이 아니라 행복입니다. [에코토피아]의 저자가 탈산업·탈자본주의 정치조직의 이름을 생존당(survival party)이라 했던 것이 생각납니다.
탈원전·탈성장 녹색전환의 목적지는 정의롭고 지속가능한 창조사회입니다. 사회적으로 정의롭고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하며 창조적으로 자기실현하는 사회입니다. 다시 말해 탈원전·탈성장의 사회적 목표는 이렇습니다. 사회정의, 생태적 균형, 자기실현. 우리가 원하는 것은 행복입니다. 자기실현입니다. 사회정의와 생태적 균형은 자기실현의 필요충분조건입니다.
지속가능하고 창조적 삶을 꿈꾸는 수많은 대안운동이 “성장 없는 풍요”를 제안합니다. 풍요와 행복은 경제성장 없이도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전략과 정책대안도 간단합니다. 핵심고리는 노동시간 단축입니다. 단지 일자리 나눔만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노동시간 단축은 대량생산 대량소비 사회로부터의 사회경제적 다운시프트를 위한 출발점입니다. 또한 풍요로운 여가와 삶의 질 향상. 임금노동을 줄이고 자유와 창조의 시간을 늘리는....
“21세기에는 21시간 노동”, 영국 한 연구기관의 슬로건입니다. 노동시간 단축의 조건이 있습니다. 동일노동 동일임금과 기본소득제. 아주 단순합니다. 논점은 비정규직이냐 정규직이냐에 있지 않습니다. 인간다운 삶인가 노예의 삶인가에 있습니다. 복지라는 이름으로 국민들의 삶을 너무 많이 관리하고 있지 않은가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정규직이라 하더라도 노동의 대가를 평등하게 인정받을 수 있게 하는 것. 그리고 노동능력이 설사 없더라도 이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지속가능한 삶의 물질적 기초를 보장하는 것(기본소득제). 일단 이 둘이 확실해지면 거의 절반 이상을 해결한 셈입니다.
녹색당은 농촌당입니다. 농민들부터 기본소득제를 실현하기를 기대합니다. 농민은 생명 지킴이입니다. 생명의 먹을거리를 생산하고, 탄소를 흡수하고 산소를 내보내는 농촌과 산촌의 생태계를 지켜주는 농민들, 누천년 삶의 문화, 농업문화를 보존해온 농민들에게 기본소득을 보장해주는 게 너무도 당연한 일 아닐까요? 워킹푸어(working poor) 청년들이 농촌에서 즐겁고 행복하게 일하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하나의 예일 뿐입니다. 녹색전환의 구체적인 프로그램이 우리 삶과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구체적으로 마련되어야 합니다. 에너지 전환, 농업의 전환, 산업구조의 전환, 기술시스템의 전환, 노동양식의 전환, 소유양식의 전환, 생산양식의 전환, 환경·생태의 전환 등등.
녹색전환은 이미 진행중입니다. 전환의 전략, 전환의 과정기획이 필요한 때입니다.
4. 떡갈나무 혁명
떡갈나무 한 그루가 숲을 바꿉니다. 아니 도토리 한 알이 침엽수의 시대를 활엽수의 시대로 전환시킵니다. 숲 생태계의 질적인 변화, 즉 천이(遷移) 말입니다.
소나무 숲속 그늘 아래 활엽수들이 소곤댑니다. 어린아이 키만한 떡갈나무와 풀푸레나무와 단풍나무들이 한 줄기 햇볕을 좇으며 숲속의 미래를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내 소나무 사이사이 하나 둘 활엽수들이 머리를 내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어느 날 소나무 숲을 강타한 낙뢰와 산불로 뒤끝 거대한 소나무군락은 사라지고, 소나무가 지배하던 침엽의 시대에서 떡갈나무와 풀푸레나무와 같은 활엽수들이 풍요로운 숲을 이루는 활엽의 시대가 옵니다.
일종의 혁명입니다. 생태혁명, 떡갈나무 혁명. 일시적이고 물리적인 변화는 아닙니다만, 장기간에 걸쳐 일어나지만 기존의 지배적 질서를 바꾸는 근본적인 변화입니다. 중심가치를 바꾸고 중심축을 바꿈으로써 체제의 성격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녹색당은 한국의 정치생태계를 바꾸는 떡갈나무 한 그루입니다. 3%면 족합니다(총선에서 3%를 얻으면 비례대표 1석이 주어집니다.). 3퍼밀(0.3%)의 소금이 바닷물의 성질을 결정하고 소돔과 고모라를 구하는 데는 5명의 의인이면 충분했습니다. 바로 이것. 숲속생태계의 변화는 한 알의 도토리에서 시작합니다. 한 알의 도토리가 떡갈나무로 성장하고, 한 그루의 떡갈나무가 숲의 식물생태계를 바꾸기 시작합니다. 식생이 바뀌면 거기에서 노는 곤충들과 동물들이 달라집니다. 녹색당은 한 알의 도토리입니다. 10 대 90의 정글 생태계를 바꿉니다. 딱딱한 껍질을 뚫고 나오는 새싹의 힘, 생명의 힘으로 한국의 정치생태계를 바꿀 것입니다.
독립된 생명주체만이 생태계를 바꿀 수 있습니다. 독립녹색, 즉 녹색당만이 정치생태계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자기정체성이 없으면 기존의 지배적 생태계에 흡수(동화)되는 게 자연의 이치입니다.
정치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진보정당에 생태 강령이 있으나 국민들에게 진보정당은 그저 민주노총당일뿐입니다. 노동을 대표하는 정당도 필요합니다만, 생명가치를 대변하는 정당이 절실합니다. 생태적 가치, 탈(脫)물질적 가치를 대표하고 또 오롯이 담아낼 독립적이고 독자적인 정치조직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녹색당 하면 독일이 떠오르고, 독일녹색당 하면 탈원전 태양에너지를 떠올립니다. 후쿠시마의 대안은 역시 녹색당입니다. 녹색당은 녹색대안과 녹색전환의 보통명사입니다. 탈원전·탈성장 생명평화를 향하여.
독일녹색당의 위세는 접어두고서라도 선거제도 탓에 30여 년동안 상원의원을 배출하지 못한 미국이나 영국과 프랑스 등의 녹색당도 영향력으로 보면 그 존재감이 대단했습니다. 녹색당은 내내 소수당에 머물렀지만, 보수정당과 진보정당들이 환경정책, 소수자정책, 에너지정책을 가져갔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정책을 변화시키고 국민생활을 변화시켰습니다. 모방하는 것도 녹색전환입니다. 정치의 녹색화입니다.
녹색당은 창당 과정에서부터 정치생태계의 변화를 촉진할 것입니다. 정치문화를 바꿀 것입니다. 중앙당이 대전이 있는 정당. 제비뽑기로 당 지도부를 뽑는 정당. 1번부터 5번까지 비례대표가 모두 여성인 정당. 그리고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의 아방가르드가 되는 정당. 그리하여 격이 다른 정당. 새로운 차원을 여는 정당.
나아가 한국사회의 차원변화의 촉매제로 역할 할 수도 있습니다. 좌와 우, 진보와 보수 너머 패러다임의 전환을 기대합니다. 생명은 삶과 죽음의 역설이며 순환하는 균형, 혹은 역동적 균형입니다. 좌·우파와 보수·진보의 이분법은 생태적 지혜와 생명의 원리와 거리가 멉니다. 반(反)MB의 2차원적 전선도(戰線圖)를 넘어 3차원의 지형도를 넘어 스피릿(spirit)이 있어 4차원이 되는 새로운 세상을 열어갑니다.
녹색당은 정치조직입니다. 체제전환의 플랫폼(platform)입니다. 플랫폼은 강령이면서 기차역이면서 운영체계입니다. 녹색비전을 담은 녹색강령이 선을 보입니다. 체제전환을 실천하는 사람들(coordinator, 코디네이터)들이 오고가는 정거장입니다. 레드(red)나 블루(blue)와는 구별되는 그린(green)만의 조직문화와 운영방식과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그리하여 이것이 바로 녹색당입니다.
마을만들기에서부터 4대강 반대까지, 플러그 뽑기에서 탈원전까지, 녹색전환을 위한 메타기획이 정치라면 녹색정치의 집단지성이 곧 녹색당입니다. 녹색전환을 위한 광범위한 녹색물결이 필요합니다. 그 네트워크센터 혹은 허브가 바로 녹색당입니다. 다른 삶을 꿈꾸는 이들의 녹색 정치공동체이며, 어쩌면 미래의 녹색공화국이 될지도 모릅니다. 지역의 녹색당은 녹색대안센터가 되고 생태적 사회경제적 위기 때에는 녹색적 민생 대안의 태스크포스가 될 수도 있습니다. 또한 녹색당은 그 자체로 녹색전환의 상징입니다. 의식과 문화, 생활양식이 변화하는 문명전환의 상징입니다. 대안운동의 오래된 미래입니다.
녹색당은 현실정치를 추구합니다. 선거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야 합니다. 정당 없는 선거는 없습니다. 선거 하지 않는 정당도 무의미합니다. 결국 선거를 통해 녹색전환의 비전과 정책을 보여주고 또 설득해야 합니다. 이미 지구적 보통명사가 된 녹색당의 경우에는 거시적ㆍ국가적 의제가 선거의 쟁점이 되는 전국단위 선거가 유리합니다. 한국 녹색당의 진정한 목표는 2014년 지방선거에 있는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2,307개 선거구에서 3,991명에 당선자를 뽑는 지방선거에서 신생정당의 존재감은 거의 없습니다. 그 많은 후보자를 감당할 수도 없습니다. 정당으로써의 지속가능성도 보장받기 어렵습니다. 2012년 총선에 즈음하여 녹색당을 탄생시켜야 합니다. 3% 얻을 수 있습니다. 5% 어렵지 않습니다. 10%도 가능합니다.
2012년 대선에서 정치공학적으로도 녹색당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총선에서의 야권 선거연합을 위해서도 대선에서 야당 집권을 위해서도 독립된 실체가 있어야 합니다. ‘탈MB’ 전선의 확장을 위해서도 야권 후보의 득표력을 확대를 위해서도 독립녹색, 즉 녹색당의 역할이 필요합니다. 연합의 시너지효과를 위해서 말입니다.
‘그날이 오면’에 만들어질 한국 녹색당은 없습니다. 2014년 지방선거엔 2014년의 녹색당이, 2016년 총선엔 2016년의 녹색당이 있을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2012년 총선과 대선에는 2012년의 녹색당이 절실합니다. 아열대기후의 한반도, 신음하는 4대강, 최악의 자살공화국을 경고하고 전환의 지렛대를 만들어야 합니다. 반대와 분노를 조직하기보다 신명나게 지금 여기서 에코토피아를 실현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의식의 변화와 생활의 결단이 체제전환, 나아가 문명전환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합니다. 2011년 오늘 우리의 녹색당이 있습니다.
5. 녹색전환2012
2012년은 분명 의미심장한 정권교체기이지만, 다른 한편 기후변화로 인한 생태적 대재앙과 대공황에 버금가는 경제위기, 무엇보다 식량·에너지 위기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권력과 자본을 가진 사람들, 공무원과 대기업 등 직장 자체가 사회적 안전망인 사람들은 큰 문제가 없을 수 있으나 대다수 민초들은 생활과 생계가 걱정입니다. 민생의 대안이 절실한 시기입니다.
그 답은 역시 녹색전환에 있습니다. 민생의 대안은 사실 새로운 라이프스타일, 생활양식의 전환에 바탕을 두어야 합니다. 단순 소박한 삶, 자립적이고 협동적인 삶, 지역적 삶이 그것입니다. 상호부조와 호혜의 그물망을 엮어내야 합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원전과 석유에 의존하고, 경제성장의 논리에 함몰된 체제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다시 탈원전·탈성장 녹색전환입니다.
2012년을 녹색전환의 원년으로 만들기를 바랍니다. 위기를 전환의 기회로, 탈원전·탈성장 체제로의 전환의 디딤돌을 놓는 해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탈원전·탈성장 녹색전환2012 시민물결을 기대해봅니다. 환경운동과 생명운동과 풀뿌리운동이 앞장서고 종교인들과 수행자들, 생활협동조합들의 주부들, 동물단체 사람들, 다른 삶을 살고자 하는 모든 이들이 함께 모여 녹색전환의 큰 강물을 만들기를 바랍니다. 녹색물결(green wave)이 넘실거리기를 소망합니다.
4대강을 저지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국가복지의 확대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탈원전 프로그램이 나오고 탈성장 풍요사회를 위한 정책이 제안되고 절망하는 청년들에게 희망의 반딧불이와 등대가 되는 2012년이 되기를 바랍니다. 콘크리트로 막힌 대한민국과 한반도에 녹색전환과 생명평화의 강물이 흘러가기를 기원합니다.
녹색당은 녹색전환의 가장 튼튼한 지렛대가 될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산을 옮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산을 옮기기 위해 수십 수 백 년이 걸린다고 낙담할 필요도 없습니다. 5% 녹색당이 전환의 지렛대가 될 수 있습니다. 잘 만든 지렛대는 지구를 들어 올릴 수도 있습니다. 먹을거리 전환에서 에너지 전환, 생산양식의 전환까지.
녹색당은 대안적 민생의 지역적 태스크포스가 될 것입니다. 호혜적 지역네트워크의 센터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2012년 한국의 정치생태계를 바꾸는 떡갈나무 혁명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녹색당이 있어 희망이 있습니다.
덧붙임: <녹색당> 창당에 앞서 생각해야할 몇 가지 것들(草)
◯ 우리에겐 <지구녹색헌장>이 있다.
2001년 오스트레일리아 캔버라에서 열린 제1회 세계녹색당대회에서 채택된 지구녹색당 헌장은 지구 녹색의 지향과 원칙을 잘 정리해주고 있다. 특히 6대 원칙은 지금 여기 한국의 녹색정당에게도 중요한 준거가 되고 있다. 첫째 생태적 지혜(ecological wisdom), 둘째 사회정의, 셋째 참여민주주의, 넷째 비폭력, 다섯째 지속가능성, 여섯째 다양성 추구.
◯ 한국에도 20년 녹색정치운동의 역사가 있다.
1991년 <참여와자치를위한시민연대회의>, 2002년 녹색평화당의 창당과 지방선거 참여, 같은 해 환경운동연합의 <녹색자치위원회>의 조직과 녹색후보의 출마와 당선. 그리고 2004년 <초록정치연대>의 창립과 2006년 <풀뿌리초록정치네트워크>의 지방선거 참여, 2007년 <초록당> 창당 시도와 좌절, 그리고 2011년 현재 <초록당사람들(준)>의 존재 등 미미하지만 나름 한국녹색정치의 가능성을 탐색해온 여정이 있었다.
◯ 녹색당은 보통명사다.
녹색당은 이미 대안의 보통명사가 되었다. 미국의 경우 민주당이 진보의 보통명사가 되고 공화당이 보수의 보통명사가 되었듯이, 한국사회에서도 한국 국민들에게도 녹색당은 대안의 보통명사로 인식되었고 또 학습되었다. 이미 다른 수식이나 개념이 불필요하다. 녹색당이 그저 환경당으로 인식될 수 있으나 지평을 넓히는 것은 참여 주체의 몫. 독일녹색당이 지지율을 높일 수 있었던 것은 환경정당을 넘어서 다문화정당, (신재생에너지)일자리정당으로 활동반경을 넓힌 덕택이다.
◯ 녹색당은 생활로 말한다.
지금 여기 녹색당이란 모습, 문화, 생활 그 자체의 힘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사회와 정치를 변화시킨다는 말이다. 녹색당의 정책은 녹색당 사람들을 통해 지금 여기서 이미 실현되고 있다. 최소한 가슴속에 열망으로 간직하고 있다. 자가용 안타기, 육식 줄이기, 유기농산물 이용하기, 자발적 노동시간 단축, 귀농 혹은 텃밭 가꾸기 등등.
◯ 2011년 녹색전환의 척도는 탈원전·탈성장이다
세계는 “후쿠시마 이전과 이후로 나눠진다”는 말이 낯설지 않다. 후쿠시마의 원전사태와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가 현실로 드러나면서 우리의 생명 감각은 직관적으로 "No~!"라고 말한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정치적 기준점이 분명해졌다. 탈원전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탈성장의 경로와 전략도 간결하다. 노동시간단축이 전략적 열쇠다. 그리고 기본소득제와 동일노동 동일임금으로 이를 뒷받침한다.
◯ 지역공동체(community)는 녹색당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이다
지역(local) 혹은 커뮤니티는 신자유주의적 지배력의 틈이며 대안의 여백이며, 녹색 삶의 기초 단위이다. 녹색당의 조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녹색당은 지역에서부터 조직된다. 녹색당은 로컬파티 네트워크이기도 하고, 커뮤니티 파티의 네트워크이기도 하다. 중앙당 사무처도 여의도가 아닌 지방 어느 곳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
◯ 녹색은 세력이 아니라 출렁이는 그물망이다
동원되는(mobilized) 덩어리 대중(mass)은 녹색의 주체가 아니다. 결사체(association)만으로도 부족하다. 녹색의 조직론은 network와 field(場)다. 생명의 존재양식은 ‘’이다.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동시에 연결된 전체이기도 하다. 지구녹색헌장에 동의하고 탈원전·탈성장사회를 향한 체제 전환의 열망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녹색당은 녹색 관점의 커뮤니티와 녹색 관점의 아젠더의 교직(交織) 혹은 네트워크다. 서울, 경기, 부산, 경남, 전북, 강원 등 전국 각 지역의 지역당들과 환경녹색, 생명평화녹색, 청년녹색, 풀뿌리녹색, 동물보호녹색, 사회녹색 등의 교직. 녹색은 세력이 아니라, 출렁이는 그물망이다. 녹색의 조직은 띄우는 것도 축조하는 것도 아니다. 아마도 길러냄(養育)에 가까울 것이다.
◯ 녹색당엔 미학과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
녹색당은 존재만으로도 새로운 문화운동이어야 한다. 액션 하나하나가 멋지고 아름다워야 한다. 권위주의, 가부장주의는 물론 아니다. 다른 문화를 보여주어야 한다. 당대표와 비례대표, 제비뽑기로 뽑아보자. 돈도 십시일반으로 조직도 밑으로부터. 한국 녹색당 창당의 첫 스토리는 팔당 두물머리에서. 프레스센터에서의 녹색당 토론회는 너무 진부하다. 일본 녹색당으로부터 후쿠시마의 탈원전의 투쟁현장을 공감하고, 호주녹색당으로부터 탈성장의 기획을 공유하자.
◯ 녹색당의 주인공은 단연 여성과 청년이다.
산업·자본주의 사회의 주변에 머물었던 이들, 살림살이 생명세계의 주역이 주인공들이다. 약소자들과 꽃들과 동물들이 주인공이다. 그렇다면 운동권은? 386운동권은 조명감독이 되고 촬영을 하고 온갖 굳은 일을 마다않는 조연출이 되면 좋지 않을까?
◯그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