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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블랙박스를 찾아서
 
 
 
카페 게시글
삼국사(고구려) [퍼온글]고구려 왕조는 부여 해씨인가 아니면 고씨인가
크크리 추천 0 조회 626 16.02.15 15:14 댓글 14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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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6.02.15 17:10

    첫댓글 추모왕의 원래 성씨는 해씨이지만 고구려의 국호를 따서 고씨라 했지요.
    그래서 온조의 성씨는 고씨이지만 추모왕의 아들인 유리는 원래의 성씨를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에 해씨입니다.

  • 16.02.15 17:14

    우리는 국조왕과 태조왕을 동일 인물로 보지만 국조왕은 재사이고 태조왕이 궁입니다.
    재사와 궁은 중국의 사료에는 구분 못하여 121년에 고구려왕 궁이 죽었다고 했는데 실제 죽은 인물은 선왕인 재사이죠.
    후한서 동이열전에 121년 고구려왕이 죽어 후한이 조문사절을 보냈지만 궁이 또 다시 나타나는 이유를 중국인들은 알지 못했지요. ㅋㅋ
    그래서 후한서 본기에는 고구려왕의 사망사실에 관한 기록이 없는 이유도 동이열전의 기록이 앞뒤가 안맞으니 없앤 것이죠.

  • 16.02.17 03:11

    "국조왕은 재사이고 태조왕이 궁입니다."

    본기신편열전에 의해서,

    국조왕 = 궁이죠.

    태조왕이 국조왕과 같다는 것은 아직 미정이죠.
    태조왕과 국조왕이 의미는 같으니, 동일인의 가능성도 많죠.

  • 16.02.17 03:08

    AD53년 ~ AD113년 사이의 60년 분량이 사라져 버렸다고 생각하므로,
    그 사이의 기사는 고구려사초 가지고도 역부족이죠.
    고구려사초가 기년 문제가 잇으니까요.

  • 16.02.15 17:20

    추모왕의 본래 성씨는 해씨이고 고친 성씨가 고씨이며, 온조는 고씨성을, 유리는 해씨성을 사용했는데, 유리 - 대무신 - 민중 - 모본은 해씨이고, 태조왕이 고씨인 이유는 국조왕 재사가 고씨이기 때문이죠.
    남당유고에는 재사가 유리왕의 아들 또는 대무신왕의 아들이라고 했는데 어찌됐던 해씨여야 하는데 기록에는 고씨라고 되어 있는 걸 보면 아버지는 유리왕도 대무신왕도 아닙니다.
    남당유고에 보면 아버지가 2명이상인 경우는 있지만 어머니가 2명이상인 경우는 없는데 더욱이 생년도 다릅니다.
    어머니가 바뀌었다는 것은 아버지에 대해 숨기고 싶은 사실이 있다는 것을 말하지요.

  • 16.02.15 17:23

    121년에 죽은 고구려왕의 나이가 100세이니 서기22년 출생인 것이 맞고, 서기22년은 유리왕이 죽고 대무신왕이 즉위하지 않는 시점이고 19세에 해당합니다. 당시 고구려는 섭정왕이 즉위한 상태인데 바로 그가 졸본출신의 고씨입니다. 백제의 본래 출신지가 졸본이고 온조의 성씨도 고씨이니 재사는 온조의 아들입니다.

  • 16.02.17 03:10

    @정성일 님이 언급하신건 일리가 있는 말이군요..

  • 16.02.17 03:18

    AD22년, 여름 4월, 부여왕 帶素(대소)의 아우(帶弗)가 갈사수(曷思水) 가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왕을 칭하였다. 이 사람은 부여왕 금와의 季子(막내 아들)인데 역사책에는 그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다. 처음에 帶素(대소)가 죽임을 당하자,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알고, 따르는 자 100여 명과 함께 압록곡에 이르렀다. 해두국왕(海頭國王)이 사냥 나온 것을 보고 결국 그를 죽이고, 그 백성들을 빼앗아 이곳에 와서 비로소 도읍하였는데. 이 사람이 갈사국왕(曷思國王, 帶弗, 曷至王)이 되었다.

  • 16.02.17 04:01

    @정성일 본기신편열전 갈사태후란에서...

    갈사태후가 낳은 아들은 '아버지 再思' 庚申 = BC1년에 출생.
    '아들 再思' AD22년 출생 = 壬午년.

    아버지와 아들 차이가 23년 차이가 나니까 계산이 맞군요.

  • 16.02.22 11:37

    크크리님> 안녕하세요...카오스입니다.
    직접작성하신 글은 아닌 것으로 봅니다만,....재미있기도하지만, 아주 중요한 부분이어서...다른분들과 조금 색다른 내용을 소개드리고자 합니다....굳이 ‘근거대라’고 말하지는 마시고 한번 들어 보시기만 바랍니다...

    (1) ‘주몽의 성씨가 고씨가 아니다.’..
    --->예, 말씀하신대로 주몽은 분명히 고씨가 아닙니다,....그러나 우선 ‘주몽은 고구려의 시조로 설정된 가공인물[=고구려건국 준비과정을 의인화한 것임]’이므로 고구려의 왕성이 ‘고’씨라면, 고씨가 되는 것이고, 고구려의 왕성이 ‘해’씨이면 해씨가 되는 것으로 보아도 될 것입니다.

  • 16.02.22 13:00

    다만, 주몽의 시기[전37~전19]에 ‘고씨’는 아예 없었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물론 당시 ‘해’씨도 없었던 것이었지만, 그래도 부여의 성씨를 ‘해씨’로 본다면, 모두 부여세력들이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어쨌든, 가공인물인 시조 주몽을 고씨로 만든 시기는 20장수왕시기로 보아야 합니다. 물론 그때 6태조왕을 고씨왕의 시조로 삼았었던 것이지만, 중간에 해씨, 유씨, 모씨, 고씨 등등이 번갈아가면서 왕을 했었던 적이 있으니 정식으로 고씨왕들이 계속 이어진 것은 18고국양왕 때부터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 16.02.22 13:05

    (2) ‘6태조왕 때부터 고구려(려)란 국호가 시작된다’
    ---> 예, 대부분(통설포함)의 사람들이, 6太祖王(태조왕)이자 高宮(고궁)이라고 했었으니 이때부터 ‘고구려’란 국호가 시작된 것으로 볼 것입니다만, 앞에서 말씀드렷듯이 20장수왕시기에 6태조왕을 고씨왕의 시조로 ‘소급해서 삼은 것’이므로 ‘고구려(高麗)’란 국호는 20장수왕때부터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그 이전의 국호는 ‘고구려(高麗)’가 아니라 ‘구려(句麗)’였었던 것인데, 문제는 여기서 모든 ‘麗(려)’자는 ‘黎(리,려)’자를 변조한 것이고 모든 ‘句(구)’자는 ‘九(구)’자의 변조라는 것입니다.

  • 16.02.22 13:11

    즉, 고구려는 마지막 망할 때까지 국호가 ‘黎(리,려)’ or ‘九黎(구려,구리)’ or ‘高黎(고려,고리)’ or ‘高九黎(고구려,고구리)’였었던 것인데, 망한 다음에 역사를 재정리하면서 ‘麗(리,려)’ or ‘九麗(구려,구리)’ or ‘高麗(고려,고리)’ or ‘高九麗(고구려,고구리)’로 모두 변조되었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아마, 남당유고에 그 힌트가 있을 것으로 봅니다만, 카오스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6太祖王(태조왕)의 아버지인 (고)주리’가 47년에 그 이전의 해씨들[부여세력]을 축출하고서 나라의 실권을 완전히 장악[4민중왕4년9월>東海人髙朱利獻鯨魚目,夜有光]하고 5모본왕으로 교체하였었다고 봅니다.

  • 16.02.22 13:19

    그래서 47년10월에 ‘1만여가(家)가 낙랑으로 가서 한(漢)에 투항’하는 큰 변고가 생겼었고 이때부터 고구려는 부여세력들과 차별화를 하게 된 것으로 봅니다. 즉, 고구려의 실권을 장악한 (고)주리는 일단, 48년에 해씨인 5모본왕을 그대로 옹립했었었다가 53년에 자신의 아들인 6태조왕으로 바꾸고 섭정했었던 것[ 以年七歳, 大后垂簾聽政]으로 봅니다. [참고 : 太后(태후)는 어머니(母)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父)인 (고)주리를 代稱(대칭)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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