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고구려 왕조 계보에 대해 헷갈려 하고 의견이 분분하다.
이에 대해 정리해 보고자 한다.
고구려(高句麗)의 시원은 어떻게 되는가?
고구려의 첫 이름은 무엇인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의 성(姓)은 고(高)요, 휘(諱)는 주몽(朱蒙)이며, 일설에는 추모(鄒牟)라고도 하고 상해(象解)라고도 한다….나는 본시 하백(河伯)의 딸로 이름은 유화(柳花)라고 합니다. 여러 동생들과 함께 놀고 있을 때, 한 남자가 자칭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解慕漱)라고 하고 나를 웅심산(熊心山) 아래 압록(鴨錄) 강가의 집으로 꾀어서 사욕을 채우고 가서 돌아오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를 보면, 고구려 시조 주몽은 부여의 후손 해(解)씨인데, 오히려 ≪삼국사기(三國史記)≫는 앞뒤가 맞지 않게 고(高)씨라고 기록하였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주몽이 최초 고(高)씨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전체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주몽은 명백히 부여의 후손 해(解)씨이다. 해주몽(解朱蒙)이 맞는 것이다. 그렇다면 ≪삼국사기(三國史記)≫는 어찌하여 주몽을 고(高)씨라고 기록하였는가. 앞뒤가 맞지 않는 기록을 하였다. 이는 어떠한 이유가 되었든지 잘못된 기록이다.
한편, ≪삼국사기(三國史記)≫는 “도읍을 하려 하였으나 미처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어 우선 비류수(沸流水) 위에 살며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고(高)씨를 성으로 삼았다. 혹은 주몽이 졸본부여(卒本扶餘)에 당도하니 마침 왕이 아들이 없다가 주몽을 보고서 범상한 인물임을 알고 자신의 딸을 아내로 주었다.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고도 한다.”라고 하였다.
이는 ≪삼국사기(三國史記)≫도 고구려(高句麗)의 최초 이름이 고구려(高句麗)인지, 아니면 최초에는 고구려(高句麗)라는 이름이 아니고 졸본부여를 그대로 이어받아 나라를 다스렸는지 불확실하다고 기록한 부분이다. 오히려 후자인 졸본부여를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 옳다고 보아야 한다. 주몽은 명백히 해(解)씨이다. 왕족인 주몽 스스로 성씨를 고(高)씨로 바꾸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는 후대에 해(解)씨가 고(高)씨로 바뀐 정치적 이유가 있었을 것을 암시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유리왕(琉璃王) 33년에, “가을 8월, 왕은 오이(烏伊)· 마리(摩離)에게 명하여 군사 2만명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가게 하였다. 양맥(梁貊)을 정벌하여 그 나라를 없애고 진격하여 한(漢)의 고구려현(高句麗縣)을 쳐서 빼앗았다.”라고 하였다. 주몽 시기에 이미 졸본부여를 그대로 이어 받아 다스렸고 고구려라는 이름은 당시에 아직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유리왕때 기록에 갑자기 고구려현을 언급하였다. 이는 학자들이 헷갈려하는 부분이다. 이 당시에도 고구려 이름이 존재하지 않는데, 갑자기 고구려현이 등장한 것이다. 이상한 것은 당연하다. 당시 실제로 고구려현이 존재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는 고구려현이 아니라 고조선(古朝鮮)현을 후대에 고구려현라고 기록한 것이다. 이는 정치적인 문제로 고조선을 북경근처까지 비정하기 어려운 실상 때문이었다. 당시 차이나와의 충돌을 회피해야 하는 문제가 있었고 고구려의 당시 본래 이름인 “려(麗)”가 이미 고(高)씨계 정권에 의해 완전히 고구려란 이름으로 정착되어 버린 이유도 있었다. 옛 지도에 보면, 이곳에 고조선성(古朝鮮城)이 있다. 여기에서 고구려현이라고 한 것은 ≪삼국사기(三國史記)≫ 가 의도적으로든, 비의도적으로든 잘못 표기한 것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가 차이나에 눈치를 보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역사적인 사례로 이는 오기(誤記)이다. 유리왕 때까지 고구려라는 이름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전히 졸본부여를 잇고 있었다.
3대 대무신왕(大武神王), 4대 민중왕(閔中王), 5대 모본왕(慕本王)때에도 역시 고구려는 존재하지 않는다. 제 6대 태조대왕(太祖大王)에 이르러 “려(麗)”라는 이름이 등장하고, 다음 고구려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태조대왕(太祖大王) 59년 3월, “통감(通鑑)에는 이 해 려(麗)의 왕 궁(宮)이 예맥(濊貊)과 더불어 현도를 침략하였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예속되기를 원하였기 때문인지 혹은 침략을 한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그 중 하나가 잘못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삼국사기(三國史記)≫ 태조대왕(太祖大王) 94년 12월, “해동고기(海東古記)를 보면, ‘고구려(高句麗) 국조왕(國朝王) 고궁(高宮)은 후한(後漢) 건무(建武) 29년 계사(癸巳)년에 즉위하였는데, 그 때 나이 7세이므로 국모가 정사를 대리하였다”라고 하였다. 그런가 하면,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고구려를 모두 ‘고려(高麗)’라고 표기하였다. 대표적으로 “당(唐)의 <배구전(裵矩傳)>에 이르기를, “고려(高麗)는 본시 고죽국(孤竹國)인데 주(周)나라가 기자(箕子)를 봉하여 조선(朝鮮)이라 하였으며”라고 하였다.
이는 고구려의 본래 이름이 ‘려(麗)’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려(麗)’는 ‘고려(高麗)’라고도 불렀으며, 또 ‘고구려(高句麗)’라고도 불린 것임을 알 수 있다.
고구려 왕조는 해씨인가, 고씨인가.
그렇다면 어찌하여 ‘려(麗)’는 ‘고려(高麗)’라고도 불리고 ‘고구려(高句麗)’라고도 불린 것인가. 이는 고구려 정권의 계보와 관련이 있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고구려(高句麗)’ 에서 고(高)씨가 나왔다고 하는데, 이는 고구려의 전체 기록을 무시한 추측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 의자왕(義慈王)편 말미에 “신라사람이 자칭 소호금천(小昊金天)씨의 후손인 까닭으로 성을 김(金)씨라 하였다. 고구려 역시 고신(高辛)씨의 후손이므로 성을 고(高)씨라 하였다고 한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고(高)씨는 고구려가 생성되기 이전에 이미 고(高)씨 가문이 존재하였던 것이다. 오히려 ‘고려(高麗)’나 ‘고구려(高句麗)’의 고(高)는 고(高)씨 가문이 정권을 잡았으므로 ‘려(麗)’가 고씨 왕조라는 뜻으로 ‘고려(高麗)’나 ‘고구려(高句麗)’가 된 것이다. 이를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 바로 주몽의 가계사이다. 주몽은 명백히 부여의 해(解)씨 가문이다. 주몽은 해모수(解慕漱)의 아들이다. 따라서 당연히 주몽은 해(解)씨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제4대 민중왕(閔中王)의 휘(諱)가 해색주(解色朱)이고, 제5대 모본왕(慕本王)이 해우(解憂)”인 것을 보면 주몽의 직계 후손들이 성씨를 바꾸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제1대 주몽(朱蒙)부터 2대 유리왕(琉璃王), 3대 대무신왕(大武神王), 4대 민중왕(閔中王), 5대 모본왕(慕本王)은 모두 해(解)씨인 것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제6대에 이르러 왕 이름이 태조대왕(太祖大王)이 된다. 그리고 제7대는 차대왕(次大王)이 된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제 6대 태조대왕 때에는 드디어 고구려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태조대왕(太祖大王)은 나라를 세운 최초 왕이라는 뜻이다. 제6대 왕이 어찌 최초 왕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는 것인가. 그리고는 바로 7대 왕이 두번째 왕이라는 뜻의 차대왕(次大王)이 된다. 그리고는 태조대왕의 어머니는 부여사람이라고 표현한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해(解)씨 왕조가 고(高)씨 왕조로 바뀌었다는 의미이다. 어머니는 부여 사람으로 해(解)씨 왕족의 후손이고, 아버지는 고추가(古鄒加) 재사(再思)로 고(高)씨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는 태조대왕이 유리왕의 아들 고추가(古鄒加) 재사(再思)의 아들이라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유리왕으로부터 제 5대 모본왕까지는 재위기간만 무려 72년이 흐른다. 만일 태조대왕이 유리왕의 손자라면 유리왕이 BC 19년에 왕위에 올랐으므로 최소한 BC이전에 태조대왕의 아버지인 재사를 낳았을 것이다. 평균적으로 BC10년 전후로 재사를 낳았다고 본다면 태조대왕이 태어날 때 재사의 나이는 무려 최소한 56세에서 60세가 된다. 이는 고씨계가 해씨계에서 왕조를 빼앗았다는 것을 애써 숨기기 위해 왕조의 정통성을 주장하고자 시조 주몽의 아들인 유리왕을 고조할아버지로 모신 전형적인 왕권 교체 방법이다. 모본왕의 재위가 5년이고 신하 두로(杜魯)에 의해 살해 당한 것을 보면 왕권에 심각한 변화가 생겼음을 알 수 있다. 어머니가 정통 왕손인 부여 해(解)씨이었으므로 어머니가 7세 아들을 대신해 수렴청정이 가능했고, 또 외손이 왕권을 자연스럽게 넘겨받을 수 있었다. 이로써 왕권은 서기 53년에 태조대왕에 이르러 부여 해(解)씨에서 고(高)씨로 왕권이 넘어간다. 따라서 제6대 태조대왕은 나라의 시조격인 국조왕(國朝王)이라고 불리었고 또 제 7대 왕은 고(高)씨의 두번째 왕인 차대왕(次大王)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그러하니 제 6대 태조대왕에 이르러 최초로 나라이름 “려(麗)”가 등장하고 이때부터 고려, 고구려라는 이름이 등장한 것이다. “려(麗)”라는 나라이름을 최초로 사용하기 시작하고 고(高)씨계가 왕권을 잡았으므로 당연히 태조대왕은 국조왕(國朝王)이 아니겠는가.
첫댓글 추모왕의 원래 성씨는 해씨이지만 고구려의 국호를 따서 고씨라 했지요.
그래서 온조의 성씨는 고씨이지만 추모왕의 아들인 유리는 원래의 성씨를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에 해씨입니다.
우리는 국조왕과 태조왕을 동일 인물로 보지만 국조왕은 재사이고 태조왕이 궁입니다.
재사와 궁은 중국의 사료에는 구분 못하여 121년에 고구려왕 궁이 죽었다고 했는데 실제 죽은 인물은 선왕인 재사이죠.
후한서 동이열전에 121년 고구려왕이 죽어 후한이 조문사절을 보냈지만 궁이 또 다시 나타나는 이유를 중국인들은 알지 못했지요. ㅋㅋ
그래서 후한서 본기에는 고구려왕의 사망사실에 관한 기록이 없는 이유도 동이열전의 기록이 앞뒤가 안맞으니 없앤 것이죠.
"국조왕은 재사이고 태조왕이 궁입니다."
본기신편열전에 의해서,
국조왕 = 궁이죠.
태조왕이 국조왕과 같다는 것은 아직 미정이죠.
태조왕과 국조왕이 의미는 같으니, 동일인의 가능성도 많죠.
AD53년 ~ AD113년 사이의 60년 분량이 사라져 버렸다고 생각하므로,
그 사이의 기사는 고구려사초 가지고도 역부족이죠.
고구려사초가 기년 문제가 잇으니까요.
추모왕의 본래 성씨는 해씨이고 고친 성씨가 고씨이며, 온조는 고씨성을, 유리는 해씨성을 사용했는데, 유리 - 대무신 - 민중 - 모본은 해씨이고, 태조왕이 고씨인 이유는 국조왕 재사가 고씨이기 때문이죠.
남당유고에는 재사가 유리왕의 아들 또는 대무신왕의 아들이라고 했는데 어찌됐던 해씨여야 하는데 기록에는 고씨라고 되어 있는 걸 보면 아버지는 유리왕도 대무신왕도 아닙니다.
남당유고에 보면 아버지가 2명이상인 경우는 있지만 어머니가 2명이상인 경우는 없는데 더욱이 생년도 다릅니다.
어머니가 바뀌었다는 것은 아버지에 대해 숨기고 싶은 사실이 있다는 것을 말하지요.
121년에 죽은 고구려왕의 나이가 100세이니 서기22년 출생인 것이 맞고, 서기22년은 유리왕이 죽고 대무신왕이 즉위하지 않는 시점이고 19세에 해당합니다. 당시 고구려는 섭정왕이 즉위한 상태인데 바로 그가 졸본출신의 고씨입니다. 백제의 본래 출신지가 졸본이고 온조의 성씨도 고씨이니 재사는 온조의 아들입니다.
@정성일 님이 언급하신건 일리가 있는 말이군요..
AD22년, 여름 4월, 부여왕 帶素(대소)의 아우(帶弗)가 갈사수(曷思水) 가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왕을 칭하였다. 이 사람은 부여왕 금와의 季子(막내 아들)인데 역사책에는 그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다. 처음에 帶素(대소)가 죽임을 당하자,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알고, 따르는 자 100여 명과 함께 압록곡에 이르렀다. 해두국왕(海頭國王)이 사냥 나온 것을 보고 결국 그를 죽이고, 그 백성들을 빼앗아 이곳에 와서 비로소 도읍하였는데. 이 사람이 갈사국왕(曷思國王, 帶弗, 曷至王)이 되었다.
@정성일 본기신편열전 갈사태후란에서...
갈사태후가 낳은 아들은 '아버지 再思' 庚申 = BC1년에 출생.
'아들 再思' AD22년 출생 = 壬午년.
아버지와 아들 차이가 23년 차이가 나니까 계산이 맞군요.
크크리님> 안녕하세요...카오스입니다.
직접작성하신 글은 아닌 것으로 봅니다만,....재미있기도하지만, 아주 중요한 부분이어서...다른분들과 조금 색다른 내용을 소개드리고자 합니다....굳이 ‘근거대라’고 말하지는 마시고 한번 들어 보시기만 바랍니다...
(1) ‘주몽의 성씨가 고씨가 아니다.’..
--->예, 말씀하신대로 주몽은 분명히 고씨가 아닙니다,....그러나 우선 ‘주몽은 고구려의 시조로 설정된 가공인물[=고구려건국 준비과정을 의인화한 것임]’이므로 고구려의 왕성이 ‘고’씨라면, 고씨가 되는 것이고, 고구려의 왕성이 ‘해’씨이면 해씨가 되는 것으로 보아도 될 것입니다.
다만, 주몽의 시기[전37~전19]에 ‘고씨’는 아예 없었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물론 당시 ‘해’씨도 없었던 것이었지만, 그래도 부여의 성씨를 ‘해씨’로 본다면, 모두 부여세력들이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어쨌든, 가공인물인 시조 주몽을 고씨로 만든 시기는 20장수왕시기로 보아야 합니다. 물론 그때 6태조왕을 고씨왕의 시조로 삼았었던 것이지만, 중간에 해씨, 유씨, 모씨, 고씨 등등이 번갈아가면서 왕을 했었던 적이 있으니 정식으로 고씨왕들이 계속 이어진 것은 18고국양왕 때부터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2) ‘6태조왕 때부터 고구려(려)란 국호가 시작된다’
---> 예, 대부분(통설포함)의 사람들이, 6太祖王(태조왕)이자 高宮(고궁)이라고 했었으니 이때부터 ‘고구려’란 국호가 시작된 것으로 볼 것입니다만, 앞에서 말씀드렷듯이 20장수왕시기에 6태조왕을 고씨왕의 시조로 ‘소급해서 삼은 것’이므로 ‘고구려(高麗)’란 국호는 20장수왕때부터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그 이전의 국호는 ‘고구려(高麗)’가 아니라 ‘구려(句麗)’였었던 것인데, 문제는 여기서 모든 ‘麗(려)’자는 ‘黎(리,려)’자를 변조한 것이고 모든 ‘句(구)’자는 ‘九(구)’자의 변조라는 것입니다.
즉, 고구려는 마지막 망할 때까지 국호가 ‘黎(리,려)’ or ‘九黎(구려,구리)’ or ‘高黎(고려,고리)’ or ‘高九黎(고구려,고구리)’였었던 것인데, 망한 다음에 역사를 재정리하면서 ‘麗(리,려)’ or ‘九麗(구려,구리)’ or ‘高麗(고려,고리)’ or ‘高九麗(고구려,고구리)’로 모두 변조되었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아마, 남당유고에 그 힌트가 있을 것으로 봅니다만, 카오스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6太祖王(태조왕)의 아버지인 (고)주리’가 47년에 그 이전의 해씨들[부여세력]을 축출하고서 나라의 실권을 완전히 장악[4민중왕4년9월>東海人髙朱利獻鯨魚目,夜有光]하고 5모본왕으로 교체하였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47년10월에 ‘1만여가(家)가 낙랑으로 가서 한(漢)에 투항’하는 큰 변고가 생겼었고 이때부터 고구려는 부여세력들과 차별화를 하게 된 것으로 봅니다. 즉, 고구려의 실권을 장악한 (고)주리는 일단, 48년에 해씨인 5모본왕을 그대로 옹립했었었다가 53년에 자신의 아들인 6태조왕으로 바꾸고 섭정했었던 것[ 以年七歳, 大后垂簾聽政]으로 봅니다. [참고 : 太后(태후)는 어머니(母)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父)인 (고)주리를 代稱(대칭)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