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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무왕의 설화가 서려있는 궁남지 어제(20일) 오후 빗속을 헤치며 서동 연꽃축제가 막 열리기 시작한 부여를 다녀왔다. 지방자치 이후, 눈에 띄게 늘어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축제'라는 형식일 것이다. <진도 아리랑> 노랫말 속엔 '청천 하늘엔 잔별도 많고 요내 가슴엔 수심도 많다'라는 구절이 있거니와 좁으나 좁은 땅에, 좋아서 팔짝 뛰다가 죽을 일도, 배를 끌어안고 널브러질 만큼 기쁠 일도 없는 요즘의 세상살이건만 웬 축제는 그리도 많은지. 가치는 희귀성에 딸린 종속변수다. 흔할수록 가치가 떨어지기 마련이다. 아무리 쌔고 쌘 게 축제라지만 매양 쓸모가 없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삶이 쑥구렁에 박힌 쑥 같다고 느껴질 때, 삶이 한 걸음도 떼지 못할 만큼 깊은 진흙탕이라 느낄 때,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 싶지만 떠나려고 해도 막상 갈 곳이 없을 때 축제는 우리의 선택을 훨씬 용이하게 해준다. 진흙탕 같은 내 삶도 한 떨기 연꽃처럼 함초롬히 피어나기를 기대하면서 부여를 향해 떠났다. 쏟아지는 비의 하중을 감당하기 버거웠던 걸까. 차는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같이' 사뿐히 내닫지를 못하고 2시간이 꼬박 걸려서야 부여땅에 들어선다. "날이 부옇게 밝았다"는 말에서 유래한 부여는 본디 아침의 땅이었다. 그러나 서기 600년 백제가 멸망한 이래 부여는 황혼의 땅이 되고 말았다. '장대비 동생 작달비'가 퍼붓고 있었지만 연꽃 축제가 열리고 있는 궁남지 주변은 몰려드는 차량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연꽃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받치고 있는 우산마저 연꽃의 일종이 아닌가 착각할 정도였다. 서동 연꽃축제는 2003년부터 열려 왔다. 부여군이 궁남지 주변 2만5천여 평에 2000년부터 식재한 연과 야생화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고 궁남지 및 주변 문화유적을 홍보하기 위해 만든 축제다.
궁남지 옆에는 마동설화를 새겨놓은 비가 있다. 정숙해야 할 선화 공주님이 남몰래 정을 통해 둔 서동을 밤에 몰래 안고 갔다는 <서동요>의 내용은 나를 잠시 헷갈리게 한다. 공주를 얻으러 적국에까지 침투해 들어간 마동의 전략적 승리였던가, 아니면 내 낭군은 내가 선택하겠다는 선화공주의 도발적 페미니즘의 승리였던가. 궁남지 한 켠에도 연이 무리지어 자라고 있다. 송나라 주돈이는 <애련설>에서 물과 땅에 자라는 여러가지 식물에 대해 평하는데 "연꽃은 군자다"라고 했다. 연은 더러운 진흙 개흙에서 자라지만 더러움에 물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 선비들은 연못을 조성하고 거기에 연을 심었던 것이다.
원추리는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꽃이다. 봄에 돋아나는 새순은 나물로 무쳐먹거나 된장국을 끓여 먹기도 한다. 또 묵은 잎이 봄에 새싹이 나오기 전까지 말라비틀어진 채로 남아있는 모양이 마치 어린 자식을 끝까지 보호하려는 어미와 같다하여 옛 사람들이 애호하던 꽃이다. 게다가 꽃은 하루 정도 피었다가 통째로 떨어지기 때문에 지저분하지 않고 깨끗하기까지 하다. 이곳 궁남지에서 멀지 않은 동남리에서 태어난 민족시인 신동엽은 <원추리>라는 시에서 " 춤추던 사람이여/ 토장국 냄새//이슬 먹은 세월이여/ 보리타작 소리"라고 썼다. 원추리야말로 우리 민족의 꽃인 것이다. <신동엽과 김지하를 노래하는 이정지>라는 이종구의 음반 속에 들어 있는 '원추리'는 청아하기 그지없다.
땅속줄기는 연근이라고 하며, 비타민과 미네랄 함량이 비교적 높아 연근조림이나 연근정과 등 요리로 쓴다. 뿌리줄기와 열매는 약용으로 쓴다.
돌이켜 보면 내 젊은 날의 사랑은 시간의 유리함을 믿었던 까닭에 오만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이제 나는 안다. 알기 전에 느낀다. 더디게, 아주 감질나게 하는 더딘 사랑만이 진짜 사랑이라는 것을. 이정록 시인은 .더딘 사랑'이란 시에서 이렇게 말한다. 돌부처는 눈 한 번 감았다 뜨면 모래무덤이 된다 눈 깜짝할 사이도 없다 그대여 모든 게 순간이었다고 말하지 마라 달은 윙크 한 번 하는데 한 달이나 걸린다 이정록 시 '더딘 사랑' 전문 시간은 덧없이 흘러간다. 영원은 순간의 명시되지 않은 적(敵)이다. 그러나 시인의 상상력은 순간과 영원을 변증법적으로 통일시킨다. '달은 윙크 한 번 하는데 한 달이' 걸리고 '돌부처는 눈 한 번 감았다 뜨면 모래무덤이'된다고 말한다. 모든 것이 순간이긴 하지만 더디게 할 줄 아는 사랑은 순간을 정지시킬 줄 안다. 그러나 나는 오늘 저 연꽃 봉오리가 개화하는 순간에서 끝내 영원을 발견하지 못했다.
다시 새벽의 땅이 되길 빌며 하얀 블라우스를 걸친 여인이 연밭 사이로 난 길을 저벅저벅 걸어오고 있다. 비가 가져다 준 비애의 상념을 가슴에 담고 있는 여인은 이 전설의 태실(胎室)인 궁남지에서 무슨 전설을 생각하며 걷는 것일까. 지금은 별똥별이 되어 아득하게 사라진 옛 사랑의 전설을 생각할까? 아니면 오늘같이 비 내리는 날의 저녁을 따끈하게 데울 수 있는 별미를 궁리하고 있는 것일까. 한 자리 꿈속을 헤매다가 갑자기 눈을 떠보니 내 품에서 잠이들던 사랑은 한숨속에 날아가 버려 서러움이 가득한 마음을 안고 성황당 돌덩이 하나 들어 꿈에나 만나는 내사랑은 돌던지면 만날까 빌어보렴 여기가 어딘가요 아 사랑 있나요 여기가 어딘가요. 더 갈 곳 있나요 우_ 사랑은 있나요 심진 스님의 노래 '여기가 어딘가요' 가사 전문 1991년에 나온 심진 스님의 1집 <그대를 위한 詩> 중 '여기가 어딘가요'라는 노래가 떠오른다. 저 연꽃이 피는 것도 잠깐이다. 잠깐 피는 연꽃을 바라보는 나라는 일물(一物) 역시 있다 없다 말할 수조차 없는 초로인생에 지나지 않는다. 시간이 벌써 오후 4시를 지나고 있다. 서둘러 부여 땅을 떠난다. 지나는 길에 힐끗 정림사지 5층석탑을 쳐다본다. 옛 부여의 껍데기는 모두 사라지고 남은 부여의 알맹이가 쓸쓸하기 짝이 없다. 신동엽 시인은 '껍데기는 가라'고 마치 주장자를 든 선사처럼 외쳤지만 껍데기 없는 알맹이는 안쓰럽다. 미안하다, 그대여. 육신이라는 껍데기가 있어 아름다운 줄을 몰랐구나. 이제라도 알았으면 됐다면서 5층 석탑이 잘 가라고 손을 흔든다. 다시 올 때는 이 땅이 더 이상 황혼의 땅이 아니길 빈다. 나 역시 옛 백제의 땅에 태어난 유민이기 때문이다. |
첫댓글 전부비맞은연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