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간의 죄인생활
증언자 : 손병섭(남)
생년월일 : 1955. 2. 13.(당시 나이 26세)
직 업 : 호텔 종업원(현재 레스토랑 경영)
조사일시 : 1989. 2
개 요
1980년 당시 금남로에 있는 미도호텔에 근무했다. 5월 19일 아침 9-10시쯤 갑자기 호텔로 들이닥친 공수들에게 붙잡혔다. 상무교회로 이송되어 3일 후 석방됨.
5월 19일 아침 9-10시 사이 금남로 지하도 공사장에 공수특전단이 있었다. 나는 그때 미도호텔(금남로 3가 1-5번지) 프런트에서 경리를 보고 있었다.
"너는 부모형제도 없느냐?"
"죄 없는 학생들을 왜 때리냐?"
현관에 있던 사장과 친구분들이 악을 쓰는 소리가 들렸다. 공수대원 20-30명이 호텔 쪽으로 밀려오자 사장이 주차장 철문을 빨리 닫으라고 했다. 조건수(당시 지배인) 씨와 함께 철문을 미처 닫기도 전에 뛰어든 공수들이 한 마디 말도 없이 우리를 발로 차고 곤봉으로 내리쳤다. 나는 정신을 잃고 무의식 중에 끌려갔다. 끌려가는 도중에도 거리거리에 배치된 공수들에게 또 구타당했다. 관광호텔 앞까지 끌려가 경찰 미니버스에 탔다. 형사들이 우리를 차에 끌어올렸다. 우리는 광주경찰서에 도착하여 주소, 성명 등 간단한 신상파악을 끝낸 다음 보호실에 감금되었다. 얼마 안 있어 우리 직원인 김병렬, 장익수, 김영대 등도 끌려왔다. 우리는 호텔 식구끼리 함께 행동하기로 하였다. 저녁 식사를 하고 9-10시 사이에 닭장차에 실려 31사로 향하였는데 고개를 들지 못하게 했다.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공설운동장(무등경기장) 부근에서 차가 한 번 멈추었다.
그때 버스에 올라온 공수 2, 3명이, "이 새끼들 다 죽여야 한다."며 진압봉을 휘두르며 밟고 다녔다. 버스에는 우리처럼 잡혀온 사람들이 꽤 됐고 수행형사 3-4명이 있었다. 이들은 아무런 권한이 없는지 공수대에게 꼼짝하지 못 했다. 31사단에 도착했지만 그곳에서 수용할 수 없다고 했으므로 상무대로 향했다.
상무대에 도착하자 헌병들이 호주머니 검사를 하고 인원을 파악한 뒤에 상무교회로 들어가라고 했다. 200-300명이 무릎을 꿇고 앞사람 등에 고개를 숙인 채로 수용되어 있었다. 쭈그리고 앉아 있자니 얻어맞은 상처가 아파왔다.
20일 1시가 넘어 찐빵 1봉을 주었는데 치아가 들떠서 도저히 깨물 수가 없었다. 아침이 되어서야 군의관(중위)이 왔다. 그러나 심한 상처에도 불구하고 머큐롬만 발라주는 형식적인 치료로 끝냈다.
나는 군의관에게 물어보았다.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지금 헬기 날아다니는 걸 봐라. 지금은 말할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다."
치료를 그런 식으로 시키고 난 후 조사를 하려는지 한 사람 두 사람씩 불러냈다. 검정 안대를 씌워 인솔 군인이 쥔 노끈을 잡게 하여 10여 분 개 끌고 가듯이 끌고 갔다. 비가 와서인지 길이 질퍽질퍽했다. 안대를 풀고 보니 교실처럼 보이는 곳에 몇 개의 책상이 놓여 있었다. 한 책상마다 사복차림의 정보요원이 둘씩 앉아 있었다.
"어디서 데모했느냐?"
"어떻게 연행됐는가?"
그들이 나에게 물었다.
"저는 데모에 가담한 사실도 없고, 호텔에서 근무하다가 연행됐습니다."
"데모에 가담하지 않았는데 연행될 리가 없다. 거짓말 마, 이 새끼야."
소리를 버럭 지르며 거칠게 대했다. 조사가 끝난 다음 점심은 도시락으로 해결했다. 21일 0시쯤에 수용된 사람 중 20, 30명을 호명하여 불러내길래 나는 '저 사람들은 아는 줄이 있어 풀려나는가보다'고 생각했다. 21일 10시쯤 더러워진 옷을 벗어달라고 해 가져가더니 11시 30분쯤 전부 세탁해 가지고 왔다. 그리고 30분 뒤에 상무대 연병장으로 집합했다. 육군본부에서 내려왔다는 전라도 출신 장군이 4, 5분 동안 훈시를 했다. 그중 김순영 장군이, "바로 광주시내로 들어가지 말고 고향친지 친척집에서 일주일만 쉬고 광주로 올라오라."는 얘기를 했다. 상무대 후문에서 풀려나 아세아자동차 공장, 광주역을 지나 시외버스 공용터미널을 거쳐 호텔로 돌아왔다.
문이 잠겨 있어 현대예식장 후문을 통해 호텔 후문을 두들기자 동료 박필호(보일러 기사)가 문을 열어주었다. 샤워 후 사장 친구가 경영하는 박윤식 외과에서 치료를 받았다. 다른 직원은 집으로 돌아갔지만 나는 광주에 연고지가 없어 몇몇 동료와 같이 다시 호텔로 들어왔다.
23일인지 24일인지 도청 앞에 나가 상무관에 들렀는데 영정이 담긴 관 앞에서 통곡하는 가족들을 보고 '나도 저렇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착잡한 심정으로 호텔로 돌아왔다.
27일 새벽 3시쯤 옥상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계엄군이 시내로 진입해 온다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고 콩볶는 듯한 총성이 들려왔다. 아침이 되어 계엄군이 진입해 왔다는 소리를 듣고 김순영 장군이 말한 일주일이 광주시내 진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계속 호텔 근무를 해오던 2, 3년 후에 두통이 더욱 심해지고 때로는 정신이 멍해지는 증상이 나타났다. 가만 있다가도 깜짝깜짝 놀라고 허리에 통증과 마비가 왔다. 그래서 전남대병원 사거리 일중한의원에서 치료를 받아왔다.
그러던 1988년 12월 6일 부상자 신고를 하고 요한병원 신경정신과에서 검사를 받았다. 동료 박필호에게는 생활안정자금 통지서가 왔다는데 나에게는 오지 않았다. 5·18 진상은 반드시 규명되어야 하고 억울한 사람에게는 보상을 해주어야 한다. 정부차원의 보상도 필요한데 특히 내 경우에는 몸이 아플 때 치료받을 수 있는 의료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조사.정리 주경화)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