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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처음부터(*
, 아프 아르케스) - '처음부터'라고 번역된 헬라어 '아
프 아르케스' 중
'아르케'(* )란 말은 '모든 일의 시작'에 대해 또는
'말해진
일들의 시작'에 대해서 사용되는 단어이다. 이것은 '예수의 탄생에서부터'라는 의미보
다는 예수의 '공생애의
시작에서부터'라는 의미, 또는 '세례 요한의 활동의 시초에서
부터'(3:1, 2;행 1:21, 22;10:37)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
의 공생애 시작부터 예수에 관한 모든 일의 목격자들이다.
말씀의(*
, 투 로구) - 여기서 이 단어는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니
고 있다. 신약 성경에서
'말씀'(* , 로고스)은 다양하고
빈번하게 사용 된
다. 특히 요한은 자신의 복음서를 통해 '말씀'에 대한 특별한 의미를 제공하고 있는데
그가
기술한 요 1:14에서는 "말씀(로고스)이 육신이 되었다"(incarnation)라고 기록하
고 있다. 이는 분명 말씀이 성육신보다
선재(先在)했음을 암시한다(Lenski). 그리고
그 말씀을 통하여 천지가 창조되었으며(요 1:3), 그 말씀은
생명이있고 또 사람들의
빛이 된다고 설명한다(요 1:4). 또한 그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
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게 하나님을 나타내셨다고 증언한다(요 1:14). 이에 비해 본
문의 '말씀'은 '복음'을 의미한다.
즉 예수의 '말씀'과 '행동'을 통해 계시된 복음이
다. 사실 고대 헬라의 작가들은 어떤 사람의 말과 그에 걸맞는 행동을
연관시켜 그 중
요성 강조했었다. 행 1:1에서도 누가는 예수의 사역을 기술할 때 '행하시며'와 '가르
치시기를'이라는
말들을 서로 결합시키고 있다. 어쨌든 말씀과 행동을 통해 계시된 그
복음의 말씀은 1절의 '이루어진 사실'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Liefeld).
목격자 되고 일군 된
자들(*
, 아우토프
타이 카이휘페레타이) - 마태나 요한과는 달리 누가는 예수의 공생애 내내 곁에서 목
격자되고
일꾼되었던 제자는 아니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복음서 기록을 위해 그 같
은 사도적 증거(witnesses)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본절은
바로 그 같은 사실이 고백되고 있다. 여기서 '목격자'에 해당하는 '아우토프타이'는
'자기 자신'을 나타내는 '아우토스'(*
)와 '보다'의 뜻을 가진 '호라오'(*
)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그 의미는
'스스로 본 자', '직접 자기 자신이 본 자'
(eyewitnesses, 목격자)라는 뜻이 된다(Robertson). 이는 곧
누가의 복음서 기록을 가
능케 했던 각종 정보를 제공해준 자들로서 그들은 실제로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 직접
그분의
활동상을 목도한 산 증인이다. KJV는 이 부분을 '말씀의 일꾼'(minister of
the
word)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실로 예수 공생애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꾼
된 자들은 예수의 열 두 제자 외에 70인 전도대 및
예수를 수종들던 여인들(막 15:40,
41), 그리고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형제들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누가는
여기
서 자신의 복음의 권위를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 자신의 복음서 기술을 가능케 한 자
들이 '목격자' 또는 '말씀의
일꾼' 어느 한쪽에만 치우치지 않고 양자 모두가 포함되
고 있음을 밝힘으로써 그 복음의 권의와 내용상의 완벽을 넌지시 강조하고
있다. 여기
서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지는 것은, 1절의 '우리'는 바로 목격자 되고 일꾼된 자들이
라는 사실이다. 이들은 복음의 산
증인들이다.
전하여 준 그대로 - 본문에서 누가는 복음서 기록을 위해 준비한 모든
자료들이
임의대로 더하거나 뺀것이 없는 원형 그대로의 것이라는 사실을 밝힌다. 즉, 누가는
예수의
말씀과 행적에 관해서 자신에게 전해진 구전(Oral tradition)과 기록(Written
tradition)이 신빙성 있고
정확한 것임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본문의 '전하여
준'
(*
, 파레도산)은 제2 부정과거 복수 능동태 직설법 동사로서 어김
없이, 확실히 건네주었음을 뜻하는 말이다. 물론 이 말은 여기서
'구전'(口傳)을 가리
킬 수 있으나(고전 11:23;15:3) 반드시 구전만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24:20;행
1:20;3:13). 즉 이것은 구전과 기록 문서를 포함한 일종의
'전승'(*
, 파라도시스)으로 봄이 좋을 것이다. 실로 누가는 최초 목격자와 일꾼들이 전해준
전승을 통하여 자신의
복음서를 편집 구성하였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사실 누가는
예수의 제자도 아니었고, 사도도 아니었기에 복음에 있어서만은
직접적 증인이 아니었
다. 따라서 복음서를 기록함에 있어 최초 증인의 확실한 보증 등의 신중을 기할 수밖
에
없었다.
내력을
저술하려고(*
, 아나태사스다이
디에게신) - '저술하려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나태사스다이'는 '차례로',
'잇달아'
라는 뜻을 가진 '아나'(* )와 '고정된 곳에 놓다', '어떤
순서대로 배열하다'라
는 뜻을 가진
'타쏘'(* )의 합성어인
'아나타쏘마이'(*
)가 원형이다. 따라서 이 단어는 임의대로 복음을 기록함이 아니라 일관성 있게,
차례대로 순서에 따라 편찬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내력을'에 해당하는 '디
에게신'은
'디에게오마이(*
, '완전히 인도하다', '자세히 말하
다')라는 단어에서 온 것으로서(8:39;막 5:16;9:9;행
8:33;히 11:32) 이는 곧 내용을
정밀하고 체계적으로 기록함을 말한다.
붓을
든(*
, 에페케이레산) - 이 단어는 '손을 대다', '착수
하다', '시도하다' 등의 뜻을 가진
'에피케이레오'(*
)로서 흔히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 등의 의학 용어로 많이 사용되었으며, 그 의미하는
바는
'실패나 비난에 유념치 않고 무엇을 시도하다'로 이해되곤 했다(Robertson). 이로 보
건대 이
일을 착수하거나 시도하는 사람들이 이미 있었다는 것을 알수 있다. 그런데
뒤늦게 누가가 이 작업에 착수하게 된
까닭은 무엇인가? 앞서 기록된 자료(Written
tradition)들이 부실하다고 생각해서였을까? 물론
누가는 자기 앞의 다른 기자(記者)
들의 불완전함을 지적하거나 그것을 극복하고 더 나은 기록을 남기고자 하는 경쟁자적
입장에서 붓을 든 것은 아니다. 오히려 누가는 예수에 관한 증인 의식을 가지고 좀 더
방대한 정보와 심도깊은 연구를 통해 더 많은
역사적 사실들을 담은 상세하고 정확한
복음서를 기록하려고 의도했다. 사실 이런 점에서 다른 복음서가
전하지 않는 여러
내용들을 본서에서는 다루고 있다(5:1-11;7:11-17,
36-50;8:1-3;10:25-37;15:1-32;19:
1-11;24:13-53). 또한 그는 기존의 기록을 단순히 모방하거나
답습하지도 않았다. 오
히려 누가복음이나 각 기록들을 통해 확대되거나 모방된 외경들이 이단 교파나 특수한
종파
가운데서 사용되기도 했다(예:히브리인 복음서, Gospel According
to the
Hebrews). 결국 이 부분은 예수의 교훈과 행적을 담은 당시의 각 기록이 나름대로의
독특성들을 지니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으며, 특히 누가는 다른 기자들과 공동으로 인
식하고 있는 복음의 내용을 자신도 감히
기록하겠노라는 복음서 기술 의도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사람이 많은지라 - 정확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었는가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누
가는 분명히 그 '많은 사람' 중에 어느 누구의 기록된 자료를
참고하여 이 복음서를
기록했을 것이다. 4복음서를 비교하여, 같거나 비슷한 내용을 빼고 다른 부분을 놓고
본다면, 누가복음의 초반부는 누가가 독톡한 자료를 참고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여기
서 1절의 '우리'와 연결하여 본다면 의미가 좀
더 확실해진다. '우리'는 누가가 기록
한 사도행전 속에서도 등장하는데,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면 누가가 '우리'와
많은 곳
에서 여러 활동을 했던 것을 보게 된다(행 16:10-17, 20:5-14;21:1-18;27:1-22).
렌스
키(Lenski)는 누가와 마가가 바울의 첫 투옥 중에 서로 접촉을 했고, 2차 투옥시에도
같이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바울을 중심으로 긴밀한 친우사이가 되었고, 따라서 둘
중 먼저 복음서를 기록한 사람이 그 내용에 관해서 서로
이야기 했을 것이다. 그러므
로 사도행전과 연결해서 볼때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본서의 '우리'와는
긴밀
한 상관 관계를 갖고 있으며 그들 중에는 저술에 참여하는 많은 사람들, 적어도 세 명
이상의 사람들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복음서의 기록은 많은 기록들 가운
데서 특별히 객관성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우리말 어미에 해당하는...
지라(*
, 에페이데페르)고 하는 이 접촉사는 '...이므로'란 뜻의
'에페이'(* )와 '확연히 알려진 것'이라는 뜻의
'데'(* ), 그리고 뜻을 깊
이하거나 강조하는데 쓰이는 후접사
'페르'(* ) 등이 합성된 단어로서 '...이므
로',
'참으로...이니까', '생각해 보건대'라는 등의 다양한 의미를 지닌 말이라 할 수
있다. 이 단어가 가진 뜻으로 보아 앞선 사실이나
기존의 잘 알려진 일에 대한 회상과
확인을 나타내는 단어임을 알 수 있다.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이 곳에서만
나타난
다. 그러나 일반 헬라 문학에서는 자주 사용된다. 헤로도투스(Herodotus)나
디오니시
우스(Dionysius)의 역사서의 서두에서도 이 단어가 전통적인 문체로 사용되고
있다
(Robertson). 누가는 헬라인이었다. 그래서 헬라문학의 전통 양식에 따라 가장 격조높
은 고전 헬라어로
자신의 복음서를 시작하고 있다(1:1-4). 이에 대해
바클레이
(Baclay)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것은 마치, 가장 위대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
으며 이 이야기에
대신할 수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듯하다.
=====1:3
그 모든 일을...자세히 - 전하는 바에 의하면 누가는 의사였다고
한다(골 4:14).
따라서 그는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상당한 지식의 소유자였음이 분명하다. 그런 그가
여기서 자신의 복음서 기록의 성격을 제시한다. 먼저 '그 모든
일'(* ,
파
신)을 나타내는 원어는 중성 복수로서 예수에 관한 모든 사건, 예수 중심으로 발생했
던 모든 일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근원부터'(*
, 아노덴)는 '처음부터
', '맨 시초부터' 또는 '일찍부터'(행 26:5)라는 뜻으로, 2절의 '처음부터'란 말과
직
접 연관은 없으나 의미상 유사성을 지닌다. 아마 누가는 이 팔을 쓰면서 분명 본서
1, 2장에 언급된 탄생 기사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그리고 뒤이어지는
'자세히'(*
,
아크리보스)는 원래 '첨단' 또는 '극점'을 의미하는 '아크론'(*
)에서 나온 말로서 아주 세밀한 부분까지 파고 들어가는 열정적 태도를 가리킨다. 본
문에서는 그런 맥락에서
'매우 정확하게', '엄밀하게'의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
리고 뒤이어 나오는
'차례대로'(*
, 카데크세스)는 '순서에 맞추어', '
연속적으로'라는 뜻으로서 누가는 자신의 복음서를 서술함에 있어서 역사적
시간순을
존중하여 연대기적 기술 방법을 택했다고 소개한다. 더욱이 그는 단순히 각 사건들을
시간적
배열만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떤 주제 의식을 갖고 신중히 체계화, 조직화
했음을 밝힌 것이다. 사실 9:51-18:8은 주제에 의해
사건과 교훈이 나열되어 있다. 이
로 미루어 누가는 다음과 같은 원칙에따라 본 복음서를 기록해 나갔음이 밝혀진다. 즉
첫째,
역사성, 둘째, 정확성, 셋째, 논리적 일관성의 원칙에 따랐으니 이는 또한 누가
복음 전체의 특성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미루어
살핀(*
, 파레콜루데코티) - '마음을 다하여 무엇을 따르다
', '집요하게 무엇을 탐구하다'는 등의 뜻으로서 고대 헬라어에서 흔히 사용되던
동사
의 완료 능동태 분사형이다. 이는 누가가 자신의 독자들에게 자신의 기록에 대한 신뢰
감을 심어주기 위해 언급한 말로서, 누가는
복음서를 기술하기에 앞서 주도 면밀하고
도 심층적인 연구와, 정확하고도 방대한 지식을 지니고 있었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
다. 이로써 그는 자신의 기록이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충실하고 정확하
다는 사실을 밝혔다.
나도(* , 카모이) - 이는 '붓을
든 많은 사람'(2절)과 짝을 이루는 말로
서 누가 자신도 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복음서를 집필할 만한 정보와 지식을
소유하
고 있음을 밝힌 것이다.
데오빌로
각하(*
, 크라티스테 데오필레) - 누가
가 기록한 두 책(본서, 사도행전)의 수신자로 명시되고 있는 데오빌로가 누구인지 전
하는
바가 별로 없다. 혹자에 따르면 누가가 자신의 수신인의 진짜 이름 대신 가명으
로 사용한 것이거나 또는 상징적인 이름이라 보기도
한다. 또 다른 견해로는 그가 도
미티안 황제의 조카로서 상속인이었던 클레멘스(Titus Flavius Clemens)였을
것으로도
추정한다(Streeter). 그렇게 되면 이 데오빌로라는 이름은 가명이 되고 만다. 그러나
'데오빌로'는
하나의 고유명사(a proper name)이며 특히 누가가 그의 이름에 붙여 사
용하는 '각하'라는 명칭을 통해 볼 때 그가
실재(實在)한 로마의 고위 공직자였을 것
이라 단정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리펠드(Liefeld)는 데오빌로가
누가의 학우이거
나 발행인이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E. J. Goodspeed, Grevdanus). 여기서
'데오빌
로'라는 이름은 '데오스'(* , '하나님')와
'필레오'(* , '사랑하다',
'친구가 되다')라는 단어들의 합성어로서 이를 합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 또
는 '하나님의 친구'라는 뜻을 나타낸다.
이러한 명칭을 듣고 혹자는(Origen, Bruce)
이것이 B.C. 3C 경에 흔히 사용되딘 이름으로서 어떤 특정
개인을 가리키기 보다는 하
나님을 신앙하는 모든 신자들, 즉 신앙 공동체를 지칭하는 것이라 보기도 한다. 하지
만 이것은
적어도 하나님을 신실하게 신앙하는 한 성도의 이름이라는 가능성을 더욱
짙게 할 뿐 상징적 이름이나 가명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실로 데오빌로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초보에 들어서 있었는데 누가는 그 신앙을 더욱 확고히 하기 위
해 자신의
복음서를 전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4절). 한편 여기서 분명히 밝혀 둘 것
은 비록 본서는 데오빌로가 그 대표적 수신자로 밝혀져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오직
데오빌로 개인에게만 국한시켜 헌정(獻呈)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실 어떤 책을
권위있고 명성이 높은 한 개인에게 헌사하는 경우는 당시 일반적인 관례였는데, 그렇
게 함으로써 그 책은 더
높은 권위와 더 많은 독자를 가지게 되었었다(Julicher
Fascher). 더욱이 본서의 전반적인 기류는 탈(脫)유대적이요, 범세계적이라는 점을감
안할 때 누가의 복음서는 이방
세계, 특히 헬라주의에 깊이 물든 신앙인들에게 보내졌
을 뿐 아니라 그들을 발판으로 하여 전세계 모든 신앙인들에게로 지향하고
있다고 본
다. 한편 본문에 언급된
'각하'(*
, 크라티스테)라는 말은 '지존하신
', '가장 고상한'이란 뜻으로서 형식적이고 친근하게 인사치레로 사용되기도 하고, 관
례적으로
존경을 표하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대부분 어떤 특
정한 지위나 관직에 있는 신분이나
하나의 공식적인 직함으로 사용되고 있다(행
23:26;24:3). 따라서 본문의 데오빌로는
로마제국 내의 행정 장관이었거나 어느 직할
지의 총독 내지는 고위 관직에 있던 인물로 추정해 볼
수 있다(Noval Geldenhuys,
Ramsay).
좋은줄
알았노니(*
, 에돝세 카모이) - 헬라어 원문에는 이
말이 3절 문장 서두에 온다. 여기서 '에돝세'는 '찬양하다', '영광을
돌리다'라는 뜻
에서 유래된
'도케오'(* )의 과거형이다. 실로 예수에
관해서 기록을 하는
일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고, 주께 영광 돌리는 일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은 또한 인간들에게도 큰 기쁨이다. 누가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문장을 시작하고 있
다. 한편 KJV와 NIV를
통해서 보면 이 구절의 의미가 더욱 명백해진다. NIV는 이유를
나타내는 단어 'since'를 이 구절 문장 서두에 사용하고,
KJV는 이유를 나타내는 분사
구문을 사용해 성경을 기록하는 일이 왜 좋은지를 밝히고 있다(It seemed good to me
also). 실로 누가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처음부터의 모든 일들을 거의 완벽할 정
도로 알게
되었다. 그러기에 그는 이러한 사실을 기록하는 것을 기쁘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1:4
배운
바(*
, 카 테케데스 로곤) - '배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테케데스'는
'카테케오'(*
, '귓가에 울리게 하다', '말로
가르치다')라는 단어에서 왔다. 이로 미루어 데오빌로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구전으
로 배웠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는 책의 필요성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누가
에게 이 복음서
기록을 의뢰하였을수도 있으며 아니면 누가가 기록한 이 책을 출간해
주었을 수도 있다(Henry, Liefeld,
Geldenhuys). 한편 우리말 개역 성경에서는 번역되
지 않은 '로곤'은
'로고스'(* , '말씀', '사건')의
소유격 복수 형태이다.
NIV와 KJV는 이 단어를 '사실들',
'일들'(things)이라고 번역하고 있으며 알포드
(Alford)는 이 단어를 '말씀에서 표현된 것'이라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버운바'는
말씀을 통해서 배운 것들을 의미한다.
확실함(*
, 텐 아스팔레이안) - 이 단어는 부정의 뜻을
나타내는 접두어 '아'(* )와 '미끄러 넘어지다',
'걸려 넘어지다'라는 뜻을 가진
'스
팔로'(* )의
합성어이다. 즉 '확실함'이란 무엇에 걸려 넘어지지않고 견고
히 서는 것이다. 실로 우리가 믿고있는 복음은 우리를 견고히 세우고 온전케
하며 확
신을 같게 한다(딤후 3:15-17). 사실 분명하지 않은 바를 다른 이에게 전할 수 없고,
가르칠 수
없다. 그런 연유로 누가는 진리에의 확신과 예수께 대한 '확실함'을 간직하
게 하기 위하여 붓을 들고 있다. 한편 이 책을 받아
볼데오빌로는 구전을 통해 복음을
배웠을 것이라고 앞서 이야기했다. 따라서 구전을 통해 믿음이 성장한 그는 많은 이단
사상에
도전(挑戰)을 받았을 것이 분명하다. 당시는 유대교의 박해와 그리스도의 진리
를 위협하는 영지주의(Gnosticism)와 이단자들이
성행했다. 혹시, 데오빌로 역시 이런
영향에 위협을 느꼈을지 모를 일이다. 이런 종교적 갈등은 명상이나 사색을 통해 해결
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직 누가가 기록하고자 하는 실제적인 복음 기사를
통해서만 해결되어야만 할 것이었다. 따라서 누가가 기록한 이
복음 기사가 이단 사상
들의 커다란 바람막이가 되고, 또 때로는 중요한 공격 무기가
되었을 것이다(엡
6:11-18). 그리고 데오빌로는 누가복음으로 인해 자신의 믿음을 반석 위에 올려 놓고
복음의 확실함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Liefeld).
알게 하려
함이로라(*
, 에피그노스) - 이 단어는'...에 부가하여',
'...에 더하여'의 뜻을 가진 전치사
'에피'(* )와 '알려고 배우다', '알게 되다'
라는
뜻을 가진
'기노스코'(*
)의 합성어
'에피기노스코'(*
)
) 의 부정 과거 형태로 사용되었다. 즉, '...을 철저히 알다',
'정확하게 알다'라는 뜻이 된다. 누가는 데오빌로가 이미
알고 있는 것에 좀 더 분명
하고 확실한 지식과 정보를 더하려고 하였다. 기존의 지식에 완벽함을 더하는 것은 피
교육자의
입장에서, 이제는 교육자의 위치로, 또는 증인의 위치로 이끌어올리는 계기
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1:5
유대 왕 헤롯 때에 - 헤롯은 유대인의 왕으로 보통 대헤롯(Herod
the Great)이라
하는데, 본문에서 '헤롯 때에'라 함은 곧 '그의 통치 기간 중에' 라는 의미가
된다.
그는 B.C. 37년 로마 제국 원로 회의를 세금 상납 및 치안유지 등의 약속으로써 매수
하고, 특히 당시
실권자인 옥타비우스(Octavius)와 안토니오(M.Antonius)를 등에 업음
으로써 유대 곧 팔레스틴
전체(4:44;6:17;7:17;23:5;행 19:37)의 분봉왕(分封王)이
되어 B.C. 4년에 그가
죽기까지 유대의 실질적인 통치가 노릇을 하였다. 그는 에서의
후손인 이두메(Idumean) 태생 이방인으로서 지략과 용기가
탁월한 정치가였고 특히 유
대 백성에 대한 유화 정책상 유대교의 후원자로 자처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위시한 수많은 공공 건물을 건립케함으로써 유더 백성들의 마음을 유화시
키고자 노력했다. 그러한 반면에 그는 정권 유지를 위해 정적(政敵)을
제거하고 심지
어 자기 자식과 아내 및 장모, 처남, 삼촌 등을 죽일 정도로 잔인했다. 그런데도 그는
정치적 술수가 워낙
뛰어나, 로마의 비호 아래 대제사장의 임명과 폐위에까지 간여(干
與)하여 그 타락함이 극에 달했다(마 2:1 주석 참조). 실로 이 시기는
종교적으로 타
락한 시기였고 정치, 사회적으로 비극적이며 희망이 없는 시대였다. 이제 이러한 비극
과 어두움을 버경으로,
누가는 새로운 희망의 빛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특별히 그는
말라기 선지가(B.C. 435-425 추정) 이후
400년동안 하나님의 계시의 중단으로 인한 영
적 암흑기를 마감하는 위대한 여명기(黎明期)가 시작됨을 알리려
한다.
아비야 반열 (the priestly division
of Abijah) - 여기서 먼저
'반열'(*
//
, 에페메리아)이란 '...동안', '때마다', '만큼' 등의 뜻을 지닌 전
치사
'에피'(* )와 '날', '하루' 등의 뜻인
'헤메라'(* )의 합성어로서
성전의
매일 봉사를 위한 제사장의 직무 순서를 뜻하는 말이다. 이는 아론 자손 곧 제
사장 가문에 기초하여 24반열로 구분하는데 각 반열은 순서에
따라 1주일씩 성전에서
봉사하였다. 한편 24반열 중 아비야 반열은 8번째 순서였다(대상 24:10).
이에 관한
더 자세한 내용은 8절 주석을 참조하라.
사가랴요 엘리사벱이라 - 사가랴는 히브리
이름으로 보통 스가랴(Zechariah)라고
하며 유대인 사회에서 흔한 이름이다(왕하 14:29). 그
이름은 '여호와께서 기억하신
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한편 엘리사벱(Elizabeth)은 '내 하나님은
맹세의 하나님
이시다'라는 뜻을 가고며 '엘리세바'와 동일 이름으로 여겨진다(출 6:23). 이들 부부
는 모두
제사장 가문의 출신으로, 제사장 가문끼리 결혼을 한다는 것은 이중적인 영예
로 여겨졌다(Geldenhuys). 본래 율법은 제사장이
이스라엘 태생의 처녀에게 결혼해야
한다고 못박고 있다(레 21:14). 그러나 반드시 제사장 가문에서 아내를
취해야만 한
다는 조항은 없다. 그럼에도 사가랴가 대제사장 가문(아론의 자손)의 처녀와 결혼했다
는 것은 상당히
영광스럽고도 특기할 만한 일이라 할 것이다. 한편 '엘키사벱'이 이스
라엘 최초의 대제사장인 아론의 아내 이름과 같다는 사실은(출
6:23) 매우 의미있는
일치로 본다.
=====1:6
이 두 사람이...의인이니 - 이 말은 원래 구약적 개념으로서 율법적으로 온전한
자
에게 붙여진 관용구였다. 여기서
'의인'(*
, 디카이오이)이란 '옳은',
'똑바른', '정직한' 등의 뜻을 지닌
'디카이오스'(*
)의 변화형으로서,
특별히 이 말이 법률적인 용어로 사용될 때에는 정당한 판단에 따른 긍정적인 시인(是
認) 내지는
평가를 받은 자들 의미하기도 한다. 더욱이 이 단어가 '하나님앞에'(in
the sight of God,
NIV)라는 병행 문구와 같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욱 확
실시된다. 즉 이는 '하나님이 보실 때에 바른 자들',
'하나님의 명령을 온전히 지키는
자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하나님의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자들' 등의 의미를
지닌다. 이에 대해 마샬(Marshall)은 '의인'이란 말이 '순전히 윤리적인 측면의 인격
에 대한 평가이기 보다
종교적인 측면에서의 인격을 가리킨다'고 했다. 사실 인간이
그 인격으로는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나설수 없다(롬
3:10). 그런 까닭에 성경적인 의
미의 '의'는 믿음을 가진 죄인에게서 그 죄와 죄의 대가를 제거하고 의로우신 예수 그
리스도의
의를 덧입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디카이오스'의 의
미를 결정지어 주는 객관적인 기준이 되시며 그 말의 의미를 변치
않게 하시는 분이시
다. 즉, 하나님은 모든 의의 기준이시다(Wuest). 진정 인간은 '율법'으로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될 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의 대속의 '믿음'만으로 의인이 될 수있다(롬
3:20-24). 그런 점에서 사가랴와 엘리사벱은 본성적이고 본질적으로 의인이기 보다 바
로 '하나님 앞에'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긍정적인 평가로 인해서' 의인임을 간과해서
는 안될 것이다. 한편 이 '의인'이란 말은 선민 이스라엘에서 가장 탁월한 칭찬의
말
로 간주되었었는데 (창 6:9;7:1;18:23-28;겔 18:5-9)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한 경건
한 인물에게만
붙여졌다. 이것은 유대인의 이상형이었다. 예를 들자면 구약에서는 아
브라함, 이삭, 야곱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고 신약 성경에
와서는 '율법의 의로는 흠
이 없는 자로라'(빌 3:6)고 자랑했던 바울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구약 율법 시대의 의인관(義人觀)관에 따른 표현이었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
단죄하는 복음관에서의 평가로 볼
수는 없다. 한편 이러한 구약적 의인관에서 볼 때
특히 누가복음 내에서는 사가랴와 엘리사벱, 마리아와
요셉 부부들 및 시므온과 안나
등이 하나님께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또 그분으로부터 특별한 계시를 받을 수 있는 의
롭고
경건한 사람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Robertson). 이러한 부모의 경건한 삶이 그리
스도의 오실 길을 예비하는 세례 요한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었겠는가?
계명과
규례(*
, 타이
스 엔톨라이스 카이 디카이오마신) - 여기서 '계명'을 나타내는'엔톨라이스'는'명령',
'교훈' 등의 뜻을 지닌
'엔톨레'(* )의
복수로서 하나님께서 친히 당부하
시고 지시하신 권위에 찬 명령들을 의미한다 개역 성경에서는 이 '엔톨라이스'를 주로
'계명'이란 말로 번역하고 있다(롬 7:8-13). 그리고 '규례'를 가리키는 '디카이오마
신'은
'옳게 여기다', '정당화하다', '공의를 행하다'는 뜻인
'디카이오오'(*
)
)에서 유래한 말로서 '하나님께서 정당히 여기시는 것들', '하나님께
서 만드시고 옳게 여기시는 것들'이란 의미를 지닌다. 결국
위의 '계명'과 '규례'는
인위적인 요소가 배제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거룩하고 온전한 명령과 생활
규범들
을 가리킨다고 볼수 있다. 그런데 혹자(Bengel, Calvin)는 이 양자를 분리하여 '계명'
은 궁극적으로 인간에게
심판의 근거가 되는 종교, 도덕적인 법령(法令)을, '규례'는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는 의식적이고 제의적인 예법(禮法)을 각각
지칭하는 것으로 보
고 있다. 이에 비해 또다른 학자들(Bruce, Lenski)은 이 양자를 대조시키지 않고
히브
리인들이 즐겨쓰는 셈어적인 중복 기법으로 보아 두 개념을 동일하게 이해하고 있다.
즉 여호와의 법령을 강조하기 위해
중복적으로 두 단어를 사용한 것일 뿐 그 의미하는
바는 동일하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이 후자의 견해를 취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흠이 없이 행하더라 - 여기서 '흠이
없이(*
, 아멤프토이)란 '비난
받거나 책망받을 것이 없이'라는 뜻으로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를 지켰다는 사실을
수식하고
있다. 실로 당시 사람들은 아무도 사가랴와 엘리사벱의 종교. 도덕적인 삶을
책망하거나 비난할 수 없을 만큼 그들 두 사람은 경건히 생활했던
것이다. 결국 그 두
사람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서 하나님께 인정받는 동시에 사람
들에게 인정받는
참된 신앙인들이었다.
=====1:7
엘리사벱이...무자(無子)하고 - 유대인들은 자식을 하나님의 축복과
그 기업으로
믿고있어 자식이 없는 것을 대단한 수치와, 하나님께 대한 죄의 형벌로
알았다(시
127:3). 또한 유대 랍비들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파문당할 수있는 7가지 유형을 기
록한 목록 서두에서
"유대인이면서 아내가 없고, 또 아내가 있으면서도 자식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무자한 것은 합법적인 이혼 사유가
되었다
(Barclay). 더구나 두 부부는 이미 나이가 많아 수태(受胎)의 가능성은 더욱 희박했
다. 한편
본문에 언급된 바 '수태를 못하므로'라는 표현 가운데 그 이유를 밝히고 있
는
'카도티'(* )란말은
신약 성경 중 본서 저자인 누가만 주로 사용하는
단어이다(행 2:45;4:35). 이 '카도티'는 대략
'...때문에', '...만큼', '왜냐하면' 등
의 뜻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후기 헬라어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다. 어쨌든 이러한
슬픔
과 절망적인 상황에서 더욱 빛나 보이는 것은 두 노부부의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자세
이다. 이들은 결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주어진 자신들의 위치에서 묵묵히 그 역할
을 감당해 갔다. 결국 이 경건한 노부부는 구약의 예와
같이(창17:16-17-사라;삼상
1:5-11-한나)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된다. 더욱이 그들은 자신들이 얻은 아들이
메시
야의 오실 길을 예비하는 선구자로 선택되는 영광까지 얻음으로써 지금까지 그 어떤
부모도 얻지 못한 큰
은혜를 덧입게 되었던 것이다.
=====1:8
마침...할새(*
, 에게네토 데) - 이 말은 이야기를 상호 연결시
켜 주며 무엇을 소개시켜 주는 문구로서 히브리어의
'와에히'(* , '때마침 그
것이 일어났나')와
유사한 표현이다. 특히 이 문구는 타복음서보다 본서에서 이야기들
을 자연스럽게 연결시킬 때 흔히 사용된다. 그리고
이 문구와 비슷한
'기노마이'
(* )
역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쓰여진 것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이
본서에 사용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누가가 복음서를 기술할 때 자신의
문학적인 역량
에 덧붙여 자신이 참고한 자료들을 하나하나 편집해갔음을 알 수 있다(Gaston).
반열(班列)의 차례대로 - 유대의 제사장들은 전체적으로 2만명 정도가 되고, 이들
은 종가(宗家)에 따라
24반열(division, 각 반열에 천명 정도)로 나눠진다. 이러한 제
도는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건국자라 할 수 있는 다윗 때에 정비된
것으로, 다윗은 초
대 대제사장인 아론의 두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의 후손들을 24가족(반열)으로 나누
고 그각
가족으로 하여금 1년에 1주씩 2차로 성전봉사를 하게 했다 (대상 23, 24장 ;
대하 8장). 그런데 이러한 제도는 바벧론
포로 당시에 일시 끊어져 포로 귀환하면서 4
반열만(하김, 예수아, 임멜, 바스훌) 귀국하게 된다(스 2:36-39). 그 후,
이 반열은
에스라의 주도하에 가능한한 본래의 모습대로 재조직하여 24반열의 이름만이라도 유지
하게 되었다. 사가랴는 그
중에 아비야의 반열로 여덟번째 반열에 속하게 된다. 그러
므로 그 근원을 따져보면 사가랴가 속한 아비야 반열은 다윗 당시의
그것과는 전혀 다
른것임을 알 수 있다.
제사장의 직무를...행할새 - 각 제사장 가족들은 그 해(年)에
해당되는 기간 동안
성전 봉사의 책무를 맡게 된다. 즉 제사장들 중 그해에 봉사할 임무를 맡게 되는 지사
장 가족은
일주일 동안씩(8일간;안식일에서 안식일까지) 일년에 두 번 성전을 섬기게
된다(J. Jeremias). 그러나 다음과 같은
유월절, 오순절,장막절 등 절기 때에는 제사
장들 모두가 함께 참여했다. 그러나 한 제사장 개인이 상번제(the daily
sacrifice)를
위해 분향단에 향을 피운다는 것은 극히 희박한 경우이며 일생에 단 한번 주어지는 것
조차 큰 행운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왜냐하면 당시 제사장의 수효(일설에는 약 2만명
정도였다고 함)가 상당히 많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혹자(Farrar)에 따르면 한 제사장
이 평생에 두 차례에 걸쳐 성전 봉사를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런 관점에서
그 많은
제사장들 가운데 제비가 자신에게 떨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제사장에게 있어 이 일은 자신의 생애에 최고의 영광이요 은총이 아닐 수 없었다.
한편 본문에는 직무를 맡은 제사장 사가랴가 '하나님
앞에서'(*
, 에난티 투 데우) 그 임무를 수행했다고 표현되었는데,
이는 성전이 곧 하나
님의 임재 처소로 이해되었던 히브리인들의 전통적 사상에 의한 묘사로 보아야 할 것
이다(합
2:20).
=====1:9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 이 말은 내용상 원래 8절에 부속되고 있으나
개역 성경의
읽기대로 '제비를 뽑아...분향하고'라는 표현과 연결시켜 생각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따라서'제사장의 전례' 곧 '제사장들이 전통적으로 수행해 오던
관습(* , 에
도스)'이란 8, 9절에 명시된
내용들을 모두 지칭하는 것이라 볼수 있다.
제비를
뽑아(* , 엘라케) - 제사장들의 24반열 중
각 반열의 차례가 돌아
오면 그 해당 반열의 제사장들은 제비를 뽑아 각각 수행해야 할 임무를 맡게 되었다.
한편 이
제비뽑기는 히브리어로 '고랄'( )이라 하는데,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특수한 표시를 한 물건을 땅에 던지거나 용기(容器)에서 뽑는 제비뽑기가 매우 유행하
였다. 물론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이
제비뽑기는 미신적 의미에서 이뤼진 것이라기
보다 항상 '여호와 앞에서' 제비를 뽑는다는 신전 의식(Coram
Deo)하에서 이뤼진 것이
다(신 18:10-12;수 18:6, 8). 구약에서는 여러 경우의 제비뽑기 사례가
등장하는데,
새로운 땅 분배시(민 26:55;수 14:2), 죄인을 찾아낼 때(수 7:14;삼상 14:42),첫번째
왕
선택시 (삼상 10:20,21), 성도의 일을 다스리는 자나 노래부르는 자 또는 문지기의
일을 맡을 자 등을 선택할 때 제비뽑기를
하였다. 그리고 신약에서도 제비뽑는 경우를
볼수 있는데 예수의 11제자가 맛디아를 가룟 유다대신에 제자로 선출할 때 등에서
나
타난다(행 1:26). 여기서 보듯이 이 제비뽑기는 모든 의사결정의 유일한 방법이 아니
라,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가
시행되던 시기,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가
필요했던 경우에 한해서만 시행되어졌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인간들에게 알리
시기 위해 제비뽑기를 부분적으로 허용하셨으며, 그 일의 배후에는 당신이 친히 섭리
하셨으나(잠 16:33)
특별 계시인 성경이 완성되고 성령의 적극적인 역사가 시행되는
오늘날에는 이 제비뽑기가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여하튼 사가랴 당시에
제사장들은 제비뽑기를 통하여 대략 아침 일찍 제단과 불을 준비하고,
제물이나 성소
의 기구들을 예비하며, 또 준비된 기구들로 분향하거나 제물을 드려 제사하는 일 등을
각각
분담받았다.
주의 성소에 들어가 - 여기서
'성소'(* ,나오스)란 성소(Holy Place)와
지
성소(the Holy of Holies)를 합한 성전 내부를 가리키는 말로서 성전 전체를 가리키는
'히에론'(* )과 구별된다. 결국
사가랴는 이때 향단에 향을 지피기 위해 성
전의 내부에 해당하는 성소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한편 이와
같이 성소에
들어가 분향의 임무를 맡게되는 제사장은 출 28:1-43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이 세마포
및
에봇으로 된 성의(聖衣)를 착용하고 홀로 성소에 들어가 여호와께 봉사하게 된다.
분향하고 -
분향 곧 향을 불사르는 일은(출 30:7, 8) 제사장의 고유 임무로서, 이
때에 드려지는 향은 모든 백성들의 마음의
간구 곧 기도를 상징한다(시 141:2;계
8:3). 제사장이 이 분향의 절차를 밟는 동안
백성들은 바깥에서 엎드린 채 그 향이 여
호와 하나님께 흡향(吸香)되도록 온전히 기도하였다(10절). 바로 이같이 하나님께 온
마음이 열려있을 때 사가랴는 천사로부터 요한의 수태 고지(受胎告)를 받게된다.
=====1:10
모든 백성은...기도하더니 - 이 구절의 '모든 백성'에 대해 NIV는
'운집한 경배자
들'(all the assembled worshipers)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 부분의
헬라어 원문은
'라오스'(* ,
'백성')이다. 따라서 정확한 의미 전달이 안 되고 있다. 예배자
들만이 성소 밖에서 기도한 것이 아니라 모든 백성들이 기도한
것이다. 백성들은 기도
하기 위해서 하루에 세번씩 성전뜰이나 성소 바깥뜰에서 모였다. 이들의 첫째와 섯째
모임
시간은 아침과 저녁 분향 시간과 일치하는 시간이었다(Geldenhuys). 한편 이 백
성들 가운데 연로한
시므온(2:25)과 여선지자 안나(2:36)도 함께 있었다고 한다
(Pulpit
Commentary). 이 곳에 모인 백성들은 뒤에 21, 22절에 기록된 백성들과
일치
한다(Liefeld).
=====1:11
주의 사자 - 사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앙겔로스'(*
)는 '사자', '천
사',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 번역된다. 성경에는 곳에
따라 '사자'(12:9;마
2:13), 또는 '천사'(마 24:36;막 12:25;롬 8:38;고전 4:9;1:13, 14)
등으로 번역되었
다. 이 곳 외에도 누가복음 전체를 통해서 '천사'에 관련된 기사는 매우 많이
등장한
다(1:26;2:9, 13, 21;12:8;15:10;16:22;22:43;24:4, 23). 누가가 기록한 사도행전에서
도
이러한 특징들이 눈에 띄게 나타난다(행 10:4, 7;12:8-10). 주의 사자가 사가랴에
게 나타난 이 사건은 결국 역사의
분수령이 되는 사건의 시작이 된다. 하나님께서 메
시야를 보내실 구체적 일을 시작하신 것이다.
향단
우편 - 향단과 번제단은 다르다. 번제단은 성소 밖에 위치한다. 매일의 분향
은 성막뜰의 번제단 위에서, 제사는 성소안에서
드려졌다. 분향을 드리는 제사장은 제
사를 드린다는 표시로 번제단에서 향단으로 불을 가져가 향을
사른다(Alford). 주의
사자는 향단과 떡상(진설병을 놓는 상) 사이에 나타났다. 성소를 들어가면
왼쪽에 떡
상, 오른쪽에 등대(촛대) 그리고 정면에 분향단이 있고, 그뒤에 휘장이 성소와 지성소
를 구분하게 된다(출
30:1-10;40:2-27, 아래 그림 참조).
=====1:12
놀라며 무서워하니 - '놀라며'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타라크데'(*
)
는 원형인
'타라쏘'(*
)의 수동태 과거형이다. 그 뜻은 '요동하다', '내
적 동요를 일으키다', '마음의 평정을 없애버리다'이다(마
2:3;막 6:50;요 11:33).
'무서워하니'에 해당하는
'포보스'(* )는 '두려움', '놀람',
'경악', '공포
를 일으키는 것'이라는 뜻을 갖는다. 이로 미루어 사가랴는 천사의 출현 때문에 마음
의 평정을
잃을 정도로 놀랐음을 알 수있다. 이는, 하나님의 사자를 만난 많은 사람들
의 공통된 현상이다(삿
6:22;13:22).
=====1:13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 간구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에시스'(*
)
는 일반적인 기도를 뜻하는 단어
'프로슈케'(*
)와 비교해 특별한 기
도를 뜻한다. 따라서 사가랴는 평소와는 다른 특별한 기도를 드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들린지라'에 해당하는 부분을 KJV는 현재형으로, NIV는 현재완료형으로
각각 표현하고 있다. 헬라어 원문
'에이세쿠스데'(*
)는 제1부정
과거 직설법의 형태로 사용되었다. 이는 일종의 무시간적 부정과거의 형태로, 과거에
도 들렸고
지금도 들린다는 의미이다(Robertson). 따라서 사가랴의 기도는 일회적이
아니고 지속적 행위로 나타나고 있다.
한편 제사장 사가랴가 성소안에서 무슨 기도를
드렸는지를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천사의 응답은 그 내용을 추정
가능하게 한다. 즉
그의 기도 내용은 자식이 없는 자신을 돌보실 것과 자신의 민족을 구원하실
메시아의
도래에 관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천사는 사가랴의 간구 이상으로 응답하신다. 즉
아들을 주시고, 메사아도 곧 오실
것인데, 그의 아들이 메시아의 오실 길을 예비하리
라는 것이다. 이는 분명히 사가랴에게 임한 축복으로서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약 5:16)는 사실을 절감케 한다.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 아들의 이름까지 지어줌으로써
확신을 더해준다.
요한(*
, 요안넨)은 히브리어 '예호하난'(* )과
같은 말로 '하나님께
서는 자비하시다'라는 뜻이다. 이 이름은
'요난'(*
, 대상 3:24),
'요아
네스'(*
, 대하 28:12)등의 변형으로 히브리인들이 좋아하는 이름 중 하
나이다. 성경적인 사고 방식에 의하면 이름이란 단순한 호칭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본
성(本性)과 인격까지 나타낸다. 다시말해 이름은 인격의 본질이자 내적 존재의 표현으
로 사용되었다. 한편
작명법(作名法)은 바벧론 유수기(幽囚期)를 전후허서 뚜렷한 차
이점이 나타났다. 초기에는 아이의 타고난 특성에 따라 특징있는
이름을 지어주었으나
B.C. 5세기 이후부터 아이의 이름을 친척이나 특히 조부의 이름을 따르는 관습이 생겼
다. 이러한 관습에 의해
과거 인물들의 이름이 다시 등장하고, 페르시아, 그리이스,
로마 사람들의 이름도 따서 쓰게
되었다.
=====1:14
너도 기뻐하고...기뻐하리니 - 이 부분은 '기쁨'을 뜻하는 헬라어
'카라'(*
)와 '즐거워하다'로 번역된
'아갈리아시스'(*
)가 연이어서 나
오는 문장이다. '아갈리아시스'는 '환희' 또는 '너무 기뻐 주체할 수 없는 기쁨', '기
뻐서 뛰고
소리침'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즉 기쁨의 최고 상태를 가리킨다. 요한의
탄생은 사가랴의 개인적인 기쁨만이 아니라 민족
전체의 기쁨이 될 것을 암시한다.
=====1:15
주 앞에 큰 자 - '큰'에 해당하는
'메가스'(* )는 '위대한',
'덕스러운',
'권위있는'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마 20:25;딤 2:13). 이 말을 32절의 예수께 대해
큰 자라고
표현한 것과 비교해 보면, 32절의 '큰 자' 앞에는 '주 앞에'라는 수식어가
없음을 알수 있다. 결국 요한은 예수 때문에 큰
자가 되는 것임을 나타낸다.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 이 말을 통해 우리는 나실인에 대한 계율을
기
억할 수 있다(민 6:3, 4). 요한은 평생 나실인으로 살아가며 자신의 메시지와 일치하
는 절제된 생활을 한다.
소주에 해당하는
'시케라'(* )는 강한
, 독주 등
을 말하며, 신약 성경에서는 본 구절에서만 사용되고 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 이
부분은 앞부분의 포도주와 소주라는 말과 어울려 좋은
대조를 이루는데 특별히 엡 5:18을 통해서 술취함과 성령의 충만함에 대한
비교를 좀
더 확연히 알 수 있다.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누가의 성령 강조이다. 누가
복음에서
성령이란 단어는 12회 사용되는데, 그 중 본장에서 4회(15, 35, 41, 67절)가
사용되었다. 그리고 누가의 저작 사도행전에서는
성령이란 단어를 무려 41회나 사용하
고 있다. 메시야의 오심에 있어 성령의 활동은 그 핵심적 위치를 차지한다. 또 한
가
지 놀라운 것은, 아직 태어나지 아니한 태아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는 사실이다.
=====1:16
이스라엘 자손을...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 선지자의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가 하
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었다(렘
3:7, 10;겔
3:19;단 9:13). 요한의 사역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회개
의 사역이었다(Alford). 요한은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를 연결하는 마지막 선지자이
다. 요한은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주께 돌아오게 하여 그의 뒤에 오실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한다. 그러므로 그는 일찍이 요한보다 더
큰 선지자가 없었다는 칭송을 듣게
된다. 요한은 제사장 가문의 출신이었지만 선지자의 직무를 행하였다(눅 3:3)
=====1:17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 '심령'을 나타내는
'프뉴마'(*
)는 '어떤
사람의 영혼을 지배하는 성질 또는 영향력, 어떤 능력이나 애정, 감정, 욕구 등의 근
원' 등을
나타낸다. 그리고 '능력'을 나타내는
'뒤나메이'(*
)는 '물려
받은 힘', 또는 '사람이나 사물에 내재된 물리적 혹은 정신적 힘'을 의미한다. 더러는
'기적을 행할 때와
같은 놀라운 권능'을 의미할 때도 있다. 즉, 요한은 엘리야가 지녔
던 기질이나 영향력, 그리고 엘리야가 하나님께 받은 능력같은 것을
가지고 사역을 할
것이라는 말이다. 유대인들 가운데는 메시야가 오시기전에 선지자 엘리야가 먼저 와서
주의 길을 예비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사 40:1;말 3:1-5;4:5, 6). 이것은 말라기
선지자때부터 요한이 탄생할 때까지
약 400년 동안의 유대인들의 소망이기도 했다. 요
한은 전생애가 엘리야와 너무도 비슷했다. 삶과 사역을 통해 그 유사성은 더욱 확연히
들어난다. 광야에서의 삶(털옷과 가죽띠를 두르고)이나 지위고하(地位高河)를 막론하
고 회개를 선포한 사실(엘리야는 아합과
이세벧에게 회개를 요청하고 탄압을 당했으며
요한은 헤롯과 헤로디아에게서 박해를 받는다) 등이 그러하다. 그렇다고 엘리야와
요
한이 동일 인물이라는 것은 아니며 엘리야가 요한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이야기는 더더
욱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받은 능력들과 갖은
사역의 성격과 내용에 있어서 바로
엘리야를 지칭하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예수님도 뒤에 그를
엘리야로 말씀하신다(마
17:12;막 9:13).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돌아오게 하고 - 이
구절은 말 4:6에서 인용한 것으로
난해 구절에 속한다. 일단에서는 이 부분을 로마의 식민지 통치 하에서 파괴된
이스라
엘 가정의 회복을 알리는 이야기로 해석하는데 그 당시에는 로마와 결탁한 부모, 열심
당(Zealots)에 가담한 아들,
바리새파 형과 사두개파 아우 등 가정은 4분5열이 되어
있었으나 이 분열이 요한을 통해서 회복되리라는
것이다(pulpit Commentary). 한편 매
튜 헨리(Mattew Henry)는 유대인의 믿음을 이방인에게로 돌이켜 이방인들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을 극복하게 할 것이라고 해석한다. 아무튼 요한은 분열과 불신, 배타와 독
선 등을 끝내고 화합과 믿음,
사랑과 평화를 전해 줄 것이다.
주를 위하여...예비하리라 - '백성'이라는 헬라어
'라오스'(* )는 공관 복
음서에 49회나
사용되는데 그 중 누가복음에서 35회나 사용되고 있다. 누가는 이 단어
를 '무리', '군중'을 나타내는
'오클로스'(* )와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는데
(마 21:26) 이 '백성'은 단순히 무리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를 위하여 세운
구
별된 백성, 즉 이제는 유대인 뿐만 아니라 복음으로 하나가 된 이방인들까지도 포함하
는 말이다(Liefeld). 여기서 요한의
사역의 의미가 분명해진다. 요한의 사역은 주를
위하여 예비하는 것으로 특징지워진다.
=====1:18
어떻게 알리요...나이 많으니이다 - '어떻게'에 해당하는 '카타
티'(*
)는 '무엇에 의하여'라는 뜻이다(in what way, MLB).
사가랴는 증거를 요구하
며 의심의 이유를 제시했다. 20절과 연결하여 보면, 이것은 사가랴의 겸손이 아니고
불신의 소치임을 알 수가 있다. 한편 마리아의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34절)라는
질문은(Haw shall
this be, RSV) 45절로 미루어 천사의 메시지를 믿고 있음을 나타낸
다. 즉 사가랴의 질문은 의심의 질문이고, 마리아의
질문은 성취 방법에 대한 질문이
다. '늙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레스뷔테스'(*
)는 나이많은 사람
을 지칭하는 말이다. 민 4:3;8:24, 25에 보면 레위인들은 50세가 넘으면 현직에서 물
러나야
된다고 하였다. 물론 사가랴가 아직 현직에 있는 것으로 보아 물러날 때가 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현직에서 물러날 정도로
늦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자식
이 없다는 것에 대한 사가랴의 초조함이나 불신은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1:19
천사가...가브리엘이라 - '가브리엘'이란 이름은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능
력'이라는 뜻이다. 성경상에서 천사의 이름은 '가브리엘'(단 8:16;9:21)과
'미가엘'
(단 10:13, 21;12:1; 유 1:9; 12:7) 둘 만이 등장한다. 가브리엘은 사람들에게 하나님
의 계시와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천사이며 미가엘은 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사
단의 세력과 싸워 승리하는 하나님의 용사로 나타난다. 그리고
구약 외경 에녹서(Book
of Enoch)에는 4명의 천사장 이름이 나온다. 그 이름은
미가엘(Michael), 라파엘
(Raphael), 우리엘(Uriel), 가브리엘(Gabriel) 등이다. 한편 '하나님
앞에 섰는'이라
는 말에서는 권위와 위엄(威嚴)이 느껴진다. 물론 하나님 앞에 있기 때문에 권위와 위
엄이 있긴 있지만,
오히려 이곳에서는 조심스럽고 겸손한 표현으로 생각된다. '내가
비록 천사장이지만, 결국 하나님 앞에 있는 자이고,
단순히 하나님의 명령만을 받아
수행하는 자이다. 그리고 지금 내가 너와 함께 만나고 있지만, 이 순간에도 나는
하나
님의 심부름꾼으로 그 앞에 서있는 자이다.'
좋은
소식(*
, 유앙겔리사스다이) - 이 단어는 '좋은
소식을 전하다'라는 헬라어 동사
'유앙겔리조마이(*
)에서 왔다. '유'(* )는 '좋은'(good)을 뜻하며
'앙겔로'(*
)는 '메시지를 전하다', '선포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래서 이 합성어 '복음의
선포'라는
뜻으로 번역된다(Wuest). 그리고 '유앙겔리조마이'는 공관복음에서 모두11
회가 사용되었는데 그
중 누가복음에서 10회나 사용되었다(본절;2:10;3:18;4:18,
43;7:22;8:1;9:6;16:16;20:1). 따라서 누가에게 이 단어는 특별한 의미를 지님을 알
수
있다(Liefeld). 여기서 8절에 나타난 사가랴의 불신앙의 질문에 천사 가브리엘이
즉각적으로 대답하고 있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헬라어 성경의 이 부분의 문법적 구조
에 따르면, 천사의 대답은 사가랴의 불신의 질문에 뒤이어 거의 동시적으로
이루어짐
으로써, 사가랴의 의심에 찬 말문을 막고 불신을 조기에 불식시키고자 하는 뜻을 나타
낸다.
=====1:20
보라 이 일의 되는 날까지...내 말이 이루리라 - '보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이두
'(* )는 주의를 집중시키는데 사용하는
불변사이다. 이 단어는 말을 강조할 때
나 좀 더 깊이 생각하기를 촉구할 때 사용하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는 가브리엘
천사
가 이 팔에 얼마나 강한 강조점을 두고 있나를 보게 된다. 의심의 결과는 벙어리가 되
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가랴가 벙어리가 된
것이 꼭 형벌이었다고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사가랴가 표적을 원했기 때문에 그 표적에 대한 예시로 벙어리
가
되었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Alford). 또한 62절과 비교해 보면 사가랴는 벙어
리뿐만이 아니라 귀머거리까지 된 것으로 추측할
수가 있다. 하지만 그의 벙어리됨은
오히려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될 것이다. 말 못하는 어려움이 있지만 그는 오랜
침묵
을 통하여 의심의 질문을 던지던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다(67-80절). 그리고 이
구절에서
살펴보면 천사의 말은 이루어지도록 예정된 것으로 보인다. '이 일의 되는
날까지'라는 말로 미루어보아, 다른 어떤 사람이
거부한다 해도 그 일은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다.
=====1:21
백성들이...기이히 여기더니 - 제사장은 백성들의 대표가 되어 성소
안에 들어가
분향을 하게 된다. 그런데 성소 안에서 제사장이 오래 지체하게 되면 백성들은 제사장
이 어떠한 잘못으로 인해
하나님의 징벌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사장들이 성
소 안에서 오랫동안 머물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고
한다(Alford). 탈무드(Talmud)에도
제사장이 성소 안에서는 잠시 동안만 머물렀다고 기록되어 있다(Lenski).
따라서 제사
장들은 가능한한 성소에서 속히 나와 백성들을 축복하고 해산시킨다. 이 구절에서 보
면, 분향이 행해질 때
밖에서 기도하던(10절) 백성들은 초조해하고 긴장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아마 그들은 사가랴가 성소 안에서 어떤
과오로 인해 죽지 않았나 걱정했을
것이다(레 10:1, 2)
=====1:22
저희에게 말을 못하니 - 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는 백성들에게
축복하는 것이
관례였다(민 6:24-26). 그러나 사가랴가 성소를 나오면서 시종 일관 침묵을 지키자 백
성들은 성소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상(異像) - 헬라어에서 사용되는 '이상' 또는 '환상'이라는 말은
모두 3개가 된
다. '자신을 나타내 보이는 행위'에 해당하는
'와타시아'(*
), '보여지
는 것'을 나타내는
'호라마'(* ), '봄', '외관',
'자태'에 해당하는
'호라시
스'(*
)등이다. 이구절에서는 '와타시스'가 사용되었다. 성경에서 사용된
'이상'이라는 말은 대개 정상적인 시각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본 것, 꿈이나 황홀경
중에 본 것, 혹은 선지자에게 계시된 것 등을 의미한다.
형용(形容)으로 - 사가랴는 말을 못할 뿐만 아니라 듣지도 못하기에 손짓, 몸짓으
로 그의 뜻을 전달하였다. 사가랴의 말 못함은
백성들에게 성소 안에서 그가 지체한
원인에 대한 충한 답변이 되었고 또 그가 이상을 보았다는 증거가
되었다.
=====1:23
직무(*
, 레이투르기아스) - 이 말은 원래 자신의 '공적인
사무'를 뜻하며 자신의 희생이나 비용으로 수행되는 '공적인
봉사'(성스러운 봉사)를
의미한다(고후 9:12;빌 2:17, 30;히 8:6;9:21). 특히 여기서는 제사장적
사역의 의미
를 나타낸다. 사가랴는 듣고 말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직무를 끝까지 수행한
다. 사가랴의
희생적인 직무 수행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
다.
=====1:24
엘리사벱이...숨어 있으며 - 엘리사벱이 왜 숨었는가에 관해서는 본문에 밝혀져
있
지 않다. 자신이 나이들어 임신한 것을 부끄러워해서 숨은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도
있으나 삿 13:13,
14의 내용처럼, 임신한 자신을 부정한 생활에서 구별하고 이와 아울
러 태어날 아이의 양육 문제에 관해 경건한 마음으로 준비하기 위함이었을
것으로 봄
이 더 타당할 듯하다.
=====1:25
주께서 나를 돌아보시는 날에 - 이 구절에는 깊은 감사의 뜻이 담겨있다. '내
부끄
러움'이란 유대인 제사장 가문에서 아이가 없다는 세인(世人)들에 대한 부끄러움이다
(창 30:23;삼상
1:6-10). 여성의 불임은 유대 사회에서는 치명적인 약점이요 수치였으
며 심지어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까지 여겨졌다. 그러나 엘리사벱은
오랜 세월의
고통
가운데서 큰 결실을 얻게 되었으며 그녀의 기쁨은 하늘에 닿아 있었다.
부끄러움(*
, 오네이도스) - 이 말은 '비난', '불명예', '모욕'이라
는 뜻을 갖는다. 신약성경 중에는 본절에서만 사용된다. 이
'부끄러움'은 단순한 수치
심 정도가 아니라 깊은 고뇌와 근심 속으로 빠뜨리는 치욕을 뜻한다.
없게
하시려고(*
, 아펠레인) - 이 단어는 원형이
'아파이레오'(*
)로서 '치워버리다', '가져가다', '베어버리다'라는 뜻이다.
=====1:26
천사 가브리엘이...동네에 가서 - 타복음서와는 달리 누가는
예수의 탄생과 유년
시절을 소개하기에 앞서 세례 요한의 출생과 유년시절을 병행하며 소개하는 치밀감을
보여준다. 이는 그가 예수와 관련된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폈음을 나타
낸다. 이제 본절로 부터는 예수의 탄생에 얽힌
이야기가 전개되기 시작한다.
갈릴리 나사렛 - 나사렛(Nazareth)이라는 동네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먼저 갈릴리
지방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을 받아볼 데오빌로나 그 외 이방 사람들은 작은 나라
의 작은
마을인 나사렛이 어느 지방의 어떤 곳인지 잘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나사렛
은 앞에 언급된 예루살렘과 비교가 된다. 천사는 호화롭고
화려한 대도시를 찾아간 것
이 아니라 보잘것없는 외진 마을을 찾아갔다. 여기서 우리는 요 1:46에 기록된 나다나
엘의 말을 기억할
수 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극단적으로는
이렇게까지 취급받던 동네가 나사렛이다. 예수는 공생애 이전의 삶의
대부분을 이 지
역에서 보내셨다. 이 마을은 예루살렘 북동쪽으로 약 70마일 떨어진 이스르엘 또는 에
스드라엘론(Esdraelon) 평야 북편의 깊은 산 계곡에 위치해 있다. 나사렛 뒷편에는 레
바논과 언제나 눈이 덮여있는 헬몬산이
있고, 다른 쪽에는 푸르고 높은 갈멜산이 위치
했는데 이 산은 지중해와 맞닿아 있다. 현재는 이 지역을 '엔 나시라'(EN
Nasirah)로
부른다(Geldenhuys).
=====1:27
요셉이라...마리아라 - 요셉과 마리아의 정혼은 천사가 나타날 때까지 잘
지켜지고
있었다. 유대 관습에 따르면 결혼하기 1년 전에 정혼(약혼)한다. 샴마이(Shammai)학파
는 정혼한 여인의 부정은
사형으로 처벌된다고 했다. 그리고 혼전의 성관계도 물론 용
납되지 않았다. 또한 정혼 기간 내에 신랑이 사망할 경우 신부는
과부로 간주되기도
했다. 본절과 29, 34절 등에서는 마리아의 처녀성이 거듭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강조
는 약혼
이후에 마리아가 더욱더 조신(操身)하고 경건한 생활을 하였음을 부각시킴은
물론이고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확증시키려는 의도를
나타낸다.
처녀(*
, 파르데논) - 이 단어는 원형이 '파르데노스'(*
)로서 '미혼녀', '소녀'라는 뜻이다. 성경 외적 문헌에 의하면 이
말이 동정녀
만을 뜻하지 않고 단지 젊은 여자를 가리키는 일반적인 단어로 쓰이기도 했다. 하지만
전후 문맥과 특히
34절에 수록된 마리아 자신의 고백으로 미루어볼 때, 여기서는 문자
그대로의 동정녀를 뜻한다. 예수의 동정녀 탄생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1:5-38의 주
제 강해 참조.
=====1:28
은헤를 받은 자여...함께하시도다 - 천사 가브리엘은 사가랴에게
나타난 것(8-24
절)과 같이 마리아에게도 나타난다. 사가랴의 경우와 마리아의 경우를 비교해보면, 사
가랴에게 천사가
나타났을 때에는 평안과 주의 임재의 인사를 하지 않은 반면에(8-24
절) 마리아의경우에는 이 같은 천사의 인사가 있던 점이
차이가 난다. '은혜를 받은
자'에 허당하는 헬라어
'케카리토메네(*
)는 그 어원이 '은
혜'를 뜻하는 어근
'카리스'(* )에서 온 말로서 완료 분사형으로
쓰였다. 이
완료 분사는 강한 현재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 정확한 의미는 '은혜를 받은
상태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는 뜻이다(Lenski). 한편 천사와 마리아 간의 대화는 세
차례에 걸쳐 전개된다. 1차 대화에서는(28, 29절) 천사의 은혜로운
인사와 이에 대한
마리아의 당혹감이 나타나며, 2차 대화(30-34절)에서는 마리아의 임신에 대한 천사의
재확인과 마리아의 설명 요구가 뒤따른다. 그리고 3차 대화(35-38절)에서는 천사의
대답과 마리아의 순종을 보여준다.
=====1:29
생각하매(*
, 디엘로기제토) - 이 말은 원래 '별개의 논거
(論據)들을 모아서 그것들을 합하다', '추론하다'라는 뜻이며
반대할 의사가 없음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 마리아는 놀라는 한편 모든 일들을 논리적으로
생각하
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의사를 갖고 있는 것이다.
=====1:30
천사가...무서워 말라 - 사가랴의 경우는 천사가 나타나는 순간 놀라고
무서워했으
나(12절) 마리아는 천사의 인사를 듣고 무서워했다. 역시 두 상황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얻었느니라(* , 휴레스) - 이 말은
'발견하다'라는 뜻을 가진
'휴리스코'
(*
)의 단순 과거형이다. NIV는 이를 '발견했다'(have found)라는 현재
완료형으로 번역했고
렌스키(Lenski)는 '이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발견되는 것이지
결코 획득되는 것이 아니다'고 해석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아무런 대가나 공
로를 요구하지 않는 채 주어진다(엡1 :6). 그러나 언제든지 주어지는 그 은혜를 발견
하느냐,
못하느냐는 우리에게 달려있다. 여기서 헬라어의 단순 과거형이 사용되었음을
보아 마리아의 경우에도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이미 은혜를 받은
상태에 있음을 알 수
있다.
=====1:31
예수라 하라 - '예수'는 '여호와는 구원이시다'의 뜻인 히브리어
'예호수아'(*
)의 헬라음으로서 이 이름은
구약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이름이다(출 24:13;삼
상 6:14;왕하 23:8;대하 31:15;학 1:1;슥 3:8). 이
이름은 주후 2세기 초까지 흔하게
사용되었으나 2세기 이후부터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행 13:6;골 4:11). 이는 아마도
의식적으로 그 이름의 사용을 꺼렸기 때문인 것같다. '예수'라는 이름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나타내며
이 이름의 기독교적 의미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
고 한 마 1:21에서 잘 나타난다.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여타의 다른 인물들과 그분을
구별하기 위하여 신약성경의 기자들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마21:11), '다윗의
자손'(마 27:37;막 10:47-48;요 18:5) 등의 문구를 덧붙여 사용하기도
했다.
=====1:32
큰 자 - 이 구절은 15절과 대구를 이룬다. 가브리엘은 요한에 대해 이야기할
때와,
예수께 관해서 이야기할 때 서로 다른 어투를 사용한다. 요한에 대해서는 다분히 제한
적 어투를 사용했으나 예수께 대해 이야기할
때는 매우 경외로운 표현을 사용하였
다.(Liefeld).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
, 휘오스 휘프시스투) - 예수께
서 신적 기원(divine origen)을 지닌 메시야이심을 단적으로 증거하는 말씀이다.
'지
극히 높으신 이'는 35절에서도 나오는데 양자 모두 하나님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 단
어는 70인역에서 하나님을
나타내는 하나의 명칭, 특히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신약 성경에서는 모두 아홉번
사용되었는데 그 중 일곱
번을 누가가 사용했다(본절, 35, 76;2:14:35;8:28;19:38).
그 조상 다윗의 위(位) - 당시의 대중적인 메시야 칭호는 '다윗의 자손'이었다. 예
수의 호적상 아버지인
요셉의 족보를 더듬어 올라가면 예수는 다윗의 혈통임을 확인
할 수 있다(3:31). '위'에 해당하는 헬라어
'드로논'(*
)은 '등받침이나
팔받침 또는 발등상을 갖춘 높은 의자'를 가리킨다. 또 이 단어의 복수형은 왕이나 신
의 권능을 의미할
수도 있다(골 1:16). 여기서 다윗의 위는 왕되신 메시야의 보좌를
상징하는 다윗 왕의 보좌를 가리킨다. 요컨데,
예수는 예언된 바 그대로 다윗의 혈통
에서 태어나사(삼하 7:12-16;시 89:29;132:11;사 9:7) 다윗 왕권을 통해
드러내 보이
시고자 했던 하나님의 신령한 뜻을 온전히 성취하신 것이다.
=====1:33
영원히(*
, 아이오나스) - '시대', '영원' 등의 뜻인 '아이온'(*
)의 복수
목적격이다. 이 단어는 때때로 '오래 전부터'(70절), 혹은 '창세 이후로'
를 뜻하기도 하나, 특정한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 영원성과 결부된 문맥에서 잘 쓰
인다(55절;요 6:51). 특히 이 단어는 복수형으로 사용될 때 '영원성'에
대한 암시를
두드러지게 나타낸다(마 6:13;롬 1:25;히 13:8;유
1:25, H. Sasse, TDNT. I,
197-209).
야곱의
집(*
, 오이콘 야콥) - '집'에 해당하는 '오이콘'은
'오이코스'(* )의 단수 목적격으로서
'집', '가족', '가문', '종족'의 뜻을
나타낸다. '야곱의 집'이라는 표현은 행 7:46에도 나타나며 그 의미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나타내지만 더 정확히는 영적 이스라엘로(마 3:9;롬 10:10-13) 그리스도를
왕
으로 받드는 모든 성도들을 의미한다는 견행에 많은 학자들이 공통된 입장을 취한다
(Lenski,
Geldenhuys, 이상근).
왕 노릇 - 다윗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됨으로써
예수
께서 메시아로서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통치자가 된다는 의미이다(고전
15:25;계
11:15).
그
나라(*
, 바실레이아스) - '왕국'의 의미를 담고있는 이 단어
는 때때로 '왕권', '왕정', '통치' 등의 뜻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의와 사랑에 의해 통치되며 의와 평강과 희락
(喜樂)으로 가득한(롬 14:17)
하나님의 나라에 다름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개념에 관
해서는 막 1:15의 주제 강해에서 다루었으니 참조하기 바란다.
하나님께서는 그 나라
를 그리스도께 넘겨 주셨고(22:29), 우리를 그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골 1:13).
무궁하리라(*
, 우크 에스타이 텔로스) - '무궁'을 나
타내는 '텔로스'는 '끝', '목표','정지' 등의 뜻을 가지며, 부정의 뜻을 나타내는
'우
크'와 함께 사용되어 '정지되지 아니하리라' 또는 '끝이 없으리라'는 뜻을 나타낸다.
'영원'과 '무궁'을 연이어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왕국의 영원성과 무한성을 강조하고
있다(시 45:6;단 2:24;7:14;요 12:34;계
11:15).
=====1:34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 '알지'에 해당하는
'기노스코'(*
)는 히
브리어에서 성적 관계를 나타내는 단어
'야다'(* )의 의미로 사용되었다(창
4:1;19:8;삿 11:39). 이 동사는 현재 시상으로 사용되어서, 과거의 모든 행동을 포함
한 현재의 상태를
나타낸다. NIV는 이 부분을 '나는 처녀이니'(since I am a virgin)
라고 번역한다. 즉, 과거에나 지금 이
순간에나 아무 남자도 알지 못한 처녀임을 말해
준다(Liefeld). 그러나 이 구절을 놓고 로마카톨릭이 마리아가 영원한
동정녀로서 지
냈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예수에겐 육친(肉親)의 형제들이 있었기
때문이다(마
12:46;막 3:31, 32).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 의심하여 표적을 구한 사가랴와는 달리(18절)
마리아는
표적을 구하지 않고 성취 방법을 묻는다(18절 주석
참조). 천사의 수태 고지
(announcement)를 듣고서 처음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지만, 무소불능하신
하나님의 권
능을 믿는 믿음이 었었기에 이제 마리아는 천사의 전언(傳言)을 오히려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1:35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 누가는 다시 성령을 언급하고 있는데,
1장, 2장에서만도
여섯번 이상을 언급한다(41, 67, 80절;2:25, 26, 27). 유대인들은 모든 아이들이
출생
하는 데는 세분히 동역자, 즉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 요구된다고 생각
하였다. 성령의 역사 없이는 결코
아이를 출생할 수 없다고 믿은 것이다(Lenski,
Barclay). 하지만 예수의
경우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탄
생하셨다는 점에서 유일 무이한 기적이었다.
능력(* ,
뒤나미스) - 신체적, 지적, 영적 '힘' 혹은 '가능성'을 의미
한다. 신약의 여타 개념들과 마찬가지로 '능력'에 대한 개념 또한
그리스도와 직접적
인 연관을 맺고 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능력과 메시야가 밀접한 연관을 나타낸다
(시
110:2;사 9:5;미 5:5). 이러한 능력은 일차적으로 왕적 능력이지만 선지자의 능력
도 포함된다(17절;24:19;미 3:8;행
7:12). 하지만 그리스도는 바로 전지 전능하신 하
나님의 본체이시라는 점에서 능력있는 선지자 이상의 존재이다.
이러한 점은 동정녀
잉태의 과정에서 성령과 지존자의 능력이 함께 하셨다는 사실에서도 잘 나타난다.
하
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는 잉태되고 탄생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이 함
께하였으며, 당신의 맡은 바 사명을
수행하실 때에도 성령의 특별한 능력을 친히 행해
보이셨다(4:14, 36).
덮으시리니(*
, 에피스키아세이) - '그늘을 지우다', '덮다',
'역사하다'라는 뜻을 가진
'에피스키아조'(*
)의 직설법 미래형이
다.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나타내는
출40:38의 영광의 구름(the
shekinah glory)을 암시한다(Robertson). 또한 공관복음에 모두
기록되어 있는 변화산
관련 기사에서도 구름이 덮힌 사실이 묘사되었다(9:34;마 17:5;막 9:7). 이 기록들에
서는
한결같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과 동일시하는 목소리가 구름 속에서 들렸다고 되
어 있는데, 이는 성령의 능력에 의해 태어날 생명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본 구절의
말씀과 일맥상통한다.
하나님의 아들 - 이 칭호는 예수께서
스스로 사용하시지는 않았지만 세례 받으실
때와 변화되실 때(막 1:11;9:7) 들린 하늘로부터의 음성에
의해, 베드로의 신앙 고백
에 의해(마 16:16), 귀신들에 의해(막 5:7) 그리고
로마의 한 백부장에 의해(막
15:39) 불리워졌다. 예수께서도 하나님과 자신과의 부자(父子) 관게를
암시하신 적이
많다(마 11:27;막 13:32). 하지만 예수는 단순히 한 아들이 아니라 유일하신 독생자이
다(요
20:17). 아들과 아버지는 뜻과(요 4:34;6:38;7:28;8:42;13:3) 행위와(요14:10)
영생
수여의 면에 있어(요 10:30) 하나이다(요 5:19, 30). 이런점에서 이 칭호는 메시
야적 칭호임과 아울러 성부와 성자께서 그
기원과 성품에 있어 동등하신 분임을 시사
한다(요 3:16;히 1:2).
=====1:36
네 친족 - '친족'에 해당하는
'슁게네스'(*
)는 '동족' 혹은 '친
척'이란 뜻이다. 엘리사벱과 마리아가 정확히 어떤 관계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엘
리사벱은 레위인출신의 제사장 가문에 속해 있지만(5절) 그렇다고 하여 마리아도 레위
인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레위인들은 서로 다른 지파사람들과도 혼인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출 6:23;삿
17:7).
=====1:37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없느니라 - '말씀'에 해당하는 헬라어
'레마'(* )
는 '생생한 목소리로 말해진 것',
'말씀', '진슬'등의 뜻을 나타낸다. 이 단어는 동의
어인
'로고스'(* )에 비해 '계속적인' 의미와
단일 개념을 강조한다. 한편
본절은 창 18:14과 마 19:26에서도 나오는 내용으로서 천사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모든
것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 사실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로서 제시된다. 즉 '하나님
께서 말씀하신 것을 하나님이 행치
않으시겠느냐'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1:38
주의 계집종 - '계집종'을 뜻하는 헬라어
'둘레'(* )는 '노예'를 뜻하는
'둘로스'(* )의
단수 여성형이다. 이 표현은 자식을 간구하던 한나의 기도
를 떠올리게 한다(삼상 1:11). 마리아는 자신의 임신 사실이 밝혀질 경우
자신에게 미
치게 될 온갖 비난(非難)과 돌팔매질을 감수하고서라도 오직 하나님의 처분에다 모든
것을 맡기려는
심정을 이 말로써 표현한다. 또한 이는 하나님 앞에 선 인생의 겸손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 마리아의 이 고백은 엘리(삼상 3:18)나 다윗(삼하
7:25)의 전례를 연상시킨다(이상근). 마리아의 이 고백은 결코 가볍게 여겨질 성질의
것이 아니다. 처녀
수태로 인해 파급될 문제는 엄청난 것이다. 요셉과의 파혼과 함께
부정한 여인으로 몰려 세인(世人)의 멸시와 지탄을 받아야 하고
자칫하면 돌에 맞아
죽어야할지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사의 마지막 말(37절)이 마리아의
가슴속에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이 일을 시작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니 모든 일을 다
하나님이 처리하시리라는
굳센 믿음이 마리아의 심령을 사로잡았다.
=====1:39
마리아가...빨리 - 본절에 이르러 엘리사벱과 마리아에 관한 두 가지
이야기가 결
합되고 있다. 지금까지는 예수께서 요한보다 우위에 있다는 사실이 그다지 강조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예수와 그 어머니 마리아에게 주의가 집중된다(43절). 여
행길이 얼마나 걸렸는지, 어떻게
여행했는지, 누구와 함께 찾아갔는지는 확인할 수 없
다. 단지 그녀는 엘리사벱을 만나고자 하는 일념으로 여행길을 재촉해 '빨리'
갔다고
전한다. 아마 마리아는 친족 엘리사벱도 이적적 은혜에 의해 수태되었다고하는 소식을
듣고 그 기쁨과 놀라움을 나누고 싶었을
것이다. 한편, 혹자는 마리아가 엘리사벱을
방문하기 전에 마 1:18-25의 사건들이 발생했다고 한다(Pulpit
Commentary).
산중에(*
, 오레이넨) - 이 단어는 해안에 접해 있는 유대 산지를 말
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장소의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기 어렵다.
팔레스틴을 해안
지대, 평원 지대, 계곡 지대 그리고 고원 지대로 구분할 때, 사가랴의 집은 이 고원
지대에
위치했던 것 같다(이 상근).
=====1:40
문안하니 -
'에스파사토'(*
)의 기본적 의미는 '껴안다'인데, 여
기서 파생된 의미가 '...을 좋아하다', '...에게 경의를 표하다',
'...를 환영하다'
등이다. 즉 이 인사는 포옹과 문안을 포함하는 매우 열렬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H.
Windisch, TDNT., I, 496-502, Lenski).
=====1:41
아이가...뛰노는지라 - 임선 6개월에 복중(腹中)의 아이가 뛰노는 것은
흔히 있는
자연적 현상이다(창 25:22). 자연적인 것 같은 현상을 특수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
까닭은 이 순간의 태동(胎動)이 다른 때와는 달랐기 때문이다. 누가는 이것을 자연적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로
기록하였음에 분명하다.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요
한이 복중에서부터 그리스도의 방문을 기뻐 뛰놀며(44절)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아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브레포스'(* )는 이
구절에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태아(胎兒)에 해당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18:15에서는 예수로부터 영적 축복을
받는
'어린아이들'에 대해서도 이 단어가 사용된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 아이에게 역사하신 성령의 감동이 그의 모친
엘리사벱에게
도 역사해 그녀의 마음에 놀라움과 감사, 사랑을 가득 채워주었다. 엘리사벱에게 임한
성령의 역사는 예언을 통해
나타났으며, 이러한 예언의 영은 구약에서도 종종 나타난
바이다. 엘리사벱을 방문한 마리아, 그 인사를 들은 엘리사벱,
복중의 태아, 모두가
성령 안에 있었다(15절 주석 참조)
=====1:42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 오랜 산중생활에서 외부인과의 접촉을 피하고 있던 중
마
리아를 만난 데서 온 기쁨, 마리아를 만나자마자 복중의 아이가 뛰는 사실에 대한 감
동 그리고 성령의 계시 등에 의한
복합적 감정의 표시로서 탄성을 발했을 것이다. 물
론 엘리사벱은 마리아에게 일어난 사실들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한
상태였다. 그
런데 마리아가 찾아와 인사를 하자 그 순간 계시에 의해서 모든것을
알게 되었다
(Lenski).
여자 중에...복이 있도다 - 엘리사벱은 마리아의 입을 통하지 않고서
성령의 계시
에 의해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알았다. 본절은 최상급을 나타내는 히브리적, 아람어적
표현으로서(삿
5:24;아 1:8) 마리아가 세상의 모든 여자 중 가장 큰 축복을 받은자임
을 가리킨다. 물론 마리아의 축복은 그녀의 복중에
든 아기 곧 만백성을 구원하실 메
시야 때문이지 마리아 자신의 특별한 장점 때문이 아니다. 따라서 카톨릭에서
마리아
를 성모로서 숭배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라 할 수 있다.
=====1:43
내 주의 모친 - 신약성경 어느 곳에서도 마리아를 가리켜 '하나님의
어머니' 라고
한 곳은 없다. 예수 안에 있는 신성(Deity)을 인성(人性)에 포함시켜서는 안된다('예
수는
하나님이다'라고 말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예수이시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마리아는 메시야요 주이신
예수의 어머니였, 하나님의 어머니인 것은 결코 아니다. 이
같은 사실에도 불구하고 카톨릭에서는 마리아를 신성시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으니,
이
는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우상 숭배에 다름 아니다. 한편, 본서에는 '주'(Lord)라는
명칭이 자주
사용되고 있다(공관복음에 이 명칭이 166번 나오는데 그 중 95회가 누가
복음에서 사용되었다). 누가복음의 예수탄생 기사를
보면 이곳 외에도 다른 두 곳에서
예수는 '주'로 불리워졌다(76절 ;2:11). 여기서 이 말은 유대인들이 대망해 오던 바로
그
메시야를 지칭한다.
내게...어찌 된 일인고 - 엘리사벱의 이 말과, 후에 세례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오
신
예수께 한 말,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마 3:14)는 맥을 같이한다. 엘리사벱
의 이 겸손함이 예수의 신들메도 감당치
못하겠다는 세례 요한의 겸손으로 이어진다.
=====1:44
네 문안하는 소리가...뛰놀았도다 - 이 구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문 서두에는
'이
유'를 설명하는 헬라어 '가르'( )가 사용되었다. 이것은 앞 구절의
이유를 설명
한다. 메시아에 대한 계시가 엘리사벱 자신에게 임했다. 그리고 그 계시를 통해 마리
아에 관한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고 또한 복중의 태아도 기쁨으로 뛰어놀았다. 한편
자신에게 있었던 그 비밀한 일을 엘리사벱이 알고
반응하며 동시에 이를 통해 자신이
낳을 아이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또 엘리사벱의 복중의 아이도 기뻐하며 자신
의
아이에게 경배하자 마리아는 크게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다.
=====1:45
믿은 -
'피스튜사사'(*
)는 원형이
'피스듀오'(*
)로 단순 과거 분사형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마리아가 어느 한 순간만 믿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꾸준히 계속해서
신앙을 지켜온 여인임을 알 수 있다.
주께서...이루리라 - 이 문장에는 개역 성경에 번역되지 않은 헬라어
단어가 하나
있다. 그것은 문두에 있는 '호티'이다. 이것은 '...하는 것'(that) 또는 '...이기
때
문에'(for because)라는 뜻이며 이 후자의 뜻으로 옮기면 더욱 생생한 의미가 드러난
다. 하나님의 약속하신
말씀은 일점 일획도 어김없이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를
믿은 여인 곧 마리아가 복되다는
의미이다.
=====1:46
마리아가 가로되 - 46-55절까지는 '마리아의 찬가'라고 이미
알려져 있다. 이는
'매그니피캣'(Magnificat)이라고 불리우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라틴어역
성경에서 이
시의 앞 부분 첫단어로서 이 말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는 삼상 2:1-10의 한나
의
기도를 떠 올리게 한다. 플루머(Plummer)는 이 시를 한나의 시와 그 외에 다른 12
개의 구약성경 구절들과 서로 비교하고
있다. 이 시에 관한 보다 구체적인 사항은 해
당 강해 부분을 참조하라.
찬양하며(*
, 메갈뤼네이) - '위대하게 만들다', '찬양하다'라는
뜻으로, 원문에서는 문장 제일 서두에 놓인다. 몇몇 학자들은 이 노래에 대해
본문 비
평학상이나 문맥상의 이유로 마리아가 부른 노래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더러는 라틴어
사본의 이 부분이 엘리사벱의 노래로 되어
있어 이를 엘리사벱의 노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삼상 2장에 나타난 한나의 상황과 자식이
없어 사
회적으로 수치를 당하던 엘리사벱의 상황이 유사하며, 노래를 지은 사람의 처지와 48
절의 내용이 유사한 것으로
보아 엘리사벱이 저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그러
나 이러한 주장들은 타당성이 없다. 한나와 엘리사벱의 처한 상황이 서로
유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48절의 말씀은 마리아에게도 역시 적합한 말씀이다.
=====1:47
내
마음(*
, 토프뉴마 무) - '마음'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
뉴마'는 46절의 '프쉬케'(영혼)와 구분해 볼 수 있다. 이들은 공히 인간의 지적,
정서
적, 의지적 생의 중심부를 말하며 때로는 '영혼' 혹은 '마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
다. 굳이 그 의미를
구분하자면 '프쉬케'가 개인의 생리적이고 감정적인 측면을 강조
할 때 사용된 반면에 (벧전 2:11), '프뉴마'는
프쉬케보다 더 고등한 면을 나타냈
을 때 사용되었다(롬 8:16).
여기서는 이 두 용어가 별다른 의미의 구별없이 반복적으
로 사용된 바, 이는 반복을 통해 강조를 꾀하는 히브리식 관용법에
해당한다.
하나님 내 구주 - 마리아는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함으로써 자신의 노래를 시작하고
있다. 이는,
시련을 당함에도 불구하고 구주이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리라고 고백했
던 하박국 선지자의 노래에 비교될 수 있다(합 3:18).
로마 카톨릭에서는 마리아가 예
수를 잉태하던 그 순간부터 원죄(Original Sin)의 모든 영향에서 벗어났다고
말한다.
하지만 본문을 통해 분명히 드러나듯이 마리아 또한 하나님의 구원을 절실히 요청할
수 밖에
없는 죄인일 따름이다.
=====1:48
그 계집종의...돌아보셨음이라 -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노래한 후 마리아는
하나
님앞에 선 자신의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모습에 대해 겸허한 태도를 표명하였다. 여기
'계집종의
비천함'이라는 표현은 실제로 목수의 아내라는 낮은 사회적 신분에 대한 인
식과 겸손에서 나온 고백이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을
입을 만한 별다른
조건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메시야의 모친이라는 칭호를 받게 된데 대한 감격과 겸손을
표시하였다.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심령이 겸손한 자에게 임하시는 것이다(사
57:15).
보라 이제...일컬으리로다 - 마리아는 엘리사벱을 통하여 '복이 있다'는 소리를 이
미
들었다(42절). 그리고 후에도 한 여인에게서 '복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11:27).
또한
마리아는 성도들을 통해 대대로 복있는 여인으로 칭송받게 될 것이며 그리스도의
복음이 살아있는 한 그녀의 영광은 지속될 것이다. 여기서
주의 할 것은 이 구절의
의미가 로마 카톨릭의 마리아 숭배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마리아
가 비천한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메시야의 모친이 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며,
따라서 마리아에게
소원을 간구하고 축복을 부탁하는 행위는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한
다.
=====1:49
능하신
이(*
, 호 뒤나토스) - '능하신 이'는 구약성경에서 '엘
쇄다이'(* )로 표현되어
하나님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창 17:1;욥
5;17;8:3등). 야훼는 권능의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성도는 곤궁에
처할 때에 도움을
얻기 위허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하며,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받아야만 한다(신 8:17,
18;시 46:1;86:16;사 41:10). 하나님의 능력은 변덕스럽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능력은
일관된 당신의 뜻과 공의로운 계획에 따라 행사되기 때문이다(사 5:16).
거룩하시며(* , 하기온) - 구약성경에서
거룩이란 개념이 하나님께 적용
되면 그것은 모든 피조물 위에 뛰어나시고 모든 피조물로부터 분리된 그분의 초월성을
뜻하며(출 3:4, 5) 또한 윤리적으로 무흠하신 성품을 뜻한다(레 11:44;벧전
1:16).
그리고 이 말이 사람에게 적용되면 의식상의 존엄성과 관련되어 쓰인다(출 29:1). 특
히
신약성경에서 '거룩하다'는 뜻인 혤라어 '하기오스'는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
합됨으로써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전가(轉嫁)받은 성도들의 영적 상태를 뜻하거나
(고전 1:30) 또는 성령의 인도하심따라 그리스도의 성품에 참예하는
성도들의 윤리적
특성을 묘사하는 말이기도 하다(롬 6:22;고후 7:1).
=====1:51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 '힘'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라토스'(*
)는
'힘', '권능', 또는 '권능의 표현', '전능한 행위'등을 나타낸다. 이 단어는
인간의
힘(신8:17), 활의힘(시 76:3), 심지어 바다의 힘(시 89:9)에까지도 관련되지만 대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능력(시
62:11;엡 1:19, 20;6:10;골 1:11;딤전 6:16)에 사용된다.
특히 여기서는 하나님의
압도적인 권능을 강조한다. 한편 '그의 팔'은 하나님의 전능
하신 능력을 가리키는 구약적 표현이다(신 26:8;시
89:13;118:15). 여기서 마리아는
과거에 하나님이 교만하게 당신을 반대했던 권세가들을
물리치시며(출 15:1, 22;단
4:24-27) 겸손한 자들에게 축복을 허락하셨던 사실(창 41:16;단
1:8-21)을 언급하면서
하나님의 공평하신 심판을 찬양하고 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삶의 상황과
무관하게
천상(天上)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 깊숙이 개입하시며, 또한 모든 불의
하고 왜곡된 상황이 하나님의
개입으로 바로 잡히게 되리라는 사상이 이 노래 속에 강
렬하게 함축되어 있다.
흩으셨고 - '디에스코르피센'의
원형
'디아스코르피조'(*
)
는 '흩다', '낭비하다', '탕진하다'의 뜻이다. 구약에서 이 말은 원수들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사용되었다(삼하 22:15).
=====1:52
권세 있는 자를...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 원어상 '권세 있는 자'는
'주권자', '통
치자'를 뜻하며 '위'(位)는 '왕좌', '보좌'를 뜻한다. 따라서 본절은 '압제자들을 그
들의 보좌에서
쫓아내셨으며'라고 옮겨질 수 있다. 마리아는 본절과 다음절에서 약자
와 강자 사이에 행하시는 하나님의 공변된 보응을 대조시키고
있다. 성경에는 하나님
이 교만한 자를 징계하신 사건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예컨대 바로(출5:1-11), 고라와
그의
동료(민 16장), 하만(에6:6-14), 느부갓네살(단 4:24-37), 벧사살(단 5장), 아마
샤(왕하 14:1) 그리고 웃시야(대하
26:16) 등의 경우가 그러하다. 물론 성경은 권세나
부(부) 자체를 나쁜 것이라 규정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그것들을 하나님의 축복의
산물
로 간주한다. 그러나 여기서 거론된 것은 하나님을 떠난 잘못된 권력과 부의 행사를
말한다. 교만하고 강한
자는 낮아지고 비천한 자가 높아지며 굶주린 자가 배부르게
되리라는 이 사상은 예수의 산상 수훈
가운데 표출되어 있는 것이기도 하다(마 5:3-6
주석 참조).
=====1:53
주리는 자를...배불리셨으며 - 누가는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과
멸시받는 자들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나타내었으며(15:1-32), 당시의 특권층과 기득권자들에로의 부의
집중으로인해 빈민층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던 다수 백성들에 대한 깊은 관심을 표명
하였다. 예컨대, 가난한
자에게 임할 축복과 부자들에게 미칠 화에 관한
설교
(6:20-26),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12:13-21) 등이 그러하며 본절 또한 그 중 한 예에
속한다.
'배불리셨으며'에 해당하는
'에네플레센'(*
)의 원형은
'엠
피플레미'(*
)로서 '가득 채우다', '만족케하다'는 뜻이다. 이 동사
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포괄할 수 있을 만큼 폭 넒은
용어이며 그릇에 더
이상 담을 수 없을 만큼 가득 채웠음을 의미한다.
부자를...보내셨도다 - 본문에서 부자는 자기 중심적이며 자신들의 이익과 결부된
데에만 관심을 가지는 자들을 일컫는다.
하나님은 사리 사욕에만 급급하는 자들에게는
켤코 은혜를 내리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그들이 자랑하는 부를 많이 가질수록 그들의
속은 그만큼 텅비케 된다. 더욱이 그들의 부가 완전한 절망으로 바뀔 수도 있다. 하나
님의 은혜가 없이는 어느 누구도 부유해질 수
없다는 사실은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면
뿐만 아니라 영적인 면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한편, 이 모든 공의의 실현이
앞으
로 오실 메시야를 통해 실현되리라는 것이 절대적으로 확실하기에 마리아는 이 찬송시
(讚頌詩)에서 계속 과거 시상을 사용하고
있다.
=====1:54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 '종'에 해당하는 '파이도스'의 원형
'파이스'(*
)는 '어린아이'(소년, 소녀)란 뜻이며 혈통과
관련하여서는 '아들', 사회적 신분과
관련하여서는 '종'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유일하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
도록 택하심받은 언약 공동체이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그 존재 의의를 지닐수
있었으며, 이방인들은 이러한 언약 공동체에 속함으로써 비로
소 하나님과의 신령한 관계에 들어갈 수 있었다. 구약 시대에는
'긍휼'과 '도움'이 원
칙적으로는 이스라엘에게 한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말라기 이후 400년 동안 이스라엘
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선지자가 끊김으로써 소위 암혹기가 진행되었다. 그러던
중 이 암흑을 뚫고서 구원의 새로운 빛이 임하고, 조상에게 약속하신
바를 이루실 메
시야가 마침내 도래하셨다. 그리고 이 약속의 대상은 이제 민족과 혈통의 구별을 초월
한 영적 이스라엘로
확대된 것이다(롬 9:6;갈 3:16;6:16). 사실상 이방인 구원은 구약
속에 이미 태동되어 있던 구속사의 한 주제였다(사 43:5,
6;49:12;59:19;말 1:11 등).
기억하시되(*
, 므네스데나이) - 이 말의 헬라어 원형
'밈네스
코'(*
)는 '기억하다', '마음에 간직하다' 등의 뜻으로서 언약하신 바
를 반드시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신실성과 관련하여
주로 언급된다(창 9:15이하;출
2:24).
=====1:55
우리 조상에게...영원히 하시리로다 - 마리아의 찬양은 선민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
님의 신실하심을 감사하는 내용으로 끝을 맺는다. 그녀는,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과(창 12:3) 이삭과(창
26:3, 4) 야곱에게(창 28:14) 맺으신 약속대로 언약
백성을 도우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들어 장래에도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가 함께 하시
리라는 강한 확신(確信)을 표명하고 있다.
=====1:56
마리아가...돌아가니라 - 36절에 의하면 엘리사벱은 이미 임신
6개월의 몸이었다.
이 이후에 마리아가 방문하여 3개월을 함께 보내었으니 엘리사벱은 임신 9개월이 되어
해산할 시기가
임박하였다. 마리아가 3개월이나 함께 있다가 엘리사벱의 해산을 보지
않고 돌연 집으로 돌아간 것인지 아니면 해산을 보고
돌아갔는지에 관해서는 분명하지
않다. 그리고 엘리사벱의 해산 이전에 돌아갔을 경우, 그 이유 또한 확실히 제시할 수
없다. 여하튼
마리아는 집으로 돌아간 이후에 가이사 아구스도의 호적 명령으로 요셉
과 함께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 여행하게
된다(2:4).
=====1:57
엘리사벱이...낳으니 - 앞에서는 세례 요한과 예수의 수태에 관한
기사가 번갈아
가며 언급되었으며 이제부터는 그들의 탄생에 관한 기사가 나온다. 본절은
5-25절에
이어 세례 요한의 탄생 기사가 시작되는 부분이다.
=====1:58
함께
즐거워하더라(*
, 쉬네카이론 아우테) - 지속적
인 즐거움을 묘사하기 위해 미완료형을 사용하고 있다. 기쁨은
엘리사벱 개인에게
한정되지 않고 그 소식을 접한 사람들 모두의 기쁨으로 옮아갔다. 뿐만 아니라 메시야
의 앞
길을 예비하는 선구자가 탄생한 사실은 구속사적으로 중대한 의미를 갖는 바,
본절의 기쁨은 모든 성도의
기쁨이기도 하다.
=====1:59
할례(割禮)하러(*
, 페리테메인) - 이 단어의 원래적 의미는
'둘레를 자르다', '칼자국을 내다' 등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생후
8일째 되는 날에 할
례를 받았는데, 구약 시대에 이 할례가 갖는 의미는 여러가지였다. 1 하나님의 언약
에
대한 순종의 표. 2 선민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과 구별되는 표(삼상 17:26). 3 여호
와의 언약을 영원히 기억케 하는 표. 4 신약
시대의 세례에 대한 예표등. 하지만 세월
의 흐름과 더불어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는 할례의 진정한 의미를 망각한 채
신체적으
로만 할례를 받는 자들이 늘어감에 따라 소위 '마음의
할례'가 강조되었다(신
10:16;30:6;렘 4:4;겔 44:7).
그 부친의 이름을
따라...하더니 - 생후 팔 일만에 할례를 행하며 이때 아이의 이
름을 짓는 것이 관습이었다(59절;2:21). 따라서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창 17:5), 야
곱이 이스라엘로(창 32:28), 혹은 사울이 바울로(행 13:9) 칭하심받게 된
때는 그들
의 인생에 있어 중대한 전환점에 해당한다. 또한 아이에게 이름을 붙이는 일에 이웃이
참여하는 것은
예부터 내려오던 유대 풍습이었고(릇 4:17)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아이
의 이름을 짓는 것도 유대의 한 풍습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름이 갖는 의미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아담은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행위를 통해 지배권을
행
사했으며(창 2:19, 20) 한 성읍의 이름을 명명하는 것은 그 성읍에 대한 통치권 확보
와 동일시되었다(삼하
12:28). 그리고 여자들은 고통 중에 있을 때 남자의 이름으로
칭해지길, 즉 남자의 보호 아래 놓여지길
구했으며(사 4:1), 하나님의 보호가 '하나님
의 이름으로 칭함받다'라고 표현되었다(사 63:19).
=====1:60
아니라 요한이라 - 엘리사벱은 자신의 반대가 관습을 무시하는 처사이고 또
여자의
견해라하여 무시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거부 의사를 표했다. '아니라'에 해
당하는 헬라어
'우키'(* )는 '정말로, 절대로 아니다'는
뜻이다. 엘리사벱이
'요한'이라는 이름을 알게 된 것에 대해 몇몇 주석가는 그녀가 남편 사가랴처럼
직접
계시를 받은 것이라 주장한다(Meyer, Bengel). 그러나 그보다는 엘리사벱이
필담(筆
談) 형식을 통해 사가랴가 받은 모든 계시의 내용을 전해받아 알았을 거라는 주장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Bruce, Plummer, Lenski). 원문에는 '우키' 다음에 바로
'알
라'(* )라는 단어가 뒤따른다. 이 단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오
히려'라는 뜻이며 부정어 '우키'와 함께 사용될 때는 '정반대로'의 뜻을 나타낸다. 한
편,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는 뜻인 '요한'이라는 이름은 다음 몇가지 사실을 암시한
다. 1 노년기에 이르도록 무자하였던 사가랴 부부에게서
요한이 태어났으므로 하나님
의 은혜였다. 2 요한의 탄생과 더불어 사가랴에게 내려졌던 하나님의 징계가
철회된
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였다(64절). 3 장차 요한의 메시지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하나
님께 돌아오게 됨은 더욱
큰 은혜였다(3:10-14;마 3:5-6).
=====1:61
저희가 가로되...이름한 이가 없다하고 - 친척과 이웃 사람들의 생각에는
요한이라
는 이름이 부적합했다. 왜냐하면 유대 사회에서는 어느 가문에서건 전승되는 이롬이
있기 마련이었으며
가문 중에 사회적 명망(名望)이나 존경을 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이름을 따라서 이름을 짓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러므로 계시의
내용을 알지
못하는 이웃과 친족들은 관례적으로 부친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고 이름짓기를 청했
던 것이다.
그러나 태어난 아이는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서 이름지을 인물이 아니었다.
이 아이는 주 앞에서 큰 자가 될 것이므로(15절) 그의 위대한
생애에 걸맞는 이름이
필요하였다.
=====1:62
그 부친께 형용하여...물으니 - 당시 사가랴는 벙어리이자 귀머거리 상태에
있었을
것이다(20절 주석 참조). 22절에서 누가는 '사가랴가 벙어리대로 있더니'라고 말하지
만 사용된 단어
'코포스'(* )는 '벙어리'뿐만아니라
'귀머거리'를 의미하기
도 한다(7:22).
=====1:63
서판(書板) - 표면에 밀랍(wax)을 얇게 칠한 작은
나무판(little-tablet)으로서 그
곳에 첨필(尖筆)로 글을 썼다.
그 이름은...기이히 여기더라 -
사람들이 아이의 이름에 대해서 사가랴의 의견을
물었을 때, 사가랴의 대답은 '요한이라'였다. 이것은
사가랴의 의견이 아니었다. 이것
은 계시에 의해서 이미 주어진 이름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기이히 여겼다는 것은 사
가랴가
귀거머거리였음을 강력히 뒷받침한다. 만일 사가랴가 엘리사벱과 주위 사람들
의 대화 내용을 모두 들었었다면 부인 엘리사벱과 똑같은
이름을 대는 것이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1:64
이에 그 입이...찬송하니 - 사가랴의 믿음있는 단호한 태도와 순종은 결실을
맺고,
자신의 불신의 표적(sign)이었던 벙어리 상태에서 풀려나게 했다. 이로써 20절의 천사
의 말도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사가랴는 그 혀가 풀리어 말할 수 있게 되자 먼저 하
나님을 찬양했다. 이 찬양은 바로 뒤이어 나오는 68-79절의
내용뿐만 아니라 지금까
지 되어온 모든 것에 대한 감사의 찬양이며 지난 10여개월 동안 말 못했던
답답함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아니라 크나큰 은총에 대한 깊은 감사의 찬양이다. 아마 그는 장
장 10여개월에
걸친 침묵의 기간 동안 하나님과 내밀한 교제를 나누는 과정에서 자신
의 불신에 대해 뉘우침과 아울러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도리를 절실히 배웠을 것
이다.
=====1:65
다 두려워하고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보스'(* )는
'공포'가 아니
라 초자연적 사건에 접하게 됨으로 갖게 되는 종교적인 '경외감'이다(12절 주석
참
조). 주위 사람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가운데 주도 면밀하게 이루어진 일
을 목격한 것에 대해 경탄을 금치
못했다는 의미이다.
온 유대 산중에 두루 퍼지매 - 엄격한 의미에서 유대는 예루살렘 주위의 한정된
지
역이었지만 정치적인 상황에따라서 때때로 그 지역이 확대되었음이 분명하다. 유대 본
령(本領)은 한 면이 약 70km되는 거의
정방형(正方形) 모양이었다. 유대는 특히 '산
지'로서 석회암으로 된 거대한 요새지가 600m에서
1,004m에 걸쳐 있다(헤브론의 북
쪽). 이 지역은 역사 이래로 계속해서 '광야' 또는 '사막'
지대로서 샘이 거의 없어
항상 인구가 적었다. 한편 본문이 보도하고 있는 바 이 사건은 예루살렘 산간 지역
일
대에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교역상(交易商)들이 항상 유대 주위를 통과했는데 이
교역상들을
따라 이 이야기가 점차 유대 전역으로 퍼져 나갔을 것이다.
=====1:66
마음에 두며 - 헬라어에서 '마음'은 인격의 중심을 의미한다. 단순한
호기심이나,
소문 또는 낭설로 여기지 않고 마음속에 간직했다는 것이다(47, 51절 주석 참조).
이 아이가
장차 어찌될꼬 - 이 아이가 선한 인물이 될지 악한 인물이 될지에대한
물음이라기보다는 이 아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이 민족을 위해서 무슨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기대감과 호기심 섞인 물음이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바로 뒤이은
구절 '주의 손'이 이 질문을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의
손(*
, 케이르 퀴리우) - 구약은 창조에 있어서나 역사
진행 과정에 있어서 자주 하나님의 손에 대해 언급한다. 하나님은
강한 손을 펼치사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셨다. 창조와 구원은 모두 하나님의 손으로 하신
일로
서 영원토록 찬양을 받은 일이며 또한 하나님의 손은 개개인의 삶 속에 들어오셔서
역사하신다(왕상 18:46). 그러므로 '주의 손'이 요한과 함께 한다는것은 곧 하나님께
서 큰 권능으로 요한을
덧입히시며 돌보심을 의미한다.
=====1:67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 본장 원문에서는 '성령'이라는 단어에 대하여 관사를 계속
하여 사용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성령의 활동을 계속해서 특별히 강조하는 것으로 지
금까지 되어온 모든 일들이 성령의 도우심과 인도 하에 진행되어 온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아울러 앞으로 되어질 모든 일들 역시 성령의 세밀하신 역사 아래 진행되어질
<세례요한교회의 벽에 있는 샤가랴의 찬가>
것을 시사하고 있다(15,41절 주석 참조).
예언하여 가로되 - 예언이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것임을
강조하려는 누가의 의지를 엿보게하는 구절이다.
성령의 감동으로
전개되는 사가랴의 축가(Benedictus)는 전반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사역과
역사하심을 구원론적 차원에서 제시하고
그것을 교훈과 예언의 형식을 빌어 표현했다. 내용상 이를 두
부분으로 나눌 때 전반부는 메시야를 통해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이며 후반부는 메시야의 선구자인 세례
요한을 소개하는 내용이다.
또한 이 축가는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성을 강조하며, 마리아의 찬가와 마찬가지로
구약 성경의 구절을
엮어 놓은 듯 한 인상을 준다(시 105:8, 9;106:45;111:9;사
42:7;렘 11:5;겔
29:21).
=====1:68
찬송하리로다(*
, 율로게토스) - '율로게토스'란 말은 하나님께
서 그의 선하심을 베푸신 사람에게(42, 45절에서처럼 '복되도다'라는
의미로) 사용할
수 있으며 또 하나님의 선하심에 감사하는 우리가 하나님께 사용할 수 있는 단어이다.
64절에서도 같은
단어가 사용되었다. 따라서 68-79절은 찬송의 말씀이자 축복의 내용
을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Liefeld).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 - 이스라엘이란 말은 17절과 77절에서 언급된
'주의 백성'
과 같은 말이다(54절 주석 참조).
돌아보사(*
, 에페스케프사토) - 이 단어는 원형이
'에피스케
프토마이(*
)로서 3인칭 과거 직설법으로 쓰였으며 '도움을
주시기 위해 살펴보다'는 의미이다. 즉 하나님이 주권적 개입으로 그
백성들을 돌아보
사 그들을 은혜 가운데로 인도해 내신다는 사상을 짙게 내포하고 있다. 또한 이 단어
의 여러 의미 가운데는
'방문하다', '탐구하다', '찾아내다' 등의 뜻이 포함되어 있
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기 위하여 그
백성들을 '방문하시거나', '돌아보신다'
는 의미는 7:16에도 잘 나타나 있다. 특별히 이 단어는 하나님이 주어가 될 때
영적인
의미가 강화된다(H.W.Beyer, TDNT., II, 599-622)
속량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뤼트로시스'(*
)는 '구속', '구원',
'해방', '자유' 등의 뜻이며 그 동사형인 '뤼트로'는 '몸값을 치르고 놓아주다'는
뜻
이다. 신약 시대의 한 파피루스에서는 이 단어가 '속죄금을 치르다'는 전문적 법률 용
어로 사용되고 있다. 즉 한 특정인이 죄인의
죄값을 대신 지불해주고 그 사람을 풀어
주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 말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께서 인생의 죄값을
십자
가상의 저주로써 대신 치르시고 죄와 사망에서 인생을 구원해내신 것을 나타낸다. 특
히 이와 관련하여 신약 성경에서는
'값을 치르고 구원함', '구속'(자)의 뜻인
'아폴뤼
트로시스'(*
)가 주로 쓰인다(21:28;롬 3:24;8:23;고전 1:30;엡
1:7등). 한편 구속의 개념은 신.구약을 통털어 성경 전체에 폭넓게
깔려있다. 일반적
으로 구약에서 '구속(속량)하다'는 말은 히브리어
'파다'( )와 '가알'(
)의
번역이다. 전자는 이스라엘 가운데서 장자의 속건(贖錢)으로 돈 지불을 요구할 때 사
용했으며(출 13:2,
11-16), 노예 상태로부터 해방된다는 뜻도 내포되어 있다(출
21:8). 후자는 주로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간 땅을 회복하는 것이나(레 25:26;룻 4:4)
서원한 것을 도로 물리는 것을
말한다(레 27:13). 특히 이 말을 신학적 내지는 교리적
의미로 이해할 때, 구약에서의 구속에 대한 대표적인 예로는 출애굽 사건을 들
수 있
다.
=====1:69
구원의 뿔 - 근동 지역에 사는 뿔가진짐승들은 매우 강한 힘을 지닌 것들이
대부분
이었다. 그래서 뿔은 흔히 힘을 상징하는 말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구약성경에서 뿔은
능력(왕상 22:11;단 8:3)과
왕권(단 7:23;8:20-22)을 상징하는 것이니 만큼 '구원의
뿔'은 구원의 능력을 지닌 구세주 곧
메시야를 가리킨다. 사가랴는 이 구원을 일종의
힘으로 생각한듯하며, 구약적 개념을 빌어 표현함으로써 이 구원자가
구약에서 이미
예언되어온 바로 그 메시야임을 나타내고자 한 것 같다.
그 종 다윗의 집
- '집'이라는 표현은 구약과 신약에서 종종 '가족'과 '종족'으로
서의 뜻을 나타내기도한다(33절 주석 참조). '다윗의
집'은 27절과 2:4에서처럼 가문
이나 자손을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는 이 표현이 사가랴 당시에 유대 전역에 있던
메
시야 사상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을 이방의 압제와
죄악 가운데서 구원하실 구세주가 이스라엘을
열방의 위협에서 건져내었던 다윗 왕가
중에서 나타난다는 사상이 유대 민족 사이에 팽배했었고 또한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
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종 다윗'이라는 표현은 오실 메시야의 선재성(先在性)을 암
시하는 것이며 그처럼
위대했던 다윗도 그의 종이었음을 보아 그의 위대함과 놀라운
위치를 증거해 준다. 그리고 구원의 뿔을 다윗의 집에서
일으키셨다는 것은시 132:17
의 말씀을 암시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며 메시야 사상을 잘
드러내고
있다.
=====1:70
거룩한 선지자의...말씀하신 바와 같이 - 이 문구는 단순한
삽입구가 아니라 히
1:1과 같이 예수의 메시야 역활이 구약에 기원을두고 있음은 물론 구약의 지지를 받는
것임을 확실하게 해주고 있는 문구이다. 구약의 메시야 예언은 율법서나 선지서, 시가
서 등 구약성경 전체에 걸쳐 언급된다(마
1:18-25 주제 강해 '메시야 예언과 그 성취'
의 도표 참조). 따라서 우리는 구약성경 전체가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구절에서의 '선지자'라는 의미도 문자 그대로의 선지자라기보다
구약성경
전체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Liefeld Geldenhuys).
=====1:71
원수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여드로스'(*
)가 형용사로 쓰이면 '적
개심 있는', '미워하는'이란 뜻이다. 당시 유대인들의 메시야 대망이 대부분
민족적이
고 정치적 성격이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사가랴는 원수라는 말을 로마 세력 혹은
로마의 사주를 받은 헤롯에
빗대어 사용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본 축가가 구속
역사의 진행 과정 중에 보여주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찬양하는 측면에서 전개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 '원수'는 곧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훼방하는 사단과 그
세력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마 13:39).
=====1:72
긍휼히 여기시며...언약을 기억하셨으니 - 본절에서 언약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긍
휼이 언급된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 왜냐하면 만일 하나님의 긍휼이 없었다고 한다면
하나님과 그
백성간의 언약 관계는 그 백성의 범죄와 완악성으로 인하여 오래전에 이
미 파기되고 말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언약은 73절에서
특별히 아브라함과의 언약
을 지칭한 것으로 규정되어 있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 외에도 아담(창 3:15),
노아
(창 6:18), 이스라엘 백성(신 29:1-30:20), 다윗(삼하 7:5-16) 등과 더불어 구속사의
중요
시기마다 언약을 체결하사 신앙적 삶의 방향을 설정해 주심과 아울러 당신의 구
원계획을 약속의 형태로 제시해 주셨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언약들은 그리스도 안에
서 하나로 통일되고 또한 성취되어졌다.
=====1:73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는 창
22:16-18의 내용으로서
그의 후손들의 원수들이 정복될 뿐만아니라 아브라함 자신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온 세
상이
축복을 받을 것이라는 내용이다. 따라서 여기서의 구원은 단지 이스라엘이 로마
의 압제로부터 해방되리라고 하는 정치적 해방을
가리킨다기보다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올무에서 벗어나게 될 소위 영적 이스라엘의 구원을 가리킨다고 봄이
무
난하다. 진정한 아브라함의 후손은 혈통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신령한 믿음에 의한 것이
기 때문이다. 한편 본절의 '맹세'는 72절의
'언약'과 더불어 교차 대구법적으로 구성
된 본 축가의 중심 위치에 놓여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중요성과 그 언약에
대
한 하나님의 충실하심을 강조하는 효과를 나타내고있다. 또한 이러한 사실은 누가복음
에서 언약과 맹세가 매우 중요한 주제임을
밝혀주고 있으며, 동시에 우리로 하여금 하
나님의 언약을 믿을 수 있는 용기를 주고 있다(시 106:45).
=====1:74
원수의 손 - 71절 주석 참조.
건지심을
입고(*
, 뤼스덴타스) - 이 단어는 원형이 '뤼오마이'
로서 과거 수동형으로 쓰였으며 '글어내다', '구출하다', '구원하다'등의
의미를 나타
낸다. 하나님께서는 헬라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헬라 세계의 불멸의 신들(Gods)과 또
그들과는 대조되는 유한한 인간
존재들과 같이 존재론적 법칙들에 의해 제한받지 않으
신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비하심에 따라(느 9:8), 자기 이름을 위하여(시
79:9), 그
리고 그가 원하시는 대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다. 바로 그의 이름이 구원자이시다(사
63:16). 본절과 75절
내용은 하나님이 그 신실하심과 긍휼히 여기심에 따라 언약을 주
권적으로 성취시키시는 이유 혹은 목적에 해당한다. 이러한 사실은 메시야의
선구자인
세례 요한의 사역의 목적 또한 주의 백성에게 구원을 알게하는 것이라는 점에서(77절)
더욱 확연해진다. 한편으로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임재하심 가운데에서의 보호
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인간편에서의 믿음 혹은 신뢰가 요구된다(시
22:4, 5;34:19).
또한 하나님께서는 죄를 고백하는자를 구원하시며 은혜와 긍휼을 아끼지
않으신다(W
Kasch, TDNT, VI. 998-1003).
=====1:75
종신토록(*
, 파사스 타스 헤메라스 헤
몬). 헬라어 '파사스'는 원형이
'파스'(* )로서 복수 목적격으로 쓰였으며 '모
든',
'온', '모두' 등의 의미를 나타낸다. '헤메라스'는 원형
'헤메라'(* )
의 복수
목적격으로 '날', '낮', '때'등의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이 문구는 '우리
의 모든 날들' 이라는 의미가 된다. 즉 지상에서의
우리의 평생을 의미한다.
주의
앞에서(*
, 에노피온 아우투). 헬라어 '에노피온'은
'...앞에', '...의 목전에', '...가운데' 등의 뜻을 나타낸다. 이 문구의
의미는 '그
의 목전에서' 또는 '그의 면전에서'가 된다. 이는 제의적인 용어로서 이 어구에 담긴
의미 가운데는
제사장적 섬김의 개념이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 이 용어가 본 구절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모든 사람들과 관련하여 사용된것은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
다. 즉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자들의 만인 제사장직에 대한
암시를
엿볼 수 있다(Lenski).
성결과
의(*
, 엔 호시오테티
카이 디카이오쉬네) - '성결'에 해당하는 '호시오테티'는 원형
'호시오테스'(*
)의 단수형이다. 이 단어는 주로 구원받은 자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드러내는
경건성과 관련하여 쓰이며 신약성경에서 '거룩함과 의로움
안에서'라는 표현으로 2회
나타난다. 본절에서 이 단어는 구원의 시대에 사는 신자들의 삶을 묘사하며, 엡
4:24
에서는 중생으로 얻어진 새로운 본성을 가리킨다. '의'에 해당하는 '디카이오쉬네'는
70인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지킨다는 의미(사 5:7)로 사용되었으며, 랍비들에게 있어서
는 특히 가장 많은 공로가 쌓이게 되는 행위들 중 하나로서의
자선행위를 의미했다.
따라서 이 단어는 주로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의로운 행위
를
지칭하는데 사용된다. 하나님의 언약 성취는 이스라엘에게 새롭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즉
소극적으로는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섬기며, 적극적으
로는 '성결과 의'로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시 05:8,
9).
=====1:76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 - '지극히 높으신 이'는 하나님의 또 다른
명칭 중의
하나이다(32절 주석 참조). 그리고 '선지자' 세례 요한은 두 가지 면에서 선지자보다
큰 자(마
11:11) 혹은 가장 위대한 선지자였다. (1) 시대적인 위치의 면에서, 그는 신
약과 구약의 가교적(架橋的) 위치에 있었다. 그는
예수와 동시대에 살면서 친히 예수
의 권능을 목격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수행했다는 점에서 위대한
선지자였다.
즉 그는 복음의 여명이 동터오는 것을 목격하였던 것이다. (2) 사역의
내용면에서,
그는 메시야의 선구자였다는 점에서 위대한 선지자였다. 구약에 탁월한 선지자들이 많
이 있었지만 메시야의
앞길을 평탄케하는 사역을 직접 수행한 선지자는 세례 요한뿐이
었다. 한편 예수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로서 표현이 되고 요한은
'지극히 높으
신 이의 선지자'로서 표현이 되는 것은 현격한 신분적 차이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서로
가 중요하고도 내밀한
상관 관계를 갖고 있음을 나타낸다.
앞서 가서...예비히여 - 이 말씀은 사 40:3;말 3:1;4:5 말씀의
성취이며, 이 구약
말씀과 비교할 때 누가는 요한을 엘리야와 연결시키고 있음을 알수 있다. 다시 말해서
요한은
'엘리야의 심정과 능력'을 가진 자로서(1:17) 회개를 선포함으로써 가난하고
상한 심령을 주 앞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맡은 선구자였던 것이다(3:3-6;마 3:1-6).
=====1:77
주의 백성 - 17절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 54절 '그 종 이스라엘'
주석 참조.
죄사함(*
,아페세이 하마르티온) - '사함'에 해당하
는 '아페세이'는 '용서', '해방', '탕감'의 뜻을 나타낸다.
성경상에서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에게 큰 소망과 위로를 주는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곧
'죄사
함'이라는 말이다. 구약의 모든 희생제사는 예수의 대속 죽으심을 예표한 것이므로 반
복적으로 드려져야 했다. 그러나 흠없고
완전한 희생 양이신 예수는 단 한번의 희생을
통해 영원하고도 완전한 죄사함을 이루셨다(히 9:25, 26). 또한 하나님은
아무리 큰
죄라 할지라도 용서하시고(사 1:18), 한번 용서한 죄는 기억치도
않으심으로써(사
43:25), 죄에 대한 앙금이나 미련을 갖지 않으시며 그 흔적을 조금도 남기시지 않으시
며(시 103:12;미
7:19), 완전하고도 무한한 죄사함을 이루신다(Lenski).
구원을 알게 하리니 - 구원을 알기 위한 전제조건은
선행되어 나온 '죄사함'이다.
즉 회개와 함께 죄사함을 받지 못한 사람은 구원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이 구절에
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이 로마 제국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정치적 개념을 넘어선 보
다 깊은 영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애당초 인간은 하나님과
의 신령한 인격적 교제를 누리며 참생명을 누리도록 피조되었으나 인간의 죄악된 행위
가 둘 사이를 갈라
놓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고 손을 내밀 때
하나님의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고 하나님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 가운데 죄악이 있기 때문이다(사 59:1, 2). 그러므로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
의 행위 가운데는
철저한 회개와 죄사함의 요청이 포함되어있는 것이다. 요한은 후에
그 '죄사함'을 위한 회개의 세례를 베풀게
된다(3:3).
=====1:78,79
돋는 해가...인도하시리로다 - 캄캄한 어둠을 물리치고 동녘에서
떠오르는 태양에
관한 이미지는 이미 말 4:2에 나오며 사 9:2;60:1에는 '빛'으로 그리고 민
24:17에는
야곱에게서 나온 한 '별'로 등장한다. 이는 모두 흑암과 죽음을 몰아내고 의와 진리와
사랑으로 충만한 세계를 도래케
할 메시야에 관한 예언이다.
임하여(*
, 에피스케프세타이) - 이 단어는 68절에서는 '돌
아보사'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메시야의 도래 그 자체가 곧
하나님의 임재와 보호
를 뜻함을 암시한다.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 - 이 구절은 사
9:2을 인용하고 있다(마 4:16).
이는 직접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말하지만 궁극적으로 이방인들을
제외하지는 않
는다. 그리스도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그 누구를 막론햐고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되
어 멸망의 나락으로
떨어져가는 비참한 인생들에게 진리와 생명의 빛을 비추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 '평강'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레네'는 (1) 전쟁이
나 투쟁에 반대되는 개념으로서의 평화(14:32;행
12:20), (2) 하나님과 인간간의 바른
관계의 회복을 뜻하는 화목(고후 5:19), (3) 심령의 평화(골 3:15)등을
의미한다. 이
평강은 신.구약을 통털어 풍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신학적 개념이라 할 수있다. 특히
본절에서 메시야와 평강의 길은 밀접한 관계를 드러내 보인다. 사 9:6에서 메시야는
평강의 왕으로서 예언된
바 있으며, 사도 바울도 하나님 나라의 특징을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설명하였다(롬 14:17). 또한 예수께서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은 영속적
이고도 완전한 평안을 성도들에게 끼치노라고 친히 말씀하셨다(요 14:27).
인도하시리로다(*
, 카튀뒤나이) - 원형 '카튜뒤노'(*
)는 '곧게
하다', '똑바로 하다', '바로 안내하다' 등의 듯을 나타낸다.
즉 왜곡되고 잘못된 길을 바로 잡아 똑바로 가게하는 것이다.
밝은 빛 가운데서 길을
잘못 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평강의 길은 주께서 가시는 길이며 그분께서
예비하신
길이다. 구원의 빛이 길을 잘못가지 않도록 우리의 앞을 비추어 평강의 길로
나가게 한다. 한편 이렇게 하므로써 사가랴의 찬가는 끝을
맺는다. 사가랴 찬가는 첫
말이 '찬송하리로다'로서 시작되어 '평강'이라는 말로 그 끝을 맺는다. 이는
하나님
과 우리의 관계가 '찬송'과 '평강'으로 특징지워지는 것을 반영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찬송을 드림으로써 그분과 인격적 교류를
갖고 그의 구원의 계획 속에 참여함으로써
하나님께서 부여하시는 평강을 얻게 된다. 즉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찬송이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응답으로 주시는 것은 평강이다.
=====1:80
자라며(*
, 유크사넨) - 신체적 성장을 뜻하는 말이다. 요한도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정상적인 성장 과정을 거쳤음을 나타낸다.
심령이 강하여지며 - 요한은 신체적 성장과 아울러 영적으로도 함께 성장하고 있었
다. 이 성장 과정은 예수의
성장 과정과 흡사하고(2:40, 52), 어린 사무엘이 성장할
때와도 유사하다(삼상 2:26). 모든 일이 그렇듯이
어린아이의 자라나는 것 역시 하나
님의 뜻가운데 있는 것이다.
빈 들에 있으니라 - 혹자는 요한이
사해(死海) 부근의 유대 광야 어느 곳에 있었던
에세네파(Essenes)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나 그것을 입증할 만한 별다른
자료가 발
견되고 있지는 않다. 요한은 에세네파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요한은 곧 오실 메시야
의 도래를 전파하며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지만 에세네파는 그리스도와는 전혀 무관하
게 행동했다. 또한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베풀면서 민족적 구원을
시도했지만 에세네
파 사람들은 사회를 외면하고 고립된 생활을 지향했다. 아울러 요한이 민족적,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고
정의를 집행하려고 모든 노력을 다 기울였으나 에세네인들은 개인 구
원의 수단과 방법에 집착해 철저한 금욕적 생활과 고립된 생활을 지향했다.
또한 쿰란
(Qumran) 공동체와 세례 요한을 연결시키는 사람들도 있으나 그와 관련이 있다는 아무
런 증거는 없으며 또한
요한이 머물렀던 지역이 어느 곳인지도 정확히 확인되고 있
지않다. 여하튼 그는 광야에서 철저하게 자신의 사역을
준비했다. 우리는 구약성경을
보면서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광야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준비했던 것을 볼
수 있다(모세, 엘리야 등). 요한은 광야에서 외롭고 고독한 생활을 보낸 후에 회개의
복음을 외치며 그리스도께서 오심을
전파한다(3:2, Geldenhuys, Liefe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