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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전쟁(crusades , 十字軍戰爭 ]
요약 11세기 말에서 13세기 말 사이에 서유럽의 그리스도교도들이 성지 팔레스티나와 성도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8회에 걸쳐 감행한 대원정.
11세기 말에서 13세기 말 사이에 서유럽의 그리스도교도들이 성지 팔레스티나와 성도 예루살렘을 이슬람교도들로부터 탈환하기 위해 8회에 걸쳐 감행한 원정이다. 그리고 이 전쟁에 참여한 군사를 십자군이라고 부른다. 당시 전쟁에 참가한 기사들이 가슴과 어깨에 십자가 표시를 했기 때문에 이 원정을 십자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십자군의 태동이 종교적 요인에 의한 것이라는 점은 명확하고 또한 유일신을 믿는 그리스도교도와 이슬람교도와의 배타적 싸움이라는 점에서도 종교전쟁으로 인정된다. 그러나 이것을 간단히 종교운동이라고 성격지을 수는 없는 복합적인 이해가 요구된다. 봉건영주와 하급 기사들은 새로운 영토지배의 야망에서, 상인들은 경제적 이익에 대한 욕망에서, 또한 농민들은 봉건사회의 중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희망에서 저마다 원정에 가담하였다.
그 밖에 여기에는 호기심 ·모험심 ·약탈욕구 등 잡다한 동기가 신앙적 광기과 합쳐져 있었다. 대체로 십자군시대의 서유럽은 봉건사회의 기초가 다져지고 상업과 도시의 발달도 어느 정도 이루어져 있어서 노르만인의 남(南)이탈리아 및 시칠리아 정복, 에스파냐의 국토회복운동, 동부 독일의 대식민활동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주변 세계와의 경계를 전진시키고 있었다. 따라서 이런 배경에서 십자군도 정치적 ·식민적 운동의 일환이 될 수밖에 없었고, 종교는 이 운동을 성화(聖化)시키는 역할을 수행하게 된 것이다.
십자군 전쟁
1. 예루살렘을 향해 떠난 유럽 사람들
봉건 제도 아래에서 안정된 생활을 하던 서유럽 사람들에게 새로운 유행이 생겨났어요. 그것은 자신들이 믿는 크리스트교의 성지, 예루살렘에 다녀오는 것이었어요.
“우리의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부활1)하신 곳, 예루살렘에 가 보는 게 소원이에요.”
하지만 예루살렘을 차지하고 있던 셀주크 투르크2)는 이슬람교를 믿었어요. 그래서 자신들의 땅에 크리스트교 사람들이 자꾸 찾아오는 것이 못마땅했어요. 뿐만 아니라 그들은 비잔티움 제국의 땅을 차지하려고 했어요. 이제 두려움을 느낀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는 로마 교황청에 도움을 부탁했어요. 이 당시의 교황은 우르바누스 2세였어요. 마침내 1095년, 우르바누스 2세는 회의를 열고 이렇게 말했어요.
“크리스트교의 성지 예루살렘을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 내주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성지를 되찾아야 합니다. 혹시 이 전쟁에서 목숨을 잃는다면 틀림없이 천국에서 보상3)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자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이 모두 찬성을 했어요.
“옳소! 우리 모두 예루살렘으로 갑시다!”
〈우르바누스 2세〉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시작한 교회 개혁을 진전시켰고, 십자군 전쟁을 일으켰으며, 교황청을 강화시켰어요.
십자군 전쟁 본문 이미지 1
하지만 실제로 그들은 성지를 되찾으려는 마음보다는 다른 속셈이 있었어요. 재산이 많지 않은 영주는 보다 넓은 땅을 차지하려는 욕심이 있었고, 교황은 동방에 크리스트교를 퍼뜨리고자 했어요. 또 상인들은 장사를 하여 좀 더 많은 이익을 얻으려는 욕심이 컸답니다. 이들은 가슴과 어깨에 십자가 표시를 하고 전쟁에 나섰어요. 그래서 이들을 십자군이라고 불렀지요.
그 당시 피에르라는 수도승4)의 연설은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어요. 그러자 여자들과 노인들까지도 따라나섰어요. “우리도 같이 가겠어요.”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향해 떠났어요.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도중에서 굶거나 병들어 죽었어요. 게다가 셀주크 튀르크의 강한 방어5)로 처음에 출발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죽고 말았지요. 그럼에도 십자군 행렬은 끊이지 않았어요. 많은 영주들과 잘 훈련된 기사들이 계속해서 밀려왔어요.
“우리는 반드시 전쟁에서 이겨 예루살렘을 되찾을 것이다!”
마침내 기사들을 앞세운 십자군은 셀주크 튀르크의 이슬람군을 물리치고 드디어 십자군은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떠난 지 2년 만에 예루살렘의 길목을 차지했어요.
클레르몽 교회회의에서 십자군 원정을 호소하는 교황 우르바누스 2세
클레르몽 교회회의에서 십자군 원정을 호소하는 교황 우르바누스 2세
세계 역사 바로 알기
예루살렘은 이슬람교에서는 무함마드가 승천했다는 전설이 남아 있는 장소예요. 크리스트교에서는 예수가 죽은 곳이면서 부활한 곳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이슬람교와 크리스트교 모두 예루살렘을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2. 실패한 전쟁
그런데 문제는 이때부터였지요.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코앞에 두고 이슬람군이 강하게 버텨 내는 바람에 힘든 전쟁을 치러야 했어요. 예루살렘은 이슬람 교도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곳이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지요.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어요. 십자군은 부족한 식량을 나누어 먹으며 이슬람군과 싸웠어요. 1099년, 십자군은 마침내 예루살렘에 들어왔어요. 그런데 이때 십자군은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어요.
“우리는 배가 고프다. 먹을 것을 빼앗아 오자!”
십자군이 처음 떠날 때는 성지만 되찾으려 했어요. 하지만 오랜 전쟁에 시달린 십자군은 식량과 보물을 빼앗고, 이슬람 사원에 불을 질렀어요. 또 이슬람 사람들을 함부로 죽이고, 노예로 팔기도 했지요. 1차 십자군 원정은 그렇게 끝이 났어요. 한때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차지하고 예루살렘 왕국을 세우기도 했어요. 하지만 이슬람군이 다시 전쟁을 일으켰고,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두고 물러나야 했지요. 얼마 뒤 2차 십자군이 만들어져 예루살렘을 향해 다시 떠났지만, 이슬람의 위대한 장수 살라딘에게 져서 뜻을 이루지 못했어요.
살라딘은 이슬람 세계에서는 영웅으로 일컬어지는 인물이란다. 그는 이집트의 아바스 왕조로부터 ‘술탄’이라는 호칭을 받았어. 술탄은 아랍 말로 왕이라는 뜻이야. 살라딘은 1187년 이슬람군을 이끌고 십자군과 맞서서 싸워 예루살렘을 되찾았어.
십자군 전쟁 본문 이미지 2
〈프리드리히〉
붉은 수염이란 뜻의 ‘바르바로사’란 별명을 갖고 있었어요. 제3차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여 성지로 가는 길에 죽었어요.
1189년에는 독일의 황제인 프리드리히와 프랑스의 필리프 2세, 그리고 영국의 리처드 1세까지 힘을 합쳐 3차 십자군을 일으켰어요. 하지만 십자군은 프리드리히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우왕좌왕하게 되었고, 끝내 예루살렘까지 이르지 못했어요. 하는 수 없이 리처드 왕은 살라딘에게 말했어요.
“예루살렘이 당신네 땅임을 인정하겠소. 다만 우리가 성지 예루살렘에 자유롭게 갈 수 있도록 해 주시오.”
리처드 왕은 살라딘과 협정을 맺고 돌아갔어요. 이후로도 200년 동안 십자군 전쟁은 계속되었지만 예루살렘을 빼앗지는 못했어요. 오히려 십자군은 베네치아 상인들의 꾐에 넘어가 콘스탄티노플을 차지하고 금은보화를 빼앗는 등 어이없는 사건을 일으켰지요.
베네치아 상인들은 전쟁에 필요한 물자와 식량을 대는 일을 하고 있었어. 그런데 십자군이 돈을 치르지 못하자, 콘스탄티노플을 털어서라도 갚으라고 했지. 그러자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한 거야.
예루살렘을 약탈하는 십자군
성지 예루살렘을 되찾기 위한 십자군 전쟁은 시간이 흐르면서 질서가 무너졌어요. 그들은 이슬람의 도시를 공격해 보물을 빼앗고 사람들을 노예로 잡아가는 등 끔찍한 일을 저질렀어요. 십자군 전쟁이 실패로 끝나면서 교황과 영주의 힘이 약해졌지요.
잠깐 퀴즈
제2차 십자군을 물리친 이슬람의 장수는 누구인가요?
정답 : 살라딘
3. 소년 십자군과 전쟁의 끝
더 슬픈 일은 1212년에 시작된 소년 십자군이었어요.
“우리가 폭력 대신 사랑으로 성지를 되찾아 오겠어요!”
프랑스와 독일에서 수많은 소년들이 모여 예루살렘으로 향하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소년들은 육지로 가지 않고 바다를 통해 가려 했어요. 그러나 예루살렘에 도착하기도 전에 폭풍우를 만나 소년 십자군들이 목숨을 잃었어요. 그때 한 뱃사람이 나타나 도와주는 척하고서는 소년들을 모두 노예로 팔아 버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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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200년 가까이 계속된 십자군 전쟁은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하고 끝을 맺었어요. 하지만 십자군 전쟁의 결과로 많은 변화가 있었답니다. 십자군 전쟁의 실패로 교황의 권위는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어요. 사람들은 더 이상 교황과 교회의 말을 믿지 않았어요. 영주와 기사들의 세력도 약해졌지요. 덕분에 왕과 상인은 힘이 세졌어요. 또 지중해를 통해 동방 세계와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도시가 생겨났지요. 상인들은 전쟁으로 많은 돈을 벌었고, 왕은 힘을 키우기 위해 상인들과 손을 잡았어요. 이렇게 십자군 전쟁으로 봉건 제도가 무너지면서 유럽 사회에는 새로운 변화가 찾아오게 되었답니다.
십자군 전쟁의 주요 인물들
4. 십자군 전쟁의 목적
십자군 전쟁의 목적이 신분마다 달랐어요?
십자군 전쟁은 셀주크 튀르크로부터 예루살렘을 되찾기 위해 일으킨 전쟁이었어요. 하지만 실제로는 신분마다 그 목적이 달랐어요.
십자군 전쟁 본문 이미지 4
5. 핵심 되짚기
1) 십자군 전쟁의 시작
예루살렘을 차지한 셀주크 튀르크가 비잔티움 제국까지 세력을 뻗치자, 이에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는 로마 교황에게 셀주크 튀르크를 물리쳐 달라고 요청했어요. 이로써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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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십자군 전쟁의 실패
제1차 십자군 전쟁에서는 십자군이 이겨 예루살렘을 차지하고 왕국을 세웠어요. 그러나 오랜 전쟁과 굶주림에 시달린 십자군들은 점차 사람들을 함부로 죽이고 물건을 빼앗았어요. 영주와 군사들은 땅과 물품을 빼앗는 데만 관심을 쏟았고, 상인들은 물건을 파는 데에만 힘을 쏟았어요.
3) 십자군 전쟁의 영향
십자군 전쟁은 200여 년 동안 이어졌지만 실패했어요. 이로 인해 봉건 제도가 무너지면서 유럽 사회에는 많은 변화가 생겼답니다. 교황의 권위가 약해지고 왕의 힘이 세졌어요. 또 상업과 도시가 발달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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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퀴즈
처음에 십자군 전쟁을 일으킨 목적은 무엇이었나요?
정답 : 크리스트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을 되찾기 위해서였어요.
'신이 인도하여 주시리라'
십자군 전쟁(1096년 ~ 1272년)
요약 팔레스타인을 다스리는 셀주크 투르크가 이슬람 교를 믿으며 기독교 순례자들을 학대하자 교황 우르반 2세가 십자군 운동을 제창했다. 십자군 전쟁은 결과적으로는 실패였으나 서유럽의 도시들이 십자군 원정에 힘입어 동서 교통이 활발해지고 상업이 활기를 띠게 되었다.
목차
셀주크 투르크, 기독교 순례자들을 학대하다
교황 우르반 2세, 하인리히를 궁지에 몰아넣다
우르반 2세, 예루살렘 탈환을 위해 종교회의를 개최하다
로마 교회 주도의 교회 재통합을 위해 십자군 운동을 제창하다
십자군, 8회에 걸쳐 예루살렘을 향해 진군하다
살라딘, 지중해 정세를 분석해 외교를 전개하다
이슬람 교도 살라딘, 기독교도의 예루살렘 순례를 허용하다
실패로 끝난 십자군 전쟁, 서유럽에 활기를 불어 넣다
셀주크 투르크, 기독교 순례자들을 학대하다
십자군 운동은 로마 교황의 세력이 등등하던 때에 일어났다. 중세에는 순례 의식을 중요시하였다. 순례는 고생스러운 여행과 위험을 겪으며 성지를 참배하고 영혼의 구원을 얻으려고 행해졌다. 수많은 순례지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곳은 그리스도의 무덤이 있는 예루살렘이었다.
11세기에 아라비아인을 내몰고 팔레스타인을 다스리게 된 셀주크 투르크는 이슬람 교를 열렬하게 믿으며 기독교 신자를 적으로 생각하여 기독교 순례자들을 학대하였다. 때문에 서유럽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셀주크 투르크의 손에서 탈환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셀주크 투르크
기독교 순례자들을 학대하고 동로마 제국을 공격한 셀주크 투르크의 영토.
교황 우르반 2세, 하인리히를 궁지에 몰아넣다
때마침 동로마 제국이 셀주크 투르크의 공격을 받아 서유럽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때 교황 우르반 2세(재위 1088~1099)가 나섰다. 우르반 2세는 교황으로 선출된 후 그레고리우스 7세의 정책을 이어, 성직 매매와 성직자의 혼인을 철저히 금하는 동시에 성직 서임권을 교황이 차지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그는 '카노사의 굴욕'의 주인공 하인리히 4세가 세운 교황 클레멘스 3세를 추방하는 일에 성공하였다.
우르반 2세
교회의 권위를 회복하고 십자군 결성을 주창한 교황.
우르반 2세는 하인리히를 궁한 지경에 몰아넣는 데 힘을 쏟아 1093년에 하인리히의 아들 콘라트를 신성 로마 황제로 세웠다. 콘라트는 교황의 지지를 등에 업고 부왕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하인리히 4세는 이 사건 이래로 실의에 빠져 나날을 보냈다. 우르반 2세는 마침내 스승 그레고리우스 7세의 원수를 갚은 셈이었다.
우르반 2세, 예루살렘 탈환을 위해 종교회의를 개최하다
1095년에 우르반 2세는 셀주크 투르크로부터 수도 콘스탄티노플까지 위협받고 있는 비잔틴 제국의 알렉시우스 1세로부터 구원을 요청받게 되었다. 그 요청은 기독교의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여, 투르크의 위협으로부터 기독교 국가 비잔틴 제국을 지켜 달라는 내용이었다.
동방에서 이동해온 셀주크 투르크는 1055년에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1071년에는 비잔틴 제국군을 격파하여 해안지대를 제외한 소아시아를 점령했으며, 그 후에도 시리아와 예루살렘을 지배 아래 두고, 1095년에는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건너편 해안까지 공격해온 것이다.
교황 우르반 2세는 1095년에 프랑스 클레르몽에서 종교 회의를 개최하였다.
클레르몽 종교 회의
우르반 2세가 성지 회복을 위한 십자군 결성을 주장하며 설교하고 있다.
그는 회의에서 이렇게 연설하였다.
"서구의 기독교도여, 높은 자나 낮은 자나 부한 자나 가난한 자나 근동의 기독교인을 구원하는 일에 진군하자. 하나님이 그들을 인도하시리라. 하나님의 정의를 위해 싸우다 쓰러지는 자에게는 죄 사함이 있으리라."
로마 교회 주도의 교회 재통합을 위해 십자군 운동을 제창하다
그가 성지 회복을 위해 십자군 운동을 제창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1054년 그리스도 교회의 동서 분열이 있은 이래로 거의 일관되게 동방의 비잔틴 제국과 그 교회가 로마 교회에 대해 우위에 서 있어온 역사를 이번 기회에 역전시켜, 로마 교회 주도로 동서 양 교회를 재통합해보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
교황의 연설을 들은 청중은 감격한 나머지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다!"고 외치며 성지 회복을 위해 싸울 것을 맹세하였다. 편성된 군대는 복장과 깃발에 십자가 표지를 붙였기 때문에 십자군이라고 불려지게 되었다.
십자군, 8회에 걸쳐 예루살렘을 향해 진군하다
다음해인 1096년, 역사적인 제1회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향해 진군하였다. 십자군은 3년에 걸친 고된 행군과 전투 결과 1099년 7월 15일에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 그때 우르반 2세는 중병으로 병상에 누워 있는 상태였고, 성지 탈환의 소식이 닿기 전인 7월 25일에 사망하였다.
1차 십자군
예루살렘을 공격하고 있는 십자군.
이렇게 시작된 십자군은 1096년부터 1272년까지 근 200년에 걸쳐 모두 8회 파견되었다. 제1회 때는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예루살렘 왕국을 건설했으나, 그 후는 대부분 실패로 끝났다. 실패한 이유는 횟수를 더할 때마다 국왕과 제후 그리고 이탈리아 여러 도시의 경제적 이해에 따라 좌우된 탓도 있으나, 상대편인 이슬람 편에서 영걸한 지도자가 나왔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이슬람 교도를 공격하는 십자군.
성전이라는 이름 아래 행해졌던 십자군 원정은 가장 추악한 전쟁의 하나로 기록되었다. 마드리드 국립도서관 소장.
살라딘, 지중해 정세를 분석해 외교를 전개하다
그 당시 북아프리카에는 이집트에 이슬람의 시아파인 파티마 왕조(909~1171)가 성립되어, 시리아에서 모로코까지 이르는 광대한 영토뿐 아니라 시칠리아 섬과 몰타 섬까지 차지하여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이 파티마 왕조의 재상이 되어 실권을 장악하고, 마침내 파티마 왕조를 쓰러뜨린 것이 살라딘(재위 1169~1193)이다.
살라딘
십자군에 맞서 이슬람 세계를 지킨 용맹한 용사이자 인도주의자.
그는 새로 아이유브 왕조(1169~1250)를 열었다. 술탄이 된 살라딘은 당시 지중해의 정세를 정확히 분석해 교묘한 외교를 전개하였다. 비잔틴 제국과 이탈리아 여러 도시와 동맹을 맺은 후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및 예멘을 차례로 정복하였다. 1187년에는 십자군이 세운 예루살렘 왕국을 타도하고 예루살렘을 탈환하였다.
이슬람 교도 살라딘, 기독교도의 예루살렘 순례를 허용하다
예루살렘이 함락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제왕(帝王) 십자군이라고도 하는 제3회 십자군(1189~1192)을 일으켰다. 살라딘은 침입해온 영국 왕 리처드 1세가 인솔하는 십자군과 격전을 벌이며 마지막까지 예루살렘을 지켰다. 1192년에 양국은 휴전 조약을 체결하고, 살라딘은 기독교도의 예루살렘 순례를 허용하였다.
살라딘은 경건한 이슬람 교도이며, 군인으로서도 용맹하고 과감한 용사라는 소문이 자자하였다. 그는 전투와 휴전 교섭에 즈음해서는 항상 인도주의적 정신을 발휘하여 약속을 성실하게 지켰다. 그는 십자군을 격퇴한 다음해에 병을 얻어 5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실패로 끝난 십자군 전쟁, 서유럽에 활기를 불어 넣다
십자군 전쟁은 결과적으로 실패로 끝났으나, 이 사건을 통해 서유럽에는 활기가 넘치게 되었다. 그리스와 로마 시대 문화의 중심지였던 도시들이 십자군 원정에 힘입어 동서 교통이 활발해지면서 상업이 다시금 활기를 띠고, 도시가 번성하게 된 것이다.
북이탈리아의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상인들은 지중해 무역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십자군 장병을 태운 배가 돌아올 때는 동방의 후추와 향료며 보석과 명주 등을 싣고 왔다. 이와 같은 현상은 십자군 전쟁이 없을 때에도 이어졌다. 지중해 무역이 주로 사치 상품을 다룬 반면, 발틱 해와 북해의 무역에서는 곡물 · 생선 · 목재 · 모피 등 주로 생활필수품을 다루었다. 이 무역은 독일의 뤼벡과 함부르크 등지에서 이루어졌다.
이 두 무역의 중계지에 위치한 독일과 프랑드르(지금의 벨기에)에도 도시가 생겨났고, 이탈리아의 피렌체는 모직물로 번영하였다. 은과 동의 광업으로 번영한 남독일의 아우크스부르크에는 대부호 푸거 가(家)가 등장했고, 그 재력은 능히 신성 로마 황제까지도 움직일 수 있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