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양성 종신서원 30년차 프랑스 성지순례기
대상자 : 박놀벨도 수사, 김바오로 수사, 전미카엘 수사
일정 : 2015년 10월 18일부터 11월 1일까지 (14박15일)
순례장소 :
프랑스내 한국초대교구장님들이셨던
조선 초대 교구장 브뤼기에르 (Bruguiere, 한국성 蘇, 세례명 바르톨로메오, 재임기간 1831년 9월-1835) 주교
2대 성 앵베르 주교(라우렌시오 범세형, 1835-1839)
3대 페레올 주교(요셉 고, 1839-1853)
4대 성 베르네 주교(프란치스코 장경일, 1854-1855)
5대 성 다블뤼 주교(안토니오 안돈이, 1866.3.7.-3.30)
생가, 세례장소, 서품성당 등 (아미앵, 엑상 프로방스, 마이넝 뀌뀌롱, 샤또 드 르와, 까르까손)
그 외 순례지:
파리외방선교회본부, 기적의 메달성당,
몽마르뜨르 언덕 예수성심성당,
루르드, 성요한마리비안네 신부님의 아르스
기타 관광 : 에펠탑, 세느강 유람선, 몽블랑 등정
귀국 : 11월 1일 주일
하느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두 형님 모시고 2주간의 성지순례 무사히 잘 마쳤습니다.
지나온 시간동안 섬김의 자세로 지냈듯이 앞으로의 시간 동안도 참회와 보속의 의미로 침묵하며
함께 살고 있는 형제님들을 섬기게 해 주소서.
순례동안의 서로 느낌을 나누었던 파리에서의 마지막 밤 평가시간에서도, 우리 서로는 너무도 즐겁고 감사한 순례였다고 술회들을 하였다. 나 또한 두 형님들을 모시고 섬기는 순례가 되어야겠다고 작정하고 한국에서 출발했건만, 지나온 시간 모두 서로가 서로를 섬기는 모습이었기에, 내가 섬겼던 것이 아니라 섬김을 받았던 기쁨을 누렸다. 젊은 형제들은 형제들대로 나이든 우리들은 우리들대로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면서 섬기는 모습은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날씨는 또 얼마나 좋았던지... 춥지도 덥지도 않고 화창한 날씨의 연속이었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릴 따름이었다.
인천공항에 착륙하여 오후 4시에 수도원 도착하여 짐 풀고 샤워하며 이발하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출발 : 첫날 10월 18일 월요일 맑음
프랑스 성지순례를 떠나면서 일상과 느낌을 적어본다.
이번 순례의 일행은 떼가누스 박놀벨도, 김바오로 수사님 그리고 나 이렇게 3명이다.
양라파엘 신부님은 사목현장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단다.
그리고 프랑스에서 우리를 가이드 하며 합류할
오요한보스꼬, 최대건안드레아, 강베드로 수사님들이다.
이번 순례는 여행 또는 관광이라기보다는 진정 섬기는 자세로 두 형님 수사님을 모시고 다니는 마음가짐이어야 하겠다고 다짐해 본다.
지난 세월동안 잘못 살아온 것에 대해 보속하는 마음이이야 하겠고, 누가 내 이웃인지에 대해 깊이
인식하여 조금이라도 방심하지 말고, 진중하게 침묵과 인내로서 두 분을 섬기며 다녀야 할 것이다.
‘허약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일수록 오히려 훨씬 더 요긴한 것’(1고린토12,22)이기에 부족한 서로가 타국 순례길에서 서로의 약함을 도아주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리라.
하루 전에 모여서 이번 순례동안 의사결정의 대표가 있어야 하는데 누가 했으면 좋겠느냐고 물으니 두형님이 흔쾌히 나보고 대표를 맡으란다. 해서 내가 대표를 하고 형님들의 의견을 묻고 결정나면 저에게 순명하시는 것으로 받아들이시겠느냐고 하니, “순명!”하며 약속들을 하신다. 고마웠다. 나는 이제 그분들을 헤아림과 기다림 그리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섬기는 행동만 지켜나갈 각오를 해야 했다.
몇일 동안 짐과 일정을 준비하면서, 죽음에 대해서도 묵상을 했다.
성지순례 떠나서 돌아오지 못할 수 있다는 “죽음 묵상”
방청소는 물론이고, 빨래와 서류정리등도 마무리 해놓고, 인수인계서류도 다 만들어 놓았다.
생의 애착이 없을 이 나이에 하늘나라로 가는 은총이 주어진다면,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옛 프랑스선교사들이 순교지인 한국으로 떠나듯이, 나도 이제 죽을 수도 있다는 순교의 마음으로
프랑스를 향해 떠난다.
(이 글을 쓰는 때는 프랑스 파리에 폭탄테러가 벌어져 많은 사상자가 생긴 뒤다. 휴~)
새벽에 일어나 여름내 쳐 두었던 모기장을 걷어 벽장에 넣어두고 방 정리를 하고 떠날 짐을 갈무리 했다. 아침기도와 미사 그리고 식사를 마치고 미결된 일을 사무실에서 마무리 한 뒤, 김알벨또 수사님이 운전봉사해주는 차를 타고 편안히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그러나 짐을 내리고 보니 나에게 운송을 부탁했던 김야고보 수사님의 짐 2개가 보이지를 않았다.
어제 내가 현관 옆 원장사무실에 넣어둔 것을 싣지 않고 온 것이다.
아~갑자기 머리가 띵 하며 현기증이 다가온다. 그래도 아직 다행인 것이 우리가 서둘러 일찍 떠나왔기에 남은 시간은 충분했다. 해서 한대건안드레아 수사님에게 전화를 걸어서 급히 그 가방 2개를 인천공항으로 가져오기를 부탁하고 김알벨또 수사님은 그대로 귀원하라고 했다.
우리는 우선 내린 짐을 가지고 탑승수속을 하고 짐을 부쳤다. 뒤에 오는 짐은 또 추가로 부칠 수가 있다고하니 나란히 비행자리를 배정받고 편안히 기다리기만 하면 됬다.
한대건안드레아 수사님을 기다리는 공항주변은 갑자기 시간이 정지한 듯 고요하게 느껴지는 것이
가을햇볕도 따사로웠다. 망중한을 누리며 수첩을 꺼내 오늘의 이 상황들부터 순례기를 적어본다.
한 시간 여 만에 한대건안드레아 수사님이 짐 2개을 내려주고 돌아간다. 김정길 수사님도 길가에 나와서 함께 무거운 짐 내리는 것을 도와주며 한대건안드레아 수사님에게 하시는 말씀이
“번거롭게 해서 미안해~”한다. 이번 일은 정작 내가 미리 준비 못한 잘못인데... 말씀이라도 고마웠다. 우리는 다시 모여 탑승 수속했던 카운터로 가서 추가 짐을 부치고자 했다.
드디어 또 문제가 발생했다. 김야고보 수사님의 짐 중 큰 가방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짐을 덜어내라는 것이다. 38㎏이니 5㎏을 빼라는 것이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지퍼에 자물쇠가 걸려있는 것이다. 그것도 열쇄가 있는 자물쇠가 아니라 번호키의 자물쇠였다. 우리는 갑자기 당혹스러웠지만,
전화를 걸어서 알아보자 하며 안심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도대체 야고보 수사님이 전화를 받지 않는것이다. 아~~~ 이 오전시간이면 주일미사를 하고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퍼뜩 들면서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별별 상상력을 다 발휘하여 번호를 돌려 보았으나 속수무책이었다.
그렇게 한 10여분 씨름을 하고 있는데 우리 모습이 안타깝게 보였던지, 승무원이 자기가 한번 열어보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난감함 속에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자물쇠를 돌려세웠다. 그런데 갑자기 기적처럼 자물쇠가 열린 것이다. 단 1분만에 그 승무원이 열은 것이다. 나는 그 열린 순간에 번호가 무엇이었느냐고 물으니, 자기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저 돌리다가 덜컥하고 열렸다는 것이다.
그러니 짐을 덜어내어도 다시 잠글 수는 없었던 것이지만 그것이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았다. 열린 것이 기뻤을 뿐이었다. 이제 여유를 갖고 농담을 주고받았다. “혹시 아가씨 집안에 잠금장치 여는 기술보유자가 있는 것 아닌가요?”하고... 우리는 모두 웃으며 옆자리의 승무원도 너무 놀란 듯이 서로를 쳐다본다. 기적이 따로 있나 이런 것이 기적이지... 성령님께 감사...
하여튼 이제 문제를 또 해결하여 짐을 마저 부친 후 우리는 검색대를 지나 탑승구로 향했다.
아침에 서둘러서 공항에 도착하면 여유있는 시간을 누리며 면세점에서 몇 가지 구입하려 했던 부식꺼리 (튜브 고추장, 젓갈 등)를 이제 구입할 수가 없게 된 10여분의 시간이 남았을 뿐이다. 그저 간단히 형제들이 원하는 담배 4보루만 구입하여 탑승할 수밖에 없었다.
파리행 비행기는 정상적으로 12시 30분에 움직이더니 12시 50분에 이륙하였다. 편안한 여행이 되기를 .. 기내에서나마 튜브고추장을 구입하려 했으나 면세품책자에 그런 품목이 없었다. 승무원에게 물어보니 역시나 판매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더니 나에게 기내용 튜브고추장 10개를 주는 것이다. 너무 고마웠다. 그 고추장은 프랑스 순례동안 유용한 밑반찬거리가 되었다.
이제 시차적응을 하는 것이 나의 생체리듬 숙제였기에 가장 우선적으로 내 시계자체를 8시간 뒤로 돌려놓고 파리시간에 적응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그것도 맘대로 잘 되지를 않는다. 자꾸만 시계를 쳐다보며 계산을 하게 된다. 이제 2시간만 가면 프랑스 파리에 도착이다.
무사히 프랑스 드골 공항에 착륙하여 입국신고하고, 짐 찾고 공항로비로 나왔건만, 이게 어떻게 된 거지? 하는 마음이 순간 들었다. 우리를 마중해 줄 반가운 얼굴들이 안 보이는 것이다.
3층으로 내려갔다가 5층으로 다시 올라가기를 반복하고 공항 밖에까지 나가 보았으나 그 누구도 보이지를 않는다. 해서, 나는 인천공항에서 정지시켰던 로밍을 풀고 전화통화를 시도했으나 잘 되지를 않아 급한대로 메시지를 보냈다. 20여분 만에 오요한보스꼬 수사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차가 너무 밀려서 늦는다고... 아직도 한시간을 더 기다려 달라고 미안한 듯이 부탁한다. 휴~~~ 이제 이렇게라도 연락이 다았으니 걱정없이 기다리기로 했다. 입국자들을 위한 공항홀이 너무 작아서 왠가했더니 공사중인가 보다.
프랑스 드골공항에서 마중나올 오요한보스꼬 수사님을 기다리며...
프랑스 드골공항에서 마중나올 오요한보스꼬 수사님을 기다리며...
프랑스 드골공항에서 마중나올 오보스꼬 수사님을 기다리며...
드골 공항에서 2시간반을 기다리고서야 오요한보스꼬 수사님이 공항에서 렌트한 승합차로 공항을 빠져나 올 수가 있었다. 공항으로 오는 고속도로에서 차량화재가 나서 정체가 심했다고 들려준다. 드골 공항에서 250㎞나 떨어진 자기 본당에서 주일미사와 유아세례식을 마치고 부랴부랴 달려 온 것이란다. 자꾸만 미안해 하지만 우리로서는 만났다는 것 만으로 고맙고 반가울 따름이다.
휴대폰의 네비게이션은 구글을 통해 한국말로 안내해주는데 숙소로 가는 길이 편안 했다.
프랑스에서까지 한국말 네비게이션 안내를 받다니... 밤 9시반이 되어서야 식당에 도착하였다.
한식당으로 우리는 안내하는데 주인아주머니가 서울 연신내가 고향이라고 한다. 친절하게 우리의
피로를 생각하여 권하는대로 김치찌개와 된장찌개로 훌륭한 저녁식사를 했다. 기본반찬으로 나온
총각김치가 왜 그렇게나 맛있게 잘 익었던지... 앞으로의 프랑스 식생활이 걱정된다.
바로 옆 10분거리에 위치한 파리외방선교회 숙소로 들어오다가 오요한보스꼬 수사님의 운전미숙(?)으로 (중형차량이 좁은 도로를 끼고 대문을 들어오기가 쉽지않았다) 철대문을 옆으로 긁고 말았다. 마당에 주차하고 확인해 보니 찌그러지진 않았는데 붉은 페인트가 넓게 긁혀 있었다.
휴~ 수리비가 백여만원 나가겠구나 하는 투덜거림이 속으로 터져 나온다.
긴 여행의 피로가 갑자기 몰려온다. 방에 들어와 짐을 풀고 잠을 청하니 밤 11시가 넘어간다.
이렇게 오늘 프랑스 성지순례의 첫날이 저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