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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시집 리뷰
뚝배기처럼, 혼용(混用)의 시학 -권성훈 『밤은 밤을 열면서』(실천문학, 2019)
시가 뚝배기 같다. 뚝배기를 펄펄 끓이는데 시간이 소요되듯, 권성훈의 시를 읽을 때는 시어의 온도가 임계점에 이를 때까지 고즈넉해야만 한다. 시인이 수수께끼를 내듯이 행간에 감쳐둔 중핵(中核)은 기다려야 육수처럼 우러나오는 것이다. 뚝배기는 가지각색의 재료들을 용해하여서 진한 국물을 낸다. 축적된 열이 재료들을 소화시키고 한 덩어리로 뒤섞는 것이다. 입천장이 벗겨지도록 뜨거운 국물을 삼키며 건더기의 맛을 분별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뚝배기는 후후 불면서 들이키는 맛, 목구멍을 타고 가는 뜨끈한 국물로 허기를 채우는 것이 참맛이다. 시집에서 시적화자는 “뚝배기같이 금이 간 정오”에, “설렁탕집에서 마지막 밥알을 건져 올”리며, “씹다만 부르튼 밥알을 넘기지 못하고”, “돼새김”(「남은 이유」)하고 있으며, 때론 “푹푹 끓”는 “뚝배기”를 “모락모락 피어나는 한 그릇 평화”(「꽃피는 복날」)라고 칭하기도 한다. 또한 화자는 “비 오는 날 명동 성당 골목집에서 감자탕을 먹”으며, 감자탕마냥 “나는 숭숭 뚫린 등뼈”(「감자탕」)를 가졌다고 진술한다. 이밖에도 뚝배기는 “손발 없이 내장으로만 피어났다”, “고난했던 오장육부가 담긴 욕계 한 그릇”(한길 순대)으로 묘사되기도 하고, “철거가 한창”인 “폐가”에서 “온갖 잡동사니가 게워 놓은 장기들의 마디”가, “순댓국 같은 더운 김을 뿜어 올린다”(「스티로폼」)고 표현을 하며, 시인은 뚝배기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드러낸다. 이처럼 시인에서 있어서 뚝배기는 생의 만연(萬緣)을 읽는 중요한 도구이다. 풍경은 뚝배기를 통해 저마다의 사연을 발설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세상살이란 살다가 먹고, 운 나쁘게 죽거나, 시인의 말대로 간혹 다시 살아나는 일(「그래서 환생」)이 아니겠는가. 투박한 그릇에 담겨있는 삶의 애환과, 인생의 지난함은 가히 ‘뚝배기의 시학(詩學)’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누군들 펄펄 끓는 국밥을 맛있다고 먹는 사람이 있겠는가. 국물에 바삐 밥을 말아서 허겁지겁 허기를 메우는 일이고, 또 한 끼를 건너는 일이다. 그리하여 다시 연명(延命)하는 것이다. 봄날은 가고 복날이 온다 뚝뚝 떨어진 붉은 꽃잎을 지나 봄날은 가고 드디어 핏기 가신 환한 웃음 짓는 복날이 온다 유기된 골목에서 봄날은 갔는가 사육된 철장에서 복날이 오는가 기관이 끊어진 감각을 발라내며 고통에서 분리된 고난을 섞어 가며 실룩실룩거리는 위생 관리 안 된 여름을 푹푹 끓이며 뚝배기로 온다 모락모락 피어나는 한 그릇 평화 구원은 언제나 뜨겁게 달아오른 한 올 털도 없이 찢겨진 기쁨같이 온몸 살로만 잎을 피운 슬픔같이 복날이 오고 봄날은 간다 늦게 나,온다고 으르렁거리는 식탁에서 울긋불긋한 봄날이 흐른다 바닥을 먼저 보인 당신도 쩝쩝 늘어난 평화를 개줄처럼 끌고 어느 낯익은 땡볕에 길게 묶여 있는가
-「꽃피는 복날」 전문
시인의 특기인 ‘묵시론적 세계관’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시이다. 음절의 유사성을 보이는 “봄날”과 “복날”의 대비와 신랄한 표현과 아이러니를 통해서 인간의 잔혹성을 강도 높게 폭로하고 있다. “붉은 꽃잎”, “뚝뚝 떨어”지는 ‘봄날’은, ‘봄철의 나날’을 일컫는 심리의 척도로서, 이는 사계절 가운데 특정 시기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기억 속 따뜻하고 화려했었던 시절을 일컫는 관용어이며, 시에서는 “울긋불긋한” 색감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핏기 가신 환한 웃음”짓는 ‘복날’은 생명의 기운이 가장 번성하는 ‘계절의 절정’을 지칭하는 표현인데, 시에서는 잔혹과 폭력성을 노출하는 표징으로서 활용하고 있다. 시적화자는 ‘봄날’이 가고, ‘복날’이 오는 경계에 있다. 두 시간대는 상당히 ‘밀접한 거리’를 가지고 있지만, “가고”, “온다”는 서술어의 대비를 통해 평행선처럼 결코 합치될 수 없는 이질적인 거리감을 유지하고 만다. “유기된 골목”, “사육된 철장”, “위생 관리 안 된 여름을 / 푹푹 끓이”는 날이며, “한 올 털도 없이 찢겨진 기쁨”같고, “온몸 살로만 잎을 피운 슬픔같”은 ‘복날’은 화자를 향해 다가“오고”있지만, 아직 채 이르지는 못했다. “온다”는 서술어는 “복날”이 아직 도래하지 않았으며, 화자를 향해 오고 있다는, 혹은 올 수도 있다는 일반적인 사실만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복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 다시 말하자면 ‘봄날’은 아직 ‘가지’ 않았다. 시적화자는 “봄날”과 “복날”의 틈이라 할 수 있을, 가상의 공간과 임의의 시간대인 ‘묵시론적 현장’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틈은 “오늘의 내가 어제의 나를 바라다보”고, “어제의 나로 오늘의 내가 들렀다 가”며, “너무나 많은 내가 나를 비추”는, “머나먼 거울 속 빈방”(「자화상」)같은 의미의 진공상태이자, 무중력의 공간이다. 다시 주목해야할 부분이라면 “당신”이 “개줄처럼”, “어느 낯익은 땡볕에 길게 묶여 있”으며, 또 개처럼 “으르렁거”리는 혼돈의 시간대에 반응하는 시적화자의 독특한 발화 방식이다. 그토록 지독한 ‘복날’이 들어있는 “뚝배기”를 “모락모락 피어나는 한 그릇 평화”라고 진술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구원”이라 일컫고 있다. 그리고 “늘어난 평화”를 “개줄처럼” 끄는 행위조차 기괴한 표현이라 할 수 있는데, ‘뚝배기’가 “늦게 나,온다고 으르렁거리는”것이 다음 행의 “식탁”인지, 아니면 불특정의 “당신”인지 조차 모호하게 처리되어 있다. 또한 쉼표를 통해 의도적으로 “나,온다고”를 분절한 점도 ‘내’가 늦었기 때문에, 대상이 으르렁거린다는 중의성을 가지게 만든다. 딱 부러지게 설명할 수는 없으나, 시어의 반복을 통해 시인은 ‘무언가’, ‘가고’, 또한 ‘무언가’, ‘오기’를 갈망하는 듯이 보인다. 이처럼 의도적으로 ‘묵시론적 혼돈’을 조성하는 시인의 발화방식으로 인하여 주체와 대상 간 ‘틈’에 가까운 ‘밀접한 거리’가 형성되고, 그리고 형태부터, 의미론까지 ‘지독한 아이러니’가 시의 골조를 이루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을 먹은 뱀으로 술을 담갔지 하늘이 든 독이 부글거리는 밤 농염한 혀가 시시각각 갈라지며 똬리 튼 항아리에서 까마득한 말씀이 새어 나오네 다른 신을 믿으라 미신을 섬기라 하나님을 욕하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내지 마라 네 부모를 공경하지 마라 살인하라 간음하라 도둑질하라 거짓말하라 네 이웃의 재물을 탐하라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새로운 아이러니라 삼천삼백 년 묵은 율법이 술독에 빠져 허물을 벗었네 이 얼마나 옳으신 팔할이 말씀인가
-「21세기형 십계명」 전문
시인이 구현해낸 ‘묵시론적 세계관’, ‘지독한 아이러니’의 발현을 살필 수 있는 시이다. “하나님”과, “뱀”, “술”, “십계명”은 모두 신약에 나오는 종교의 아이콘이며, “하나님을 먹은 뱀”으로 ‘술’을 담갔다니 성경을 뒤집는 도발적인 선언이자 역(逆)세계관의 제시이다. 시는 십계명의 역(逆)을 통하여, 진리(眞理)의 불안정성을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똬리 튼 항아리”의 “농염한 혀”가 내는 “까마득한 말씀”이란 곧 수사법으로서 시인이 활용하는 ‘지독한 아이러니’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정언(正言)을 떠받치고 있는 반언(反言)과 비언(非言)의 가능성을 통해 정법(正法)의 위태로움을 증명해내고자 하는 것이다. 즉 불안이란 존재의 배면(背面)에 맞붙어있는 그림자 같은 것이라, 고통과 위기, 혼돈은 생명활동에 수반되는 일반적인 제현상(諸現想)이 아니었던가. 따라서 시인은 아이러니라는 반언(反言)과 ‘묵시론적 혼돈’의 묘사를 통해서 그 너머에 있는 정언(正言)을 바로보고자 하는 것이다. 자신의 죽음으로 ‘부활(復活)’과 ‘신성(神性) 증명해낸 예수의 전지전능함처럼, 시인은 ’절망적인 아이러니‘를 활용하면서, 고통을 투과하여야만 그 자체를 바로 볼 수 있으며, 진정한 ‘구원’을 바랄 수 있다는 생(生)의 역설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저마다 검은 속내를 감추고 있는 순대같이 권선시장 어디쯤 한길로 닳아진 골목 있지 숨이 끊어질 때까지 목줄을 잡고 있던 입과 항문이 뱉어 낸 구부러진 거리마다 비워 내고도 충만한 생애 입김이 서려 있네 다만 터져 나오는 전생의 입구를 막고 시작과 끝을 둥글게 포개는 몸피 손발 없이 내장으로만 피어났다 오래 만져 왔거나 많이 걸어온 것들의 식사 휘청거리는 전·생·애를 건너가는 고단했던 오장육부가 담긴 욕계 한 그릇 꽉 찬 창자로 텅 빈 창자에 머물다 가네 피가 내장이 되고 내장이 피가 되어 삶은 삶이 한길에서 환생하는 여기는 도솔천
-「한길 순대」 전문
순대와 골목이 모티브를 이루고 있는 시이다. “비워 내고도 충만한 생애”, “시작과 끝을 둥글게 포개는 몸피”, “손발 없이 내장으로만 피어났다”, “꽉 찬 창자로 텅 빈 창자에 머물다 가네”는 생명을 지탱하고 있던 내장의 말이며, 그 내장으로 빚은 순대의 말이기도 하고, 사람들이 머물다 떠나는 골목의 말이기도 하다. 몸의 중심에 있는 내장은 생명이 직립할 수 있도록 몸을 지탱하며, 내장의 촘촘한 주름에는 시간의 잔흔이 스며들어 있다. 생명은 입으로 음식물을 섭취하고 항문으로 배설물을 배출한다. 내장은 입과 항문을 연결하는 “뫼비우스의 띠”(「드럼 세탁기」) 같아서, 안팎을 잇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피가 내장이 되고 내장이 피가 되”는 동안, “삶은 삶”을 향해 순환하고 거듭나는 것이다. 앞서 뚝배기가 만물(萬物)이 어우러지는 화쟁(和諍)의 상징이자, 존재의 현현(顯現)을 확인하는 물물(物物)이라면, 내장은 생명현상과 정신을 잇는 생명의 주요한 장기로서, 시인의 형이상학적 지향을 노출하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시인은 궁극적으로 뚝배기와 내장의 시학을 통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자라는 듯” “내장을 내주고도 희마하게 담긴” “뚝배기 한 웃음”(「보리살타 돼지」)의 초월적인 경지를 열어보이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새끼를 키우려고 새끼를 내다 팔던 할머니 지하 골방에 죽음이 다녀갔다 개를 기르던 노인이 노인을 기르던 개가 들어 있다 홀로 두고 발길 돌리기 안타까웠는지 두 장 빛바랜 엽서처럼 붙어 서로를 애처롭게 만지고 있다 이미 대가를 치렀다는 듯 한 생애를 지리고 나온 부패한 사연이 지독한 흉터로 인쇄된 증표같이 굳어져 떨어지지 않는다 개는 노인의 주검을 지키며 쉰 목소리로 부고를 짖어 댔을 것이다 한 달 동안 굶어 죽은 개소리가 노인이 끄지 못한 삼식 촉 백열등처럼 희미하게 저물어 가는 12월 우체통 수취인 없어도 뜨겁게 쓰다가도 차갑게 지우고 있다
-「골방 엽서」 전문
시인은 작고 사소해 보이는 사물들이 발산하는 은밀한 소리들을 포착하여서, 내밀한 문체로 표현해내는 재주가 있다. 그 중 시 세계를 포획하고 있는 가장 주요한 의미망은 죽음이다. 그의 시편에는 삶에도, 사물에도, 풍경에도 죽음이 묻어있다. 위의 시에서는 노인과 그가 키우던 개의 죽음을 ‘엽서’에 빗대어 말하고 있다. 죽음 이후 노인과 개는 “두 장 빛바랜 엽서처럼 붙어 / 서로를 애처롭게 만지고”있는 것이다. 삶에서 합치될 수 없었던 둘은 죽음을 통해 ”지독한 흉터로 인쇄된 / 증표같이 굳어져 떨어지지 않“으며 서로 간의 거리를 무화(無化)하고 만다. 소리는 물체의 진동에 의해 사람의 청각기관에 전달되어서 작용을 일으키는 공기의 파동, 매질의 진동을 가리킨다. 소리의 본질은 진동이고, 울림이다. 따라서 삶과 죽음에 있어 소리의 한계선은 엄격하게 구분이 된다. 삶이 소리를 주체적으로 양산해낸다면, 죽음은 소리를 소화시키지 못하고 반사하며, 또 한없이 미끄러지기만 하는 것이다. 죽음은 어떤 소리를 낼까? 물건에도 영혼이 있다면 어떤 소리를 내는 걸까? 시인은 무생물이 속삭이는 소리를 포착하는 민감한 청력을 가지고 있다. “한 달 동안 굶어 죽은 개”가 “쉰 목소리로 부고를 짖어”대고 있으며 ”노인이 끄지 못한 삼식 촉 백열등“이 내는 거뭇한 소리는, 오히려 부패한 냄새에 가까워 보인다. 시에서는 삶의 소리가 죽음에 수렴하듯이 가까워지다, 가벼워지고, 서로 간 스며드는 광경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주체와 대상은 “안에서 닫혀 있는 것은 밖으로 열리고 / 밖으로 닫혀 있는 것은 안에서 열”(「단추」)리는 서로의 ‘단추’가 되고, “너를 덮고 있는 체위로 나는 잡히고 / 나를 잡고 있는 체온으로 너는 열고 있는”(「손잡이」) ‘손잡이’가 되기도 한다. 우리들 사이의 거리는 합치될 만큼 가깝게 수렴하고 있는 것이다.
여름 베란다 한편 외출에서 돌아온 날들이 뒤섞여 있다 일주일도 넘은 쉰내 나는 아버지와 어젯밤 외박을 하고 온 비린 새엄마와 오늘 월경을 시작한 풋내기 누나 어디서 왔는지 묻지 않아 팔이 사타구니 속에 사타구니가 가슴 사이로 아랫도리가 윗도리 속에 윗도리가 아랫도리 사이로 서로 꿈에서 꿈으로 네가 내가 되어 내게서 네가 나오고 나에게 우리가 들어오기도 하는 안쪽과 바깥쪽이 있지만 없는 뫼비우스 띠 서둘러 돌아와서 돌아가 멈칫 돌아온 길을 돌아보며 다시 반대 방향으로 되돌아간다 몸과 몸을 섞으며 거리와 거리를 섞으며 시간과 시간을 섞으며 쉬었다 돌아가다 돌아와 그것들이 재미있다며 왔던 곳으로 뒤돌아간다 삑삑 소리를 내며 피범벅이 된 채 가끔 물처럼 긴 호스로 연결된 불이문(不二門)을 빠져나가기도 하는
-「드럼 세탁기」 전문
대상과의 거리감을 집요하게 탐색하던 시인은, 위의 시에 이르러 더욱 극단적인 장면을 연출해낸다. 시에서 “쉰내 나는 아버지”, “어젯밤 외박을 하고 온 비린 새엄마”, “월경을 시작한 풋내기 누나”등 위태로운 가족구성원들은 “팔이 사타구니 속에 사타구니가 가슴 사이로 / 아랫도리가 윗도리 속에 윗도리가 아랫도리 사이로”, 몸을 뒤섞으며, “서로 꿈에서 꿈으로”들어가 “네가 내가 되어 / 내게서 네가 나오”는 타락의 순간을 보여준다. 공동체는 “거리와 거리를 섞으며”, “몸과 몸을 섞으며”, “시간과 시간을 섞으며”, “안쪽과 바깥쪽에 있지만 없는”, 무중력의 공간에서, 인류 원초의 모습을 재현해내고 ‘뫼비우스 띠’를 형성한다. 이처럼 난해하게 꼬여있는 관계망은 앞서 언급한 세계의 기초이자 안팎이 연결되어 있는 ‘내장의 세계관’과 상통하는 것이다. 뇌옥에서 고통에 시달리던 공동체는 속죄의식이자 정화(正化)작용인, 기계적 구심력에 의해서 “삑삑 소리를 내며 피범벅이 된 채”,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고자 한다. 여기에서 “왔던 곳”은 모든 생명의 시원(始原)이며, 존재와 대상이 합일(合一)을 이루고, “우리는 물이 되고 바람이 되어 만”나며, “들숨과 날숨같이 서로에게 정박”하여, “나에게 닻은 너에게로 돋고 너에게 돛은 나에게도 닿는” (「닻과 돛」)곳을 뜻한다. 이처럼 권성훈은 죽음에 가까운 암울한 현실세계에서, 현상의 환부에 대한 더욱 적나라한 노출과 폭로를 통해, “밤이 밤을 열면서”(「폐차」), 고통 그 다음의 세계를 진단하고자 하며, 다양한 시적 시도를 통해 대상과의 끊임없는 합일(合一)과 혼용(混用)의 정신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해본다. 원조 국밥집에서 내는 뜨끈뜨끈한 국밥의 얼큰한 맛은 좋은 재료가 내는 것이었던가? 뚝배기가 내는 것이었던가? 아니면 내 허기가 내는 맛이었을까? 다시 물어본다. 권성훈의 시가 내는 씁쓸하고 고통스러운 감상은, 시대의 풍경이 내는 것일까? 불편한 시의 형식이 내는 것일까? 아니면 닫혀있는 독자의 마음이 내는 것일까? 아마도 답은 “삶은 삶이 한길에서 환생하는”, 권선시장 “도솔천”(「한길 순대」)의, ‘보리살타 돼지’나 알고 있지 않을까 싶은데, 고개를 숙이고 “불이문(不二門)”(「드럼 세탁기」) 너머에 있는 그를 만나러 가야겠다.
전 구|2018년 《사이펀》 신인상 문학평론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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