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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미 님’을 그리워하며
(이글을 故 김학 교수님께 바칩니다)
꽃밭정이 문학회 및 신아문예 수필창작 목요반 전용창
Ⅰ. 나도 울고, 하늘도 울고
“아~ 슬프다!” 그날은 너무나 슬퍼서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가슴속에서는 차디찬 겨울비가 내렸고, 하늘도 땅도 잿빛이었다. 사랑하는 ‘두루미 님’은 그렇게 한마디 말도 남기지 않으신 채 먼 곳으로 떠나셨다. ‘두루미’는 나를 5년간 수필지도 하신 김 학(金 鶴) 교수님의 예명이다. 그런데 이제는 ‘님’이라는 애칭으로 부르고 싶다. ‘님’은 ‘피천득’의 「수필」에 나오는 鶴아다. 학은 하루 종일 우렁하나만 먹고도 배고픔을 모르고 깊은 사색을 한다. ‘님’도 하루의 절반 가까이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보내셨다. 강의 준비와 제자들의 글을 받으면 첨삭지도 하시며 보내셨다. 첨삭된 글은 그날 아니면 다음 날 새벽같이 100여 명 제자에게 전해진다. 그뿐이랴? 여러 문예지와 문학 카페에도 올리시고, 한국디지털도서관에도 올리신다. 그렇게 열정적인 교수님께서 며칠이 지나도록 내가 보낸 수필을 열어보지도 않았다.
무슨 일이 있으실까? 메시지를 보냈다. 아무런 답이 없다. 전화를 했다. ‘나는 행복합니다.’ 컬러링이 울렸다. 그리고 통화가 연결됐다.
“교수님? 무슨 일 있으세요? 메일도 메시지도 열어보시지 않아서 전화했어요?”
“나 병원에 있어.”
“어디가 많이 편찮으신지요?”
“아니야 괜찮아. 다 나았어.”
“어느 병원 몇 호실인지요?”
“‘D' 병원인데 ‘코로나’로 면회도 안 돼, 다음 주에 퇴원해.”
“그럼 몸조리 잘하세요. 저도 교수님을 위하여 기도드리겠습니다.”
“고마워!”
이렇게 몇 마디 나눈 게 교수님과 마지막 통화다. 이삼일 내에 퇴원하실 줄만 알았는데 그로부터 나흘이 지난 2021년 1월 28일 아침녘에 사모님의 떨리는 목소리 전화다.
“지난밤 자정이 조금 지난 시간에 교수님께서 하늘나라로 가셨어요.”
“아니 지난주 저하고 통화하실 때 곧 퇴원하신다고 하셨는데 무슨 말씀이세요?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어요?”
“주치의 선생님이 약물중독 같다며 죄송하다고 하는데, 그분 운명이겠지요, 그동안 수고하셨다고 했어요. 자식들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가만있지 않았을 거예요.” 청천벽력같은 사실에 정신을 놓고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누구보다 건강을 챙기셨고, 저녁에 잠자기 전과 새벽에 잠이 깨면 ‘발끝 부딪치기’를 500~1,000번을 하신다며 자랑도 하셨는데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의료사고란 말인가, 뇌질환인가? 온몸이 떨렸다. 여러 생각을 하는 중에 지난해 늦가을부터 평소와는 다른 ‘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언제나 수업교재와 자신의 수필만큼은 직접 낭독하셨는데 눈이 침침 하시다며 교재는 'J 문우님‘에게 부탁했다. 또한, 평소에 앞만 보는 강직한 분이었는데 지난해 12월 4일, 「반성문 쓰는 아버지」라는 회고록의 수필을 발표했다.
Ⅱ. 예감은 있었다
그 내용은 이러했다. ‘나는 2남 1녀의 아버지다. 그 아이들의 나이는 어느새 40대에 접어들었다. 나는 자녀들에게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생각을 한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방송국 프로듀서로서 직장 일에 바빠 아이들과 놀아줄 시간을 내지 못했다. 또 문학을 한답시고 글 벗들과 어울려 밖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불평불만 없이 잘 자라주었다. 그러면 되는 것으로 여겼다. (중략) 사실 나는 아버지 노릇을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몰랐다. 아버지 역할을 배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내가 7살 때인 31세에 돌아가셨다. 아버지 상여가 나갈 때 어머니는 큰아들인 나에게 삼베옷을 입히고 대나무 지팡이를 들려주며 상여 뒤를 따라가라고 하셨다. 나는 부끄럽다며 그 상복을 입지 않으려고 버둥거려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렸다. 그런데 그때는 그것이 불효인 줄도 몰랐다.’(중략)
나는 반성문을 읽으면서 여러 번 눈시울이 붉어지곤 했다. ‘님’은 운명을 예견하고 이 글을 쓰셨을까? 글을 쓰시는 동안 아버지 상여를 생각하며 얼마나 애통하셨을까? 남은 생애를 계산하며 자식들에게 미안함을 남기셨지 싶었다. 수필 하단에는 이례적으로 본인의 약력도 구체적으로 기록하였다. 이 모든 게 영감 靈感이 와서일까(?) 신아문예대학 ‘서 회장님’은 모 일간지에 ‘님’에 대한 추모사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라는 글을 올렸다. ‘지난달 20일 아침 아홉 시께였다. 느닷없이 “다음 학기에는 강의를 못 하겠으니 후임을 선임하라”고 통고한다. (중략) 느닷없는 통고에 어리둥절해서 무슨 일이 있느냐고 몇 번을 물었다. “지금 병원에서 검진 중이다.”라는 말로 전화는 끊겼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운명을 예견하는 것일까?
「반성문 쓰는 아버지」에 이어 「호롱불세대와 전깃불세대」, 「지구를 아름답게」, 「멋진 노인의 삶」, 「한국의 수필」, 「만세는 왜 세 번 부를까」, 「배우는 늘 배우는 사람」, 「서울 바라기」, 「우리 집 10대 뉴스」, 「육필 편지 받는 기쁨」, 「수필은 어떤 문학인가」, 「내가 자랑하고 싶은 것 두 가지」 등을 남겼고, 2021년 1월 8일에 마지막으로 「글 쓰는 사람은 감사할 일들이 많아서 좋다」, 「글을 쓴다는 일」 등 두 편을 남기셨는데 한 달 동안에 무려 14편의 수필과 제자들의 수필집 발문을 여러 편 남기셨다.
몸이 아픈데 좀 쉬시지, 왜 그렇게 글쓰기에 몰두하셨습니까? 후학들에게 수필의 진수를 남기시려고 그리하셨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한번은 죽는다. 덴마크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을 ’절망‘이라고 했다. 미국의 임종 분야 전문의사인 ’퀴블러-로스‘는 죽음에 이르는 분노의 단계를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의 5단계라고 했다. 누구나 한 번은 죽음을 앞두고 절망과 분노의 단계를 거치나 보다. 그런데 ‘님’은 절망과 분노의 단계를 수필 속에서 뛰어넘으셨고, 「수필은 어떤 문학인가」에서 ‘수필은 마음의 예술이자, 고백의 문학이다’며 수필과의 인연으로 감사하고, 행복했다며 받아들였다.
Ⅲ. 사랑의 노래
교수님이 떠나신 지 보름도 지났다. 삼우제가 지나고부터 추도의 글을 한 편 남겨서 고인에게 바치려고 했으나 몇 줄 쓰고 나면 가슴이 울적하고 답답하여 더는 쓸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에 친구가 불후의 명곡이라며 동영상을 보내왔다. 한국의 젊은 성악가 ‘임태경’과 영국의 성악가 ‘폴포츠’가 열창하는 ‘나훈아’의 「사랑」이었다.
‘이 세상에 하나밖에 / 둘도 없는 내 여인아 /
보고 또 보고 또 쳐다봐도 / 싫지 않은 내 사랑아(중략)
행여 당신 외로울 때 / 내가 당신 친구가 되고 /
행여 당신 우울할 때 / 내가 당신 웃음 주리라 /(하략)
나는 이 노래를 ‘님’과 함께 들은 적이 있다. 남해 유배문학관 문학기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버스 속에서 어느 문우님이 절규하며 부른 노래다. 그때 ‘님’은 혼자 말씀을 하셨지요. “짝을 잃으면 저토록 애통하고 괴로운 것일까?”라고요. 누군가 나에게 귀띔해 주었다. 저분은 상처한 지 7년이 되었는데 아직도 저리 슬픈가 봐요…. 그러니 이제 홀로 되신 사모님은 얼마나 외롭고 적적하실까?
Ⅳ. 추억을 회상하며
‘님’이시여? 다시 못 올 그 먼 곳을 떠나가심을 예감이라도 하셨으면 그렇게 힘드시고 외로우실 때 저를 한 번쯤 부르시지 그랬습니까? 고향 박사마을 삼계를 다녀오자고 말이에요? 7살 때 마지막으로 본 아버지 가신 길을 가보자고 하시지 그랬어요. 이년 전인 2018년 가을이다. 제14회 '원종린 수필문학상 대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을 때 저랑 같이 식장에 가고 싶다고 하셨지요. 찻 속에서 사모님은 “저 양반 별명이 뭔지 아세요? ‘목석같은 사람’입니다.” 나는 편애하지 않고 목석같이 산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일까 생각해봤다. 식장에서 큰 아드님 내외와 따님의 꽃다발을 받고 기뻐하시는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돌아오는 길에 공주 마곡사에 들렀다. 그때 사모님께서는 “저 양반은 저렇게 걸음이 빠르시다.”고 하실 정도로 앞장서서 걸으셨다. ‘김구 선생님’이 은신하신 ‘백범당’에 들려서 벽면에 걸린 ‘서산대사’의 선시 ‘답설야중거’를 함께 바라보았지요.
(전략) 今日我行跡 (금일아행적) 오늘 내가 남긴 발자국이
遂作後人程 (수작후인정) 뒤에 오는 사람의 길이 되리니
그 시가 ‘김구 선생님’의 좌우명이었다고 하시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요? 후학들이 많이 배출되어 우리 고장 전북이 수필의 메카로 자리매김하기를 바라셨지요.
‘님’은 수필을 위하여 태어났고, 수필과 함께 한평생을 사셨다. 등단 30주년 기념으로 <수필아, 고맙다>라는 수필집에 실린 내용이 그렇다.
‘나는 요즘 날마다 수필에게 절이라도 하면서 감사의 인사를 건네고 싶다. 수필은 나에게 엔도르핀보다 4천 배나 더 성능이 좋다는 다이돌핀을 퐁퐁 솟아나게 해 주는 소중한 친구다. (중략)
‘내가 수필과 사귀기 시작한 지는 어느새 반백 년 가까이 된다. 내가 처음으로 수필이라고 쓴 건 1962년 대학교 1학년 때였다. <아웃사이더의 사랑 이야기>란 흉내 내기 수필을 ‘전북대학신문’에 발표했었다. 그때는 반응이 좋아서 우쭐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 뒤부터 꾸준히 수필과 친교를 나누며 다정하게 지냈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자면 수필을 향한 나의 일방적인 짝사랑이었다고 하는 게 옳다.‘
‘또 서해방송 프로듀서가 된 뒤 나는 수필과 더 가까워졌다. 1970년대 초 <밤의 여로>란 프로그램을 맡아 2년 반 동안 날마다 수필 한 편씩을 써서 그 수필에 감미로운 음악 3곡을 섞어 방송을 했었다. 그런데 그 프로그램에 대한 청취자의 반응이 무척 좋았다. 수필가도 아니면서 날마다 글을 한 편씩 썼으니 얼마나 고충이 컸겠는가? 돌이켜 보면 그때가 내 수필쓰기의 지옥훈련 기간이었던 셈이다.‘ (중략)
‘정년퇴직 이후 나에게 즐거움과 기쁨 그리고 삶의 보람을 가져다준 것도 수필이다.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과 전주안골노인복지관에 수필창작반을 개설하여 수필을 사랑하는 후배들과 함께 수필 공부를 할 수 있게 된 것도 수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정년퇴직 이후 누구나 느끼는 허무감과 무력감을 맛볼 짬도 없이 나는 즐겁고 보람차게 나의 2모작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중략) 2008년부터 중앙교육이 출간한 고등학교 작문 교과서에 내 작품 <수필, 그 30초 전쟁>이 수록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내가 어찌 “수필아, 고맙다!”라는 인사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뒤 ’수필아 고맙다‘는 후학들의 건배사가 되었다.
‘님’이 남긴 「행복 전도사」라는 수필에는 ‘나는 스스로 행복전도사가 되려고 노력하며 산다. 그러기에 우리 집 가훈을 ‘이웃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이라고 정했던 것이다. 나의 이웃이 나 때문에 조그만 기쁨이라도 얻을 수 있기를 바란다. 나에게 스마트폰으로 전화를 걸어 본 사람이라면 <나는 행복합니다>란 노래를 들을 수 있을 줄 안다. 내가 그 노래 값을 지불하고 스마트폰에 담아두었기 때문에 내 스마트폰에 전화를 걸면 누구나 공짜로 그 노래를 들을 수 있다. 그 노래를 듣는 사람은 그만큼 행복해질 것이다.‘ (중략)
Ⅴ. ‘님’의 발자취
‘님’의 지인인 수필가 ‘P 교수’는 「불광불급(不狂不及) 전문 수필가, 삼계 김학」이란 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김학 선생은 생활 자체가 수필이다. 무엇이든지 미치지 않고는 이르지 못하는 것인데 김학 선생은 수필에 미치다시피 천착해왔다. 그래서 수필로 일가를 이룬 분이고 수필로 참 행복하게 사는 분이다. 핸드폰 컬러링도 ‘나는 행복합니다.’를 사용하고 있다.‘ (중략)
‘전북은 자타가 인정하는 수필의 메카이다. 그 수필 메카의 초석을 놓은 분이 김학 선생이기도 하다. 서해방송 PD시절, 1970년 밤의 여로를 맡아서 2년 반 동안 매일 수필 한 편씩을 써서 방송하다가 그 뒤 전북의 문인들에게 청탁해서 방송을 했고, 1978년 송년모임에서 김학 선생이 산파 역할을 해서 전북수필문학회를 창립하기로 하고 1979년 10월 전북수필문학회를 창립했고, 『전북수필』 창간호가 발간되었다. 그렇게 해서 전북에 최초의 수필문학회와 수필전문지가 탄생했다. 전북수필은 벌써 39년째이고 85집까지 발간되었으며, 회원은 150명 정도가 되었다.’(*2020년은 90집)
‘이렇게 『전북수필』이 크게 발전하는 데도 김학 선생의 역할이 아주 컸다. 전북수필문학회 2대 회장을 맡아서는 『전북수필』을 크게 활성화시켰고, 전북수필문학상을 만들기도 했다.’ (중략)
‘수필확산의 큰 획을 긋기 시작한 것은 KBS를 정년한 2001년 9월부터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전담교수를 맡으면서부터이다. 70세까지 전북대에서 수필창작을 지도하면서 수강생들을 대상으로 행촌수필문학회를 창립도록 하여 <행촌수필> 38호가 출간되었고, 이어서 2008년에는 안골노인복지관, 2011년에는 꽃밭정이노인복지관, 2015년에는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반을 지도하면서 문하생 210여 명을 수필가로 배출했고, 신춘문예에 5명(전북일보 김재희/ 전북도민일보 정원정, 정성려/ 경남신문 이주리/ 동양일보 이은재), 각종 각종문학상(목포문학상: 정원정, 조윤수/ 토지문학제 평사리문학대상: 박일천) 등을 배출하기도 했다.’ (중략)
‘전북문협회장을 역임하고 다음 회장에게 인계해 줄 때는 9백만 원의 거금을 넘겨주었고, KBS전주방송총국 편성부장 때는 현대자동차에서 4천만 원의 협찬을 받아서 <전북의 어른상>을 만들어 시상하기도 했다.’(중략) 김학 선생은 ‘유영금 여사’와의 사이에 2남 1녀를 두었다. 유영금 여사는 초등학교 교사시절 김학 선생과 결혼했는데, 김학 선생은 인생에서 가장 잘 선택한 일이 유영금 여사를 만난 것이라고 자랑한다, 특히 전주사범병설 중, 전주여고, 전주교대를 나와서 머리가 아주 좋다고도 했다. 큰아들 정수는 LGU+ 부장, 작은아들 창수는 미국 카네기멜론대학 전자공학박사로 ‘퀄컴사’에서 간부로 근무하고 있고, 딸 선경은 서울 광운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있다. 몇 년 전에 미국에 갔을 때 작은며느리가 술을 끊으라고 해서 바로 술을 끊었다고도 한다. 그때 며느리가 사준 오렌지색 운동화를 늘 신고 다니면서 지금도 운동을 한다.‘ (후략)
Ⅵ. 추모 행렬
일간지 및 카페에 실린 ‘님’에 대한 추모의 글이다.
‘故 김학 원로수필가를 그리워하는 지역 문인들과 고인의 제자들이 29일 오전 11시 30분 전북대 장례식장에 모여 추도식을 열었다. 이날 추도식에는 고인의 제자들인 행촌수필문학회 회원들과 고향 임실문협 회원 등 15명이 참석했다. 영호남수필 회장, 행촌수필 회장, 전북예총 사무처장, 전북수필과 비평작가회장, 사무처장, 임실문협 회장 등이다.’
‘추도식에서는 고인의 수필문학 업적 보고와 함께 ’김춘자 수필가‘가 수필 「봄」을 낭독하며 유족들을 위로하고 명복을 빌었다. ’김정길 영호남수필 회장‘은 “선생은 수필로 일가를 이룬 분으로서 후학 양성에 힘써 전북은 물론 한국수필문학발전에 많은 공을 세웠다”며 “김학 선생이 없어도 동료 제자들이 그 뜻을 이어받아 수필문학을 발전시키겠다”고 다짐했다.‘
‘신영규 수필과 비평 회장’은 “선생께서 이렇게 홀연히 떠나시다니 너무 충격이 커 비통한 심경을 금할 수 없다”며 “부디 하늘나라에서도 수필문학을 조직해 그곳에서도 좋은 글을 써서 영원토록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안타까운 심정을 전했다.‘
구순을 바라보는 '고재흠 문우님'은 ‘코로나19’로 빈소는 가지 못했다며 장례식 상황만 물어왔다. 그런데 도저히 그냥 있을 수 없다며 추모공원에 가시고 싶다고 했다. 함께 화장장에 갔다. 그곳에 차려진 영정 앞에서 무릎을 꿇으시고는 고인의 덕망을 칭찬하시더니 “이렇게 허망하게 떠나셨습니까?” 그만 오열을 하시어 유족들과 함께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추모공원에서도 조문하고 歸信寺에 들리자고 했다. 대적광전에 들려서 다시 한번 명복을 빌으셨다. 본인이 2001년 전북대 평생교육원 수필창작반 설립 시 1호로 접수했으니 제자 중 첫 번째라며 긍지도 있으셨다.
고인의 제자인 '김세명 신아문예 작가회장님'도 추도사를 남겼다.
‘2021. 1. 28. 11:30 사무국장이 그동안 우리 작가회 단체 지역문화육성자금 신청에 수고하여 점심 약속을 하고 이동하던 차에 교수님의 부음을 들었습니다. 이렇게 황망 할 수가 있습니까? 교수님 편찮다는 걸 누구도 몰랐습니다.’ (중략)
‘항상 인자하고 과묵하시며 칭찬하라는 좋은 사회운동을 하셨어요. 매일 올라오던 글이 메일을 열어봐도 올라오지 않아 안부가 궁금해 전화를 하니 ‘나는 행복합니다’ 노래가 울리고 전화를 받으시기에 “교수님 안부 전화 올렸습니다. 점심 함께하지요?” 하자 교수님은 약간 어눌한 목소리로 “병원에 있어.” 그 말이 마지막 말씀이셨습니다. 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 뜬구름 같은 세상사 이별 하셨으니 좋은 곳으로 가시고 김 학 교수님 명복을 빕니다. 영면하소서 ······‘
제자 ‘석청/김재교 문우님’은 「고사」라는 한시로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고사(告辭)
석청 김재교
飛學珖翼長隨筆 / 庭前萬頃流流水 / 筆下多讀正筆士 /
傳敎得習進世世 / 天師隨筆不復生 / 影必敎書發潛日 /
‘나르는 학의 여유롭고 높게 빛이 서린 수필 / 뜰 앞 만경강 유유히 흐름 탄 무너미 한 낙엽배 글 / 슬하에서 많은 문필들이 생성 되어 / 세상 곳곳에서 문학의 세계를 만들고 있다 / 하늘이 내린 스승님 가르침은 다시 못 들으니 / 님의 가르침 잠 일대 해 뜸같이 아름다운 꽃을 피우리라’
제자 ‘구연식 문우님’은 「운명」이라는 수필로 명복을 빌었다. (전략) ‘교수님한테 평상시에 잘 안 보이던 행동이 예감된다. 발문을 쓰시는데 자료를 충분히 드렸는데도, 더 필요하다며 “긴급 연락”으로 사흘이 멀다고 세 번이나 요청하셨다. 그래서 발문도 꼼꼼히 시집보내는 막내딸처럼 구구절절하게 적어주셨다. 1월 20일에 인사도 드릴 겸 수필 1편을 첨삭지도 부탁드렸는데 소식이 없었다. 그간 “긴급 연락”으로 자료를 요청하시더니 어디 여행이라도 떠나신 것일까? 짐작하고 마무리한 것이 은사님과 마지막이었다. 운명을 예견하시고 “긴급 연락”으로 서두르셨는지? 미물만도 못한 나 자신이 한없이 죄스럽고 가슴에 멍울이 맺혀있다.(중략)
더구나 은사님이 마지막 첨삭 지도하셨던 「노인과 낙엽」은 은사님의 소천을 예견하고 쓴 글인 것 같아 더더욱 마음에 걸린다.‘ (중략)
‘하늘에는 싸락눈이 내려 오르던 길 멈추고 아파트로 내려오고 있다, 산비탈 어느 집 솟대 위에 앉은 기러기 등에도 싸락눈이 소복하다. 낙엽이 얼어 살짝만 밟아도 바스락거린다. 낙엽이 데굴데굴 굴러가면서 그래도 한마디 한다. "노인님, 당신도 언제인가는 땅에 묻히고 그 위를 내가 덮어 줄 테니까 너무 서러워하지 마시오." 어느 피붙이보다도 임종을 지켜줄 친구인 것 같다. 나 닮은 것 같은 늙고 쓸모없는 것이라고 미워했던 낙엽을 보며 반성을 한다.‘ 〈노인과 낙엽〉 중에서
‘은사님이 지도해주셨던 불초 제자 수필집 《그리움을 담아서》를 은사님 영전에 올립니다.’ 2021년 1월 12일 <구연식 수필집 발문> 노교육자의 수필 사랑 이야기 『그리움을 담아서』 출간에 부쳐-가 ‘님’께서 카페에 올린 마지막 작품이다. 조문을 나온 어느 문우님은 대형도서관이 사라졌다며 안타까워하시기도 했다. ‘님’에 대한 추모의 글은 이외에도 많은 분이 남겼으리라.
Ⅶ. 석별의 정
돌이켜보면 ‘님’과 함께한 5년이란 세월은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 1년 차까지 인연을 맺은 기간이다. 미치지 않고는 도달하지 못한다며 불광불급(不狂不及) 정신을 전수하였지만 글쓰기가 힘들어서 잠시 멈춘 적도 있었다.
그때 ‘님’께서는 “요즘엔 왜 수필이 안 오네. 무슨 일 있나?”며 한편의 동영상을 보내주었지요. 제목이 「Never give up!」 이었다. 엄마 오리와 새끼 오리 12마리가 봄나들이 가는데 3단으로 된 돌계단이 가로 막았다. 엄마가 먼저 올라서 '짹 짹 짹 짹' 신호를 보낸다. 11마리 새끼가 올라가서 자리를 떠났지만 늦둥이 막내는 도저히 오르지 못한다. 엄마는 막내를 부르며 떠나지 않았다. 엄마는 손이 없으니 그저 부르기만 할 수 밖에 없다. 측은했다. 막내가 넘어지기를 7번 반복하더니 마지막 계단을 오른다. 엄마는 날개로 감싸준다. 엄마가 있는 한 막내는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불과 2분 남짓한 동영상이었지만 나는 엄마가 새끼들을 사랑하는 모성애에 깊은 감동을 받았고, 새끼들은 엄마가 있는 한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는 도전정신을 보았다.
나는 글쓰기가 힘들 때마다 이 영상을 떠올린다. 내가 ‘님’께 보낸 마지막 수필은 2021. 1. 14. 일 보낸 「합평회 유감」이다. 이 글은 나의 208번째 글이다. 합평을 하는 시간이 상대방을 칭찬하는 축제의 한마당이 되기를 바라는 글이다. ‘님’은 내 작품에 'LOOK'라는 이모티콘을 붙여주었다.
Ⅷ. 님의 고백
‘님’은 지난해 말, 「내가 자랑하고 싶은 것 두 가지」라는 글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이렇다. ‘칭찬거리 찾기와 우리 집 10대 뉴스 쓰기를 창안해 냈다.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수강생들에게 칭찬거리를 찾아 발표하도록 했다. 칭찬의 대상은 제한하지 않았다. 1주일 동안에 칭찬거리를 찾아서 그 중에서 가장 좋은 내용을 발표하도록 했다.’ (중략) ‘칭찬경영이란 말이 있다. 직장에서 아랫사람의 잘못을 지적하고 꾸짖기만 하는 것보다는 아랫사람을 칭찬하여 사기를 진작시키는 게 효율적인 경영이라는 이야기다. 「우리 집 10대 뉴스」를 기록하는 걸 나무에게서도 배웠다. 나무는 해마다 자기 몸에다 문신처럼 나이테를 새긴다. 나무는 말도 못 하고 문자도 모르지만, 자신의 살아온 역사를 나이테란 기록으로 남긴다. 그 나이테를 보면 그 나무의 나이가 몇 살이고, 어떻게 성장했는지 알 수가 있다.’
칭찬의 시간은 나에게 가장 보람된 시간이었다. 남을 위해 훌륭하게 사시는 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도 많이 반성도 하며 타산지석으로 삼았다.
‘님’은 ‘우리 집 10대 뉴스’를 발표할 때 그 어떤 때보다 활력이 넘치셨다. 「2020년 우리 집 10대 뉴스」에는 손주들에 대한 사랑이야기로 가득했다. ‘큰손자 김동현은 대진고등학교로, 외손자 안병현은 휘문고등학교로, 미국의 손자 김동윤은 샌디에이고에 있는 Carmel valley middle school 1학년이 되었다.’(중략) ‘미국 손자 김동윤은 미국 샌디에이고 카운티 주최 바이올린 경연대화 초‧중 리그 120명이 참여한 가운데 2등으로 입상하여 상금 30만 원을 받다. 상금 전액을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에게 기념품을 마련하여 보내주었다. 그 오케스트라에서 손녀 윤서는 콘서트마스터로, 손자 동윤은 수석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하략) ‘연말에는 예기치 않는 문학상을 받았다. 전북PEN CLUB을 창립하여 초대 회장을 맡아 활동하던 중 <이강주> 대표인 ‘조정형 회장’의 지원을 받아 작촌문학상을 만들었는데, 이번에는 ‘선산곡 회장’이 ‘전북PEN기림상’을 만들어 내가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다.‘
저 지난해에는 한 해에 수필집 두 권(하루살이의 꿈, 지구촌 여행기)을 출간한 내용과 미국에서 세계적인 통신사인 ‘퀄컴사’에 다니는 작은아들이 우리나라 이사 격인 Senior Staff로 승진했다는 이야기, 고명딸 김선경의 서울시교육감상 수상, 삼계초등학교 100주년 기념식장에서 ‘자랑스러운 삼계인상’ 수상, 3월 1일부터 4박 5일 동안 태국을 비롯하여 라오스와 미얀마를 다녀왔고, 열여섯 번째 수필집 『지구촌 여행기』를 출간한 뒤 KBS 1 TV <공감 토크, 결> 이란 50분짜리 프로그램에 출연한 이야기로 수놓았다. 모쪼록 자녀들과 손주가 국내에서 해외에서 열심히 살고 있으니 감사하다고 고백했다.
Ⅸ. 고별사
‘두루미 님’께!
‘님’이 떠나신 지 스무날이 지났건만 아직도 꿈인지, 생시인지 가슴이 먹먹하기만 합니다. 사랑하는 사모님과 2남 1녀 피붙이, 두 분의 며느님, 6명의 손주가 눈에 밟혀서 어떻게 눈을 감으셨습니까? 산수도 지나지 않았는데 왜 그렇게 서둘러 떠나셨습니까? ‘님’에 대한 예감을 설마로 생각한 나 자신이 죄스럽기만 합니다. 병상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시며 얼마나 애통하셨습니까. “짝을 잃으면 저토록 애통하고 괴로운 것일까.”라고 하시면서 사모님을 홀로 두시고 어떻게 떠나셨습니까?
‘님’은 운명을 예감하시고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않으셨습니다. 고통이 엄습할 때마다 작품에 몰두하셨을 ‘님’은 수필이 삶의 전부였습니다. 수필 속에 살아왔고, 수필과 함께 마지막을 보내셨습니다. ‘님’은 모든 것을 준비하셨습니다. 자녀들이 멀리 떨어져 있어 산소관리를 할 수 없다며 오래전에 조부모님과 부모님을 ‘모악추모공원’으로 이장하였다고 하셨지요. ‘님’도 조상님 곁에 편히 안장하였습니다. 그곳 107호실 197함이 ‘님’이 지상에서 영면하실 안식처가 되었습니다. 107197은 ‘님’의 고유번호입니다. ‘님’이 떠나신 뒤, 남기신 장서 4~5천 권은 ‘님’의 뜻을 받들어, 임실 ‘삼계’ *박사마을로 보냈다고 합니다. 그곳 고향에 도서관이 들어선다고 합니다. 도서관이 완성되면 ‘님’의 코너가 생기고 수필의 성지가 될 것입니다.
사모님도 ‘님’을 존경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글만 쓰신다고 미워했는데, 늘그막에도 할 일이 있고, 많은 제자를 두고 있는 게 존경스럽다고 저에게 얘기했답니다. 자녀분들도 모두 ‘님’의 성품을 닮았습니다. 큰 아드님은 삼우제를 마치고 모든 문우님께 감사 인사를 드렸고, 작은 아드님은 아직껏 미국으로 떠나지 않고 어머니가 안정을 취하기를 돕고 있다고 합니다. 고명 따님은 아버지가 자식보다 수필을 사랑했지만 존경하고 사랑한다며 아버지가 원하시는 게 무엇인지 생각한다고 했어요. 손자, 손녀도 국내·외에서 머리가 될 것입니다.
‘님’께서는 주님을 사랑하셨고, 집사의 직분도 받으셨지요. 주님께서는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슬픔 중에 있을 때에도 즐거워하는 자들과 즐거워하며 우리가 즐거울 때에도 슬픔 가운데 있는 자들과 슬퍼하라는 권면이라 생각합니다. 아직은 힘들어도 잘 헤쳐 나갈 거예요. 7살 소년이 가장이 되어 거목으로 성장했잖아요. 신아문예대학 수필반도 훌륭하신 ‘전일환 교수님’을 청빙했어요. 슬픔을 잊고 다시 일어설 거예요. 부디 하늘나라에서는 세상의 번뇌를 잊으시고, ‘난’처럼, ‘학’처럼, ‘청자연적’처럼 향내 나는 아름다운 삶으로 승화하여 천수를 누리시길 빌겠습니다. 끝.
(2021. 2. 19.)
* 박사마을 : 전북 임실군 삼계면은 박사가 많이 배출된 곳으로 유명하다. 전체 인구가 2,000명도 안되는데 배출된 박사가 170여 명이나 된다니 가히 기네스북에 오를만하다. 두 집 건너 한 집에서 박사가 난 셈이다. 그 이유로는 조선시대 무오사화 등을 피해 낙향한 유학자와 경주 김씨, 청주 한씨, 풍천 노씨, 양천 허씨 등 선비 가문이 많은 데다, 향학열이 남달리 높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삼계는 ‘엿’으로도 유명하다. 자식은 박사 되고, 부모는 엿 만드는 마을… '박사골 엿마을'
■ 수필가 김학 경력과 작품세계
1943년 전북 임실 출생인 고인은 전북대 사학과를 졸업한 후 전주해성중·고 교사와 서해방송 프로듀서, KBS 전주방송총국 편성부장을 지냈다. 1980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해 전북문인협회, 전북펜클럽 회장 등을 역임했다. 전북 수필계의 원로인 고인은 40여 년간 수필가로 활동하며 수많은 문하생을 길러냈다. 전북수필문학회 회장, 대표에세이문학회 회장, 임실문인협회 회장, 전북문인협회 회장, 전북펜클럽 회장,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부이사장,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전담교수 역임, 안골노인복지관, 꽃밭정이노인복지관, 신아문예대학 등에서 후학을 양성하는데 열정을 쏟았다.
저서로는 《손가락이 바쁜 시대》 《수필아, 고맙다》 《지구촌 여행기》 등 수필집 17권, 《수필의 길 수필가의 길》, 《수필의 맛 수필의 멋》 등 수필평론집 2권이 있다. 2019년에 출간한 『지구촌 여행기』를 2020년에 한국문학방송에서 전자책으로 출간했다.
펜문학상, 한국수필상, 영호남수필문학상 대상, 연암문학상 대상, 신곡문학상 대상, 임실문학상 대상, 전라북도문화상, 전주시예술상, 전북문학상, 목정문화상(문학부문), 전주시예술상, 대한민국 향토문학상, 한국현대문학 100주년 기념 문학상 수필집 부문 금관상, 원종린 수필문학상 대상, ‘전북PEN기림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