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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사랑'2009년 2월호 토박이의 음식기행 <중국집의 추억>
http://www2.seoul.go.kr/web2004/seoul/publication/seoul/200902/ 30~32쪽
중국집의 추억
2월은 모두들 들뜬 기분으로 지나기 마련이다. 상급 학교 진학이나 사회 진출을 앞두고 각급학교 졸업식이 줄을 잇는가 하면, 재학생들은 재학생대로 한 학년씩 올라갈 준비에 조금은 불안한 마음이 된다. 부모 또한 자식 잘 자라기 바라며 갖가지 치다꺼리로 부산한 나날을 보내게 된다.
요즘이야 모두 제각각이라 종업식 마친 초등생조차 “그냥 돈이나 주시죠”하며 친구끼리 피자 나부랭이 먹고 찜질방이나 PC방을 섭렵하는 행태이지만, 그때 그 시절, 아이들이 가장 좋아했던 것은 그야말로 짜장면(자장면이 공식명칭이지만 제 맛이 안 나 이렇게 부르겠다) 한 그릇이면 최고였다. 우리 세대 대부분이 그렇듯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유년시절 외식 대표메뉴 짜장면
짜장면에 대한 추억은 국민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시절 내게 2월말 종업식날은 가장 즐거운 날이었다. 온 식구가 중국집에 가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메뉴라야 정해져 있었다.
어머님은 짜장면 보통, 나와 동생들은 짜장면 곱빼기, 아버님은 짬뽕을 시키셨다(국물을 배갈 안주로 하기 위해). 곱빼기라고 하지만, 허기졌던 그 시절 우리 배를 채우기엔 턱없이 모자라는 양. 결국 아버님은 군만두 하나 더 시켜주는 것으로 가장의 도리를 다했다. 탕수육? 어림 반 푼어치 없는 희망사항이었다, 그때 그 시절엔.
지금은 ‘무늬만 중국집’이 적지 않지만, 예전엔 화교(華僑)가 하는 정통 중국음식점이 소도시까지 포진해 있었다. 호칭도 가지가지. ‘중국집’이 가장 평이한 호칭이라면 ‘청요릿집’은 비싼 요리를 먹었다고 뽐내고 싶을 때 항용 쓰는 높임말이었다.
가장 흔한 호칭은 ‘짱께집’이었다. 짱께의 어원은 장궤(掌櫃)다. 카운터에서 돈 계산하는 사람, 즉 주인을 말한다. 짱께는 나중에 짜장면을 지칭하는 말로 뜻이 전이되기도 했다.
‘짱께’가 하는 진짜 중국집
짱께가 만든 오리지널 짱께가 먹고 싶을 때 불원천리 달려가는 곳이 있다. 삼각지 로터리 근처 명화원(明華苑)이다. 매너라고는 찾아보려야 볼 수 없는 퉁명스런 주인장과 그 가족이 대를 물려 운영하는 말그대로 짱께집. 영업시간도 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 완전 배짱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오전 11시부터 손님이 몰려들기 시작해, 11시50분 쯤이면 가게 앞에 줄이 10여m 정도 길게 늘어선다. 한겨울 엄동설한과 한여름 땡볕아래서도 멀쩡한 신사숙녀들이 줄 서 있는 꼴이란! 매일 그런 현상이 벌어진다. 왜일까?
바로 이 집 음식의 중독성 때문이다. 6․25 직후부터 한 자리를 지켜왔다는 이 집. 반세기 넘은 세월의 더께를 자랑이라도 하듯 꾀죄죄한 공간에서 주방 인력과 종업원이 연신 “쏼라쏼라” 해대는 가운데 볼품없는 그릇에 성의 없이 담겨 나오는 짜장면, 짬뽕. 하지만 ‘불쌍한(?)’ 고객들은 거의 왕의 하사품 받아들듯 감지덕지 코를 박고 먹어댄다.
이집 매니아 중 하나인 나의 국민학교 후배 이승철은 “짬뽕 국물 한 그릇으로 배갈 세 독구리는 간단하게 비운다”는 너스레로 이집 짬뽕의 내공을 상찬한다.
각자 취향이 다르지만, 개인적으론 이 집 탕수육과 군만두가 더 맘에 든다. 탕수육은 정말 무슨 비법이 있는지, 돼지고기 육질이 그대로 살아 있는 상태에서 튀겨내 씹으면 육즙이 흘러나온다. 바싹 마른 여느 탕수육과는 차원이 다르다. 군만두 역시 고교시절 여학생과 작업할 때 먹었던 바로 그 맛이다.
짜장면․짬뽕은 手打麵이 최고
하지만 짜장면은 역시 수타면(手打麵)이라야 제 맛이다. 예전에야 어느 중국집이든 수타면이었지만, 70년대 들어서면서 기계면이 일상화됐다. 특히 내국인이 하는 중국집이 늘어나자 수타면은 멸종위기종이 되어버렸다.
수타짜장을 먹고 싶을 때 잘 찾는 곳이 있다. 마포에 있는 현래장(賢來莊)이다. 불교방송 빌딩 지하에 있는 이 집은 수타면으로 짜장면과 짬뽕을 만들어낸다. 원래 여의도에서 시내 쪽으로 마포대교를 건너자마자 우측 길가에 있었던 현래장. 근육질의 수타맨이 단련된 솜씨로 면 뽑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초대형 유리창이 명물이었는데, 이 일대가 재개발지구로 지정되는 바람에 빌딩지하로 들어가 버렸다. 장소는 지하화돼 운치가 없어졌지만, 쫄깃쫄깃 수타면발을 씹는 맛은 짜장, 짬뽕에 관계없이 환상 그 자체다.
재미있는 것은 이집 구성원이다. 주인 주명연씨와 지배인 채근상씨는 이름과 생김새가 영락없는 화교지만 실상 내국인이다. 두 분 다 소시부터 화교 밑에서 잔뼈가 굵어 이제 일가를 이뤘단다. 중국요리를 오래 만들다보니 얼굴조차 화교를 닮게 된 건지, 아니면 이들 조상에 화교의 DNA가 들어 있어 중국집을 개업한 건지 잘 모르겠으나 아무튼 이 분들 보는 재미에 가끔 찾는다. 전가복 같은 고급요리 값도 엄청 저렴하다.
華僑 홀대와 차이나타운 衰落
‘화교’ 하면 차이나타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세계 대도시 곳곳, 심지어 사회주의국가의 대도시에도 차이나타운은 존재한다. 국내에도 인천을 비롯해, 서울․부산 등 대도시에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차이나타운이 있었다.
서울의 경우 전통적인 차이나타운은 시청 맞은편 프라자호텔 뒤편이었다. 행정구역상으로 중구 북창동 일대. 지금은 고층 빌딩과 ‘북창동식 서비스’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룸살롱이 빼꼭히 들어선 유흥가이지만, 1970년대 말까지만 해도 이 곳은 중국집이 다닥다닥 붙어있던 전형적 차이나타운이었다.
유년 시절 기억의 창고에서 꺼낸 추억의 실타래엔 북창동 차이나타운에서 맛본 물만두가 들어있다. 국민학교 몇 학년 때이던가? 학년 말로 기억되니 2월 하순 쯤이었을 게다. 아버님을 따라 갔던 대한문 맞은 편 세평 남짓의 중국집에서 맛본 새알 만한 물만두. 먹어도 먹어도 성에 차지 않아, 자꾸 더 먹고 싶었던 물만두. 그걸 눈치 채셨는지, 아버님은 추가로 찐만두를 시켜주셨다.
주인이 문밖에 내건 커다란 솥단지 뚜껑을 열어 나무 채반 위에 가지런히 놓여 김을 모락모락 피우는 찐만두를 양손 후후 불어가며 떼어내 접시에 담아오면, 나는 입천장이 데는 것도 아랑곳없이 허겁지겁 입에 집어넣곤 했다.
그런 북창동 차이나타운은 박정희 정권 시절, 화교에 대한 갖가지 규제와 92년 한중수교로 대만과의 국교가 단절되면서 급속한 쇠락의 길을 걷는다. 주로 중국집을 운영하면서 이국에서의 삶을 일궜던 화교들은 눈물 머금고 남부여대 미국, 대만 등지로 삶의 터전을 옮긴다. 북창동 일대의 차이나타운 역시 화교들의 이탈과 도심 재개발정책으로 사라지게 되고….
요즘도 시청 근처에 약속이 있으면 일부러 북창동 거리를 지나곤 한다. 고층빌딩과 룸살롱이 즐비한 사이로 아직까지 차이나타운의 흔적을 안고 있는 중국 식자재 화상(華商) 가게를 보면 내 유년과 대학시절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다시 형성되는 차이나타운
그래도 다행인 것은 서울에서 아쉬운 대로 차이나타운의 흥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 있다는 점이다. 우선 명동 중앙우체국 뒤 옛 자유중국대사관 일대. 이곳은, 예전 암달러상이 즐비한 환전골목으로 유명했지만 요즘은 중국 서적이나 물품 등을 구입하거나 산둥 요리의 진수를 맛보려는 미식가들의 명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오향장육이 일품이었던 일품향(一品香)은 1955년 북창동에 문을 열어 오랫동안 경영하다가 83년부터 진건충 사장이 가업을 이어오던 중, 2002년 3월 이 곳으로 옮겨와 터를 잡았다. 중국음식 100여 가지를 요리할 수 있다고 호언하는 이 집의 요즘 전공은 삼겹살을 ‘청채 삼겹살’과 달짝지근하면서도 입에 착착 붙는 ‘광둥식 탕수육’이라고 한다.
태화관의 역사 잇는 연희관
또 하나 반가운 것은 지방자치단체와의 협조로 신촌 연세대 서편 서대문구 연희동과 마포구 연남동에 차이나타운이 형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연희동은 주민들의 반대로 타운 조성이 무산됐고, 연남동은 화교 출신을 동장(洞長)으로 선출해 본격적인 타운 조성에 나섰다는 점이다.
어쨌거나 연희동의 중국집 연희관(현 동보관)은 우리집과 인연이 깊다. 중년 이후 숙수(熟手)를 업으로 삼으셨던 아버지는 종로구 서린동 광화문우체국 옆에 있던 ‘태화관(泰華館)’에서 배설된 잔치일을 다니곤 하셨는데, 그 곳 종업원으로 일하던 유옥호라는 분과 교분을 쌓았다.
태화관은 이렇다 할 연회장소가 마땅치 않던 시절, 부유층의 회갑 결혼식, 피로연, 돌잔치에 약혼식은 물론, 각종 모임까지 할 수 있는 크고 작은 공간을 구비한 초대형 중국집으로 당시 대만의 장경국 총통이 우리나라를 방문하면 반드시 들를 정도의 명소였다. 하지만 국내 화교 세력의 침체와 함께 태화관도 80년대 초, 문을 닫는다.
태화관이 문을 닫자 유 노인은 연희동에 중국집을 냈다. 우리 가족은 이따금 그 집에 가서 음식도 먹고 옛 얘기도 나누곤 했는데, 유 노인은 지금 고향 엔타이(烟台)에가 있고, 지금은 아들 유기운 씨가 대를 이어 운영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불현듯 동보관에 가서 짜장면 한 그릇 먹고 싶어진다. 일간 어머니 모시고 한 번 가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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