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 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틔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서정주의 <자화상自畵像>
젊음은 창백했습니다. 진정 백지장처럼 삶은 창백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시작하면서 슬퍼집니다. 세상은 어디 하나 미동도 없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한여름의 햇볕은 뜨거운 채로 마당을 데우고 있는 시간 잠자리의 투명한 날개처럼 젊은 청년의 삶은 빛나는 번뇌 하나 잡고는 아파하는 일밖에는 다른 도리를 몰랐습니다. 이렇게 생을 마무리할 수는 없다는 인식의 한 편에서 제 스스로 빛을 잃어가고 있는 일이 전부였습니다. 세상은 참 아득했는데, 그 아득함은 눈물이었거든요. 한 여름날 내가 서 있는 땅에 몇 방울의 눈물이 떨어진들 땅이 흥건히 젖지도 않고 세상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진정 견디기 힘든 고독은 찬란한 햇빛 속에서 느끼는 창백함이었지요. 삶마저도 증발할 것 같은 그런 짱짱한 날에 느끼는 고독, 대책이 없지요. 거의 절망을 느끼게 되더군요. 어느 여인이 자살을 하러 가는 시간에도 바람은 살랑거리며 불고 있었고, 어느 남정네가 오입을 하러 가는 그 시간에도 바람은 살랑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인은 삶은 무너지는 것의 연속이라며 자살을 하러 가고 있고, 한 남정네는 흥에 겨워 바람을 피우러 가고 있습니다. 그런 시간에도 일상은 이루어지고 좌판을 벌인 시장은 여전히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삶은 늘 그 모양이었거든요. 젊음을 짊어지고 사유와 번뇌로 골방에서 어둠과 씨름하고 있는 시간에도 나와 무관하게 세상은 잘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원래 젊었을 적에는 피가 거꾸로 돌지요. 그 피가 삭아야만 피가 천천히 돌면서 제대로 돌거든요. 부드러움은 거친 세상을 건너온 부드러움이라야 따뜻하지요. 어둠을 막 건너와 만나는 신새벽의 밝음은 그래서 더욱 투명한 게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글이 23살의 청년 서정주가 지었다는 것에 공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시는 어쩌면 거의 달관에 가까운 면면을 보이고 있거든요.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라는 말은 23살의 젊음이 말하기에는 바람의 양이 적었다고 생각되거든요. 23살 나이에는 보통 부모가 바람막이가 되어주거든요. 시인이 산 삶은 달랐나 봅니다. 시인의 세상 바라보는 마음도 달랐나 봅니다. 이 시는 청년 부처가 그윽이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있는 모습이 언뜻 떠오르는 시거든요. 아직 깨달음에 이르지 않았으나 삶에 대한 고뇌와 사람에 대한 연민이 뒤엉켜 있는 세상을 아파하고 있는 청년을 떠올려 봅니다. 젊음은 아파야지요. 분명 아파야 하는 겝니다. 아파하지 않는 젊음은, 인생이랄 수 없습니다. 합리와 불합리가 어느 순간에 정반합으로 만나듯 두루뭉술해 지는 때가 옵니다. 그러나 그것은 두 세계를 다 만난 연후에야 통합은 가능하다는 것을 저는 은근히 주장하고 싶어지거든요. 산다는 건 바람 속을 걸어야 하는 것이었고, 그 바람은 사람도 바람이 되라고 부추깁니다. 바람에 맞서서 견뎌내야 하는 사람에게 너도 나를 닮아 바람이 되라고 하지요. 허망한 바람에 기댈 수 없는 것이 숙명입니다. 하루종일 일을 해도 먹을 것이 모자라는 사람에게도 바람이 붑니다. 깨어나서 시작한 일을 어두워질 때까지 일을 해도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없는 종의 엄마요, 아내요, 자식에게도 바람이 붑니다. 종의 자식은 어린 나이에 이미 세상을 배워버렸습니다. 아파하며 하루를 살아야 하는 것이 세상인 것을 알아버렸습니다. 그런 것을 배우고 있는 종의 자식과 종의 아내와 종의 어머니 이렇게 세 사람이 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아주 단순한 나열이, 서술이 갑자기 진지해지는 것은 한 줄에 적어도 될 분량의 글을 두 줄로 나누어 적어서가 아닙니다. 너무나 아픈 진실을, 숨기고 싶은 사실을 수사 하나 없이 담백하게 고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서정주 시인은 순수하거나 이 시에 나오는 모자란 사람을 지칭하는 백치임이 틀림없습니다. 숨기고 싶은 진실을 공개한 후에 이 세상의 바닥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아버지가 밤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고 있는 상황인식이 한발 성큼 큰 걸음으로 다가섭니다. 시의 출발이 아픈 진실을 위로하는 방파제가 되고 있는 막막한 어둠에는 초조함이 잔뜩 배어있습니다. 1연은 기다림과 그것에 겹치는 할아버지의 죽음이 동시에 그려지고 있어 초조함은 다시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리게 합니다. 이러한 상승곡선의 꼭짓점에 한 청년의 사유가 자리하고 있어 그 고뇌의 느낌이 한결 진지해지고 있습니다. 헌데 그 고뇌를 건너고 있는 젊음의 사유물思惟物은 너무나 당당합니다. 이미 삶의 원류인 ‘영원히 완성되지 않는 삶’을 알고 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삶은 완성을 향하여 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과정을 통과하는 것이 삶이거든요. 결코, 매듭지어지지 않는 삶을 가지고 당당하게 무엇인가를 주장하기에는 우리의 사고체계가 허약하거든요. 삶은 정착이 아니라 삶은 분명 변화의 과정이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어느 곳에서도 머무를 수 없는 끝없는 진행형이었습니다. 생각하는 동물이면 어디에도 기댈 수 없는 이러한 생의 허허로움을 감당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그리고 아파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아프고 부끄러운 것은 그 체계 속에서 무엇도 정의 내리지 못하고, 무엇도 이루어내지 못하고, 부족한 사람에 대한 어떠한 도움도 주지 못하며 동시대를 사는 생명을 가진 자로서의 불임을 아파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인생은 진정으로 불임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완성해 놓을 수 없는 것이 삶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과정 속으로 밀어 넣는 자식을 낳을 뿐이지요.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이 시의 어느 부분에서도 시의 기교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너무나 산문적인 나열이 도리어 시적 상상력을 끌어내는 그 역설 앞에 서게 되지요. 좋은 시는 꾸밈이 없습니다. 담백하거든요. 그 담백함은 오래오래 사람을 감동을 주는데 질리지 않게 하지요.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라는 시구가 너무 좋아 혼자서 몇 번이나 되뇌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가슴 아파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습니다. 제가 아마 고등학교 때였던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국화 옆에서>에서는 그러한 감동이 없었거든요. 헌데 이 시는 오래도록 제 곁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씹을수록 맛이 나는 시였지요. 이 시는 은유 직유 활유 그리고 형상화라는 것도 여기서는 논하기가 어쭙잖아 보입니다. 깊은맛에는 단맛이 적은 법이지요. 자극적인 것에서는 깊이를 구하기가 어렵고요. 세상은 맹물이 키우더군요. 들판에 봄 불을 지르면 초록으로 마구 살아나서 무서운 속도로 들판은 전염되어 세상 전체가 푸르러지는 것을 보셨나요. 어느 누구는 봄이 말발굽소리처럼 번져오는 초록을 보며 환장한다고 했습니다. 그때에도 비가 내리는데, 봄비가 내렸지요. 곱게 머리빗은 듯이 봄비는 조용히 왔습니다. 헌데 그 빗물이 순전히 맹물이거든요. 맹물이란 아무 맛도 없는 투명함이지요. 이 시인이 바로 그러한 내면을 가졌습니다. 소박하게 삭아가는 인간사를 눈치챘음이 틀림없습니다. 재목으로 쓰인 나무가 삭아지듯이 사람도 산만큼은 삭아지는 것이 순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생명을 위하여 자리를 양보해야 하는 게지요. 사그라지는 것이 아름다움인 줄을 여행하면서 보았거든요. 아주 오래전이지요. 남도를 여행하고 있을 때였는데, 흥국사를 만난 거예요. 여수였음이 틀림없습니다. 저는 고색창연古色蒼然, 오래된 빛깔이 아름답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요. 세상에 사그라지는 것이, 낡아지는 것이 아름다워진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거든요. 헌데 흥국사의 쇠락해 가는 모습에 한동안 감동으로 서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너무 아름다웠거든요. 잘 삭으면 저렇게 아름다워질 수 있구나 했지요. 그리고 나이가 들어 찾아갔습니다. 그곳은 이미 달라졌더군요. 세상은 바쁘게 변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단청을 하고 주변은 도시가 들어섰습니다. 아니었지요. 허지만 저는 그곳에서 배웠습니다. 세상은 삭는 것이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볼 수 있었던 기쁨을.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이 부분에서 다시 삶을 이야기해야 하는가 봅니다. 시에는 피가 섞여 있다는 표현에는 그것이 주는 상징이나 비유가 너무 강하고 아프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우선 쉽게 시 하면 느껴지는 것이 낭만과 한가함이지요. 배부른 자가 세상을 노래하는 거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개미가 아닌 베짱이를 생각하게 되는 게지요. 헌데 시에 피가 섞여있음을 알게 되는 것은 시를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공감이 오는 것을 어쩔 수 없습니다. 제가 시를 쓰니까 시인 편이라고요. 다시 말해 가재는 게 편이라고요, 그렇지요. 바로 그렇기는 하지만 격정을 격정 그대로 표현하면 시가 될 수 없습니다. 마음의 상태를 그대로 그리면 직설적인 선전문구나 격문이 되겠지요. 시는 분명 시의 특질이 있습니다. 산문과는 얼마만큼 거리를 두고 있거든요. 그것을 바로 전 고색창연하다는 것을 말하면서 사그라지는 것이, 낡아지는 것이 아름다워지는 것에 대해 말했습니다. 사람이 삶을 이해하는 순간 사람에 대한 연민이 생겨나지요. 힘들게 살아가는 그리고 힘들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 생명의 당위여야 한다면 삶은 진정 의미 없는 일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이 땅에 태어나는 순간 태어나서의 할 일을 잊어 버렸는지도 모릅니다. 삶의 임무를 잊어버린 기억상실증 환자인지도 모르지요. 그래서 더 아파하는 것이리라 생각됩니다. 마지막 대목에서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고 시인은 말하고 있습니다. 삶은 끝끝내 길을 내어주지 않았고 시인의 손톱에는 때가 까맣게 끼었습니다. 삶이 고단한 게지요. 마음은 아마 더 고단했으리라 여겨집니다. 시인 자신, 그리고 인연이라는 굴레를 뒤집어 쓴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이 있습니다. 고통과 회한이 손톱 밑에 남아있는 것입니다.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라는 구절에서 그래도 버릴 수 없는 생명적 욕망의 강렬한 확인이 됩니다. 저는 <그래도>라는 말을 썼습니다. ‘그래도’는 접속사인데 아쉬움을 끌어안고 있는 접속사지요. 어쩔 수 없이 살아가야 하는 상황을 그 속에 담고 싶었거든요. 이 시의 제목이 <자화상>입니다. 자신의 삶을 이렇듯 담담함의 미학으로 삶의 심장을 관통한 시는 없었습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삶의 나이테가 겹겹이 쌓인 둥근 나무의 몸통은 직립을 꿈꾸지요. 하늘을 향해 오르는 상승의 원리에 꿈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무는 언제나 푸르른 머리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가 가지는 것도 삶, 그 건너편에 있는 깨달음에 이르고 있는 자가 아주 원망도 기원도 버리고, 있는 그대로를 그려내고 있어 한국어에 생기를 불어넣어 준 명작입니다. 미당 서정주는 1915년 전라북도 고창에서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고향 마을 질마재는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장수강 너머 선운산에 위치해 있습니다. 변산반도가 보이는 그곳에서 가난을 아름다운 풍경처럼 짊어지고는 유년기를 보냈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울어댄 청년기를 보냈습니다. 삶이 아프면 절창이 되는가 봅니다. 가난을 짊어지고, 아픈 상처를 가슴에 묻고서,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살면 시인이 되는가 봅니다. 저는 서정주 시인의 개인의 역사에 대해서 여기까지만 이야기하고 오늘은 함구하려 합니다. 그것은 전문적인 시평을 하는 분이나 평론가의 몫으로 남겨두고 싶습니다. 그에 대한 한국인의 애증을 서정주 시인 본인이 알고 세상을 하직했음도 알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이제는 서정주에 대해 글을 쓰는 사람은 드뭅니다. 그는 이 시대에 버림받은 사람이라고요. 허지만 저는 많은 사람이 서정주 시인은 한국의 시성詩聖이라고 찾을 때 개인적으로 알지도 못했고, 다시 많은 사람이 서정주 시인을 매국노라고 버릴 때 찾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시에 있어서는 그가 한국인인 것에 자부심을 가져도 괜찮으리라 싶습니다. 내친김에 한 편의 시를 더 감상해보지요. 그의 시는 산문시에서 더욱 한국적인 것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당기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고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40년인가 50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 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 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서정주의 <신부>
하나의 현실이 전설이 되는 순간을 이토록 가슴 시리게 그려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지요. 어떤 분은 ‘한국 여인의 매운 절개를 놀랍도록 담담하고 짧은 이야기로 엮었다.’ 합니다. 시의 내용으로 보아 첫날밤의 신부가 신랑의 오해로 말미암아 소박을 당하였지만 40년인가 50년, 이 시간은 한 인간의 삶 전체를 의미하겠지요. 이 시간이 지난 뒤까지도 첫날밤의 그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가 우연히 들른 신랑의 손길이 닿고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어떤 분은 ‘이로써 여인네의 정절의 삶이 완성’되었다고 하지만 이 시에다 여인의 정절이나 윤리 도덕으로 설명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이 부분에서 아, 하고 감탄이 나옵니다. <매운 재>가 <초록 재와 다홍 재>로의 변이를 찾아가는 언어의 미학은 한국인의 심성에 ‘한恨의 심성’을 절묘하게 연결하고 있습니다. 그 많은 말로 설명해야 할 <40년인가 50년이 지나>간 세월의 상황과 신혼부부가 함께 살지 못한 역사를 이렇듯 간결한 몇 개의 단어로 완성해 놓고 있음은 감동이지요. 설명하지 않고 다시 한 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여러 번 읽어도 세월이 얼마만큼 흐른 후에 다시 읽으면 가슴에 순간 섬뜩한 바람이 지나가고 있음을 느낍니다. 늦은 가을바람처럼 시립니다. 아픔이 순간 아름다워지는 것을 이 시에서 만나게 됩니다. 어느 외국인이 한국인은 참으로 독특한 심성을 가진 민족이라고 말하면서 든 예가 생각납니다. ‘한국인은 슬픈 노래를 즐겁게 듣는다.’라는 말입니다. 정말 그런가 봅니다. 우리 가슴의 호숫가에는 바람이 불고 있음을 느낍니다. 그 바람은 가난해서 드러누운 자식에게 밥은커녕 죽도 제대로 못 쑤어 먹이는 어미의 마음 같은 아픔을 품고 있지요. 우리의 정서인 한恨의 근원에는 정말로 시린 역사가 있습니다. 한의 정서는 고단한 삶에 대한 한숨 같은 것인데, 그것에서는 묘하게도 신명이 슬쩍 마당을 펼치곤 하거든요. 그래서 한과 신명은 남 같으면서도 친구 같은 절묘한 궁합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그 접점지대에서 그 정서를 가지고 한 시인이 노래를 만들어냈는데 바로 그 시인이, 서정주지요. 아니라고요, 글쎄요. 저는 그의 시를 읽으면서 이 양반이야말로 진정한 ‘한국인의 바람(風)’을 몸으로 체험한 양반이로구나 하는 마음이 들지요. 우리 몸에는 옷깃을 설핏 스쳐가는 바람에서 느껴지는 회한의 정서와 신명이 함께 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고는 합니다. 한의 정서는 징의 울림에서 느껴지고, 꽹과리의 낭창 낭창한 쇳소리에서는 신명이 느껴지지요. 헌데 서로 다른 출생인 듯한 둘의 만남은 절묘하게 궁합이 맞아떨어집니다. 이 징과 꽹과리가 만나 가을들판을 흔들어대면 삶은 어느새 바람결을 닮아버리지요. 아팠던 마음도, 아팠던 사연도, 아팠던 기억도 바람결과 만나 흥이 되고 어깨춤이 되는 게지요. 산도 한국인의 신명 든 어깨에 얹혀 흔들리는데 가관이지요. 물론 서정주 시인에게서는 신명이 느껴지지는 않지요. 한의 정서가 떠올려지지요. 서정주 시인의 시 세계는 인간탐구를 지향하였던 관계로 '인생파' 또는 '생명파'라는 문학적 칭호를 얻었습니다. 생명파 문학의 성격은 생명을 탐구함에 있어서 이성적, 합리적인데서 찾기보다는 본능적, 감정적인데서 찾는, 즉 지성보다는 감성을 옹호했다는 점입니다. 그러면서도 문학적 규범에 의해 정제된 표현을 하였지요. 또한, 영혼의 깊이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 그대로를 적었습니다. 그만큼 사람에 대한 깊은 성찰과 깊이를 가지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솔직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서 기인하는 게지요. 서정주시인은 좀 특이한 면이 있습니다. 망국의 땅, 백제에서 태어나 신라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옳고 그름이 맞고 틀리고가 다 부질없음인지도 모르지요. 경계, 그것에 얽매이지 않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얽매임이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다시 언급하지만 23세의 젊은 나이에 벌써 이런 말을 하고 있음에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그리고 천진스럽게 살다간 한 시인의 글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것도 사실입니다. 한 시인의 미추美醜가 오롯이 자연으로 돌아갔습니다. 이제사 바람이 되어 고향 질마재로 돌아간 시인의 노래는 아직도 아름답습니다.
편집고문 신광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