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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영의 작은 세상 - 군사 세상 - 전쟁사 - 한국전쟁
제목 : 한국전쟁 - 잊혀진 전쟁
(한국전쟁 제1면...)
1950년 6월 25일 새벽을 기해 감행된 북한군의 기습 남침을 시작으로 하여, 1953년 7월 27일(정전일:휴전일)까지 장장 3년 1개월에 걸쳐 진행되었던 한(韓)민족 최대의 비극적 전쟁. '6.25 전쟁' 또는 '6.25 사변'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우리 근대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시대적 사건이 바로 '잊혀진 전쟁'이라 불리는 '한국전쟁(韓國戰爭)'이다. 이 전쟁의 지상전 전개 과정을 (역사적, 국제적, 민족적 관점이 아닌) 군사적, 전쟁사적 관점에서 간결하게 조명 기술한다.
[1] 전쟁 전야
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 6월경의 대한민국 국군(이하 한국군)과 북한 조선인민군(이하 북한군) 군 전력은 오른쪽 표와 같았다(관련 자료마다 일부 수치가 약간씩 다름).
사단 숫자는 한국군이 8개, 북한군이 10개로 2개 차이에 불과했지만, 1개 사단당 보유 병력이나 전투력에는 큰 격차가 있었다. 한국군 8개 사단 중에 절반인 4개 사단만이 3개 연대로 편성되어 있었던 반면(나머지 4개 사단은 2개 연대 구성), 북한군은 모든 사단이 3개 연대를 근간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전차와 자주포, 곡사포 등의 수량 차이가 컸다. 한국군은 단지 4개 사단만이 포병대대를 1개씩 가지고 있었으나, 북한군은 사단마다 3개 포병대대로 구성된 포병연대를 예하에 두고 있었다. 또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한국군에는 단 1대도 없던 전차와 자주포를 300대 이상 편제하고 있었다. 일반 보병부대가 가진 장비들도 양이나 질적인 면에서 많은 격차가 있었다.
무기의 성능 차이도 적지 않아서, 같은 종류와 등급의 야포라고 하더라도 최대 사거리나 파괴력 등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공군력 역시 미국 공군이라는 변수가 존재하기는 했지만, 북한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한국의 지형과 도로, 특히 교량의 하중 담당 능력 부족은 전차의 효과적인 운용에 부적합하다. 만약 북한이 T-34 전차를 보유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한국군이 장비하고 있는 2.36인치 RKT포(일명 '바주카포')로 충분하다. 이 RKT포는 세계의 어떤 전차도 파괴할 수 있다."
- 1949년 10월, 주한미군사고문단장(KMAG) 준장 로버츠(Roverts)
한국군의 상황을 더욱 어렵게 한 것은, 전체 8개 사단의 40%에 가까운 3개 사단(7개 연대)이 지리산, 태백산 등에 출몰한 북한 인민유격대, 게릴라 등을 소탕하기 위해 후방 지역의 공비(共匪) 토벌 작전에 투입되고 있던 점이었다. 한국군 1개 사단의 편성표상 정원은 10,948명이었으나(북한군은 12,092명), 실병력은 3개 연대로 된 사단은 9천여 명, 2개 연대로 된 사단은 7천 명 내외였다. 때문에 개전 시점에 38선 부근에 배치된 한국군의 규모는 5만을 초과하지 못한 반면, 북한군은 15만 이상을 38선 부근에 투입하고 있었다. 통상 공자(攻者)에게 요구되는 1:3의 전력차(성공적인 공격을 위해서는 방자보다 최소 3배 이상 전력이 우세해야 한다는 경험 법칙)를 38선 일대에서 북한군에게 허락하게 된 것이다.
북한군의 공격 계획은 소련측이 김일성(金日成)과의 긴밀한 협의를 거쳐 1950년 5월에 작성한 '선제타격(작전)계획'을 통해 그 실체가 확인되고 있다. 개전 3일 내에 서울을 점령하고(1단계:수원-원주-삼척), 이후 전과를 확대하며(2단계:군산-대구-포항), 남한 전역을 점령해 소탕한다(3단계:목포-여수-부산)는 것을 주요 골자로 하고 있었는데, 서울을 점령한 부대와 춘천 방면에서 진격하는 부대가 협공으로 한강 이남, 수원 이북에서 한국군을 포위 섬멸하는 1단계 작전만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었다. 2단계와 3단계가 소홀한 이유는, 일단 서울을 점령하면 남한 전역에서 즉시 수십 만의 남로당원이 일제히 봉기해, 폭동과 내전을 거쳐 스스로 붕괴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계획과는 별도로 '반격계획'이라는 것도 전해지고 있다. 선제타격계획이 3단계로 이루어져 있던 것이 비해, 이 반격계획은 4단계로 되어 있었다. 작전 개시 5일차에 수원-원주-삼척(종심 90km)을, 다시 4일 안에 천안-충주-제천(종심 40-90km)을, 그로부터 다시 10일 안에 대전-선산-영덕(종심 90km)까지 진격한 후, 계속 남하하여 남한 전역을 점령한다는 계획이었다. 선제타격계획과 비교할 때 2단계 이후 작전에 대한 계획이 명확하고, 실제 작전도 계획과 유사하게 진행되었다는 점이 특이점이다(이 반격계획은 북한군이 처음부터 작성한 공격 계획이 아니라, 선제타격계획의 내용을 전쟁이 발발한 후에 일부 변경한 다음, 북침 분위기를 유도하기 위해 명칭을 바꾼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남조선에는 현재 약 20만 명의 남조선로동당원(남로당원)이 이승만(李承晩)의 야수와 같은 탄압에도 불구하고 지하에서 투쟁하고 있습니다. 만약 인민군이 남하하면 20만의 남조선로동당원이 일어서서 인민군의 군사 작전을 원호하고 전 남조선 지역을 해방할 것입니다."
- 1950년 4월, 북한 노동당 중앙정치위원회 부위원장 박헌영(朴憲永)
북한군은 이러한 작전 계획에 의거해, 각 제대별(대대, 연대, 사단급) 훈련 및 야외기동훈련을 실시한 후, 전후방 각지에 있던 부대를 38선 일대로 전진 배치시켰다. 이 배치는 6월 23일에 완료되었는데, 그에 앞서 6월 10일에는 야전부대를 통제할 상급 사령부인 군단(보조지휘소)을 설치했다. 서울 방면을 담당한 황해도 금천의 제1군단장에는 김웅(金雄) 소장을, 강원도 화천의 제2군단장에는 김광협(金光俠) 소장을 임명했으며, 당초 계획에 따라 제1군단을 주공(主攻)으로, 제2군단을 조공(助攻)으로 선정했다. 9개 사단을 38선 부근에 배치했는데, 제1군단에 제1, 제3, 제4, 제6사단과 군단 예비로 제13사단을, 제2군단에 제2, 제5, 제12사단과 군단 예비로 15사단을 각각 배속시켰으며, 남은 1개 사단은 후방 위치시켜 작전 예비로 활용했다(평안남도 숙천에 위치한 제10사단으로, 7월 25일에 전선 투입).
[2] 전쟁 경과
6월 25일 일요일 04시를 기해 38선 전역에서 북한군의 기습적인 남침 공격이 개시되었다. 한국군은 그간 수집한 첩보 및 정보에 따라 북한군의 침공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지만, 이들 보고는 육군본부(이하 육본)를 비롯한 군수뇌부에서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일본 도쿄(東京)의 미 극동사령부(FEC) 정보참모부(G-2)도 북한군의 부대 전개와 공격 움직임을 감지하고 있었으나, 역시 워싱턴(Washington) 당국(국무부, 국방부, CIA 등)에서 유효하게 고려되지 않았다. 그야말로 완벽에 가까운 북한군의 기습 공격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서쪽으로 독립 제17연대가 위치한 옹진반도에서부터, 동쪽으로 제8사단 제10연대가 위치한 동해안에 이르기까지, 모든 전선이 일시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매국역적 리승만 괴뢰정부의 군대는 6월 25일에 38선 전역에 걸쳐 공화국 북반부 지역에 대한 전면적 진공을 개시하였습니다. 용감한 공화국 경비대는 적들의 침공에 항거하여 가열한 전투를 전개하면서, 괴뢰정부의 진공을 좌절시키었습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는 조성된 정세를 토의하고, 우리 인민군대에 결정적인 반공격(반격)전을 개시하여 적의 무장력을 소탕하라는 명령을 내리었습니다. 인민군대는 공화국 정부의 명령에 의하여 적들을 38선 이북 지역에서 격퇴하고 38선 이남 지역으로 10-15키로메터까지 전진하였습니다. 인민군대는 옹진, 연안, 개성, 배천 등의 여러 도시들과 많은 부락들을 해방하였습니다." - 1950년 6월 26일, 김일성의 북한 평양방송 연설
한국군은 전체 67개 대대 가운데 불과 11개 대대만을 최일선 진지에 배치하고 있었는데, 그나마도 6월 24일 00시를 기해 내려진 육본의 비상경계령 해제 조치로 인해 많은 병력이 휴가 또는 외박으로 부대를 비워 즉각적인 전투력 발휘에 한계가 있었다(국방부와 군의 주요 인사들도 용산에서 열린 육군본부 장교구락부 준공 기념 파티에 참석해 24일 밤을 보냈다.). 또 개전 보름 전인 6월 10일에 단행되었던 대규모 인사 개편(사단장 4명과 주요 참모)과 연이어 하달된 부대 교체 명령(예속 변경 및 주둔지 이동)은 각급 지휘관들이 작전 지역과 부대를 효과적으로 분석하고 통제하는 데 많은 어려움으로 작용했다. 개전 직후 육군 총참모장 채병덕(蔡秉德) 소장의 지휘에 의해 41개 대대급 부대가 전선에 추가 투입되었으나, 북한군의 진격을 정지시키는 데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옹진반도 지구 : 북한군 제6사단 제14연대와 38선 경비 제3여단이 공격을 시작하자, 한국군 독립 제17연대와 제11포병대대는 15시 20분에 하달된 육군본부 명령에 따라 24시간 가량 교전을 펼치다가 26일 오전에 인천으로 철수했다.
개성 및 문산 지구 : 북한군 제1사단, 제6사단 등이 T-34/85 중(中)전차의 지원을 받아 공격을 감행하자, 해당 지역을 방어하던 한국군 제1사단은 제15연대 일부, 제20연대 제3대대, 혼성전투연대(서울특별연대) 등의 지원을 받아 지연전을 계속했으나, 우측 의정부 전선이 무너지고 28일 새벽에 북한군이 서울을 함락하자 30일 18시까지 시흥으로의 철수를 명했다. 북한군 제1사단의 진격 속도가 상대적으로 늦었기 때문에 한국군 주력이 포위되는 상황을 피할 수 있었다.
의정부 지구 : 북한군 제1군단의 주력이 투입된 지역으로, 제3사단과 제4사단, 제105땅크려단(제105전차여단) 등이 05시 30분에 공격을 개시했다. 이 지역에는 한국군 제7사단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부분적으로 실시된 역습에 실패하면서 전력에 큰 손실을 입었다. 수도경비사령부, 제2사단 등의 증원이 있었으나 이들 역시도 대대급 단위로 축차 투입되면서 대부분 소진되었다. 북한군은 25일 11시에 포천을, 26일 19시에 의정부를 완전 점령한 후, 서울을 향해 진격했다.
춘천 지구 : 북한군 제2군단 예하 제2사단과 제12사단이 춘천과 홍천 일대를 공격했다. 이 지역에 있던 한국군 제6사단은, 사단장 김종오(金鐘五) 대령의 지시에 따라 전쟁 전부터 참호와 진지를 요소에 구축하고 부대원을 영내 대기시키는 등의 대비를 하고 있었다. 이러한 전투준비 태세와 제16포병대대의 효과적인 포격 지원에 의해, 북한군 제2사단의 춘천 공격은 곧 좌절되었다. 북한군이 홍천쪽으로 진격하던 제12사단에서 2개 연대를 차출해 춘천 방면에 추가 투입하고 동쪽에 위치하던 한국군 제8사단이 퇴각을 시작하자, 제6사단은 27일 저녁에 춘천에서 물러나 홍천으로 철수했다.
개전 당일로 춘천을 점령한 후, (제1군단이 서울을 점령한) 28일까지 수원에 진출해 한국군을 포착 섬멸한다는 것이 북한군 제2군단의 처음 목표였다. 그러나 27일 저녁이 되어서야 겨우 춘천 시내에 진입했기 때문에 계획(제1차 작전) 달성에 실패했다. 그 결과, 북한군은 제2군단장 김광협 소장을 군단참모장으로 강등하고, 참모장 최인(崔仁) 소장을 보직 대기, 제2사단장 리청송(李靑松) 소장, 제12사단장 전우(全宇) 소장을 대좌(大佐:대령)로 강등 해임하는 등의 문책성 인사를 실시했다. 만약 전쟁이 한국군의 북침으로 시작되었다면, 그 공격을 성공적으로 저지하였을 뿐 아니라 오히려 역습을 감행해, 춘천과 홍천까지 진격한 지휘관들을 이렇게 해임하고 강등할 이유가 없게 된다. 때문에 한국전쟁이 북한군의 남침으로 촉발되었음을 강력하게 증명하는 사례 가운데 하나로 지목되고 있다.
동해안 지구 : 북한군 제5사단과 38선 경비 제1여단이 공격을 담당했다. 이에 대응하는 한국군 부대는 강릉에 있던 제8사단으로, 예하에 2개 연대를 두고 있었다. 04시 30분에 강릉, 옥계, 임원 등에 상륙한 북한군 부대가 후방을 교란하고 동시에 제5사단이 남침을 개시하자, 제8사단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대관령을 넘어 충북 제천 방향으로 철수했다.
동해 해상 : 동해안 침투를 시도하던 북한군 대대급(600명) 유격부대가 26일 새벽에 부산 해상에서 한국군 백두산함의 포격을 맞고 격침되었다(대한해협 해전). 백두산함은 당시 한국 해군이 보유하고 있던 유일의 (배수량 450톤의 초계정급) 전투함으로 함번은 701, 함장은 최용남(崔龍男) 중령이었다. 이외에 옥계 등지에서도 치열한 해상 교전이 있었다.
(한국전쟁 제2면...)
북한군이 서울 북동쪽 근교의 창동을 돌파한 것이 27일 10시경, 미아리를 돌파한 것이 28일 01시경이었다. 11시 30분에 서울 시내 진입에 성공했는데, 그에 앞서 북한군이 미아리를 넘었다는 정보를 접한 한국군이 02시 30분경 한강교를 폭파했다(채병덕 총참모장의 명령). 비록 춘천에서 제6사단이 선전한 덕분에 한국군 주력이 포위되는 위기는 모면했지만, 다리를 너무 일찍 폭파한 관계로 상당수 병력과 전투 장비(보유 장비의 70% 추정)를 한강 이북에 유기하게 되는 불행한 결과가 초래되었다. 한국군은 28일자로 한강 이남에 시흥지구전투사령부 등을 설치하고 전열을 정비해 한강선 방어전을 준비했으나, 6월 30일부터 개시된 북한군의 공세에 밀려 한강 방어선을 포기하고 다시 남쪽으로 후퇴했다. 북한군은 7월 3일에 한강을 본격 도하해 영등포를 점령한 후, 다음날 인천과 수원을 점령했다(춘천에서 수원 방향으로의 제2군단 남하 및 남한 전역에서의 남로당 봉기를 기다리기 위해 한강 도하를 수일 간 지체했다는 분석이 많다.).
"6.25는 사흘을 예정했으나 실제로는 무려 3년이 걸린 전쟁이었다. 이 말은 뒤집어 말해 인민군이 3일을 제외한 전 기간 동안 각본에도 없는 전쟁을 치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민군이 서울 점령 3일째인 7월 1일부터 다시 남진을 시작함으로써 6.25는 제한전에서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 인민군은 이때부터 구체적인 작전계획이 없는 상태에서 전쟁을 벌였다."
- 1990년 증언, 당시 북한군 전선사령부 작전국장 소장 (총참모장 직무대리 중장) 유성철(兪成哲)
전쟁 발발 소식이 국제 사회에 전해지자, 6월 25일 14시(뉴욕 시간:한국 시간 26일 04시)에 긴급 UN(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가 소집되었다. 북한군의 전투 행위 중지와 38선 이북으로의 철수가 결의되었으며, 27일에는 침략자에 대한 군사제재(한국에 대한 군사원조) 권고안이 통과되었다. 이러한 UN의 행동은, 중요 의결권자인 소련이 UN 상임이사국 한 자리를 장제스(蔣介石:장개석) 국민당(중화민국:자유중국:대만) 정부에서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의 중화인민공화국(중공:중국) 정부로 교체하기 위해 보이콧(Boycott:참석 거부)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미국은 이와 별도로 지상군 파견 여부를 논의한 후, 그 결정을 극동군사령관 맥아더(MacArthur) 원수의 정세 판단에 의지하기로 했다.
수원비행장을 통해 29일 남한강변 전선을 시찰한 맥아더 원수는 지상군 투입이 필수적이라는 결심을 내리고, 이를 본국에 타전했다. 이튿날 새벽에 미국 대통령 H. S. 트루먼(Truman)의 승인이 떨어졌으며, 곧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 제24보병사단과 제25보병사단에 한국으로의 이동 준비 명령이 내려졌다. 우선 1개 대대급 부대를 선발대로 투입하기로 하고 제21연대(제24사단) 제1대대를 기간으로 스미스(Smith)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했다. 스미스 특임대는 7월 1일 부산공항에 도착한 후, 한강 방어선이 붕괴되어 후퇴를 거듭하던 와중이었으므로 7월 4일에 오산 북방 죽미령에 진지를 구축했다. 그러나 이튿날 벌어진 북한군 제4사단과의 전투에서 패퇴하고 말았다. 이것으로 소부대와 2.36인치 RKT 같은 무기로는 북한군의 진격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으므로, 미 정규군의 대규모 개입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7월 7일의 제476차 UN 안전보장회의에서 군사원조를 위한 연합군사령부 설치가 결의되었고, 이튿날 사령관에 맥아더 원수가 임명되었다. 연합군사령부 역할을 미 합동참모본부(JCS)가 담당하고, UN군사령관에 맥아더 원수가 임명된 것이다. 맥아더 원수는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 제8군을 UN군 지상군을 지휘할 중간 사령부로 결정했는데, 당시 제8군사령관은 W. H. 워커(Walker) 중장이었다. 한국 정부는 동월 14일에 국군에 대한 작전지휘(Operational Command)권을 UN군사령관에게 위임하였다(제8군에 재위임). 이것이 전후 50년을 넘도록 계속된 작전통제(Operational Control)권 위임의 시작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6월 27일 새벽에 열차편으로 서울을 떠나 대전으로, 다시 부산으로 거처를 옮기고, 수도(首都)가 대전(27일), 대구(7월 16일)를 거쳐 부산(8월 18일)으로 임시 이전하는 동안, 한국군은 총력을 다해 지연 전투를 펼쳤다. 재편성으로 7월 5일과 17일, 24일에 제7, 제5, 제2사단이 차례로 해체되면서 불과 1개월 사이에 사단 숫자가 8개에서 5개로 줄었으나, UN군이 투입되기 전까지 전선을 고수, 교부보를 확보해야 한다는 절박한 사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한국군 제6사단 예하 제7연대가 충북 동락리(무극리)에서 북한군 제15사단 관하 제48연대를 섬멸하고 수도사단 제17연대가 경북 화령장 일대에서 북한군 제15사단을 격퇴하는 등의 전과를 올렸음에도, 기본적인 전력 자체가 크게 열세였으므로 차령산맥과 같은 험준한 지형을 이용한 후퇴전 활용이 불가피했다.
미군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아, 제24보병사단의 경우 연이은 패전으로 부대가 거의 와해되고 사단장 딘(Dean) 소장마저 행방불명 도중에 전북 진안에서 북한군 제6사단에 포로가 되는 상황이 초래되기도 했다(그러나 제24보병사단의 공주-대전 지연전이 제1기병사단을 비롯한 증원 부대들의 성공적인 투입을 가능하게 했다.). 북한군은 7월 8일에 충주와 천안, 13일 청주와 공주, 19일 이리, 20일 대전, 23일 광주, 24일 영주, 25일 순천과 영동, 30일 거창, 31일 합천과 진주를 점령한 후, 8월 1일에는 안동까지 진출했다. 북한군 제4사단과 제6사단의 기동은 특별히 놀랄 만한 것으로, 무주-함양-진주 일대에 출몰한 이들 북한군으로 인해, 상주를 지키던 미 제25보병사단이 급거 마산 지구로 전환 투입되었다.
"우리에게는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다. 여기가 격파되면 나라가 망하고 우리들에게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대한민국이 멸망해서는 안 된다는 마음은 모두 같다. 보라, 우리를 돕기 위해 지구 저쪽에서 온 미군이 저 아래 골짜기에서 싸우고 있지 않은가. 그들을 버리고 후퇴하겠다고 하는 것은 대한 남아로서 부끄러운 일이다. 내가 선두에 서서 돌격하겠다. 내가 후퇴하면 너희들이 나를 쏴라."
- 1950년 8월 대구 북방 다부동, 한국군 제1사단장 준장 백선엽(白善燁)
8월과 9월은 한국군(UN군)과 북한군 사이의 치열한 낙동강 공방전이 계속되던 시기였다. 미 제8군사령관 명령에 의해 8월 1일 설정된 낙동강 방어선은 경북 함창을 기점으로 한국군 5개 사단이 동측(북부)을, 미군 3개 사단이 남측(서부)을 담당하는 형태로 되어 있었다. 북한군은 7개 사단(제1군단)을 미군 정면에, 6개 사단(제2군단)을 한국군 정면에 전개시키고 있었으며, 8월 15일까지 부산을 점령을 완수하기 위한 총공세에 들어갔다. 그러나 8월초 북한군 전력은 개전 당시에 비해 40-50% 감소된 8-9만 명 가량이었으며, 이 무렵이 공세종말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공격 과정에서 과도한 손실을 입었고 보유 장비도 크게 감소해 작전지속능력이 고갈되었으나, 공격자 입장이었기 때문에 그 기세를 타고 8월과 9월에 계속 공세를 감행했을 뿐, 실질적인 공격 역량은 8월 초엽에 이미 소진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북한군 제4사단이 8월 6일에 낙동강 돌출부인 경남 영산 지역에서 개시한 공격은 미 제24보병사단의 역습으로 소탕되었으나, 전력이 약한 한국군 방어 지역에 대한 공격에서는 일부 성공해 대구 북서쪽의 왜관에서부터 신령-기계-포항선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대구 점령이라는 본래 목표는 대구 북방 다부동에서 미 제27연대(제25사단)와 제23연대(미 제2사단), 한국군 제10연대(제8사단)의 지원을 받은 한국군 제1사단에게 패하면서 실패했다. 이 전투에서 제1, 제3, 제13사단이 심각한 손실을 입고, 9월 5일부터 13일까지 벌어진 영천 전투에서도 제15사단이 괴멸적인 타격을 입는 등, 북한군은 대부분 전선에서 전투력이 급속도로 약화되었다. 이처럼 전쟁 수행력이 한계점에 이른 북한군은 그동안 반격할 힘을 축적하고 있던 UN군이 9월 15일에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공세로 전환하자 전면 붕괴되었다.
"적은 공화국 인민군대의 맹렬한 공격으로 인하여 무질서하게 퇴각하다가 다시금 군사적 모험으로서 인천항구에 상륙, 점령하고 계속 전진하여 우리나라 수도서울을 점령할 목적으로서 덕정, 용유, 영흥면 일대에 참선(站船:수송선)들을 입항 체류하고 있는 바 적들은 기회만 있으면 인천항에 기습 상륙을 기도하고 있으며, 더욱 적(敵)은 항공으로 인천시 상공을 위협하고 있다."
- 1950년 8월 29일, 북한군 인천 지역 주둔 제884군부대 '전투명령'
M26 퍼싱(Pershing), M4A3 셔먼(Sherman) 전차, F-51 머스탱(Mustang), F-80 슈팅스타(Shooting Star) 전투기를 비롯한 각종 무기와 병력 증원으로 8월부터 전선 상황이 UN군에게 유리하게 조성되었지만(북한 공군력은 7월초에 이미 괴멸되었다.), 보다 확실한 승전을 이끌어 내기 위해 북한군 점령지 후방에 지상군 부대를 상륙시키기 위한 작전이 진행되었다. 7월 22일을 상륙일로 예정한 계획이 있었으나, 전황 급박을 이유로 상륙 예정 부대였던 미 제1기병사단이 앞당겨 전선에 투입되자 새로운 계획이 수립 추진되었으며, 곧 상륙지는 (후보지 인천, 군산, 주문진 가운데) 인천으로, 상륙부대는 미 제1해병사단과 제7보병사단, 한국군 독립 제17연대와 해병대 등으로 결정되었다. 북한군은 UN군의 후방 침투를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으나, 전방 상황이 다급했으므로 충분한 규모의 수비대를 편성 배치하지 못하고 있었다. 혹자는 성공 확률이 1/5,000에 불과하다고 했지만, 기상만 양호하다면 실패할 가능성이 거의 없던 작전이었다.
9월 15일 06시 30분에 개시된 인천상륙작전은 소규모 북한군 수비대의 간헐적인 반격을 받았지만 대체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18일에 교두보를 완전히 확보하고 김포비행장을 탈환했으며, 서울을 향해 진격했다. 낙동강 전선의 UN군도 16일 09시를 기해 총반격을 개시했으나, 북한군의 거센 저항으로 인해 돌파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 성공이 기정사실화되자 퇴로 단절에 위협을 크게 느낀 북한군이 23일을 전후로 일거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대부분 전선에서 돌파구가 마련되었으며, 패주하는 북한군 부대와 전투원, 낙오병을 추격하는 양상이 곳곳에서 전개되었다.
"사단장 류경수(柳京洙)는 사복으로 갈아입고 미제(美製) 파카 외투를 걸쳤으며, 군관(軍官:장교)과 전사(戰士:사병)들도 계급장과 기타 부착물을 모두 떼어버린 다음 북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나침반을 유리한 길잡이로, 산길만 골라서 하루 40-50리씩 걸었다."
- 1950년 9월, 북한군 제105땅크사단 문화부(정치부 전신) 군관 대위 오기완(吳기완)
26일에 오산 북방에서 상륙 부대인 미 제7보병사단과 북진 부대인 제1기병사단이 전선 연결에 성공했다. 이어 28일에 서울을 탈환(수복)했으며, 10월 1일에는 한국군 제3사단 제23연대를 필두로 38선을 돌파했다. 동월 10일에 원산, 14일 금천과 사리원, 17일 개성과 함흥을 점령한 후, 19일에는 평양에 입성(한국군 제1사단)했다. 중국의 개입을 염려한 UN군사령부에 의해 9월 27일에 일시적으로 북진한계선이 설정되기도 하였으나, 10월 24일자로 한계선이 철폐되면서 한만(韓滿:한중) 국경 지역까지 진격 작전을 계속했다. 북한군은 패잔병 부대와 급거 편성된 신편 부대를 모아 개성, 원산, 평양, 숙천 등에서 고수방어, 급편방어를 실시했지만 (개전초에 한국군이 처했던 상황처럼) 상대방인 국군 및 UN군과의 압도적인 전력차를 끝내 극복할 수 없었다. 오로지 지연전을 펼치며 북쪽으로 후퇴할 뿐이었다.
"(제3사단 제23연대 중에서) 선봉에 나선 제3대대 전초 중대원에게는 대대장(소령 허형순)의 지시가 내려져 있었다. '38선을 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것이었으나, 중대원들의 들뜬 진격 분위기를 진정시키지는 못했다. 장병들은 '38선'이라고 쓰인 나무푯말을 보자 걷어차 버렸다. '38선이 이제 어디있어!'라고 했다는 것이다. 나는 장병들의 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38선'이라는 푯말을 보면서 분을 터뜨렸을 것이다. 그 푯말 하나로 조국의 허리가 잘려야 했단 말인가."
- 한국군 38선 돌파시 회고, 당시 한국군 삼군총사령관 겸 육군총참모장 소장 정일권(丁一權)
(한국전쟁 제3면...)
중국인민지원군(中國人民志願軍:CPVA:항미원조지원군)이라는 명칭으로 참전했던 중공군이 압록강을 도하해 침투한 것은 UN군의 북진이 한창이던 10월 19일이었다. UN군이 한중(韓中) 국경을 향해 계속 진격하자 중국이 9월 25일 이후 5차례에 걸쳐 개입 가능성을 경고했는데, 그것을 실제 결행한 것이였다. UN군도 10월경부터는 중공군의 참전을 예측했으나, 소규모에 그칠 것이라고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상은 항공정찰을 피하기 위해 산간도로를 따라 야간에만 기동하는 방식으로 평북 운산, 온정, 희천, 강계 일대에 배치된 병력만 벌써 15만을 넘었다. 그리고 한국군 제6사단 예하 제7연대가 압록강변(초산)에 도달한 날인 26일에 기습적인 제1차 공세를 단행했다. 11월 7일까지 계속된 공격으로 UN군은 정체되고 단절되었으며, 결국 평남과 평북의 경계를 흐르는 청천강 이남으로 철수하기에 이르렀다. 중공군이 소극적 공격 후에 바로 후퇴한 것은 UN군 주력을 확실하게 '유인' 섬멸하려는 전술에서였다. 이 시점에도 미 제8군사령부는 중공군 규모를 2-3개 사단, 7만 명 이하에 불과하다고 오판하고 있었다(당시 북한 내 중공군 숫자는 이미 30만을 넘었다.)
전열을 정비한 UN군이 11월 24일에 공격을 재개하자, 중공군 역시 공세로 대응했다(제2차 공세). 서부전선의 미 제1, 제9군단과 한국군 제2군단(이상 제8군), 동부전선의 미 제10군단과 한국군 제1군단이 안주, 초산, 만포, 나진 등을 향해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는데, 초기에는 저항이 미미했지만 26일부터 인적 자원을 바탕으로 한 중공군의 기습에 의해 전진이 좌절되었다. 중공군 제13병단(야전군급)이 미 제8군의 우익을 담당하고 있던 한국군 제2군단을 강타해 제7사단과 제8사단의 전투력이 상실된 것을 단초로 UN군이 28일부터 퇴각에 들어갔다. 미 제2보병사단이 후퇴 도중에 섬멸적인 손실을 입었으며, 동부전선에서는 혜산진을 점령한 미 제7보병사단과 청진을 넘어 공격하던 한국군 수도사단, 제3사단 등이 작전을 시작하기도 전에 철수 명령을 받고 후퇴했다. 특히 제1해병사단이 장진호에서 중공군의 사면공격을 받고 심대한 피해를 입었다(이 혈전에서 중공군 제9병단이 입은 손실은 더욱 커서 재편성에 3개월이 소요되었다.)
"첫번째로 기억 나는 것은 나팔소리였다. 그리고는 온통 아수라장이었다. 질서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때 나는 부사수와 함께 침낭 속에서 자고 있었는데, 갑자기 보초를 서고 있던 친구가 침낭 끝을 잡아당겨 나를 언덕 아래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그는 어리둥절해하는 내게 '그들이 왔어! 놈들이 왔어!'라고 다급하게 말했다. 많은 전우들이 군화를 벗은 채로 적의 포로가 되었음이 틀림 없었다. 양말만 신은 채 도망치는 전우들도 많았다. 이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 1950년 11월 27일,
미군 제1해병사단 제5해병연대 제1대대 본부근무중대(HSC) 일병 D. 미쇼드(Michaud)
12월 3일에 하달된 총퇴각 명령에 따라 UN군은 모든 전선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중공군이 주축이 된 북한군은 UN군이 11월 30일에 포기한 청천강을 넘어 12월 3일 순천과 덕양, 4일 안주, 5일 평양을 점령하며 파죽지세로 남하했으나, 보급선의 과도한 신장과 전투지속 체계 미비로 장기전 수행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UN군이 방어선으로 설정한 38선 부근에서 정지했다(원래 평양 일대에서 휴식하려 했으나, UN군이 계속 후퇴하므로 38선까지 남진했다.). 동부전선에서는 성진항을 통해 1개 사단, 흥남항을 통해 4개 사단이 철수했다. 흥남철수는 12월 11일부터 동월 24일까지 이루어졌으며, 병력 10만 5천, 민간인 9만여 명이 부산, 거제, 제주 등지로 안전하게 후송되었다. 12월 15일부터 약 보름간 다소 안정되는 듯한 기미를 보였던 전선은, 12월 31일에 실시된 중공군의 공세와 그에 따른 UN군의 철수, 즉 '1.4후퇴'로 새로운 해를 맞이하게 된다. 12월말 무렵 한국군과 UN군 병력은 36만, 중공군과 북한군 병력은 44만 가량이었다.
미 제8군사령관 워커 중장 12월 23일 의정부에서 교통사고로 순직하자, 후임자에 M. B. 리지웨이(Ridgway) 중장이 임명되었다. 리지웨이 중장은 그동안 독립 운영되던 미 제10군단을 제8군 아래로 편입시키고 38선에 연해서 구축된 방어선에 대한 진지 보강을 명령했다. 그러나 12월 31일에 시작된 중공군의 1월 공세(정월공세:신정공세:제3차 공세)로 인해 다시 남으로 후퇴하는 상황이 초래되었다. 중공군과 북한군이 31개 사단(서울 방향 15개 사단)을 동원해 개성-의정부-춘천을 잇는 광정면을 공격해 오자 1951년 1월 3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다시 부산으로, UN군 전방지휘소가 대구로 이동했으며, 4일에는 결국 한강부교를 폭파하고 서울을 포기했다. 이때 UN군은 지난해 12월과 같은 무질서한 모습을 보이며 기약 없이 후퇴했다. 손실 누적과 병참 상황 악화로 중공군이 스스로 진격을 중단하자, 당초 계획한 수원-양평-홍천-주문진이 아닌, 평택-안성-장호원-제천-삼척을 연결하는 37도선 부근에서 비로소 전선을 수습했다(1월 6일).
중공군의 제2차 공세로 전황이 크게 악화된 1950년 12월 무렵,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한반도에서의 완전 철군을 심각하게 고려했다. UN군사령관인 맥아더 원수는 중국에 대한 보복조치의 일환으로 전면적인 확전을 건의하면서도 이러한 미 합참의 판단 통보에 대해 (최악의 경우에 그렇게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동의했다. 이어진 중공군의 재차 공세로 서울을 넘겨주는 1.4후퇴 상황이 발생하자, 미국과 UN군사령부는 UN군 철수와 한국 정부에 대한 도서 이전 대책을 마련했다(1월 12일). 즉, UN군을 일본으로 철수시키고 한국 정부와 군대, 경찰 등 약 100만 명을 제주도 등으로 이송시켜 망명정부를 설립, 본토수복을 위한 항전을 계속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극비에 부쳐졌던 이 계획은 다행히 실행에까지 이르지 않았지만, 당시 중공군의 공세로 인한 위기감이 어느 정도였지를 가늠하게 한다.
중공군의 본격 공세에 앞서, 북한군 제2, 제9사단이 12월 27일에 춘천, 현리의 한국군 방어 구역에 침투, 진지를 교란해 제8사단과 제9사단이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즉, 중공군의 1월 공세로 가장 크게 돌파당한 곳은 중동부 지역이었다. 홍천과 영월을 거쳐 단양까지 내려왔으나 다행히 UN군 전선은 동서로 양분되지 않았다(홍천이 조기에 탈취당하면서 방어선이 37도선까지 내려간 것이다.). 리지웨이 중장은 1월 15일과 25일에 수원, 용인, 이천 지역에 대한 위력정찰을 실시해 중공군이 최전선 지대에 주력부대를 배치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정비를 마친 UN군은 25일 07시 30분을 기해 서부전선에서 제한적인 반격에 돌입해, 26일에 수원, 2월 7일에 안양을 확보하고 한강 남안까지 전진했다. 중부전선에서도 2월 5일에 행동을 개시했으나, 곧바로 이어진 중공군의 역공세로 인해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역공세였던 중공군의 2월 공세(제4차 공세)는 제39군과 북한군 제5군단에 의해 2월 11일 야간에 감행되었다. 13개 사단이 한국군 담당 전선을 쇄도해 한국군 제3, 제5, 제8사단을 격파하고 원주와 제천 방면으로 전진했다. 그러나 지평리에서 UN군 공군이 화력 지원하에 미 제23연대(제2사단)가 중공군 3개 사단 공격을 막아내면서 2월 16-18일에 중공군의 철수로 공세가 마감되었다. UN군은 21일에 다시 공격을 재개해 28일에 양평-횡성-진부-강릉선에 도달했으며(킬러 작전), 3월 7일에 서울 재탈환과 중공군 주력 포착을 목표로 공격을 실시해 3월 16일에 서울에 진출하고 31일에는 임진강-춘천-양양에 이르는 선까지 진격했다(리퍼 작전). 주력 소탕에는 실패했으나 제3, 제4의 작전을 실시해 4월 중순에는 38선 근처까지 전선을 확장했다. 트루먼 대통령이 맥아더 원수를 UN군사령관 겸 극동군사령관에서 해임하고 그 직을 리지웨이 중장에게 맡긴 것은 4월 11일이었다. J. A. 밴플리트(Van Fleet) 중장이 신임 제8군사령관이 되었다.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를 결정한 UN 결의에 따라 UN 산하 회원국이 개전 직후부터 전투부대를 파견해 중공군 공세가 절정이던 1951년 5월까지 선발 부대들이 속속 한국에 도착했다. 미국, 영국, 그리스, 남아공, 네덜란드, 뉴질랜드, 룩셈부르크, 벨기에, 에티오피아, 캐나다, 콜롬비아, 태국, 터기, 프랑스, 필리핀, 호주 등 16개국이 전투부대를,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이탈리아, 인도 등 5개국이 외과병원, 병원선, 병원부대 등을 파견했다. 참전 부대 규모는 미국 9개 사단(82만 명), 영국 1개 사단급(5만6천 명), 캐나다, 터키가 각 1개 여단(각 5-6천 명) 등이었으며, 해군과 공군 파견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한편, 의용군 형태로 북한에 지원된 중공군 병력은 230만 명 이상이었다.
1951년 전반기는 중공군의 공세와 UN군의 반격으로 점철된 기간이었다. 4월 22일 04시에 4월 공세(제5차 공세:제1차 춘계공세)가 시작되자 UN군은 의정부를 포기하고 서울 북쪽까지 일시 물러났지만, 공세가 시작된 지 7일만에 공격 저지에 성공했다. 금곡-홍천-횡계-양양선까지 밀려났다가 곧 반격을 취해 5월초에는 의정부-가평-춘천-인제-속초선까지 회복했다. 문제는 5월 15일에 개시된 중공군의 5월 공세(제5차 공세 2단계:제2차 춘계 공세)였다. 사전에 춘천-인제 사이에 중공군이 집결되고 있음을 알았지만, 확실한 대비책을 세우지는 못했다. 언제나 화력과 기동력이 취약한 한국군 담당 전선에 집중하던 전술을 십분 발휘해 제5, 제7사단에 압력을 가하면서 한국군 제3군단의 퇴로를 차단한 후, 제3사단과 제9사단의 책임 지역을 유린했다. 비록 5일만에 공세가 종결되었으나, 유래 없는 피해를 입은 한국군 제3군단은 26일자로 해체되었다(용문산 전투에서는 한국군 제6사단이 중공군 3개 사단을 격퇴해 전월의 패배를 만회했다.).
(한국전쟁 제4면...)
중공군의 5월 공세는 UN군뿐만 아니라 중공군에게도 큰 손실이 되었다. 수 차례에 걸친 공세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에서 UN군을 축출하는데 성공하지 못한 반면, 그때까지 입은 직접적인 병력 피해만도 수십 만에 달했다(5월 공세에서만 9만 명 추산). 대량 인원 손실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전과를 확대할 수 없음이 확실하게 드러났고 기대했던 소련으로부터의 지원도 충분하지 못했으므로, 북한군 수뇌부와 함께 UN군과의 정전 협상에 나서게 되었다. 미국 주도의 UN군측도 전년 12월경부터 정전을 통한 전쟁 중단을 모색하고 있었으므로(맥아더 원수 해임의 일부 원인이기도 했다.), 양자의 이해가 일치해 7월 8일의 예비회담을 거쳐 동월 10일에 개성에서 최초의 정전 회담이 개최되었다. 한국 정부와 한국 국민은 휴전(休戰)에 극렬하게 반대했지만, 교전 당사자인 관계로 형식적으로나마 회담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UN군은 5월말부터 적극 공격을 개시해 6월 15일 전후로 38선 이북 10-20km선을 연결한 임진강-화천-양양의 켄자스-와이오밍(Kansas-Wyoming)선 대부분을 확보했다. (현재 휴전선에 근접하는 전선이 마련되고) 본격적인 휴전 교섭이 개시되자, 이후 전투는 '대진(對陣)'이라는 진지전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흡사 제1차세계대전 당시 서부전선에서나 볼 수 있던 것 같은 전형적인 교착 상태의 재현이었다. 다만 일부 다른 점이 있다면, 산악지형적인 특성상 고지(高地)를 중심으로 전투가 벌어졌고, UN군이 '공세적 방어'를 기본 전술로 채택해 능동적이고도 즉각적인 방어 전투가 수행된 정도였다. 펀치볼, 피의 능선, 단장의 능선(Heartbreak Ridge), 수도고지, 지형능선, 백마고지, 저격능선, 351고지 등에서 격렬한 고지쟁탈전이 있었으나, 전선 변동폭은 크지 않았다. 1953년 7월 13일 실시된 중공군의 금성 지구 공격이 마지막 격전으로, 2년전 춘계 공세 이후 최대 규모로 실시된 이 작전에서 중공군은 약 6만의 손실을 내며 4-9km를 전진하는 절반의 성공을 거뒀다.
"피아간에 수많은 전상자가 속출한 격전이었다. (중략) 내가 지휘한 제1분대 역시 나중에는 2명만 성(盛)했을 뿐이었다. 분대장인 나는 전상을 입은 분대원까지 고무(鼓舞:독려)하면서 중대가 진지를 교대할 때까지 48시간 동안 눈 한 번 붙여보지 못하고 분대 진지를 끝끝내 지켜 내었다. 교대하여 고지에서 내려가니 대대장, 연대장, 그리고 사단장까지도 잘 싸웠다고 치하하면서, 심지어는 군신(軍神)이라는 말까지 하면서 충무훈장(충무무공훈장)을 내 가슴에 달아 주었다."
- 1953년 7월 김화 지구, 한국군 제9사단 제29연대 제7중대 1소대 이등중사(분대장) 박희경(朴喜敬)
거제도 포로수용소 폭동(1952.04.02), 반공포로 기습 석방(1953.06.18) 등과 같은 일련의 사건이 있었지만, 최초 회담이 있은 후 만2년을 넘도록 지리멸멸 거듭된 정전 협정은 결국 1953년 7월 27일 10시에 UN군측 수석대표 W. K. 해리슨(Harrison) 중장과 북한측 수석대표 남일(南日) 대장의 서명으로 조인되고 말았다. 27일 22시부로 협정이 발효되었으며, 한국과 북한은 자연스럽게 정전 체제로 편입되었다(한국측은 교전 당사자이기는 했으나, UN군에 작전지휘권을 위임하고 있었으므로 협정 체결 당사자가 아니었다. 때문에 미국에 전후 방위 문제에 대한 부담을 지우기 위해 의도적으로 전문 5조 36항으로 구성된 정전 협정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3년을 넘도록 계속된 길고 긴 전쟁,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적인 전쟁이 어느 한쪽의 완전한 승리나 패배 없이 대단원의 막을 내린 것이다.
[3] 전쟁 통계
정전시 양측 병력은 한국군이 18개 사단 60만, UN군이 9개 사단 34만(미군 30만), 북한군이 18개 사단 38만, 중공군이 58개 사단 122만 명이었다. 한국군은 미군 철수에 대비해 기획한 20개 사단 증편 계획에 의거해 1953년 12월까지 2개 사단(제28, 제29사단)을 추가 창설했다.
전후 북한으로 7만6천(북한군 7만, 중공군 6천), 남한으로 1만3천 명(한국군 8천, UN군 5천)의 포로가 각각 송환되었다(이에 앞서 한국에서 북한군 출신 반공포로 2만7천 명을 석방). 양측 모두로의 송환을 거부한 한국군 2명과 북한군 74명, 중공군 12명 등 88명은 제3세계 국가인 인도로 이송되었으며, 중국 귀환을 거부한 1만 4천 명의 중공군 포로는 대만에 인계되었다(포로 본인의 선택에 따름).
인명 피해 외에 가옥, 도로, 발전, 항만, 공장을 비롯한 산업 시설 상당수가 파괴되었으며, 피난 이재민 320만, 이산가족 1천 만, 전쟁미망인 30만, 고아 10만 명 등의 기록적인 피해가 발생했다. 오른쪽 상단 표에서 북한군과 중공군 인명 피해 및 북한 민간인 피해는 추정치이다. UN에서 발표한 미군측 통계에 따르면 북한군 사상자는 52만, 중공군 사상자는 90만 명 내외였다. 참고로, 북한측 발표에 따른 UN군 손실은 한국군 58만, 미군 39만, 기타 UN군 3만 등 100만 명이었다.
"미국놈의 고용 간첩인 박헌영은 남조선에 지하당원이 20만 명이나 되고, 이 가운데 서울에만 6만 명이 있다고 떠벌렸는데, 20만 명은 고사하고 우리가 낙동강 경계선에 진출할 때까지 단 한 건의 폭동도 없었다. 만약 부산에서 노동자들이 몇천 명이라도 일어났더라면 우리는 반드시 부산까지 다 해방시켰을 것이고, 미국놈들은 상륙하지 못했을 것이다."
- 1963년 군관들 앞에서 연설, 북한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원수 김일성
첫댓글 북한과 친북세력들은 6.25동란을 내전이라고 하면서 조국해방전쟁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6.25 동란은 엄연히 자유진영과 공산진영간의 전쟁이죠. 그래서 전쟁 발발 초기에 미국 측에서는 이제는 한국만의 전쟁이 아니라 우리의 전쟁이라고 표현했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