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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成均館)
성균관 대학교 안에 있는 성균관은 국가가 설치한 최고 학부로, 국학, 학궁, 반궁(泮宮)이라고도 한다. 반궁이란 명칭은 천자의 학은 벽옹이고 제후의 학은 반궁이라는 중국 고대의 제도에 의한 것으로, 성균관의 좌우편에는 반수(泮水)라는 냇물이 흐른다.
성균관이란 명칭은 고려 충선왕 때 성균감(成均監)을 성균관으로 개칭한 뒤 조선에서도 그대로 부르던 것으로 성균관의 건물은 궁궐, 종묘 및 사직단과 함께 태조 4년에 착공하여 태조 7년(1398)에 완성되었다.
성균관은 유학을 강의하는 명륜당(明倫堂)을 비롯하여 공자 이하 136명의 성현을 모신 문묘(文廟, 현판은 大成殿으로 표시되어 있음.)를 비롯하여 유생 200여 명이 거처하는 동서재와 부속 건물 등 총 76간에 이른다. 성균관은 관리 후보자를 양성하는 교육 기관의 기능과 함께 공자를 비롯한 성현을 모시는 사묘(祠廟)의 기능을 지니고 있다.
성균관에 있는 문묘는 국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대표적인 것으로 태조 7년 한성에 천도한 후 현재 명륜동에 위치를 정하여 창건되었다. 문묘는 창건 이후 여러차례의 화재를 입어 재건하기도 했으며, 현재의 건물들은 임진왜란 이후 선조 때에 재건된 것이다.
현재 건물의 배치는 창건 당시와 대동소이할 것으로 생각되며, 중앙의 높은 기단 위에 서 있는 공자묘인 대성전을 중심으로 하여 전면에 72제자와 홍유향현의 신위를 안치한 동서양무가 있고, 그 앞쪽에 대성전 중심축 선상에 남향하여 중문이 서 있으며, 좌우에는 담벽이 연결되어 있어서 대성전 앞에 큰 중정이 형성되어 있고, 동무 앞에는 비각이 서 있다.
문묘는 대성전인 공자에게 제사를 하는 제향공간과 명륜당인 유학을 전공하는 강학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묘(文廟)
문묘(文廟)는 공자의 위패(位牌)를 모신 사당을 말하는 것으로 공자묘라고도 한다. 문묘는 우리나라, 중국, 일본 등지에 있는데 우리 나라에는 서울 종로구 명륜동에 있는 것이 규모가 가장 크며, 전국에 231개 향교에 있다.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된 우리나라 18현을 열거하면 신라의 설총(薛聰)과 최치원(崔致遠), 고려의 회헌 안향(晦軒 安珦. 후에‘裕’로개명),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조선조의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 일두 정여창(一두 鄭汝昌),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퇴계 이황(退溪 李滉), 율곡 이이(栗谷 李珥),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우계 성혼(牛溪 成渾),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 신독재 김집(愼獨齋 金集), 중봉 조헌(重峯 趙憲),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동춘당 송준길(同春堂 宋俊吉), 현석 박세채(玄石 朴世采)이다.
문묘제례의 의식 절차는 영신(迎新)·전폐(奠幣)·초헌(初獻)·공악(空樂)·아헌(亞獻)·종헌(終獻)·철변두(徹邊豆)·송신(送神)· 망료(望燎) 등의 순서로 진행된다.
◐문묘(文廟) 배향(配享) 인물
[문묘(文廟)의 위패(位牌) 배치도]
1. 대성(大成)
1). 공자 (孔子)
▣생몰연도: BC 551-479
▣배향위치: 중앙 제1위(第一位)
▣인물개요:
중국 춘추시대 말기의 대 사상가이며 교육자로 유교의 개조(開祖)시며 성인으로 일컬어진다. 공(孔)은 성이고 자(子)는 남자의 미칭(美稱)으로 '선생' 의 뜻이며,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이다. 노나라 창평향 추읍(지금의 산동성 곡부현 남쪽 추현)출신. 탄생 연도에 대해서는 기원전 551년(주왕실 영왕21년, 노양공22년)이라는 설(사마천의 "사기"[공자세가])과 552년이라는 설("춘추공양전" "춘추곡량전")이 있다.
아버지는 숙량흘(叔梁紇), 어머니는 안징재(顔徵在)이다. 숙량흘은 60세가 넘어 젊은 안징재와의 사이에서 공자를 낳은 것이라고 한다. 안징재는 공자를 낳기 위해서 니구산(尼丘山)에 기도를 들였다 하는데, 공자의 이름이 구(丘)이고 자가 중니(仲尼)인 것도 니구산과의 관계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혹은 나면서부터 머리꼭대기 가운데가 움푹 들어가 언덕처럼 생겼으므로 이름을 구라고 했다고도 한다("사기")
공자의 조상은 은(殷)왕실과 줄이 닿아있다. 즉, 은나라가 망한 뒤 주공은 은나라 최후의 임금인 주왕(紂王)의 서형(庶兄) 미자계(微子啓)를 송(宋)나라에 봉했다. 송나라는 제 6대 양공희에 와서 조카인 여공에게 죽임을 당하고 왕위를 빼앗겼는데, 양공희에게는 이때 아들 불보하(弗父何)가 있었다. 그가 공자의 조상이다. 그 뒤로 송나라의 10대 대공(戴公)에서 무공(武公) , 선공(宣公)에 걸쳐 임금을 보좌한 재상 정고보(正考父)가 있으나, 그 아들 공보가 (孔父嘉)가 송나라의 정쟁에 휘말렸고(B.C 710)다시 그의 아들 자목금보(子木金父)는 송나라를 떠나 노나라로 옮겨와 살게되었다. 그리고 공보가의 '공'자를 따서 성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이 자목금보의 현손이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이며, 숙량흘은 '키가 10척이고 무예와 힘이 뛰어났었다'고 한다. ("공자가어")
"춘추좌씨전"에는 숙량흘이 전쟁에 나가 무공을 세웠다는 기사가 두 군데(양공10, 17년) 기록되어있다. 공자도 용모나 몸집이 보통 사람과는 달랐다고 한다. "사기"에는 "키가 9척 6촌이어서 사람들이 모두 키다리라 부르며 이상하게 생각하였다."라고 하였고, 또 공자가 정(鄭)나라에 가서 제자들과 떨어져 어려운 처지에 놓였을 때의 모습을 정나라 사람의 입을 빌어 "이마는 요임금 같고 목은 고요같고 어깨는 자산과 같으나, 허리 아래편은 우임금보다 3촌이 모자라며 초상난 집의 개처럼 축 늘어져 있더라."라고 표현하였다. "공자가어" [곤서(困書)]에서는 '키는 9척 6촌이며 눈두덩이가 평평하고 긴 눈에 툭 불거진 이마를 지녔다.' 는 형용을 보탰으며, 한 대 공부(孔)의 "공총자"가언에서는 장홍(弘)이 공자의 인상을 표현하여, "눈두덩이가 평평하고 꼬리가 긴 눈과 불거진 이마는 황제(黃帝)의 모습이요, 긴 팔에 거북 같은 등을 하고 9척 6촌의 키를 지니고 있는 것은 탕(湯)임금의 용모이다." 라고 하였다. 이같이 공자는 용모가 비범하였고 체력도 강했다 한다.
2. 사성(四聖)
1). 연국 복성공 안자 (○國 復聖公 顔子)
▣생몰연도: BC 521 - 481
▣배향위치: 동배향(東配享) 제1위(第一位)
▣인물개요:
공자의 제자로 춘추 말엽 노(魯)나라 사람이다. 성은 안(顔)이고 이름은 회(回)이며 자가 자연(子淵)이기 때문에 안연(顔淵)으로도 일컬어진다. 노 소공(昭公)21년에 출생하여 애공(哀公) 14년 4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공자보다 30세가 적으며, 집안은 청한(淸寒)하였다. 16-7세 때부터 공자를 스승으로 모시고 계속하여 공자의 학습 생활을 따랐으며 종신토록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안회는 공문제자 중에서 공자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고, 사람됨이 총혜(聰慧)롭고 배우기를 좋아하였으며, 내향적인 성격으로 침정(沈靜)한 데다가 엄격하고도 근면하였다.
그는 공자의 제자 가운데 덕행수양(德行修養)면에서도 가장 뛰어난 인물이다. 공자는 제자들을 평가하면서 덕행 면에서 안연을 제일로 지목하고 그의 인(仁)을 높이 평가했다. 또한 안회는 안분지족(安分知足)으로 자기를 지켰고, 예에 어긋나는 말과 행동을 하지 않았으며, 명리(名利)에 담박하여 안빈낙도(安貧樂道)하였고, 자신의 장점과 공로를 자랑하지 않았다.
2). 성국 종성공 증자(○國 宗聖公 曾子)
▣생몰연도: BC 505 - 432
▣배향위치: 서배향(西配享) 제1위(第一位)
▣인물개요:
공자의 제자로 춘추 말엽 노나라 남무성(南武城) 사람이다. 성은 증(曾)이고 이름은 삼(參)이며 자는 자여(子輿)이다. 추존하여 증자(曾子)라고 하였으며 공자보다 46세가 적다. 집안은 몰락한 귀족으로 빈한하였으며, 그의 부친 증점(曾點)도 공자에게서 수학하였다. 공자는 증삼을 노둔하다고 평하였는데 이는 성격이 내성적이고 일을 신중히 처리하였기 때문이다. 그가 학습하고 수양한 것은 주로 '내성(內省)'과 '신독(愼獨)'이다. 즉 "논어" [학이편]에 "나는 날마다 세 가지로 내 몸을 살핀다."라고 하여 내성을 말하였고 "예기"와 "대학"에 "군자는 반드시 그 혼자 있을 때 삼가야 한다"라고 하여 신독을 말하였다. 그는 유가의 최고 덕목인 인(仁)의 실현을 자신이 추구해야 할 최고의 과제로 여겼기 때문에, 평상시에도 아주 근신하고 신중하게 행동하였으며 결코 자기가 취해야 할 활동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증삼은 특히 효행으로 이름났다. 공자의 제자 중에 효행이 뛰어난 사람으로는 민자건(閔子騫)도 있지만 후세에 끼친 영향은 민자건보다 증자가 훨씬 크다. 그는 효의 전형으로서 어리석을 정도로 몸소 효도를 실천하였는데 "사기" [중니제자열전]에 의하면 공자는 그를 효도에 능통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효경"은 바로 증자가 지었다고 하였다.
3). 기국 술성공 자사(沂國 述聖公 子思)
▣생몰연도: BC 483?- 402
▣배향위치: 동배향(東配享) 제2위(第二位)
▣인물개요: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가이자 유가학파의 중요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성은 공(孔) 이름은 급(伋) 자는 자사(子思)로 공자의 적손이다. 대략 주나라 경왕 37년에 태어나서 주나라 위열왕 24년에 졸(卒)한 것으로 전해진다.
자사는 일찍이 증자를 사사하여 그 종전을 얻었다. 때문에 "맹자" [이루 하]에는 '증자 자사 동도(曾子子思同道)'라고 되어있다. 그의 학술과 주요 사상은 "중용"에 나타나 있는데 그것은 공자의 중용사상을 계승 발전시켜서 성(誠)으로써 핵심적인 철학체계를 세운 것이다. 자사는 사람을 세 부류로 나누어 하나는 생이지지(生而知之)하여 안이행지(安而行之)하는 사람과 학이지지(學而知之)하여 이이행지(利而行之)하는 사람, 그리고 곤이지지(困而知之)하여 면강이행지(勉强而行之)하는 사람으로 분류하였다. 또 자사는 유가의 사회 윤리관을 개괄하여 군신 부자 부부 곤제 붕우의 교(交)를 천하의 달도(達道)라 하였으며 지인용(智仁勇) 세가지를 천하의 달덕(達德)이라 하였다. 정치 사상으로는 천하를 다스리기 위해서 수신(修身), 존현(尊賢), 친친(親親), 경대신(敬大臣), 체군신(體群臣), 자서민(子庶民), 내백공(來百工), 유원인(柔遠人), 회제후(懷諸侯)의 구경을 제시하였다.
4). 추국 아성공 맹자(鄒國 亞聖公 孟子)
▣생몰연도: BC 372 - 289
▣배향위치: 서배향(西配享) 제2위(第二位)
▣인물개요:
전국시대 사상가이자 정치가, 교육가로 유가학파의 대표적인 사람이다. 성은 맹(孟), 이름이 가(軻)이며, 자는 자거(子車) 또는 자여(子輿)로 노나라 추읍(鄒邑) 사람이다. 아버지는 맹손격(孟孫激)이고 어머니는 장()씨라고 하나 선계가 분명치 않다.
그가 40세를 전후했을 때 추목공은 그를 발탁하였다. 그러나 당시 추의 정치는 극히 혼란하여 맹자는 자기 나라에서 자신의 정치적 포부를 펼칠 수 없음을 부끄럽게 생각하고는 곧 추를 떠났다. 그리고 그는 일생동안 왕도정치로써 제, 량, 노, 추, 등, 설, 송 등의 나라를 두루 다니면서 제후들에게 유세하였고, 제선왕의 공경이 되기도 하였다.
맹자가 평생 목표로 삼았던 것은 사상 면에서는 유학을 드높이는 것이었고 정치면에서는 왕도정치의 실천 곧 유가의 이상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그의 사상 면에서 두드러진 점은 성선설(性善說)이다. "맹자" 7장은 이러한 성선설의 정신으로 일관되어있고 그 중에서도 특히 [고자]와 [진심]두 편에는 이러한 이론이 여러 군데 등장한다.
3. 공문십철(孔門十哲)
1). 비공민손(費公閔損)
▣생몰연도: BC 536 - 487
▣배향위치: 동배향(東配享) 제1위(第一位)
▣인물개요:
춘추 말엽의 노나라 사람인 민손은 자가 자건(子騫)으로 공자보다 15세가 적은 공자의 제자이다. 출신이 빈한하였으며 생모가 일찍 죽고 아버지가 재취하여 두 아들을 낳았는데 계모는 민손을 심하게 학대하였다. 집안 사정이 매우 어려웠던 관계로 민손은 어리지만 직접 수레나 마차를 끌면서 생계를 꾸려 나갔다. 중년에 아버지가 죽어 삼년상을 치르는 중에 노국에 전란이 일어나자 그는 상복 대신 군복을 입고 복역했으며, 그 일이 끝나자 다시 돌아와 삼년상을 마쳤다. 계씨(季氏)가 그를 비읍(費邑)의 재상으로 삼았으나 사양하고 평생 벼슬하지 않다가 나이 50세가 되어죽었다.
민손의 사람됨은 공근단정(恭謹端整)하였으며 침정(沈靜)하여 말이 없었다. 공자는 민손의 모습을 "온화하도다(誾誾如也)" 라고 하였다. 또 노나라 사람이 장부라는 창고를 개수하자 민자건이 "옛 것을 그대로 이용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필이면 반드시 고쳐 지어야만 하는가?"라고 하였다. 이 말을 공자가 듣고 "저 사람이 말을 하지 않을지언정 말을 하면 반드시 도리에 맞음이 있다"라고 하였다. 이는 민손이 평소에 말은 매우 적게 하지만 일단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면 반드시 사리에 맞는 말을 한다는 것이다.
2). 운공 염경(○公 ○耕)
▣생몰연도: BC 544 - ?
▣배향위치: 서배향(西配享) 제1위(第一位)
▣인물개요:
공자의 제자로 성은 염씨이고 이름은 경이며 자는 백우(伯牛)이다. 춘추 말엽 노나라 사람으로 노나라 양공 29년에 태어났으나 졸년은 자세하지 않으며, 공자보다 7세가 적다.
출신이 빈한하였고 염옹(雍)과는 동종(同宗)이다. 공자가 노나라의 사구(司寇)가 되어 정승의 일을 섭행할 때, 염경을 중도의 재상으로 삼았다. 공자가 열국을 주유할 때에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수행하였는데 공자가 노나라에 돌아온 뒤 얼마 되지 않아 악질(惡疾)에 걸려 공자보다 먼저 죽었다. 염경은 공자의 제자 가운데 덕행으로 뛰어난 사람이다. 즉 공자는 제자들의 특장을 말하면서 덕행으로 안연 , 민자건, 염백우, 중궁을 들었고, 맹자도 "염우(염경을 이름), 안회, 민자건은 덕행을 잘 말하였다"("맹자" [공손추상])고 한 것이 그것이다. 또한 그는 일을 신중히 처리하였는데 일상생활의 잡다한 일을 잘 처리하는 독특한 재간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3). 설공 염옹(薛公 ○雍)
▣생몰연도: BC 522 - ?
▣배향위치: 동배향(東配享) 제2위(第二位)
一二 ▣인물개요:
춘추 말엽의 노나라 사람으로 자는 중궁이며 공자보다 29세가 적은 공자의 제자이다. 출신이 매우 한미(寒微)하였으며 염백우(伯牛) 염유(有)와 동종(同宗)이다. 일찍이 공자를 스승으로 따르면서 열국을 주유하였으나 사적이 분명하지 않다.
"논어"에 의하면 염옹의 사람됨은 인독돈후(仁篤敦厚) 침정과언(沈靜寡言)하였으며, 국량이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인다. "논어" [옹야]에서 공자가 "중궁은 군왕의 자리에 앉을 만하다(雍也可使南面)" 고 한 것은 중궁의 마음이 넓고 크며 간략하고 중후하여 인군(人君)의 도량이 있음을 찬상(讚賞)한 것이다. 또 "논어" [공야장]에는 어떤 사람이 염옹에 대해서 "인(仁)하나 말재주가 없습니다.<仁而不>"라고하자 공자는 "그가 인한지는 모르겠으나 말재주를 어디다 쓰겠는가?" 라고 말하였다. 이는 공자가 말 잘하는 사람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가진 것을 감안할 때 크게 칭찬한 것이다.
4). 제공 재여(齊公 宰予)
▣생몰연도: BC 522 - 458
▣배향위치: 서배향(西配享) 제2위(第二位)
▣인물개요:
공자의 제자로 춘추 말엽 노나라 사람이다. 재(宰)씨이고 이름은 여(予)이며 자는 자아(子我)인데, 재아(宰我)로 칭하기도 한다. 노나라 소공 20년에 출생하여 주(周) 정왕(定王) 11년에 졸(卒)하였으며, 공자보다 29세가 적다. 가계와 평생의 사적에 대해서는 자세하지 않다. "사기"에 의하면 그는 공자가 열국을 주유할 때 처음부터 끝까지 동행하였는데 공자는 여러 번 그를 외교 사절로 제나라와 초나라에 파견했다고 한다.
재여는 지혜가 뛰어났고 언변에도 능한 사람이었다. 공자가 그를 언어에 뛰어난 자로 말하였을 뿐만 아니라 맹자와 사마천도 그가 언변에 재능이 있었음을 인정했다. 맹자는 또한 "재아, 자공, 유약은 지혜가 족히 성인을 알만하다"("맹자" [공손추상])고 하여 재여의 지혜가 뛰어났음을 말하였다.
5). 여공 단목사(黎公 端木賜)
▣생몰연도: BC 520 - ?
▣배향위치: 동배향(東配享) 제3위(第三位)
▣인물개요:
춘추 말엽의 위국인(衛國人)으로 성은 단목(端木)이며, 이름은 사(賜)이고, 자는 자공(子貢)이며, 공자보다 31세 적은 공자의 제자이다. 출신이 한미(寒微)하여 청년시기에 곧 상업 활동을 하였다. 공자가 열국을 주유(周遊)하면서 위(衛)나라에 이르렀을 때 자공이 배알하고 스승으로 모셨다. 후에 위나라에서 벼슬을 하면서 상업을 하여 많은 재산을 모았다. 공자의 서세(逝世)에는 모든 제자가 삼년상을 입었으나 유독 자공만은 무덤가에 묘막(墓幕)을 짓고 육년이 지난 후에 돌아갔다.
자공은 천성이 영오(穎悟)하고 낙관적이며 활발하였고 정리(情理)에 통달하였지만 다른 사람의 시비(是非)에 대하여 평론하기를 좋아하는 흠이 있었다. 이는 그의 마음이 곧고 말하는 것이 솔직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한 언변이 매우 좋은 것과도 연관이 있다. 그는 언변에 매우 능하여 외교적인 면에서 비범한 재능이 있었다.
6). 서공 염구(徐公 ○求)
▣생몰연도: BC 522 - ?
▣배향위치: 서배향(西配享) 제3위(第三位)
▣인물개요:
공자의 제자로 춘추시대 말엽 노나라 사람이다. 염씨이며 이름은 구(求)이고 자는 자유(子有)인데, 염유(有)로 일컫기도 한다. 노 소공 12년에 출생하였으나 졸년은 자세하지 않으며 공자보다 29세가 적다.
출신은 한미 했으며 중궁, 염우와는 동족이다. 청년시절에 그는 계씨(季氏)의 가신으로 있으면서 공자를 스승으로 받들다가 나중에는 공자를 따라 열국을 주유하였는데, 노 애공(哀公) 5년 가을에 노나라의 집정자였던 계환자(季桓子)가 죽고 계강자(季康子)가 집정하자 공지어(公之魚)의 추천으로 진(陳)나라로부터 노나라로 돌아와 계씨 가족의 총리를 맡았다. 애공 11년에 제나라와 노나라가 교전했는데 이때 염구가 계씨의 장수가 되어 제나라의 진영에 돌입하여 제군을 대파했다. 그 후 염구는 곧바로 계씨 가족의 직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7). 위공 중유( 衛公 仲由)
▣생몰연도: BC 542 - 480
▣배향위치: 동배향(東配享) 제4위(第四位)
▣인물개요:
춘추 말엽의 노국인(魯國人)으로 성은 중(仲) 이름이 유(由)이며 자는 자로(子路)이나 계로(季路)로 쓰기도 한다. 출신이 한미 하였으며, 공자보다 9세가 적은 공자의 제자이다.
자로는 젊었을 때 웅계(雄鷄: 용병을 상징하는 수탉 깃으로 장식한 관)를 쓰고 가돈(豚: 용맹을 상징하는 수퇘지 가죽으로된 띠)을 차며 공자를 능멸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공자가 예를 차려 가르치자 마침내 유자(儒者)로서 자신을 맡겨 제자가 되기를 청하였다. 공자를 따라 노나라에 있으면서 벼슬을 할 때 계씨의 비읍(費邑)의 재상이 되었으며 뒤에 노나라를 떠나 위(衛)나라에 이르러서는 위국 대부 공리(孔)의 포읍령(蒲邑令)이 되었다. 공자가 14년간의 주유를 마치고 노나라로 돌아올 때에 자로도 함께 돌아왔으나 위국 포읍령의 직책은 버리지 않았다. 노 애공 15년에 위국에서 내란이 일어나자 몸소 그 난리에 뛰어들어 죽었으니 나이 63세였다. 자로는 위인이 용맹하였으면 의(義)를 숭상하였다. 이는 위나라에 내란이 일어났을 때 직접 말을 몰아가서 싸우다 죽은 일에서도 알 수 있다.
8). 오공 언언(吳公 言偃)
▣생몰연도: BC 506 - ?
▣배향위치: 서배향(西配享) 제4위(第四位)
▣인물개요:
언언(言偃)은 성이 언(言), 이름이 언(偃)이며 자는 자유(子游)이다. 오(吳)나라 사람으로 공자보다 45세가 적은 공자의 제자이다. "공자가어"에는 노인(魯人)으로 공자보다 35세 적다고 되어있다.
자유는 공자가 열국을 주유한 후에 제자가 되어 비교적 종사한 것이 늦기는 하였으나 배움에 능하여 이룸이 있었다. 특히 자유는 유가에서 주장하는 예악정치(禮樂政治)를 몸소 실천한 사람이다. 자유가 무성재(武城宰)가 되어 백성들을 다스리고 있을 때의 일이다. 공자가 무성에 갔을 때 현가(絃歌)의 소리를 듣고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하기를 "닭 잡는데 어찌 소잡는 칼을 쓰겠느냐?"하고 하자 자유는 "예전에 선생님께 듣기로 '군자가 도를 배우면 사람을 사랑하고 소인이 도를 배우면 부리기가 쉽다'고 하셨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공자는 "자유의 말이 옳다. 지금 내가 한 말은 농담이었다"라고 하였다.
9). 위공 복상(魏公 卜商)
▣생몰연도: BC 507? - ?
▣배향위치: 동배향(東配享) 제5위(第五位)
▣인물개요:
복상(卜商)은 성이 복(卜), 이름이 상(商)이며, 자는 자하(子夏)이다. 위나라 사람으로 공자보다 44세가 적은 공자의 제자이다. 자하는 출신이 빈한하였으나 재물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로 인해 만년에 강학을 열어 배우는 사람들이 삼백여 인에 이르렀으나 매우 청빈한 생활을 하였다. 학문을 매우 좋아하여서 위문후(魏文侯)가 스승이 되어 줄 것을 부탁하였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생 동안 곤궁하게 살았으며 만년에 자식까지 잃는 불행을 겪기도 했다.
10). 영천후 전손사(潁川侯 孫師)
▣생몰연도: BC ? - ?
▣배향위치: 서배향(西配享) 제5위(第五位)
▣인물개요:
전손사는 성이 전손이고 이름이 사이며 자는 자장이다. 진나라 사람으로 공자보다 48세가 적은 공자의 제자이다. "여씨춘추"에는 "노지비가(魯之鄙家)"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출신이 매우 천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공자는 자장을 평하여 '벽()'이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주자는 '용모에만 익숙하고 성실성이 부족함'이라고 풀이하였다. 또 자장이 성인의 도를 묻자 공자는 "성인의 자취를 밟지 않으면 방에 들어갈 수 없다" 라고 하여 자장의 학문 태도가 형식상의 모방에 다소 치우침이 있어서 승당입실(昇堂入室)하기 어려웠음을 알 수 있다.
4. 송조6현(宋朝六賢)
1). 도국공 주돈이(道國公 周敦)
▣생몰연도: 1017 - 1073
▣배향위치: 동배향(東配享) 제6위(第六位)
▣인물개요:
북송 때의 철학가로 '북송오자(北宋五子)'중의 한 사람이다. 본래의 이름은 돈실(敦實)인데 영종의 구휘(舊諱)를 피하여 돈이로 고쳤다고 한다. 자는 무숙(茂叔)이다. 도주(道州)의 영도(營道)사람으로 송나라 진종 천희 원년(1017)에 출생하여 송나라 신종 희령 6년(1073)에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일찍이 남안군사리참군(南安軍司理參軍), 계양현령(桂陽縣令) 등 여러 관직을 거쳤고 만년에는 여산의 연화봉(蓮花峰)아래에 거처를 정하고 염계(濂溪)로 이름하니 후인들이 그를 염계선생으로 칭하고 그의 학파를 염학파라 하였다.
철학적으로는 "역전" "중용", 한유(韓愈)의 [원도(原道)]에 의거하고 도교와 불교의 일부 사상을 받아들였다. 진단(陳)의 "무극도(無極圖)"를 개변하여 세계본체와 그 형성 발전을 논한 "태극도설"을 저술하였으며, 공맹(孔孟)의 정통 사상을 위주로 한 철학 이론 체계를 수립하였고, "중용"의 '성(誠)' 사상을 계승, 개조하여 '성이란 우주 본체와 인류 만물의 근본 속성이며 법칙'이라고 하였다.
2). 예국공 정호(豫國公 程顥)
▣생몰연도: 1032 - 1085
▣배향위치: 서배향(西配享) 제6위(第六位)
▣인물개요:
북송 때의 저명한 철학가로 '북송오자'중의 한 사람이며, 송 명리학 창시자 중 한 사람이다. 자는 백순(伯淳)인데 세칭 '명도선생(明道先生)'이라고 하였으며, 하남(河南) 낙양(洛陽)사람으로 송 인종 명도(明道) 원년(1032)에 출생하여 송 신종 원풍 8년(1085)에 졸하였다. 진사(進士)에 합격하여 조악(調), 상원(上元)의 주부(主簿)로 발탁되었고, 진성(晉城), 부구(扶溝)의 현령(縣令)을 지냈으며, 후에 여공저(呂公著)의 천거에 의하여 태자중윤(太子中允), 감찰어사이행(監察御史裏行)이 되었다. 젊었을 때 그의 아우 정이(程)와 함께 주돈이(周頓)에게 배웠으므로 이정(二程)으로 병칭 되었고, 그들이 장기간 낙양에서 강학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학을 낙학(洛學)이라고 하였으며, 송유(宋儒)들은 정호를 공맹의 도(道)를 계승하고 크게 발양한 진유(眞儒)로 여겼다고 한다.
정치적으로는 사마광(司馬光), 소옹(邵雍)과 같은 입장에서 왕안석(王安石)의 신정을 반대했으며, 인종에게 개혁 방안<치법십사(治法十事>를 올려 토지 겸병의 제지와 병역 제도의 개혁을 주장하고 농업 생산을 강조하였다.
3). 낙국공 정이(洛國公 程)
▣생몰연도: 1033 - 1107
▣배향위치: 동배향(東配享) 제7위(第七位)
▣인물개요:
북송 때의 저명한 학자로 '북송오자'중 한 사람이다. 자는 정숙(正叔)인데 세칭 '이천선생(伊川先生)'이라고 한다. 하남(河南)의 낙양 사람으로 송나라 인종 명도(明道) 2 년(1033)에 출생하여 휘종 대관(大觀) 원년(1107)에 졸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민하였고, 18세 때는 천자에게 상서하여 세속의 의견을 물리치고 왕도로 근본을 삼아야 한다고 하였다. 비서성교서랑(秘書省校書郞), 숭정전설서(崇政殿設書)등을 지냈고, 철종(哲宗) 때 간당(姦黨)으로 몰려 삭적(削籍)되고 부주(州)로 유배되기도 하였다. "송사(宋史)" [도학열전(道學列傳)]에 의하면 그는 읽지 않은 책이 없었으며 그의 학문은 성(誠)을 근본으로 하였고, "대학", "맹자", "논어", "중용"을 표지로 삼았으면 육경에 통달하였고 행동거지가 과묵하였으며, 일단 성인(聖人)을 스승으로 삼으면 성인의 경지에 이르지 않고서는 그 학(學)을 그만두지 않았다고 한다.
4). 신안백 소옹(新安伯 邵雍)
▣생몰연도: 1011 - 1077
▣배향위치: 서배향(西配享) 제7위(第七位)
▣인물개요:
북송 때의 저명한 철학가로 송나라 명리학(命理學) 창시자 중 한 사람이다. 자는 요부(堯夫)이고, 자호(自號)는 안락(安樂)이며, 시호(諡號)는 강절(康節)이다. 공성인(共城人)으로 송나라 진종 대중상부 4년(1011)에 출생하여 송나라 신종 희녕 10년(1077)에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일생동안 벼슬하지 않고 부필(富弼), 사마광(司馬光) 여공저(呂公著), 장재(張載), 정호(程顥), 정이(程)와 교유를 맺고 친하게 지냈다. 이지재(李之才)로부터 [하도], [낙서(洛書)] 복희(伏羲)씨의 [팔괘 육십사괘도상]을 전해 받고 이를 깊이 연구하고 통달하여 광대한 경지에 이르렀는데 대부분 스스로 터득한 것이라고 한다.
5). 미백 장재(伯 張載)
▣생몰연도: 1020 - 1077
▣배향위치: 동배향(東配享) 제8위(第八位)
▣인물개요:
북송 때의 저명한 철학가로 '북송오자' 중 한 사람이며 송 명리학 창시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자는 자후(子厚)이고 시호는 명공이다. 봉상미현(鳳翔縣) 횡거진(橫渠鎭)사람이기 때문에 '횡거선생'으로 일컬어졌으며, 송나라 진종 천희 l4년(1020)에 출생하여 송나라 신종 희령10년(1077)에 졸하였다.
관중(關中)에서 강학(講學)하였으므로 그의 학을 관학(關學)이라고 한다. 어려서는 병법 논하기를 좋아하였으나 후에 범중엄(范仲淹)의 가르침을 받아 "중용"에 치력하였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불(佛), 노(老)에 눈을 돌려 여러 해 그 설을 궁구하였지만 얻은 것이 없자 다시 전향하여 육경을 탐구하였다고 한다. 진사에 합격하여 기주사법참군과 운암령이 되었고, 숭문원교서와 감찰어사이행을 지냈다.
6). 휘국공 주희(徽國公 朱熹)
▣생몰연도: 1130 - 1200
▣배향위치: 서배향(西配享) 제8위(第八位)
▣인물개요:
남송의 유학자로 복건성의 우계(尤溪) 출생이다. 자는 원회(元晦), 중회(仲晦)이고 호는 회암(晦庵), 회옹(晦翁), 운곡산인(雲谷山人) 창주병수(滄洲病), 둔옹(遯翁) 등이며, 이름은 희(熹)다.
선조는 대대로 휘주무원(徽州原: 안휘성)의 호족으로 아버지 위재(韋齋)는 관직에 있다가 당시의 재상 진회(秦檜)와의 의견 충돌로 사직하고 우계에 우거하였다. 주자는 이곳에서 14세때 아버지가 죽자 그 유명에 따라 호적계, 유백수, 유병산 에게 사사하면서 불교와 노자의 학문에도 흥미를 가졌으나, 24세 때 이연평(李延平)을 만나 공부하면서 유학에 복귀하여 그의 정통성을 계승하게 되었다.
5. 동국 십팔현 (東國十八賢)
1). 薛聰<弘儒侯>先生
▣생몰연도: 655∼?
▣배향위치: 동배향(東配享) 제1위(第一位)
▣인물개요:
신라(新羅)때의 거유 석학(巨儒 碩學). 자는 총지(聰智), 작호(爵號)는 홍유후(弘儒侯), 하상주인(下湘州人)이다. 원효대사(元曉大師)의 아들로, 어머니는 요석고주(瑤石公主)이다. 신라 삼문장(新羅 三文章: 强首. 薛聰. 崔致遠)중 한 사람이며 벼슬은 한림(翰林)에 이르렀다. 어려서부터 유달리 총명(聰明)하여 경사(經史)에 통달(通達)했으며 이두(吏讀)를 집대성(集大成)하였고 경덕왕 5년에는 박사(博士)로서 강수(强首)와 함께 구경(九經)을 처음으로 구결(口訣)로서 강론(講論)하여 후학(後學)을 훈도(訓導)하여 국학(國學)을 흥기(興起)하였다. 고려 현종(高麗顯宗) 임술(壬戌)에 홍유후(弘儒侯)를 봉(封)하고 성묘(聖廟)에 종사(從祀)하였다. 화왕계(花王戒.誡)를 저술(著述)하여 전하고 있다.
2). 崔致遠<文昌候>先生
▣생몰연도: 857∼?
▣배향위치: 서배향(西配享) 제1위(第一位)
▣인물개요:
신라 말기(新羅末期)의 거유(巨儒), 자는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 작호(爵號)는 문창후(文昌候), 경주 사량부인(慶州 沙梁部人)으로 사실 선계(史失先系)되었다. 12세에 당(唐)에 유학(留學)하여 심사역학(尋師力學)하고, 17세 때 재당 등과(在唐 登科)하여 선주표수현위(宣州漂水縣尉)를 거쳐 승무랑시어사내공봉(承務郞侍御史內供奉)이 되어 자금어대(紫金魚袋)의 하사(下賜)를 받았다.
당(唐) 나라 고변(高변=馬+弁)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있을 때 황소(黃巢)의 난(亂)에 격문(檄文)을 시작(詩作)하여 명진천하(名振天下)하였으며 28세에 환국(還國)하여 한림학사 겸 병부시랑(翰林學士 兼 兵部侍郞)과 지서서감사(知瑞書監事)등 많은 벼슬을 역임(歷任)하였다.
재직시(在職時)에는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를 내어서 아찬(阿찬)이 되었으며 고려현종(高麗 顯宗)때 묘(聖廟)에 종사(從祀)하고 문창후(文昌候)로 봉작(封爵)하였다. 소저(所著)에는 사륙집(四六集)과 계원필경(桂苑筆耕)이 있으며 선생(先生)이 찬(撰)한 봉암사시문(鳳巖寺碑文)과 숭복사시문(崇福寺碑文) 또 석순응전(釋順應傳)이 유명하다.
3). 安裕<晦軒>先生
▣생몰연도: 1243∼1306
▣배향위치: 동배향(東配享) 제2위(第二位)
▣인물개요:
고려(高麗)때의 명신 거유(名臣 巨儒). 초휘(初諱)는 향(珦). 자는 사온(士온). 호는 회헌(晦軒). 시호(諡號)는 문성(文成). 순흥인(順興人)이다. 초휘(初諱)가 향(珦)이었으나 조선조(朝鮮朝) 문종(文宗)의 어휘(御諱)가 향(珦)이라서 유(裕)로 개칭(改稱)했다. 밀직부사(密直副使) 부(孚)의 아들로 태어나 학문(學問)을 밝히고 유풍(儒風)을 떨쳐 동방 도학지조(東方 道學之祖)라 했다.
좌승지(左承旨) 밀직사사(密直司使) 집현전태학사(集賢殿太學士) 등을 역임(歷任)하였고, 왕을 따라 연경(燕京)에 갔을 때 처음으로 주자전서(朱子全書)를 보고 기뻐하여 유학(儒學)의 정통(正統)이라 하여 손수 필사(筆寫)하고 공맹(孔孟)의 초상(肖像)과 함께 주자학(朱子學)을 수입하여 공부하고 연구하면서 회암(晦庵)의 호(號)를 따라 회헌(晦軒)이라 자호(自號)하였다.
4). 鄭夢周<圃隱>先生
▣생몰연도: 1337∼1392
▣배향위치: 서배향(西配享) 제2위(第二位)
▣인물개요:
고려 말기(高麗末期)의 충신 학자(忠臣 學者), 초휘(初諱)은 몽난.몽룡(夢蘭·夢龍), 자는 달가(達可), 호(號)는 포은(圃隱), 시호(諡號)는 문충(文忠), 영일인(迎日人)이다. 영천군(永川郡) 동우항리(東愚巷里)에서 명유(名儒)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使) 습명(襲明)의 후손 성균관학생(成均館學生) 관(瓘)의 아들로 태어나 삼장(三場)에 연달아 장원급제(壯元及第)하고 벼슬이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거쳐 밀직제학(密直提學)과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으며 삼사좌사(三司左使)를 지나 대제학(大提學)이 되었다.
성절사(聖節使)로 명(明)과의 국교회복(國交回復)에 공헌(貢獻)하였고 유학(儒學)을 진흥(振興)하며 성리학(性理學)에 뛰어나 동방 이학지조(東方 理學之祖)로 추앙(推仰)되었다.
이성계(李成桂)의 조선조 창업(朝鮮朝 創業)에 불사이군(不事二君)으로 반대하다가 선죽교(善竹橋)에서 피살(被殺)되었다.
5). 金宏弼<寒暄堂>先生
▣생몰연도: 1454∼1504
▣배향위치: 동배향(東配享) 제3위(第三位)
▣인물개요:
조선 전기(朝鮮前期)의 문신.성리학자(文臣. 性理學者)로서 자는 대유(大猶), 호는 한훤당(寒暄堂), 사옹(蓑翁). 관향은 서흥(瑞興). 단종(端宗)2년 한경 정릉 사제(漢京 貞陵洞 私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충좌위사용(忠佐衛司勇) 유(紐)이며 어머니는 중추부사(中樞副使) 승순(承舜)의 딸로서 청주한씨(淸州韓氏)이다.
소시에는 호방(豪放) 불기(不羈)하였으나 성장하면서 발분(發奮) 역학(力學)하였다. 점필재(점畢齋) 김종직문(金宗直門)에서 수업(受業)하면서 소학(小學)에 심취하여 자칭 소학동자(小學童子)라 하고 지난날의 허물을 깨달았다고 한다. 평생토록 소학(小學)을 독신(篤信)하여 삼십을 넘어서 경학(經學)을 섭렵(涉獵)하고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성종 25년에 행의(行義)로써 천거(薦擧)되어 남부참봉(南部參奉)에 임명되었고, 연산군(燕山君) 2년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다음해 형조좌랑(刑曺佐郞), 동 4년(1498)에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남에 전사관(前史官) 탁영(濯瓔) 김일손(金馹孫), 소유(小游) 권오복(權五福) 등은 사사(賜死)되고 이미 파계(他界)한 점필재는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다.
6). 鄭汝昌<一두>先生
▣생몰연도: 1450∼1504
▣배향위치: 서배향(西配享) 제3위(第三位)
▣인물개요:
조선(朝鮮) 중기(中期)의 문신(文臣). 성리학자(性理學者)로서 자는 백욱(伯욱), 호는 일두(一두). 관향은 하동(河東). 세종32년 함양 덕곡리 개평(咸陽 德谷里 介坪)에서 태어났다. 함길도(咸吉道) 병마우후(兵馬虞候) 증 한성 좌부윤(贈漢城左府尹) 육을( 六乙)의 아들이다.
일찍이 부친을 여이고 학업에 전념하여 한훤당(寒暄堂)과 함께 점필재(점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사사(師事)했으며, 경전(經典)을 공부하여 성리학(性理學)의 깊은 이치(理致)를 깨우쳐 역행천이(力行踐履)하여 명경독행(明經篤行)으로 세상에 알려졌으며 모친에 대한 효성도 지극하였다.
성종 21년(1490)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에 등용되고, 뒤에 시강원(侍講院) 설서(說書)로 옮겨져서 동궁(東宮)을 보도하였으나 질시(嫉視)를 받아 안음(安陰)현감으로 외임(外任)되자 향리(鄕里)의 자제(子弟)들을 훈도하여 많은 제자를 키웠다.
7). 趙光祖<靜庵>先生
▣생몰연도: 1482∼1519
▣배향위치: 동배향(東配享) 제4위(第四位)
▣인물개요:
조선(朝鮮) 중기의 문신 거유(文臣 巨儒)로서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 관향은 한양(漢陽). 개국공신(開國功臣) 온(溫)의 5세손으로 성종13년 한성부(漢成府)에서 태어났다. 일직부터 학문에 뜻이 커서 과거(科擧)는 달갑지 않게 여겼다.
18세때 부친 원강(元綱)이 어천(魚川)찰방(察訪)으로 부임되었을 때 마침 한훤당 (寒暄堂 )이 희천(熙川)에 유찬(流竄)되어 있었기에 정암(靜庵)은 한훤당(寒暄堂)에게 종학(從學)하여 위학(爲學)의대방(大方)을 들었다.
그의 학문(學問)은 소학(小學)과 근사록(近思錄)을 탐독(探讀)하고 경전(經典)을 연구하여 평거(平居)에도 관복(冠服)을 렴식(렴飾)하여 위의(威儀)가 정연(整然)하였으며, 출처(出處)와 제행(霽行)을 고훈(古訓)에 상고(詳考)하였다. 중종(中宗) 5년 진사과(進士科) 장원(壯元)에 들고 동 10년에 알성과(謁聖科)에 올라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에 제수(除授)되였다. 얼마 후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이 되고 다시 홍문관(弘文館) 부제학(副提學)으로 승차( 陞差)되었다.
8). 李彦迪<晦齋>先生
▣생몰연도: 1491∼1553
▣배향위치: 서배향(西配享) 제4위(第四位)
▣인물개요: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性理學者)로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 자계옹(紫溪翁). 관향은 여강(驪江). 성종 22년 경주 양좌촌(慶州 良佐村)에서 태어났다. 생원(生員) 번(蕃)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경주손씨(慶州孫氏)로 계천군(鷄川君) 소(昭)의 딸이다.
연산(燕山) 8년에 구사재(舅四宰) 손중돈(孫仲暾)에게 취학(就學)하여 성리학을 익히고 늘 산사( 山寺)에 거처하면서 독서(讀書)에 열중(熱中)하였다.
중종(中宗) 9년(1514) 문과에 급제, 천관랑(天官郞)을 비롯한 인동현감(仁同 縣監)·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밀양부사( 密陽府使) 등을 거쳐 동 25년(1530) 사간(司諫)에 이르렀다.
9). 李滉<退溪>先生
▣생몰연도: 1501∼1571
▣배향위치: 동배향(東配享) 제5위(第五位)
▣인물개요:
조선(朝鮮)의 대유학자(大儒學者)로서 자(字)는 경호(景浩). 호(號)는 퇴계(退溪) 또는 퇴도만은(退陶晩隱). 시호(諡號)는문순공(文純公)이다. 본관은 진보(眞寶)이며 연산 7년 진사(進士) 식(埴)의 7자 1녀 중 끝으로 경상도 안동예안(安東 禮安) 온혜(溫惠)에서 출생하였다.
선생은 생후 7월에 부친을 여이고 숙부 우(호 松齋 ;生員·文科·戶曹參判; 靑海君)에게 수학(修學)하였으며 중종(中宗) 29년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典籍), 호조좌랑(戶曹佐郞) 교리(校理) 전한(典翰) 등을 역임하였다.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자 선생도 파직(罷職) 되었다가 다시 복직(復職)되었다. 그 뒤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곧 고향에 돌아가 학문에 몰두(沒頭)하였다. 학문(學問)의 명성(名聲)이 높아지자 사방에서 학자(學者)들이 찾아와서 그의 학문을 배워 많은 석학(碩學)이 배출(輩出)되였다.
10). 金麟厚<河西>先生
▣생몰연도: 1510∼1560
▣배향위치: 서배향(西配享) 제5위(第五位)
▣인물개요:
조선(朝鮮) 인종(仁宗)때의 명신 거유(名臣 巨儒),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河西) 또는 담재(湛齋), 시호는 문정(文正), 울산인(蔚山人)이다. 중종(中宗)때 장성현 대맥동(長城縣 大麥洞)에서 참봉(參奉) 영(齡)의 아들로 태어나 모재 김안국(慕齋 金安國)에게 수학(修學)하고 문과에 급제(及第)하여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이 되었으나 을사사화(乙巳士禍)때 고향 장성(長城)으로 내려가 성리학(性理學)에 몰두(沒頭)하였다.
중종 계사(中宗 癸巳)에 종유(從遊) 반궁강학(泮宮講學)하였으며 명종조(明宗朝)에서 누증(累徵)되었으나 불취(不就)하고, 이기혼합설(理氣混合說)을 주장(主張)하여 기고봉(奇高峰)과 더불어 태극도설(太極圖說)과 사단칠정(四端七情)을 강론(講論)하였으며 천문지리(天文地理)와 의약률역(醫藥律曆) 등에도 조해(造諧)가 깊었다. 정조 병진(正祖 丙辰)에 증 영의정(贈 領議政)하고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였다. 저서(著書)로 하서집(河西集)과 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이 있다.
11). 李珥<栗谷>先生
▣생몰연도: 1536∼1584
▣배향위치: 동배향(東配享) 제6위(第六位)
▣인물개요:
조선 중기(朝鮮中期)의 학자(學者),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 시호는 문성(文成), 덕수인(德水人)이다. 강릉부 북평(江陵府北坪)에서 감찰(監察) 원수(元秀)의 이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사임당 신씨(師任堂 申氏)이다.
16세때 어머니를 잃고 세상의 허무(虛無)를 한탄(恨歎)하고 금강산(金剛山)에 들어가 불교(佛敎)에 입문(入門)하였다가 1년만에 돌아와 성리학연구(性理學硏究)에 열중(熱中)하고 명종(明宗) 13년 당시 명성(名聲)이 높은 퇴계(退溪)를 찾아가 학문(學問)을 논의(論議)하니 퇴계(退溪)는 그의 재능(才能)에 크게 감탄(感歎)하였다.
그해 별시(別試)에 장원(壯元)하고 전후 과거(前後 科擧)때 마다 장원(壯元)하여 구도장원(九度壯元)이라는 칭송(稱頌)을 받았다. 호조좌랑(戶曹佐郞)을 시작으로 청주목사(淸州牧使), 황해감사(黃海監使), 대사헌(大司憲). 대사간(大司諫), 호조판서(戶曺判書), 이조판서(吏曺判書), 대제학(大提學)과 우찬성(右贊成)을 역임(歷任)하였다.
12). 成渾<牛溪>先生
▣생몰연도: 1535∼1598
▣배향위치: 서배향(西配享) 제6위(第六位)
▣인물개요:
조선 선조(朝鮮 宣祖)때의 문신 유학자(文臣 儒學者), 자는 호원(浩原), 호는 우계(牛溪), 시호는 문간(文簡), 창녕인(昌寧人)이다.
중종(中宗)때 한양 순화방제(漢陽 順化坊第)에서 현감(縣監) 수침(守琛 號 聽松)의 아들로 태어나서 청송(聽松)이 파평 우계(坡坪 牛溪)에 복거(卜居)함에 가정에서 시학(侍學)하고 휴암 백인걸문(休庵 白仁傑門)에서 경학(經學)을 연구하여 학문(學問)과 덕망(德望)이 뛰어났다. 일직부터 과거(科擧)를 포기(抛棄)하고 누증 천제(累徵 薦除)된 벼슬을 사양 불취(辭讓 不就)하고 임난(壬亂)때는 광해세자(光海世子)를 도와 임금의 몽진(蒙塵)에 동참(同參)하여 상소(上疏)로서 용병 군량(傭兵 軍糧)등의 삼책(三策)을 논(論)하였다. 그후 특배 자헌대부 의정부 우참찬(特拜 資憲大夫 議政府右參贊)하고 이듬해 대사헌(大司憲)에 제수(除授)되었으나 예궐 사양(詣闕 辭讓)하고 우계(牛溪)로 내려와서 많은 제자(弟子)를 길렀다.
13). 金長生<沙溪>先生
▣생몰연도: 1548∼1631
▣배향위치: 동배향(東配享) 제7위(第七位)
▣인물개요:
조선 중기(朝鮮 中期)의 학자(學者). 자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 시호는 문헌(文憲), 광산인(光山人)이다. 명종(明宗) 3년 한경 황화방 정동제(漢京皇華坊 貞洞第)에서 대사헌(大司憲) 계휘(繼輝)의 아들로 태어났다.
귀봉 송익필문(龜峰 宋翼弼門)에서 예학(禮學)을 수학(修學)하고 율곡문(栗谷門)에서 성리학(性理學)을 전수(專修)하여 성학지오(聖學之奧)를 비문(備聞)하여 당대 예학(當代 禮學)과 유학(儒學)의 거두(巨頭)가 되었다.
창릉참봉(昌陵參奉)을 천제(薦除)하고 정산현감(定山縣監), 군자감첨정(軍資監僉正), 안성(安城) 및 익산군수(益山郡守)를 제수(除授)하였으나 불취(不就)하였다. 율곡(栗谷)의 학통(學統)을 이어 문인(門人)과 더불어 강론(講論)하여 많은 석학(碩學)을 배출(輩出)하였으며 그 학통(學統)이 다시 신독재(愼獨齋). 우암(尤庵). 동춘(同春)으로 전수(傳授)되었다.
14). 趙憲<重峰>先生
▣생몰연도: 1544∼1592
▣배향위치: 서배향(西配享) 제7위(第七位)
▣인물개요:
조선 선조(朝鮮 宣祖)때의 학자(學者), 충신의병장(忠臣義兵將).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峰), 시호는 문열(文烈), 백천인(白川人)이다. 중종(中宗) 39년 김포현 서감정리제(金浦縣 西坎井里第)에서 응지(應祉)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직 우계문(牛溪門)에서 사사(師事)하고 성학(聖學)을 배웠는데 특출하여 우계(牛溪)도 사제간(師弟間)의 예(禮) 이상으로 대(對)했다고 한다.
명종(明宗) 22년에 문과 급제(文科 及第)하여 정주교수(定州敎授)를 거쳐 호(戶).예(禮).이조좌랑(吏曹佐郞)과 시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歷任)하다가 난리(亂離)의 조짐이 보이자 모부인(母夫人)을 모시고 피우청주(避于淸州)하였다. 임난(壬亂)이 일어남에 의병(義兵)을 소모(召募)하여 보은차령(報恩車嶺)에서 적(敵)을 격퇴(擊退)하여 청주성(淸州城)을 탈환(奪還)하고 금산전투(錦山戰鬪)에서 호남의병장(湖南義兵將) 고경명(高敬命)과 더불어 독전(督戰)하여 적(敵)에게 많은 피해(被害)를 주었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7백명 의병(義兵)이 모두 전사(戰死)하였다.
15). 金集<愼獨齋>先生
▣생몰연도: 1574∼1656
▣배향위치: 동배향(東配享) 제8위(第八位)
▣인물개요:
조선 효종(朝鮮 孝宗) 때의 학자(學者). 자는 사강(士剛). 호는 신독재(愼獨齋). 시호는 문경(文敬). 광산인(光山人) 사계(沙溪)의 아들로 한성 황화방 정동제(漢城 皇華坊 貞洞第)에서 태어났다. 선조(宣祖) 14년에 천곡 송상현문(泉谷 宋象賢門)에 취학(就學)타가 다시 귀봉 송익필문(龜峰 宋翼弼門)과 율곡 이이문(栗谷 李珥門)에 수학(修學)하여 학행(學行)이 뛰어났다.
18세 때 진사시(進士試)에 합격(合格)하여 재랑(齋郞)에 이르렀으나 광해조(光海朝)에 부 사계(父 沙溪)를 모시고 연산 향리(連山 鄕里)로 돌아가 은거(隱居)하였다.
인조 반정후(仁祖 反正後)에 출사(出仕) 부여현감(扶餘縣監)과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거쳐 부승지 대사헌(副承旨 大司憲) 그리고 이조판서(吏曺判書)를 역임(歷任)하였다. 사계(沙溪)의 학문(學問)을 이어 예학(禮學)의 체계(體系)를 세우고 현종(顯宗) 때 숙종묘(孝宗廟)에 종향(從享)하였으며 고종(高宗) 때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追贈)하고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였다.
16). 宋時烈<尤庵>先生
▣생몰연도: 1607∼1689
▣배향위치: 서배향(西配享) 제8위(第八位)
▣인물개요:
조선 중기(朝鮮 中期)의 명신 학자(名臣 學者).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 시호는 문정(文正). 경헌공(景獻公) 은진인(恩津人)이다. 수옹 갑조(睡翁 甲祚)의 셋째 아들로 옥천군 구룡촌(沃川郡 九龍村)에서 태어났다.
광해(光海) 6년 송동춘(宋同春)과 함께 동춘선생(同春先生)의 부 청좌공(父 淸坐公)에게 취학(就學)하고 그후 사계문(沙溪門)에 수학(修學)하였다. 인조(仁祖) 11년 사마시(司馬試)에 장원(壯元)하여 봉림대군(鳳林大君.孝宗)의 사부(師傅)가 되어 축일 강마(逐日 講磨)하였으며 병자호란(丙子胡亂)후에는 회덕 송촌(懷德 宋村)으로 이거(移居)하여 동춘(同春)과 더불어 학문(學問)에 열중(熱中)하여 사계(沙溪)의 학통(學統)을 계승(繼承)하여 후배양성(後輩養成)에 전력(專力)하고 많은 석학(碩學)을 배출(輩出)하였다.
17). 宋浚吉<同春>先生
▣생몰연도: 1606∼1672
▣배향위치: 동배향(東配享) 제9위(第九位)
▣인물개요:
조선 중기(朝鮮中期)의 명신(名臣). 자는 명보(明甫). 호는 동춘(同春). 시호는 문정(文正). 은진인(恩津人)이다. 선조(宣祖) 39년 한성 정릉동 우사(漢城 貞陵洞寓舍)에서 군수(郡守) 청좌 이창(淸坐 爾昌)의 아들로 태어났다. 우암(尤庵)과 더불어 청좌공(淸坐公)에게 취학(就學)하여 후에 사계문(沙溪門)에서 수학(修學)하였다.
인조(仁祖) 14년 우암(尤庵)의 뒤를 이어 대군 사부(大君師傅)를 제수(除授)받고 또 세자 찬선(世子 贊善)으로 수시(隨時)로 입시주강(入侍晝講)하였다. 효종(孝宗)이 즉위(卽位)하자 사헌부 집의(司憲府 執義)로 기용(起用)되어 우암(尤庵)과 함께 김자점(金自點)을 규탄(糾彈)하여 물리쳤다. 성균관좨주( 成均館祭酒)를 거쳐 대사헌 이조판서(大司憲. 吏曺判書)를 지나 현종(顯宗)때 우.좌참찬(右.左參贊)을 역임(歷任)했다.
18). 朴世采<玄石>先生
▣생몰연도: 1631∼1695
▣배향위치: 서배향(西配享) 제9위(第九位)
▣인물개요:
조선 숙종(朝鮮 肅宗) 때의 문신(文臣). 자는 화숙(和叔). 호는 현석(玄石) 또는 남계(南溪). 시호는 문순(文純). 반남인(潘南人)이다. 인조(仁祖) 9년 한성 창동 우제(漢城 倉洞 寓第)에서 고려의 직제학 상충(尙衷)의 후손,교리(校理) 중봉(中峰) 의 (의=水+倚)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 중봉공(父 中峰公)에게 수학(受學)하여 격몽요결(擊蒙要訣)을 배울 때 이미 위학하는 방향(爲學之方)을 알았고 시사전기(詩史傳記)를 무불통람(無不通覽)하였다. 효종(孝宗) 10년에 익위사 세마(翊衛司洗馬)하고 숙종(肅宗) 때는 수시(隨時)로 입대시강(入對侍講)하여 강 심경(講 心經)하였다. 공조참판겸성균관좨주(工曹參判兼成均館祭酒)와 대사헌 이조판서(大司憲. 吏曺判書)를 거쳐 좌의정(左議政)을 역임(歷任)하고 당쟁(黨爭)의 중재에 힘썼으며 많은 상소(上疏)로서 수제치평(修齊治平)의길을 건의하였다 몰후(歿後) 숙종이 진도(震悼)하여 도승지(都承旨)를 보내 조상하였으며, 문인 시복( 門人 持服)이 2백이 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