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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代音樂 고대음악에 관한 문헌이나 악보는 거의 남아 있지 않으므로 발굴된 악기 또는 회화, 조각 등에서 그 양상을 추정할 수밖에 없다. 기원전 3000-4000년경 세계 4대 문명 발상지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우선 고대음악의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이 티그리스, 유프라테스강과 나일강 유역의 고대 오리엔트 여러 나라로부터 그리스로 전해져 음악은 고도로 예술화되고 체계화된 이론마저 남기게 되었다. 악기로는 하프, 리라, 쌍관(雙管) 오보에, 북 등이 각 지역에서 사용되었으며, 음악은 축제제례(祝祭祭禮)나 종교 등 국가행사와 결부되어 발전함에 따라 직업적 음악가가 나타나고, 윤리적 목적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단순한 오락으로서도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메소포타미아는 기원전 3500년경 수메르 사람의 우르 제1왕조시대에 음악이 제례(祭禮)에 쓰여져, 이미 하프나 리라, 류트(현악기) 등 많은 악기가 있었다. 그후 고대 바빌로니아, 카시트조(朝), 아시리아, 신(新)바빌로니아에 계승되어 더욱더 발전하였다. 그리고 호른, 트럼펫, 딱다기 외에도 대표적인 현악기로는 하프가 나타나, 그것이 특히 아시리아에서 쓰였음은 조각으로도 추정할 수 있다. 이스라엘은 기원전 1050년경을 경계로 하여 유목시대와 왕정시대로 나뉘는데, 유목시대에는 킹노르(현악기), 토프(큰북의 일종), 쇼파(양의 뿔로 만든 피리) 등의 악기가 있었다. 그리고 다윗이나 솔로몬의 왕정시대에는 직업적인 음악가가 나타나 유대교의 회당을 중심으로 교회음악이 성행하였고, 네베르(현악기), 아소르(관악기), 하리드(관악기) 등의 악기가 노래의 반주에 쓰였다. 이집트음악은 고왕조, 중왕조의 전반기에는 힉소스 사람의 침입 등에 의한 근동(近東), 아시아의 영향을 받아 피리, 하프, 복관 클라리넷과 궁형 하프로 이루어지는 기악합주나 성악이 성행하고 있었다. 신왕조로부터 누비아, 사이트 시대까지에는 북, 오보에, 트럼펫, 퓨트 등의 악기가 추가디어져 이집트의 독특한 색채를 지닌 음악으로 변하여 갔다. 그리스음악의 특징으로는 음악이 시나 무용, 연기 등과 깊은 유대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 음악이 예배나 제전 등을 통하여 국가적 행사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음악에 관한 학문적 연구가 비로소 체계적으로 거론되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겠다. 그리스음악의 역사는 스파르타에서 기원전 7세기 이후에 시작되는데, 이 시대는 이집트, 크레타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키타라(cithara)를 연주하는 테르판드로스나 아울로스(aulos)를 취주하는 사카다스, 그 밖에 탈레다스 등의 이름이 남아 있다. 그후 아티카의 아테네로 문화의 중심이 옮겨져 거기서 극음악이 발생하였다. 디오니소스의 봄의 제전(祭典)인 디튜란보스에서 비극이 발생하였으며, 기원전 5세기에는 그리스 비극의 3대 시인이라고 하는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가 나왔다. 또한 희극의 대표적 작가로는 아리스토파네스를 들 수 있으며, 사포, 아나클레온, 핀다로스의 서정시도 음악적으로 낭창(郎唱)되었다.
音樂-起源 음악이 역사상 언제쯤부터 어떻게 하여 발생하였는가에 대해서는 뚜렷하게 밝힐 수 없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대략 5만년으로부터 1만년쯤 전의 제4빙하시대(또는 후기구석기시대)경에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음악은 주술(呪術)이나 마술 등의 행위와 결부되어 발달하였고, 본래 마력적이며 신비적인 힘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어 왔었다. 악기로는 뼈로 만든 피리나 딱다기 등이 있었다. 음악의 기원으로는 "동물의 울음소리를 흉내내려는 시도에서", "언어의 억양에 점차 고저가 뚜렷해짐으로써", "자기의 감정을 음으로 표현하려는 의도에서", "노동작업을 할 때 장단을 맞추기 위해서", "춤 동작에 맞춰서" 생겼다는 등의 여러 설이 있다.
Mesopotamia 音樂 기원전 4000년경에 동기시대(銅器時代)가 시작되고, 기원전 3500년경 수메르 사람의 국가가 형성되어 우르 제1왕조를 세웠다. 이 무렵에는 제례를 중심으로 음악이 성행하였으며, 리라, 하프, 류트, 그 외 복관의 리드 악기, 시스토름 등이 있었으나, 이윽고 셈족의 고대 바빌로니아로부터 다음의 카시트조나 앗시리아, 그리고 신바빌로니아에 이르기까지 메소포타미아의 음악은 독자적인 발전을 이룩하여 왔다. 새로운 악기로는 호른, 트럼펫, 딱다기, 시스토름 외에 하프가 현악기 가운데에서 매우 발달하였음을 볼 수 있다.
Israel 音樂 기원전 1000년 이전의 유목시대의 악기로서는 킹노르(현악기), 토프(큰북의 일종), 쇼파(양의 뿔로 만든 피리) 등이 있었고, 농경작업과 관련하여 상호창(相互唱)의 형식이 왕궁에서 연주되었으며, 한편으로는 유태교의 교회 안에서 종교음악이 성행하여 많은 종교음악가가 특별히 양성되었다. 새로운 악기로는 네베르(현악기), 아소르(관악기), 하리르(관악기) 등이 민요의 반주에도 사용되었다.
交唱·應唱 초기 크리스트교의 예배에서는 시편 또는 성서에 바탕을 둔 노래(칸티쿰)의 전후를 2개의 합창으로 노래하는 경우 이것을 교창이라 하였다. 또 응창은 독창으로 부르는 시편의 구(句)에 대하여 합창으로 답하는 리플레인을 말한다. 이러한 뜻에서의 교창이나 응창은 원래 유대의 성악형식이었으나, 후에 초기 크리스트 교회에 이입(移入)되어 발전하였다.
古代 Egypt 音樂 고대 이집트 문명은 고왕조, 중왕조(中王朝), 신왕조(新王朝), 누비아 및 사이트 왕조시대로 나뉜다. 고왕조와 중왕조를 포함한 전반기(기원전 33-16세기)에는 딱다기, 갈대의 피리, 복관 클라리넷, 하프 등의 악기가 있었으며, 성악과 무용도 있었다. 합창할 때에는 멜로디의 움직임을 손으로 표현하는 카이로노미라고 하는 지휘법이 쓰였다. 신왕조에서 사이트 시대까지의 후반기(기원전 16-6세기)에는 신왕조시대에 메소포타미아를 정복하고 거기에서 궁형(弓型) 하프와 리라, 류트, 오보에, 북, 트럼펫 등 새로운 악기를 가져왔다. 그 뒤 이집트의 독자적인 색채가 명확해졌고, 대형 하프나 리라가 많이 쓰였으며, 음계는 7음 음계였다고 한다.
Greece 音樂 고대 그리스에서 '무지케'란 말은 음악을 중심으로 시, 무용, 연기 등을 포함한 종합적인 예술을 뜻하였다. 음악은 예배나 제례 등의 경우를 통하여 생활과 밀접하게 결부되었으며, 국가의 청년층을 도덕적으로 육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어 왔다. 또한 피타고라스나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등에 의해서 음악의 학문적 연구가 처음으로 시도되었다는 점 등에 특색이 있다.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384-322)는 플라톤처럼 음악의 윤리적 효과까지 논하고 있으나 동시에 음악을 오락의 대상으로서도 인정하고 있었다. 그리스 음악의 전설 가운데에서 오르페우스나 아폴론 등의 전설은 유명하지만, 도시국가에서 국가의 보호를 받아 음악이 생활 속에 들어온 것은 기원전 7세기 초의 스파르타에서였다. 이 시기의 음악가로서 이름이 남아 있는 사람은 키타라라고 하는 현악기의 반주가 따르는 노래를 불러 제전(祭典)에서 상을 받았다고 하는 텔판드로스(BC 675년경)나, 관악기 아울로스로 반주를 하는 노래와 연주에 뛰어났다는 사카다스(기원전 586년경), 아폴론에 대한 송가(頌歌) <파이안>의 작자로 유명한 탈레타스, 크세노다모스 등을 들 수 있다. 그 뒤 아테네로 문화의 중심이 옮겨져(기원전 6-4세기) 극음악이 발달하였다. 이 시대의 극음악은 종합예술로서 12, 3명으로 구성된 코러스가 노래와 춤을 담당하여 개막(프롤로고스), 입장의 노래(파라도스)로 시작하여 퇴장의 노래(엑소도스)로 끝났다고 한다. 또한 극음악 외에는 사포, 아나클레온 등의 서정시가 음악적으로 낭창되었다. 이윽고 이와 같은 그리스 음악의 융성은 차차로 쇠퇴하여 기원전 2세기경에는 소멸하고 말았다. 그리스 음악에 대하여 현존하는 자료는 극히 적으나, 델포이에서 발견된 2개의 아폴로의 찬가(기원전 2세기 후반경), 세이길로스의 노래(기원전 2세기 또는 1세기), 크레타의 시인 메소메데스의 작품이라고 하는 뮤즈, 헬리오스, 네메시스에게 바친 찬가(2세기) 등이 있다. 한편 사용됐던 악기로는 리라, 포르밍크스, 키타라, 하프, 복관 오보에인 아울로스, 파이프를 가로로 연결한 시링크스 등이 있었다.
etose論 그리스 사람들은 음악이 각각 고유의 성격을 지니고 인간의 의지에 감화를 미치는 것이라 하여 음악을 그들 사회의 도덕상의 기초로 간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울로스의 연주를 익히고, 합창에 가담하는 것을 교육상으로 의무화하고 있었다. 플라톤의 <국가편> 제3권에는, 예컨대 도리아조(調)는 남성적이며 강한 성격을 가졌고, 프리지아조는 열정적, 리디아조는 여성적, 믹소리디아조는 비애적이라는 식으로 각 선법(旋法)에 따른 윤리적 특성을 구별하고 있었다.
choros 그리스 연극에서, 오르케스트라라고 불리는 원형극장의 중심에 위치하여 유절형식(有節形式)의 비교적 단순한 선율의 노래와 춤을 혼합시키면서 연기와 음악의 중심적 역할을 한 것이 코로스(코러스)라고 불린다.
Pythagoras(기원전 582년경-500년경)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며, 음향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영혼의 정화(카타르시스)가 음악의 목적이라는 설을 주장하고 음의 협화를 현의 길이의 비례로 설명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자기 자신은 저작을 남기지 않았으며, 이른바 피타고라스 학파의 사람들에 의해서 이러한 이론이 후세에 전해졌다. 또한 순정5도(純正五度)를 반복하여 겹친 음률을 피타고라스의 음계라고 한다
四音音階 tetrachode 그리스의 음악이론으로는 테트라코드가 음의 조직을 체계화하는 기본적인 단위로 되어 있다. 그 분할 방법에 의하여 반음과 2개의 온음으로 되는 온음계적(全音階的) 테트라코드, 2개의 연속되는 반음과 1개의 단3도 음정으로 되는 반음계적 테트라코드, 2개의 연속되는 4분음과 장3도 음정으로 되는 엔하모닉 테트라코드의 세 가지 종류가 있다. 그것을 겹치는 방법으로는 2개의 테트라코드를 1개의 공통음으로 잇는 콘정크트와 1온음의 간격을 두고 잇는 디스정크트의 두 종류가 있다.
五音音階 5음음계 가운데에서도 가장 많이 쓰이는 것은 3개의 온음정과 2개의 단3도 음정으로 이루어진 온음계적 5음음계와, 반음정을 포함하는 반음적 5음음계 및 자바의 스렌드로 음계처럼 온음정이나 반음정에 의하지 않는 것도 있다. 5음음계는 한국, 중국, 일본, 인도 등 동양에 특징적이나, 이 밖에도 아프리카, 아메리카 인디언,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등에서도 볼 수 있다.
Greece 旋法 그리스 선법은 테트라코드(4음음계)를 기본으로 하여 설명되며 노래를 부름에 따라 음계가 내려가는 점이 흥미롭다.
古代 Roma 音樂 기원전 6세기 말에 왕정(王政)을 폐지하고 공화정치(共和政治)를 수립한 로마는 서양 고대의 모든 요소를 통합하였다고 할 수 있겠으나 문화적으로는 그리스 문화를 계승하였음에 불과하며, 음악도 역시 그리스의 전통에 강하게 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당시의 음악작품이나 음악에 관한 기록도 잔존하지 않았으므로, 그 음악의 상세한 내용에 관해서는 아직도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리스의 아울로스에 해당하는 티비아라는 관악기가 독창의 반주 등에 흔히 쓰였으며, 네로 황제도 키타라의 명수였다고 한다. 또 로마에서는 고도의 기교를 지닌 명인예(名人藝)가 존중되어 극장 흥행물에도 대규모로 편성된 합창이나 관현악이 채택되어 있었던 듯하다.
Romanesque 音樂 본래 중세 유럽의 미술, 특히 건축양식에 대해 쓰이는 '로마네스크'라는 말을 음악사상(音樂史上)의 개념으로 사용하는 것은 중세 후기의 '고딕 음악'이라는 개념의 사용보다도 더 드물며, 실제로는 좀처럼 음악과 구체적으로 대응시키기 어려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네스크 정신을 가장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 즉 그리스도교적 중세를 대표하는 교회당 양식의 이미지와 그레고리오 성가나 초기 다성음악(多聲音樂), 트루베르나 미네젱거 등 통속음악과의 내적인 연결을 그대로 보아넘길 수는 없다. 로마네스크라는 용어는 영어의 '로마적'이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으며, 유럽 여러 나라에 따라서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나 약 10세기 말부터 12세기 사이에 있었던 로마 건축의 기술을 채택한 예술양식에 대하여 사용되고 있다. 이 양식과 실제의 음악을 대응시키고자 하는 시도는, 이 시기를 대표하는 그레고리오 성가나 교회 다성음악, 통속음악 등을 구체적으로 탐구한 뒤에 이루어져야 하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初期-敎會音樂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604년 사망)에 의하여 성가가 일단 통일되기 이전에 이미 교회 성가는 몇 세기에 걸친 발전이 있었다. 멀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使徒)의 시대까지 소급되나 그 여러 단계를 살펴보면 헤브라이적 기원과 그리스적 기원을 원천으로 하여, 로마의 음악과 비잔틴의 영향을 받아 발전하였으며, 그 가운데에 시리아나 이집트의 요소도 융합하고 있는 일종의 혼합문화였다. 초기 크리스트 교도들이 노래로 기원하기 시작한 것은 유태의 교회(시나고그)로부터였다. 중세 초기의 크리스트교 음악이 유대교 예배음악의 여러 형식 가운데에서 자라왔다는 사실은 구약성서에도 명백히 나타나 있다. 그 때 음악만이 다른 예술과는 달리 예배에 채택되어 불가결의 것으로 생각되었다. 초기 크리스트교도의 대부분은 유태인이었다. 그러나 헤브라이인이 예배에 사용한 음악을 오늘날 실음(實音)으로서 알 수는 없다. 여러 자료를 연구한 결과 명백해진 것은, 다윗의 시편을 노래한 것이 헤브라이 교회음악의 주요 부분이었다는 점과 초기 그리스도교가 그것을 예배 속에 채택하였다는 점, 시편의 가창형식(歌唱形式)으로서 (1) 사제에 의한 독창, (2) 회중에 의한 응창, (3) 가창자가 둘로 나뉘어서 번갈아가며 노래하는 교창(交唱)의 세 가지가 있었다는 점, 시편 이외에 (1) 복음서의 송가(頌歌), (2) 초대의 산문적 찬가, (3) 음률적인 유절(有節)의 찬가가 있었다는 점 등이다. 악기는 대개의 경우 쓰이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스음악과의 관계는 주로 그 이론면에 영향을 주고 있다. 고대 그리스의 선법(旋法)이 비록 완전히 형태를 바꾸고 있기는 하나, 이렇게 하여 교회선법으로 계승하여 간다.
Bizantium 북방 민족에 의한 크리스트교 박해가 끝나자,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이교적인 분위기의 색채가 짙은 로마를 떠나 고도(古都) 비잔티움에 도읍을 정하고(328년), 그 곳을 크리스트교화하여 콘스탄티노플이라고 개명하였다. 그런데 이 비잔틴 제국(帝國)의 음악,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성가는 오늘날까지 전해져 그리스 정교회(正敎會)의 비잔틴식 전례(典禮)에서 그리스어로 노래되어 생생하게 그 전통이 유지되고 있다.
聖 Ambrosius(339경-397) '서구 교회음악의 아버지' 등으로 불리는 밀라노의 주교 성 암브로시우스가 초기 교회음악의 발전에 이바지한 공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이미 서방(西方)에도 있었던 응창적 시편송(詩篇頌) 외에 동방의 시리아나 팔레스티나에서 시작된 교창적(交唱的)인 창법을 채택했다는 점과, 또하나는 흔히 '암브로시우스의 찬가'라 하는 찬송가를 창작하여 서방 교회음악의 기초를 굳힌 점 등이다. 시편송에서는 앞뒤에 음의 고저를 가져오지만, 중간부는 같은 음의 지속으로서 말하자면 시편을 노래한다기보다 낭창(郎唱)하는 경향이 짙었으나, 성 암브로시우스는 교인의 대중적인 노래를 적극적으로 교회에 도입시켰던 것이다. 또, 성서나 복음서의 구절에서 인용한 것이 아니라 암브로시우스 자신이 라틴어로 쓰고 작곡한 새로운 종교가를 창작했던 것이다.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이시여>, <영원히 사물(事物)을 이끄는 손길> 등이 유명하다. 이러한 노래는 오늘날까지 카톨릭 교회에서 노래되고 있으며, 그 중에서 몇 개는 루터 등의 종교개혁가에 의하여 프로테스탄트 교회에 계승되어 현재도 독일 코랄 속에 들어 있다. 암브로시우스의 찬가에서 그 특징을 살피면 악센트의 취급에 있다고 하겠다. 고대의 단순한 민요풍의 멜로디를 취함과 동시에 헤브라이, 시리아계의 악센트에 따른 새로운 운율해석을 거기에 결부시켜 새로운 종교적 태도를 확립시켰던 것이다.
Milano 聖歌 밀라노의 교회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카톨릭 교회의 공식전례(公式典禮)인 '로마 전례'와는 다른 '암브로시우스 전례'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그레고리오 성가'와는 다른 '암브로시우스 성가'가 전해지고 있다. 실질적으로 어떻게 성 암브로시우스와 관계가 있는가는 지금도 분명하지 않지만, 그레고리오 성가에 비하여 보다 오랜 로마 성가의 모습을 부분적으로 전하고 있다고 하겠다.
Gregorian 聖歌 로마 카톨릭 교회의 전통적인 단성(單聲) 전례성가로 라틴 교회의 대표적 전례양식인 로마적 미사전례의 정통(正統) 성가로서, 크리스트교적 고대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쓰이고 있다. 성 그레고리우스 1세 교황(Gregorius Ⅰ, 590-604 재위) 때에 집대성되었기 때문에 흔히 '그레고리오 성가'라고 부른다. 지금까지는 라틴어로 노래되어 왔으나, 제2바티칸 공회의(1965)에서 각국의 모국어로 노래해도 좋다고 결정되었다. 이 성가는 미사전례와 일신동체를 이루고 있으므로 전례와 분리시켜서 음악만을 생각할 수는 없다. 그레고리오 성가는 미사 성제(聖祭)를 위한 성가를 모은 그라두알레와 성무일과(聖務日課)의 성가집인 안티포날레로 크게 나눌 수가 있다. 노래미사의 순서로는, (1) 사제의 입장시에 성가대가 부르는 입제창(入祭唱) 인트로이투스, (2) 교인이 부르는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키리에, (3) 최초의 1절을 사제가 부르고 뒤를 성가대가 계속하는 영광의 찬가 글로리아, (4) 기도와 성서의 낭독 뒤에 전창자(前唱者, centor)와 교인이 노래하는 전례성가의 승계송(昇階誦) 그라두알레와 환희에 찬 찬송의 할렐루야가 들어가며, 슬픔의 날에는 영송(詠誦)인 트락투스가 쓰인다. 이 세 가지는 유대의 교회음악에서 직접 계승된 부분으로서 전창자와 교인과의 시편응창(詩篇應唱)의 형식으로 노래된다. (5) 신앙선언(信仰宣言)의 크레도, (6) 빵과 포도주의 축원(祝願)과 함께 부르는 봉헌송(奉獻誦) 오페르토리움, (7) 사제만 부르는 서창(敍唱) 프레파치오, (8) 감사의 찬가 산크투스와 3성송(三聖誦) 베네딕투스, (9) 주님의 기도, (10) 평화의 찬가 아그누스 데이, (11) 성스러운 비적(秘蹟)에 이어지는 영성체송(領聖體誦), (12) 마지막 기도 종제송(終祭誦)이 주요한 것들이다. 이 가운데에서 2, 3, 5, 8, 10의 다섯 부분은 미사 통상문(通常文, 不變部)이라 하며, 1, 4, 6, 11은 날(日)에 따라 식전의 성격과 함께 텍스트와 미사곡이 달라지는 미사 고유문(可變部)으로서, 이 두 부분은 이상과 같이 엄격한 순서에 따라 교묘하게 배분(配分)되어 전례의식(典禮儀式)을 형성한다. 이처럼 정비된 형태는 대략 12세기에 굳어졌다고 생각된다. '미사 통상문'을 일관하여 작곡하는 것은 고딕 시대 이후 미사곡의 습관으로 되었다. 기보법(記譜法)은 네우마라고 하는 4각(四角)악보로 기록한다. 그레고리오 성가에서 리듬의 기본은 아르시스(飛躍)와 테이시스(休息)이며 박자는 2배와 3배의 자유로운 결합으로 생각된다. 세로줄(小節線)로 끊기지 않는 이 자유로운 리듬은 로마네스크 정신의 표상(表象)으로 간주되고 있다. 조성(調性)은 8개의 교회선법인 모두스가 쓰이고 있다.
聖務日課-音樂 크리스트교의 음악적 의식에서 가장 오래된 부분이며, 하루를 여러 시간으로 나누고 그 시간에 올리도록 정해진 기도로서, 오피치움이라고도 한다. 새벽의 조과(朝課), 하루의 제1시과(第1時課)인 상오 6시, 제3시과인 상오 9시, 제6시과인 정오, 제9시과인 오후 3시, 일몰의 만과(晩課), 그리고 종과(終課) 등으로 정해져 있다. 최근의 전례헌장(典禮憲章)에 따라 성무에 약간의 개정이 있으나 음악적인 내용은 시편송(詩篇誦)이 중심이며, 만과는 저녁의 기도로서 특히 중요하다. 후세에 작곡된 복음악적(複音樂的)인 교회음악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모테토는 원래 이 성무일과에 쓰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시편송은 오랜 유대의 창법(唱法)인 2개의 코러스가 대화를 나누듯이 번갈아 부르는 '교창(交唱)'과, 독창에 대하여 코러스가 응답하는 '응창(應唱)'이라는 형태에 따라 노래불리었다.
敎會旋法 그레고리오 성가에서 8가지의 선법이 인정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음은 앞서 말한 바와 같으나, 이것들은 모두 같은 온음계 계열을 바탕으로 하며, 그 각각이 옥타브에 걸친 독자적인 음넓이(안비투스)와 독자적인 마침음(피날리스)에 의해서 성격화되고 있다. 그레고리오 성가에서는 D, E, F, G의 4개 피날리스에 두 가지 선법이 마련되고, 피날리스에서 피날리스까지의 옥타브의 음넓이를 지니는 정격선법(政格旋法)과 도리아, 프리지아, 리디아, 믹솔리디아의 각 선법 및 피날리스의 아래 4도에서 위 5도까지 옥타브의 변격선법(變格旋法), 즉 히포도리아, 히포프리기아, 히폴리디아, 히포믹솔리디아의 각 선법이 있다. 명칭은 그리스 선법에서 유래되었으나 양자간에는 내적 관계가 전혀 없다. 16세기에 스위스의 음악가 그라레아누스가 그의 저서 <도네카코르돈>(1547)에서 정·변(正·變) 4개의 선법을 도입하여 12선법을 확립하였다. 이 교회선법은 17, 18세기에 이르러 근대의 장단조(長短調) 음조직으로 전환하기까지 중세 르네상스의 음계로 이어져 내려왔다.
organ-發明 오르간의 기원은 매우 오래되어 기원전 수세기에까지 거슬러올라간다고 하겠다. 기원전 265년에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살던 크테시비오스라고 하는 사람이, 물의 힘으로 공기를 보내고 손으로 밸브를 열고 닫아 파이프를 울리는 악기, 말하자면 물 오르간 같은 것을 발명하여 '휴드라울루스'라고 하였다. 이 아랍의 기술이 그리스로 전해져 개량되고 비잔틴 문화로 이어졌으며, 로마의 크리스트 교회는 비잔틴에서 오르간을 도입하였다고 한다.
sequenzia-tropus 스위스의 잔크트 가렌 수도원의 도서관에는 지금도 그레고리오 성가에 관한 귀중한 사본이 많이 보존되어 있어 방문하는 사람에게 깊은 감명을 준다. 이 수도원의 수도사 노토켈(840경-912)은 새로운 음률에 의한 제쿠엔치아의 텍스트 가운데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중요한 작자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제쿠엔치아 독송(讀誦)은 처음에는 유비루스라고 불리는 알레루야의 끝 모음(母音)인 장대(長大)한 메리마스 자체를 그렇게 불렀으나, 10세기 초엽부터 1음절에 대해 1음표적인 것을 즐겨 사용하는 경향이 생겨나서 멜로디도 새로 만들게 되었다. 트로푸스 삽입구(揷入句)도 9-13세기의 로마 교회의 전례성가(典禮聖歌)에 삽입된 멜로디로서, 모두가 음악과 서정시를 결부시켜 교회음악으로 사용하는 시도의 시초이며, 트렌토의 종교회의(1545-1563)에서 제쿠엔치아는 4개만으로 한정되고 1727년에 스타바트 마테르(슬픔의 성모)가 추가되었다.
neuma 그레고리오 성가의 음표를 네우마라 부르며, 오랜 것과 새로운 것으로 크게 나눈다. 오랜 네우마는 근대나 현대에 와서는 전혀 쓰이지 않고 있다. 새로운 네우마는 로마 4각음표를 가리킨다. 네우마는 1음 또는 2음 이상의 음의 무리(群)를 말하며, 음의 상대적인 높이나 리듬, 뉘앙스를 나타내는 기보법(記譜法)이나 그 해독법은 지금도 학자들 사이에서 많은 견해 차이를 보이고 있다.
定量音樂 13세기에 들어서면서 시가(時價)를 잘게 정한 정량악보가 나타나 17세기경까지 쓰였다. 정량악보에 의한 기보법을 정량기보법이라 하며, 정령기보법으로 쓴 음악을 정량음악이라고 한다. 13세기 중엽의 이론가로 서부 독일 쾰른의 성 요한 수도원의 수도사였던 프랑코는 중요한 논문 <정량음악론>을 1260년경에 저술하여 정량기보에 관한 이론서를 남겼다. 그보다 앞서 1035년경에는 이탈리아 아베라나의 성(聖) 크로체 수도원 원장인 구이도 다렛초(Guido d'Arezzo, 990경-1050)가 <성요한의 찬가>의 멜로디 가운데서 각 행의 개시음인 6실라블 우토, 레, 미, 파, 솔, 라를 헥사코드(6개의 음으로 된 온음계적 음계)의 각 음에 할당시켜 시창(視唱)하기 쉽도록 시도하였다. 이와 같이 해서 마련된 '계이름'은 16세기경에 와서 '우도'가 부르기 쉬운 '도'로 변하였고, 17세기경에는 제7음인 '시'가 추가되어 오늘날과 같은 도, 레, 미, 파, 솔, 라, 시, 도의 계이름이 되었다. 구이도는 또 4선보(四線譜)를 고안하여 음높이를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려고도 시도했다. 그의 주요 저작인 <미크로로고스>는 이 시대의 음악교수법을 전하는 것으로 중요하다. 음의 높이를 규정하는 음표기호도 구이도가 처음으로 고안한 것이라 한다. 음계 중의 반음이 그 선 아래에 있음을 나타내며 처음에는 E음선(빨강)이, 다음에는 C음선(노랑)이 쓰였으나, 구이도는 이 두 선에 흑백의 두 선을 더하여 4선으로 하였다. 음이름을 문자로 표시하기는 고대 그리스에서 이미 시행되고 있었으나, 중세 초기에 비잔틴 교회의 영향으로 알파벳을 온음계의 음계이름으로 쓰기 시작하였다. 보에티우스(A. M. S. Boethius, 480-524)의 기보법으로는 A부터 P까지의 15자(J를 제외)를 그 옥타브에 해당시키나, 클루니(O. D. C. Cluny, 879-942)는 오늘날과 같은 A에서 G까지의 글자를 쓰는 것으로 개정하여 B(내림 )와 H(B)의 구별도 분명히 하였다. 그것을 이어받아 구이도가 현행 음계이름의 기호를 만들었던 것이다.
Gregorian聖歌-普及 보조신부(神父司祭) 요한은 그의 저술 <성그레고리오전>에서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는 미사용 성가집 안티포나리움을 편찬하여 스콜라 칸토룸을 설립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그레고리우스 교황은 성가를 편찬함에 있어 그것을 바르게 잘 연주토록 하기 위하여 라테라노 대궁전 근방에 집을 주어 스콜라 칸토룸이라 하는 기숙제(寄宿制)의 성가 가수 양성학교를 세워 가수교육을 실시하였다. 스콜라 칸토룸은 학교인 동시에 성가대를 뜻하며, 예배 중인 신도가 해야 할 역할을 성가대가 대행하게 되었다. 당시엔 아직 기보법이 발달되지 못했으므로 그것들은 모두 암기해야만 했으며 가수들은 오랜 기간을 두고 스콜라 칸토룸에서 엄한 훈련을 받아야만 했다. 교황은, 여기서 교육시킨 성가 가수와 합창장을 각지의 교회로 파견하여 그레고리오 성가의 보급에 힘썼다.
Ars Antiqua '낡은 예술'이란 뜻을 지닌 아르스 안티쿠아라는 말은 14세기의 이론가들이 자기들의 새로운 예술 아르스 노바(Ars Nova)에 대응시켜 13세기 말의 음악을 약간 모멸적으로 부른 것이다. 오늘날에 와서는 노트르담 악파를 중심으로 하는 13세기의 음악 전체를 가리키며, 초기의 복음악(複音樂)과 정량이론(定量理論), 정량기보법(定量記譜法)의 발달이 아르스 안티쿠아의 두 가지 큰 과제가 되었다.
Goethic 音樂 그레고리오 성가로 대표되는 로마네스크 음악을 중세음악의 제1단계라 하면 복음악, 즉 폴리포니로 대표되는 고딕 음악은 중세음악의 제2단계를 가리킨다고 하겠다. 그러나 로마네스크 양식(樣式)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시대 양식을 음악에 적용시킬 경우 약간의 무리도 있어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영국, 네덜란드 등 여러 나라에 따라 그 발전은 일정하지 않으나, 대략 13세기 후반부터 15세기 전반에 이르는 시기를 일반적으로 가리키고 있다. 13세기의 아르스 안티쿠아와 14세기의 아르스 노바를 모두 지니고 있기는 하나 고딕의 정신은 노트르담 악파 및 이에 계속되는 아르스 안티쿠아로 대표된다. 고딕예술과 폴리포니는 중세후기의 신학, 철학, 시예술을 지배했던 스콜라파의 엄격한 질서를 존중하는 정신의 산물로 생각된다. 파리 노트르담, 랭스, 루앙, 쾰른의 장려한 고딕 양식의 대성당, 13세기의 레오누스와 페로티누스 등 파리 악파의 다성악(多聲樂), 네덜란드 악파의 대담하고 복잡한 복음악적 구성기법, 그리고 토마스 아퀴나스,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보나벤투라 등 스콜라파의 신학과 철학, 단테의 <신곡(神曲)> 등이 지니는 우주적인 세계, 이들에게서는 서로 상통되는 정신의 지향(志向)을 느낄 수 있다. 고딕 대성당의 위풍당당한 외관이나 스콜라 철학의 위대한 체계와 흡사한 정신력은 새로운 다성의 모테토에 단적으로 나타나 있다. 중세의 스콜라적 사고방식으로는 음악은 7학과 중에서 수학의 부류인 4과, 즉 산술, 기학, 천문, 음악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었다. 12세기 이후에는 유럽 각지에 대학이 설립되었으며, 파리, 옥스포드, 볼로냐, 파도바, 프라하 등 큰 대학에서는 철학부의 한 교과로 채택되어 학사학위를 획득하려면 반드시 음악을 이수하여야만 했다.
複音樂-起源 고딕 시대는 서양음악사상 가장 큰 사건이 일어난 시기라고 할 수 있겠다. 즉 복음악(polyphonie)의 발생이 그것이다. 초기 폴리포니의 기원에 대해서는 오늘날에도 그 정설(定說)이 일정치 않으나 (1) 악기에서 발생하는 자연배음(自然倍音)을 알아차린 것이 아닐까, (2) 노래부를 때 테너와 베이스와는 음넓이가 다르다는 점, (3) 제쿠엔치아에서 볼 수 있는 동일악구(同一樂句)의 5도상의 반복이 동시에 불림으로써 발생한 것이 아닌가 하는 등의 여러 설(說)이 주장되고 있다. 현존하는 가장 초기의 폴리포니 형태의 실례는 9세기 말의 이론서 <무지카 엔키리아디스>에서 볼 수 있는 오르가눔으로서, 그레고리오 성가를 상성 정한가락(上聲定旋律)으로 하여 5도 또는 4도의 병행진행을 곁들인 것이다. 또 데샨이라고도 하는 디스칸투스 스프라 리브룸이라는 것은, 그레고리오 성가의 성가본에 적힌 멜로디를 테너로 하여 거기에 즉흥적으로 대위성부(對位聖部)를 노래하는 중세의 가창법이다. 하나의 주된 가락에 대하여 그 3도 아래에 대한 가락을 붙여 부르는 지메르라고 하는 복음악이 10세기경부터 영국에 나타났는데, 유럽 대륙의 4도, 5도의 병행 오르가눔에 비하여 보면 흥미가 있다.
organum 9-13세기 사이에 성행하였던 초기의 다성음악으로서, 그레고리오 성가의 멜로디에 하나 또는 그 이상의 대성부(對聲部)를 곁들인 것이다.
Notre Dam 樂派 12세기 후반에서 13세기에 걸쳐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의 스콜라 칸토룸을 중심으로 번성한 폴리포니의 악파로서, 대성당의 고딕 건축양식과 호응하여 생겨난 것이다. 당시 '오르가눔의 최량의 거장(巨匠)'이라고 한 합창장 레오니누스(12세기 중엽에 활약)는 교회력(敎會曆)에 의한 1년간의 전례용곡 <마누스 리베르 오르가니>(2聲의 오르가눔 대곡집)를 편집하였다. 이어서 '콘둑투스의 최량의 거장'이라 불렸던 그의 후계자 페로티누스는 레오니누스의 곡집을 재편집하고, 또한 3성부, 4성부를 추가하여 초기 복음악의 발달에 공헌하였다. 그들의 오르가눔 기법은 길게 이어지는 테너에 대하여 상성부가 엄격한 리듬형으로 진행되고, 테너에도 이 리듬형이 쓰이기도 하였다.
rota 대략 13세기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유명한 <여름은 오도다>라는 6성의 영국 성악곡은 지금도 알려져 있는 가장 오래된 돌림노래(輪唱)의 카논(로타)으로서, 이것이 발견된 수도원의 이름에서 연유되어 <레징의 로타>라고도 한다.
conductus 그레고리오 성가를 정한가락(定旋律)으로 하지 않는 라틴어의 노래로, 단성과 다성이 있고 12, 13세기의 중요 악종(樂種)의 하나이다. 다성 콘둑투스에서는 작곡가가 자유롭게 테너를 만들며, 이를 토대로 하여 2성 또는 3성의 상성부는 테너와 같은 리듬을 갖고 1음표 대(對) 1음표로 된 리듬 정형을 가지며 가사도 전성부(全聲部)가 동일한 것을 불렀다.
mottetto 12세기의 메리스마적인 2성 오르가눔이 리듬 정형화한 것을 크라우즐라라고 하였으나, 13세기 초에 이 크라우즐라에서 정한가락의 바로 상성부의 두푸름이 원래 모음창법으로 노래되었던 것이 이 성부에 가사를 붙여 그 성부를 모테투스라고 부르게 되었고, 또한 그와 같은 성부를 포함한 악곡 전체를 모테토라고 하게 되었다. 그 전형적인 형태는 오르가눔과는 달리 엄격한 리듬정형을 지니며, 테너에 그레고리오 성가의 메리스마적 멜로디의 1부분을 리듬정형의 어느 하나에 맞추어 사용했다. 어느 단선성가(單旋聖歌)를 썼는가는 성가의 첫머리 몇 마디(이것을 incipit라 하였다)를 적어 표시하였다. 테너가 악기로 연주되기도 했으며, 상성부위 가사는 최초에는 테너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으나, 점차 테너에서 독립하여 다른 말, 상반되는 뜻의 내용을 지닌 가사, 종교적 가사와 세속 가사가 동시에 불리는 형상을 낳았다. 그러나 각 성부가 이와는 다른 가사, 다른 리듬정형을 지님으로써 개개 성부의 독립성이 강조되었고, 폴리포니의 발전을 촉구하였다.
Troubadour 중세의 세속가요 중에서 악보로 남은 것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라 하며, 남프랑스를 중심으로 10세기 말경부터 13세기경까지 성행하였다. 음유시인(吟遊詩人)이라고도 한다. 발라드나 론도, 비를레 같은 일정한 악곡형식을 갖는 것, 또는 샹송 드 제스트처럼 이야기조의 것이 있으며 후렴을 곁들인 것이 많다.
Trouveres 트루바두르보다 약간 늦게 북프랑스에서 활약한 음유가인(吟遊歌人)을 말한다. 음악은 본질적으로 트루바두르와 다름이 없으며, 그 대표자는 아당 드 라 알이다.
Minnesanger 중세 독일의 음유시인을 말한다. 그들의 음악은 주로 단선율로 된 것이며 바르 형식으로 된 것이 많다. 독일의 기사문화(騎士文化)는 게르만적 인생감정과 그리스도교적 신앙, 라틴 문화의 세 가지 요소로 이루어졌으며 '부인에의 봉사', '신에의 봉사', '군주에의 봉사'를 테마로 노래불렀다 그 대표자로는 라인마르 폰 하게나우, 발터 폰 데아 포르겔바이데, 하인리히 폰 모르겐의 세 사람을 들 수 있다. 현재 독일 하이델베르크의 마네세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수사본(手寫本)은 미니어튀이르 장식으로 되어 있어, 색채가 선명하며 중세 로마의 세계를 그대로 펼쳐 보여주고 있다.
Meistersinger 독일문학이 성(城)에서 시(市)로, 기사계급에서 시민계급으로 옮겨짐과 동시에 서정시의 면에서는 미네젱거가 도시의 일반 서민들에게 이어져 마이스터게장이 되었으며, 15, 16세기에 성행하였다. 소박한 생활의 노래에 자유로운 리듬의 무반주 단선을 달아 전통적인 바르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 많다. 마이스터게장을 부르는 마이스터징거의 대표적인 인물은 뉘른베르크의 제화공인 한스 작스이다. 이 노래는 후에 독일민요 속에 파고들었다고 한다.
Bar 形式 중세 이후 독일에서 사용되었던 가장 중요한 악곡형식의 하나이다. a a b라는 기본형을 취하고 있다. 미네젱거나 마이스터징거에 즐겨 사용되었으며 미네젱거에는 변형의 a a b a의 형식도 볼 수 있다.
劇音樂-誕生 12세기에 루앙의 대성당에서 제3시의 성무일과가 끝난 다음 그리스도의 탄생에 연유한 '세 사람의 동방박사' 이야기가 주교좌 성당(主敎座聖堂)의 세 사람의 상급 참사회원에 의하여 연출되었다고 한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에 관한 이야기는 참으로 극적이며, 탄생, 수난, 부활의 제례(祭禮)는 전례극(典禮劇)의 모체가 되었다. 합창대가 번갈아 부르는 안티포나(交唱)나 신부와 합창대가 응답하는 레스폰소리움(應唱)은 그 자체가 하나의 음악극의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이리하여 전례극은 교회에서 벗어나 민중극으로의 발전을 도모하게 된다.
Ars Nova 14세기의 이론가 필립 드 비트리(1291-1361)가 1323년경 <아르스 노바>라고 하는 정량기보에 관한 논문을 썼을 때 그 표제가 프랑스의 비트리, 이탈리아의 지오반니 다 카샤, 야코포 다 볼로냐 등의 14세기 전반의 음악을 '아르스 안티쿠아'와 대조시켜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후에 와서는 14세기의 음악에 나타난 새로운 경향, 즉 다성악과 세속적 멜로디가 결부된 마드리갈레, 발라타, 카치아의 섬세하고 우아한 예술을 창조하게 되었다. 따라서 프랑스의 마쇼, 이탈리아의 란디노, 부르군트의 뒤파이 등도 포함되며 이것은 이탈리아의 초기 르네상스 감각을 이미 예시한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러한 가곡들은 이윽고 정묘한 기악반주로 장식된다.
Fauxbourdon 영국에서는 이미 13세기 말에 그 밖의 나라에서 4, 5, 8도만이 협화음(協和音)으로 생각했던 시대에 3도를 협화음으로서 애호하는 풍조가 있었다. 테너의 정한가락에 바탕을 두고 6도나 8도 위에 최고부를, 또 3도나 6도 위에 중간부를 붙여 즉흥적으로 불렀다. 그 뒤 15세기를 통하여 널리 유럽 각지에 있었던 포부르동의 수법은 최고성부에 정한가락을 두고 그 6도 또는 8도 아래에 테너를 두며, 중성부는 최고성부의 4도 아래를 즉흥적으로 불렀다. 플랑드르 악파의 뒤파이나 뱅스와 등이 순수한 포부르동에 약간의 장식을 가하게 되어 이 수법의 절정을 이룩하였다.
定量音表 13세기의 아르스 안티쿠아의 음악은 리듬정형으로 정률화(定律化)되어 있었다. 그것이 14세기의 아르스 노바에서는 개개 음의 장단을 음표의 형태로 구체적으로 표시하는 정량음표가 출현하여 그 음표로 정량기보법이 시작되었다. 처음의 흑표(黑符)시대의 맥심, 론거, 브레비스, 세미브레비스, 미니마에, 백표(白符)시대에는 세미미니마, 푸사, 세미푸사도 추가되었다. 여기에 싱코페이션, 점, 색표(色符)가 병용되어 기보법도 점점 복잡해졌다. 그러나 박자표의 지시가 없으므로 음의 움직임으로 리듬을 정해야만 한다. 아르스 안티쿠아의 리듬은 크리스트교의 3위1체를 상징하는 3의 숫자를 중히 여기는 경향을 받아 3박자가 원칙이었으므로 항상 3으로 나뉘었으나 이 시기에는 2분할도 전적으로 동등하게 쓰이게 되었다. 각 성부의 리듬의 독립을 중히 여겨 악센트의 주기적인 반복을 피하는 르네상스기 플랑드르 악파의 폴리포니에서 정량음악의 전형이 나타나게 된다. 아무튼 이 시대의 음악을 현대음악의 박자, 리듬의 관념, 2박자는 셈·여림·셈·여림, 3박자는 셈·여림·여림이라는 관념으로 연주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음악을 왜곡하는 것이므로 주의해야 한다.
中世-樂器 중세에는 어떠한 악기가 있었고 연주되었는가를 우리는 당시의 많은 회화나 교회의 조각, 조상(彫像)에 나타나 있는 '주악의 천사'의 모습에서 엿볼 수 있다. 작은 종·탬버린 등의 타악기, 트럼펫·새크배트·본발트·코르넷·플루트·튜바·백파이프 등의 취주악기, 그리고 하프·류트·기타·프살테리움 등의 발현악기(撥絃樂器), 피델·트럼바·비올 등 활로 현을 켜는 것, 소형의 휴대용인 포르타티브 오르간 등과 같은 악기로 천상의 음악을 연주하였고 또는 모테토의 정한가락이 연주되었다. 아르스 노바의 음악에서는 통속성악곡(通俗聲樂曲)이 악기로 화려하게 반주된다. 기악의 가장 오랜 형식의 하나인 에스탄피라고 하는 춤곡도 프로방스 지방에서 발생하여 13, 14세기에 번성하였다.
Gohn Danstable(1380경-1453) 15세기 최대의 영국 작곡가로 역사적으로는 뒤파이, 뱅스와 등 부르고뉴 악파에 영향을 준 사람으로서 평가되고 있다. 작품으로는 미사곡, 모테토 등이 있고 작품은 보수적인 경향과 진보적인 경향의 양면을 지니고 있으나 3도, 6도를 유효하게 사용하여 화성기능에 대하여 이미 우수한 감각을 나타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Burgundian 樂派 14세기의 이탈리아 및 프랑스의 아르스 노바와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에 걸친 플랑드르 악파를 결부하는 15세기 전반에서 후반에 이르는 중요 악파로서 종래는 제1기(또는 초기) 네덜란드 악파라고 하였으나 프랑스 동북부의 부르고뉴 공원을 중심으로 번성하였으므로 이렇게 부르는 편이 보다 적절하다 하겠다. 뒤파이(Guillanme, Dufay 1400경-1474)와 뱅스와(Gilles Binchois, 1400경-1460)의 2대 작곡가가 대표하는 중세의 유럽 대륙과 영국의 수법을 종합하여 폴리포니 양식을 확립하고 새로운 르네상스 음악에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포부르동을 즐겨 사용했다는 점과 랑지노의 마침(終止) 사용, 3도에 바탕을 둔 멜로디의 감각, 팔세토의 사용 등을 들 수 있으며 전체적으로는 여성적인 우아함과 암울한 작풍이 특징이며, 리코더, 비올, 트롬본 등의 악기가 동시에 곁들여 화사함을 더하였다. 곡종으로는 미사곡, 모테토, 마니피카트, 프랑스어의 샹송 등을 들 수 있으며 형식으로는 론도, 비를레, 발라드 등이 사용되었다. 이 악파의 음악은 중세의 종말을 알림과 동시에 다가올 르네상스를 예시하고 있다
對位法 둘 이상의 독립된 성부(聲部)를 결합하는 작곡기법은 초기의 다성악, 오르가눔에서는 테너에 중점을 두고 대성부(對聲部)는 매우 종속적이어서 4도, 5도의 병행으로 나아갔다. 14세기 아르스 노바에 이르러 독립적인 다성부 텍스처(書法)이론으로서의 대위법이 여기에 성립하였다. 4도, 5도의 완전 협화음의 병행진행은 금지되고 3도, 6도가 우위를 차지하게 되며 각 성부가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모방양식(模倣樣式)이 확립된다. 이 대위법의 전형적인 작곡기법 악종은 모테토이다. 테너의 정한가락에 각기 다른 가사가 있는 2성부를 동시에 부르는 2중 모테토가 전형적이며 테너와 다른 성부가 동일 리듬형을 반복하는 이소리듬에 바탕을 두고 작곡되어 있다. 아르스 노바의 거장인 마쇼는, 3성의 모테토를 많아 남겨 놓았다. 부르고뉴 악파에서는 4성의 모테토가 표준이 되고 각 성부는 공통의 가사를 지니며 중세 모테토의 2대 특징이었던 다가사성(多歌詞性)과 정한가락의 지배가 상실된다. 영국의 단스타블이나 부르고뉴 악파의 뒤파이에게서 기악반주가 있는 독창 모테토도 볼 수 있다. 계속되는 플랑드르 악파에서는 모테토가 4에서 6성부로 되며, 미사와 더불어 중요 악곡형식이었다. 각 성부가 평등하게 모방에 참가하는 통모방양식(通模倣樣式)이 성립되고 죠스캥 데 프레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Missa 變化 뒤파이는 15세기 전반에 번성했던 부르고뉴 악파의 대표적인 작곡가인데 미사작곡기법을 한층 발전시켰다. 그는 미사의 정한가락에 그레고리오 성가가 아닌 속요(俗謠)를 사용한 최초의 사람이라고도 한다. 미사에서 발전한 제쿠엔치아, 트로푸스에 대해서는 이미 말하였으나 이 현상은 원래 전례성가이어야 할 미사곡이 점차로 음악적 자유를 누리게 되어 이로 인하여 미사의 속화(俗化)를 초래했기 때문에 트렌토 공회의(公會議)에서 폐지되었다.
Flandre 樂派 부르고뉴 지방을 중심으로 작곡가들의 영향을 받아 1450년경부터 1600년에 걸쳐 플랑드르 지방, 즉 현재의 벨기에 남부로부터 북부 프랑스에 이르는 지방에 음악사상 획기적인 대악파가 번성하여 고딕 후기로부터 르네상스 음악으로 옮아간다. 최근까지는 '네덜란드 악파'라는 명칭이 일반적이었으나 오늘날에는 '플랑드르 악파' 또는 악파의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연대로 구분하여 설명하는 음악사도 있다. 제1기의 젊은 오케겜, 오브레히트 등은 4성 텍스처(四聲書法)인 폴리포니를 시도하였다. 다음 제2기에는 죠스캥 데 프레, 그리고 이자크, 피에르 드 라 뤼가 있다. 여기서 한 성부에 정한가락을 두는 수법과는 달리 각 성부가 고르게 모방을 하는 통모방에 의한 마지막 고전적인 폴리포니 양식이 확립되었다. 끝으로 클레멘스 논 파파 및 랏수스에 의하여 성부는 5성, 8성으로 확대되었고 17세기에 이르러 성악 폴리포니는 기악과 극음악에 그 자리를 양보하지 않을 수 없어 쇠퇴하고 말았다. 악종으로는 미사, 모테토가 중심이며 세속곡으로는 프랑스의 샹송, 이탈리아의 마드리갈, 독일의 리트를 들 수 있다.
樂譜印刷-出版社 악보가 인쇄되기 전까지는 작곡가나 필경사의 손을 거쳐 쓰인 악보로 연주하였다. 15세기에 이르러 서적인쇄에서 악보인쇄의 기술이 발전하였고, 1498년 옥타비아노 디 페트루치(1466-1539)가 베네치아 공화국 의회로부터 식자인쇄방식에 의한 악보인쇄의 20년간 특허를 받아 1501년에 모테토, 샹송, 미사, 프로틀러 등 대가의 작품 96곡을 포함한 대집성을 간행하였다. 이것은 <오데카톤>이라고 불리며 가장 오래된 악보 인쇄본으로서 귀중한 자료가 되어 있다. 이렇게 해서 이탈리아에서 비롯된 악보 출판은 1525년경에는 베네치아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파리, 안트워프, 뉘른베르크, 아우크스부르크 등 유럽 각지에서 널리 행하게 되었다. 그 결과 도회의 교회나 궁전 같은 특수한 곳에서부터 시인의 가정이나 지방에 이르기까지 급속히 우수한 음악이 퍼져서 음악문화를 비약시켰던 것이다. 독일에서는 종교개혁가인 루터가 때를 맞춰 독일어역 성서와 함께 찬송가집을 인쇄하여 신도들에게 보급시키기에 노력하였다.
Byzantine-音樂 4세기부터 1453년에 멸망할 때까지 약 1000년 동안 번영하였던 비잔틴 제국은 로마 제국의 전통과 그리스의 고전문화,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세 가지 요소가 융합한 가운데 오리엔트 문화를 곁들임으로써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고 서구문화에 계속 영향을 미치고 있었는데 음악 역시 예외일 수는 없었다. 비잔틴 음악의 해독과 연구는 현재의 과제이며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점이 많으나, 14, 15세기엔 비잔틴의 성가를 (1) 카논의 오드, (2) 단절(單節)의 찬가, (3) 전례가집에 수록된 메리스마적인 노래의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300년경에 활약했던 쿡제레스라는 작곡가는 정형화된 메리스마에 대하여 새로운 음표를 만들었으며, 이것이 1400년경에 와서 일반화되었다고 한다.
Renaissance 音樂 르네상스라는 말은 원래 '고대문화의 부흥'을 의미하는데, 미술이나 문학의 분야에서는 이 말이 대개 해당되나 음악의 경우는 이러한 뜻에서의 르네상스 음악이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르네상스를 보다 넓은 뜻으로 해석하여, 자유로운 인간의 감정이나 개성에 눈을 떠서 합리적 사고방식이나 조화를 존중하고 명석함을 추구한다고 하는 사회·문화 발전에 걸쳐 볼 수 있는 시대의 특징적 정신이라는 점에서 생각한다면, 15세기 말에서부터 16세기의 음악에는 르네상스라고 할 만한 몇 개의 특징을 찾을 수가 있다. 이 시대의 음악작품의 음넓이(音域)가 확대되고, 이에 따라 새로운 음공간(音空間)이 개척되었는데 이것은 회화에서의 원근법 탐구와도 비할 수 있을 만한 진보였다. 또, 악보 인쇄술의 발명, 정흑백보(定黑白譜) 기보법의 보급, 전통에 구애되지 않는 새로운 음악이론의 탄생은 르네상스 정신의 큰 특징인 합리성이나 표현의 가능성을 추구하는 경향의 출현이라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르네상스의 정신은 이미 14세기의 아르스 노바에도 나타나 있으나, 특히 플랑드르 악파로 통하여 죠스캥 데 푸레의 음악에서 뚜렷한 형태를 취하여 나타났다. 플랑드르 악파의 작곡가들은 전유럽에 걸쳐 활약하였고, 그들의 성악 폴리포니의 작곡법은 르네상스 음악의 중심적 양식이 되었다. 그러나 이 대위법적인 복잡한 기법(技法)은 르네상스 음악에서는 단순한 기교를 위한 기교가 아니라 보다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감정표현과 결부되어 있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16세기에는 음악의 중심이 점차로 이탈리아로 옮겨져, 여기서 르네상스 정신은 수많은 꽃을 피우기에 이르렀다. 미사, 모테토를 비롯하여 각종의 세속 합창곡이 번성하였으나, 그와 동시에 오르간이나 류트 등의 기악음악도 놀라운 발전을 하였다. 이 기악은 바로크 이후의 음악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16세기 말에는 각종 극음악이 시도되었는데, 이들은 17세기 바로크 음악의 성립과 발전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플랑드르와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음악의 영향 아래 유럽의 다른 여러 나라의 음악도 각각 독자적인 발전을 보였다. 일반적으로 말하여 르네상스 음악은 플랑드르 악파의 폴리포니에서 볼 수 있는 북방적이며 고딕적인 요소와 이탈리아의 마드리갈 등에서 볼 수 있는 남방적·라틴적 요소와의 결합에서 성숙하였다 하겠다.
madrigal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다성가곡의 형식이며, 원래는 목가적 서정시(牧歌的抒情詩)인 마드리갈레를 그 가사로 하고 있다. 이처럼 마드리갈레를 가사로 하는 음악은 14세기 중엽에 생겼으나 곧 쇠퇴하였고, 16세기에는 이와 관계없이 이탈리아 각지의 궁정을 중심으로 유행했던 세속적 가곡형식과 페트라르카 등의 서정시에서 자극을 받아 플랑드르 악파의 폴리포닉한 작곡 기법을 채택한 새로운 마드리갈이 생겨났다. 이는 르네상스 정신으로 충만한 것이며, 귀족사회에 적합한 세련된 것이었다. 처음에는 3성 내지 4성의 것이 많았고, 차차 5성부가 중심이 되어 처음에는 부분적이었던 모방의 수법이 많이 쓰였다. 또 가사의 내용을 특정음형이나 화성진행을 사용하여 표현하게 되었고, 반음계법을 사용하여 화성효과도 보다 풍부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초에 걸쳐 한층 강조되었으며, 가사의 극적인 표현을 추구하여 마침내는 새로운 양식으로 이끌어갔다. 이탈리아의 마드리갈은 마렌치오(Luca Marenzio, 1560-1599)가 완성하였다. 그는 몬테베르디를 비롯하여 영국, 독일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近代的-音階 중세의 음계는 8개의 교회선법을 전적으로 사용했었으나 세속음악이 번성해짐에 따라 현재의 장음계와 단음계를 닮은 음계가 애호되는 경향을 띠기 시작했다. 이러한 풍조는 플랑드르 악파의 후반경부터 16세기의 음악에서도 더욱 뚜렷하게 볼 수 있어 이와 같은 실정 아래 스위스의 음악이론가인 글라레아누스(H. Glareanus, 1488-1563)는 그의 저서 <12음계론>(1547)에서 새로운 이오니아 정격(正格, 다에서 다까지의 음계)과 그 변격(變格), 에올리아 정격(가부터 가까지)과 그 변격의 4개 선법을 인정하여 모두 12개 선법을 주장하였다. 이 새로운 선법은 장·단조로 전화(轉化)함으로써 옛날부터의 모든 선법을 차차 소외시켜 마침내는 지배적인 지위를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十六世紀初期-大家- 16세기의 전반, 르네상스 음악의 작곡가 가운데에서 첫째로 꼽을 수 있는 사람은 빌라르트(A. Willaert, 1480/90-1562)이다. 그는 플랑드르 출신이나 1527년 베네치아 산마르코 대성당의 악장이 되었다. 여기서 미사, 모테토 등의 교회작품을 비롯하여 마드리갈이나 기악곡을 썼으며, 또 많은 우수한 음악가들을 육성하여 이른바 베네치아 악파의 개조(開祖)가 되었다. 그는 플랑드르 악파의 성악 폴리포니의 기술에 숙달했으나, 베네치아의 인상적인 회화적 풍경에 영향받아 그 정교한 대위법적 수법은 점차 간소화되고 풍부한 색채효과와 폭 넓은 음의 울림, 음빛깔의 눈부신 대비(對比)를 지닌 음악을 창조해냈다. 특히 2개의 코러스가 대화조로 번갈아 노래 부르고, 끝에 가서는 한데 어울려 클라이맥스에 이르는 현란한 2중합창의 양식을 처음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기악곡에서도 그가 창시한 리체르카레는 특히 주목된다. 그 시대의 음악가에는 플랑드르 출신인 베르데로(?-1550), 알카데르토(1505-1567), 이탈리아 사람인 페스타(1480경-1545) 등이 있다.
ricercare '탐구한다'는 뜻의 이탈리아말에서 유래되며, 16-17세기의 많은 기악곡에 사용된 이름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모방적 리체르카레이다. 이것은 성악 모테토의 양식을 기악에 적용함으로써 시작되었는데, 그 중요한 특징은 모테토와 마찬가지로 여러 개의 주제를 모방적으로 다루고 있다. 여기에는 기악합주용의 것과 오르간용의 것이 있었으나, 후자가 발달하여 점차 푸가로 이행하였다.
Venetian School 16세기의 르네상스 음악은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와 로마를 중심으로 발달하였으나 그 발달양식은 각각 달랐다. 로마가 15세기 이후 성악 폴리포니의 완성에 전념하여 교회음악을 현저히 발달시켰음에 대해, 베네치아는 17세기의 바로크 음악으로 이끄는 그 당시의 가장 진보적인 경향을 대표하고 있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반음계법의 자유로운 사용, 독립된 기악곡 형식의 확립, 화려한 2중합창의 활용 등이라 하겠다. 빌라르트가 베네치아 악파의 기초를 확립한 뒤 그의 제자 안드레아 가브리엘리(Andrea Gabrieli, 1510-1568)가 그 뒤를 이어 마드리갈이나 교회음악, 기악곡 등을 작곡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2중합창곡은 그의 스승인 빌라르트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다양하고 색채가 풍부한 음의 강도와 빛깔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안드레아의 조카 지오반니 가브리엘리(Giovanni Gabrieli, 1557-1612)는 작곡가인 동시에 우수한 오르간 주자이기도 하였다. 그는 백부가 개척한 길을 더욱 발전시켜 베네치아 악파를 정상에 올려놓았다. 특히 기악의 분야에서 오르간을 위한 리체르카레, 판타지아, 칸초네 등을 발전시켰다. 그 밖에도 베네치아 악파의 중요한 작곡가로는 메를로(1533-1604), 음악이론가인 차를리노(1517-1590)가 있다. 차를리노는 장3화음, 단3화음을 화성의 기초로 확립시켜 화성학의 아버지라 불리게 되었다.
幻想曲 엄격한 대위법과 리체르카레를 악기(처음에는 류트)의 특성을 모아서 자유롭게 변형한 것이다. 따라서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환상적인 기분은 없다. 건반악기용의 판타지아는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초에 영국의 버지널리스트에게 영향을 주었다. 안드레아 가브리엘리에게 배운 플랑드르의 스벨링크(1562-1621)는 오르간이나 클라비어의 연주 및 작곡, 특히 이 판타지아 등의 작품을 통하여 후세에 큰 영향을 남겼다. 또 프랑스의 샹송을 기악용으로 편곡을 한 '프랑스풍의 칸초네'가 널리 애호되었는데, 이러한 종류의 기악형식은 17세기의 소나타나 푸가로 발전함에 있어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다.
Giovanni Pierluigi de Palestrina(1525경-1594) 평생을 두고 그 예술적인 일생를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봉사하였으며 100여 곡의 미사곡, 200에 가까운 모테토를 써서 16세기 최고의 교회음악 작곡가가 되었다. 음악의 특징은 플랑드르의 엄격한 대위법적 기교와 이탈리아의 우아한 가락, 그리고 색채와 조화의 감각을 교묘하게 연결한 점에 있다. 오늘날까지 팔레스트리나 음악은 참된 카톨릭 정신이 가장 깊고 설득력이 풍부한 표현으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복잡한 기교를 지닌 고딕적 폴리포니에서, 가로의 움직임에 관심을 두는 보다 간단한 호모포니로 옮아가는 그 당시의 경향에 따라 팔레스트리나도 점차 1음표 대 1음표라는 호모포닉한 화성구조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그 바닥을 항상 다성적인 것에 두고 있어 베네치아 악파에서 볼 수 있는 극적인 표현을 목표로 한 반음계적 진행이나 안어울림음 등은 되도록 피하고, 보다 자연스런 음의 움직임과 전체 음의 경쾌한 울림을 존중하였다. 이상과 같이 그의 음악은 새로운 표현이나 양식을 개척함이 없이 성악적인 폴리포니의 전통을 지켜 순수하고 숭고한 종교적 기분에 넘쳐 있다고 하겠다.
Palestrina 樣式 팔레스트리나에 의하여 확립된 아 카펠라(무반주 합창곡)의 양식을 말하는데 그가 죽은 후 제자인 나니니(1545경-1607), 조바네리(1550경-1625), 아네리오(1560-1614) 등 로마 악파의 작곡가들에게 계승되어 규범으로 받들어졌다. 한편, 16세기 초 이후 인간구가(人間謳歌)의 르네상스 사조에 따라 교회음악의 쇠퇴가 두드러질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면 교회음악에 오르간 이외의 악기를 사용한다든가 세속적인 가사내용의 노래가 삽입되는 형상 등이다. 이는 성직자뿐만 아니라 로틀르담의 에라스무스 같은 학자도 앞장서서 주장했던 것이다. 1545년부터 1563년에 걸쳐 카톨릭교회의 공회의가 트렌토에서 열리자, 교황 비오 4세는 이 문제를 거론하였으며, 거기서 종교개혁에 대한 카톨릭측의 태도가 뚜렷이 확립되어 음악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당시의 카톨릭 성직자의 입장에서 보아 불순하고 비종교적이라고 생각되는 음악은 모두 교회음악에서 배제되었는데, 이때 팔레스트리나 양식의 다성 교회음악이 크게 환영받았다. 프라하의 작곡가 야콥스 데 케를레(1531/32-1991) 등도 카톨릭 교회에서의 폴리포니 음악의 재인식에 공헌이 컸던 음악가이다. 에스파냐에서 아 카펠라 팔레스트리나 양식의 대표자로는 모랄레스(1500경-1553), 에스코페데오(1500경-1563), 구에렐로(1528-1599)나, 작풍이 팔레스트리나와 흡사하기 때문에 종종 '에스파냐의 팔레스트리나'라고 불리는 빅토리아(1548경-1611) 등을 들 수 있다.
Orlando di Lasso(1532경-1594) 팔레스트리나와 함께 16세기 르네상스 음악의 최대 거장이다. 라소는 플랑드르 출신이나 1556년 이후 뮌헨에서 활약하였으며, 드물게 보는 정력과 다능다재(多能多才)한 재질로 2천을 넘는 종교곡과 세속곡을썼다. 그 가운데서도 모테토는 가사의 정확한 표현과 깊은 내면성 등으로 역사상 가장 뛰어난 곡이다. 세속곡에서는 독일어의 리트, 프랑스어의 샹송, 이탈리아어의 마드리갈 등과 각국어로 된 작품을 써서 국제적 작품을 나타냄과 동시에 플랑드르 악파의 폴리포니 기법을 기초로 하여 음악과 언어의 밀접한 결부와 극적인 표현력, 색채적인 하모니 용법 등으로 전인미답의 경지를 개척하고, 다음의 바로크 음악을 예고하였다. 그의 문하에서는 새로운 음악의 개척자들이 나타났으며, 특히 베네치아 악파의 조반니 가브리엘에 대한 영향은 크다.
獨逸-多聲歌曲 르네상스 음악이 플랑드르 및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발전하고 있는 동안, 독일에서는 그 때까지 민중 사이에서 싹트고 있던 민요를 토대로 하여 플랑드르풍의 대위법적 수법으로 쓰인 다성가곡이 16세기 전반에는 당시의 독일에서 가장 기교적으로 높은 음악작품이 되었다. 독일의 다성가곡은 이탈리아의 마드리갈처럼 세련되고 매력적인 우아함이나 프랑스의 샹송 같은 기지의 빛남은 없으나, 그 후 오래도록 독일 음악의 특색이 되었던 독일적인 감정인 '감상(感傷)과 동경'을 성실하고 소박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와 같은 독일 가곡은 모두 민요의 편곡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작곡가의 수완은 대개의 경우 흔히 알려진 멜로디에 대위적인 멜로디를 더하는 기교 속에서 발휘되었다. 그리고 그 스타일의 특징은 매우 자유로운 리듬에 있다고 하겠다. 특히 우수한 작곡가로는 핑크(1445-1527)를 비롯하여 궁정 오르가니스트이기도 했던 호프하이머(1459-1537), 이자크의 제자로 그 뒤를 계승한 젠플(1490경-1543) 등이 있다.
Protestant 敎會-音樂 교회의 다성가곡이 르네상스 음악의 다른 여러 나라, 즉 플랑드르나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등의 음악에 필적할 위치를 이룩했을 무렵, 마틴 루터(Martin Rutter, 1483-1546)가 1517년에 종교개혁의 봉화를 올렸다. 그 결과 새로 일어난 교회를 위해 루터는 새로운 교회의 찬송가를 필요로 했다. 그것은 교회에 모이는 신자들이 직접 신에게 기도하며 신을 찬미한다는 목적에서 그 때까지 쓰였던 라틴어 대신에 독일어의 가사와 단순하고 노래부르기 쉬운 멜로디로 된 것이었다. 그리고 문학이나 음악의 소양이 많았던 루터 자신도 당시의 우수한 작곡가들의 협력을 얻어 새로운 프로테스탄트의 코랄을 탄생시켰다.
choral 프로테스탄트의 코랄은 독일 국민의 기질과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종교적 내용에 적응한 새로운 독일의 종교가이다. 그 가사와 멜로디는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전적으로 새로운 가사와 멜로디로서, 그 가운데에는 루터 자신의 작품도 있다. 둘째는 카톨릭 성가의 편곡, 셋째는 종교적·세속적 민요의 멜로디와 가사를 개정한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새로운 목적에 맞도록 개편된 코랄의 가락은 단순하고 명쾌하여 힘찬 리듬을 지니게 되었다. 처음에는 홀가락의 형태로 쓰여 회중은 그것을 유니즌으로 불렀으나, 이 코랄의 멜로디를 테너에 두고 플랑드르 악파의 모테토 양식으로 만들어진 성가 내용의 다성 코랄을 보다 부르기 쉽게 하기 위하여 코랄의 멜로디를 소프라노에 두고 타성부(他聲部)가 여기에 단순한 형으로 화성을 곁들이도록 하였다. 이러한 코랄의 작곡가로는 루터의 친구이며 협력자였던 요한 발터(1496-1570)와 오지안더(1534-1604), 허슬러(1564-1612) 등을 들 수 있다. 프로테스탄트의 코랄은 고도의 예술적 작품의 기초로 쓰여졌다. 이런 것을 코랄편곡이라 하며, 그 발전에 공헌한 프레트리우스(1571-1621)에서 바흐에 이르기까지 독일 프로테스탄트 음악의 영광은 코랄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英國音樂 16세기의 영국은 엘리자베스 왕조의 황금시대였으며, 문학으로는 셰익스피어가 불멸의 걸작을 낳은 시대이기도 했다. 이 시대의 음악은 기악이나 성악에도 우수한 작품이 많았다. 영국의 교회음악에 공헌한 작곡가로는 타이(Tye, 1500-1573) 및 탈리스(Tallis, 1505경-1585) 등이 있는데 그 작풍은 간결하고 명쾌하였다. 탈리스는 특히 대위법의 기교에 우수하였다. 엘리자베스 왕조 때 최대의 작곡가였던 버드(W. Byrd, 1542경-1623)는 교회음악을 비롯하여 세속적 합창곡, 비올을 위한 실내악, 건반악기 음악 등 당시 유행했던 모든 작곡 분야에서 활약했으며, 그 모든 것에 탁월한 기교를 발휘함과 동시에 스스로 개척한 형식과 스타일을 다음 세대에 전하였다. 종교적·세속적 합창곡으로는 영어가 지닌 독특한 리듬감을 살린 뛰어난 대위법의 기교를 나타내어, 영국 마드리갈의 개척자가 되었다. 그러나 역사상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건반악기 분야에서의 공헌을 들 수 있겠다. 그 부분은 버지널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버지널은 건반이 달린 옛 발현악기(撥絃樂器)이며, 그 무렵에 영국에서 유행한 쳄발로(하프시코드)의 일종이다. 16세기 말엽부터 17세기 초에 걸쳐 버드를 비롯해서 이 악기를 위하여 음악을 쓴 작곡가들을 버지널리스트라 했으며, 그들의 대표작품은 <파르테니아(Parthenia, 1610)>나 <피츠윌리엄 버지널의 책(Fitzwilliam Virginal Book, 1625년경)> 등의 곡집에 수록되어 있으며, 그것들은 춤곡, 변주곡, 프렐류드, 판타지아 등이다.
violin族樂器-發達 바이올린족의 선행악기인 비올족이 15세기의 후반, 류트 등과 함께 궁정기악 합주의 중심이 될 무렵에 이탈리아에서는 상업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라 베네치아 극장이 건립되어 오페라와 기악합주가 시민에게 개방되었다. 그러나 넓은 극장을 위하여 필요한 음량과 새로운 형식의 음악이 요구하는 표현을 지금까지의 비올족으로는 충족시킬 수가 없었다. 이러한 상황 아래 비올족에서 바이올린족이 급속히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최초의 바이올린은 16세기의 30-40년대에서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그후 바이올린족은 비올족과 1세기 이상을 두고 그 세력 다툼을 하면서 비올족에 영향을 주는 가운데 1705년까지의 사이에 바이올린족이 완성되었다. 이 완성에는 크레모나의 위대한 제작자 아마티 일가(Amati 一家, 1535-1684까지)를 비롯하여, 대대의 명가(名家)인 구아르네리(Guarneri), 스트라디바리(Stradivari) 등의 명장(名匠)을 중심으로 수많은 제작자들이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여러 가지 뛰어난 작품을 완성하여 후세에 남겼다.
Baroque 音樂 원래 바로크란 17, 18세기의 미술양식을 말하는 것이었으나, 일반적으로 1600년경부터 1750년경의 음악에 대해서도 이 명칭으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바로크 시대를 좀더 세분한다면 다음과 같이 셋으로 구분할 수 있다. 즉 초기 바로크는 1580-1630년, 중기 바로크는 1630-1680년, 후기 바로크는 1680-1750년이다. 바로크 음악의 역사적 배경을 보면 정치적으로는 절대주의 왕정으로부터 계몽주의로의 이행을 볼 수 있으며, 경제적으로는 중상주의(重商主義), 정신사적(精神史的)으로는 합리주의적·계몽주의적인 사조의 흐름 속에서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여러 사회적 상황이 몇 겹으로 겹쳐서 궁정·도시·교회 등 세 활동범위를 기초로 하여 바로크 음악을 형성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시대의 음악은 통주저음(通奏低音)의 기법을 사용했기 때문에 바로크 음악의 시대를 '통주저음의 시대'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바로크 음악은 '정서론(情緖論)' 즉 '음악의 궁극목적은 음과 음의 리듬, 멜로디, 하모니, 음정 등으로 모든 정서를 자아내는 데 있다'고 하는 독특한 타율적 미학관(美學觀)으로 뒷받침되고 있다. 1세기 반에 걸친 바로크 시대에서는 국가나 지역에 따라 상당히 시기와 양식의 차를 볼 수 있으므로, 이를 각국별로 개관하면 다음과 같다. 이탈리아에서는 G. 가브리엘을 중심으로 하는 베네치아 악파의 협주양식이나 페리, 카치니의 모노디 양식 오페라가 바로크 양식의 선구를 이루었고, 로마 및 베네치아 악파를 거쳐 A. 스카를라티 등의 나폴리파에 와서는 벨 칸토 창법으로 명인기적(名人技的)인 기교를 과시하는 명가수 중심의 오페라로 변화해 갔다. 1730년대에는 서정적인 비극을 테마로 하는 오페라 세리아와 코믹한 요소를 중심으로 하는 오페라 부파 등 2개의 스타일이 뚜렷이 분리하게 되었다. 또한 모노디 양식에서 종교적인 제재를 다루는 칸타타나 오라토리오가 카리시미에 의하여 확립되었다. 기악 면에서는 트리오 소나타, 교회 소나타, 실내 소나타, 그리고 주로 바이올린 주법의 눈부신 발전과 함께 합주 협주곡, 독주 협주곡의 형식이 생겨났다. 프랑스에서는 루이 13세로부터 15세에 이르는 절대주의 시대를 중심으로 하여 번영하였는데, 1720-1730년에 걸친 경쾌·우아한 로코코의 갤런트 양식이 두드러졌으며 장중한 표현을 지닌 륄리나 라모 등의 오페라, 쿠플랭 등 클라브생 악파 등이 현저한 발전을 보였다. 영국에서는 17세기 초인 엘리자베스조의 버지널 음악 등의 번영을 기반으로 하여 왕정복고 후에는 퍼셀 등이 앤섬, 오페라, 마스크 등의 국민적인 양식을 낳았다. 그리하여 18세기에는 헨델이 오라토리오의 전통을 이룩하였다. 독일에서는 초기 바로크가 네덜란드의 폴리포니 전통을 기반으로 하여 베네치아의 복합창 양식, 모노디 양식을 융합시켜 독일 프로테스탄트 음악의 전통을 세웠으며, 모테토, 오라토리오,수난곡, 코랄 등에 우수한 작품을 남겼다.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아 텔레만, 헨델, 바흐 등 3인의 거장이 잇달아 등장하였고, 바로크 음악을 절대적인 위치로 이끄는 데 공헌했다.
monody-起源 모노디란 화음반주를 가진 단일 멜로디의 음악양식을 가리키나, 엄밀히 말하면 1600년경, 피렌체의 카메라타 그룹에 의하여 이루어진 통주저음(通奏低音)의 반주가 있는 레치타티보 양식의 독창 성악곡을 뜻한다. 이에 앞서서 이미 16세기의 류트 반주가 있는 독창가곡으로 편곡한 것에서 그 싹을 엿볼 수 있다. 피렌체의 카메라타 그룹은 고대 그리스에서 본딴 '신음악'의 이론을 세웠다. 즉, 언어와 멜로디가 완전 일치하고, 언어가 지배하고 음악이기에 따를 것을 지향하며, 텍스트를 명확하게 이해시켜 주기 위하여 대위법의 텍스처를 금하고 간단한 반주가 따르는 솔로의 형태를 취하여야 하며, 언어는 바르고 자연스러운 억양으로 불러야 한다는 등의 근본원리가 확립되었다. 오늘날에 남아 있는 피렌체 모노디의 가장 오래된 예는 카치니의 가곡에서 볼 수 있다.
Camerata 16세기 말에 고대 그리스극의 음악을 본따 피렌체의 바르디가(家)에 모인 작곡가·시인·학자·예술 애호가들의 그룹을 가리킨다. 그 멤버에는 천문학자인 갈릴레이의 아버지 V. 갈릴레이, 시인인 O. 리누치니, 작곡가 J. 페리, E. 카발리에리, G. 카치니 등이 있었다. 그들은 음악보다 말을 중시하여 말과 멜로디의 완전일치, 말은 올바르고 자연스런 억양으로 노래부른다는 등의 이상(理想)을 표현하는 적절한 방법으로서 모노디 양식을 주로 사용하였다.
opera-誕生 중세의 종교적 의식에서 전례극(11-13세기)과 신비극(14-16세기)이라 불리는 두 가지 종교극이 생겼다. 종교극은 원래 예배식의 일부로 그리스도 탄생의 이야기나 부활의 이야기를 드라마로 상연함으로써 시작되었으며, 차차 거리의 광장 등에서 전문적인 배우들에 의하여 상연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음악은 아직 전혀 부수적인 구실밖에 하지 못했다. 16세기에 이르러 신화의 테마를 중심으로 하여 합창과 댄스, 팬터마임 등이 궁정축연에서 상연되었으며(발레) 세속적 연극의 막간에 기악반주로 독창·합창·발레 등을 상연한 데서 '인테르메디오'가 생겼다. 또한 신화나 우화를 제재로 하여 시·기악·성악·댄스·연기를 결합한 형태로 왕후나 귀족을 위하여 상연된 것을 가면극 '마스크'라 불렀다.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걸쳐 마드리갈의 스타일로 작곡되어 즉흥희극(卽興喜劇) 코메디아 델라르 테풍의 제재를 다룬 극음악을 '마드리갈 코미디'라 하며 O. 벳키의 <양피파르나소>(1594년 상연)가 대표적인 작품이다.
敍唱樣式 17세기 초 카치니의 '신음악'에 사용된 기악반주가 따른 성악양식을 말하며, 규칙적인 리듬이나 가사의 반복을 특징으로 한다. '스틸레 라 프레젠타티보'(극장양식)는 역시 17세기 초 오페라 작곡가인 페리나 카치니 등이 채용한 극적 표현양식을 말한다. 언어의 자연스런 리듬·악센트·억양 등을 철저하게 존중하였으나, 한편으로는 음악의 자연스런 흐름이 손상된다는 느낌을 면할 수 없다.
opera-發達 현재 남아 있는 작품 중에서 가장 오래된 오페라는 리누치니가 대본을 쓰고, 페리와 카치니가 각각 작곡하여 1600-1602년에 피렌체에서 상연된 <에우리디체>를 들 수 있다. 페리와 카치니의 두 작품은 어느 것이나 텍스트의 자연스런 리듬, 악센트 및 억양을 충실하게 지키는 피렌체파의 스틸레 라프레젠타티보 양식으로 작곡되어 있어 멜로디 자체에는 독립된 구조가 없다는 점과 끊임없이 반복되는 형식대로의 카덴차, 단조로운 멜로디선 등의 결점도 볼 수 있다.
通奏低音 리만이 바로크 시대를 '통주저음의 시대'라 불렀듯이 낮은음표 밑에 숫자를 달아 화성을 나타내는 방법은 이 시대의 최대 특징이라 하겠다. 기원에 관해서는 비아다나(1564-1627)를 발명자로 생각했던 시대도 있었으나, 반주자가 처음 멜로디에 바탕을 두고 즉흥적으로 화성을 채웠음은 이미 16세기 후반의 종교 합창곡의 오르간 반주에서 볼 수 있다. 이 경우 즉흥연주용의 스코어로서 성악의 최저성부를 쓰고 그 아래에 다른 성부에 생기는 화음을 명시하는 기호를 나타냈다. 이 방법은 17세기에 이르러 모노디스트들이 사용하면서부터 널리 세상에 알려졌다. 통주저음을 쓴 현존하는 가장 오랜 예는 1600년에 출판된 페리의 오페라 <에우리디체(Euridice)>이다. 이와 같은 초기시대에는 반주부가 전적으로 타성부를 화성적으로 강화하는 역할을 했으나 17세기 후반에 이르자 점차로 독립성이 부여되어 장식적인 비화성음이 들어가게 되었다. 한편 독일에서는 18세기 전반에 반주부분에 모방과 그 밖의 대위법적 기법을 채택하여 더욱 독립성을 유지시켜, 마침내는 통주저음의 전성기를 가져왔다.
Baroque 時代-樂器 바로크 시대에는 악기에 많은 개량이 있었으나 원칙적으로는 르네상스 시대에 사용되었던 것의 대부분이 바로크 시대에도 계승되었다고 하겠다. 건반악기로는 하프시코드·클라비코드, 지르바만(1683-1753)이 개량하여 절정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는 바로크 오르간이 있으며, 한편 아직 미숙하기는 하나 피아노에 대한 시도가 이탈리아의 하프시코드 제작자인 크리스토포리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현악기로는 르네상스 시대에서 이어받은 비올 종류에 새로 바이올린이 추가된다. 특히 이탈리아에서는 바이올린사상 고전적인 도시 크레모나(Cremona)의 아마티가(家)와 현재의 표준적 바이올린을 처음으로 만든 스트라디바리, 또는 아마티 문하이며 역시 명장인 구아리네리가(家) 등이 계속 등장하였다.
cantata 실내 칸타타는 극적 요소를 포함한 독창 혹은 중창에 악기의 반주가 따르는 형식이다. 반복하는 통주저음 위에 소리의 멜로디를 두고, 이야기 부분에는 레치타티보풍으로, 서정적인 표현에는 아리오소풍의 텍스처로 작곡되었다. 초기에 해당하는 17세기 전반의 작곡가에는 루이지 로시, M. 체스티, 카리시미 등이 있으나, 이 세기의 후반엔 레치타티보와 아리아를 번갈아 두고 가성부는 화려하고 유려한 멜로디를 갖는 스타일이 되며, 나폴리파 오페라의 거장(巨匠)들, 즉 A. 스트라데라나, A. 스카를라티가 활약했다.
敎會 cantata 18세기 초엽 무렵부터 칸타타의 형식이 독일 프로테스탄트 교회음악으로 전용(轉用)하게 되어 함부르크의 노이마이스터는 성서에서 인용한 가사에 자유로운 서정시를 덧붙였다. 그 이후로 모테토나 교회 콘체르토, 오페라의 영향 등을 각각 채택하여 발전시켰으며, 코랄 칸타타, 시편 칸타타, 격언 칸타타 등으로 나누어진다. J. S. 바흐는 형식과 내용에서 변화가 풍부한 200여 곡의 교회 칸타타를 남기고 있다.
oratorio-基礎 오라토리오라 함은 주로 종교적인 제재로 독창·합창·관현악을 사용하여 무대장치·의상·연기 등을 수반하지 않고 음악만으로 연주되는 악곡형식을 말한다. 오라토리오는 중세 전례극의 아류(亞流)라고 하겠으나 무대묘사를 배제했다는 점과 대사(臺辭)를 읊는 사람이 있다는 점에서 전례극과는 다르다고 하겠다. 16세기 중엽에 로마의 성(聖) 지로라모 데라 카리타 성당의 기도소(祈禱所=오라토리오)에서 수도사 필립포 네리가 오라토리오 집회를 시작하였다. 이 집회에서는 성서의 낭독 외에 문답체의 라우다 영창(詠唱)도 하였는데, 여기서 오라토리오의 형식이 발전하였던 것이다. 초기 오라토리오의 작품으로는 1600년에 오라토리오 집회에서 상연된 카발리에리의 <영혼과 육신의 극>으로, 이 작품은 피렌체파의 모노디 원리를 종교음악에 적용시킨 가장 오래된 예이나, 역시 종교극적인 요소가 많다고 하겠다. 이 밖에 마드리갈 스타일의 합창과 솔로를 포함하는 아네리오의 <아름다운 영혼의 극> 등이 있다.
Latin語 oratorio 북이탈리아에서 발생하여 대사를 읊는 부분이 호모포닉한 스타일의 합창으로 작곡되어 있는 점 등이 특징이나, 뒤에 로마로 중심이 옮겨져 G. 카리시미에서 최성기를 맞는다. 그의 작풍은 <예프테> 등에서 볼 수 있듯이 텍스트에 포함된 관념을 충분히 파악하여 레치타티보와 아리오소의 대화나 코러스로 극의 발전을 진행시켜 적절한 표현방법으로 감동적인 작품을 남기고 있다.
俗語 oratorio 카발리에리 이후 이탈리아어 오라토리오는 17세기 후반에 와서 매우 번성하였다. 스파냐, 체노, 메타스타지오 등이 오라토리오 가사를 개혁한 결과 합창이 중요하지 않게 되고 아리아가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여 관현악 반주가 있는 레치타티보, 명인예적(名人藝的) 기교를 채택하는 등 나폴리파 오페라의 경향을 닮아갔다. 로마·베네치아파의 전통을 잇는 로티, 카르다라나 나폴리파의 스카를라티, 레오, 하세, 욤멜리 등이 당시의 대표적인 오라토리오 작곡가이다.
Italia-opera 1607년에 만토바에서 상연된 C. 몬테베르디(1567-1643)의 <오르페오(Orfeo)>는 종래의 모든 형식과 독자적인 수법을 교묘하게 결합시켜 초기 오페라 중에서 가장 우수한 작품으로 손꼽힌다. 로마에는 란디, 로시 등의 이른바 로마 악파가 있었고, 우화풍(寓話風)의 이야기를 테마로 하여 폴리포닉한 코러스, 명확한 조(調) 조직을 지닌 아리아, 칸초네풍의 서곡을 채택한 것 등을 특징으로 들 수 있다. 베네치아는 1637년에 세계 최초의 오페라 극장인 산캇시아노가 열린 뒤부터 일약 유럽의 오페라 중심지가 되었다. 몬테베르디의 <폽페아의 대관식(戴冠式)>, 카발리에리의 <지아소네>, 체스티의 <황금의 사과> 등을 대표작으로 들 수 있으며 역사나 신화·우화적인 제재를 테마로 하여 그것에 코믹한 에피소드를 가미한 것이 많았다. 유절형식(有節形式), 론도 형식, 다 카포 아리아 등 아리아의 형식이 많아졌다는 점과 레치타티보와 아리아가 형식적으로 분화하기 시작했다는 점, 그리고 대규모의 기계장치를 한 화려한 무대장치 등의 특징을 볼 수 있다.
興奮樣式 1624년 베네치아에서 상연된 몬테베르디의 오페라 <탄크레디와 클로린다의 싸움>은 그가 스틸레 콘치타토라는 새로운 기악의 기법(技法)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여기서 그는 분노나 흥분의 기분을 표현하기 위하여 급속히 반복되는 현의 트레몰로를 써서 새로운 양식의 음악적인 표현법을 개척하였다.
Napoly派 opera 17세기의 말엽부터 18세기의 전반에 걸쳐 로마·베네치아파의 뒤를 이은 나폴리파는 우수한 작곡가들에 의하여 18세기의 전형적인 오페라 악파가 되었다. 이 악파에 속하는 작곡가로는 창시자로 불리는 A. 스카를라티 외에 욤멜리, 피치니, 페르골레시, 트라에타, 파이지엘로, 치마로자, 하세, 그라운 등을 들 수 있다. 그들의 공적은 ABA의 전형적인 다 카포 아리아 형식의 확립, 오케스트라를 수반하는 레치타티보, 즉 레치타티보 아콘파니아토 또는 레치타티보 스토르멘타토, '빠르게-느리게-빠르게'의 이탈리아식 서곡의 채용, 아름다운 목소리를 들려주기 위한 벨 칸토 창법, 카스트라토나 뛰어난 기법을 들려주는 명가수들의 배출 등으로 말미암아 극적인 통일성이 결여될 만큼 음악이 우위에 서게 되었다.
da capo Aria 17세기 말엽부터 18세기에 걸쳐 사용된 전형적인 아리아의 형식이다. A-B-A 세 부분의 구성으로 되었으며 제3부분은 가수가 즉흥적으로 장식을 하는 경우가 많다. B의 부분은 조성(調性)·박자·템포가 A와 대조적인 경우가 많다. A. 스카를라티가 다 카포 형식을 그의 오페라에 채용한 이후로 성악적인 묘기를 발휘시키기 위한 이 아리아는 나폴리파에서 대단한 인기를 가졌으며 모든 극음악(劇音樂)에 쓰였다.
Italia風序曲 17세기 말경 A. 스카를라티의 <다르 마로 일 베네>에 이탈리아풍 서곡이 처음으로 사용된 뒤부터 바로크시대에 애용되었다. 이 서곡은 '빠르게-느리게-빠르게'의 세 구조를 지니며 제1부는 알레그로, 제2부는 그라베, 제3부는 프레스토가 되는 경우가 많다. 이 이탈리아풍 서곡은 신포니아라고도 하며, 고전파 교향곡의 싹이 되었다.
recitativo acconpaniato통주저음 악기의 반주가 붙는 레치타티보를 레치타티보 세코라 하며, 그 밖의 관현악 반주가 있는 것을 레치타티보 아콘파니아토 또는 스트로멘타토라고 한다. 이것은 오페라의 극적 클라이맥스의 장면에서 한층 감동을 깊게 하기 위하여 쓰인다. 후기 나폴리파의 작곡가인 하세, 그라운, 욤멜리, 글루크, 트라에타가 이 형식을 썼으며, 또한 모차르트의 오페라에서도 아리아의 감정을 미리 표현하기 위하여 효과적으로 쓰이고 있다.
France-opera 중세의 목가극이나 궁정의 발레를 토대로 하여, 또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영향을 받아 프랑스 오페라가 처음으로 공적(公的)인 성립을 보게 된 것은 1669년 피에르 페랑과 로베르 캉베르가 왕립음악 아카데미를 설립한 뒤부터였다. 1670년 이후에는 루이 14세의 보호를 받아 륄리가 등장하여, 그 후의 프랑스 오페라의 기초를 확립시켰다. 륄리의 대본을 쓴 키노는 신화나 전설에서 제재를 얻어 전통적인 5막 구성의 양식을 만들었다. 또한 코러스나 발레에 중요한 의의를 부여했으며 화려한 무대장치나 묘사적인 기악곡 등이 그들의 협력으로 탄생하였다. 18세기 중엽에는 그들의 서정비극의 전통을 이어받은 라모가 대위법적인 스타일을 구사하여 코러스를 극적으로 처리하고 오케스트라의 표현력을 확대시켰다.
France風序曲 프랑스풍 칸초나를 말하며, 종래의 칸초나, 교회 소나타 등의 전통을 이어받아 륄리에 의하여 처음으로 확립되었다. 그 예는 그의 발레 <아르시디아느>에서 처음 선을 보였다. 느림-빠름-느림의 구조로 점(附點) 리듬의 장중한 도입부 뒤에 칸초나풍인 알레그로의 모방적인 스타일의 부분이 계속되고 끝에 가서 처음과 같이 완만한 부분이 가해진다. 이 형식은 모음곡(組曲)의 서곡으로서 남아 있으며 바로크 시대에 널리 애호되었다.
和聲論 장 필리프 라모는 1715년 클레르몽 페랑에서 오르간 주자로 일하면서 유명한 이론서인 <화성론>을 저술하였다. 이론가로서의 그는 그 뒤에도 많은 저술을 하였는데, 그 이론의 특징은 3도를 겹친 화음구성, 화음의 자리바꿈(轉回)법칙, 기초 저음에 의한 화음연결 원리의 확립 등이며 그의 이론이 근대의 기능화성법의 기초를 이룩하였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英國 opera 16세기 말에 '마스크'에서 발전하였다. 마스크는 원래 신화나 우화적인 제재를 지녔으며 정교한 무대장치와 대사(臺辭)의 대화, 노래, 기악 등을 포함하고 있었으나 17세기에 들어와서는 대화의 부분을 모노디풍의 스타일로 작곡하거나 간소한 민요풍의 가곡을 삽입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공화제(共和制)의 시대가 되자 디브난트는 이탈리아나 프랑스 오페라의 영향을 받아 최초의 영국 오페라 <로도스의 포위>를 발표하였다 17세기 후반이 되자 M. 로크, J. 브로, H. 퍼셀 등 3인의 작곡가가 영국음악의 황금시대를 이룩하였다. 당시 셰익스피어 극은 기계장치나 노래, 발레, 기악곡 등과 함께 상연되고 있었는데 그들은 그 부수음악을 작곡하였으며 그것이 영국 오페라의 전통적인 형식이 되었다. 퍼셀(1658-1695)은 여러 국민양식을 융합한 영국 최대의 작곡가이며 <디도와 에네아스>는 우수한 독창성과 유기적인 통일을 지닌 구성법, 그리고 그 생생한 극적 표현 등으로 그의 대표작이 되어 있다.
獨逸opera 독일 오페라의 전신은 도덕적이며 종교적인 내용을 지니는 학교극 또는 교훈극인데 최초의 독일 오페라는 1627년에 H. 슈츠가 작곡한 <다프네(Daphne)>이다. 함부르크에서는 독일 최초의 오페라 극장이 1678년에 창설되어 J. 타일레의 <인간의 창조, 타락, 구원>이 상연되었다. 초기에는 슈트룬크, 프랑크 등의 작곡가가 있었으나 이탈리아나 프랑스 오페라가 원어 그대로 또는 번역되어 상연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윽고 J. 푹스나 R. 카이제르 등이 등장하여 참된 국민적인 오페라 활동에 지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함부르크 오페라의 중심적 인물이라고 하는 카이제르는 아름다운 멜로디를 지닌 많은 아리아를 남겼으며 프랑스와 이탈리아 오페라의 영향을 독일적인 개성으로 교묘하게 통일하였다. 그의 뒤로는 J. 마테존을 비롯하여 헨델, 텔레만이 함부르크를 위하여 오페라를 썼으나 1737년에 오페라 극장이 폐쇄되자 오페라는 점차 쇠퇴하고 말았다. 브랑슈바이크에서는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은 쿠서, 그리고 하노버에서는 스테파니가 헨델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바이센페르스에서는 클리거가, 또 빈에서는 J. 푹스가 활약하였다. 뿐만 아니라 드레스덴은 로티나 하세 등에 의하여 독일에서의 나폴리파 오페라의 중심지가 되었다.
獨逸歌曲 17세기의 초기에 일상적인 것을 노래한 서정시나 민요풍의 리트가 새로이 발전되었다. H. 알베르트는 프로테스탄트의 코랄이나 이탈리아의 모노디풍 솔로, H. 샤인의 영향을 받아 통주저음이 있는 다성적인 서정가곡을 탄생시켜 독일가곡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리고 A. 클리거는 소박하고 단순한 민요풍의 유절형식(有節形式)을 써서 예술적 향기가 높은 가곡을 썼다.
Baroque 時代-器樂發達1600년 이전은 성악의 시대라고도 할 정도로 성악의 전성기로서, 기악을 위한 것으로는 간단한 춤곡(舞曲)이나 성악곡의 편곡 정도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바로크 시대에 와서부터는 처음으로 기악이 성악과 자리를 같이하여, 기악형식이나 기악을 위한 새로운 형식이 확립되고 많은 기악곡이 산출되었다. 기악형식의 대부분은 프랑스의 성악곡인 샹송이 이탈리아 사람에 의하여 기악으로 옮겨졌다. 이른바 칸초네 프랑 체제(프랑스풍 칸초네)를 기초로 하여 그것이 모노디의 발명과 결부되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독립된 기악형식으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우선 칸초나 가운데 대비적(對比的)인 부분이 각각 독립하여 개개의 대조적인 악장을 취함으로써 카프리치오가 생겨났다. 이것은 다른 여러 형식에 비하여 대위법적(對位法的)이며 푸가의 전신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 밖에도 모테토가 기악으로 옮겨진 리체르카레, 자유로운 대위법에 의한 즉흥적인 판타지 등도 푸가의 전신이다. 그리고 지로라모 프레스코발디(1583-1643)는 이러한 악곡에서 몇 개로 나뉜 대조적인 부분 사이의 주제를 통일하여 전체를 엄밀하고 유기적인 조직으로 하고 또한 그 주제에 기악적인 음형(音型)을 사용함으로써 모방적인 대위법의 기악곡을 만들어냈다. 그 뒤로 각 부분은 그 내부구조를 충실케 함으로써 그 수효를 줄이고 주제와 그 응답 사이에도 으뜸조(主調)와 딸림조(屬調)라고 하는 기능적인 관계를 확립시켰다. 또 파헤르베르(1653-1706)에 의하여 주제가 들어가는 배분이 개량되고 에피소드가 조직적으로 편성되게 된다. 북독일의 북스테후데(1637-1707)도 토카타와 푸가에서 극적인 요소를 도입하였다. 이리하여 17세기 전반(全般)을 통하여 점차 푸가의 개개 요소가 성립하고, 바로크 시대의 후기에 오자 다른 대위법적 악곡을 누르고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한편 칸초나에 의거하지 않는 악곡형식도 새로 생겼으며 특히 건반악기를 위한 여러 변주곡이 유행하고 저음이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음형, 즉 오스티나토 바스에 기초를 둔 변주곡인 파사칼리아, 샤콘, 그라운도 등이 왕성하게 작곡되었다.
敎會 sonata-成立 건반악기를 위한 칸초나는 주제를 통일함으로써 푸가로 발전하였으나 기악 앙상블 편성에 의한 칸초나부터는 대조적인 각 부분이 각각 독립성을 갖게 되었고 또한 그 수효가 줄어들자 이에 따라 교회 소나타가 성립한다. 이것은 흔히 느림-빠름-느림-빠름의 4악장으로 이루어지며 전체적으로는 장중하고 성실하며 또한 추상적인 형식이다. 이 형식은 1650-1750년의 1세기 동안에 매우 애용되어 지오반니 바티스타 비타리(1644경-1692), 주제페 트레를리(1650경-1708), 그리고 17세기 최대의 걸물인 아프칸제로 코레리(1653-1713)가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다.
室 sonata 이것은 실제로는 일련의 춤곡으로 되어 있으며 보통은 알르망드-쿠랑트-사라반드-지그, 거기에 임의의 춤곡이나 자유로운 구성의 서악장(序樂章)이 부가되거나 또는 되지 않기도 한다. 이러한 두 형식은 여러 악기편성을 위하여 작곡되었는데, 가장 애용된 것은 2개의 바이올린과 콘티누오의 편성이었다. 이것을 악보로 보면 3개의 멜로디선(旋律線)으로 표기되므로 특히 트리오 소나타라 하며 바로크 시대를 통하여 매우 애용된 실내악 형태이다. 이 밖에도 통주저음과 독주악기의 편성으로 된 솔로 소나타를 위한 작품도 남아 있다. 우수한 독주악기인 바이올린을 위한 곡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비올이나 비올라 다 감바, 오보에나 플루트 등을 위한 작품도 남아 있다.
組曲-成立 몇 개의 춤곡(舞曲)을 결합시켜 구성하려는 시도는 이미 16세기부터 있었다. 즉 짝수박자의 것과 3박자의 것, 속도가 빠른 것과 느린 것이 결합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모음곡(組曲)의 초기 발전에 관해서는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은 바가 많으며 영국은 지그를, 에스파냐는 사라반드를, 프랑스는 그 밖의 많은 춤곡과 전체적인 세련성을, 그리고 독일은 알르망드와 모음곡을 통일된 형식으로 만든다는 생각을 상호간에 제공하여 마침내는 단순히 춤을 추기 위한 곡에서 벗어나 양식화(樣式化)된 예술형식으로 나아갔다. 모음곡이 음악형식으로 확립되기 위하여 큰 공헌을 한 사람은 J. 프로베르거(1616-1667)인데, 그는 처음에 알르망드―쿠랑트-사라반드의 3악장 형식을 택했었다. 그 뒤로 지그가 추가되어 17세기 말엽에는 4악장형식이 널리 쓰였다. 연주형태로는 건반악기용의 것이 많았으나 관현악 모음곡, 실내악 편성으로 된 소나타 다 카메라도 이러한 장르에 들어간다.
concerto grosso-發生 바로크 시대의 가장 중요한 관현악 형식으로서 합주협주곡(concerto grosso)을 들 수 있다. 전체는 투티 또는 리피에노라고 하는 관현악부와 콘체르티라고 하는 2-4개의 독주악기군(獨奏樂器群)으로 나뉘며, 양자가 번갈아 나타나 다이내믹한 대비(對比)를 이룬다. 이 명칭이 처음으로 사용된 것은 1698년에 로렌초 그레고리(1700경)에 의해서라고 전해지나, 그 이전에도 이미 코렐리나 알레산드로 스트라데라(1645경-1682)가 이 원리를 바탕으로 한 작품을 남기고 있다. 콘체르티노의 악기군(樂器群)으로서 이탈리아에서는 2개의 바이올린과 콘티누오라는 편성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이것이 곧 트리오 소나타의 편성이다. 한편 독일에서는 독주악기로서 관악기를 즐겨 썼다. 이탈리아 양식에 따른 가장 훌륭한 예로는 헨델의 <콘체르토 그로소집 (集)>이 있으며, 또한 이런 장르에서 최고의 걸작이라면 역시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일 것이다.
獨奏協奏曲 solo concerto 하나의 독주악기와 관현악으로 구성되는 것이 가장 일반적 형태인데, 독주악기에 따라 피아노 협주곡·바이올린 협주곡 등으로 불린다. 합주협주곡과 다른 점은 독주악기가 보다 두드러진 움직임을 보이고 보다 오랜 시간 연주된다는 점이며, 교향곡에 맞먹을 정도의 깊은 세계를 표현할 수 있는 형식이다. 최초의 독주협주곡은 G. 토렐리(1658-1709), T. 알비노니(1671-1750) 등에 의한 것인데 1700년경에 공개되었고 또한 A. 비발디(1678경-1741/42)에 의해 확립되고 대규모의 형식으로 발전하였다. 그의 협주곡은 빠름-느림-빠름의 3악장으로 되어 있으며 각각 그 내부는 일련의 투티와 솔로로 이루어져 있다. 비발디의 형식을 이어받은 사람으로는 F. 제미니아니(1687-1763), G. 타르티니(1692-1770), P. 로카텔리(1693-1764), 헨델, 바흐, G. 텔레만(1681-1767) 등을 들 수 있다.
器樂-敎會音樂 바로크 시대 이전에는 교회에서 연주되는 것이라면 거의가 예외없이 성악이었다. 기악양식과 새로운 기악형식의 성립, 그리고 각 악기 사이의 양식이 구별되기 시작한 이 시대부터 교회를 위한 새로운 기악형식이 생겨났다. 그리하여 신도들이 부르는 코랄을 위한 오르간 전주부에 중요한 의미가 주어져서 코랄 전주곡이라는 독립된 기악곡이 탄생하였다. 이 형식에 큰 공헌을 한 사람은 S. 샤이트(1587-1654)로서 그에 의하여 오르간 음악의 기교적인 면은 완성의 경지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그 이후 J. S. 바흐에 이르는 일련의 독일 오르간 음악의 거장들은 전적으로 코랄 전주곡의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내는 데 전념하였다. J. 파헬벨은 이 새로운 형식에 푸가를 곁들였으며, G. 뵘(1661-1735)은 코랄의 멜로디를 번뜩이는 듯한 섬세한 음표로 장식하였고, 또한 디트리히 북스테후데(1637-1707)는 코랄의 멜로디에서 나오는 소재를 자유롭게 환상적으로 다루는 코랄 판타지를 만들었다.
敎會 cantata-完成 17세기 전후에 이탈리아에서 시작되고 세속적인 제재를 다룬 칸타타는 독일에서는 주로 교회음악에 쓰였으며, 교회 칸타타라고 하는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형식을 이룩하였다. 이를 위해 큰 역할을 한 최초의 사람은 H. 슈츠(1585-1672)이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모노딕한 콘체르타트 양식을 독일 교회음악에 도입하였고 코랄에는 거의 의거하지 않은 자유롭고 극적인 예배음악을 만들었다. 한편 슈츠와 같은 시대의 작곡가 사이에는 코랄을 사용함으로써 교회 칸타타를 보다 풍부하게 하려는 움직임이 보였다. 이러한 사람들로는 M. 프레트리우스(1572-1621)와 J. H. 샤인(1586-1630)을 들 수 있다. 이러한 두 흐름은 바로크 후기에 이르러 작사자(作詞者)인 E. 노이마이스터(1671-1756)가 등장함으로써 가사에 시적인 자유시가 도입되고 또 레치타티보와 아리아가 주목됨에 따라 결정적인 영향을 받아 J. S. 바흐에 의해 위의 모든 것을 집약한 완성을 이룩하게 되었다.
受難曲 복음서에 의거하여 그리스도의 수난을 다루는 수난곡의 역사는 멀리 초기 크리스트교 시대에까지 거슬러올라갈 수 있다. 우선 성주간(聖週間)에 성직자가 복음서를 낭독하는 것으로 시작되며, 12세기에는 각 등장인물을 다른 성직자가 독송양식(讀誦樣式)의 단선성가(單旋聖歌)로 부르는 코랄 패션이 이루어진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전체를 모테토풍의 다성합창곡으로 작곡하는 이른바 모테토 패션이 되며, 바로크 시대에 이르러 새로운 양식이 나타나자 복음서의 인물이나 복음저술가(마태, 누가, 요한, 마가)에는 레치타티보가 사용되고 자유롭게 시작(詩作)을 한 부분이 코랄이나 아리아의 형태로 삽입되어 오라토리오의 형태에 접근한다. 이 패션을 오라토리오 패션이라고 하며, 18세기 초기의 함부르크 악파에 의하여 절정에 달했다. 이 악파를 위해 중심이 되어 작사한 사람은 브로케스(1680-1747), 작곡가로는 헨델, 텔레만, 카이저 등이 있다. 한편 바흐는 부분적으로는 브로케스의 시를 쓰고 있으나 전면적으로는 복음 저술가들의 기술(記述)을 중심으로 하였고, 또 프로테스탄트의 코랄을 더하여 서사적인 동시에 서정적이며 극적인 긴장감을 더한 독자적 경지를 개척하였다.
Bach-Hendel 바로크 시대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1685-1750)와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1685-1759)이 등장함으로써 절정을 이루어 일단 정리되었다고 하겠다. 이들 두 사람은 다른 17세기 초기의 대가들과는 달리 새로운 형식이나 양식을 만든 것이 아니라 기존의 요소를 각각 독자적인 방법으로 자기 것으로 하여 소화 완성시켰다. 이들은 모두가 독일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여러 나라 양식을 받아들여 혼합 또는 융합시켰다는 점에서도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생애나 인격이 매우 다르듯이 음악도 여러 점에서 다르다는 점은 흥미있는 일이라 하겠다. 우선 바흐는 일생를 통하여 국외에 나간 일이 없고 여행이라 해도 기껏해야 함부르크 정도였음에 대하여 헨델은 독일, 이탈리아, 영국에서 그의 일생를 보냈으며 특히 마지막에는 영국에 귀화한 말하자면 국제인이었던 것이다. 바흐는 두 번의 결혼에서 20명이나 되는 자녀를 두었고 끊임없이 신변의 자질구레한 잔근심으로 고민하였음에 반하여 헨델은 결혼도 하지 않고 항상 모험을 즐겼다. 뿐만 아니라 바흐가 독일에서도 이름높은 전통적 음악가의 집안에서 성장하였음에 반하여 헨델에겐 전혀 음악가 조상이 없었으며 또한 그가 음악가가 되려는 뜻을 부친은 완강하게 반대하였다. 인격 면에서도 바흐는 겸손하고 경건하며 때로는 완고했음에 비하여 헨델은 보다 세속적이며 겉보기에 화려하고 귀족적이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두 사람의 차이는 그대로 음악에도 나타나 우리의 흥미를 끈다. 작곡에 쓰는 악곡형식으로서 바흐는 오페라를 제외하고는 당시 있었던 대부분의 형식을 다루었으나 역시 주력은 교회 칸타타나 오르간 작품 같은 교회음악이라고 하겠다. 한편, 헨델의 대부분의 작품은 오페라와 오라토리오였는데, 그의 오라토리오는 매우 인간적이고 현실적인 것으로 말하자면 종교적 제재에 의한 오페라 같은 것이었다. 또 바흐의 작품 대부분이 교회나 궁정에 근무할 때 요청에 따라 쓴 실리적인 것이었음에 비하여 헨델은 틈이 나는 대로 아무런 목적이나 필요성도 없이 작곡하였다는 점도 흥미롭다고 하겠다. 두 사람의 작품을 보면 바흐는 바로 대위법 기술의 정수(精粹)를 다한 사람이나, 그것에만 만족하지 않고 당시에 이미 궁정문화에 침투했던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양식을 스스로 받아들여 칸타타에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도 했다. 거기에는 그가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배운 여러 나라의 온갖 요소가 모두 투입되어 그만이 지닐 수 있는 최고로 천재적인 용광로 속에서 융화되어 일치미(一致美)를 이루고 있다. 콘티누오만으로 반주되거나 또는 여러 개의 악기로 반주되는 독창이나 중창에 의한 이탈리아식 다 카포 아리아, 오페라적인 아리오소와 레치타티보, 가장 초기의 가브리엘 형태에서 바흐 시대의 프랑스식 서곡에 이르기까지의 관현악 신포니아, 협주곡, 트럼펫의 팡파르, 풍요한 장식성을 지니고 성악성부에 얽혀드는 기악의 오블리가토 성부, 복합창형식, 때로는 성악에까지 적용되는 프랑스의 리드미컬한 춤곡, 이러한 것이 독일의 오랜 전통인 코랄과 결부되고 있다. 대체로 바흐만큼 코랄을 훌륭하게 활용하고 또 코랄을 창작의 중심으로 삼기에 정당함을 느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여러 나라 양식의 혼합은 기악 분야에서도 볼 수 있다. 프로베르거의 전통, 쿠프랭의 프랑스 모음곡형식, 쿠나우에 의하여 전해진 이탈리아의 소나타 다 카메라양식, 도메니코 스카를라티의 건반 텍스처(鍵盤書法), 푸가에 있어서도 클라비어 푸가는 이탈리아 협주양식의 영향을 나타내나 오르간 푸가는 북독일 오르간 악파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협주곡 분야에서는 끊임없이 비발디가 모범으로 숭앙되며, 가장 이탈리아의 특징을 나타낸다. 이와 같이 바흐의 작품은 매우 많은 여러 가지 양식을 포함하고, 또한 작곡한 분야도 넓으며 바흐 개인으로서도 시대에 따라 기술적, 내용적으로 현저하게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개인양식을 간단히 종합하기란 곤란하다고 하겠다. 한편 헨델은 그 명성을 거의 그의 극적 작품에서 얻었지만 통주저음을 바탕으로 성립되는 바로크적 협주양식에 기초를 두고 유려한 벨 칸토의 성악적 멜로디와 결부하여 항상 간결·명쾌하며 밝은 표현을 나타낸다. 그의 멜로디에서 벨 칸토 양식은 독일의 내면적인 힘찬 표현과 결부되어 호모포니의 방향으로 향한다. 또한 바로크 특유의 일정한 악형(樂型)의 반복이 사라반드, 쿠랑트, 가보트 등의 리듬에 지탱되면서 단조롭게 고수(固守)되고 있는 경우가 많으며, 바흐에서 볼 수 있는 표현의 길이라든가 다양성은 없으나 그 대신 알기 쉽고 명쾌한 표정을 보여준다. 그는 합창에서도 가장 뛰어난 솜씨를 발휘했다. 특히 후기의 오라토리오에서는 여기에 중점을 두고 있다. 여기서는 그도 역시 대위법 양식을 쓰고 있으나 바흐처럼 엄격하지는 않고 그 내부에 호모포니적인 화성적 경향을 내포하여 감정을 다이내믹하게 고조시키는 수단으로 삼고 있다. 또 협주양식에 특징적인 솔로와 투티, 피아노와 포르테, 레가토와 마르카토, 폴리포니와 호모포니, 장조와 단조 등의 대조를 잘 활용하여 심리적 긴장과 다이내믹한 효과를 추구하고 있다. 이상 독일에서 성장하고 그 전통을 익힌 뒤에 주위 여러 나라의 갖가지 양식을 받아들인 점에서는 모두가 공통되나 그것을 어떻게 혼합시키고 융합하여 자기 것으로 했느냐의 점에서 두 사람은 매우 다른 경지의 높이를 이룩하고 있는데, 그들이 취한 태도에서의 근본적인 차이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점에 집약된다고 하겠다. (1) 두 사람이 모두 폴리포니의 대가이나, 바흐의 음악에서는 폴리포니가 지배적이며 헨델의 음악은 호모포니가 지배적이다. (2) 바흐의 성악곡의 최대 특징은 기악적이란 점에 있다. 즉 그 성악 멜로디는 종종 연주가 곤란할 정도로 기악의 이디엄에 가깝다. 한편, 헨델은 보다 성악적 표현법이 풍부한 작곡법을 택하며, 기악작품에서까지도 본질적으로는 성악의 이디엄 바탕으로 쓰고 있다.
古典派音樂 음악사적으로는 1740년경부터 1810년경까지 주로 빈을 중심으로 한 음악을 말한다. 음악의 특징으로는 주요 3화음을 중심으로 한 기능화성법의 확립, 소나타 형식에서의 제1, 제2주제의 조성을 으뜸음(主音)과 딸림음(屬音)과의 관계에서 파악하여 두 주제의 성격적 대비(對比)를 갖게 했다는 점, 그리고 주제를 유기적으로 전개하는 '주제노작(主題勞作)'원리의 확립, 2관편성의 오케스트라, 소나타 형식에 바탕을 둔 교향곡, 협주곡, 실내악곡 등의 여러 가지 악곡형식을 낳았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바로크 시대와 고전파 사이에서 고전파에의 디딤돌 구실을 한 시대를 전(前) 고전파(1720-1760경)라고 한다. 로코코 음악은 18세기의 화려한 궁정생활을 반영한 것이나 로코코 시대의 경쾌하고 우아한 양식을 갤런트 스타일(gallant style)이라 하며 대위법적인 수법에서 화성적 수법으로의 이행(移行)을 나타내며 섬세하고 우아한 멜로디와 단순한 형식, 세속적이며 사교적인 성격을 지닌 소곡(小曲) 등을 그 특징으로 한다. 이 양식을 전형적으로 나타낸 것이 18세기 중엽 프랑스의 클라브시니스트인 F. 쿠프랭, J. P. 라모, C. C. 다캥 등의 작품이다. 그리고 이 경향에서 18세기 후기에 북독일에서 W. F. 바흐나 C. P. E. 바흐, G. 벤다, J. J. 크반츠 등에 의하여 대표되는 자연스럽고 풍부한 감정표출을 지향한 감정과다양식(感情過多樣式)이 일어났다. 또 1770-1790년경 독일에서 발생한 헤르더, 괴테, 실러 등의 문학운동 슈투름 운트 드랑, 즉 질풍노도양식(疾風怒濤樣式)이 음악에도 영향을 미쳐 디나미크나 멜로디크, 관현악법에 두드러진 대조적 효과를 주었다. 슈베르트, 시타미츠의 기악곡, 라이히아르트, 첼터, 츰시티크 등의 가곡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빈에서는 G. C. 바겐자일, M. 몬 등이 교향곡의 악곡구성 면에서 기초를 이룩하였다. 그리고 만하임에서는 예술을 애호했던 선제후(選帝侯) 카를 테오도르 궁정에서 J. 슈타미츠, 홀츠바우어, 리히터, 카나비히 등이 활발히 활동하였다. 빠름-느림-빠름의 3악장에 미뉴에트를 쓴 4악장의 악곡 구성, 제1, 제2주제의 성격적인 대비(對比), 크레센도, 디미누엔도, 포르테, 피아노 등의 음량변화(音量變化), 관악기의 중시(重視), 장식법 등이 고전파 음악에 대하여 많은 공적을 남기고 있다. 그 밖에 이탈리아에서는 D. 스카를라티, 사키니 등의 쳄발로 소나타, 파리에서는 슈베르트, 고세크, 런던에서는 크리스티안 바흐 등의 전기(前記) 고전파에 활약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성기고전파시대(盛期古典派時代)에는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등 세 거장의 창작활동으로 감히 따를 수 없는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동기(動機)가 악곡구성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며 음빛깔, 리듬, 화성, 디나미크 등의 모든 수단을 통하여 동기에 의미를 부여하며 주제를 이끌어 나아가는 '주제노작(主題勞作)'의 원리가 그들의 보편적인 어법(語法)이 되었던 것이다.
十八世紀-opera 헨델은 영국에 귀화한 뒤 영국에서 이탈리아 오페라의 대표자로 간주되고 있었으나 그는 결코 개혁자가 아니며 기성의 형식을 활용하면서 하나의 정점을 쌓아올리고 있었다. 그의 오페라는 아리아에서 각개의 기분을 순수하게 추출하여 묘사함을 기초로 하고 정밀한 구축적(構築的) 플랜을 가지고 있으면서 이탈리아풍의 벨칸토 양식과 독일풍의 힘찬 내면묘사를 단순·명쾌한 형식 속에서 결합시켜 갔다. 18세기의 이탈리아에서는 나폴리파가 바로 오페라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아리아와 레치타티보의 두 스타일은 분명히 분리되어 레치타티보에서는 극적인 전개가 이루어지며 정서표현은 아리아에서 나타나 있었다. 그 결과로 여러 가지 아리아의 형태가 생겨났으며 아리아가 오페라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고 작품 전체의 구성에서 균형을 잃게 되었다. 또 명인예적(名人藝的)인 기교를 가진 가수가 환영받아 점차로 가수의 기교 과시를 위한 오페라로 변화해 갔다. 시인인 츠에노와 메타스타지오에 의하여 비극적인 스타일의 오페라에서 코믹한 요소가 분리되자 코믹 오페라는 각국에서 각각 독자적인 스타일을 이룩해 나갔다. 즉 이탈리아의 오페라 부파, 프랑스의 오페라 코믹, 영국의 발라드 오페라, 독일의 징슈필 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모두가 흔히 있는 일들을 제재로 하여 단순하고 알기 쉬운 형식의 음악이 곁들여졌다. C. W. 글루크는 가수만능의 이탈리아 오페라에 대항해 음악은 시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고 가수가 기교를 과시하거나 필요 이상의 음악적 장식을 하는 것을 배제하며 표현력이 풍부한 레치타티보나 오케스트라, 또는 코러스 등의 표현력 증대 등으로 단순하고 자연스런 표현 속에서 극적 효과를 높이기 위한 시도를 했다.
opera buffa 츠에노와 메타스타지오의 개혁으로 비극적 스타일로부터 코믹한 요소가 분리되고 그 때까지 인테르메조(幕間劇)로서 긴 오페라의 막간에 상연되었던 짧은 넌센스 코믹이 오페라 부파로서 독립하여 상연되게 되었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전통적인 즉흥희극인 코메디아 델라르테에서 전형적인 등장인물이나 틀에 박힌 사건, 템포가 빠른 동작이나 대화 등이 분명히 영향을 받고 있었다. 오페라 부파의 대본은 흔히 있는 일상생활에서 일어난 일들을 제재로 하였으며 아르레키노라든가 브리게르라, 또는 코메디아 델라르테의 유형적(類型的)인 인물이 등장하고, 악곡형식은 칸초네타나 시칠리아노 등의 민요에서 취했으며, 도약적인 음형이라든가 빠른 소리로 지껄이는 레치타티보 세코, 광대역의 바소 부포, 중창(重唱)이 중요시되는 것 등이 그 특징이라 하겠다. 나폴리파 오페라 부파의 초기에서 전형적인 초기작품은 페르골레시의 <마나님이 된 하녀>(1733)를 들 수 있다. 1750년 이후, 오페라 부파는 세련된 드라마로 발전하는 한편 피치니의 <착한 아가씨>에서 볼 수 있듯이 감상적인 요소마저 삽입하게 되었다. 후기의 나폴리파에서는 <세비야의 이발사>를 작곡한 파이제로는 등장인물의 교묘한 성격묘사와 화려한 색채의 관현악 등에서 특히 뛰어나며 모차르트에게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유명하다. 아름다운 멜로디와 경쾌하고 자연스런 줄거리를 지닌 <비밀결혼>의 치마로자도 나폴리파의 종말을 장식한 대표적인 작곡가이다.
opera comique 프랑스의 오페라 코미크는 보드빌이라고 하는 간단한 속요(俗謠)를 혼합시킨 보드빌 코미디에서 생겼으며 극시인인 샤를 파바르에 의하여 수준 높은 코미디로 발전했다. 1752년 페르골레시의 <마나님이 된 하녀>가 파리에서 상연된 뒤부터 이탈리아와 프랑스 음악의 미(美)의 우열에 대해 유명한 '광대 논쟁(buffon論爭)'이 일어났다. 1750년 이후 J. J. 루소의 <마을의 예언자>를 효시로 하여 오페라 코미크는 독자적인 장르로서 발전, 그 뒤 두니, 피리돌, 몽시니 등의 작품이 속속 등장하였다. 그것들은 농민의 생활을 서정적으로 다룬 것을 테마로 하였고 앙상블의 중시(특히 곡의 끝을 유절형식의 노래에 리프레인을 붙여 연결하는 보드빌 피날레), 오케스트라의 교묘한 정경묘사가 특색이다. 그리고 그레트리가 간결한 구성, 서정적인 멜로디 등으로 18세기 오페라 코미크의 대표적 작곡가가 되었다.
Singspiel 징슈필은 독일어로 서로 주고 받는 대사(臺辭)에 서정적인 노래가 곁든 민속적인 오페라로서, 1743년에 영국의 발라드 오페라 <악마의 복수>가 독일어로 번역, 상연된 데에 자극받아 A. 힐러가 대본작가인 바이세와 협력하여 1770년에 <사냥>을 작곡하여서 새로운 징슈필의 형태를 성립시켰다. 그들이 대표하는 북부독일의 징슈필은 전원적(田園的)이고 서정적, 공상적인 코미디의 형태로서 민요 같은 단순한 멜로디의 음악을 지니나, 힐러 뒤로는 G. 벤다가 수식없는 그대로의 대사(臺辭)에 오케스트라가 딸린 '멜로드라마의 형식'으로 <낙소스의 아리아도네>를 작곡하였다. 이 형태가 뒤에 베토벤의 <피델리오>나 베버의 <마탄(魔彈)의 사수(射手)> 등에도 영향을 준 바 있다. 남부독일에서는 1778년, 요제프 2세의 명에 의하여 국민 극장에서 징슈필이 상연되었으며, 이 무렵에 디터스돌프의 <의사와 약사> 등 대표적인 작품이 작곡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전통이 모차르트의 <후궁(後宮)에서의 유괴(誘拐)>나 <마적(魔笛)> 등의 명작을 낳았던 것이다.
Berlin 歌曲樂派 베를린 가곡악파는 1753년 베를린의 변호사이며 작곡가인 G. 크라우제의 <송가(頌歌)와 멜로디>로 시작되었다. 이 곡집에는 크반츠나 C. P. E. 바흐, H. 그라운들의 가곡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제1기의 베를린 악파에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전속 음악가들, 즉 E. 바흐, K. 그라운, F. 벤다, W. 마르푸르크, J. 키른베르거 등이 있었다. 크라우제는 단순한 형식을 지닌 민요를 바탕으로 한 리드의 창작을 단순한 형식을 지닌 민요를 바탕으로 한 리드의 창작을 주장하였다. 이 시기의 리드는 독립된 클라비어 반주부를 갖고 있었으나 E. 바흐는 게레르트의 종교시집을 작곡하여 우수한 작품을 남겼다. 제2기 베를린 악파에서는 J. 슐츠, 라이히아르트, 첼터 등이 대표자이나 그들은 크로프슈토크나 괴테, 실러 등 당시의 뛰어난 시에 곡을 붙여 리드를 간결한 형식에 의한 국민적인 가곡으로 승화시켰다.
Christoph Willibald Gluck(1714-1787) 글루크는 오페라 세리아 분야에서 18세기 최대의 작곡가라 하겠다. 1736년, 빈에서 로브코비츠공(公)의 실내악 연주자가 되어 그 곳에서 이탈리아 오페라를 많이 들을 기회를 얻었으며, 또한 다음해 이탈리아에서 사마르티니(G. B. Samartini, 1700-1775)에게 사사(師事)하여 최초의 오페라 <아르타세르세(Artaserse)>를 발표한 이후 이탈리아 오페라 작곡에 의욕을 갖게 되었다. 1752년부터는 빈을 중심으로 활약하여 그 무렵부터 몇 개 프랑스 오페라 코미크의 영향을 받은 작품을 남기고 있다. 1761년부터는 대본작가 칼차비지(Ranieri Calzabigi)와 협력하여 <오르페우스(Orfeus)>, <알체스테(Alceste)> 등을 작곡하였으나 이탈리아의 오페라 부파의 인기에 눌려 별로 호평을 받지 못하였다. 1774년, <아우리스의 이피게니아>가 파리에서 대성공을 거두고 프랑스 오페라풍으로 제작한 <오르페우스> 등이 그 뒤를 이었다. 당시 파리 오페라계에는 글루크를 미는 프랑스파와 피치니의 이탈리아파 사이에 대논쟁이 일어나 두 사람은 <아우리스의 이피게니아>를 작곡하여 실력을 겨루었으나 결국 글루크의 실력이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글루크는 이처럼 이탈리아 오페라, 프랑스 오페라, 독일 오페라 등이 지니는 각 양식을 융합하여, 가수에 편중하는 오페라에서 '음악을 대본에 봉사케 하는 오페라'로의 개혁을 이룩하였던 것이다.
Gluck-歌劇改革 1769년에 빈에서 출판된 <알체스테>의 스코어에 글루크 오페라에 대한 새로운 이상이 명백히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그는 "시는 음악표현의 기초가 되며 음악은 시에 종속한다. 가수의 기교 과시나 필요 이상의 음악적 장식을 가능한 한 배제하여 단순한 기법을 쓸 것. 서곡을 극 전체의 분위기와 밀접하게 관계지을 것" 등을 강조하고 있다.
前古典派 18세기 중엽, 바흐와 헨델에 의하여 완성된 바로크 시대에서 하이든이나 모차르트에 의한 새로운 정점이 이룩되기까지인 1720-1780년경의 시기는 과도적인 성격이 현저하기 때문에 전고전파 또는 초기 고전파라고 부른다. 고전파 음악의 발달은 주로 기악분야에서 이루어졌으나, 이 시기에는 소나타가 교향곡이나 실내악에서 알레그로-안단테-미뉴에트(트리오가 있는 것)-알레그로의 4악장으로 된 구성으로 점차 고정되는 경향을 볼 수 있다. 이 가운데 제1악장은 소나타 형식의 성장과 함께 비중이 증대하였고 제3악장에는 바로크 시대의 춤곡형식이었던 미뉴에트가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오케스트라의 분야에서는 종래 통주저음 악기로 쓰이던 쳄발로가 없어지고 현악기를 주체로 하는 근대적인 2관편성의 전형(典型)이 형성되었다. 이에 따라 합주기술이나 음량변화, 악기법 등에 새로운 표현이 개발되었다. 건반음악에서는 쳄발로나 클라비코드에서 피아노에로의 이행이 있었으며 또한 이 시기에는 고전주의 음악을 형성하는 3개의 기본적 표현이 나타났다. 즉 제1은 음악상의 로코코양식이라고도 할 수 있는 갤런트 양식(gallant style), 제2는 감정과다양식(感情過多樣式), 제3은 역시 같은 이름의 문학운동에 해당되는 것으로 생각되는 이른바 슈투름 운트 드랑(疾風怒濤時代)이다. 이와 같은 새로운 양식은 널리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만하임, 베를린, 파리, 런던 등에서 자라났다.
gallant style 문화의 중심이 바로크 시대의 교회에서 왕후귀족의 살롱으로 옮아감에 따라 음악의 양식도 장중하고 견고한 바로크 스타일에서 로코코풍의 경쾌하고 우아한 것으로, 대위법적 작곡에서 화성중심의 음악으로 변천하였다. 이 양식은 17세기에 프랑스의 류트나 클라브생의 음악에서 발단하여 18세기 중엽에는 독일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대표적인 작곡가로 쿠프랭(F. Couperin, 1668-1773), 피셔(J. Fischer, 1665-1746), 텔레만(G. Teleman, 1681-1767) 등을 들 수 있다.
感情過多樣式 1750-1780년경, 북부독일의 작곡가를 중심으로 일어난 '진실하고 자연스런' 감정표현을 추구하여 생겨난 로맨틱한 색채가 짙은 양식, 특히 C. P. E. 바흐의 동적 대조(動的對照)나 칸타빌레한 멜로디가 풍부한 작품을 말한다. 주요 작곡가로는 에마누엘 바흐(1714-1788), 쿠반츠(1697-1773), 벤다(1722-1795), 라이히아르트(1752-1814) 등이 있다.
疾風怒濤 본래는 1770-1790년경에 일어난 문학운동. 헤르더, 괴테, 실러, 클린거들이 루소의 '자연으로'라는 운동의 결과 유희적 감정이나 장식이 많은 로코코 양식에 대항하여 생겨난 주관성이 짙은 문학양식. 이 운동에 비할 음악분야의 경향은 악기법이나 음량변화의 대담한 대조효과와 강렬력하고 도약적인 멜로디의 흐름 등에서 볼 수 있다. 슈베르트(1720-1768), C. P. E. 바흐 등의 작품, 또는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의 초기작품에까지 그 흔적을 엿볼 수 있는 한 사조(思潮)로서의 음악양식.
古典派-sonata 소나타가 순환형식으로 알레그로-안단테-미뉴에트(트리오 붙음)-알레그로의 4악장으로 고정된 것은 약 1770년의 일이다. 이것은 급·완·급의 3악장으로 되는 나폴리파의 심포니아파에 바탕을 두고 여기에 마지막부터 두 번째에 바로크 모음곡 가운데의 미뉴에트가 곁든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이와 같은 고전파의 소나타에서는 제1악장이 소나타 형식을 취하여 소나타의 중핵(中核)을 형성한다. 제2악장은 템포가 완만한 리트 형식이며 제3악장의 미뉴에트는 이미 바로크 시대의 무용의 성격을 잃고 A-B-A(B는 트리오라 한다)의 3부형식을 취하고 있다. 끝악장은 급속한 템포에 의한 론도 형식과 소나타 형식으로서 소나타의 악곡 전체를 마무리짓는다. 4악장으로 된 고전파 소나타를 확립시킨 사람은 교향곡 분야에서는 만하임 악파의 슈타미츠, 오스트리아의 바겐자일, 몬, 슈레거, 시타르츠아 등이다. 이에 반하여 베를린 악파는 3악장제를 고집하였다. 소나타는 교향곡뿐만 아니라 고전파의 실내악이나 클라비어곡의 조구성(組構成)이 되기도 했다.
sonata 形式 소나타 형식은 고전파의 기악곡에서 형성되어 낭만파를 거쳐 현대에 이르고 있는 악곡형식이다. 이것은 교향곡, 소나타, 실내악의 빠른 제1장에 거의 예외없이 쓰이는 외에 제2악장이나 제4악장에도 쓰이는 경우가 있으며 이 시기의 협주곡 제1악장의 대부분은 바로 이 형식의 변형이다. 소나타 형식은 18세기 초에 여러 가지의 전통적 형식, 그 가운데에서도 모음곡의 댄스 악장, 다 카포 아리아, 콘체르토 그로소, 나폴리파의 오페라 심포니아 등에서 볼 수 있는 형식 및 양식상의 특징을 병합하면서 나타났다. 우선 훗날 소나타 형식의 골격이 되는 ||:A:||:BA:ll (2부·3부형식)의 형태는 1720년경 모음곡의 악장이나 기타 작품에서 확립되었다. 한편 대조(對照)라는 소나타 형식에서의 중요원리는 콘체르토 그로소의 투티와 솔리의 교체에 의한 대비적(對比的) 스타일에서 볼 수 있다. 이 원리를 모음곡 악장의 형식적 골격으로 사용한 것이 나폴리파의 오페라 심포니아이다. 소나타 형식은 교향곡의 제1악장에서 그 전형(典型)을 볼 수 있으며 제시부(提示部)·전개부(展開部)·재현부(再現部=코다)로 구성된다. 제시부에서는 으뜸조의 제1주제와 딸림조의 제2주제라는 여러 악주(樂奏)가 제시되고, 전개부에서는 이러한 것들이 동기적(動機的)으로 분할되어 여러 조성(調性)으로 인도되어 발전한다. 재현부는 제1부의 재현이나, 제시부에서의 딸림조 제2주제는 으뜸조로 환원되어 통일을 꾀하고 있다. 종결부는 독립적인 길이를 가진 것과 재현부에 흡수되는 것이 있다.
地域-古典派樣式 서구음악사에서 하나의 신기원을 이룬 고전파양식의 발전을 위해 다양하고 활발한 움직임을 보인 음악가들을 지역적으로 살피면 대강 아래와 같다고 하겠다.
Italia 새로운 고전파양식의 성립에 주요한 구실을 한 사람으로는 우선 이탈리아의 오페라나 오페라 심포니아, 합주곡 및 호모포닉한 선율이나 반주형을 지닌 클라비어 음악을 들 수 있다. 특히 욤멜리(N. Jommelli, 1714-1774)는 오페라에서의 표정 풍부한 성악양식을 관현악에 전용(轉用)하여 기악분야에서 새 국면을 개척하였다. 실내악이나 관현악 분야에서는 부드럽고 풍부한 울림의 페르골레시(1710-36)의 선율법이나 소나타 형식에서 2개 주제에 대조성을 부여한 사마르티니(1704-74), 교향곡의 제1악장 형식에 명확한 부분구성을 부여한 카프아 등의 업적이 있다.
Austria 지역적으로 이탈리아와 북부독일을 잇는 중개점에 있어 하이든이나 모차르트와는 가장 밀접한 유대를 지니고 있다. 일찍이 1704년에 몬(1717-1750)이 미뉴에트를 포함한 4악장으로 된 교향악곡을 작곡한 바 있다. 그 밖에도 교향곡의 각 구성요소의 충족을 촉진시킨 작곡가로서 바겐자일(1715-77), 가스만(1729-1774) 등이 있다.
Manheim 만하임 악파라고도 하며, 팔츠바이에른의 선제후(選帝侯) 카를 테오도르 아래에서 활약한 사람들이 대표적이다.요한 슈타미츠(1717-57)를 지휘자로 하는 우수한 관현악단을 조직하여 연주와 관현악곡의 작곡 등 양면에 걸쳐 공헌하였다. 작곡상의 업적으로는 교향곡의 제3악장에 미누에트를 둔 4악장 구성의 확립, 크레센도나 피아노와 포르테의 대비 등 다이내믹 효과의 추구, 관악기(특히 클라리넷)의 중용(重用) 등이 특필된다. 연주 면에서는 정연한 운궁법(運弓法), 정확한 음량변화 등을 하여 온 유럽에 그 명성을 떨쳤다.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요한 슈타미츠(1717-1757), 홀츠바우어(1711-1783), 리히터(1709-1789), 필츠(1730-1760) 등이 있다.
Berlin 북부독일 악파라고도 하며 프리드리히 대왕의 궁정을 중심으로 활약하였다. 주작곡가로는 우수한 클라비어 음악을 저술한 대 바흐의 둘째아들 C. P. E. 바흐(1721-1783), 기악곡의 쿠반츠(1697-1773), 그라운 형제(1702/03-1759) 등을 들 수 있다. 보다 젊은 세대로는 피아노 반주에 의한 가곡을 작곡한 슐츠(1747-1800), 라이히아르트(1752-1814), 첼터(1758-1832)가 있다.
Paris·London 프랑스에선 슈타미츠의 교향곡이 즐겨 연주된 외에 고세크(1734-1829)가 있다. 런던에서는 일찍부터 시민계급에서 음악회가 개최되었다. 클라비어 음악 및 교향곡의 대표적 작곡가로서는 크리스티안 바흐(1735-1782)가 있다. 또 바흐-아벨 연주회로 알려진 아벨(1723-1787)도 있다.
Wien 古典派 전고전파(前古典派)의 업적을 바탕으로 하여 빈을 중심으로 창작활동을 하여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에 의하여 그 절정을 이루었다. 그 특징으로는 주요 3화음을 중심으로 하는 기능화성의 확립, 소나타 형식에서의 제1주제와 제2주제를 조적(調的), 성격적(性格的)으로 대비(對比)시켜 포착했다는 점, 주제 재료를 유기적으로 전개시키는 주제노작(主題勞作) 원리의 확립, 2관편성에 의한 오케스트레이션의 완성 등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양식원리(樣式原理)를 바탕으로 하여 이 시기에는 교향곡 외에 협주곡, 실내악도 현저한 발전을 보였다.
協奏曲 바로크 시대의 협주곡 리토르넬로 형식은 고전파의 시대가 되면서 점차로 소나타 형식으로 대체되고 반주인 현악합주도 관현악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급·완·급의 3악장 형식과 투티와 솔로가 교체하는 스타일은 바로크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다 협주곡에서의 소나타 형식의 특징으로는 제시부에서 처음에 관현악이 두 주제를 원조(原調) 그대로 나타내고, 이어 솔로를 주체로 하여 본래의 제시(이번에는 제2주제가 딸림조로)가 반복된다. 또 재현부가 끝나고 코다에 들어가기 전에 관현악이 쉬고 솔로의 자유로운 카덴차가 삽입된다.
室內樂 실내악은 바로크 시대의 통주저음 양식이 쇠퇴함과 동시에 종래의 트리오 소나타(바이올린2, 첼로와 통주저음 악기)를 주체로 하는 합주체에서 바이올린2·비올라·첼로로 이루어지는 현악4중주로 중심이 바뀌었다. 이 형식은 하이든에 의하여 확립되었으나 그는 1781년의 <러시아 4중주곡>에서 소나타 형식의 주제조작(主題操作) 원리를 실내악 분야에서도 확립하였음을 공표하고 있다. 모차르트는 독자적인 색채감각이나 피아노의 숙달로 오히려 현악 5중주나 피아노를 포함한 중주(重奏)에 이채를 띠었다. 그러나 고전파의 실내악을 예술적 최고봉으로 이끈 사람은 바로 베토벤이었다. 그는 후기의 현악4중주곡에 소나타 형식과 함께 변주곡이나 푸가, 코랄의 수법까지 흡수하여 형식적 통일을 꾀함과 동시에 형식을 탈피하여 깊은 주관적 세계에까지 이르렀다. 이 밖에도 현악 3중주, 피아노가 있는 실내악에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Joseph Hydn 요제프 하이든(1732-1809)은 18세기 후반의 빈 고전파에서 중심인물 중의 한 사람으로 주로 교향곡이나 현악4중주곡 등의 기악형식의 완성에 공헌하였다. 또한 만년의 2개의 오라토리오나 미사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볼 수 있다. 하이든의 작곡활동은 외적, 내적인 특징에 따라 대략 세 시기로 구분된다. (1) 1760년경까지(빈), (2) 1760-1790(아이젠슈타트-에스테르하지), 1790년 이후(빈-런던-빈) (1) 가장 초기의 작품에서는 특별한 예술적 개성은 볼 수 없으며 오히려 토착적(土着的)인 전통과의 결합(디베르티멘토나 그 밖의 오락음악)이 현저하다. (2) 1761년, 헝가리의 에스테르하지 후작 가문의 부악장으로 취임하자 초기의 교향곡군이 탄생되었다. 1761년의 표제가 붙은 3부작(제6번 <아침>, 제7번 <낮>, 제8번 <저녁>)으로 대표되는 초기의 교향곡에는 바로크의 흔적이 역력하다. 그러나 1770년경의 이른바 '슈투름 운트 드랑'기(期)에 이르자 급격히 표현력이 심화(深化)하여 클라비어 소나타, 현악4중주, 교향곡 등에 현저한 발전의 자취가 새겨진다. 종래의 클라비어 소나타는 디베르티멘토풍의 경쾌한 성격이었으나 하이든은 에마누엘 바흐의 '감정과다양식'의 풍부한 표현력이나 클라비어 협주곡의 견고한 구성을 소나타에 이식하여 소나타를 교향적인 것으로 하였다. 현악4중주도 디베르티멘토풍의 성격을 배제, 4악장 구성을 원칙으로 하여 OP17(1771)에서 고전파의 현악4중주 구조와 정신이 확립되었다. 여기서는 푸가 형식이 악장에 채택되고 있다. 그리고 이 시기의 교향곡에도 새로운 양식에 대한 의욕을 볼 수 있으며 단조(短調)의 채용, 힘찬 리듬적 충동에 의한 표현의 심화가 꾀해지고 있다. 1781년은 하이든이 전적으로 새로운 특별한 방법으로 작곡하였다고 자칭한 <러시아 4중주곡>이 소나타 형식의 주제조작 원리를 실내악의 분야에도 확립한 것으로 의의가 깊다고 하겠다. 1783-1784년의 교향곡(제76번-81번)에는 모차르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되는 특징이 보이나, 한편 모차르트도 1782-1785년에 작곡한 6곡의 현악4중주곡을 하이든에게 바쳐 선배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다. 1780년대 후반에는 하이든의 명성이 전유럽에 퍼져 외국으로부터의 작곡의뢰가 늘어났다. 그리고 1786년에는 파리의 관현악단 콘세르 드 라 로쥬 올람피크로부터의 교향곡 6곡(제82번-87번)의 작곡의뢰를 받았다. (3) 1790년대에는 에스테르하지후(候)가 사망하여 후작가의 악단은 해산되고 하이든은 다만 명예악장으로서 이름만을 남겼을 뿐 빈으로 옮겨졌다. 자유의 몸이 된 하이든은 영국의 흥행사 잘로몬의 권유로 1791-1795년 사이에 두 번에 걸친 영국여행을 하여 영국의 대편성 오케스트라를 위하여 12곡의 교향곡(제93번-104번)을 작곡하였다. 이는 하이든의 교향곡 창작의 발전의 정점 동시에 고전파 교향곡의 금자탑이 아닐 수 없다. 런던에서 빈으로 돌아온 뒤로 하이든은 교향곡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고 런던에 와 머무르며 헨델의 오라토리오에 자극을 받아 2개의 오라토리오 <천지창조>, <4계(四季)> 및 6개의 대규모 미사곡의 작곡에 몰두하여 만년의 원숙한 경지를 성악분야에 구축하였다. 여기서 하이든은 청년시대의 바로크 음악 경험과 독자적인 교향적 사고(交響的思考)와의 참된 통일을 달성하고 있다. 음악사에서 하이든의 업적은 교향곡이나 현악4중주를 통하여 추구된 소나타 형식의 완성에 집약되겠으나 그의 많은 기악곡과 오페라에 나타나는 민족성이나 부포적 성격이 그의 작품에 독특한 매력을 보이고 있다는 점도 경시할 수는 없다. 더구나 만년의 대규모적인 성악곡은 고전파의 표현범위에서 다시 낭만주의의 길마저 암시하고 있다.
Wolfgang Amadeus Mozart 하이든보다 24세나 젊었음에도 불구하고 하이든과 어깨를 나란히 할 뿐만 아니라 서로 상보(相補)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더구나 모차르트는 교향곡이나 현악4중주 등 순수기악 영역에만 머무르지 않고 기악과 성악, 종교와 세속을 가리지 않고 전작품 분야에 예술적 완성을 가져왔다. 모차르트의 유년기는 궁정 바이올리니스트인 부친 레오 폴트(1719-1787)의 적절한 교육으로 클라비어에 숙달하여 유럽 각지를 일찍부터 순회연주하였다. 당시 유럽의 각지에서는 여러 가지 새로운 양식적 시도가 있었으므로 모차르트의 여행은 그러한 새로운 예술적 동향에 직접 접할 기회를 부여받고 그의 창작능력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이처럼 그가 일찍부터 부친의 천재교육과 유럽의 연주여행에서 직접 체험하고 또한 받은 중요한 영향을 살펴보면 대강 아래와 같다. ( 잘츠부르크 음악. 어린 모차르트가 출생지에서 받은 영향은 그의 예술적 소질을 형성하였다. 잘츠부르크의 음악은 결코 깊이가 있다고는 할 수 없으나 우아함이 감도는 경쾌감이 특징으로서, 이 지방의 작곡가 에이베를린이나 요제프 하이든의 동생 미하엘의 음악에 기조를 이룩하기도 했다. ( 파리의 음악. 1763-1764년, 파리에서 알게 된 슈베르트, 에카르트(Eccard), 르그랑(Legrand)의 영향을 받아 당시 파리를 휩쓸던 우아하고 경쾌한 클라브생 음악에서 감명을 받았다. ( 크리스티안 바흐. 1764-5년의 체재 중, 대(大) 바흐의 막내아들 크리스티안의 교향곡에서 배운 바가 많았다. ( 이탈리아 음악. 1770년의 이탈리아 여행 중, 마르티니 신부로부터 직접 지도를 받아 엄격한 대위법 음악에 대한 흥미를 더하였다. ( 전(前)고전파의 작곡가들. 1773년 여름의 빈 여행에서 하이든, 바겐자일, 몬 등의 견고한 구성미의 음악에 결정적인 자극을 받아 독일음악을 재인식하였다. ( 갤런트 양식. 미하엘 하이든의 우아한 작풍에 감명을 받고 모차르트의 선천적인 음악적 기질과도 어울려 우아한 표현이 개화하였다. ( 만하임과 파리. 당시 유럽에서 가장 음악이 번영한 곳으로서, 만하임 오케스트라의 우수한 관현악 기법과 파리의 오페라 코미크나 글루크의 오페라 세리아에서 극적 표현을 습득하였다. ( 요제프 하이든, 모차르트가 1781년 빈에 정주한 뒤부터 직접적인 교류에 의하여 한층 그 유대가 강해졌으며 그는 1782-1785년에 걸쳐 작곡한 6곡의 현악 4중주곡 <하이든 4중주곡>을 하이든에게 바쳐 감사를 표하였다. ( 바로크 음악. 반 스비텐 남작과 알게 되어 바흐나 헨델 등 바로크 대가(大家)의 음악에 접하는 기회를 얻어 엄격한 폴리포니의 기법과 정신 면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모차르트는 천재적인 피아니스트로서 음악가의 경력을 시작하였으므로 당연히 작곡도 피아노 분야에서 시작되었으며 평생을 두고 이 악기를 사랑하였다. 클라비어계는 당시 아직도 낡은 형태의 건반악기에서 새로운 피아노로의 과도기였으나 여기서 모차르트는 낡은 스타일을 연상시키는 갤런트 양식에서 베토벤적인 강력한 에너지를 응집시킨 작품까지 폭넓은 표현을 개척하였다. 전통적인 세레나데나 디베르티멘토 등의 기회음악(機會音樂)은 당시 아직도 왕후귀족의 오락으로서 인기가 있었으나 모차르트의 초기에는 이러한 장르에서의 최량의 작품이 나왔다. 물론 하이든이 철저하게 추구했던 교향곡이나 실내악 등 순수기악의 영역에도 그는 중요한 공적을 남기고 있다. 모차르트는 형식 면에서의 혁명가는 아니었으나 특히 빈 시대의 6곡, 그 중에서도 최후의 3대 교향곡(제39, 40, 41번 <주피터>)에서 고전교향곡의 완성을 이끌어 베토벤에의 길을 개척하였다. 그러나 모차르트의 이와 같은 다채로운 재능이 유감없이 발휘된 장르는 무엇보다도 오페라의 영역일 것이다. 그 중에도 빈에 정주 후 작곡한 <후궁으로부터의 도주>에서 <마적(魔笛)>에 이르는 오페라 부파와 징슈필의 계열에서 폭 넓은 인간표현과 깊은 독자적 표현을 확립하였다. 대체로 예술세계에서의 창조자는 형식이나 어법 면에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는 급진적인 혁명가와 이러한 형식이나 어법을 적용하고 순응하는 곳에서 독창적 정력을 발휘하는 추고자(推敲者)와의 두 타입이 있겠다. 18세기 고전파의 쌍벽인 하이든이 전자에 속한다면 모차르트는 후자의 전형이라 하겠다
Ludwig van Beethoven 베토벤(1770-1827)은 시대적으로는 하이든, 모차르트에 가깝고 대체로 그들과 더불어 빈 고전파의 3대 거장으로 손꼽힌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가 신시대의 선구자인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일생을 거의 전속악사로만 보낸 하이든이나 봉건적 질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모차르트에 비하면, 베토벤은 프랑스 혁명에 의한 해방적 시대를 배경으로 하여 선천적인 강인한 성격과 도덕적 신념으로 홀로 감연히 세계에 맞섰다. 그는 외적 상황에 속박되지 않았던 최초의 참된 자유인이었다. 베토벤의 전작품은 보통 작곡연대에 따라 3기로 나눌 수 있다. 초기는 대체로 하이든이나 모차르트의 전통에 의한 영향이 짙다. 그러나 제1, 제2교향곡과 피아노 소나타 제8번 <비창(悲愴)>에 넘쳐흐르는 강렬한 충동은 베토벤적인 웅대한 세계를 엿볼 수 있게 하고 있다. 이 힘은 중기의 바이올린 소나타 <크로이처>나 제3교향곡 <영웅> 등에 훌륭하고 자유분방하게 실현되었다. 더구나 이 시대의 작품은 절망적인 귓병(耳疾)에 대한 그의 초인간적인 자기극복의 대상(代償)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교향곡의 영역에서는 제3에서 제8까지의 압도적인 기념비가 피아노 소나타에서는 각각 강렬한 개성을 주장한 제14번 <월광(月光)>, 제21번 <발트슈타인>, 제23번 <열정>, 제26번 <고별> 등이 분류(奔流)가 되어 넘쳐흘렀다. 그리고 실내악의 분야에서는 <크로이처> 외에 피아노 3중주곡 <대공(大公)>, 현악 4중주곡 <라즈모프스키> 등 그 수효는 매우많다. 이 10년 동안에 베토벤은 거대한 작품의 산맥을 정복한듯이 보였으나 한편 후기에서는 원숙경(圓熟境)의 배후에 철학적 명상에 이끌린 새로운 세계가 전개된다. 피아노 소나타 제29번 <해머 클라비어>는 거인적인 규모 속에 비합리의 세계를 소화시키고 있다. 대작 <장엄 미사> 및 제9교향곡에는 형식상의 수많은 새로움과 함께 '평화'와 '환희'에의 기원(祈願)을 노래 불렀다. 또한 베토벤은 최후의 힘을 기울여 현악 4중주곡(제12-16번)을 완성하였다. 여기서 그는 인간적 고뇌를 달관한 체념의 세계에 이르고 있다. 베토벤은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전형이 될 수 있는 작품을 남기고 있다. 유일한 오페라 <피델리오>는 정조가 굳은 용감한 아내가 모든 고난을 극복하여 남편을 구출한다는 부부애의 이상을 그린 것으로, 음악의 교향적 수법과 내용의 진실한 점에서 매우 독일적이라 하겠다. 베토벤의 음악적 진수가 가장 명확하게 주장된 것은 9개의 교향곡이다. 하이든이나 모차르트의 교향곡에는 3악장과 4악장제가 혼재하고 있었으나, 베토벤의 음악에서는 4악장으로 통일되어 있으며 미뉴에트도 스케르초 내지는 스케르초적 성격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관현악은 2관편성을 원칙으로 하였다. 제3교향곡 <영웅>은 규모로나 내용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하여, 그 뒤의 교향곡 계열의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제5는 '운명의 동기'라고 하는 4개의 음이 전개하는 고전적 형식의 이상(理想)이다. 제6번 <전원>은 음화(音畵)라기보다 오히려 감정의 표현이며, 후의 표제음악(標題音樂)의 선례가 된다. <제7교향곡>에서는 전곡을 일관하여 리듬 동기가 구성원리로서 작용하고 있다. 최후의 제9교향곡(합창 붙임)은 마침내 순수기악의 테두리를 넘어 성악을 교향곡 속에 합류시켰다. 베토벤의 32곡의 피아노 소나타는 바흐의 24곡으로 된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이 '구약성서'라고 불리는 데 대해 '신약성서'라고 불리는 영예를 지니고 있다. 이 32곡은 또한 베토벤의 예술적 일생에서 가장 면밀한 이력서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실내악 영역은 베토벤의 전창작의 귀결이라 하겠다. 만년의 5개 연작(連作)과 대(大) 푸가와는 고독한 영혼이 자아내는 숭고한 독백이며, 감성(感性)을 초월한 영적 언어(靈的言語)이다. 빈 고전파는 베토벤 음악의 형식적인 완성과 내용의 숭고함 속에서 양식적(樣式的) 정점을 형성함과 동시에 낭만파의 세계로 용해(溶解)함을 말한다고 하겠다.
Romanticism 音樂 음악의 경우 낭만파의 범위에 대해서는 양식사(樣式史)나 세대론과 관계되어 매우 문제시되는 점이나, 일반적으로는 빈 고전파 이후의 19세기 전체가 해당된다. 현재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되는 선에서 그 흐름을 추구해 보면 우선 독일 낭만파로 슈베르트에서 슈만까지를 다루고, 동기(同期)의 낭만파군(浪漫派群)으로는 주로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오페라 작곡가나 쇼팽을 든다. 그리고 낭만파적 현실주의에서 후기 낭만파에의 길로 베를리오즈, 리스트, 바그너의 선이 주목되며, 그 밖에 그 주변이나 또는 대립으로서 브람스, 브루크너, 프랑스의 구노, 비제, 이탈리아의 베르디를 들 수 있다. 또한 스칸디나비아나 슬라브 각국에 대한 낭만파의 영향도 만들어진다. 이와 같이 포괄적으로 살핀 흐름에서도 명료하듯이, 낭만파의 음악은 미학이나 다른 예술과의 관련방식이나 대상으로 하는 곡종 등의 점에서 각각 다른 수단에 의하고 있다. 그러나 작곡이론상에서의 공통된 문제점은 개성적인 작품에 대한 심리의 미묘한 반영을 꾀한 결과, 조바꿈(轉調)이나 색채의 변화에 관련되는 화성법, 또는 관현악법에 있었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모든 예술 속에서 음악은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며 기악음악의 가치가 충분히 인정되었다는 사실이다. 음악은 "일반적인 말처럼 하나하나의 명확한 뜻을 지니지 않고 그것만으로 무엇인가를 표현하려는" 음의 언어로서 파악되며, 따라서 작곡가는 시적(詩的), 회화적, 설화적(說話的), 극적 등의 세계와 결부된 감정의 움직임을 적극적으로 음악에 나타냈다. 그러므로 소곡이건 대곡이건 표제가 따른 작품이 많이 만들어지고, 마침내는 바그너의 오페라에서 볼 수 있듯이 낭만적인 이념과 고전적인 이념의 결합이 이루어지며, 표제음악의 내용의 깊은 정신성이 서양음악의 전통을 배경으로 새로운 호소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부분적으로는 바그너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바그너와는 다른 방향에서 19세기 후반 음악의 특징을 결정한 작곡가가 있는데, 베르디, 브람스, 브루크너 등의 이름을 들 수 있다. 특히 브람스는 바흐―베토벤―슈베르트―슈만의 선에 따라 독일음악의 전통적인 고전적 경향을 나타내어 글자 그대로 표제음악의 개념에 대립하는 절대적인 음악의 입장을 취하였다. 이 음악의 근본적인 견해에 관한 대립은 음악학에서의 근대적인 사상의 확립에 크게 기여했다. 브루크너는 주관적인 경향을 초월하여 보편적, 즉 종교적인 감정의 표현을 되찾았으며, 카톨릭적 낭만주의 작곡가로서 근년에 와서 새삼스럽게 주목을 받고 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1890년대 무렵부터는 서서히 낭만주의의 쇠퇴가 나타나 현대에의 이행을 뚜렷이 했다.
初期浪漫派 고전파의 정점을 쌓아올린 베토벤이 또한 낭만파 활동의 이정표가 된 것은 그의 후기 작품의 내용으로나 낭만파의 많은 작곡가의 저술로도 명백하다. 독일의 낭만주의는 우선 '슈투름 운트 드랑'이라는 1770-1780년경의 문학운동에서 싹이 텄으며, 그와 함께 시인이나 철학자의 사색에서 곧잘 음악관을 논하게 되었다. 음악적인 시인으로서는 E. T. A. 호프만이 낭만파의 성립에 관계한 작곡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음악 체험에 의하면 '음악은 인간에게 알려지지 않은 영역 ― 외면적인 감각세계와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는 세계 ― 을 개척해 주며, 사람은 전혀 추상적으로 특정한 감정을 뒤로 하여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것에 몸을 맡긴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그의 음악관의 구체적인 예로서 그 자신의 작품은 <운디네>를 비롯해서 현재는 역사서술 이외에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 실질적으로 슈베르트와 베버가 초기낭만파의 대표자로 평가되고 있다.
Carl Maria von Weber 베버(1786-1826)는 베토벤이 사망하기 1년 전에 이미 그의 일생을 마쳤으나 슈베르트보다도 훨씬 후기형에 속하는 낭만적 작곡가라 하겠다. 피아노곡·오페라·가곡·교회음악 등에서 상당히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1820년에 작곡되고 다음해 베를린에서 처음으로 상연된 오페라 <마탄(魔彈)의 사수(射手)>는 역사적으로 획기적인 의미를 지녔다. 그리고 5년 전에 같은 장소에서 상연된 E. T. A. 호프만의 <운디네>를 베버는 "어느 시대에도 결코 우리에게 줄 수 없었던 가장 정신적인 것으로 충만한 작품의 하나"라고 평하였으나, 호프만이나 슈포르의 작품이 아니라 바로 <마탄의 사수>가 획기적이라는 이유는 보다 개성적으로 강한 베버의 음악적 재능에 있다. 줄거리는 괴테도 지적했듯이 약간 유치하나, 장면을 진행시키는 멜로디나 훌륭한 관현악법 속에 독일 숲의 신비적인 분위기나 등장인물의 심리 등이 선명하게 떠오르고 있다. 여기서 호프만풍의 낭만적인 영역은 직접으로는 전개되지 않는다. 그 대신에 나중의 '낭만파 음악'이라 불리는 개념의 기초가 이룩되었던 것이다. 베버는 또한 독일 징슈필의 형식에 따른 <마탄의 사수>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완전한 오페라 형식으로 독일 낭만주의적인 오페라 세리아의 작곡을 원했으나 결국 <오이뤼안테>나 <오베론>은 <마탄의 사수> 영역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Luis(Ludwig) Spohr 독일의 슈포어(1784-1859)는 19세기 전반(前半) 독일의 대표적 바이올리니스트로서 바이올린 협주곡이나 교향곡의 작곡을 남겼으며, <파우스트>나 <이에존다>와 같은 독일어의 국민적인 제재에 바탕을 둔 오페라를 써서 베버와 함께 국민 오페라에의 공헌자로서 유명하다. 특히 <이에존다>는 교묘한 줄거리와 음악이 잘 융합되어 성공하였으며, 그것으로써 슈포어는 낭만파 음악가로서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Franz Peter Schubert 슈베르트(1797-1828)는 낭만적인 고전파라고도 하고 고전적인 낭만파라고도 한다. 그는 베토벤을 스승으로 삼아 거장으로부터 고전파의 형식을 계승하였다. 그의 교향곡이나 피아노 소나타에는 전통형식에 대한 그의 진지한 추구가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그에게는 원래부터 선배의 동기적 구축(動機的構築)에 기초를 둔 주제라든가 그것을 드라마틱하게 전개하는 힘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의 걸작인 나단조의 <미완성 교향곡>이나 제10번의 <대교향곡>의 위대함은 오히려 이것들과는 대조적인 면에 근거를 두고 있다. 슈베르트의 참된 특질인 멜로디의 아름다움은 문학의 예리한 감수성과 어울려 가곡 분야에서 이상적인 형태로 응집되었다. 피아노와 독창을 위한 독일가곡(리트= Lied)은 그에 의해서 예술적 완성에 달하였다. 그의 리트는 형식에 따라 (1) 유절(有節) 리트, (2) 변형을 수반하는 유절 리트, (3) 연작(連作) 리트로 나누어진다. 제1의 형식에 의하여 그는 <들장미>를 대표로 하는 서정의 세계를 노래하였다. 그러나 한층 복잡한 심리적 뉘앙스를 지니는 시에는 형식적인 테두리를 무시하고 완전히 자유로운 음악이 달린 제3의 형식을 주고 있다. 특히 만년의 연작가곡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처녀>와 <겨울 나그네>는 이와 같은 형식적 특질을 종횡으로 구사한 슈베르트 예술의 미크로코스모스라 하겠다.
Felix Mendelssohn-Bartholdy 멘델스존(1809-1847)은 일반적으로 '낭만적인 고전파'로 불리고 있다. 그것은 혜택받은 환경 아래에서 자란 균형잡힌 세련된 감각과 고전적 전통에 뿌리박은 교육으로 그의 작품이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도 모두 중용(中庸)을 갖춘 온화한 작풍을 지니기 때문인 것이다. 그의 걸작으로는 셰익스피어의 <한여름밤의 꿈>에 붙인 부수음악이나 회화적인 연주회용 서곡 <핑갈의 동굴>, 또는 요정(妖精)의 경쾌함 같은 익살스러운 <스케르초>, 낭만적인 동경(憧憬)을 찬양한 합창곡, 피아노에 의한 노래라고도 할 수 있는 <무언가집(無言歌集)> 등을 들 수 있다. 또 멘델스존의 전통에 대한 깊은 이해로 바흐의 <마태 수난곡>이 부활되기도 했다. 이 전통에의 지향(志向)은 단순히 낡은 음악의 역사적 재생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 선례를 규범으로 하여 오라토리오 <성(聖) 바오로>, <엘리야> 등의 걸작을 낳았다. 그는 낭만파의 표정이 풍부하고 우아한 멜로디와 바로크의 대형식을 결합시켜 리스트와 아울러 19세기의 종교적 오라토리오의 한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盛期浪漫派 낭만주의 운동은 1820년대의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발전하였다 성기낭만파라고 할 경우에는 흔히 바그너 이후(19세기 후반)는 포함되지 않으며, 멘델스존, 슈만, 베를리오즈, 로시니, 쇼팽, 마이어베어 등을 중심으로 한다. 이 시기에는 낭만파의 환상적인 성격이 각 방면에 화려하게 나타났으나 그 이면에는 악기, 특히 관악기의 개량이라는 눈에 띄지는 않으나 중요한 진보가 있었다. 낭만파음악에서는 섬세한 감정의 반영으로서 화성은 내부에서 움직이기 쉬워지며, 그 결과 반음계적 진행이나 조바꿈(轉調)의 부분이 자주 요청되었다. 그리고 이와 병행하여서 목관이나 금관은 키 조작의 개량이나 밸브의 발명 등으로 그 경향에 응할 수 있을 만한 성능을 지닌 악기로 개량되었던 것이다. 이 관현악법과 악기의 균형잡힌 상호관계는 색채의 감각에 눈뜬 낭만파 역사에서 경시할 수 없는 것이라 하겠다.
Robert Alexander Schumann 슈만(1810-1856)의 일생은 참으로 낭만적인 작곡가답다고 하겠다. 그는 잔 파울이나 프리드리히 리히터, E. T. A. 호프만 등의 문학이나 칸트의 철학을 이해했으며, 작곡가와 비평가라는 두 면에서 중요한 활동을 하였다. 작곡가로서의 슈만은 1830년대에 걸작이 많은 피아노곡으로 기초를 이룩하고, 그 뒤 해를 거듭하며 장르를 넓혀 가곡이나 교향곡, 피아노를 더한 실내악, 피아노 협주곡 등으로 대표되는 작품을 썼다. 가곡 분야에서는 슈베르트부터의 독일 리트(Lied)를 더욱 전개시켰으며, 기악곡 분야에서는 특히 피아노곡을 중심으로 시적인 세계에서 음악을 쓰는 데 성공하였다. 독일에 19세기의 표제음악을 탄생시킨 사람은 슈만이다. 다만 그때의 표제란 순수하게 환상적인 음악의 세계를 가져오게 하는 계기로서 작용하는 것이다. 또한 그의 실내악이나 교향곡에는 작곡학적으로 보아 브람스의 작품에 통하는 요소를 많이 볼 수 있으며, 중요한 작품이 적지 않다. 낭만파에서는 호프만, 베를리오즈, 리스트, 바그너처럼 낭만적 음악비평의 저술을 남긴 사람이 많으나 <음악신보>라는 잡지를 창간한 슈만의 비평활동은 가장 개방적이고 공평하며, 역사에 관해서 충분히 암시적이라 하겠다. 그는 베토벤 숭배의 전통을 수립함과 동시에 슈베르트, 쇼팽, 베를리오즈, 리스트 등의 천재를 찬양하여 낭만파를 위해 싸웠다. 그러나 그후 리스트, 바그너의 창작에 자기 이상과의 본질적인 차이를 시인해야만 했다. 그 뒤 1853년의 브람스와의 상봉으로 슈만은 훌륭한 찬사로써 그를 세상에 소개하여 그의 비평활동의 클라이맥스를 이루었다.
Schumann-周邊 독일에서 19세기 전반(前半)의 정점을 이루는 슈베르트, 베버, 멘델스존, 슈포어, 슈만의 주변에는 호프만이나 베버, 슈만 등의 문필활동의 영향이 컸으며, 이에 힘입어 많은 작곡가가 나타났다. 기악음악의 분야에서는 M. 하우프트만이나 I. 모슈레스를 경계로 하여 소나타라는 전통적 형식은 별로 다뤄지지 않게 되었으며 대신 소규모의 작품이나 변주곡이 즐겨 작곡되었다. 그러나 대체로 그 배후는 시적인 것으로의 도피라는 소극성을 볼 수 있어 아류(亞流)가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소규모적 작품 분야인 성악곡에서는 K. 레이베(1796-1869)가 있다. 슈베르트의 리트 2년 뒤에 그는 역시 리트인 <마왕(魔王)>을 작곡하였으나, 마찬가지로 낭만적인 분위기의 세계를 표현하였다고는 하지만 정경묘사의 부분에서는 언어를 음악의 기초적 리듬으로 하는 관계로 장면의 변화가 현실적이며 다양하게 구사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오라토리오에도 낭만파적인 시도를 한 바 있다. 다음으로 오페라에서는 마르슈너, 로르칭, 니콜라이 등의 작품이 있으나, 그것들은 일단 호프만 또는 베버의 영향권 안에 있다고 하겠다.
Heinlich Marschner 마르슈너(1795-1861)는 걸작을 3개 남겼다. <반비아>, <성당의 기사와 유대 여인>에서는 호프만풍의 환상에서 바이런풍의 세계로 가는 도정(道程)을 느낄 수 있으며, <한스 하이링>에서는 호프만이 <운디네>에서 결코 소화시킬 수 없었던 낭만파의 근본 테마인 인간 속의 초속성(超俗性)이란 문제를 다루었다. 이러한 특징에 더하여 그의 음악은 화성과 색채와의 신선한 혼합을 보여주기도 했다.
Albert Lortzing 로르칭(1801-1851)은 <운디네>, <레기나>, <안드레아스 호퍼> 등을 썼으며, 그 작품특징은 독일 징슈필(18세기 후반 이후 독일에서 상연되던 민속극 연극 형태로서 노래가 많이 삽입되어 있다)의 전통을 유지, 확보하고 있다는 점이라 하겠다. 즉 독일어로 된 회화 오페라의 즐거움을 독일어로 추구하였던 것이다.
Otti Nicolai 니콜라이(1810-1849)의 대표작은 <윈저의 명랑한 아낙네들>이나 이 오페라의 친근감을 뒷받침해 주는 그의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독일의 악파는 첫째로 독일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경쾌함을 더할 수 있다면 더욱 바람직하다". 그는 모차르트를 이상으로 삼았다. 마르슈너나 로르칭과는 달리 니콜라이에 대해서는 이탈리아의 영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Italia-France-浪漫主義音樂 19세기 전반의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음악은 슈만까지의 독일음악과 병행하여 중요하다. 19세기는 정치상 보수와 혁신의 다툼이 계속되었던 시기이나, 프랑스의 낭만주의 운동은 혁명정신과 밀접하게 결부된다. 즉 과거와의 단절(미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점에서는 독일보다도 현실적이며 급진적이었다. 이 근대적인 관심과 현실에서 도피하려는 경향과의 공존에 프랑스의 낭만주의 운동의 특이성이 나타난다. 음악에서는 국제적 색채가 풍부한 파리를 무대로 각국의 음악가들이 등장하였다. 그 중에서도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것은 바이올린의 마술사 파가니니였다. 낭만적인 시대에 명연주라는 것이 얼마나 강한 영향력을 미치는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으나, 파가니니는 명인예의 전형이기도 했다(베를리오즈와 리스트에 대해서는 바그너와 함께 뒤에 한데 묶어 다룬다).
Italia-opera 이탈리아 음악에서 낭만주의적 경향의 출현에 관해서는 지금도 아직 명확하지 않으나, 대체로 1818년에 괴테가 <이탈리아에서의 고전적 작가와 낭만적 작가>라는 논문을 발표하였을 때 직관적으로 그 경향이 파악되었다고 생각되고 있다. 외국의 낭만주의 운동은 로시니 등이 직접 받아들였다. 로시니가 나오기 전까지는 M. 지몬(1763-1845)이 이탈리아 오페라의 발전에 기여했다. 그는 바이에른 출신의 독일인으로 이탈리아의 독자적인 멜로디가 우선하는 오페라에 극적인 부분이나 합주, 그리고 합창의 장면을 융합했고, 특히 악기법 분야에서는 역사적으로도 중요시되고 있다. 그 뒤 1830년경까지 나타난 로시니, 벨리니, 도니체티에 의하여 이탈리아의 오페라 부파와 오페라 세리아는 모두 19세기에서도 성과를 올릴 수 있었다.
Gioacchino Rossini 로시니(1792-1868)는 종교음악, 가곡, 관현악곡, 실내악 등도 많이 남겼으나, 일반적으로는 오페라 작가로서 유명하다. 대표작품인 <세비야의 이발사>로 이탈리아 희가극의 절정을 쌓은 그의 음악은 형식적 면에서는 18세기의 것과 본질적으로 다를 바가 없으나, 기악의 효과나 유려한 멜로디의 명인예(名人藝)의 효과를 더하여 낭만파시대를 반영하고 있다. <오텔로>, <빌헬름 텔> 등의 훌륭한 정통 오페라 작품도 남겼다.
Gaetano Donizetti 도니체티(1797-1848)는 지몬의 제자로서, 로시니의 아류(亞流)가 많이 나타난 가운데에서도 특히 뛰어났다. <르크레치아 보르쟈>나 <루치아디 람메르무어>는 전적으로 로시니풍이라 하겠다. 그러나 <돈 파스콰레>(1843) 등은 로시니와 함께 이 영역의 정점을 구축하였다. 그의 재능은 솔로이스트의 노래 속에 발휘되고 있다.
Vincenzo Bellini 벨리니(1801-1835)는 로시니의 은퇴와 베르디가 출현한 사이의 약 10년 동안 이탈리아 오페라계의 중심인물이었다. 대표작은 <노르마>, <청교도>. 그는 기악의 힘을 억제하여 드라마틱한 '노래하는 오페라'를 기초로 하여 작품을 구성하고 있다. 로시니, 벨리니, 도니체티 등 세 사람 지도자 그늘에는 P. 게네라리, G. 팟키니, R. 메르카단테 등의 이름을 들 수 있다.
France opera 이탈리아에서와 마찬가지로 프랑스에도 오페라 부파(喜歌劇)에 해당하는 오페라 코미크와 오페라 세리아(正歌劇)에 해당하는 그랜드 오페라의 두 가지 양식이 있었다.
opera comique 안이하고 더구나 독일 징슈필의 경우처럼 프랑스적인 감정에서 생겨났던 오페라 코미크는 저절로 프랑스 사람의 창작 대상이 되어 많은 작품이 탄생했다. 첫째로 이탈리아에 유학한 N. 이즈르가 오페라 부파의 내용에서 많은 것을 흡수한 작품을 발표하였다. <지오콘다>, <센도리온> 등의 작품에서는 이탈리아풍의 코로라툴라나 프랑스의 오페라 양식 같은 것이 다채롭게 융합하고 있다. A. 보아엘 듀는 케루비니와 메유르, 로시니의 양극에 화해의 선을 긋는 작곡가라고 하나, 1880년경까지 <장 드 파리(파리의 장)>, <라 다메 블랑슈(흰옷의 부인)> 등을 작곡하여 오페라 부파에 필적할 만한 오페라 코미크를 확립했다. 이 보아엘 듀의 흐름을 이어 D. F. E. 오베르(1782-1871)도 <르 메송>, <마농 레스코> 등의 걸작을 포함하는 약 37곡의 오페라 코미크를 썼다. 그들 외에는 L. J. F. 에로르나, A. 아담도 당시의 주요 작곡가라 하겠다.
grand opera 프랑스 혁명으로 인한 불안전한 사회상태의 영향으로 1790년부터 1820년경까지, 프랑스는 위대한 작곡가를 배출하지 못하였다. 오베르가 이 분야에서도 <포르티치의 벙어리 처녀>로 낭만파의 발전에 기여하였으나, 로시니가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메유르, 알레비, 에로르 등의 프랑스인은 끝내는 다시 외국인인 마이어베어의 명성으로 그 빛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Giacomo Meyerbeer 마이어베어(1791-1864)는 명작 <악마의 로베르>, <유그노>, <예언자>, <아프리카의 여인> 등으로 낭만파 그랜드 오페라 최대의 작곡가라 하겠다. 멜로디의 묘기, 관현악법의 탁월성, 대규모적인 무대 등의 특색과 역사적 사건을 다룬 제재의 선택방법으로 명백하듯이, 그는 낭만파의 민족주의적 경향을 반영시키면서 국제적인 양식을 자기 것으로 소화시켰다.
Fryderyk Fanciszek Chopin 피아노 음악에서 낭만파 최고의 작곡가인 쇼팽(1810-1849)은 순수하게 기사적인 씩씩함과 멜랑콜리의 두 면을 나타내어 독일의 슈만과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마주르카나 폴로네즈는 물론 다른 작품에서도 폴란드의 정신이 침투하고 있다. 그의 작품의 특징은 조바꿈(轉調) 등 수식이 있는 멜로디, 명인예적인 곡의 운영 등에서 보이나, 그러한 것은 연주할 때의 리듬이나 다이내믹 작용의 수단(템포, 루바토, 강약기호, 속도기호, 페달의 사용 등)과 불가결하게 결부되어 독창적인 억양과 색채감을 자아낸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점에서 시적인 슈만과 비교하여 쇼팽의 경우에는 프랑스 낭만주의의 위대한 화가 들라크루아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다.
浪漫派的現實主義-後期浪漫派 프랑스에서는 독일보다도 뒤늦게 낭만주의운동이 전개되었으며 그 대표는 베를리오즈였다. 그로부터 리스트·바그너 이르는 표제음악에 의해서 낭만파의 가장 혁신적인 활동을 전개하여 현대음악의 성립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들의 작품에서는 심리적인 표현을 너무 중시한 나머지 표제의 소재와 음악의 구조가 완전히 동시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되어 음상징(音像徵)으로서의 음악이 확립되었다. 따라서 역시 베토벤에서 출발하였으면서도 슈만의 표제음악 판타지와는 전혀 다르다고 하겠다. 또한 세 사람 가운데에서도 그 의도하는 바는 서로가 달랐으며 베를리오즈와 바그너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를 볼 수 있다. 당시 이 새로운 표제음악의 분야는 음악가에 그치지 않고 문학자나 미학자(美學者)들 사이에서도 깊은 관심거리가 되었다.
Louis Hector Berlioz 관현악법의 명인 베를리오즈(1803-1869)는 오페라·종교적 합창곡·가곡 등의 작품에 비하여 <판타지 교향곡>, <이탈리아의 해럴드>로 대표되는 교향곡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표제라는 것은 현재 빅토르 위고가 <크롬웰>의 서문에 기술했듯이 "숭고한 것과 그로테스크한 것의 두 타입의 본래적인 결합에 기인하는 새로운 극적인 현실"이라고 하는 것에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현실의 정경과 맺어져 마음에 묘사된 세계를 기악음악에 나타낼 때 베를리오즈의 표제는 극적인 텍스트의 구실을 하는 것이다. 형식적 면에서는 리스트의 순환원리에 통하는 '고정개념'이라 하는 지도동기를 씀으로써 필연적으로 베토벤에서 볼 수 있는 균형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슈만도 지적한 바와 같이 이에 준한 기악곡적인 질서가 유지되고 있다.
十九世紀後半-音樂 19세기 후반의 음악은 전반에 비하여 질적으로 약간 변화한다. 낭만파가 음악의 어느 방향에서 새 국면을 개척하였는가 하면 우선 음의 상징적, 색채적 효과에 주목하여 감각적인 즐거움을 증대시키고 기능화성의 확대를 했다는 점에 있겠다. 낭만파는 이것을 오페라와 기악음악에 병행하여 시도하였으며, 특히 쇼팽, 베를리오즈, 후에 리스트의 기악곡에서 명료한 형태로 발전이 시인됨으로써 음악적인 힘의 전적으로 새로운 면으로 정착하였다. 19세기 후반의 음악가는 낭만파의 방향을 짐작하기에 충분한 기간이 주어졌다. 즉 낭만파의 양식에서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특징을 보편화하는 원숙한 단계에 이르렀던 것이다. 바그너, 베르디, 비제, 브람스, 브루크너에서 볼 수 있는 여러 경향은 이것을 전제로 하여 비로소 공평하게 이해할 수 있다.
Franz List 헝가리 출신인 리스트(1811-1886)는 바이올린의 파가니니에 필적하는 창조적인 피아노의 명인으로 일세를 풍미(風靡)하였다. 그의 작품으로는 피아노곡이 가장 많으며 피아노 음악사상 찬란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교향시와 만년의 종교적 합창곡과 같은 다른 곡종에서도 표제음악이나 카톨릭 낭만주의에 관련하여 극히 중요한 작품을 남겼다. <전주곡>, <파우스트 교향곡>, <단테 교향곡>을 비롯한 교향시는 베를리오즈의 관현악법과 쇼팽의 화성법의 영향을 보임과 동시에 표제음악에의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하였다. "교향시에 필요한 줄거리(劇)와 주제는 음악 소재의 기술적 처리법에 대한 관심과 결부되고 있다. 영혼의 불확실한 인상은 음악으로 설명되는 구상에 의하여 확실한 인상으로 숭화된다"라는 리스트의 기술(記述)이나 형식에서 '순환방식'을 사용, 소나타적 교향곡에서 탈피함으로써 베를리오즈에서 한층의 진전을 보였음이 뚜렷하다.
循環方式 순환방식이라는 것은 소나타나 교향곡의 전 악장 또는 몇 악장에 동일한 기본동기를 써서 악곡을 전개하는 방법으로 17세기에도 쓰였다. 19세기에 와서는 베를리오즈나 쇼팽에게서도 이 방법을 볼 수 있지만 리스트가 특히 매우 경쾌하게 음악형식에 적용하였다. 리스트 이후 프랑크, 댕디, 생상스, 포레 등 프랑스의 작곡가에 의하여 하나의 작곡원리로 확립되었다.
Wilhelm Richard Wagner 베를리오즈, 리스트에 의하여 현저하게 성장한 음상징(音象徵)으로서의 음악은 바그너(1813-1883)가 참가함으로써 정점에 이르렀다. 그는 특히 <로엔그린>의 작곡 이후 예술론에 관한 많은 저작을 내었다. 음악의 면에서 그는 베토벤의 기악을 표준음악으로 하여 낭만적으로 해석하여 그 발전이라는 문제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예술의 개념이란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탄호이저>, <로엔그린>을 거쳐 1850년 이후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니벨룽겐의 반지>, <파르지 팔>에서 구체화했듯이 "예술은 근원적으로 인간 전체를 표현하는 것으로 개개의 예술 전체가 융합함으로써 참되이 그 목적은 이루어지며 예술작품은 완성된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그는 각본·음악·무대장치 등 모든 것을 스스로 고안하였다. 텍스트의 소재에는 중세의 전설이나 독일 신화를 사용했으니, 확실히 이것은 낭만주의에서의 역사학의 성과가 미친 영향이었다. 이와 같은 예술형식의 점에서 그는 쇼펜하우어, 셸링 등의 낭만주의 철학자와 밀접하게 결부되고 있다. 신화적인 의미로서의 보편성에 대한 추구는 예술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정치적으로도 나타난 그의 혁명적 정신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자기 작품을 이른바 '악극'이라고는 결코 부르지 않고 "형상화(形象化)된 음악의 행위"라고 불렀듯이 음악은 그의 예술을 의도하기 위한 주역이었다. 즉, 그의 양식의 특징이라고 하는 '구원'의 사상과 결부되는 무한 선율이나 복잡한 극을 가장 단적으로 설명하는 지도동기의 취급, 그리고 화성의 확대 등이 비로소 구체적인 하나의 형식을 이룬다. 바그너의 세계를 탐구하기 위하여, 예컨대 예술심리학적인 입장 등에서 흥미깊은 고찰을 하고 있지만 바그너가 낭만적인 동시에 고전적이며 현실적인 동시에 이상적인 근원은 아직 충분히 구명되지 못하고 있다.
指導動機 바그너의 친구 보르초겐의 논문 <바그너의 '제신의 황혼'의 동기>에서 사용한 말로서, 바그너의 후기의 주요한 작곡기법이다. 어떤 인물·감정·극의 상황 등을 특징짓기 위한 것으로, 적확한 특성묘사를 목표로 하여 충실히 재현되든가 각종 방법으로 변형된다. 지도동기는 임의의 장소에 쓰이며 자유롭게 다른 악상과 관계를 맺을 수 있고, 형식적으로는 해방되어 있다.
無限 melody 일반적으로는 바그너의 작품에서 멜로디와 멜로디 사이의 일단락을 고의로 피한 멜로디의 부단한 연속을 말한다. 이는 바그너의 창작적 의도에서 생긴 것으로, 그의 작품에 반드시 제시되는, 인간의 비극적인 최후에 부여되는 '구원', 무한에의 해소에 도달하는 것에 관계되고 있다. 그러나 그 내부는 매우 계획성이 있는 구성을 보이고 있어 바그너의 원숙함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Wagner 周邊傾向 바그너와 같은 시대에 그의 영향을 받은 작곡가 중에는 브루크너와 코르넬리우스 등이 있으나, 그들의 작품은 바그너가 '미래의 음악'이라 했던 그러한 형태로 나타나지는 않았다. 그러한 점에서 바그너는 독일에서조차 악극이라는 세계에서 완전히 고립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바그너와 음악작품에 대한 근본적인 견해 차이를 보인 미학자(美學者) 한스리크가 나타나 당시로서는 중요한 대립관계가 생겼다. 한스리크는 바그너 등이 나타내려는 음악 이외의 분야에 있는 것을 표현할 수 있다고 하는 음악의 타율적인 사고방식에 반대하여 '울려퍼지는 형식의 운동으로서의 음악'의 자율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베토벤을 절대음악의 작곡가로 보는 입장에서 한스리크는 슈만이 기대를 걸고 보낸 브람스를 자기 진영에 맞아들였다.
opera 당시의 독일음악계는 양식의 다양한 경향을 보였으며 그중에서도 오페라를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 리스트, 바그너의 추종자가 많았다. 그러나 오페라에서는 겨우 <헨젤과 그레텔>의 훔퍼딩크와 <바그다드의 이발사>의 코르넬리우스가 바그너파의 사람으로서 성공한 예이다. 19세기 후반의 오페라에서 걸작은 바그너 외에는 독일 이외에 즉 프랑스나 이탈리아에서 작곡되었다.
歌曲 가곡의 분야에서는 슈베르트 이후의 전통을 계승하여 브람스나 볼프를 보충이라도 하듯이 프란츠, 옌젠, 코르넬리우스 등이 아름다운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프란츠나 옌젠은 당시의 대립에는 직접 관여하지 않고 소박한 가곡으로 친근감을 주었다.
Robert Franz 독일 사람인 프란츠(1815-1892)는 레이베, 브람스와 마찬가지로 슈만과 연결된다. 약 350의 성악곡의 대부분이 <나의 큰 고민에서>, <장미는 말했다>, <안녕> 등이 대표하는 서정적인 가곡으로, 형식은 유절가곡(有節歌曲)이나 민요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보헤미아풍, 헝가리풍, 독일풍이니 하듯이 국민적 또는 지방적인 색채를 선천적으로 애호했다. 다만 브람스의 가곡에 대해서만은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Peter Cornelius 코르넬리우스(1824-1874) 역시 독일 출신인 리스트, 바그너 측의 충실한 추종자로서 창작활동을 계속하였으나 오페라보다도 오히려 슈만의 계통을 이어받은 가곡이나 16세기의 모테토에서 시사받은 합창곡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는 서정시인으로서도 뛰어난 재능을 지녔으며 그것은 선율에 대한 매우 민감한 화성붙임이나 취향의 면에서 효과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라인의 노래>나 <크리스마스 가곡>, <주님의 기도> 등이 있다.
operetta 오페레타는 이탈리아의 오페라 부파의 영향 아래 19세기 중엽에 프랑스에서 엘베나 오펜바흐에 의하여 명료한 형태가 주어져 전성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빈은 그 영향을 받아 주페, 슈트라우스, 미레카, 첼터 등의 빈 오페레타라고 하는 것을 확립하여 번영을 가져왔다.
Jacques Offenbach 독일 출신의 프랑스 작곡가 오펜바흐(1819-1880)는 <천국과 지옥>, <지옥의 올페오>로 유명하며 오페레타에서 활약한 데에는 그 나름의 동기가 있었다. 당시 프랑스의 그랜드 오페라는 마이어베어에 의하여 국제적인 성과를 올렸으나 오페라 코미크는 극적 내용과 음악 양면에서 철저하지 못했다. 오펜바흐는 오페라 코미크의 초기 무렵에 경쾌하고 고상한 형태의 작풍을 살려야겠다고 생각하여 그의 좋은 아이디어를 발휘, 가벼운 사회풍자를 곁들인 오페레타를 만들었던 것이다.
Johann Strauss 빈 출신인 요한 슈트라우스(1825-1899)는 빈 왈츠를 확립시킨 J. 슈트라우스의 장남. 부친은 왈츠의 아버지, 아들은 왈츠왕이라 불리고 있으며 많은 춤곡을 작곡하였고, 1870년 이후에는 <박쥐>, <집시 남작> 등의 오페레타를 중심으로 활약하였다.
Jonannes Brahms 독일음악 발전에 위대한 공헌을 한 브람스(1833-1897)는 바그너와 함께 강인한 정신의 소유자였다. 젊고 민감한 정열가로서 조숙하다는 낭만파시대 전반(前半)의 천재적 이미지는 그에게 해당되지 않는다. 브람스는 아마 낭만파의 누구보다도 과거 작곡가의 기법에 정통했으리라. 그는 바흐 또는 바로크, 그 이전의 폴리포니, 베토벤, 슈만 등에 대해 주관적인 경향에 편중하지 않고 사실에 따라 흥미를 가질 수 있었다. 그의 작품은 오페라 이외의 거의 모든 분야에 미치고 있으나 그것들은 온갖 형식에 의하여 자주 고전적인 세계, 또는 바로크나 폴리포니 세계에로의 비약을 내포하고 있다. 그로서는 독일의 전통에 따라 나아가는 것이 가장 자연스런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크나 고전파에 각각 특유의 선율과 화성의 균형이 있듯이 브람스의 작품에도 독특한 낭만적 선율의 억양이 표현되고 있다. 바그너가 딸림화음(附屬和音)의 연속사용, 화음의 색채적 용법, 반음계적 조바꿈(轉調), 단소적(短小的) 동기의 반복 등으로 조의 바탕음(基音)을 피하면서 화성을 확대하고 자유로운 어법(語法)을 추구했음에 대하여, 브람스는 대위법적 텍스처의 영향을 나타내어 악절을 다성적으로 다루어서 그것과 기능화성의 확대를 반영한 화음진행을 결합시켜 개성적 음빛깔과 선율의 자유를 얻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작곡기법에서 바그너와 브람스는 서로 보충·협조하면서 그후의 독일음악 발전에 기여했음을 알 수 있다.
Josef Anton Bruckner 역시 빈 출신으로 브루크너(1824-1896)는, 낭만파에서 종교적인 세계를 진지하게 음악 속에 보인 유일한 사람이다. 민족적, 개인적으로 분열한 19세기를 통하여 작곡가는 항상 종교적인 것을 동경하였다. 바그너나 리스트, 그리고 브람스를 브루크너와 비교하여 보면, 그들은 너무나 인간중심이며 주관주의적인 감정에서 브루크너와 같이 소박하게 떨어지지 못하고 있다. 브루크너는 주로 교향곡과 미사곡을 작곡하였다. 그의 교향곡은 그 방대한 형식이나 화성의 면에서 리스트, 바그너의 영향을 강하게 보이고 있으나 완전히 교향적이라는 점에서 흔히 브람스의 교향곡과 비교되고 있다. 이 비교로는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비서정적과 서정적, 광대한 울림과 실내악적인 울림 등의 큰 차이를 볼 수 있으며, 낭만파의 역사를 생각할 때 매우 흥미가 있다. 브루크너의 교향곡은 사후(死後) 말러나 볼프, 니키시 등이 치른 노력을 토대로 하여 해를 거듭할수록 높이 평가받고 있다.
近代音樂 현재의 시점, 즉 20세기 말에서 생각하는 근대음악이란 대체로 19세기의 마지막 10년 동안과 20세기 초의 20년 동안 합계 30년에 이르는 동안의 음악을 가리켜 말한다. 개개의 작곡가는 연대적, 지역적으로 본론에서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이 기간의 음악에서 두드러진 2대 경향만을 살피기로 한다. (1) 19세기 후반의 유럽 음악은 바그너의 영향을 지나치게 받고 있었으나, 여기에서 탈피(脫皮)하여 초극(超克)하려는 시도가 작곡기법의 면에서는 종전의 조성음악(調性音樂)으로부터 비조성음악을 출현시킨다는 근본적 전환을 가져왔다. 독일의 작곡가보다는 바그너의 영향권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던 드뷔시의 개혁, 인상주의의 창시는 특히 뛰어났으며, 영향력은 크다. 그리고 이탈리아에서의 반(反)낭만주의 운동으로서의 베리스모도 주목된다. (2) 낭만파에서 현대에의 가교적(架橋的) 역할을 하는 과도적인 음악의 정황(情況)으로서 특징적인 것은 민족주의의 발흥이다. 민족적 요소를 중시하는 사상은 원래 낭만파의 발상(發想) 중의 하나이나, 음악사에서는 후진제국, 아메리카, 러시아, 스칸디나비아, 슬라브계 각국 음악의 자각을 전제로 하여 갑자기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 음악사에서는 드뷔시나 또한 보다 현대적인 라벨, 활동기가 장기간이었던 R. 슈트라우스 등은 다음 세대에 대한 영향이나 관련을 고려하여 '현대음악'에서 다루었다.
獨逸·Austria 近代音樂독일계의 작곡가로서 근대음악에 넣을 수 있는 사람들은 동시에 후기낭만파 최후의 대표자라고도 생각할 수 있으며 볼프, 말러, 피츠너, R. 슈트라우스, 레거 등을 들 수 있다. 그들로부터 쇤베르크에 이르는 길은 유럽 음악사의 한 주류로 볼 수 있다. 즉 독일을 중심으로 하는 고전적 기능화성의 체계가 극점(極點)에 이르러 붕괴하고 기능화성법이라는 근본 전제(前提)를 12음의 기법으로 바꾸어 가는 과정을 말하며, 이 흐름이 순수기악보다도 오히려 오페라나 가곡 등 타율적 음악에 의하여 이끌려 왔음은 주목할 만한 일이라 하겠다. 그들이 공통으로 영향을 받은 것은 바그너의 <트리스탄>의 반음계인데, 각 작곡가의 자질에 따라 볼프는 리트에, 말러는 칸타타풍의 오케스트라 반주가 있는 가곡으로, 레거는 바로크의 구성원리로 복귀하면서 주로 기악곡에서 독자적인 경지를 보이고 있다.
Gustav Mahler 빈 출신인 말러(1860-1911)는 볼프, 레거와 함께 현대에의 과도기 속에서 진보적인 입장에 있었다. 그러나 과도기에서 흔히 있을 수 있듯이, 특히 세대적으로 젊은 레거 등은 아직 충분한 검토롤 받지 못하고 있다. 말러는 주로 가창(歌唱)이 수반되는 교향곡과 가곡의 작곡가로서 인정받고 있다. 낭만파시대의 관현악곡은 리스트, 바그너, 브루크너의 선을 따라 변용(變容)하면서 형식의 면에서는 대규모로 팽창하였지만, 브루크너의 제자인 말러의 작품에도 마치 전인류의 이상을 포함이라도 하듯이 퍼져 있다. 그러나 <제8교향곡>과 같은 방대하고 기념비적인 것이 되면 작곡가의 의지와 연주법이라는 실제적인 면 사이에 우선 모순이 나타난다. 그리고 낭만주의 방법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커짐에 따라 리스트나 브람스, 바그너 등의 작품에 깃들이고 있던 염세적 경향이 개인적 사정과 아울러 말러에게도 나타난다. 그의 작품에서 텍스트는 완전히 낭만파적 내용의 것이며, 형식은 보수적이나 세부의 텍스처(書法)나 관현악법은 매우 새로운 방법이 모색되고 있다.
Hugo Philipp Jacob Wolf 역시 빈 출신인 볼프(1860-1903)는 청년기에 직접 바그너의 음악을 체험한 뒤 평생을 두고 바그너를 존경하였다. 1888년 이후 유명한 '영감(靈感)의 연출'이라는 상태로 급격히 많은 가곡을 작곡하였고, 오늘날 그것들은 모두 높이 평가되고 있다. <메리케 가곡집>, <아이헤레돌프 가곡집>, <괴테 가곡집>, <스페인 가곡집>, <이탈리아 가곡집>, <미켈란젤로 가곡집>의 제명 등에 나타나 있듯이 그는 한 시인의 시를 집중적으로 작곡하는 특징이 있다. 기법으로는 시의 내용이나 언어에 깊이 결부된 낭창법(朗唱法)과 반음계법, 화성법 등에 매우 진보된 방법이 제시되었으며, 독일 리트나 바그너의 전례(前例)에 의존하지 않고 있다.
Max Reger 레거(1873-1916)는 볼프나 말러보다 젊은 세대, 즉 쇤베르크나 스크랴빈의 세대에 속하여 브람스와 힌데미트를 잇는 작곡가이다. 그는 스승인 음악학자 리만의 영향으로 절대음악의 입장을 취하였으며, 정신적으로는 바흐를 통하여 바로크에 접근하였다. 화성을 다성적으로 다루는 브람스의 텍스처를 계승하였으며 또한 거기에 반음계적인 선을 우선적으로 나타내도록 하고 있다. 레거에 의하여 절대음악의 기법은 표제음악이 개척한 분야에 매우 접근하였다. 불과 43세의 짧은 일생을 산 그는 후기에는 브루크너의 형이상학적 세계나 모차르트의 이상적인 음악세계에 관심을 보였다는 점이 무엇인가 암시적이라 하겠다.
英國-近代音樂 17세기의 헨리 퍼셀 이후, 영국에는 특출한 대작곡가가 없었다. 18세기에는 헨델이나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 등이 중심이었고, 19세기에 이르러서도 아직 유럽 대륙의 음악가들의 유력한 시장으로서의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19세기 말엽부터 서서히 영국 출신 작곡가의 활동이 활발해졌고, E. 엘가에 의하여 영국의 낭만주의적 경향은 하나의 정점에 이르렀다. 대륙과의 교류는 우선 M. W. 발프(1808-1870)나 W. 워레스(1813-1865)와 같은 사람들에 의하여 작곡과 연주의 두 면에서 이루어졌으나, 여기에 계속해서 C. H. 퍼리(1848-1918)는 옥스퍼드 대학 교수, 왕립음악학교 교장을 역임하고 또한 <그로브 음악사전>의 편찬에도 관여하여 영국의 음악을 위해 크게 공헌했다. 퍼리와 같은 시기의 A. S. 설리번(1843-1900)도 그로브에 협력한 한 사람으로, 작곡면에서는 대본작가 W. S. 길버트와 협력하여 이른바 길버트 설리번 오페라를 많이 발표하여 영국 오페레타의 전성시대를 만들었다. 작품으로는 <배심재판>, <군함 피나포어>, <미카도> 등이 있다.
Edward Elger 에드워드 엘가(1857-1934)는 영국에서 퍼셀 이후의 작곡가로서 매우 높이 평가되고 있으나, 공정한 입장에서 볼 때 외국에서는 그토록 좋은 평을 듣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19세기 말부터 20세기에 걸쳐 영국음악의 르네상라는 시기에 후기낭만파의 관현악법을 반영시키면서 크게 공헌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주요 작품은 교향곡, 서곡, 오라토리오, 변주곡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다.
France-近代音樂 베를리오즈에 의하여 프랑스에서 진정한 낭만파 음악이 수립된 데 자극받아 점차 프랑스의 독자적인 음악을 이룩하려는 활동이 활발해졌다. 그 하나의 흐름으로서 구노(1818-1893) 등에 의한 새로운 오페라 활동이 활발해졌고 독일 태생의 오펜바흐(1819-1880)는 <천국과 지옥> 등의 오페레타로 경쾌하고 절묘한 음악의 세계를 개척하였다. 한편 이탈리아와 독일의 오페라 붐의 영향을 받아 오래도록 지하에서 잠자던 가곡이나 기악곡의 작곡이 부활하였고, 동시에 그것들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나 실내악단 등도 잇달아 창설되어 연주활동이 매우 활발해졌다. 이와 같은 움직임은 그때까지 이탈리아 또는 독일음악에 거의 전면적으로 지배받았던 프랑스에서 프랑스 독자의 음악에 각성하게 되고, 마침내는 짙은 영향을 미치고 있던 바그너이즘을 불식하고 드뷔시가 인상주의 음악을 수립한다는 큰 흐름의 원천이 되었다. 더구나 드뷔시의 음악은 음악사에서의 '현대'의 개막으로서 큰 의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움직임 속에서 구노가 준 영향은 경시할 수 없다. 특히 독특하고 아름다운 멜로디의 비제를 비롯해서 그 후의 많은 작곡가의 작품 속에서 그 모습을 보게 된다. 또 프랑크(1822-1890)와 그의 제자들은 독일의 영향을 받고는 있었으나 매우 밀도가 높은 음악적 구축물을 창조하였고, 말로(1823-1892), 생상스(1835-1921) 등은 간결하고 알기 쉬운 표현 속에 프랑스적인 감각을 풍부히 전하고 있다. 이러한 사람들의 활동내용은 생상스에 의하여 1871년에 설립되고 훗날 프랑크가 계승한 국민음악협회가 구호로 삼은 '아르스·가리카', 즉 '프랑스 예술'이라는 말 가운데에 명확히 나타나 있다. 프랑크의 제자들 가운데에는 듀파르크(1848-1933))나 쇼송(1855-1899)처럼 가곡의 작가로서 뛰어난 일을 한 사람들도 있으나, 대부분이 교향곡이나 실내악 등의 고전적 형식을 써서 작곡하였다. 샤브리에(1841-1894)는 랄로와 함께 색채적인 화성과 관현악법에 의하여 인상주의 음악의 선구를 이루었고 계속하여 비제(1838-1875)는 오페라 <카르멘>으로 프랑스의 독자성과 그의 개성을 명백히 하였다. 프랑스적인 표현을 위한 형식의 개척과 그 달성에서 공적이 있었던 사람들로는 포레(1845-1924)와 댕디(1851-1931)를 들 수 있다. 생상스의 가르침을 받은 포레는 단선성가(單旋聖歌)와 16세기 교회 다성악의 수법을 써 독일 낭만파적 음악어법에 신선한 프랑스적 색채를 더하였다. 그의 가곡에 넘쳐흐르는 멜로디와 펼침화음(分散和音)이 수놓인 피아노곡은 그 고도의 시적 서정성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또 프랑크의 우수한 제자였던 댕디는 대구성의 교향시적 작품에 걸출하였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수많은 제자를 육성한 탁월한 교사로서도 큰 업적을 남겼다. 이러한 사람들이 개척하고 서서히 풍부한 자양미(滋養美)를 지니게 한 프랑스 음악이라는 토양 속에 훌륭한 꽃을 피우게 하여 독일·오스트리아의 음악과 함께 세계의 높은 봉우리를 쌓아올린 사람은 포레의 제자이기도 한 드뷔시이며, 또한 수십 년 뒤의 라벨이라 하겠다.
Italia-近代音樂 19세기 전반에서의 이탈리아 오페라의 만네리즘과 저속화는 세계에서 이탈리아 음악의 명성을 실추시키고 확고한 힘으로써 대두한 독일 낭만파 음악에 그 왕좌를 물려줄 처지에 빠졌으나, 19세기 후반에 활약한 베르디의 작품은 오늘날까지 전세계의 오페라 극장에서 상연되는 레퍼토리로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Giussepe Fortunio Francesco Verdi 베르디(1813-1901)의 초기에 발표된 애국적인 오페라는 당시 오스트리아의 압정 아래 고생하며 독립을 갈망했던 밀라노 사람들에게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의 오페라에서 중심인물은 주로 남성이며, 더구나 바리톤이 주역 성격을 띠는 수가 많다. 이것은 애국적인 테마를 지님과 동시에 그때까지의 이탈리아 오페라에서는 볼 수 없었던 특징이라 하겠다. 그 뒤로 점차 대중의 요망인 애국적 테마에 중점을 두는 입장에서 벗어나 이른바 중기(中期)의 성숙된 작품, <리골레토>, <춘희>, <운명의 힘> 등으로 성공을 거두었으며, 1869년에는 카이로의 가극장 위촉으로 수에즈 운하의 개통을 축하하는 대가극 <아이다>를 발표하였다. 베르디는 바그너와 같은 해에 태어났는데, 바그너의 악극론은 극히 본질적인 문제로서 베르디의 오페라관(觀)에 영향을 주고 있다. '극과 음악의 통일'을 달성하기 위하여 개개의 등장인물의 성격을 리얼하게 그리고 전체의 앙상블을 중시하며, 종래의 이탈리아 오페라처럼 오케스트라를 단순한 화성적 반주로 다루지 않고 바로 극적 진행을 내용적으로 돕고 등장인물의 심리를 표현하여 전체적인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수법으로서 적극적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탈리아 사람인 그는 어디까지나 그침없이 이어 흐르는 멜로디를 소중히 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생각이 잘 전달되어 성공한 작품으로 <오셀로>(1887)를 들 수 있겠다. 그는 셰익스피어, 실러, 뒤마, 위고 등 대작가의 작품을 수없이 오페라화하고 있다. 특히 셰익스피어의 것은 <오셀로> 이전에도 <맥베스>를 비롯하여 <헨리 4세>, <윈저의 명랑한 아낙네들> 등 매우 많다. 이것은 거친 줄거리에만 의존하지 않고 인물의 심리에 깃든 뉘앙스나 극의 진행에 리얼리틱한 깊이가 있는 것을 추구(追求)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작품이 오페라로서 성공한 중요한 원인으로는 그가 대작가의 작품까지도 반드시 무대작품의 경험이 풍부한 각색가에 의하여 개서된 오페라 대본을 바탕으로 하여 작곡하였다는 점을 들고 있다.
Giacomo Puccini (1858-1924) 베르디 이후의 이탈리아 최대의 오페라 작곡가다. 베르디, 바그너와 함께 오페라의 3명인(名人)으로 불린다. 그의 음악은 우미(優美), 가련한 선율로 청중을 유도, 관능에 호소하여 취하게 만든다. 대대로 음악가 집안이어서 푸치니는 5대째다. 그의 작품 중 <마농 레스코> <라 보엠> <토스카> <나비부인> 등이 자주 상연되고 있다.
Verismo 眞實派, 寫實派 입센이나 졸라에 의한 문학상의 리얼리즘 영향 아래 반(反)낭만주의를 내세워 '베리스모'라 칭하는 작곡가들이 일련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레온카발로(1858-1919)의 <광대>, 마스카니(1863-1945)의 <카바레리아 루스티카나>, 푸치니(1858-1924)의 <나비부인>, 조르다노(1867-1948)의 <안드레아 세니에> 등이 그것이다. 이것들은 작품으로는 베르디 등의 대가극에 비하여 약간 규모가 작으며 나약하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으나 낭만파 오페라에서 현대 오페라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시도로서 그 문제의식과 노력을 높이 평가해야만 한다.
Italia-器樂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독일 낭만파와 프랑스 인상파의 영향을 받은 이탈리아에 안티 로망, 안티 멜로드라마의 의미를 포함하여 기악이 부흥하였다. 즈간바티(1843-1914), 봇시(1861-1925), 마르투치(1856-1905) 등이 주요한 작곡가로서 그들은 오래도록 잊혀져 있던 이탈리아의 전통을 재현하여 순음악으로 복귀한다는 목표를 지님으로써 그 활동을 두고 이탈리아 음악상의 르네상스라고도 했으나, 그것의 진정한 의미로의 달성은 20세기 초엽이 되어 레스피기나 그 밖의 사람들의 활약에 기대를 걸어야 할 것이다. 왜냐 하면 그들이 실제로 창조한 음악은 이탈리아의 전통과는 상반하는 독일 낭만파 음악의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운동의 선구자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근대에서 현대로 발전시킨 사람들이라 하겠다.
America-近代音樂 아메리카 합중국은 역사가 짧기 때문에 유럽에서와 같은 통일적 낭만주의 운동은 없다. 적어도 19세기에는 작곡가는 물론 연주의 면에서도 유럽 음악가들에 압도되어 국민양식을 창조하는 거장은 없었다. 아메리카 원주민은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있었으나 그들의 노래는 점차 하인리히 등에 의하여 유럽풍의 작품소재로 쓰이게 되었다. 그러나 원주민은 아니나 역시 배타적인 사회에 대항해야만 했던 흑인들의 생활 속에 뿌리박고 있는 이른바 흑인영가(黑人靈歌)의 존재와 그 영향은 더욱 주목할 만하다. 포스터(1826-1864)는 흑인영가를 소재로 뛰어난 가곡을 작곡하여 성공한 최초의 작곡가라 하겠다. 포스터와 같은 시대의 고트샤룩(1829-1869)은 살롱 작곡가로서 유럽문화 우선의 풍조를 높였다. 그는 에스파냐풍의 화려한 작품 외에 남아메리카의 스람에서 음악적으로 자극을 받은 작품(반브라, 하바네라, 탱고 등)을 썼다. 오랜 기간을 두고 영국의 영향이 강하였던 아메리카 북동부 출신의 메이슨은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의 선율을 써서 찬송가집을 만들었고, 또 출판활동에서는 독일음악을 우선시켰다. 그의 뒤에는 페인(1839-1906), 차드빅이 있다. 맥도웰(1861-1908)은 또 스코틀랜드계의 작곡가·피아니스트로서 리스트와 알게 되어 우선 파리와 독일에서 연마했으며 1888년 이후는 미국에서 활약하였다. 대표작인 관현악곡 <인디언 모음곡>이나 피아노곡 <숲의 스케치>는 유럽의 낭만주의적 경향을 반영시키고 있다. 그 밖에도 레플러(1861-1935), 허들레이(1871-1937) 등이 후기낭만파의 작풍을 보이는 작곡가로 손꼽을 수 있다.
Stephen foster (1826-1864) 최초의 토박이 미국 노래를 만든 사람이다. 소박하면서도 외우기 쉬운 멜로디와 쉽고 서정성 풍부한 가사로 된 그의 노래들은 누구에게나 친근하여 세계 어디에서나 불린다. 200곡 이상을 써써 지금 남아 있는 노래가 188곡이고 거의 자신이 작사한 것이다. 그 중에서 특히 <스와니강> <켄터키 옛집> <올드 블랙 조> <오 수잔나> 등이 애창곡이다.
民族主義音樂 내셔널리즘이란 말은 '민족주의'와 '국민주의'라는 두 가지 말로 번역되어 쓰이는데, 이 두 가지 말은 다소 구분되어야 할 듯하다. 19세기의 자본주의가 융성했던 시대에 민족국가 형성의 움직임에 따라 나타난 음악상―예술상의 운동을 '국민주의'라 하였고, 19세기 말부터 20세기에 걸친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정책에서 각국의 독립 움직임에 따라 하는 운동을 '민족주의'라 부르고 있다. 음악양식에 민족적인 것이나 국민성을 도입시킨다는 것은 19세기뿐만 아니라 훨씬 전부터 있었던 일이다. 그러나 그 전부를 음악이라 부를 수는 없으며 어떤 사회적, 정치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그 시대의 주요 예술사조로서 의식적으로 민족적 음악 소재를 작품화했을 경우에 그렇게 부른다.
國民主義-音樂 유럽의 시민혁명기에 있어서 봉건성을 타파하고 각 민족이 통일적 근대국가를 형성하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였을 때 봉건적인 것과의 투쟁으로서 자유주의가, 또 개인의 감정이나 감각의 해방을 표현하는 낭만주의가 태어났으며 그와 동시에 각 민족의 정치적, 사회적 유대를 표현하는 것으로서 음악상의 국민주의가 강력한 사조로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국민주의는 그러한 것이기 때문에 중세 말에 이미 국민주의를 형성하고 있던 영국, 프랑스 등 이른바 선진국에 비하여 독일이나 동구(東歐) 여러 나라의 후진국에서 특히 강조되고 있음은 당연하다.
國民主義音樂-特色 각 민족이 전통적으로 자라온 민요나 춤곡 등을 중시하는 것이 그 주요한 특색이다.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작품 속에 도입하는 경우도 많으나 그것이 지니는 에너지의 바탕이 되어 있는 음악형식이나 여러 음악어법을 쓰기도 하고, 또 민요의 가사나 전승문학(傳承文學), 혹은 전설, 고담(古譚), 역사, 자연풍토, 민중생활 등을 소재로 하기도 하며 그 시대의 국민주의적인 새로운 문학을 제재로 자국어로 된 성악곡이나 오페라, 교향시, 모음곡(組曲) 등의 표제음악을 작곡하는 일이 성행하였다. 이러한 활동의 융성은 그 때까지 음악문화의 번영이 중앙 유럽 중심이었음에 대해 주변의 각 민족 가운데에서 작곡가의 출현을 촉진시키고 바로 그것이 이른바 '국민악파'의 활약시대를 낳은 것이었다.
Glinka 以前-Russia 音樂 18세기 전반의 러시아에서는 아직 음악은 단순한 오락의 수단으로 생각되어 천한 것이라 하여 귀족이 다룰 것이 못 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또 순수기악보다 오페라나 가곡(가사가 있는), 무용을 위한 음악이 존중되어 왔다(이것은 후세의 러시아 음악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 무렵의 음악은 거의가 외국인의 손에 의하여 존재했었으나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점차로 러시아인 작곡가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로맨스'라는 정서적인 감미로운 피아노 반주가 붙은 가곡 형태가 러시아적 예술가곡으로 탄생했다. 이를 낳은 것은 귀족계급의 딜레탕티즘이라 하겠다. 프랑스 혁명 이후, 음악은 겨우 예술로 생각하게 되었고 상류계급에서 작곡이나 연주에 힘을 기울인 사람들이 나오게 되었다. 이들 귀족 아마추어 작곡가들의 딜레탕티즘이 이후에 러시아의 뿌리 깊은 전통이 되고 러시아 음악의 원천이 되었던 것이다. 19세기 초엽 이와 같은 작곡가에는 <꾀꼬리>로 대표되는 로맨스 작곡가 아라비에프(1787-1851)나 <빨간 사프란>으로 알려진 오페라 작가 와르라 모프(1799-1861)가 있다.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원정이 실패로 끝나고 러시아가 강국으로 크게 어필하게 되자 당시 유럽에 고조되고 있던 국민주의·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아 러시아 국내에서도 민족의식에 각성하여 슬라브 중심사조가 높아졌다. 상류사회에서는 "고뇌하는 세계를 구원하는 대러시아"의 문학적 사명에 적합한 강력하고 국민적이며 애국적인 작품의 욕구가 높아졌다. 그러한 결과로 음악은 단순한 오락이 아니고 그와 같은 사명을 지닌 예술로 승격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회적, 문화적 조건이 글린카를 낳았고 이어 러시아 음악의 개화를 가져왔다.
Russia 藝術音樂-開花(글린카와 다르고미지스키) 미하일 이바노비치 글린카(M. I. Glinka, 1804-1857)는 초기에는 이탈리아에서 도니체티, 베를리오즈 등 오페라 작곡가의 영향을 받았으나, 그 뒤로는 참된 러시아 국민 오페라의 창조를 목표로 귀국하였다. 그리고 폴란드의 침입군에 대한 러시아인의 애국 이야기 '이반스사니'를 바탕으로 한 오페라 <황제에 바친 생명, 1836년 초연)을 작곡하였다. 러시아 민요의 선율을 많이 사용한 이 오페라는 독일이나 이탈리아의 양식에서 완전히 탈피하였다고는 할 수 없으나 최초의 러시아 국민 오페라이다. 오페라 <루슬란과 루드밀라>(1842)나 그 밖의 작품도 민족적 색채에 넘쳐흐르는 국민주의 음악형태의 전형을 이루고 있다. 그의 업적으로 뿌리를 뻗기 시작한 국민주의는 뒤를 잇는 다르고미지스키와 세이로프에 의하여 더욱 확고한 것이 되어 '5인조'의 작곡가들로 그 결실을 맺는다. 알렉산드르 다르고미지스키(A. S. Dargomyzhsky, 1813-1869)도 러시아 민족의 음악성을 기조로 한 몇 개의 가곡을 작곡하였고 또 그가 죽은 후는 림스키코르사코프에 의하여 완성된 오페라 <석상(石像)의 손님>으로 러시아어의 억양이나 악센트의 음악화, 즉 말의 뜻에 음악을 종속시키는 방법을 취하고 있는 것 등 '5인조' 특히 무소르크스키에 미친 영향은 크다고 하겠다. 그들에게 있었던 '민족성'과 '서구의 기술'이라는 2개의 요소를 연장시켜 발라키레프를 중심으로 하는 '5인조'와 루빈스타인 형제 및 차이코프스키에 의한 '서구악파(西歐樂派)'가 다양한 꽃을 피우고 있다.
五人組 '5인조'라는 것은 서구에서 쓰이는 통칭으로, 원래는 '든든한 친구'라는 이름의 그룹이었다. 조직자인 발라키프(1837-1910)는 글린카의 뜻에 공명하여 새로운 러시아 국민음악의 창조에 착수, '든든한 친구'를 결성하였던 것이다. 1862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무료음악학교를 설립하여 민간으로부터 유능한 음악가를 육성하는 것과 그 학교에서의 연주회로 '5인조'의 작품을 소개하는 일에 힘썼다. 그는 화성학이나 대위법 등의 작곡기법보다 러시아 민요의 바탕에 깔린 아름다움과 힘참을 소중히 여겨 스스로 러시아 각지를 돌며 민요채집을 하고 1866년에 <러시아 민요집>을 출판하였다. 보로딘(1833-1887)은 화학자로서 일생을 보낸 사람이나, 발라키레프와 알게 되어 1869년에 <교향곡 제1번>을 발표한 이후 적극적으로 작곡활동을 하였다. 그의 작품은 모두 동양적 색채가 짙어 국민악파의 음악으로서 전형적이라 하겠다. 퀴(1835-1918)도 축성가(築城家)로서 일생을 보냈던 사람이며 보로딘과 마찬가지로 음악가로는 아마추어이며 <대위의 딸> 등 수곡의 오페라와 소수의 관현악곡 외에는 살롱적인 소품이 있을 뿐이며 그것들은 매우 러시아적이나 다섯 사람 가운데에서 가장 작품이 적다. 림스키코르사코프(1844-1908)는 1865년경부터 교향곡이나 기타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 관현악곡 <사드코(1898)>로 이미 독자적인 스타일 ― 즉 민속적 전설을 바탕으로 한 환상성(幻想性), 극히 색채적인 오케스트레이션, 객관적 묘사 등 ― 을 전개하였다. 그의 문하에서는 이포리토프이바노프, 그레차니노프, 체레프닌, 스트라빈스키, 미야스코프스키 등이 배출되었다. 또 그 사이에도 <관현악법>을 저술하였으며 그의 화성상의 독특한 색채나 관현악법의 새로움은 그의 제자, 특히 스트라빈스키 등에 영향을 주었으나 그 밖에도 라벨이라든가 레스피기 등 후세의 다른 나라 작곡가의 작품에서도 그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무소르크스키(1839-1881)는 발라키레프로부터 작곡 지도를 받아 전문 작곡가로서 성공하려 하였으나 경제적으로 곤란하여 일생을 공무원으로 지냈다. 그의 작품에는 큰 곡은 적으나 모든 곡이 러시아적 풍부함과 근대적 음빛깔이 하나로 되어 자아내는 지적인 구성과 섬세한 울림이 있다.
Russia 音樂-西歐化 무소르크스키와 보로딘의 재능으로써 예술적으로 높은 가치를 창조한 '5인조'는 슬라브 중심사조의 몰락과 더불어 비교적 빨리 해체되었다. 국민악파의 사람들은 서구의 아카데믹한 작곡기술과 절대음악을 경시했다(보로딘을 어느 정도 예외로 하여). 그들의 작품이 오페라 가곡, 표제음악으로 되어 있던 점은 전(前)시대의 러시아적 음악관 그대로의 계승이다. 림스키코르사코프만은 국민악파의 입장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기술적 미숙을 절감하여 서구고전기법(西歐古典技法)을 익혀 작곡에 전념하는 직업적 활동을 하였다. 그는 이러한 점에서 서구악파의 사람들과 가깝다고 하겠다.
西歐樂派 국민악파의 보수성을 타파하고 러시아 음악에 새시대를 초래케 하는 움직임은 안톤 루빈스타인(1829-1894)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그는 피아니스트로서 세계적으로 유명하였으며 조직자로서도 매우 유능한 사람으로서 동생인 니콜라이 루빈스타인(1835-1881)과 함께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에 러시아에서는 처음으로 음악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독일이나 체코 등에서 작곡이론과 기악연주의 교사를 초청하여 전문적으로 음악가를 육성하였다. 한편 1859년에 '러시아 음악협회'를 설립하고 해마다 정기연주회를 20회나 열어 청중을 계몽하였고, 악단을 조직적으로 통일시키며, 음악가의 사회적 지위를 높였고, 기술과 양식을 존중, 절대음악을 높이 평가하는 교육을 하여 러시아 음악사상 비로소 '음악문화'를 목표로 한 혁신적 활동을 하였다. 국민악파의 사람들이 모두 귀족 출신이었는 데 대하여 루빈스타인은 새 중간층의 자제이며 처음부터 음악을 '직업'으로 삼아 직업인의 의식을 지닌 새로운 타입의 음악가였다. 이 루빈스타인의 교실에서 러시아가 자랑하는 대작곡가 차이코프스키가 탄생하였음은 특기할 만한 일이라 하겠다.
Peter Ilyich Tchaikovsky 차이코프스키(1840-1893)의 개성은 유럽적인 음악어법과 러시아적 감정이 융합함으로써 성립되었다. 민요적인 선율이나 러시아적 정감을 위주로 하여 그것을 정리하고 하나의 형태 속에 넣기 위하여 고전적 형식을 썼다. 그러나 이 관현악법의 숙달은 그때까지 러시아에 없었던 대규모의 교향적 작품을 가능케 하였다.
Academism-其他音樂史潮농노해방 이후 러시아 사회의 자본주의화에 따라 주로 소시민계급 출신의 자제로 된 직업음악가나 우수한 연주가의 출현과 음악 소비자층의 확대 등이 음악출판, 악기의 제조 등을 발달시켜 음악의 기업화가 형성되어 '베라이에프 집단'이 왕년의 '5인조'를 대신하여 러시아의 음악문화를 이끌어 갔다. 러시아 음악이 유럽이나 아메리카에 수출될 정도가 되자 당연히 국내에서의 음악가 지위도 확립되고 경제적 안정도 확보되었다. 이리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과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들을 중심으로 아카데미즘이 대두하여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국민악파로부터 민족성을, 서구악파로부터 높은 기술을 계승하면서도 그 어느 쪽이나 그들의 절실한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인지 민족적 색채는 정형화하여 생기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기법은 멋대로 독주하여 무의미한 중압감을 주는 폐해를 가져왔다. 한편 시민사회의 발달에 따라 프티부르주아적 생활감정과 비정상적일 정도로 예민해진 감각이 발생하여 그러한 것들이 문화의 면에 데카당스적 양상과 극도의 난숙을 가져왔다. 그것은 마침 서구에서 보들레르와 니체가 들어왔다는 점과 앞서 말한 아카데미즘에 의한 반발에 유발되어 신비주의, 심미주의, 상징주의, 인상주의 등을 육성하였다. 또 전음음계나 4도화음의 사용으로 러시아 모더니즘의 선구가 된 레비코프(1866-1920)의 '실험음악', 메트넬(1879-1951), 라흐마니노프(1873-1942), 미야스코프스키 등의 의고주의(擬古主義) ― '차이코프스키로 돌아가라' ― 등도 반(反)아카데미즘 사조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반아카데미즘이 '5인조'에서 볼 수 있었던 원시적인 것에 의한 향수와 모더니즘이 결부되어 다음에 스트라빈스키나 프로코피예프 등의 작품을 낳게 된다.
Poland-民族主義音樂 폴란드에 민족주의 음악을 발생시킨 사람은 도브르첸스키(1807-1867)이며 그것을 낭만파적으로 더욱 세련되게 한 사람이 쇼팽(1810-1849)이다. 그보다 약간 늦게 활동을 시작한 모뉴시코(1819-1872)는 애국적 오페라 <하르카>로 처음으로 폴란드의 오페라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을 썼으며 이 밖에도 많은 민족적 오페라와 가곡을 작곡하였다. 이어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 피니아프시키(1835-1880)가 독일 낭만주의에 슬라브적 향기를 자아낸 바이올린을 위한 곡을 남겼고, 세계적 피아니스트 파데레프스키(1868-1941)도 작곡가로서 활약하였다. 한편 그는 제1차대전 후 독립한 폴란드의 초대수상에 취임한 바 있다.
Czecho-民族主義音樂 19세기의 낭만사조가 체코에도 전해져 민족, 인류의 역사를 존중하는 헤르더의 사상이 민족주의, 특히 체코 음악문화에 대한 존중을 강조한 뒤부터 이 나라의 민족주의는 각성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체코는 처음으로 예술의 면에서 독자적인 음악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시크로프(1801-1862)의 자국어로 쓴 오페라 <도라테니크>에 의하여 시작된 체코의 민족주의 음악은 민족가극 <팔려간 신부>나 <나의 조국>, <나의 일생에서> 등의 표제를 가진 교향관현악이나 현악4중주곡을 쓴 스메타나(1824-1884)에 의하여 정점에 이르렀다. 스메타나와 함께 체코의 음악예술을 높인 드보르자크(1841-1904)는 독일음악의 영향이 보이는 순수기악곡을 많이 썼으나 그것은 슬라브적인 색채가 짙다. 그러나 다음의 피비히(1850-1900)나 펠스터(1859-1951)의 대에 이르러서는 민족적 색채가 희박해지고 다시 국제적인 작풍이 강해져 국민악파의 전통에 바탕을 둔 오페라 <이에느파>를 써서 '체코의 무소르크스키'로 불렸던 야나체크(1845-1892)의 작품도 근대적 경향을 다분히 가지게 되었다.
Norway-民族主義音樂노르웨이의 예술음악은 1814년 이 나라 독립 후에 시작된다. 이 나라의 본격적인 국민음악은 그리그(1843-1907)에 의하여 수립되었다. 그의 모음곡 <페르귄트>나 많은 피아노곡, 성악곡은 신비적이면서 구슬프며 그 반면에 열광적인 노르웨이 민요의 아름다운 선율과 리듬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Finland-民族主義音樂 핀란드의 예술음악은 19세기에 와서 독일인에 의하여 개발되기 시작하였다. 독일인인 파키우스(1809-1891)가 그 기초를 닦았으며 최초의 핀란드 오페라라고 하는 <카롤왕의 사냥> 등을 작곡하였다. 핀란드인으로는 카야누스(1856-1918)가 <칼레발라>에 의한 교향시를 작곡하여 국민악파를 확립시켰다. 그러나 핀란드의 예술음악을 대성시킨 사람은 장 시벨리우스(1865-1957)이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그의 7개 교향곡이나 <핀란디아> 등의 교향시는 핀란드 민속음악의 선율을 쓰지는 않았지만 핀란드의 국민성을 잘 전하고 있다.
Jean Sibelius (1865-1957) 세계의 어떤 음악 유파와도 상관없는 가장 핀란드적인 작곡가다. 음악을 좋아하는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 5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고, 15살 때는 바이올린도 배웠다. 헬싱키 음악원에 입학하여 베겔리우스에게 작곡을 배우고, 피아노 교사 부조니와도 알게 되었다. 1889년에 음악원을 졸업하고 베를린에 유학하여 베커에게 사사했다. 이듬해에는 빈으로 유학하여 골드마르크나 푹스에게 사사했으며, 브람스와도 친교를 맺었다. 1892년에 귀국하여 헬싱키 음악원의 작곡 및 바이올린 교수로 취임했다. 작품으로는 국민적 대서사시 <칼레발라>에 의한 독창, 합창, 관현악을 위한 교향곡 <쿨레르보>, 교향시 <엔 사가(전 설)>, 모음곡 <카렐리아>, 교향시집 <카레발라에 의한 4개의 전설>, 교향시 <핀란디아> 등이 있다.
Spain-民族主義音樂 에스파냐의 국민오페라 운동은 페드렐(1841-1922)에 의하여 그 기초가 수립되었다. 한편, 명바이올리니스트인 사라사테(1844-1904)는 <지고이네르 바이젠>, <에스파냐 춤곡> 등 민족적인 바이올린곡을 남겼다. 20세기에 이르러서는 알베니스(1860-1909), 그라나도스(1867-1916), 팔랴(1876-1946), 토우리나(1882-1949) 등이 인상주의적인 수법을 쓰면서 에스파냐 국민악파를 확립하였다. 특히 팔랴는 에스파냐 최초의 예술오페라 <덧없는 생명> 등의 작곡으로 이 나라 최대의 작곡가로 불린다.
現代音樂 '현대음악'의 범위에 대하여 현재로는 별다른 정설(定說)이 없다. '현대음악'이라는 말이 '바로크 음악' 등과 같이 음악사적 양식개념(樣式槪念)을 토대로 하고 있지 않다는 점과 지금의 현재가 바로 현대라는 것, 그리고 시대개념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음악관―드뷔시보다 이전의 음악까지도 현대음악으로 보든가 또는 쇤베르크까지도 이미 과거의 것으로 느끼든가―에 따라 큰 차가 생기기 때문에 명확한 정설을 짓기는 어려운 것이다. modern music, contemporary music, music of today 등의 외국어는 '근대음악', '현대음악', '20세기 음악' 등으로 번역되긴 하나 그러한 것들이 가리키는 내용은 애매하다. '20세기 음악'이 연대적으로 명확한 듯하나 20세기에의 모든 작품을 ― 극히 낭만주의적인 것이나 전위적인 것도 ― 여기에 포함시킨다면 그것은 무의미하다고 하겠다. 대개는 다음과 같이 셋으로 구분할 수 있다. 즉 가장 넓은 뜻으로는 20세기 초 이후 가장 좁은 뜻으로는 제2차대전 이후, 그 중간은 제1차대전 이후의 작품을 '현대음악'으로 논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당연하긴 하나 연주가를 통해서밖에는 작품을 접촉할 기회가 없는 일반 청중들에게는 상당히 오래된 작품도 새롭게 보이며 기이하게 느껴지므로 넓은 해석을 하기 쉬우나, 전위작가나 그 지지자들은 극히 새로운 것만을 가리켜 협의(狹意)로 생각한다. 협의의 '현대음악'을 지지하는 견해의 또하나의 중요한 이유로는 제2차대전 이전의 음악은 양식적으로는 전세기(前世紀)음악과 매우 다른 면을 가지면서도 본질적으로는 극히 낭만주의적인 것을 느끼게 하는 데 대하여 제2차대전 후에 출현한 새로운 양식은 그것과의 단절(斷絶)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들 수 있다. 여기서는 가장 넓은 범위, 즉 금세기 초부터의 여러 가지 새로운 양식을 살피고자 하며, 19세기 후반의 바그너 등을 중심으로 하는 후기낭만파가 독일·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찬란하게 꽃피우고 다른 나라의 음악들은 마치 그 그늘에 가려져 있는 듯함에 대하여, 금세기의 특징으로서 음악 창조의 무대가 세계적으로 넓어졌고 또 민족의 피를 이어받은 작곡가끼리 같은 작곡양식을 취하거나 또는 같은 나라 안에서도 각종 양식이 존재하는 일이 적지 않은 현상이 되었음을 들 수 있다.
十九世紀末-第一次大戰 1890년부터 1917년까지인 이 시기의 음악은 독일·오스트리아 권외(圈外)인 각국에서도 개성적으로 전개되었다고는 하나 바그너의 반음계적 화성을 기초로 점차로 조성(調性)이 애매해지기 시작한 낭만파의 양식에서 약간이나마 자유로웠던 것은 없고 바그너의 양식을 더욱 발전시켜 마침내는 쇤베르크 등에 의한 무조음악(無調音樂)으로 발전하든가 또는 사티나 드뷔시와 같이 중세의 교회선법이나 민족적 5음음계, 전음음계 등을 써서 의식적으로 바그너로부터의 탈출을 시도하든가 했다. 전체로서는 낭만주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 있던 시기이지만 그 가운데에도 몇 개의 새로운 양식이 탄생하였다.
印象主義 Impressionism 처음은 회화세계에서 사용된 이 말은 드뷔시의 독창과 오케스트라의 작품 <봄>(1887)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쓰이고부터 음악세계에서도 쓰이기 시작하였다. 환상적(幻想的)이며 빛이라든가 바람과 같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 자아내는 자연의 아름다움의 순간적 인상을 음빛깔(音色)에 정착시키려 함을 말하며, 따라서 그 때까지의 음악처럼 다이내믹한 발전을 가능케 하는 형식 대신 순간순간에 그 자체로 존재하는 매혹적인 울림으로써 성립되는 극히 탐미적인 음악이다. 드뷔시는 상징파의 시인 말라르메의 <목신(牧神)의 오후(午後)>를 토대로 한 전주곡(1892-1894)으로 바그너적 음악과 결별하고 인상주의 수법을 확립시켰다.
原始主義 Primitivism 19세기 말의 극도의 문화적 난숙이 이루어진 가운데 굴절이 심하고 복잡한 정신생활에 대한 권태에서 원시의 생명에 동경하여 사람들은 단순한 리듬과 루오나 고갱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원색적(原色的) 음향에 신선감을 느꼈던 것이며, 또한 원시주의는 19세기의 민족주의 음악이 지녔던 에그조티즘(異國情調)의 발전이기도 했다. 원시주의의 정점에 선 스트라빈스키의 몇몇 발레곡은 후기 낭만파풍의 대편성 관현악을 쓰면서 드뷔시의 인상주의적 화성법을 계기로 전통적 기능화성을 떠나 민요나 민족무용이 지니는 원시적 에너지를 발산시키고 있다. 이국주의(異國主義)마저 지닌 광의로의 원시주의는 제2차대전까지의 졸리베나 메시앙에서도 볼 수 있으며 여러 가지 이국의 음악미(音樂美)가 들어왔다는 점에서 지금까지의 서양음악과는 이질적인 비합리성이나 크리스트교 이외의 종교를 토대로 한 음악현상이 신비주의를 낳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神秘主義 Mysticism 직관으로 자연이나 신의 본질을 인식하고 이로써 지고(至高)의 경지(境地)와 법열감(法悅感)에 이른다는 종교적 체험을 바탕으로 한다. 사티가 한때 신비주의적 작풍을 보였으나 유대교도였던 스크랴빈은 이 종교적 체험과 예술감각과의 일치에서 독특한 작풍을 낳았다. 신비화음(전음계와 4도 구성화음으로 이루어지는 6음으로 되어 있다)이라는 독자적인 음체계를 발명하여 멜로디나 화성도 모두 이 6음으로 된 음렬에서 나오게 한다는 훗날 쇤베르크에 의한 음렬기법을 생각게 하는 수법을 엄격히 쓰고 있다. 그리고 음만이 아니라 색채를 내는 건반을 가진 도구를 쓰기도 하고 스크린에 색채의 변화를 영상시키기도 하고 마지막에는 향기나 맛까지 포함시킨 모든 감각을 동원하는 '신비극(神秘劇)'마저 계획되고 있다.
表現主義 Expressionism 19세기의 후반에 프랑스에서는 인상주의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기 시작하였으나 독일에서는 후기낭만주의의 침체 속에서 탈출구를 찾지 못해 중압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한 때에 회화분야에서는 '분리파(分離派)'라는 사람들의 활동(1892·뮌헨)이 발단이 되어 금세기 초에 '다리(橋, 디 브뤼케)'나 '청기사(靑騎士·부라우에 라이터)' 등의 새로운 운동이 일어났으며 이에 자극을 받아 쇤베르크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경향의 음악이 대두하기 시작했다. 인상주의에의 반발이기도 한 표현주의는 삶에 대한 불안, 공포, 죽음, 황홀, 괴기적인 환상, 예언 등을 주제로 하고 대상을 거절하여 어디까지나 독자적인 감정세계를 주관적으로 표현한다. 하나의 상태, 하나의 심리가 비정상적으로 확대되어 데포르메되어 묘사된다. 그러한 것을 표현하기 위한 새로운 음악소재와 음공간이 탐구되었다. 가락, 리듬, 음넓이, 셈여림… 등 어느 면에서나 중용과 연속감은 제거되고 예상 외의 극단으로 변화하는 단편(斷片)이 잇달아 나타난다. 음조직의 면에서는 반음계적 조바꿈(轉調)의 빈번한 사용에서 마침내는 무조(無調)로 나아가고, 또한 음렬기법, 12음기법을 발명하였고 또 악구(樂句)의 단편화는 경구적(警句的)인 매우 짧은 음악을 낳고 분단된 멜로디선(旋律線)은 베베른의 점묘적 텍스처(點描的書法)를 낳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騷音主義 Bruitismus 이탈리아의 마리네티가 '속도의 미'와 '전통의 파괴'를 내세워 제창한 '미래파 선언(1909)'을 음악의 세계에 도입한 루이지 루솔로는 "오늘의 음악은 더욱 불협화한, 귀에 비정상적으로 울리는 음의 결합을 추구하며 이윽고는 전차나 자동차, 군중이 내는 소음을 이상적으로 구성시키는 편이 <에로이카>나 <전원(田園)>을 듣는 것보다 더 흥미롭다는 생각을 갖게 될 것이다"라는 견해에서 소음악기(Inton-arumori)를 발명하여 잡음만으로 구성된 음악을 발표하였다. 이는 현대음악의 한 방향을 극히 레디컬하게 표현한 것이며 후의 바레즈 등에 의한 타악기주의와 뮤지크 콩크레트, 케이지의 우연성(偶然性) 음악의 선구라 하겠다.
一·二次大戰期-音樂 1918년부터 1945년까지의 기간을 말하며, 특히 제1차대전 후의 음악계는 스트라빈스키의 <병사 이야기>를 위시한 여러 작품의 발표와 '6인조'의 활발한 움직임, 도나우에싱겐, 잘츠부르크 등에서의 현대음악제의 개시, 국제 현대음악협회(ISCM)에 의한 현대음악의 발표활동, 그것들을 통한 우수한 신인작곡가의 등장, 아메리카 재즈음악의 유럽에의 수입 등과 그 현대음악에 대한 영향 등으로 활기에 넘쳐 있었다. 그러나 제1차대전의 종료에서 온 안도(安堵)와 낙천적 기분은 전전(戰前)의 급진적인 여러 양식을 받아들이지 않고, 또 혼란된 예술을 고전적인 것으로 복귀시키려 하는 반동에서 소편성의 명쾌한 울림과 간결한 형식을 지니는 이해하기 쉬운 음악을 추구하였다. 그리고 1930년대에 이르자 나치스 독일의 파시즘과 소비에트의 스탈리니즘이 예술가의 자유로운 창작을 불허하게 되어 전위예술은 매장되고 작풍은 더욱 고전적인 것으로 되었으며 또 전시대적(前時代的)이며 과장스러운 낭만주의 음악이 애호되었다.
新古典主義 Neoclassicism 빈 고전파 이후에 나타난 음악으로서 명확한 조성감(調性感)과 함께 뚜렷한 형식감을 갖춘 일반적으로 호모포닉한 양식을 부르는 명칭이다. 스트라빈스키의 발레곡 <프르치 넬라>(1919)가 신고전주의 융성의 계기가 되었다. 반(反)바그너이즘, 반낭만주의를 표방하는 프랑스의 '6인조'는 비대병(肥大病)에 걸린 음악형식을 본래의 모습으로 되찾아 프랑스 고전정신의 회복을 목표로 하여 전음계적 화성법을 써서 소나타나 모음곡 형식으로 작품을 썼다.
民族的新古典主義 바르토크가 확립한 몇 개의 독자적인 음악어법(音樂語法)은 마자르의 민족음악 연구에 기초를 두고 있다. 초기의 작품으로는 전래(傳來)된 그대로의 소재로서 쓰였으나 1936년의 <현악기와 타악기의 첼레스터 음악>과 다음해의 <2대의 피아노와 타악기의 소나타> 같은 추상형식을 사용한 대작의 작곡에 즈음하여 그는 '배음렬음계(倍音列音階)', '황금분할(黃金分割)', '기능근친(機能近親)' 등 그의 독자적인 음악어법을 조작하여 이를 배타적으로 사용했다. 음계는 거의 반음계적이며 마쟈르 민요의 음계에 가깝기 때문에 민족음악 그 자체가 작품에 모습을 나타내지는 않으나 여기에는 민족적 색채를 느끼게 한다.
新神秘主義 스크랴빈이나 사티의 신비주의를 계승한 메시앙은 드뷔시의 기법을 기초로 하면서 카톨릭 신비주의의 입장에서 독특한 창조행위를 했다. 그는 신고전적인 '6인조'에 크게 반발하여 '젊은 프랑스'를 결성하였다(1936). 그의 박절(拍節)을 초월한 리듬이 만들어낸 '무박자 음악'은 '무조(無調)'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생각할 수 있다.
十二音主義 Dodecaphonism 쇤베르크는 1908년의 <제2현악4중주곡>의 끝악장에서 무조의 서법을 사용한 뒤부터 몇몇 음 그룹의 음정관계를 카덴차 구조에 대신하는 1종의 악곡통일을 위한 형식으로서 쓰는 '음렬기법(音列技法)'을 써왔으며 마침내는 옥타브 안의 12반음을 전혀 중복없이 써서 음렬을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전곡의 모든 선적(線的), 화성적(和聲的) 요소를 구성하는 작곡법에 도달하여 이를 '12음기법'이라 불렀다. 그러나 쇤베르크가 12음기법으로 음렬을 구성할 때에 자연배음(自然倍音)에서 유도된 조성이 지니는 자연의 근거를 무시하지 않고 배음이 주는 협화도(協和度)나 도미넌트 관계를 고려한 점이라든가 바로크나 고전형식을 쓰고 있음은 신고전주의적 정신과 관계가 없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12음기법은 양차 대전 동안은 제자인 베베른과 베르크가 계승하였으며 제2차대전 후에 보편화하여 이 기법을 사용한 작곡가는 급격하게 늘어났다.
新卽物主義 Neue Sachlichkeit 1920년대에 독일에서 주관적인 표현주의에 대한 격심한 반발에서 발생하였다. 객관적인 합목적성(合目的性)·실용성을 존중하는 경향을 말한다. 음악의 분야에서 실천적으로 이 경향을 보급시킨 사람은 힌데미트와 와일이었다. 음악은 사회생활의 필수품으로서 생산되어야 한다는 견해에서 힌데미트의 '실용음악'이라 불리는 용도에 따라 분류된 음악이나 와일의 <하류(下流) 오페라>를 위시한 무대작품 등 명랑하고 활발한 작품이 만들어졌다. 그들은 반음계와 안어울림음도 사용하고 있으나 전체로서는 조화감이 있는, 형태로서 본다면 네오 바로크풍의 음악이었다. 나치스가 대두한 후로는 두 사람이 모두 망명처인 미국에서 이 활동을 계속하였다.
Social Realism 1930년의 당대회(黨大會)에서 스탈린이 사회주의 국가의 문화에 대하여, '형식으로는 민족적, 내용으로는 사회주의적'이라는 구호를 내세웠으며, 4년 후의 문학자 회의에서는 고리키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한 규약이 채택되어, 첫째로 음악은 계급적 또는 국가목적에 따른 구체적 제재를 지닌 것(오페라, 칸타타)이 바람직하며, 대중이 알기 쉽게 작곡양식은 고전적 질서와 낭만성을 띤 19세기적 스타일을 기본으로 해야 한다는 철저한 방침에 따라 서구의 모더니즘은 전적으로 부정되었다. 그로 인하여 이 시기 이후의 러시아 작곡가는 신고전적 경향을 가장 농후하게 지니는 결과가 되었던 것이다.
打樂器主義 Percussionism 오페라나 그 밖의 작품에서 비악음(非樂音)의 사용은 바그너 등에 의하여 증대하고 있으며 루솔로는 그것을 가장 급진적, 실험적으로 제출하였으나 타악기주의는 바르토크가 원시주의(또는 민족적 신고전주의)의 입장에서, 그리고 힌데미트가 그 기계주의에서 피아노를 숙달, 타악기로 연주하는 작품을 쓴 데 자극되어 여러 가지 타악기나 방울, 자동차의 경적, 채찍, 사이렌, 철령(鐵令, 쇠망치돌) 등에 의한 합주가 융성하였다. 카를 올프는 중세 고전을 제재로 한 합창작품으로 전음계에 의한 대위법이 없는 느릿한 오스티나토 리듬이 전편을 일관하는 작품을 썼다. 그의 작품은 전위적 음악이 모두 추방된 나치스 독일의 시대에 나타나 공적으로나 또는 일반 청중에게도 환영받았다.
微分音主義 Microtonism 반음보다도 좁은 음정으로는 4분음이 그리스 시대부터 알려져 있으나 금세기에 와서 브조니는 3분음이 이상(理想)이라 생각하였으며 또한 체코의 하바는 합창곡이나 오페라까지 4분음, 또는 6분음으로 작곡하고 있다. 하바의 시도는 제2차대전 후 전자음악으로 이행하고 또한 불확정한 음정을 지니는 음군(音群)이라는 형태로 우연성의 음 속에서 발전시키고 있다.
電氣樂器 20세기에 와서 타악기주의 등의 영향으로 지금까지 합주에는 별로 쓰이지 않던 악기, 기타·쳄발로·첼레스타 비브라폰·글로켄스필 등의 왕성한 사용을 볼 수 있다. 한편 쇤베르크의 '음색선율(音色旋律)'의 사고방식은 전기적 조작(電氣的操作)을 이용하면 쉽게 실시할 수 있는 것이었다. 전기악기로는 양차 대전쟁 동안에 나타난 몇 가지 가운데에서 온드 마르토노가 많이 쓰였다. 그리고 전기악기는 그 뒤 전자악기로 발전하였다.
第二次大戰後-音樂 제2차대전 전의 극히 반동적인 시대에의 격렬한 반발에서 1945년 이후인 전후(戰後)는 완전히 새로운 영역을 추구하는 움직임이 몇몇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움직임의 성과로서 우수한 작품이 나온 것은 종전 후 10년 이상이나 지나서였다. 이와 같이 늦어진 원인의 하나는 이 대전이 가져온 경제적, 문화적 파괴의 규모가 크며, 젊은 세대 사람들의 희생이 많았다는 점과 많은 작곡가들이 미국에 살았으며 새로운 음악창조의 무대일 수 있는 유럽에는 가지 않았다는 점을 들겠으며, 또 하나는 종전 후에 탐구된 새로운 음의 소재나 방법이 그 때까지의 음악관과 단절되었던 것이기 때문에 모색과 시기가 오래 필요했던 것이다. 종전 후 국제간의 협력이 개시되고 1946년 이후 해마다 개최되고 있는 독일 다름슈타트에서의 국제 현대음악 하기강좌에서 그때까지 쇤베르크의 그룹에서만 개척되고 있던 '12음기법'이 젊은 세대나 후진국의 작곡가들에게 침투하여 연주회 등으로 일반 청중 앞에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전후의 세대는 아카데믹한 면을 지니는 쇤베르크의 기법을 과거의 것이라 하여 베베른의 기법에서 발전한 '뮤지크 세리엘' 이하의 새로운 양식으로 작곡하고 있다.
Musique Serielle 쇤베르크는 음높이(音高)에만 순열을 규정하였으나 베베른은 리듬까지 순열화하였다. 메시앙은 그 방법을 더욱 발전시켜 음높이, 리듬, 셈여림(强弱), 음빛깔(音色, 터치의 종류나 악기의 음빛깔) 등의 모든 것을 순열적(세리엘)으로 써서 개개 음의 속성(屬性)을 그 모든 면에서 고정화시켜 음을 일종의 오브제로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는 '뮤지크 콩크레트'와의 관련이 존재한다. 이 수법은 슈톡하우전이나 브레즈 등 젊은 세대에 크나큰 영향을 주었으며 슈톡하우전은 음의 속성에 방향성까지도 주고 있다(예를 들면 어떤 음높이의 음은 항상 오른쪽에서 들린다는 식의).
電子音樂 Electronic music 진공관이나 트랜지스터를 사용한 전자적 회로를 써서 음원(音源)을 얻고, 또한 그것을 변형하거나 중복시키고, 재생도 하는 종류의 음악을 말한다. 실제의 작품으로는 슈톡하우전의 <습작 Ⅰ, Ⅱ> 이후 뛰어난 성과를 올리고 있다.
Computer music 최근에 발달한 전자계산기에 여러 가지 정보를 주어 만든 음악으로, 최초에는 이것으로 고전적인 작품의 작곡을 하였을 뿐이었다. 그리스의 크세나키스는 '확률음악(確率音樂)'이라고도 부르는 음의 무리(音群)를 확률적으로 다룬 작곡법을 시도하였으며 이 방법의 경우 스스로 계산하는 것보다 컴퓨터에 프로그램을 넣어 작곡하는 편이 보다 정밀한 숫자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계산기를 사용하게 되었다. 한편, 뮌헨에서는 컴퓨터를 직접 전자음 발생장치에 접속시켜 테이프에 음악을 만드는 방법도 실험되고 있다.
Musique concrete 具體音樂 1948년부터 파리 방송국 기사 피에르 셰페르가 시작한 것으로, 철도의 음이나 동물의 소리 등 자연계의 음이나 악기의 음 등을 녹음하여 이를 기계적, 전기적으로 조작하여 변질시키거나 겹치기도 하여 음악작품을 만들었다. 이것은 음에 의한 쉬르리얼리즘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1952년에 브레즈나 메시앙이 뮤지크 세리엘의 양식과 전자음악의 양식에 가까운 구성적인 방법으로 뮤지크 콩크레트의 작품을 발표하고, 그 뒤 바레이즈, 하우벤 스톡크=라마티, 크세나키스, 페라리 등도 이 방법으로 작곡한 바 있다. 전자음과 소년의 노랫소리를 소재로 슈톡하우전의 전자음악 <소년의 노래>(1956)가 성공한 이후 이러한 종류의 작품이 많이 나타났다. 뮤지크 콩크레트풍으로 녹음한 음을 오브제적으로 쓰는 방법은 뮤지크 세리엘의 경우가 흡사하다고 하겠다.
偶然性-音樂 Music of chance operation, happening 불확정성(不確定性)의 음악이라고도 하며, 미국의 존 케이지는 너무나 추상화되고 정밀하게 구성된 예술음악 ― 고전에서 전자음악에 이르는 모든 것 ― 에 대한 철저한 반발로서, 무대 위에서 소리를 지르거나 음식을 먹거나 피아노를 부수고 스피커로써 소음을 내기도 하는 일종의 '쇼' 같은 행동을 한다. 또한 피아노곡 <4분 33초>(1954)에서는 피아니스트가 피아노 앞에 4분 33초 동안만 앉아 있다가 퇴장한다. 그 동안에 우연히 들려온 외계의 소리와 자기의 고동이 음악이라는 것이다. 케이지의 이러한 견해는 유럽 작곡계에 심각한 영향을 주고 있다. 슈톡하우전은 연주자들에게 어느 부분만을 자유로운 템포로 연주시킨다든가 몇 개의 단편만을 작곡해 두고 연주자가 그 가운데에서 아무렇게나(無作爲) 단편(斷片)을 추려 연결시키고 연주한다는 방법으로 케이지의 견해를 자기 작품에 채택하여 이후 이 방법은 일반화되고 있다. 또한 폴란드의 펜데레키는 <히로시마 희생의 애가>에서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린 파트의 음높이와 시가(時價)를 명확하게 지정하지 않고 대략의 높이나 움직임을 정해두는 방법에 의했으며 그 결과로서 몇 개의 현악기가 미분음적(微分音的)으로 서로 마찰하여 소리가 나도록 하는 효과를 꾀했다. 이와 같은 작보법을 더욱 발전시킨 것으로 '그래픽'이 있다. 가령 5선에 기보한다 해도 매우 다의적(多義的)인 해석을 허용한다면 처음부터 5선이나 음표(音符)를 나타내지 않고 그림이나 도안과 같은 것을 연주자가 갖고 있으면 된다는 사고방식이므로 이는 그 도표가 지니는 조형미적인 아름다움과 연주자에 의한 즉흥연주의 창조성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Synthesism 合成主義音樂 단일작품 속에서 서로 다른 수법과 여러 가지 경향을 함께 구사하는 것을 합성주의(Synthesism)라 한다. 합성주의의 실례는 프로코피예프(S. S. Prokdofiev, 1891-1953)의 <바이올린 협주곡 제2번>에서 볼 수 있는데, 이 곡에는 전통적인 조성에 의한 화음기법, 변형된 화성구조, 박자의 변화, 신낭만주의 및 신고전주의형식 등이 포함되어 있다. 블로흐(Ernest, Bloch, 1880-1959)의 <현악4중주 제2번>속에는 12음기법의 이디엄(idiom), 복조, 변박자, 광시곡풍의 요소(제1악장), 다이내믹의 강조(제2악장), 부분적 인상주의적 표현(제3악장), 신고전주의(제4악장) 등이 혼합되어 20세기의 위대한 현악 4중주곡의 하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합성주의는 미적 결합을 위반하지 않은 20세기의 절충주의라고도 일컬어진다.
Graphic Notation 그래픽 노테이션이란 음악적 구조와 표지방법을 그래프식으로 나타내는 기보법을 말한다. 즉 밀집해 있는 점들과 빈 공간은 행동과 침묵을 나타내는 소리이고, 안이 차 있는 점과 빈 점은 강약을 나타내며, 높은 점과 낮은 점들은 피치를 나타내고 전체구조의 길이는 진행시간을 나타낸다. 이와 같은 도식방법은 점들로써만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 형태는 거의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어서 다른 형태는 다른 연주자에게 상이한 개념을 주어도 좋다. 이와 같은 그래픽은 표준화를 필요로 하지 않지만 이는 작곡가의 창조적인 면의 집합체이므로 각 작품에서는 단일하게 나타내어져야 한다. 그리하여 연주자는 각자 상이하게 이해하게 되고 다르게 연주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기본적인 구별은 그래픽 악보의 위, 아래 축은 높고 낮은 피치를 나타내고 좌우축은 음의 동형진행을 나타내며, 까만 점과 하얀 점은 강약을 나타낸다.
點描主義音樂 Pointillism 1880년대에 조르주 쇠라(Georges Seurat)에 의해 고안된 그림으로 표시된 기보법으로서, 색깔은 점들과 짧은 선들의 모자이크로 표현되어지고, 그 점들은 색깔과 빛의 진동부분으로 바뀌어지도록 나타내었다. 점묘주의란 용어는 베베른(Anton Webern, 1883-1945)의 음악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고 이는 각각의 점들이 그 음색·강약 및 명료도(articulation)를 지니고 있어 상대적 고립이나, 일시적인 조화로써 청취되어진다. 미학적인 면에서 이러한 음들은 거대한 음악적 구조에서 들려지거나, 밀착시켜 나가는 형태에서 잘 조화될 수 있다.
確率音樂 연주나 작곡에서 우연성을 내포시키고자 한다면 수학적인 확률계산을 통하여 그 가능성을 작곡자가 예상할 수 있고, 만일 원치 않는 결과가 나올 때 또다른 결과까지도 예상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확률음악이다. 크세나키스의 '스토케스틱(Stochastic)' 음악에서 유래하는데, 이는 확률적으로 각각의 음들을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로써 조정되어지도록 한 것이다. 이와 같은 'Stochastic'이란 어원은 그리스의 'arget'에서부터 유래된 것이며 18세기 스위스 수학자 베르누이(Bernoulli)에 의하여 정의되어진 것이다. 크세나키스는 한 음의 역사는 시간에 따라 주어진 진동수의 그래프에 의하여 나타나며, 그 시간축에 따라 음의 피치와 강도를 확률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도록 고안한 것이다.
France-二十世紀音樂 드뷔시(1862-1918)에 관해서는 인상주의 항목에서 말하였거니와 바그너이즘을 작품에서 명확하게 표현한 사람은 에릭 사티(1866-1925)였다. 그는 신비주의적 비밀결사에 접근하여, 거기서 작곡한 <별의 왕자>를 위한 3개의 프렐류드(1892)에서는 4도화음의 퇴적(堆積) 연결을 빈번히 사용해 10년이나 빨리 쇤베르크의 무조(無調)를 암시하였고, 또 <자동필기(自動筆記)>라는 제명을 가진 3개의 피아노곡은 쉬르리얼리즘의 선구를 이루었고, 디아길레프 발레단을 위하여 작곡한 발레 음악에서 타이프라이터나 권총, 발전기 등을 포함한 여러 가지의 타악기를 사용한 오케스트레이션으로 루솔로의 소음주의(騷音主義)를 예시(豫示)하는 등 새로운 시대의 예언자적 존재였다. 모리스 라벨(1875-1937)은 사티, 드뷔시 그리고 '러시아 5인조'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면서도 파리 음악원에서 사사(師事)한 포레나 제달쥬에게서 받은 전통적 교육에 평생을 두고 지배되어 고전주의적 작품을 지니고 있다 에드거 발레이즈(1885-1965)는 처음에 인상주의풍의 작품을 썼으나 제1차대전 후 갑자기 매우 전위적인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8중주곡 <옥탄돌> ― 12음기법(1924), <이오니자시온> ―타악기만(1931), 전자음의 테이프와 관, 타악기의 합주곡 <사막>(1953), 브뤼셀 만국박람회장에서 4백여 개의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서정적인 전자음악 <포엠 일렉트로닉>(1958) 등 하나하나의 작품마다 다른 매체를 써서 새로운 음향매체를 제시하였다. '6인조'라 불리는 작곡가 뒤레, 오네게르(스위스 사람), 미요, 타유페르, 프랑크, 오릭 가운데에서 유태인인 다리우스 미요(1892-1974)는 그들의 신고전주의적 강령에도 불구하고 복조(複調)와 다조(多調)로써 안어울림음이 많은 폴리포닉한 작품을 써서 쇤베르크나 베르크를 칭찬하였으며, 한편 태생지인 지중해적 서정이 넘쳐흐르는 경쾌한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그리고 발레곡 <세계의 창조>에서는 재즈도 채택하는 등 그 작풍은 매우 폭넓고 다양하다. 가장 젊었던 프랑시스 프랑크(1899-1963)는 강령에 가장 충실하여 초기에는 고지식하여 약간 따분한 작품을 썼으나 음악원의 정규교육을 받지 않은 데서 오는 신선함이라고 할 수 있는 자연스럽게 흐르는 선율성이 매력이 되어 만년에 쓴 3개의 오페라는 걸작이다. 실내악 운동단체 '라 스피라르'(1935년 결성)와 작곡단체 '준 프랑스'(1956)의 중심적 활동가였던 올리비에 메시앙(1908- ? )은 드뷔시 이후의 프랑스 최대의 작곡가이다(신신비주의 항목 참조). 발레이즈의 제자 앙드레 졸리베(1905-1974)는 원시적, 주술적(呪術的)인 것에 매력을 느껴 아프리카와 베트남, 폴리네시아 등 적도 주변의 민족음악의 원색적인 색채로 씌어진 피아노 콘체르토 <적도>(1950) 등을 작곡했다. 그리고 그는 전기악기 온도 마르트노를 위한 협주곡을 쓰는 등 이 악기를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메시앙의 문하로 신고전주의를 철저하게 비판하고 있는 완전한 전후파 피에르 브레즈(1925- )는 스스로 발명한 기법이라는 것은 없었으나 베베른이나 메시앙 등의 어법(語法)을 더욱 면밀하게 다듬어서 놀라운 정묘함을 지닌 작품을 이룩하고 있다.
Italia-二十世紀音樂 20세기의 음악에서 이탈리아인이 최초로 큰 역량을 보인 것은 루이지 다라비콜라(1904- )이다. 그는 처음에 신고전적 작풍이었으나 오페라 <야간비행>(1937-1939)으로 12음 음렬의 자유로운 구사를 보였다. 그 밖의 합창과 방대한 타악기를 포함한 오케스트라인 <수인(囚人)의 노래>(1938-1941)에서는 그레고리안 찬트의 12음 음렬을 병용하여 극적 박력과 서정성을 표현하고 있다. 슈톡하우전 브레즈와 더불어 전위세계에 뛰어든 루이지 노우노(1924- )는 독일에 살면서 첫 작품부터 쇤베르크적 12음기법에 의한 점묘적(點描的)인 세리엘 양식을 취하였다. 코뮤니스트인 그는 극히 전위적인 수법으로 사회적, 정치적 주제를 가진 텍스트를 사용한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 뒤를 잇는 루치아노 베리오(1935- )는 브레즈를 더욱 연마한 듯한 감각으로 기악곡과 콘크레이트적인 전자음악을 작곡하였다. 그 뒤를 잇는 세대도 우연성이나 모든 음악구성 요소를 총동원한 양식을 취하고 있으며 카스틸리오니의 작품이나 케이지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브소티의 그래픽 음악이 주목할 만하다.
獨逸·Austria-二十世紀音樂 제2차대전의 큰 타격을 받은 독일·오스트리아의 음악은 쇤베르크 그룹의 12음기법의 개척을 겨우 남긴 이외에는 오늘날까지 19세기의 융성을 부활시키지 못하고 있다. 서독(西獨)의 다름슈타트나 도나우에싱겐에서의 행사, 쾰른에서의 전자음악 스튜디오 등은 제2차대전 후의 유럽 음악부흥의 중요 거점으로 되었으나 거기서 생산되는 음악은 독일의 것이라기보다 세계적·국제적인 것이라 하겠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1864-1949)의 한 시기의 작품은 표현주의적 색채가 짙으며 그 때문에 무조적(無調的) 안어울림음이 눈에 띄나 만년에는 신고전적인 온건함으로 후퇴하고 있다. 막스 레거(1873-1916)는 지금까지 관심을 끌지 못했으나 반음계를 구사한 대위법적 작품(12음 음렬의 선구)이나 바로크 양식을 사용한 점 등으로 20세기 음악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아놀드 쇤베르크(1874-1951)가 알베르 지로의 시로 된 <피에로 류넬(1912)>에서 쓴 '슈프레히슈틴메'라 하여 정확한 음높이로 부르지 않는 낭독풍의 가창방법은 리트 속에 멜로드라마적인 성격을 도입시켜 표현주의적 수법으로서 매우 그 효과가 높다. 그의 수많은 제자 가운데에는 베베른과 베르크가 중요하지만 안톤 베베른(1883-1945)은 뒤에 12음기법을 지향하여 대위법적 수법에 의한 점과 점이 공간에서 교차하는 '점묘사적 작풍'으로 여러 가지 걸작을 냈으며 뮤지크 세리엘의 선구가 되기도 하였다. 아르반 베르크(1885-1935)는 일생을 통하여 비인적(的) 정서성을 잃지 않은 사람으로, 12음기법을 사용한 작품이나 순수기악곡에서도 항상 표현주의적이며 극적인 전개를 볼 수 있다. 카를 올프(1895- )에 관해선 타악기주의 항목을, 그리고 파울 힌데미트(1895-1963)에 관해서는 신즉물주의 항목을 참조하기 바라며 힌데미트는 정교하게 다듬어진 작품으로 큰 기대를 받아왔음에도 나치스의 권력에 쉽사리 전향하여 아무런 문제의식도 없는 다만 상쾌할 뿐인 재치있는 작풍으로 변하고 말았다. 쾰른 방송극의 전자음악 스튜디오 주재자인 아이메르트, 무주제적 작곡원리를 제시한 하이스, 극음악으로 알려진 코른골드, 베베른의 제자이나 프롤레타리아 작곡가로서 그 방면의 가곡 등을 쓴 아이슬러 등의 활동은 무시할 수 없으며 클트 와일(1900-1950)은 프레히트와의 공동작업으로 된 무대작품으로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유태인 에른스트 크루시에네크(1900- )는 후기낭만주의, 인상주의, 신즉물주의 등 여러 양식을 사용한 후에 네오 바로크풍의 작풍을 보였으며 또한 재즈를 구사한 오페라 <지오니는 연주한다>(1927)를 발표하여 성공하였으며 또한 12음기법을 열심히 찬양하여 최근에는 뮤지크 세리엘의 수법을 쓰고 있다. 한스헨체(1926- )는 후기낭만주의에서 12음기법, 그리고 전위적 수법을 사용한 오페라 작곡가로서 현재 활약중인 최대 작곡가의 한 사람이라 하겠다. 미요와 메시앙에게 사사한 카를하인츠 슈톡하우전(1928- )은 전자음악과 기악음악 양쪽을 탐구하면서 공간음악, 기악과 전자음악의 결합, 우연성의 채택, 그래픽의 문제 등을 자신의 특유하고 극히 면밀한 논리와 직관으로 차례로 보편화시켜 실천하고 있다.
英國-二十世紀音樂 영국의 20세기 최대의 작곡가인 브리튼(1913-1976)의 음악에는 대위법이나 반음계는 별로 사용되지 않으며 화성과 오케스트레이션에서 오는 음악이 교묘하게 사용되어 부르기 쉬운 선율과 적당하게 신선한 리듬을 볼 수 있다. 오페라 <피터 그라임스>(1945)는 퍼셀 이후의 본격적인 영국 오페라로 절찬을 받았다. 이와 같이 된 오페라는 평범한 인간과 그 사회생활에서 제재를 구하여 항상 대중과의 유대 속에서 쓰고 있다. 서얼(1915- )은 베베른에게 사사하여 12음기법을 쓴 표현주의적 작품을 썼고 또 프리커(1920- )도 해외에서 활약하고 있다. 1923년에 결성된 국제현대음악협회(ISCM)의 본부가 런던에 설치되었으나 이 나라의 보수적인 성격으로 말미암아 겨우 1952, 3년경부터 12음기법을 쓰게 되었으며 게일이나 슈톡하우전과 함께 전자음악에 관여하고 있는 카아듀 등의 작곡가들이 국제적인 주목을 끌고 있다.
Poland-二十世紀音樂 2차대전 중은 나치스 독일의 점령하에 있었고, 전후에도 공산주의국이 되어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지배하는 등 다른 나라의 정치적, 문화적 지배로 왜곡(歪曲)되어버려 그 재능을 발휘하지 못했던 이 나라의 격렬한 예술성은 1956년의 '해빙(解氷)' 이후 급격히 영화, 음악, 회화에 있어서 세계 최전위로 왕성한 창조정신을 보이고 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12음기법의 사도(使徒)로서의 구실을 다한 르네 라이보비츠(1913)와, 같은 세대의 비토로드 루트바프스키(1913- )는 중요하다. 루트바프스키의 우연성의 요소를 사용한 몇 개의 작품은 국제적으로 연주되고 있다. 유태인인 라바티(1919- )는 이스라엘에 살면서 중근동의 음악어법과 12음기법을 결합한 <축복> 등을 발표하였으며 그 뒤로는 파리나 빈에 살면서 우연성을 중히 다룬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그의 뒤로 세로키, 고토니스키, 바일트, 그래픽이나 우연성을 대담하게 쓴 셰파, 고레츠키 등 전위적 작곡가들이 뒤를 잇고 끝으로 쿠시시토프 펜데레키(1933- )도 합창과 오케스트라의 <시간과 침묵>(1960) 이후 독특한 작풍을 확립하여 52개의 현악기의 미분음(微分音)을 포함한 불확정한 음정, 소음적 효과, 그리고 현악기의 종래와는 다른 발음법 등 대담한 방법을 취하면서 정묘하고 밀도가 높은 음악을 제공하고 있다.
Hungary-二十世紀音樂 19세기까지 정치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 오스트리아의 지배하에 있던 헝가리는 바르토크와 코다이에 의하여 음악적 독립을 획득하게 되었다. 벨라 바르토크(1881-1945)는 처음에 리스트 바그너, R. 슈트라우스풍의 민족주의 낭만파적인 작풍을 취하나 코다이와 함께 마쟈르 민요(헝가리의 민족음악)을 채집하여 이를 작곡의 소재로 하면서 한편으로는 인상주의나 표현주의를 받아들여 독자적인 음악어법을 확립했다. 졸탄 코다이(1882-1967)도 바르토크와 같은 정교한 작품을 썼으나 중기 이후 다소 통속성에 안주한 작풍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바르토크의 어법이 너무 개성적이며, 드뷔시나 메시앙처럼 후계자를 양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의 헝가리 음악은 코다이의 민족적 신고전주의 작풍에 지배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뒤를 잇는 세대에서는 우수한 재능이 보이지 않지만 조르지 리게티(1924- )가 전위적(前衛的)인 작곡계에서 주목되고 있다.
美國-二十世紀音樂 제1차대전 후 뉴욕은 세계의 콘서트 도시가 되었고, 또한 작곡가조합 등이 결성되어 그 결과로 현대음악의 육성을 목표로 하는 다른 많은 단체와 그룹의 설립이 왕성해졌다. 한편 이 기간에 유럽의 일류작곡가 다수가 미국에 이주해 왔다는 점도 큰 자극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미국의 현대음악은 통속음악파에서 대담한 전우적 실험주의까지 세계의 모든 유파를 망라하고 있다. 아이브스(1874-1954)는 유럽에 앞서 다조(多調)를 시도하여 폴리리즘이나 12반음 구성을 비롯해서 4분음도 시도하는 등 새대를 초월한 독창적인 작풍을 보였다. 유태계의 고플랜드(1900- ? )는 재즈 협주곡 등에서 재즈 수법을 채택한 대담한 작풍을 보였으나 점차 신고전적이며 절충적인 안정된 작풍으로 변모했다. 역시 같은 시대의 카우엘(1897-1965)은 그 초기의 피아노곡에서 팔로 건반을 눌러 음괴(音塊)를 내거나 전기악기(電氣樂器)를 연구하기도 하여 새로운 음소재를 탐구하고, 안세일(1900- ? )은 타악기주의 작품 <발레 메카닉>을 써 청중에게 비상한 충격을 주었다. 거슈윈(1898-1937)은 피아노와 재즈 오케스트라를 위한 <랩소디 인 블루>를 출발점으로 해서 재즈 요소와 예술음악을 융합시켜 미국국민으로서는 전형적인 표현이 되는 교향적 작품을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오페라 <포기와 베스>(1935)는 제재의 선택과 음악이란 점에서 최초의 독자적인 미국의 본격적 오페라이다. 루카스 포스(1923- )는 케이지식(式)의 우연성과 재즈의 즉흥연주를 결부시킨 수편의 작품으로, 유럽에서도 주목을 끌고 있다.
Mexico-Brazil-二十世紀作曲家 멕시코의 차베스(1899-1978)는 11개의 타악기만으로 된 <토카타>나 민족적 색채를 곁들인 발레곡 등을 발표하였고 또한 브라질의 바라=르보스(1887-1959)는 브라질 오지에서 채집한 민요를 토대로 특수한 악기 편성으로 된 독특한 음빛깔을 추구했다.
Russia-二十世紀音樂 드뷔시, 쇤베르크와 함께 인상파 이후 가장 중요한 작곡가인 이골 스트라빈스키(1882-1971)는 원시주의·신고전주의를 거쳐 음렬기법으로 나아갔고 다시 점묘적 텍스처(點描的書法)까지 취하게 되어 제2차대전 후의 전위양식에 가까웠다. 신비주의자인 알렉산더 스크랴빈(1872-1915)의 후계로 간주되는 로스라베츠는 러시아에서 최초로 무조적 작품을 썼고 1925년경까지는 12음기법이나 그 외 당시의 전위적 수법으로 작곡하고 있었으나 그후 국내사정이 허락하지 않아 곧 음악계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혁명 후 최대의 작곡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1891-1953)는 처음에 민족주의적 원시주의에 인상주의와 표현주의 수법을 사용한 생생한 작품을 썼고 대담한 안어울림음의 사용을 거쳐 미국에서의 3년 동안 신고전적 작품을 발표, 1933년에 소비에트로 돌아온 뒤부터 사회주의 리얼리즘 아래 비판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쇼스타코비치만큼은 자기를 포기하지 않았다.그와 쇼스타코비치 사이에는 하차투리안, 카바레프스키 등이 실력을 갖고 있으나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1906-1975)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의한 예술비판의 표적이 되어 당의 정책변경에 좌우되었으며, 그 때마다 작풍을 바꾼 전형적인 작곡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