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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hoto 장기려기념사업회 |
성산은 1923년 개성 송도고보에 입학한다. 그러나 이때 집안의 가세가 기울어 하숙비를 절약하기 위해 초가집 뜰방에서 사촌형과 고향 친구와 셋이서 함께 지냈다. 호미 좁쌀밥에 반찬은 두세 가지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성산이 화투놀이에 빠졌던 얘기다.
“테니스를 하고 하숙집에 돌아와 저녁밥을 먹고 나면 곧장 친구집으로 달려갔다. 그리곤 친구 3∼4명이 어울려 화투놀이를 벌였다. 이 놀이가 어찌나 재미있었던지 거의 매일 어울리곤 하였다. 공부는 뒷전이었다.… 3학년에 진급한 어느날 불현듯 ‘나는 불효자식이구나’ 하는 경각심이 일어났다. 아버님은 매달 20∼30원의 학비를 보내주시기 위해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돈을 꾸기도 하는데, 나는 매일 화투놀이나 하고 세월을 헛되이 보내고 있으니 ‘나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불효자식이다’ 하는 생각이 내 마음을 마구 때리는 것이었다.” (‘성산 장기려 박사의 삶’)
성산은 고보시절 이성 간 연애는 해보지 못했다고 실토하고 있다. 호수돈여고 학예회에 구경갔다가 연기를 잘했던 같은 학년의 모윤숙에게 마음이 끌렸으나 고백은 하지 못했다.
“하나님, 의과대학에 들어가게만 해주신다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평생을 바치겠습니다. 하나님 앞에 굳게 서약합니다. 아멘.”(‘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성산은 1928년 경성의전에 입학한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평생 동안 성실하게 지켜냈다. 졸업을 앞두고 학교에 남기로 했으나 내과교실의 조수가 되어도 보수는 전혀 없다고 했다. 당장은 생활비를 대줄 수 있는 신부를 찾아 결혼생활을 하면서 공부를 더 할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다.
“경성의전 동기인 백기호군에게 이 같은 사연을 말하고 구혼자를 소개시켜 줄 것을 간청했다. 그랬더니 백군은 우리들의 대선배이신 김하식씨가 성대 의학부 스기하라 약리학교실에서 의학박사 학위논문을 준비 중인데, 그의 따님이 그해(1931년) 평양 서문고녀를 졸업하고 집에 있으면서 구혼자를 찾고 있다고 귀띔을 해줬다.… 아무튼 나는 백군의 소개로 김씨 댁을 찾아 보았다. 나는 결혼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줄 믿고 살면 살 수 있을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성산 장기려 박사의 삶’)
성산은 1932년 4월 9일 의사 김하식의 딸 봉숙과 결혼했다. 그해 경성의전을 졸업하고 당대 최고의 외과의 백인제의 조수(조교)로 남게 된다. 당시 의학계 최고의 실력자 백인제 교수의 수제자가 되는 행운을 얻은 것이다.
6년간의 조수생활을 겨우 마무리한 성산은 드디어 그렇게 원하던 강사가 되었다. 월급이 갑절로 뛰어 80원이 되었다. 그런 대로 먹고살 만한 형편은 되었지만, 서적 구입비 등 나가는 돈도 만만치 않아 아예 부모님을 서울로 모시기로 하였다.
“부모님이 올라오자 기려는 아내에게 주던 월급 40원을 아버님께 직접 드리기로 했다.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이라면 그보다 더한 일도 할 수 있는 기려였다. 아내는 얼굴조차 마주 대하기 어려운 시아버지로부터 생활비를 타 써야 함에도 불구하고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 조그만 몸 어디에 그런 바다같이 넓은 아량이 담겨 있는가? 기려로서는 신기하기만 했다.”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1940년 성산은 ‘충수염(맹장염) 및 충수염성 복막염의 세균학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는다. 그의 연구 성과가 참고되어 그후 충수치료제가 개발 보급되기도 했다. 백 교수는 약품개발을 서두르라는 편지와 함께 곧바로 논문을 독일의 동기동창에게 보냈다. 그리고 논문은 나고야대학에도 보내졌다. 심사위원장인 일본인 외과교수가 나고야대학에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 후 나고야대에서 ‘당신의 논문은 의학사에 매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라는 답장이 도착했다.
어느날 백 교수는 성산을 데리고 한 병실로 들어갔다. 백 교수는 성산의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춘원, 이제 안심해요. 여기 최고의 주치의를 내가 데려왔으니 말이오.” 춘원은 퇴원하자마자 장편소설 ‘사랑’을 썼다. 6개월간 입원해 치료를 받으면서 의학지식까지 얻고 자료수집도 충분히 한 셈이었다. 소설의 주인공인 안빈이 성산을 모델로 한 것이라고 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성산은 1940년 평양 연합기독병원에서 외과과장으로 일한다.
“백 선생님은 그때에 나를 입지전의 인물이라고 동아일보에 글을 써 주셨다. 아마도 내가 평양연합기독병원으로 갈 때에 선생님께서 소개해 주신 대전도립병원 외과과장(고등관) 자리를 마다하고 굳이 기독병원으로 간 것과 자신의 생일에 다른 사람들처럼 떠들지 않았다는 것들을 감안하시어 하신 사랑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며… 대전도립병원을 고사한 것은 일본인들 사이에서 일하기 싫었고 무엇보다 하나님께 서약한 시골의사가 되기 위해서였다.”(‘성산 장기려 박사의 삶’)
성산은 외과과장 때인 1942년 여름 무의촌 진료를 나갔다가 경찰에 붙잡혀 12일 동안 유치장에 구류된다. 김교신의 ‘성서조선’을 정기 구독한 때문이었다. ‘조와(弔蛙)’라는 글이 일제의 탄압정치와 조선의 독립을 암시한 글이라는 이유로 ‘성서조선’은 폐간되고 김교신도 잡혀갔으며, 정기구독자까지 일제 검거를 한 것이다.
이듬해 성산은 간암 환자 수술에 최초로 성공, 이를 조선의학회지에 발표했다. 성산이 간암 수술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며칠을 두고 신문에 나자 이상한 소문이 나돌았다. 책에도 안된다는 병을 고쳤으니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시골로 나가 진료를 할 때 청진기를 가리키며 한 노인이 무릎을 내밀었다. “그 기계 한번만 대주시라요.” 청진기를 대기만 하면 거기 붙은 병마가 놀라서 도망갈 것이라는 생각이 그들에겐 신앙처럼 굳어 있었다. 성산을 아예 신통력을 부리는 신의(神醫)로 믿은 것이다.
성산은 또 가난한 환자가 퇴원비가 없어 병원에 묶여 있으면 그 모양이 도리어 보기 민망해서 입원비를 대신 내주기도 했다. 부친의 귀에까지 그 소문이 들어가게 되어, 심약한 아들이 치료비도 제대로 못 받는다고 걱정이 많았다. 이처럼 의업 자체의 일 밖에서 조여오는 갖가지 스트레스 때문에 성산은 불면증과 신경쇠약으로 묘향산 약수에서 요양 중에 8·15 광복을 맞는다.
성산은 공산치하에서 평양 도립병원장, 김일성대학 외과교수 등으로 온갖 우여곡절을 겪는다. 김일성의 맹장염 수술을 소련 군의관에게 떠넘겨 시비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기도 한다.
“소련 군의관 중령이 하는 시술이라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혼이 나가는 것 같은 비명소리가 한참 이어진 후에야 안에서 나온 간호원이 환자의 소식을 바깥 사람들에게 전했다. ‘장군님의 병’을 오진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므로, 통증의 원인을 밝히는 검사 때문에 결국 김일성은 보통 환자보다 훨씬 더 심한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그후 김일성은 ‘수술기피증을 가지게 됐는데, 당시 요로검사 때문이었다. 그는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그런 고통을 다시 참을 수 없다며, 수술이라면 아예 얘기조차 꺼내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1950년 10월 20일 국군이 평양을 점령하였고, 숨어 있던 성산은 임시 개설된 의원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하다가 12월 3일 유엔군과 국군이 후퇴할 때에 같이 따라서 남하했다. 다급했던 피란이어서 차남 가용이만 데리고 왔다. 부산에 와서 제3육군병원에서 진료를 시작했다.
이듬해 6월 20일. 바로 복음병원이 태동한 날이다. 설립자 전영창은 미국 신학교에 유학 중 졸업을 1주일 앞두고 친구들에게 조국 동포를 구하러 간다며 5000달러를 모금해 왔다. 그리고 유엔 민사원조처를 찾아가 노르웨이인 넬슨씨로부터 ‘의원을 개원하면 하루 50명분의 약품을 주겠다’는 약속을 받는다. 성산은 간첩혐의로 한때 어려웠던 자신의 구명운동에 앞장섰던 한산동 초량교회 목사의 권유로 전영창과 복음병원을 함께 하기로 했다. 부산 영도구 남항동 제3영도교회 안 창고를 수리해 개원한 것이다. 의사 2명에 약사 및 사무원 등 모두 9명이었고, 이들의 가족 44명이 크리스천 개척교회에서 보내주는 500달러를 갖고 생활하면서 무료 진료를 계속했다.
무료 진료, 무료 봉사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환자들이 밀려들었다. 성산은 의술이 인술의 길임을 말없이 행동으로 보여주고, 그후 민간인 의료보험의 씨앗이 된 청십자의료보험조합 설립에도 앞장섰다. 이러한 헌신적 인술의 실천으로 성산은 1979년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했다. 그 외에도 많은 상을 받았지만 그는 오히려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만년에 그의 후배들이 흉상을 만들겠다며 입체사진을 찍자고 했으나 성산은 펄쩍 뛰며 ‘내 흉상을 만드는 자, 지옥에 떨어지리라’고 화를 내며 물리쳤다. 그는 평생 자기 소유의 집 한 칸 없이 철저한 무소유의 삶을 실천한 인물이었다. 단독으로 한 외과수술만도 1만회가 넘는 그는 ‘한국의 슈바이처’ ‘살아 있는 푸른 십자가’ ‘하나님의 사절’ 등으로 불리며 살다가 1995년 12월 24일 서울 백병원에서 별세,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묘지에 안장된다.
성산은 김봉숙과 사이에 3남3녀를 남겼다. 함께 월남한 차남 가용(별세)씨는 부친의 대를 이어 서울대 의대 박사로서, 서울대 의대 해부학 교수와 제주대 의대 학장을 지냈다. 가용씨의 부인 윤순자(74)씨도 이화여대 의대를 나와 윤안과원장을 지냈다. 가용씨는 1남1녀를 낳았다. 아들 여구(47)씨 역시 중앙대 의대 박사로, 바로 성산이 별세한 백병원의 응급실장이며, 가용씨의 딸 예원(40·이화여대 교육대학원 졸업)씨는 김진욱(40·한국외국어대 법대 졸업)씨와 결혼했다. 여구씨는 이정선(42·이화여대 음대 대학원 졸업, 전 명지대 강사)씨와 결혼, 지인(16·영동고 1년)을 낳았다.
현재 북한에는 부인 김봉숙(98)씨가 생존해 있으며, 장남 택용(78·약사)씨는 군장성 출신으로, 3남1녀 중 아들과 딸이 모두 의사이다. 삼남 인용(별세)씨는 김일성대학 박사로 강계의대 교수를 지냈으며, 아들 2명이 모두 준박사이다. 성산의 장녀 신용(73)씨는 김책공대 출신으로 식료품회사 연구원이었으며, 2남1녀 중 의사가 2명(아들, 딸)이며 다른 아들이 박사이다. 성산의 차녀 성용(71·김일성대학 박사)씨는 평양 암연구센터 연구원이었으며, 2남1녀(모두 박사) 중 아들 2명이 교수이고, 딸 1명이 IT연구원이다. 성산의 삼녀 진용(64·전 교사)씨는 평양교원대학을 졸업했으며, 1남1녀를 두었다.
“저는 우선 같은 의사로서 조부님을 존경합니다. 조부님은 1959년에 우리나라 최초로 대량 간 절제 수술에 성공하셨지요. 부친께서도 대를 이어 해부학 전문의사가 되셨고, 틈만 나면 책을 읽으셨지요. 모친도 의사이시고, 북한에 계신 어른들 중에도 의사가 여럿이라고 하니 우리는 의사 집안이지요. 저는 특히 조부께서 인연이 깊으신 백병원에 근무하고 있으니 대단한 행운인 셈이지요. 저도 외과의로서 연 2회 캄보디아에 가서 의료봉사를 합니다. 의대를 지망하는 고교생 아들도 데려가지요. 회브론병원이라고 프놈펜에서 150㎞쯤 떨어진 낙후지역인데, 조부님 기념사업회에서 지원하고 있어요. 금년에는 조부님 탄신 100주년 사업으로 수술의료봉사를 시작합니다.”(손자 여구씨)
내가 본 성산 장기려 이건오 한동대부속병원장 나는 성산이 설립해서 운영하시는 부산 복음병원에서 외과 수련의로 그분을 처음 뵈었다. 그분은 자신의 집도 없이 무료병원 건물 옥상에 20평 정도의 공간을 마련하여 이산가족의 외로움을 달래고 있었다. 재혼의 청이 있을 때마다 북에 두고온 아내가 기다리고 있다고 한결같이 사절했다. 이 세상에서 오직 한 번 참사랑을 나눈 아내에 대해 일생을 두고 미안함을 느껴온 순애보의 실천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는 그분의 열의는 대단했다. 입원비를 못내 퇴원을 못하는 환자들을 병원장이 뒷문을 열어줘 야반도주시킨 사례는 아마도 세계 병원 사상 없을 것이다. 복지병원 거제도 지소에 가서 일할 때 선생님은 무일푼의 환자에게 주머니를 털어 용돈까지 쥐어주며 도망가게 하신 적이 있다. 수술을 하실 때도 제1조수로서 실수를 하면 야단치시지 않고 다시 해보라고 친절히 가르쳐 주시는, 훌륭한 의사에 자상한 스승이다. 성산(聖山)이란 아호는 하늘나라를 늘 사모하는 뜻에서 성실하게 살아가고자 하신 것이라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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