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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01 통권 557 호 신동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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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의 삶] |
거물 화상(畵商) 되어 돌아온 청년 광부, 김희일 갤러리 아트뱅크 관장 |
“미술에 투자하세요, 루벤스와 벨라스케스가 곳곳에 묻혀 있어요” |
김서령 칼럼니스트 psyche325@hanmail.net |
모험심으로 독일 광부行을 택한 청년이 30년 뒤 세계 유수의 화상이 되어 돌아왔다. 낯선 땅 독일에서 미술을 알았고, 미술을 통해 삶의 충만함을 맛보았다. 독일은 후진국 노동자이던 그에게 문화학교이자 희망의 땅이었다. 청년으로 떠나 초로의 사업가가 되어 돌아온 고국에서 그는 거센 ‘미술 한류(韓流)’의 주역을 꿈꾼다. |
36년 전 한 청년이 독일로 갔다. 호기심과 모험심 넘치는 청년이었다. 낯선 나라를 동경했지만 가난했던 그가 유럽으로 떠나는 길은 광부가 되는 게 가장 빨랐다. 1970년 동료 200명과 함께 에어프랑스를 타고 일본을 거쳐 독일에 도착했다. 독일의 첫인상은 울창한 나무였다. 당시 막 산림녹화사업이 시작되던 한국의 민둥산만 보던 눈에 수백년 된 나무들이 울창하게 선 독일은 풍요 그 자체로 다가왔다.
탄광지대인 루르 지방 게르센키흐센이란 도시의 광산에 도착했다. 동백림 사건이 일어난 직후라 북한 사람을 조심하란 소양교육을 하도 철저히 받아서 한국인 비슷한 사람만 보여도 겁이 덜컥 났다. 당시 독일엔 북한 사람이 꽤 많이 살고 있었다. 우리보다 제법 여유도 있었다.
지하 1000m 막장 안은 뜨거웠다. 지열 때문에 기온이 늘 40℃를 넘었다. 안전모와 무릎 보호대를 차는 게 원칙이지만 워낙 더우니 벗어던질 수밖에 없었다. 아침에 각자 5ℓ들이 차 주전자를 싸들고 막장 안에 들어가 마시다 보면 그게 오줌 대신 모조리 땀으로 쏟아질 만큼 더웠다. 같이 간 동료 200명중 11명이 사망했을 만큼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시루떡처럼 켜켜이 쌓인 석탄을 기계가 파내면 그 뒤를 따라가면서 암석층에 받침대를 괴는 게 우리 일이었어요. 3년이 지나도 가래를 뱉으면 시꺼먼 탄가루가 나오데요. 막장에서 일본 규슈 탄광으로 끌려갔다던 사람들을 생각하고는 했어요. 조상들은 나라를 뺏겨서 징용에 끌려갔고 나는 돈 때문에 여기 팔려왔구나 싶었지요….”
첫 월급으로 380마르크를 받았다. 우리 돈으로 20만원쯤 되는 돈이었다고 기억한다. 당시 서울의 웬만한 집값이 300만, 400만원 할 때였으니 제법 큰돈이었다. 그러나 그가 독일로 간 목적은 돈벌이는 아니었다. 공부를 하고 싶었다. 계약은 3년! 광부 생활 3년이 끝나자 예정대로 그는 근처의 보쿰대로 진학한다. 독일 노동자들이 갖는 자부심, 수입이 많건 적건 직업에 귀천 없다는 당당한 태도가 노동자를 위한 법적, 제도적 토대 때문임을 알고 나니 독일의 노동법에 대해 공부하고 싶었다.
법대에 진학했다. 당시 보쿰대엔 한국 유학생 10여 명이 공부하고 있었다. 그들의 생활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게 됐다. 말이 아니었다. 생활은 쪼들리고, 공부한 지 6∼7년이 지났다는데도 제대로 학위 하나 받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렇게 되는 것은 원치 않았다. 광부로 온 게 28세 때였으니 진학할 당시는 서른이 넘은 상태였고 6∼7년 공부하면 마흔이 다 돼버릴 텐데 이를 어쩌나 싶었다. 공부하면서 돈 벌 수 있는 일을 찾기 시작했다.
사업가 기질 발동
김희일(金僖一·64). 그가 호기심과 아이디어로 넘치는 사람이라는 말은 앞서 했다. 게다가 그는 성실한 노력가였다. 그런 그가 독일의 막장에서 일하던 1972년 뮌헨에서 올림픽이 열렸다. 살던 곳에서 800km 거리였지만 한국팀이 거기 와서 뛴다는데 응원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루르 지역 탄광 근로자 중 독일어 실력이 기중 나은 사람이 그였다. 주말에 그는 희망자들을 모아 올림픽 구경에 앞장서곤 했다. 여행사를 중간에 끼고 버스 예약하고 호텔 예약하고 통역과 안내를 도맡았다. 원래는 뮌헨 구경 희망자가 50명이었는데 그가 깃발을 들자마자 150명으로 늘어났다. 여행사측에서 약간의 사례금을 건넸다. 동료들이 고마워하고, 자신도 즐겁고, 돈도 만질 수 있고…. 그는 광부 시절에 이미 1석3조로 쏠쏠한 재미를 맛보는 주말여행 가이드가 됐다.
주말이면 단조로운 탄광촌에 머물지 않고 동료들과 파리로 런던으로 바르셀로나로 떠날 여행 프로그램을 짜기 시작했다. 당시 독일엔 여행하며 유적을 공부하는 ‘수학여행’ 코스가 다양하게 개발돼 있었다. 그 코스를 우리말로 번역하고 그 무렵 한국에서 한창 인기 있던 ‘김찬삼의 세계여행기’를 참고해서 독자적인 유럽여행 상품을 만들었다. 아마 최초의 한글판 유럽여행 패키지 상품이었을 거다.
광부일 땐 대상이 동료들뿐이었다. 그랬는데 유학생이 되자 고객층은 함부르크 거주 조선공들, 지멘스에 와 있던 기능공들, 독일 전역에 1만명 넘게 거주하던 한국인 간호사들까지 두터워지고 다양해졌다. 자잘한 주말여행말고도 1년에 20일짜리 여행 두 건, 8일짜리 여행 두 건을 다녀올 정도로 분주한, 그는 어느새 여행사 가이드 겸업 학생이 돼 있었다. 잠복해 있던 사업가 기질이 유감없이 발휘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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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史와 첫 만남
그러나 가이드로서는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미리 여행지를 답사해볼 만한 여유도 없었고 역사와 문화에 대해 따로 공부할 기회도 없었다. 여행지에 도착하면 고객을 숙소에 내려주고 혼자 택시로 이튿날 안내할 장소를 한번 황급히 돌아보고 오곤 했다.
“한번은 간호사 일행과 오스트리아 빈을 여행하는데, 어느 공원을 지나다가 바이올린 연주하는 동상을 보고는 저게 누구냐고 물어요. 떠오르는 이름이 모차르트밖에 없어 그냥 모차르트라고 했지요. 그랬더니 그 유명한 모차르트라면 거기 내려 사진 한 장 찍고 가야 하지 않겠느냐는 거예요. 어찌나 당황스럽던지…. 가보니 동상 아래 요한 슈트라우스라고 써 있더군요. 그 자리를 얼버무려 모면하긴 했는데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데요. 돌아와서 당장 학교에 부전공으로 미술사를 신청했어요. 공부해 보니 전공인 노동법보다 훨씬 흥미진진하더군요.”
사진을 대조하고 문헌을 뒤지느라 바빴다. 책을 찾느라 온 도시의 도서관을 헤매고 다녔다. 그러는 중 절로 그림 보는 눈이 생겨났다. 서양 앤티크 가구, 공예품, 보석을 가려보는 안목도 길러졌다. 책으로만 공부한 건 아니었다. 그는 늘 현장에 있었다. 학생인 그가 몰던 자동차는 포드 무스탕으로 보쿰대에서 가장 고급차에 속했다. 이 차로 한 해에 10만km를 달릴 만큼 유럽 전역을 쏘다녔다.
그가 특히 관심을 쏟은 건 17세기 회화였다. 당시 독일엔 미술품 컬렉터도 많았고 유통되는 미술품도 많았다.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쿤스트’ 같은 신문에는 예술품을 매매하는 지면이 따로 배정돼 있을 정도였다. 그는 시간만 나면 신문을 들고 옛 그림을 구경하러 다녔다. 여행업으로 번 돈이 모이면 적당한 가격에 한두 점씩 옛 그림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20∼30점씩 그림이 쌓여갔다.
이렇게 그는 막장 광부에서 여행 가이드로, 독일 최초의 동양인 갤러리 주인으로 변신해갔다. 그림이 주는 아름다움에 점점 빠져들던 어느 날, 그의 인생에 결정적 변환을 가져오는 일이 생긴다.
푸른 눈 소년像
“어느 고성(古城)에서 그동안 모은 컬렉션을 모두 처분한다는 광고가 신문에 났어요. 당시엔 고성 같은 데서 사용하던 집기와 오래된 수집품들을 전부 내다파는 일이 간간이 있었거든요. 좋은 물건이 무척 많았지요. 1980년 이후에는 독일에도 도시마다 경매장이 생겼지만, 1970년대 중반엔 아직 그런 게 없어 값이 제대로 매겨지지 않은 물건도 많았어요. 물건을 팔려면 ‘텍사토’라는 감정사를 불러 각기 적당한 가격을 매기는데, 텍사토가 그림을 잘 알면 앤티크를 모르고, 앤티크를 잘 알면 그림을 모르는 수가 많거든요. 그래서 낡은 진주목걸이, 사파이어가 박힌 오래된 반지 같은 게 터무니없이 싸게 팔려나가곤 했어요.
그날 고성에서 그림 한 점을 봤어요. 눈이 파란 소년상(像)이었는데 마음에 쏙 들더군요. 군복 같은 제복을 입었는데 단추의 장식까지 화려하고 선명한 그림이었어요. 모르긴 해도 17세기 그림이다 싶데요. 2만마르크를 주고 그걸 샀어요. 그때 우리 돈으로 1500만원쯤 준 것 같은데, 당시 서울 여의도에 있는 50평짜리 아파트가 2000만원 했어요. 저한테는 어마어마하게 큰돈이지만 워낙 그림에 맘이 끌렸거든요. 독일인들은 꽃이나 풍경을 좋아하지, 포트레이(인물화)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모르는 사람의 얼굴을 집 안에 걸어놓고 싶어하지 않는 거죠. 그러나 17세기 명화들은 거의가 초상화예요. 당시만 해도 사진이 없었으니 귀족들이 가족의 모습을 화가에게 그리게 한 경우가 많았거든요.”
열 살이나 열한 살쯤 돼 보이는 그 푸른 눈 소년의 초상화를 안고 오는 가슴이 몹시 뛰었다. 얼른 관련 책을 찾아보려고 밥도 안 먹고 집으로 달려왔다. 17세기 그림들은 화가의 사인이 있는 경우와 없는 경우가 거의 반반이다. 사인이 없을 경우 어느 시대, 누구의 그림인지 알아내는 것은 까다롭고 전문적인 안목을 요구한다. 물감, 색조, 캔버스, 머티리얼을 면밀히 살피지 않으면 답이 나오지 않는다. 이럴 때 동양인의 섬세한 감각이 서양인보다 한 수 앞서는 경우가 많다.
그 인물화가 귀한 그림인 건 분명했다. 그러나 아무리 책을 뒤져도 누구의 그림인지 찾아낼 수는 없었다. 전문가에게 감정을 의뢰하려고 비용을 물었더니 3000달러라고 했다. 혹 진품이 아니라면 3000달러만 날릴 것 같아 그냥 머리맡에 걸어두고 날마다 바라보았다.
“어느 미술품 컬렉터가 집에 들렀기에 그 초상화를 보여줬어요. 팔 의향이 있냐고 묻데요. 값이 맞으면 팔 수도 있다고 했더니 얼마나 받고 싶냐고 해요. 최고로 비싼 값을 부른다고 40만달러를 달랬어요. 40만달러면 당시 환율이 세 배였으니까 120만마르크죠. 산 값의 60배 아닙니까. 그 사람은 두말도 않고 가만히 앉아 있더니 ‘일주일만 시간을 달라’고 하고는 돌아갔어요.”
그 일주일이 얼마나 초조했는지 모른다. 딱 일주일째 되던 날 그 사람은 커다란 여행가방에 현금뭉치를 가득 담아 들고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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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도가 어찌나 정중하고 예의바른지 몰라요. 그림 수집하는 사람들은 대개 독일 사회에서도 최상층이죠. 대개 ‘캐슬’이라기보다 팰리스(palace)라고 할 만한 집에서 살지요. 나도 부자처럼 보이고 싶어서 집사람을 밍크코트 입혀서 데리고 나갔던 게 기억나요. 그 사람이 ‘돈을 준비해오긴 했는데 3만달러 정도가 모자라니 대신 이 그림을 받아줄 수 있겠냐’면서 19세기 프랑스 화가 코로의 그림을 한 점 내놓더군요. 그 그림도 굉장히 값나가는 명화였거든요.”
돈이 가득 담긴 바퀴 달린 여행가방을 받고 소년의 초상화를 건네고 나니 꿈인지 현실인지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림 한 점으로 평생을 벌어도 손에 넣지 못할 거금을 거머쥔 벼락부자가 된 것이다. 그 신사가 그림을 물러달라고 오면 어쩌나 겁도 났다. 아내와 둘이 우리 이 돈 들고 당장 한국으로 돌아가버릴까, 궁리했다. 침대 밑에 돈뭉치를 밀어넣으며 둘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아! 벨라스케스…
김씨의 아내는 1973년 간호사로 독일에 간 채금자씨. 1975년 휴가 때 그의 여행 프로그램에 참여해 함께 유럽을 일주한 인연이 이어져 결혼에 이르게 됐다. 채씨가 들려주는 에피소드 하나.
“이 사람은 맘에 드는 그림을 하나 사들면 현실을 잊어버려요. 밥 먹는 것조차 까맣게 잊는다니깐요. 제가 첫아이를 임신해서 배가 남산만 할 때였는데, 독일 남부에서 그림을 하나 샀어요. 조수석에 앉은 절더러 운전석에서 그 그림이 잘 보이게 들고 있으래요. 남편 말이 하늘인 줄 알 때였으니 시키는 대로 들고 있었지요. 팔도 아프고 배도 고픈데 그림만 보면서 저이는 연신 싱글벙글이에요. 그러면서 휴게소를 암만 지나쳐도 밥 먹을 생각을 않는 거예요. 다음 휴게소에서 밥 먹고 갈까, 하더니 웬걸 한번도 멈추지 않고 집까지 예닐곱 시간을 그냥 달려가는 겁니다. 나는 언제나 밥을 먹나 싶어 말도 못하고 계속 그림만 들고 있었죠.
그러다 나중에는 서러워서 눈물이 줄줄 흘렀어요. 한국에 있으면 임신했다고 엄마가 얼마나 잘 거둬 먹일 텐데 낯선 나라에서 배 곯아가면서 팔 아프게 그림이나 들고 벌을 서다니 이게 무슨 고생인가 싶더라고요. 나중에 알고 보니 저 사람 머릿속엔 1초라도 빨리 집에 가서 그 그림이 어느 시대 누구 작품인지 자료를 찾아볼 생각밖에 없었던 거더라고요. 밥 생각이 날 리가 없지요.”
목돈이 손에 들어오자 그에게는 날개가 달렸다. 유럽 전역이 그의 무대가 됐다. 소더비나 크리스티 같은 본격적인 미술품 경매장에서 그림을 사고파는 굵직한 명사가 됐다.
“그 소년의 초상화를 사진으로 찍어놓은 게 있었어요. 그걸 영국 경매장에 갖다 보여줬죠. ‘내가 아는 사람이 이 그림을 가지고 있는데 살 의향이 있냐’고 넌지시 물어봤죠. 그랬더니 바짝 매달려요. 가져오기만 하면 당장 100만파운드를 주겠다는 거예요. 100만파운드면 200만달러고 독일돈으로는 600만마르크거든요. 내가 판 값의 다섯 배가 되는 거지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소년의 초상화는 17세기 스페인 화가 벨라스케스의 희귀한 작품이었다. 크리스티에서 그 말을 듣고 그림을 사간 사람 집을 찾아갔다. 잘 보이는 곳에 그림이 걸려 있었다. 혹 자신에게 되팔 생각은 없는지 물었다. 그는 서랍을 열더니 다섯 장의 감정서를 내보였다. 그중엔 맨 처음 그에게 감정료를 3000달러나 요구해서 포기했던 17세기 회화 전문가의 감정서도 들어 있었다. 되팔 리가 없었다.
“그때 내가 깨달은 게 있어요. 미술시장의 규모는 끝이 없구나. 몇백달러짜리가 있는가 하면 수천만달러짜리 그림도 있구나. 그림시장에 뛰어들면 가능성이 무한하겠구나….”
미술 경매장 큰손 ‘갤러리 킴’
여행업과 그림 수집을 겸하며 살았지만 그의 공식 직업은 학생이었다. 독일에서는 학생비자로는 공부말고 다른 일은 못하는 게 원칙이었다. 포드 무스탕을 타는 잘나가는 학생인 그에게 어느 날 외국인 담당관으로부터 출두 명령이 떨어졌다. 갔더니 그가 만든 한글판 유럽여행 안내도가 책상 위에 딱 놓여 있었다. 학생이면서 이런 영업을 했으니 15일 내로 독일을 떠나라고 했다. 그러고는 여권에 ‘추방’이라는 도장을 꽉 찍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는 난관을 헤쳐 나가는 데 이골이 난 대한의 저력 있는 사나이! 이 난국을 타개할 길을 맹렬히 찾다가 한독친선협회 회장으로 있던 슈바르츠씨를 알게 됐다. 독일 중부지역인 라인란트팔츠 주의 내무장관이자 3선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이던 그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가 “원하는 게 공부냐, 사업이냐” 하고 물었다. 사업이라고 대답했다. 얼마 전 깨달은 대로, 미술품을 처리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가 원래 유학생이 아니라 광부로 독일에 온 것과 유난히 순박하고 부지런하며 주변에 평판이 좋은 것이 그의 마음을 움직인 듯했다. 자기 관할 지역으로 이사를 오면 새로 여권을 만들어주겠노라고 했다. 아내가 간호사로 일하던 곳이 하이델베르크였다. 거기가 바로 라인란트팔츠 주였다. 망설일 것도 없이 그리로 이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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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크에서 정식으로 화랑 인가를 받았다. 이름은 ‘갤러리 킴’! 갤러리 킴은 곧 그 지역에서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는 화랑이 됐다. ‘킴!’ 하면 지역 내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주요 인사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교류하는 이들은 독일 최상층 인사들이었다. 전시회를 열면 대통령이 오고 각부 장관들이 들러 그림을 사갔다. 산 그림을 들고 그들을 방문하는 건 반드시 김 관장이 직접 했다.
그는 이때 인생의 중요한 교훈 하나를 터득한다. ‘인생은 자기 삶에서 누구를 만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슈바르츠씨와의 만남으로 그는 독일 상류사회에 가볍게 편입했다. 그들과 허물없이 어울리는 동양인 친구가 된다. 얼떨떨한 모습의 광부로 독일 땅에 발 디딘 지 딱 7년 만의 변신이었다.
굴리는 돈도 많아졌다. 그는 천부적인 안목으로 숨은 고미술품을 발굴해냈다. 렘브란트의 그림 한 점도 그런 식으로 찾아냈고, 사인이 없는 루벤스의 그림도 허름한 앤티크 더미에서 찾아냈다. 2만달러 정도에 사서 4만∼5만달러를 받고 넘긴 회화 작품은 셀 수 없이 많았다. 고화뿐 아니라 르누아르나 칸딘스키의 그림도 그의 손을 거쳐갔다. 그런 그림들은 팔지 말고 몇 점 간수하지 그랬냐고 안타까워하자 그는 아주 느긋해했다.
“내가 갖고 싶은 것을 남들도 탐내니까요. 일단 장삿길로 들어섰으니 고객이 탐내면 드릴 수밖에 없어요. 대신 남들이 주목하지 않는 다른 귀한 작품들을 좀 가지고 있지요.”
한국 미술 알리미
독일 미술계에 영향력이 생기자 그를 주목하는 이가 많아졌다. 유럽 신문에 갤러리 킴이 소개되는 일도 잦았다. 이쯤 되자 한국에서 화가들이 유럽에 오면 그의 화랑을 찾기 시작했다. 전시회를 부탁하는 일도 잦아졌다.
“당시만 해도 한국화가가 해외전을 열기가 어려웠거든요. 해외에서 전시회를 한번 하면 도불전(渡佛展), 도독전(渡犢展), 귀국전까지 줄줄이 열 정도였으니까요. 그때는 갤러리를 한다고 해도 서양 고화에만 관심 있었지 한국 현대 작가를 거의 몰랐어요. 화가들이 찾아오니까 한국 회화를 다시 공부하게 됐지요. 그림이 보이면 얼른 사모으고. 이우환 선생 그림도 40여점 사고 권영우 선생 것도 열몇 점 사모았지요. 이우환 선생 작품은 한 1000달러나 줬을까….”
잠시 귀국할 때 고향 광주에 들렀더니 지역신문에 그의 기사가 실렸다. 그 지역 화가인 김형수 화백을 독일로 초청하기로 했다. 한국 화가의 첫 독일 전시회였다.
“그때는 여권을 받기도 쉽지 않았어요. 그 무렵 우리집은 노이슈타트라는, 본 근방의 시골에 있었지요. 비스듬한 언덕에 있었는데 1층은 갤러리, 2층은 살림집, 3층은 손님을 위한 공간이었어요. 김형수 화백이 우리 집에서 전시를 하고는 세 번 놀랐다고 해요. 첫째는 풍경이 너무 멋진 시골마을에 갤러리가 있다는 데 놀랐고, 둘째는 그런 시골마을 전시회장 오픈 행사에 사람이 아주 많이 오는 데 놀랐고, 셋째는 그림이 많이 팔려 놀랐다는 거죠. 광주에서 가져온 43점 중 23점이 팔렸거든요.”
그날 동양화 두 점을 사간 사람 중에 그 지방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가진 성(城)의 주인이 있었다. 진정 귀족다운 풍모의 신사였다. 그가 사들인 그림을 들고 그의 성으로 간 김 관장은 성의 규모와 소장 예술품, 장서가 어마어마해서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성엔 ‘아시아 살롱’이 따로 있어 중국 그림과 일본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순간 이 사람을 잡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김 관장의 큰 장점 중 하나는 실천력. 그때 이미 그는 개인이 아니었다. 한국 문화를 유럽에 알리고 양쪽을 교류하는 전령사 노릇을 자임했다.
“그분께 한독미술가협회를 만들테니 독일쪽 대표를 맡아달라고 부탁했어요. 실무는 내가 다 할 테니 독일쪽 화랑을 소개하고 행사에 참석해 홍보하는 일만 맡아달라고 부탁했지요. 그분이 흔쾌히 수락해 함께 서울로 와서 당시 홍익대 총장이던 화가 이대원 선생을 만났지요.”
그렇게 한독미술가협회가 만들어져 양국 화가들의 교류가 시작됐다. 한국 대표는 운보 김기창이었고 임직순, 이경성씨도 주 멤버였다. 운보는 자주 독일에 왔고 임직순 선생도 그의 집 3층에서 6개월 이상 묵으면서 그림을 그렸다. 한국의 화가들은 유럽에 오면 그의 아내 채금자씨가 한국음식을 만들어주는 편안한 갤러리 킴에 제 집인 양 머무르기 일쑤였다. 채씨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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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개월씩 집에 있으면 다들 머리칼이 자라 더벅머리가 돼요. 남편 머리를 집에서 제가 잘라주곤 했는데, 저이는 날더러 그 화가들 머리도 잘라드리라는 거예요. 보자기를 덮어쓰고 우리집 뜰에 앉아 머리를 자른 화가가 참 많기도 해요. 송용, 황영성, 김형수, 임직순 선생. 나중에 한국 와서 찾아뵈니 다들 그때가 그립다고 하시더라고요.”
老화가의 정력
한국 화단의 상징적 인물인 한 노(老)화가에 얽힌 얘기 한 토막. 한번은 독일에 온 그가 은근히 자신을 ‘색시집’에 데려다줄 것을 원하는 눈치였다.
“예전부터 독일에는 공창(公娼)이 있는 동네가 있었거든요. 선생님을 모시고 그 동네로 갔지요. 자그마한 방이 여러 개 있는데, 선생님이 한 여자를 찍어요. 50마르크를 달라고 하길래 노인이니까 잘 모시라고 100마르크를 줬어요. 한 시간 뒤쯤 방에서 나오세요. 끝난 줄 알고 집으로 모시려고 했더니 한 군데만 더 들르자고 하셔요. 다른 여자 방에 다시 들어가셔서 한 시간 후쯤 땀을 닦으며 나오시더라고요. 그 동네를 빠져나오다가 다시 어떤 여자가 택시를 기다리고 있는 걸 보셨는데, 이번에는 저 여자한테 가서 시간 있냐고 물어보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 여자가 시내에서 약속이 있다고 했기에 망정이지…. 정말 선생은 굉장한 정력가셨지요. 이듬해 서울에 와서 선생을 찾아뵈니 ‘작년에 택시 기다리던 그 여자 정말 멋졌는데…’ 하시더군요. 허 참….”
박생광 화백도 김 관장과 특별한 인연을 맺었다. 독일에 한국 현대미술을 적극 소개하는 그를 귀애하셨다.
“수유리에 사셨는데 한국 오면 꼭 뵈러 댁에 들렀어요. 말년에는 편도암으로 목에 커다란 혹이 있었는데 댁에 들렀더니 그 몸으로 500호짜리 대작을 그리고 계셨어요. 캔버스를 눕혀놓고 기어다니시면서 원색의 그림을 그리는 광경이 얼마나 강렬하던지. ‘죽기 전에 독일에서 전시회를 한번 하고 싶다’고 하시더군요. ‘작품이 50점쯤 있어야 할 걸요’ 하고 돌아왔더니 어느 날 액자 없이 둘둘 말린 그림 50여 점이 소포로 왔어요. 그러다 전시회를 준비하는 중에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왔어요. 결국 유작전이 돼버린 거지요. 나중 유족들이 그림 반환을 요구하는 바람에 정작 전시회를 열어드리지 못한 게 지금껏 마음에 걸려요. 박생광 선생 돌아가신 게 1985년이니까 벌써 20년 전 일이네요.”
닥종이 인형을 만드는 김영희와도 각별한 관계였다. 작가 김영희가 어렵던 시절 그의 인형 100여 점을 모조리 사들인 것도 김 관장이었다.
“독일 시골에서 인형을 만들던 김영희의 작품을 내가 싸들고 와서 조선일보 미술관에서 첫 전시를 했지요. 나중에 전주제지에서 박물관을 짓는데 닥종이 인형이 필요하다고 해 한꺼번에 그리로 양도했지요. 하나씩 팔면 이익이 크게 날 수도 있었겠지만, 박물관에 한꺼번에 둬야 좋을 것 같아서….”
한국 화가를 독일에 소개한 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이렇게 독일 쪽 작품들을 한국에 들고와 전시하는 일도 자주 했다. 1981년에는 유럽 성화전을 기획했고, 1985년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독일 현대 도자기전을 열었다. 당시 그는 화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중이었다.
“쾰른에서 화랑을 할 때예요. 아내는 화랑에 있고 나만 먼저 집에 왔는데 가스가 폭발해버렸어요. 응급차를 불렀더니 누가 헬리콥터를 보내줬더라고요.”
VIP만 드나드는 육군병원으로 이송됐다. 응급차가 아닌 헬리콥터가 동원되고 수상이나 장관이 드나드는 병원으로 가게 된 것은 독일에서 김 관장이 차지하던 사회적 위치를 가늠케 한다.
인쇄업자로 변신
“내 신분이 달라졌다는 것을 그때 느꼈어요. 화상이 깊어 눈썹뿌리까지 다쳤다고 해서 눈썹이 안 날까봐 걱정했는데 처치가 워낙 빨라 회복이 잘 됐어요.”
입원 중에 독일 현대 도자기전 개막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독일 도예가 30명을 인솔해서 한국에 가기로 약속돼 있었다. 병원에 말했더니 나가려면 재감염이 돼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사인을 하고 나가라고 했다. 사인을 하고 팔에 붕대를 감고 도예가들을 인솔해 전시회 개막식에 참석했다.
“독일 도예가들은 한국에 오는 것을 무슨 성지순례쯤으로 여기고 마음이 설렌다고 했어요. 일본 도자기 책을 읽었더니 거기 한국 도공들을 납치해서 일본 도자기 역사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나오더라나요. 그들을 이천에 있는 옹기가마에 데리고 갔어요. 다들 옹기가 아름답다고 야단이 났어요. 한두 개씩 옹기를 샀지만 짐으로 부칠 수가 없잖아요. 나중에 김포에서 출국할 때 보니까 다들 커다란 옹기 한 점씩을 어깨에 둘러메고 있더군요. 진풍경이었지요. 나는 팔뚝에 흰 붕대를 처매고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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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화랑을 신나게 운영하던 1986년경 삼성출판사 김종규 선생으로부터 독일에서 쓸 만한 인쇄소 하나를 찾아보라는 제안을 받는다. 독일은 인쇄술에서 세계 최고 기술을 가진 나라다. 그런 나라의 인쇄 기술로 미술전집을 만들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럴 것 없이 삼성출판사와 합자해서 인쇄소 하나를 차리기로 의논이 됐다. 아는 화가도 많고 경매장도 많으니 도록과 카탈로그 만드는 일을 주로 하면 일거리는 무진장이라는 계산이 나왔다. 실제 그가 본에 세운 인쇄소 ‘괴츠키’는 미술품 전문 인쇄소였다. 이 인쇄소는 얼마 뒤 화집·도록·미술품 경매 카탈로그를 최고의 품질로 만들어내는 곳으로 명성을 얻게 됐다. 한때는 인쇄소 직원만 250여 명에 달한 큰 회사다.
“내가 성격이 철저한 데가 있는 사람이라 아무리 사소한 잘못도 참지 못해요. 인쇄업을 시작하니 잠시도 일에서 한눈을 팔 새가 없었어요. 예전처럼 그림 사러 다니는 일을 할 시간이 나질 않데요.”
인쇄업에 매진하느라 갤러리 킴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그의 컬렉션을 일괄 정리해 도록으로 만들어 일반에게 소개하고 나면 가치가 높아지는 경우도 많았다. 유트릴로의 부인 그림 같은 경우가 그랬다. 그는 어느 집에서 유트릴로의 부인, 루스발로 유트릴로가 그린 그림 200여 점을 일괄 구입했다. 단순하고 천진한 그림이었다. 그걸 책으로 묶어내 루스발로의 존재를 미술계에 널리 알렸다. 그림 갖기를 원하는 사람이 자꾸 생겼고 그림 가치는 자꾸 올라갔다. 나도 루스발로의 그림을 화집으로 구경했다. 맑고 밝은 그림이었다. 자꾸 찬탄했더니 다 팔고 몇 점은 기념으로 남겨뒀다고 한다.
인쇄소뿐 아니라 나중에는 제본하는 회사와 편집회사까지 따로 차렸다. 1980년대 순복음교회 신자가 된 그는 독일 현지에서 ‘국민일보’ 인쇄도 맡고 한인신문을 발행, 보급도 한다. 한국을 떠난 시간이 오랠수록 한국과의 유대가 더욱 끈끈하게 이어진 것이다.
‘미술 韓流’를 위한 다짐
그는 원래 독일 생활 30년을 꽉 채우면 한국으로 돌아올 계획이었다. 30년이 꽉 차는 해가 2000년이었다. 한국에 돌아와 그림 속에서 살고 싶어 인사동에 진작부터 땅을 마련해뒀다. 예정보다 2년 늦은 2002년, 그는 잘나가던 인쇄소 괴츠키를 접고 인사동으로 귀향했다. 수운회관 앞쪽 관훈동에 ‘아트뱅크’란 이름의 갤러리를 오픈했다. 곱게 나이 들어가는 아내와 함께 사무실에 나란히 출근한다. 인쇄소 사장에서 화랑 주인으로 돌아온 것이다.
“앞으로 젊고 의욕적인 화가들을 발굴해 전시회를 할 예정입니다. 드라마나 가요에 한류가 있는 것처럼 미술시장에도 한류를 만들어야 해요. 우리에겐 이우환, 백남준 같은 세계적인 작가가 있지 않습니까. 정부가 정책적으로 화가들을 키워줘야 해요. 전에도 말했지만 미술시장의 규모는 어마어마하거든요. 우리나라에서 알아주지 않는 화가를 어떻게 세계시장더러 알아달라고 합니까. 일본은 개인 화랑의 수가 우리보다 열 배나 많아요. 화랑이 좀더 활성화돼야 해요.
한국에 와서 화랑을 열어 보니 미술품을 구매하는 인구가 너무 적어서 깜짝 놀랐어요. 예술품을 감상도 할 수 있고, 훌륭한 투자가 될 수도 있는데도 미술품에 투자하는 이가 거의 없다시피 해요. 유명한 작가 작품에만 구매자가 몰리다 보니 유명 작가 그림값만 비싸지고…. 그러니 숨은 작가를 발굴하는 것이 시급해요. 집 안에 좋아하는 작가의 그림 한 점씩을 걸어놓는 사람이 늘어나야 우리 미술계가 풍요로워질 겁니다.”
아트뱅크 김 관장의 자리 앞엔 분홍빛 불알을 드리운 이중섭의 황소 그림이 걸려 있다. 가짜 그림에만 익숙한 나는 저게 진짜냐고 물었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그럼요” 한다. 한국에 오니 그림을 팔기보다 욕심나는 그림이 많아 자꾸 사 모으게 된다고 한다.
그의 방에 걸린 그림을 대충 훑어봐도 아트뱅크 컬렉션의 수준을 알 만하다. 이중섭의 황소와 은박지에 그린 은지화(銀紙畵) 곁엔 김환기의 점묘가, 그 곁엔 운보의 바보산수가, 맞은편엔 천경자의 개구리 그림이 걸려 있다. 내놓지 않은 숨은 보물도 많다. 그는 내몽골 홍산의 고옥들을 몇백점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인사동 인근에 소문나 있다.
“홍산은 기원전 3500년경 신석기 시대쯤 우리 동이족이 살던 땅이에요. 역사책을 찾아보니 단군의 윗대인 환웅이 건설한 나라가 있었다고 하더군요. 당시 무덤에서 출토된 옥인데 아주 정교하죠.” 나도 사진첩에서 홍산 고옥을 봤다. 5500년 전의 옥 장신구들이라니. 시간이 아득하게 압축되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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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품 해외 반출은 국토 확장?
그는 한때 외국인 노동자였다. 노동자로 독일에 가서 양국을 잇는 가교 노릇을충실히 했다. 그뿐만 아니라 독일의 앞선 미술사를 공부해 최고의 화상이 되어 30년 만에 고향에 돌아왔다. 어딜 가든 독일에 감사하고 독일을 자랑하는 사람이 됐다. 우리나라에 온 외국인 노동자들도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간곡한 주장이다. 우리나라에 일하러 제 발로 걸어온 사람들을 따듯하게 대해줘 친한(親韓) 인사로 만든다면, 한국을 공부하고 돌아가게 만든다면 결국 국가적으로 큰 도움이 되는 일 아니냐는 거다.
“외국인 노동자가 한국을 떠날 때 다들 한국이란 나라에 이를 갈고 떠난다면 그 손실이 얼마나 막대합니까. 외국인을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들이 우리 문화를 배울 수 있는 장을 만들어야, 돌아가서 그들이 우리를 홍보할 것 아닙니까. 내가 독일 문화를 한국에 소개했던 것처럼.”
그는 미술품 해외 반출 금지법도 다시 생각해보자고 주장한다.
“미술품이 해외로 나간다는 건 어떤 의미에서는 국토 확장이라고요. 무조건 막을 일만은 아니에요. 국가예산이 있어 그걸 사들이면 좋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어딜 가든 코리아의 미술품임을 당당히 주장할 수 있도록 하면 되는 거지요. 그런 식으로 많은 사람에게 우리 미술품을 알려야지요.”
독일에서 낳아 기른 1남 2녀는 어릴 적부터 하도 많은 그림을 보고 자라 절로 그림을 좋아하게 됐다.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자기 집 아이들을 보면 절로 알게 된다고 한다. 둘은 디자인 전공을 했고 하나는 법대에 다니지만 법대생 쪽이 그림 솜씨가 더 좋단다.
“아들은 고등학교만 독일에서 졸업하고 대학은 우리나라로 유학을 보냈어요. 한국이 독일보다 훨씬 좋다는군요. 산업대에서 독일 ICE와 한국고속철의 디자인 비교연구 석사논문을 준비중입니다.”
인사동 아크뱅크엔 구경할 그림이 참 많다. 그림 구경을 즐기다 보면 우리도 30년 전 김 관장처럼 숨어 있던 벨라스케스를 발견할 수 있을까. 그의 대답은 “당연히 있다” 쪽으로 기운다. 젊은 작가의 값싼 미술품을 하나씩 사들이는 사람이 늘어났으면 좋겠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