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군을 내려주고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길로 막 들어 설 때 재숙의 전화가 걸려왔다.
“미스 리 왜 무슨 일 있어?”
“아니요 사장님 저 내일 출근 못 할지도 몰라요.”
“왜 무슨 일인데”
“지금 누가 찾아와서 만나러 가는데 어디를 다녀와야 할지도 몰라서요.”
“누군지 물어 바도 되나?”
“아니요 죄송해요. 흑흑”
“그게 다입니다. 그렇게 그녀는 전화를 들고 울기만 했습니다.”
“이 사장님 우리를 바보로 알아요. 15분을 여자 직원이 우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는 걸 우리보고 믿으라는 겁니까?”
“사실인 걸 어떻게 합니까?”
“좋습니다. 그건 그렇다 치고 그럼 2시까지 어디에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그건 제가 기면증을 앓고 있어서요. 전화를 끊고 생각에 잠겨 있다가 집에 들어갔는데 그것이 새벽 2시더군요. 아마도 그사이에 잠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사장님 지금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시는 것 같은데요. 그것을 증명하지 못하면 살인범이 되시는 겁니다. 아세요?”
“증명을 할 수도 증명 할 것도 없다는 게 저도 답답합니다. 하지만 저는 결백합니다. 그러면 역으로 제가 죽였다는 증거를 먼저 찾으시는 게 빠르시겠네요.”
“좋습니다. 어디에 있던가요. 깨어 나셨을 때?”
“집 주위였습니다. 아리랑 고개 초입 이었습니다.”
“차번호가 21가XX23 에쿠스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임 형사 그쪽 CCTV 확인 해 바 일단 잠시 쉬고 계십시오. 전 기면증이라는 것에 대해 공부 좀 하고 오겠습니다. 그리고 부디 CCTV로 확인 가능하기를 바랍니다.”
가끔 소설이나 드라마에 등장하는 인물 중 기면증이라는 생소한 병을 앓고 있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길거리를 걷다가 갑자기 쓰러져 잠이 드는 인물은 흥미롭지만 실제로 이 병을 앓고 있는 경우 큰 고통에 시달릴 수 있다. 누구나 한번쯤 주체할 수 없는 졸음을 경험했겠지만 기면증을 앓고 있는 환자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슬립 어택(sleep attack)’이라고 칭하는 기습적이고 강력하게 찾아오는 잠에 빠져든다. 기면증은 야간에 6시간 이상 충분한 수면을 취해도 낮 동안에 심한 졸음증상이 나타나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질환으로 주로 중 고등학생 시기에 많이 나타난다. 미국 스탠포드 대학에서 기면증이 낮에 깨어 있게 하는 호르몬(하이포크레틴)이 부족해 발생하는 병이라는 연구가 발표됐으나 아직까지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고 우리나라의 경우 2만 명 정도가 기면증 환자인 것으로 추산된다. 자신이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게 잠이 들어 있고, 잠깐 사이에 꿈을 꿨다면 기면증 가능성이 높다. 기면증 환자는 밤에는 물론 낮 시간에도 갑자기 수면상태에 이른다. 이러한 증상은 짧게는 30초, 길게는 30분까지 지속되기도 하며 양질의 수면을 취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로 인한 집중력 저하가 나타난다.
어느 병원 홈페이지에 올라 있는 글은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이것은 이 필호가 주장하는 기면증에 많은 구멍이 있다는 걸 입증한다. 일단 중, 고등학생에게 나타나는 증상이라는 것과 길어야 수면에 빠지는 시간은 30분이라는 것이다. 즉 그의 주장대로 기면증에 걸린 사람이라 해도 3시간의 공백을 메우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말이다. 임 형사가 CCTV에서 그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는 용의자가 아닌 범인이라 몰아도 그렇게 잘못 될 것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증거라는 것을 찾아야겠지만 그것도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다. 목 졸림에 의한 질식사 일 경우 특별히 범행도구가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기껏해야 그의 손 크기와 목에 남겨진 자국과 비교해 보는 정도이다. 결국 이번 사건은 범인의 자백이 가장 큰 역활을 할 것이다. 가장 확실한 것은 목격자를 확보하는 것이 가장 좋겠으나 정 안되면 박 과장이 증인 정도는 만들어 줄 것이다. 동네 불량배 놈을 목격자로 둔갑시키는 것은 일도 아니다.
이 사장은 무언가 잘못 흘러가고 있다는 걸 감지하고 있다. 이들은 회사 전담 변호사에게 전화 하는 것조차 막아두고 이미 날 범인으로 만들어 가는 작업을 하는 듯하다. 야근 후 늦은 시간에 귀가하는 직원들이 안쓰러워 바래다 준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을 만들었다는 생각에 가슴을 칠 노릇이다. 지금껏 사업을 하면서 법을 어겨 본적도 없고 그러한 시도조차 안하고 살았는데 여직원이 밤에 전화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도 의식 없는 잠속에 있던 기면증이라는 병을 앓고 있는 것도 죄가 된다는 말인가 말이다. 밤은 깊어 가고 있다. 아니 이미 새벽으로 넘어가서 조금 더 있으면 새로운 하루가 시작 될 것이다. 오늘 오전에 새로운 거래처와 상담이 잡혀 있는데 그들은 날 내보내 줄 생각이 없는 듯하다. CCTV를 확인 한다고 나간 임 형사라는 사람도 아무 소식이 없고 김 형사도 나타나질 않는다. 온통 검정 색으로 도배를 한 이방에서 난 졸음에 겨워 꾸벅 되고 있을 뿐이다. 아니 10분이라도 눈을 붙이려하면 무언지 모를 어디에서 들리는 지 알 수 없는 사이렌 소리 같은 것이 잠속으로 빠져 들지 못하게 방해 한다. 눈에 모래가 들어간 듯 서걱 거리는 것이 기분이 영 안 좋다. 종당에는 그저 그들이 말하는 대로 말해주고 잠속에 빠져 들고 싶다. 어제 저녁에 마신 술로 인한 갈증이 목안을 깔깔하게 사포질을 하는 대 이들은 벌써 몇 시간동안 내게 한 방울의 물도 제공치 않고 있다. 이것은 분명 인권 유린이다. 내가 범인으로 잡혀 온 것도 아닌데 그들은 이미 나를 범인 취급을 하고 있는 것이다. 변호사에게 강력히 항의해 줄 것을 요구 할 것이다. 그러면서 어제 일을 다시 한 번 곱씹어 보고 있다. 분명 집 앞 골목 입구에서 그녀의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전화를 끊고 나서 얼마의 시간인지 모르도록 정신없이 잠속에 빠져 있었을 것이다. 그 3시간은 나는 빠져나가고 다른 무엇에게 잠식되어 있었다. 그것이 다다. 정말 맹세코 다른 일이 없었다. 평상시 그녀와 내가 따로 시간을 함께하거나 특별히 대우를 한 적도 없다. 모든 직원들에게 편견 없이 대했다. 그것은 우리 직원들도 인정하는 사실 일 것이다. 현장에 나가 있는 임 형사가 돌아오면 별일 없이 난 집으로 돌아 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져 본다. 아무리 들쳐 바도 내게서 나올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걸 그들은 인정 할 것이다. 또다시 눈은 감겨 온다. 이럴 때나 기면증이 오지 그럼 아무리 사이렌이 울리더라도 잘 수 있을 텐데 그놈의 병은 때와 장소를 가리는지 오늘은 나타나질 않는다. 하긴 그것이 매일 오는 것도 아니다 때로 한 달에 한번이나 두 번 심하다 싶으면 일주일에 한번 정도이다. 머릿속으로 둥둥 떠다니는 단어는 자고 싶다가 전부이다. 그것만이 내 살아야 하는 유일한 목표가 된듯하다. 어서 임 형사가 돌아와 주길 바란다. 눈이 감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