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교구 명일동성당 이계상 분도
쇠창살 안의 예수님을 찾아
육근웅 베다 동서울 Re. 명예기자
선교사, 자살예방 전문가, 표현예술 상담지도사, 자원봉사 강사, 인권 상담사, 성교육 강사, 성폭력 상담사라는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이계상 분도 형제님을 따라 강동경찰서를 방문했다.
‘유치관리팀’에 들어서자 담당 경찰관이 “오늘은 한 사람 뿐이네요”라며 분도 형제님을 반갑게 맞았다. 분도 형제님은 가방에서 블루투스 스피커를 꺼내어 놓고, 스마트폰에서 노사연의 ‘만남’을 연결시키자 싸늘한 기운이 감돌던 유치장은 마치 작은 피정장소가 된 듯하였다.
은은한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유치장 안의 유치인에게 커피 한 잔이 건네졌다. 양팔이 온통 문신으로 뒤덮인 그가 “나는 불교를 믿으니, 선교는 그만 둬요!”라고 말하자 분도 선교사는 “아, 그러세요.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왔어요.”라며 준비한 빵과 과자들을 배식구를 통해 넣어 주었다. 젊은이는 먹거리를 보더니 경계의 눈빛이 약간 누그러지면서, 배고프면 어서 먹으라는 선교사의 말이 떨어지자 봉지를 뜯기 시작하였다.
젊은 유치인과 한동안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분도 선교사의 목소리는 철없이 고집을 부리는 어린아이를 어르는 어머니처럼 배려와 염려와 자상함이 배어있었다. 난생 처음 만나는 사이인데도 유치장에 오게 된 이유를 스스럼없이 털어놓게 만드는 능력에 감탄했다.
짓누르던 고통은 나를 이끌기 위한 하느님의 섭리
그는 안보담당 공무원으로 엘리트 코스를 성실하게 거쳐 왔음에도 직급정년에 걸려 50대 초반에 직장을 잃었다. 무사안일로 업무를 수행했더라면 덜 억울할 터인데, 도저히 이해도, 용납도 되지 않는 퇴직으로 ‘신경정신과의 단골손님’이 되는 고통을 겪었다. 유아영세자로서 해외파견 근무 때문에 성당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하다가 귀국한 93년부터 레지오 마리애 단원이 되어 명일동성당의 총구역장, 사목회 부회장으로 어렵게 시간을 쪼개어 봉사활동을 하였던 것을 생각하면 더욱 주님이 원망스러웠다고 한다.
‘어떻게 이럴 수가’에 붙들려 정신적 상처에 허덕이던 중 지인의 권유로 가톨릭교리신학원에 입학하게 된 것은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 15.16)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였다.
신학원을 다니던 어느 날 얼었던 마음을 근본적으로 녹이는 성경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형님들의 아우 요셉입니다. 형님들이 이집트로 팔아넘긴 그 아우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저를 이곳으로 팔아넘겼다고 해서 괴로워하지도, 자신에게 화를 내지도 마십시오. 우리 목숨을 살리시려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창세 45,4-5)
하느님을 원망해왔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워지면서 새로운 삶의 길이 보이기 시작했고 서서히 건강도 회복돼 몸과 마음이 정상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전에 그토록 짓누르던 어려움과 고통이 오히려 나를 이끌기 위한 하느님의 섭리라 생각하니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었고, 오직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로서의 희망만이 마음을 가득 메웠다고 한다.
2002년 12월 교리신학원 졸업을 앞두고 결정한 경찰사목은 그리 녹녹한 일이 아니었다. 특히 유치장에서 유치인들의 심한 냉대와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대할 때에는 ‘내가 왜 이런 대접을 받으면서 이 짓을 해야 하나?’라는 자괴심에 빠질 때도 많았다. 이럴 때마다 김수환 추기경의 ‘참사랑의 의미’라는 글을 되새기며 힘을 얻었다.
한번 실수로 평생 고통 받지 않도록 옆에서 도와
“광우병 촛불시위로 온 나라가 홍역을 앓을 당시 광화문 한복판에서 시위대와 전․의경들이 밀고 당기는 전투(?)가 벌어졌어요. 당시 대원들은 닭장 같은 경찰 버스 안에서 새우잠을 자고 길거리에서 밥을 먹는 등 온갖 고통을 겪고 있었지요. 저는 수시로 간식을 싸들고 제가 담당하는 강동경찰서 대원들을 찾아가 ‘힘들지’ 하면서 안아주고 격려를 해줬으며, 이때 많은 대원이 눈물을 흘리면서 품에 안기고 어려움을 호소했어요. 당시 모든 선교사가 이처럼 길거리의 엄마와 아빠가 돼 그들을 위로했으며, 지금도 하나의 전설처럼 회자되고 있지요. 그 후 명동대성당에서 거행된 경찰사목위원회 합동 세례식에서 평소보다 훨씬 많은 대원이 세례를 받았어요. 그해 연 3회 세례식을 통해 거의 1000명의 대원이 하느님 품에 안겨 보람을 느꼈어요.”
처음에는 경찰기관의 배타적 자세, 타 종파의 은근한 질시 등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공소격인 경신실을 각 경찰서와 기동단에 설치해 나가면서 경찰기관에 뿌리를 내려가는 과정은 정말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고난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때마다 신부님을 중심으로 전 선교사들은 기도로 똘똘 뭉쳐 풍랑을 헤쳐 나갔다고.
또한 전․의경들의 인성 향상을 위한 해피 아트 테라피(H.A.T.)를 도입하고 콘서트를 개최하는 등 경찰기관의 특성을 고려한 문화 복음화에도 박차를 가해, 결국 경찰 당국의 긍정적인 호응을 받아냈다. 선교의 패러다임을 새로운 시대의 흐름에 맞게 구상하고 추진해 나간 결과이다. 그리하여 서울시내 전의경 부대를 묶어 연 6회 정도 ‘행복테라피 콘서트’를 열어 대원들의 사기를 올려주고, 최근에는 평화방송과 협조하여 ‘내무반에서 전하는 행복 우체통’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감화 봉사자로 활동하면서 많은 유치인들이 삶에서 저지른 실수로 한 평생 어려움을 겪으며 살아가는 것을 알게 됐어요. 이들이 또 다시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옆에서 도움을 주는 것이야 말로 저의 남은 생을 희생할 만큼 가치가 있는 일임을 깨달았어요. 꿈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다시 살아갈 희망을 전하기 위하여 그들을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가 필요해요. 그들이 곧 ‘쇠창살 안의 예수님’이라는 인식의 전환 속에서 기도하는 것이 가장 필요하지요. 무엇을 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사랑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유치인을 찾아 나서면서 항상 잊지 못하는 말씀은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 찾아주었다.”(마태 25,35-36)라는 구절이라는 분도 선교사는 “경찰사목이 사회사목의 일부라는 측면에서 그 근본정신은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 속에서 주님을 보는 것’이어야 하지 않겠어요?”라고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