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펀의 시인들|정해연
내비게이션 외
경로를 이탈했습니다 경로를 이탈했습니다 ……
벌겋게 흥분한 얼굴로 번쩍번쩍 겁주는 내비 앞에서 울컥,
왜? 꼭 그 길로만 가야 해?
목적지에 ‘우연히 들른 찻집에서 만난 첫사랑’이라 친다
길은 다 내 손바닥 안이라던 내비, 갑자기 닭발 오리발
다시 ‘구름다리에 걸어놓고 온 깔깔대던 오후’라 친다
철봉에 매달린 기억 너머,
웃음소리 공깃돌처럼 튀어 오르고
두고 온 작은 발자국들 걸어 나오고
언제였을까
처음으로 이탈 경고가 울린 건
길은 옆구릴 찢으며 자꾸자꾸 태어나고
이탈 경고는 쉴 새 없이 울려대고
빨리 목적지를 치라고 재촉하는 빈칸,
캐서린 되어 히스클리프와 달리던 바람의 언덕
제인 에어 되어 눈 먼 로체스터를 재회한 허물어진 담장, 이라 칠까
설정된 경로대로 가도 닿을 수 없는 곳이,
경로를 벗어나도 기어이 가 닿는 곳이 있다
내비 씨, 여긴 어떻게 가야하죠?
파리의 밤, 칼바도스에 젖고 서로에게 젖어들던 라비크와 조앙 마두*
칼바도스 어떤 맛일까, 빨리 어른이 되고팠던 열일곱 그 새벽 창가
* 레마르크 소설 개선문의 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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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악보는
이백팔십다섯 걸음이면 405호 앞
따라 들어온 새벽, 집을 깨운다 주인 행세하던 정적을 몰아내고 새 소릴 들인다 밤새 어딜 그렇게 헤매고 다녔을까 그녀 축축하다 그와 손잡고 걸은 숲길 얘기에 데워놓은 죽이 식는다 안 먹겠다는 투정을 입가에 묻힌 채 발목까지 뒤덮은 이끼를 내보인다 온몸 휘감은 넝쿨에 가빠진 숨, 드라이아이스처럼 방안을 채운다 뭐든 물이 되는 방. 그녀 흘러내린다 발목이 잠기고 명치가 잠기고, 목까지 차오르기 전에 돌아서야 한다 그녈 먹어치울 숲 따윈 모르는 척, 방문을 현관문을 닫고 더는 가라앉지 않겠다는 몸부림을 닫고
데자뷰 같은 시간들이 G선에 걸려있다 아직은 도돌이표가 유효한 악보. 곡이 너무 지루할까 엄마, 가끔 변주도 그려넣는다 끝날 것 같지 않은, 끝날까 두려운 이백팔십다섯 걸음, 발이 푹푹 빠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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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연
본명 정영숙. 2022년 《시와함께》 신인상으로 등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