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리로 따라가는 것이 삶의 큰 길
-한국수필 11월호를 읽고-
이방주
문학작품은 인식과 형상으로 완성된다. 수필은 대상을 철학적으로 인식하여 문학적으로 형상하는 것이 기본이다. 수필은 다른 문학과 달리 사실의 체험을 제재로 삼는다. 체험한 사실을 철학적으로 해석하여 인상적으로 표현한다. 수필 창작이 어렵게 느껴지는 까닭은 철학적 인식이라는 내용을 문학적 형상화라는 그릇에 담아야 하기 때문이다. 또 자칫 문학적 수사에 얽매어 주제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논어에 ‘문질빈빈(文質彬彬)’이란 말이 있다. 인식이 형상의 문채(文彩)보다 질박하면 왠지 촌스러워 보이고, 형상이 인식보다 화려하면 겉만 사치스러워 보이니 인식과 형상의 조화가 이루어져야 공명을 흠뻑 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사실과 체험의 문학인 수필은 조화의 황금비를 이루기 어려울 경우 문채보다 내면에 충실할 수밖에 없다. 수필은 작가 자신의 수행이 발현된 문학이기 때문이다.
수필이 수행의 문학이라면 갈고 닦은 삶의 철학이 작품에 담길 수도 있지만, 창작 과정에서 변환과 성장을 이룰 수도 있다. 그러므로 작가가 바람직한 가치라고 생각하는 인식체계를 알아보는 것이 작품 이해의 첫걸음이 될 것이다. 『한국수필』 11월호에는 모두 56편의 회원 작품이 실렸다. 이번호에는 유독 ‘섭리’를 인식의 바탕에 둔 작품이 많아 보였다. 좋은 작품이 많았지만 다음 몇 작품이 눈에 띄었다.
「갯마을의 추억」(백필기)은 만조 때 들어온 숭어 떼를 통하여 인간의 모습을 발견한다. 인간이 막아놓은 그물에 걸려 썰물을 따라 바다로 가지 못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몇 번의 시도에 실패하는 모습도 보이고, 시도조차 하지 않는 숭어도 있었다. 생과 사의 위기에서 물속 개펄 발자국에 엎드려 아예 다음 만조를 기다리는 숭어도 있다. 인간이나 미물이나 위기에 봉착하면 용감해지는 법인데 ‘흔적을 감추고 조용히 때를 기다리는 은둔자들은 용기 없는 비겁한 졸부인가, 아니면 슬기로운 지략가인가. 아니면 사태를 앞서서 깨달은 선각자였을까.’ 작가는 무모한 용감이 언제나 의로운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인간이나 미물도 위기에 봉착하면 용감해지는 법이다. 생사가 갈려지는 정점은 다가오는데 우왕좌왕할 수는 없다. 무엇이든 시도하지 않으면 얼마 남지 않은 시간만 흘러갈 뿐이다. 생멸의 갈림 시각은 다가오고 있었다. 용기를 내어 탈출을 시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생각을 거듭해도 뛰어넘기로 의기투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물 너머 겨릅발이 떠 있음을 미처 알아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낮은 그물 앞에서 전력을 다한 몸짓으로 물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작가는 먹이사슬에 얽힐 수밖에 없는 자연의 섭리 앞에서 무모한 용기보다는 슬기롭게 극복하는 것이 삶의 지혜이고 자연의 이치’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갯벌마을에서의 추억에서 섭리대로 살아갈 것임을 생각한다.
이 작품은 갯벌에서의 추억을 소환하여 현장감 있게 재구성해서 그려내는 솜씨를 보였다. 숭어, 갈게, 문어 등의 갯벌 생물들을 상관물로 인간의 삶을 유추하여 그려내는 수필적 장치도 훌륭하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냐면」(이호윤)은 섭리에 따르는 것이 순리라는 인식을 보여준다. 천지도 만물을 생육함에 억지를 부리지 않고 자연에 맡기듯이 ‘세상에 던져진 대로, 주어진 대로, 일이 일어난 대로 살아내는 것이 인생’이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창작과정에서 내면의 변환과 성숙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작가는 10년 넘게 우정을 나누며 자신이 운영하는 학원에서 함께 일했던 A라는 강사의 갑작스런 배신으로 오랜 시간 힘겨운 고통을 겪는다. 믿었던 사람이기에 상처가 더욱 컸던 작가는 이 일을 계기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시간의 거리를 두면서 나는 상황과 나 자신을 담담하게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되었다. 평온한 내 일상과 건강을 무너뜨린 것이 A 선생님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나 자신이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중간부분 생략) “인생에 ‘왜’는 없다. 어떻게 사느냐가 있을 뿐.”이라는 법륜스님의 말씀에 깊이 공감한다. 세상에 던져진 대로, 주어진 대로, 일이 일어난 대로 살아내는 것이 인생 아니던가. 그냥 받아들이자.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더는 이해하려 애쓰지 않게 되었고 괴롭지도 않았다. A 선생님처럼 내가 준 것들을 저버리든 소중히 간직하든 그것은 상대의 몫일 뿐 나는 계속하여 천지불인(天地不仁)의 섭리를 따라 모든 이에게 편애 없이 우정과 신뢰를 주고 싶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독이 될 수도 약이 될 수도 있다. 비탄과 자괴감, 우울감, 불신으로 얼룩진 지난날을 이제 두려워하지 않기로 한다. ‘비가 오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나. 우산이 아무리 커도 비에 젖는 것을 피할 수 없는 법이다. 더구나 그 비가 꼭 나쁘기만 할 것인지는 더더욱 알 수 없다.’라며 날마다 오는 내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한다. 사람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험을 하기도 하지만, 스스로를 정화하면서 긍정의 문으로 들어선다. 그러면서 한층 성숙해가는 과정을 작품에 담담한 어조로 그려냈다.
「들키고 싶지 않은 감정」(김기연)은 고백의 문학인 수필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은퇴 후 새로 시작한 일터에서 느끼는 새로운 감정. 아내가 아닌 다른 여인에 대한 호감을 경험한다. 아내에게는 숨길 수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밀어내고 싶지 않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사람은 나이가 들어도 감정은 녹슬지도 늙지도 않는다며 들키고 싶지 않은 감정을 ‘어쩌란 말이냐’며 솔직하게 고백한다.
결혼 후 처음 접하는 이성 친구와 데이트는 샴페인 거품이나 솜사탕처럼 달콤하고 황홀해서 금세 나를 매혹시켰다. 피이! ‘떡 줄 사람은 생각지도 않는데⸱⸱⸱’ 나의 머릿속 상상력은 초가집부터 기와집까지 그리는 건 아닌가? 스스로 생각해보았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카페에 들어서니 창밖으로 펼쳐지는 한강의 풍경은 우리를 위한 것처럼 느껴졌다. 카페 안에서 푸치니의 오페라 ‘별은 빛나건만’이 흘러나온다. 나는 행복한 감정을 느끼면서도 깊어가는 감정을 숨기고 있었다.
감정의 변화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 외부로부터의 규범에 어쩔 수 없이 드러내지 못하지만 누군가에게서 느끼는 호감을 아니라고 굳이 부정할 수는 없다. 이것이 거부할 수 없는 인지상정이다. 들키고 싶지 않은 감정에 작가는 용기를 낸다. 수필에서의 고백이기에 더 진솔하게 느껴지는 것 또한 감출 수 없는 감정 아닐까. 수필 창작 과정에서 고백은 진솔하고 남김 없어야 한다. 부끄러울 수도 있겠지만 솔직하고 완전한 고백만이 독자의 공감을 얻을 수 있다. 이성에 대한 호감과 연정은 동서고금 남녀노소를 초월한 인간의 보편적 정서이기 때문이다. 섭리를 고백하는 용기가 큰 울림을 준 작품이다.
「어쨌거나 참인생」(박혜선)은 자신의 의지 없이 사람의 보호 속에서만 살아가려는 게코를 통해 작가는 삶에 正道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인식을 드러내었다. 작가는 모든 삶은 그 자체가 삶을 담아낼 그릇이며 빛나는 아침의 해처럼 소중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들이 내릴 선택을 존중해 보기로 하고 사육장 문을 열어 놓아보았다. 게코들이 머무는 곳은 작은 유리 사육장이었고 그들은 문밖을 실수로 나갔건 선택을 해서 나갔건 결국 어김없이 제 사육장으로 돌아와 주인의 손길과 먹이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작가는 내게 주어진 인생을 남과 견주며 타인의 인생 속에서 삶의 열쇠를 찾으려 하기보다 때때로 버겁고 자책으로 고민하더라도 자신이 선택한 삶에 충실할 것을 다짐한다. 내가 선택한 삶이든 선택된 삶이든 나름의 의미가 있음을, 삶은 그 자체가 삶을 담아낸 그릇이며 소중하다고 말한다. 세상에 의미 없는 삶은 없다. 어떤 삶을 살든 어떻게 살아내든 어쨌거나 참인생이다. 그것이 바로 순리이고 섭리를 따르는 삶이라는 데 가치를 둔 작품이다.
「바람이 분다」(하종혁)는 좋든 싫든 자연의 순환에 따라 거스르지 않고 순응하며 사는 길이 섭리라는 인식을 바람이라는 자연 현상에 빗대어 표현했다. 바람이 계절에 따라 순환하듯 인생도 그렇게 순환한다는 자연의 질서를 사유의 바탕에 둔 작품이다.
늦가을, 요란하게 치장하여 서로 자태를 뽐내던 나뭇잎도 찬바람이 몸속 깊숙이 파고들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제히 몸을 내려놓는다. 그들은 주저하거나 슬퍼하지 않고, 자연의 순환에 그냥 몸을 맡긴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한 걸음 물러서 돌이켜보니 단지 거센 비바람이나 매서운 눈서리만 마주한 것은 아니었다.
바람은 계절이라는 또 다른 모습으로 순환한다. 작가는 인생을 살아오면서 맞이했던 바람을 반추해 본다. ‘바람이든 훈풍이든 이제는 익숙해질 만한 나이가 되었는데도 바람은 여전히 두렵다’고 한다. ‘휑한 가슴엔 쓸쓸한 바람’이 감돌기 때문이다. 늦가을 화려하던 나뭇잎도 바람에 일제히 몸을 내려놓지만 그렇다고 주저하거나 슬퍼하는 일이 없다. 그냥 자연의 순환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 사춘기의 회오리바람, 사십대에 맞은 돌개바람을 맞은 경험을 소환하여 자연의 바람과 인생의 바람에서 유추적 공통점을 찾아냈다. 바람과 인생의 상관성을 찾아내어 주제를 전달하는데 성공한 작품이다. 상관물에 대한 궁구는 수필창작 과정에서 주제를 전달하는데 매우 큰 효과를 나타낸다. 인생의 과정과 계절에 따른 바람이 설리(說理)에 맞도록 치밀한 구성도 생각해 볼만하다.
이번호에 실린 작품들은 제재를 선정하고 해석하여 인생의 의미로 치환하는데 성공한 작품들이 많았다. 수필 창작과정에서 중요한 하나의 장치인 소재에서 상관성을 찾아 작가 자신의 의식으로 발효시켜 표현하는 기술을 보여준 작품이 많았다.
그러나 어휘의 선택과 문장, 문단의 구성과 배열에 소홀한 작품도 더러 있었다. 수필은 짧은 산문이므로 어휘 선정에 신중해야 한다. 동의어라도 어감, 어조, 함축된 의미, 미세한 의미의 차이를 고려하여 선택해야 한다. 어법에 어긋나는 어휘나 문장은 말할 것도 없다. 짧은 문장이 독자에게 여백을 주어 상상에 효과적이고 깊은 여운도 준다. 수사에 치우쳐 문장이 길어지면 어법에 어긋나 의미 전달에 실패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겠다. 어법에 어긋나서 작품성이 훼손되는 안타까움을 수필가는 명심해야 한다. 적절한 어휘를 찾아 쓸 수 있는 것은 퇴고의 양과 질에 좌우된다. 다음 달에 더 좋은 작품 기대한다.
(한국수필 12월호에 게재)
첫댓글 이번 호에서는 문채보다 내면에 충실한 글들이 월평에 올랐군요.
이호윤선생님의 작품도 언급되어 반갑습니다.
우산이 아무리 커도 비를 피할 수 없고 그 비가 꼭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대목에서 마음이 확 닿았습니다.
선생님의 월평을 읽으면 수필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文質彬彬이라 하여 문채와 내용이 조화를 이루어야 하겠지만
수필은 다른 문학 양식과 달리
조금 거친 면이 있더라도 내면의 마음가짐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먹이사슬의 보이지 않는 망에 걸리는 절 반성하며 내면에 충실하도록 집중해 보겠습니다.
맞습니다.
내면이 충실하고 곧게 나아가면 망은 찢고 나갈 수 있을 겁니다.
월평 마지막 문단
'동의어라도 어감, 어조, 함축된 의미, 미세한 의미의 차이를 고려하여 선택해야 한다. 어법에 어긋나는 어휘나 문장은 말할 것도 없다. 짧은 문장이 독자에게 여백을 주어 상상에 효과적이고 깊은 여운도 준다. 수사에 치우쳐 문장이 길어지면 어법에 어긋나 의미 전달에 실패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겠다.'는 말씀을 다시 깊이 새겨야겠습니다.
좋은 작품들이 조사, 어미, 접속어, 수식어와 피수식어의 어순 같은 것을 소홀히 해서
작품성을 손해보는 것 같아 안타까웠습니다.
열쇠는 퇴고인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