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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이 파열되어 간신히 숨만 쉬고 있을 때<
그리고 그 날이 왔다.
무릅쓰고 꽃을 피워내는 것보다
봉오리를 단단히 닫아두고 있는 것이
훨씬 고통스러운 날이
이나이스 닌 -
가슴이 무겁도록 숨이 막힐 정도의 폭염이 지속되고 있다. 땡볕으로 몇 백 미터 걸으면 땀이 온 몸에 젖을 정도이고, 의존하고 있는 선풍기도 그나마 밤에 잠을 청할 때는 호흡과 신체를 바람이 누르고 해서 끄게 되면 잠에서 깨어나기가 십상이다. 나름의 방법은 독서나 글 작업에 집중하거나 아니면 신체와 느낌을 이완하여 가장 편한 상태를 유지하며 움직임을 천천히 하고 있다. 그냥 느낌의 흐름을 알아차리고 의식의 흐름에 간간히 집중해서 덥다라는 생각보다는 그 생각 이전의 몸과 정서의 상태, 나의 반응을 의식하며 함께 있는 연습을 하고 있는 중이다.
대부분의 초목들에게는 이 여름이 성장과 도약의 기회가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예기치 않은 폭풍우에 줄기가 잘리거나, 폭염에 기운이 고갈되어 쉽게 말라 버리기도 하는 위기의 계절이기도 하다. 어느 정도 장성한 나무들에게도 이처럼 폭풍우와 폭염이 위기의 순간을 가져오는 것처럼 장성한 40대 50대의 인생에 폭염을 맞아 에너지가 고갈되어 겨우 반응하며 사는 인생도 있게 된다.
10여년 교직생활에 갑작스럽게 찾아온 자기 학급의 혼란스러움을 호소하며 유난히 지처 있던 여러 교사들이 눈에 어린다. 지옥(?)에서 온 한 두명 학생들과의 버거운 갈등과 통제 불가능한 학급분위기에서 파김치가 되어 어느 사람에게는 공항장애로까지 다가온 학생들과의 갈등을 유난히 호소하는 교사들이 많았던 지난 7월이었다. 몇 주 사이에 순식간에 번진 소란스런 학급 분위기로 인해 해당 교사들은 깊은 상처와 혼란을 겪고 있었다.
그러한 순식간에 벌어지는 학급 혼란의 고통보다 더 기나긴 혼란의 과정을 겪는 사람들도 있다. 내가 만나 상담을 한 최근의 두 가정은 부부간의 문제로 깊은 좌절을 겪으면서 혼란의 기나 긴 폭염의 시기를 거치고 있었다. 기쁨이 아니라 책임과 의무로만 겨우겨우 살아가고 있었다.
A는 50대 교사로 긴 세월을 민주화운동에 정열을 불태운 경력이 있고 이제는 교육운동에 헌신하고 있는 헌신과 의지로 뭉친 남성이다. B는 40대 전문 직업인이고 긴 세월을 한국전통 무도에 오랜 세월 있었던 적이 있고 전통적인 다도에도 조예가 깊으며 자신의 비즈니스계에서는 성취감이 강한 남성이다. 이들이 당면한 문제는 부부간에 상당히 오랜 – 정확히 말하면 거의 결혼 생활 기간 내내 폭력적인 부부싸움의 세월로 보낸 – 갈등으로 인해 A는 50대 말인 지금의 나이에 이혼을 생각하고 있었고, B는 이혼이 작년에 있었음에도 아이 양육으로 계속만나면서 분노를 서로에게 전가하고 있었다.
두 사람 다 공통점은 남편으로써 이들은 전형적으로 힘과 논리의 언어를 쓰고 있었고, 아내들은 감정의 언어를 사용하다보니, 여성들은 모두 히스테리아 증상에 걸려 있었다. 특이한 공통점은 두 남성 다 일반적인 한국 남성들과는 달리 가족에 대한 의무와 책임, 특히 자녀의 양육에 대해 매우 강한 헌신을 보이는 반면, 아내들이 자녀양육에 대한 책임이나 가사 돌봄에 있어서 자신의 할 일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판단을 가지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아내와의 집안문제로 싸우면 – 조그마한 자극에도 쉽게 서로 폭발하는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 지금의 현안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 데 과거의 것을 들추어 감정적인 이야기를 한다고 대화를 단절하고 있었고, 아내들은 상대방이 너무 권위적이고 논리를 이야기해서 감정적인 상처로 인해 자신의 상태가 상대방 때문이라는 강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A가정과 B가정 부부들은 양쪽이 다 상대방이 “못하고 안 해준” 잘못들에 대한 자기 나름의 상당량의 축적된 데이터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일어나는 사건마다 “역시나 또~”라는 생각과, 서로한테 “비논리적이며 감정적” 혹은 “권위적이며 독단적”이라는 생각들이 주된 패턴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A와 B는 결혼의 기쁨을 잃은 지 오래였고 – 기쁨을 잃은 것은 거의 결혼 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 이제는 가정에 대한 책임과 자녀 양육에 대한 헌신에 대한 의무감만이 주로 존재하고 있었다. A는 이미 고등학교 이상을 졸업한 자녀 둘이 있는 데 그 둘은 아빠에 대한 기억에 있어서 깊은 트라우마가 있어서 A의 헌신이 고마움으로 다가가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아이러니 하다. B의 자녀는 아직 초등학교 두 아들인데 자녀들이 충격을 받을까봐 이혼을 공식적 표명을 하지 않았지만 아이들은 부모들이 심각히 싸우는 장면들을 오래 봐와서 함께 아빠와 엄마가 있는 것이 어렵다는 것은 눈치 채고 있었다.
나는 A와는 지난 서너 개월 동안 1회 4시간 내외 약 6회 정도 만나 이야기를 경청하였다. 주요 자극 상황들에 대한 회상을 통한 자신의 부정적 인식과 반응에 대한 통찰, 인식과 반응 패턴 이해하기, 커뮤니케이션의 기본을 다시 익히기 등에 대한 일련의 과정을 함께 가졌다. 아내의 대화 거부와 먼저 남편의 치유와 변화가 필요하다는 말에 내가 선택한 과정이었다. B는 전화로 1시간씩 사전 인터뷰를 갖고 어제 아침부터 저녁 시간까지 8시간 가까이 뭘 알아줬으면 하는지와 뭘 그 당시 원했었는지에 대해 대화를 진행을 하였다. 당사자들이 원래 사전모임에서는 해결할 것들만 쭉 나열하였었는데, 이혼에 대한 강한 원망과 분노 그리고 상처가 깊어서 먼저 깨진 심장들을 서로 연결하고 파편화되고 상처로 찢어진 기억들의 조각을 맞추는 데 하루 종일 시간이 걸렸다. 쌍방 대화중 아슬아슬한 위기 상황이 반복되어 서너 차례의 타임아웃을 갖고 개별적으로 따로 불러내어 이야기 나누고 다시 쌍방 대화를 계속하면서 결국 6시경에는 향후 어떤 현안들을 해결할 것인지 목록들을 뽑아 다시 대화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목록들도 간단한 해결될 내용들이 아니었다.
본인들이 신음의 긴 터널을 지나 가느다랗게 비친 빛을 쬐는 데로 나오기 까지는 수많은 장애들이 존재한다. A는 20년 B와 그의 아내는 10여년을 서로 상처를 주는 방식으로 별다른 기쁨 없이 살아 왔었다는 그 모진 세월에서 강한 정당성과 옳고그름의 신념의 구름속에 가리어 빛을 보는 일이 거의 차단되어 왔었다. “상대방 때문이야” 라는 객관적인 데이터들의 정보속에서 상대방의 심장을 무겁게 하고 파열시키는 비난들의 비수로 인해 제대로 상대방이 무엇을 느끼는지 모르고 자신의 정당성을 계속 외쳐왔던 패턴들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참으로 진행자로써는 기적이 필요하다는 생각까지 때때로 일어날 정도로 지독하게 힘든 상황이라는 사실을 목도하게 된다. 서로가 희생자라는 신념화에서 상대방에 대한 공격자로 있을 때, 그리고 “역시나 너는~”이라는 실망과 불신의 확인들이 서로에 대한 문을 굳게 닫고 있을 때, 그 두껍게 내리 누르는 의식의 덮개를 어떻게 열 수 있겠는가?
내가 종종 듣는 유사한 패턴들은 다음과 같다. 상대방이 ‘힘든 상황’에서 얼마나 자신을 모른 체 했는지에 대한 실망과 비난 그리고 상대방이 얼마나 ‘힘든 인간’이었는지에 대한 분노와 적대감에 대한 반복된 기술이 그것이다. 그래서 수많은 힘든 상황에 대한 나열의 스토리가, 힘든 인간에 대한 스토리가 계속적으로 전개되고 반복되어진다. 마치 녹음기가 반복 재생되는 것처럼 그렇게 진행된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우리는 그렇게 긴 세월동안 자신의 ‘절망’을 상대방에게 투사하면서 그토록 용케도 오랫동안 버텨오면서 함께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일까?
내가 당사자들과 함께 함께 이야기 퍼즐을 맞추어 나가는 것은 사건들에 대한 사실들을 넘어 그래서 각자 어떤 마음이었고 어떤 의미에 대해 추구하고자 그런 행동, 태도, 말을 했는지에 대한 재-서술이고 이것에 대한 명료화였다. 어떤 빛에 대한 아쉬움에서 그런 그림자나 어둠에 대해 힘들었던 것인지 기억을 불러내 재배치하는 것과 같다. 스토리 속에 들리지 않았던 침묵의 비가시적인 차원인 더 넓은 차원, 곧 ‘사고’로 채워진 공간을 넘어 ‘존재’가 지닌 두려움, 취약성, 좌절, 열망, 의미, 목적이 숨을 쉬고 있는,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공간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어떤 무대라는 공간을 자신의 삶으로 인식하고 있느냐에 따라 각본이 정해지고 자신의 역할이 그대로 진행된다. 의식과 무의식속에서 전쟁터라는 무대로 삶이 설정이 되면 그 사람의 역할은 공격자와 희생자가 된다. 일과 사람은 위험하거나 안전을 보장하거나 그 강도에 따라 다가오고, 그 무대라는 공간에서는 스포트라이트라는 일정한 감정의 분위기 곧 두려움과 결핍이라는 감정의 분위 속에서 생각, 행동, 태도가 결정되며 각자는 그 속에서 자기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게 된다. 공격자, 희생자 그리고 방관자라는 각본들이 얽혀지면서 공격하기(주장하기, 힘과 영향력 행사하기), 회피하기의 반응이나 얼음반응을 보인다.
연기자는 무대에서 펼쳐지는 여러 상황들에 의해 자신의 역할에 몰입하면서 그것이 자신의 정체성이라 생각하고, 삶의 상황이 그러한 규정 하에 조건 지워져 있다는 의식에 의해 자기충족법칙의 결과들을 생산한다. 실재(reality)가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역할에 몰입하다 보면 스스로 창조하며 만들어 내기도 한다. 역할이 편하고 익숙하기 때문에 벗어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감히 일어나지도 못한다. 그리고 다른 역할에 대한 그리움이 간간히 올라오지만 그 생각자체가 비현실적이거나 두려울 수도 있다. 안 해본 것이고 전혀 그려지지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연기가 익숙해지면 연기자와 자기 정체성이 다르다는 생각을 하는 게 점점 어려워진다.
어떻게 우리는 그러한 무대 위의 연기자로 하여금 다른 무대가 있다거나 아니면 그 무대에서 내려와 관찰자로 볼 수 있게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익숙한 전쟁이라는 각본의 삶의 무대가 아니라 다른 무대를 ‘선택’하게 할 수 있는가?
나는 같은 무대 위에서 익숙한 역할자에 대한 ‘저항’, 곧 자신이 만나는 힘든 상황, 힘든 일, 힘든(괴롭히는) 사람에 대해 분석하고 저항한다는 것이 에너지 소모는 많이 들고 결과는 그리 효율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같은 무대 위에서는 그러한 저항이 기존의 음향과 스포트라이트 그리고 각본들에 의해 저항 그 자체를 무력하게 만들고, ‘탈출구없음(No Exit)’이라는 비상구 표시만 보게 만든다.
어떻게 나는 나의 사고, 행위, 그리고 일의 결과가 나의 정체성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연기자가 나의 존재와는 다르다는 사실을 확연히 깨달을 수 있는 것일까? 저항이 아니라 ‘무대(공간)’을 바꾸는 손쉬운 선택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인가? 어떻게 어둠의 끊임없는 펼쳐짐이라는 행위의 결과들로부터 내가 벗어날 수 있는 것인가?
그런 변화의 에너지는 외부의 압력의 제거, 얽힌 관계의 끊음 혹은 삶의 조건들에 대한 변화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 내부에서 곧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것 아닐까?
초목의 씨앗은 내부로부터 발아하여 성장하며 나무가 된다. 강물은 샘으로부터 발원하여 물이 솟아나 번지면서 고이고 흐르며 다른 샘의 물줄기를 만나 개울이 되고 강물이 되어 바다로 흘러간다. 동물들의 새끼는 어미의 자궁속에서 배아되고 잉태되어 세상으로 나와 활동을 한다. 그렇게 안(the within)에서 생명력을 갖고 품어져 나와 밖(the without)으로 펼쳐져 나간다. 그렇게 세상만물은 안으로부터 흘러나와 밖으로 펼쳐지면서 활력과 풍요로움을 가져온다.
파열된 심장으로 겨우 숨을 쉬는 이 세상에서, 비난과 절망을 서로에게 던지고 주고받는 이 ‘당혹스러운’ 세상 삶에서, 나에게 한 가지 중요한 의식의 초점을 두게 만드는 화두는 이니아스 닌의 글에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그 날이 왔다.
무릅쓰고 꽃을 피워내는 것보다
봉오리를 단단히 닫아두고 있는 것이
훨씬 고통스러운 날이
내가 힘들어하고 저항하고 뒤쫓아 오지 못하게 달음질치게 만드는 결핍과 두려움의 추적보다, 내가 어둠의 터널 속에서 비난과 절망을 소리쳐 메아리로 양산해 서로의 비난과 절망의 소음들을 키워내기 보다, 내가 진실로 의식을 집중해 듣고자 하는 것은 내 안에 ‘무릅쓰고 꽃을 피워내는’ 그 무언가의 에너지와 움직임이 존재한다는 인식이다.
꽃을 피워내는 가능성의 실현에 대한 그리움과 열망이 더 커서 ‘봉오리를 단단히 닫아두고 있는 것이 훨씬 고통스러운’ 순간이 날 고통스럽게 만들 때 꽃을 피워내는 열림이 현실화되게 된다. ‘봉오리를 단단히 닫아두고 있는 것이 훨씬 고통스러운 날’이 될 때 씨앗은 주변의 내리누름을 뚫고 발아한다. 병아리는 알의 껍질을 깨고 세상으로 걸어나온다. 안에서 그대로 머무는 것이 더 고통스러울 때 샘은 터져서 물줄기를 밖으로 솟아낸다. <전환의 순간>이 오는 것이다.
그 전환의 순간은 두 가지가 충족될 때 “그 날(때의 충만함, 카이로스의 순간”이 오게 된다. 하나는 자신의 꽃으로써의 가능성에 대한 신념이다. 자신의 영혼이 비난과 절망과는 다른 웃음과 기쁨의 꽃이라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이다. 둘째는 외부로부터 오는 빛의 내리쬠에 대한 자기 개방이다. 빛 혹은 선물로 주어진 은총이 나를 무상으로, 그 조건 없이, 삶의 그 어떤 결과와 상관없이 충분히 주어져 있다는 신뢰이다.
영혼의 내적인 자각 –나는 꽃이다-과 빛이 비추고 있다는 신뢰는 다른 현실의 가능성을 우리에게 연다. 그리고 이것은 거의 파열되어 간신히 숨을 쉬고 있는 심장에게 놀랍게도 치유를 가져다 준다. 그대의 심장이 해야 할 일은 외부 조건과 삶의 상황에 –힘든 상황, 힘든 일, 힘든 인간에- 저항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것이 이토록 단순하기에 믿기가 도저히 어려운 사람들도 있다. 자신의 힘든 삶의 과정이 그토록 간단한 이해로 풀린다고 생각하기엔 아이러니하게도 그동안의 고통의 비용이 너무 아까운 것이다.
그대 내부에서 무릅쓰고 꽃을 피워내고자 하는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주의집중이 더 필요한 것이다. 주변이 어둠이라고 저항하기 보다는 내면에서 꽃을 피워내려는 “무릅쓰고” 강렬한 열망이 전쟁터가 아닌 정원의 공간으로 그대를 옮겨 놓게 된다. 꽃을 피워내려는 의욕이 강하게 일어날 때, 비로소 빛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어둠에 대한 수많은 이유있는 타당한 진술보다 한 가지로 전념하여 온전히 내 안에 꽃을 의식한다. ‘무릅쓰고 꽃을 피워내려는’ 그 뭔가의 내부의 충동과 간절함이 솟구칠 때, 상대방은 당신에게 주먹을 휘두르려 하기 보다는 당신에게서 뭔가 향기를 맡으려 다가온다.
부부간의 고통은 상대방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저항할 수 있는 혹은 강하게 센 비난의 펀치를 날릴 수 있는 정당성의 무기의 부족에 의한 것도 아니다. 파트너인 상대방의 비난은 나의 잘못과 실수에 대한 깨닫지 못함에 근본적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상대방이 비난과 위협의 손짓을 나에게 날릴 때, 그대가 두려워해야 할 근본적인 것은 하나이다. 나안에 ‘꽃을 피워내려는 간절한 열망’의 없음이 문제이다. 연인이나 삶의 파트너가 그대에게 분노하는 것은 나안에 있는 꽃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가 있다.
그러므로 결혼생활에서 힘든 상황과 힘든 상대방에 대해 계속 비난과 절망을 쏟아내고 있다면 우선 그대 자신에게 한번 물어보라. 상대방이 그대에게 다가올 수 있는 꽃을 그대 가슴에 피워내고 있는지를. 꽃을 피워낼 때 무대의 공간은 전쟁터에서 정원으로 바뀐다. 저항과 주장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꽃을 피워내는 가슴이 필요하다. 내가 알기로는 미친 인간이나 환상에 중독된 자 아니고서는 꽃밭을 보고서 주먹을 휘두르는 인간은 없다. 그대는 아는가? 감옥에 있는 흉악한 범죄자라 할지라도 담장에 핀 꽃에 깊이 황홀해 한다는 것을...
부부생활에서 힘든 것은 정말 상대방 문제가 아니다. 내가 스스로 꽃을 피워내려는 의식이 없다는 사실이 가장 큰 장애이다. 그대가 꽃인데 어떻게 상대방의 잘못이 보이겠는가? 상대방은 어떻게 그대의 잘못을 향해 비난이나 폭력을 휘두르겠는가? 꽃은 서로의 상처와 연약함을 불러낸다. 그리고 그것을 감싸게 만든다. 우리 모두가 잘못과 실수 그리고 연약한 본성에 의해 키워져 성장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꽃은 우리로 하여금 논리의 강함이 아니라 영혼의 연약함에 대한 민감성으로 우리를 부른다. 그리고 그러한 연약함속에서 아름다움이 솟아난다. 꽃은 자발적인 용서를 일으킨다. 서로의 연약함을 보호하려는 용서가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일어난다. 그래서 서로의 상처 난 가슴이 치유 된다.
(2017. 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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