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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의 논리(LS, 1969)에서 벩송의 지위.
- 서평자인 뒤몽셀은 벩송과 들뢰즈 관계를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 들뢰즈는 플라톤주의 전복이라고 시작하는데, 플라톤주의는 무엇을 지시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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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담2022QLF철납50플라톤BB}.
- 참조(도표3): 플라톤 폴리테이아, 불가(佛家) 염처경(念處經), 주역(周易) 4상과 8괘, 유가(儒家) 대학(大學): 이는 이분법적 분할의 예들이다.
이데아들 | Ideas | 법(法) | 태양 (太陽) | 건(乾) | 정심 (正心) | 평천하(平天下) : 조화와 정의 |
태(兌) | 치국(治國) : 교환과 소통 | |||||
수학적 대상들 | Objets mathe. | 심(心) | 소양 (少陽) | 이(離) | 성의 (誠意) | 제가(濟家) 아낌(경제) |
진(震) | 수신(修身) : 학습과 수련 | |||||
사물들 | Etres vivants | 수(受) | 소음 (少陰) | 손(巽) | 치지 (致知) | 정심(正心) |
감(坎) | 성의(誠意) | |||||
그림자들 | Images Ombre | 신(身) | 태음 (太陰) | 간(艮) | 격물 (格物) | 치지(致知) |
곤(坤) | 격물(格物) |
(55PLA)
사유의 시작에서 정리된 방식으로 도래에까지는 분류가 유사하다. 1에서 2, 2에서 4, 4에서 8로 이어지는 이분법적 방식도 있고[유가], 다른 한편으로 1에서 2, 그리고 3에서 자연의 다양한 기호에 대한 이해의 방식으로 가는 길이 있을 것이다[도가]. 그러면 철학사는 왜 전자의 길이 우선했는가? 자연 내부의 직관에 대한 이해와 설명에 어려움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고대인에게서 사유의 전개의 바탕은 5감관(상식) 중에서 눈의 관점이 중요하게 제시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2분법적 분류를 생각하는 과정은 위의 도표로 보여줄 수 있는 것과 같이 단순한 것은 아니다. 철학사의 2500여년의 서양 철학사의 과정에서 중요철학자들이, 자연에서 기호들(징후든, 증상이든)의 등장에서 보면, 수학과 물리학적 관점을 중요시한 고대철학과 르네상스의 차이든지, 생물학과 심리학의 등장으로 기호들의 실재성을 실증적으로 파악하려는 노력에서 비슷하게 보이지만, 차히를 통해 서로 다른 길을 모색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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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선분의 비유에서 그림자에서 사물로 인식을 견해(독사, doxa)라고 하고, 수학적 도형에서 이데아로 길을 지식(에피스테메, episteme)라고 한다. 우리는 한편 예전에서부터, 이런 이분적 구별이 아니라, 감각적 다양성(그림자), 사물의 일반화(사물들), 도형들의 일반화(수학적 형태), 도형의 추상화(이데아)로 연결되는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고 했다. 즉 탈레스는 피라밑의 그림자와 자신의 그림자의 길이를 통해, 피라밑의 높이 잴 수 있었다. 이런 삼각도법의 비례를 종이 위에 그려서 일반화하고, 마치 퓌타고라스처럼 직각 삼각형의 법칙을 발견할 수 있듯이, 이데아를 설정할 수 있다고 하였다.
벩송은 이런 분할에서 독사를 상식으로, 인식(지식)을 양식으로, 그리고 내재성의 인식을 보태어 일관성 있는 과정을 고등양식으로, 설명하려 했다. 들뢰즈는 독사 속의 그림자 속에서 생성과 다양체를 보았고, 그리고 생성의 일반화에서 시뮬라크르들이 생성된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플라톤주의자들은 독사를 지식으로 여기지 않고, 에피스테메를 지식으로 다루면서 위에서 아래로, 즉 상층의 이데아라는 수학적 원리들로부터 표면의 도형의 법칙들로 연역하였고, 이런 법칙들에 맞는 도형들을 시뮬라크르들이라고 여기는 이들이라 한다.
플라톤주의자들에게서 플라톤의 선분의 비유에 대한 해석은 수학(기하학)과 논리에 맞게 한 것으로 본다면,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언어와 논리의 등장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런데 들뢰즈처럼 표면에서 두 가지 시뮬라크르들의 생성과 구성으로 보면 전혀 다른 도식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도식: 가.
선의 이데아 ... 형상, 정신, 관념, 절대자 [자본, 제국]
이데아들
↙ ↘
(도형들)
[표면] 시뮬라크르 D (multiplicité, 다양체) 시뮬라크르 F
(생성자)
↖ ↗
(방황하는 원인) ... .. .. . . <Planomene Aita
아페이론 ... 질료, 자연, 생명, 영혼..
상층의 이데아에서 보면, 시물라크르 F는 원리와 법칙에 맞는 사물들인데 비해, 시뮬라크르 D는 달의 원이든 둥근 사과의 원이든 수학적 도형에 정확하게 맞는 것은 아니다. 플라톤은 시뮬라크르 F를 소크라테스에게, 시뮬라크르 D들 소피스트들에게 비유하여, 원본(이데아)에 맞지 않는 소피시트(D)들을 추방해야 한다고 했다. / 들뢰즈는 이미 비유클리드 기하학과 구조주의 언어학에서 이데아가 실재성이 없다고 하였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현실에서 구체적 생성은 생성자(D)이며, 형상(시뮬라크르 I)은 기호들 또는 상징들일 뿐이라 한다. 들뢰즈가 전복이라고 하는 것은, 퀴니코그와 스토아학파에서 수사학과 변증론에서 제기되었던 것인데, 현대적 의미로 풀어서 설명한 것이다. 플라톤주의자들 2500년 동안 세 패거리들이 결탁하여, 생성론을 완전에서보아 부족하다고, 부정하고, 무시하고, 악(허무)으로 규정하고, 마남사냥하고, 피지배자, 피식민자, 공집합으로 여겼다. 그런데 이들이 자기들이 오류 범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은 패거리 중에서 언어 논리학자들에서 특히 러셀이, 그리고 문학에서 루이스 캐럴이 자신들의 완전하고 진리인 전칭명제가 파라독스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플라톤주의 전복을 이해하기 위해 기나긴 철학사의 고비 고비를 이야기로 엮은 것이 LD(의미의 논리)이다. 이 의미(sens)는 현대에서는 비존재에서 생성의 지위를 갖는 토대(공집합)와 같은 것으로 여기지만, 프랑스의 일상 언어로서 상스는 감관들(안이비설신)이다. 철학이 감각작용들(안이비설신)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은 싯달다의 불교도, 공자이래로 유학도 마찬가지이다. 고대는 감관들의 종합으로서 인식이 있다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는데, 이는 철기문화의 초기에서 거푸집에서 온 것이라고들 한다. 오관을 통괄하는 의식, 즉 종합의식, 즉 일반화(일반개념의 형성)가 학문(철학)의 시작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 여기서 한번 도약하여, 감관들을 넘어서는 생각(사유)의 방향을 하나의 방향으로 잡고, 다른 하나의 방향으로 물체(시물라크르 D)의 방향을 잡아서, 이를 이원성이라고 말한 이는 데카르트이다. 정신에서 사유의 방향과 물질에서 물체의 너비: 여기서 방향(sens)이라 단어도 상스(sens)이다. 이 상스는 물질을 다루는 방향과 다르기에, 정신의 방향으로 봉상스(bon sens)라 한다(사실은 데카르트가 물질을 다루는 방향도 물체를 다루는 방식과 같은 방향으로 잡은 것도 봉상스이다. 그러나 물체와 달리 물질에서 영혼의 생성은 다른 방향일지모른다.). -
데카르트에게서 정신의 봉상스는 무한에까지 이를 수 있다고 여겼는데 그 무한은 그 생각의 한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봉상스란 한 방향이다. 그러면 다른 방향은 물체들의 너비와 움직임이다. 이를 설명하는 말상스(mal sens)라는 말은 없지만, 봉상스와 대립되는 말상스는 기계와 같은 것으로 취급했다. 봉상스의 길을 간 것이 데카르트와 스피노자, 그리고 칸트와 헤겔, 다음으로 후설이었다. 이들은 수학과 물리학의 정당성을 철학이 확보하고 있다고 굳게 믿었다. 자연으로서 물질은 봉상스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말상스로 가는가?
현대에 와서도 상스들(감관들, 5관)의 학문을 독사라는 것을 인정한다. 왜냐하면, 특히 생명과 기억을 일반화하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독사의 생산은 개연성으로 매우 다양하게 제기되고 전개되고 표출된다. 인간들 81억명의 일반화로서 인간이란 용어 설정은 쉽지만, 그 인간이란 말 속에는 각 사람의 고유성이 빠져(추상되어) 있다. 각 인간의 독사는 각 인간이 살아가는 과정이다. 그런데 백인의 삶, 황인의 삶, 흑인의 삶에서 누구의 삶이 봉상스이고 누구의 삶이 말상스일까? 왜 백색이데올로기는 있을까? 들뢰즈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인간의 삶에서 봉상스는 기호, 상징, 우화, 환영의 이야기라는 것이고, 각 사람들의 삶은 상스에서 나온 다양한 시뮬라크르들이라는 것이다. 이들 각각의 삶이 ‘인간’ 일반의 삶과 다르다고 하여, 각자의 삶을 상스에 기반한 독사라고 한다면, 그러면 인식으로 산다는 인간의 삶의 이야기들은 모두 현실적 삶에 비해 파라독사에 속한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 들뢰즈이다. 전칭명제의 인간을 제외하고, 현실과 구체성을 지닌 사물들과 개인들의 다양한 이야기가 파라독사가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물론 들뢰즈는 이것을 나중에 “사건”이라고 말할 것이다.
봉상스의 길은 에피스테메이고, 그러면 말상스의 길은 독사인가? 비유클리크 기하학과 유전학이래로 말상스의 삶이 또는 개연성을 지닌 현실적 삶이 인간의 구체적 삶이다. 그리고 봉상스는 말상스의 여러 길들 중에 하나로서, 또는 여러 길들의 추상으로서, 구체성이 없다는 것은 소쉬르가 더 잘 표현했다. 플라톤주의자들은 말상스의 일반화를 독사(견해, 신념)라고 했는데 비해, 들뢰즈에서는 언어와 논리상으로 봉상스는 독사의 파라독사들이라는 것이다. 이로서 인식(에피스테메)이 파라독사가 되는 인식의 전복이 성립한다. 이런 문제의 제기는 퀴니코스와 초기스토아학파에서 제기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런 문제가 언어에서 문제보다 심각한 것은 영혼과 정신에 관한 것에서 영혼에 관한 것이다. 영혼(anima)이 정신(animus)가 아니라는 크리스트교의 독단에서부터 시작한다면 말이다.
영혼은 물체 또는 생명체에 속한다고 여기고, 정신은 신의 영역에서부터 나와 인간에게 침투하거나(성체의 육신화), 신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고 주장들 해왔다. 이들은 사회 도덕적으로 왕권신수설, 종교적으로 무오류성을 주장한다. 두 패거리가 르네상스 이전에 마남사냥의 주동자들이었다. 이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깨부술 수 없었던 것은 생물학의 발달이전이었다. 천동설을 깨는데 얼마나 어려웠는데, 영혼의 하늘거주설을 깨는 것은 더욱 어려웠던 시절이 르네상스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생명은 언제 어디에서 시작하였는가? 인간은 상스와 봉상스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이(선천성이든 초월성이든) 천동설이상으로 당연하다고 여기는 자들에게 어떠한 설득도 이해도 시킬 수 없다. 태어나니 이렇게 상식과 양식을 가지고 나왔잖아. 그럼 인간이 개돼지같이미천한 것에서 나왔다 말인가? 하고 대어들 때, 무슨 말을 하겠는가? 스펜서와 다윈도, 프로이트와 라깡도 이런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벩송과 들뢰즈의 생각이다. 왜?
지금도 천동설을 상식으로 믿는 자들에게 지동설을 설명으로 설득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생명이 상스와 봉상스를 갖추는데 얼마나 오랜 세월이 걸렸는지를 설득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벩송이 유전학을, 들뢰즈가 지층학을 괜히 끌어들인 것이 아니지만, 이런 학문들로 상스, 봉상스(양식), 고등상스(고양식)의 과정을 설득시키는 것은 너무나 어렵다. 그 중에서도 점진적 노력의 과거들이 어떻게 현재에 보존되고 영향을 미치는가? 지층도 쉽게 설명되지 않았지만, 불완전한 불연속의 과정을 보여주는 자료(프라그마타)로서 점차 설득력을 갖는다고 해도, 생명의 기억에서는 엄청난 긴 과정을 연속성을 설명하지 못하기에 영혼의 외부설이 영혼의 생성설을 여전히 초월하고 있다. 예수를 믿는(독사, doxa) 것이 아니라 크리스토스를 믿는(foi, 신앙)하는 자들의 무오류와 파라노이아의 역사는 완고한데, 불교에서는 이 후자들의 신앙을 극약들(탐만치)라고 한다. 지구의 축적 또는 자연(우주)의 축적된 엄청난 자료들을 비교하고 분류하는 일이 중요하다. 생명의 과정은, 생물학자들이 말하기를 천만분의 1 (불교식으로 무량대수분의 1)의 연기(지속)도 알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한 생명의 기억의 기억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몸속에 식물세포가 있다는 것을 안지 40여년밖에 안 된다) 기억을 설명하기 위해 각 생명종들의 DNA를 연구하는 것은 아직 700년 밖에 안 된다. 긴 과정을 떻게 과정을 설명할까? 방법이 없다. 자연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탐진치에서 치(미친 광기, 독을 먹은 광기)에서, 진리를 안다고 치졸하게 주장하는 광기(파라노이아)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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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은 새로운 사실들과 사건들에 맞게 설명하는 방식에서 어려움이 많다. 이 어려움을 문제삼아 패거리들은 민중을 족쇄에 가두었다. 왜 세 패거리들이 자신들의 모습을 바꾸어가면서 승리하고, 이제는 AI를 동원해서 정신에서 영혼을 설명하는 쪽이 맞다고 주장하고, 온갖 에너지와 자연을 쏟아 부으면서 광기를 쏟고 있는데, 이는 문제해결이 아니라 지배와 잉여착취에만 열을 올리기 때문이다.
문제의 해결은 지구상의 지층에서 사라져간 종들의 DNA연구 등처럼, 생명과 인류의 장래의 난제를 해소하는 좋은 방법일 것이다. 그런데 왜 AI로 가고 DNA와 무기염과 유기염의 원초적 과정에 연구는 지체되고 있을까? 전자는 사적 이익과 잉여착취라는 무기/도구의 지배방식이 있고, 후자에서는 생명체로서 지구상에 상부상조로 함께 살아가야한다는 생의 환희가 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전자에 끌리는가? 첫째 교육에서 그리고 학문발달사에 패거리들의 이익창출에 몰두했기 때문이다. 이들이 사악한 자임에도 패거리의 교육상 이들의 선의 이데아에서 온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들뢰즈가 이를 전복(혁명)하려는 것이다.
전복의 첫째 방식은 독사를 정상적인 일반화로 바꾸고, 지금까지 패거리들의 지식 또는 인식이라는 것이 모두 독사에서 파생한 파라독사라 하는 것이다. 권력, 권세, 권위의 집단이 그럴 리가 없다고, ‘그럴 리가’라고 라면서, 아니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래서 들뢰즈가 이 책을 쓰면서 소설이라고 했을 것이다. 논리적, 실증적이 아닌 것처럼 가장한 것이리라. 벩송은 첫 작품(DI, 1889)에서 단위 설정이 부조리라고 하였듯이, 물체든, 영혼이든, 사실이든, 상태이든, (들뢰즈 표현으로 사건이든) 단위(통일성)를 먼저 설정하여 설명하는 철학사의 고비 고비마다 제시하면서 이런 설명들과 학설들이 부조리에 빠진다고 했다.
들뢰즈의 이 작품은 자기의 주장을 말한 것이 아니라, 당신들의 상스와 봉상스를 따라가면 부조리에 빠진다는 것을 제시하는 것이다. 러셀은 자기의 진리의 이야기가 스스로 파라독사에 빠지는 것을 알아챘음에도, 처음에는 벩송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중에는 수긍하였다고 한다. 들뢰즈는 이 철학적 작품(그는 정신분석학적이라고 했지만)에서 철학사에 항목(용어), 단어, 문장(명제), 판단(심판)들이 얼마나 파라독스를 감추고 자기 진리인 것처럼 유지해 왔는지를 소설처럼 이야기한다. 이 부조리의 철학사를 전복해야 한다.
상스(의미)란 독사 그리고 그 토대에서 무의미(농상스, 넌센스, 플라노메네 아이티아)라고 하는 것에서 생성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상스에서 봉상스로 그리고 선, 미, 성으로 향하는 플라톤주의의 전복을, 다시 말하면 이들의 허구, 부조리, 파라독스, 환영(환타지) 들을 지적한다. 들뢰즈는 철학사에서 또는 학문발달사에서 이런 허구와 부조리를 넘어서는 작업을 “벩송이 잘 알았다”는 것을 깊숙이 감추고 있다. 벩송과 들뢰즈는 처음에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다음으로 미루면서, 즉 벩송은 MM과 EC로, 들뢰즈는 AO와 MP로 미루면서 썼듯이, 들뢰즈는 파라독사를 통하여(물론 아이러니와 시뮬라크르들을 동원하여), 플라톤주의 철학사의 전복을 서술했다.
들뢰즈는 새로운 시대, 규소의 시대의 혁명을 고민했다. 들뢰즈의 이 작품을 가장 잘 읽었던 이는 아마도 가타리일 것이다. 이 둘은 심층으로부터 생성의 길을, AO와 MP 등을 통해 풀어갈 것이다. 그리고 이 작품에 대한 평으로서 그래도 푸꼬가 행한 서평이 가장 잘 된 것이리라. 그는 이 책에서 저자가 아이러니, 풍자, 유머들로서는 인식의 문제 해결이 안 된다는 것을 서술하면서, 이 책이 서론이 될 것이고, 다음 작품을 기대해도 좋다고 했다. 푸꼬는 이 작품이 사르트의 존재와 무와 마찬가지로 자기주장을 먼저 하는 것이 아니라, 봐라 당신들의 논의 과정을 따라가면 부조리 또는 허구의 길에 빠지 않느냐고 하는 것이다. 기존의 담론들의 부정을 통해서, 새로운 길을 내비치는 것이다. 단위든, 단어든, 문장이든 판단이든, 의미(방향)는 여럿이다. 심층의 다양체에서 솟아나는 무수히 많은 생성들을 다루어야 할 것이라는 예고편인 셈이다.
당신들이 진리라고 다룬 것은 여러 파라독사들 중의 하나이고, 그리고 당신들을 비판하듯이 다른 파라독사를 끌어내는 당신들을 비판하는 이들이 뻬르베르(도착자)들이며, 당신들과 전혀 다른 시뮬라크르들을 생산하는 이들이 스키조들이다. 지식의 권위를 누렸던 당신들은 황제제(권력)와 유일신앙(권세)에 익숙한 파라노이아 패거리들이라는 것을 예고한다. 즉 AO(앙띠외디푸스)에서 벩송의 선전제 미해결의 오류들을 불러들여, 파라노이아의 선전제(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를 비판할 것이다. 들뢰즈는 벩송의 “꼴레쥬드 프랑스 강의록”을 읽지 못했다. 그런데 벩송은 DI에서 단위 설정에 대한 비판이, “강의록”에서 설명하기를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의 운동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들뢰즈는 벩송을 암묵적으로 수용하여 LS에서 파라노이아의 선전제를 비판하는 것이다.
나로서는 들뢰즈가 의미의 논리(LS)에서 벩송을 한번 밖에 언급하지 않아서, 들뢰즈가 벩송을 얼마나 잘 풀어서 엮어가는지를 설명하기에 걱정이 있었다. 그러나 이 LS를 깊이 들여다보면, 들뢰즈가 벩송의 MM을 왜 강조했는지를 다시 깨닫게 한다. 뒤몽셸은 라깡의 “도둑 맞은 편지”의 예를 제시하면서, 벩송을 끌어들였다. 나로서는 그가 지적한 내용의 원문을 찾는데 치중했으나 찾을 없어, 고민이었다. 이 내용을 끌어들인 뒤몽셀이 “있는 그대로 철학: 부록, 벩송과 러셀 사이에 경전외적 대화(La philosophie telle quelle: Suivie de Conversation apocryphe entre Bergson et Russell, 2005”)라는 벩송과 러셀에 관한 글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가 괜히 라깡과 벩송을 엮은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였다. 라깡과 벩송의 차히가 들뢰즈를 통해서 드러난다면, 무엇에서 드러날까? 그것을 알게 한 것은 AO의 2장에서 정신분석학의 다섯 가지 오류의 전개에서였다. 다시 의미의 논리(LS)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5:13, 57RLC) (6:15, 57RLF)
평들1925LS1969뒤몽셀V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