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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가는 길>
지루하고 짜증나는 일상에서 벗어나 훌훌 떨치고 어디론가 가고 싶다고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나도 늘 떠나야지 하면서도 이런저런 이유로 뭉그적거리다 결국 떠나지 못한다. 그러나 더 늙고 병들면 가고 싶어도 가지 못 할 테니 만사 제치고 세상구경을 나서기로 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 이렇게 훌쩍 떠날 수 있으니 말이다. 여기저기 세상을 두루 구경하며 한 세상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연변에는 북한을 탈출한 사람들이 많단다. 그들을 만나면 궁금한 북한의 사정을 소상히 들을 수 있겠지. 기왕에 연변에 갈 바엔 인천에서 배를 타고 가보자. 중국을 왕래하는 보따리장수들의 억척스러운 삶을 보는 것도 재미있을게다. 인천에서 배를 타고 단동으로, 다시 기차로 심양을 거쳐 연길로 가자. 가능하면 조선족 집에서 민박을 하자. 그러면 그들의 생활도 자세히 볼 수 있겠지. 인천-단동 왕복 배표를 사고 6월 18일 출발하기로 했다. 재미가 좋으면 더 오래 머물자고 돌아오는 배편은 정하지 않았다. 외환은행에서 한화 100만원을 중국 돈 인민폐로 환전하고(환율 135.5 : 1) 비자도 받았다. 자, 이제 완전한 자유인이 되는 거다.
인천에서 단동으로 가는 배는 오후 5시에 떠나서 다음 날 10시 30분에 단동에 도착한다. 중국은 한 시간의 시차가 있으니까 18시간 반, 그럭저럭 하루 온 종일 걸려서 중국 땅을 밟는다. 지하철, 버스를 번갈아 갈아타고 오후 3시에 인천의 국제여객선 터미널에 도착했다. 과연 부두에는 보따리장수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활기가 넘치다 못해 아귀다툼을 하는 것 같다. 그들의 시끌벅적한 분위기에 섞여서 출국수속을 마쳤다. 아! 가슴이 뛴다. 항상 떠날 때는 무언가 새로운 것에 대한 막연한 기대가 있게 마련이다. 우리가 타고 가는 배는 동방명주(東方明珠:Oriental pearl). 승무원들도 친절하고 객실도 깨끗하다. 지난번 금강산 갈 때 탔던 봉래호 보다 오히려 편안하다. 6천 원짜리 뷔페식 저녁 식사도 먹을 만 하다. 그런데 곤란한 일이 생겼다. 출발부터 뱃속이 시원치 않더니 점점 심해진다. 계속 이렇게 배앓이를 하면 모처럼의 여행에 술도 한잔 못 할 테니 걱정이다.
아침 식사는 3천 원짜리 토스트로 했다. 아침 9시, 뱃전에 나가니 단동 항이 보인다. 사실은 단동 항이 아니고 동항(東港)이다. 동항은 단동에서 약 40킬로 떨어진 새로 개발된 항구다. 그래서 그런지 매우 깨끗하게 정리된 느낌이다. 그 남쪽 대안은 북한의 신의주다. 아! 저기가 우리의 갈 수 없는 땅, 북한이구나. 바로 지척인데…. 한 떼의 노인들이 서로 그렇다느니 아니라느니 우기는 모습이 보인다.
“어르신들. 관광 가십니까?”
“아니. 우리는 심양에 가.” 마치 관광이나 하는 할 일없는 늙은이로 보지 말라는 투다.
“무슨 행사가 있습니까?”
“어. 우리는 심양노인회 초청으로 친선방문이야.” 노인들은 남녀 각각 네 명이어서 부부동반인줄 알았더니 노인회의 간부들이란다. 심양의 조선족 노인회와 자매결연을 하였다며 놀랍게도 강원도 홍천에서 왔단다. 홍천이라면 내가 중고등학교를 다닌 제 2의 고향이 아닌가?
“제가 바로 홍천농고 출신입니다.” 노인들도 놀라고 나도 놀라고 한참을 홍천농고에 누구와 동기인지, 홍천의 유지 아무개를 아는지, 홍천의 어디에 살았는지를 확인했다. ‘대한노인회 홍천군지회 지회장 서정목(0336-433-8234)’이라는 명함을 준다. 83살의 나이에도 무척 건강해 보이고 의욕이 대단한 노인들이다. 한 노인은 당꼬쯔봉에 도리우찌를 쓴 멋쟁이로 옛날에는 만주 벌판이 좁다고 돌아다닌 활량이라며 중국어도 유창하다. 잘 되었다 싶어 노인들을 따라 심양까지 가기로 마음먹었다. 심양의 조선족 노인회에서 항구에 마중 나온다니 길을 물어 찾아 갈 필요도 없고 잘하면 노인들 덕에 저녁도 얻어먹고 잠자리도 얻을 수 있겠다.
입국 수속 중 서울에서 받은 아내의 비자에 문제가 생겼다. 중국 영사관의 도장 하나가 찍히지 않았다. 중국영사관의 잘못인데도 꼼짝없이 20달러를 내고 다시 비자를 받았다. 놈들에게 당했구나. 입국수속을 끝내고 나가려는데 보따리장수 아주머니가 여권을 빌려달란다. 일인당 통관 가능한 보따리가 3개로 제한되어 있어서 일반 입국자의 여권이 필요하단다. 모두들 의심하지 않고 빌려준다. 마약 같은 수입제한품목이 있을까 봐 빌려주지 않는 게 원칙이지만 주위의 사람들이 다 빌려주는데 나라고 안 빌려 줄 재간이 있나? 여권을 빌려 간 아주머니가 중국 돈 백 원을 쥐어준다. ‘이렇게 고생하며 돈을 버는 사람한테서 사례를 받다니 안되지.’ 하고 사양했더니 다 그렇게 한다며 받아야 한단다. 홍천의 노인들도 배 안에서 커피를 빼주고 친절을 보이던 보따리장수 아주머니에게 여권을 빌려주고 사례를 받는 눈치다. 아무튼 백원이나 벌었으니 일단은 출발이 좋은 셈인가? 부두에 내리니 심양 조선족 노인회에서 황중철 노인 내외가 마중 나와 있다. ‘심양 조선족 노년협회 상무부회장’이다. 택시를 타고 동항을 빠져나왔다. 단동의 압록강 변에는 갓 결혼한 여러 쌍의 신랑신부들이 친구들과 떼를 지어 다니며 기념사진도 찍고 뱃놀이도 즐긴다. 아! 마침 오늘이 토요일이구나. 유람선이 신의주 쪽으로 다가간다. 북한의 풍경은 평화스러운 중국과 너무 대조적이다. 강가에 쪼그리고 앉아 우두커니 중국 쪽을 바라보는 북한주민들의 모습이 한 여름에도 몹시 을씨년스러워 보인다. 도대체 누가 저들을 저렇게 만들었나? 강 하나 사이에 어쩌면 인간의 삶이 이렇게 다를 수 있단 말인가? 울컥 심사가 뒤틀린다.
심양까지는 기차로 4시간이 걸렸다. 홍천의 노인들은 우리내외가 신경 쓰이는가 보다. 자기들도 심양의 조선족 노인회의 신세를 지는 꼴이라느니, 자기들과 같이 가면 우리가 불편할 것이라며 헤어지기를 바라는 눈치다. 우리도 노인들에게 신경 쓰기가 싫어서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요? 불편하더라도 하루 밤 함께 지내고 떠나시오.’ 심양의 황 노인은 아주 강경하다. 홍천의 노인들과는 정반대다. 홍천의 노인들도 마지못해 그렇게 하란다. 께름칙했지만 결국 그러기로 했다. 그래서 심양 제2 초대소에서 자고 아침까지 먹고 노인들과 헤어졌다. 황 노인은 오늘 노인 운동회가 열린다며 구경하고 천천히 가면 안 되느냐고 서운해 한다. 중국의 초대소는 정부에서 운영하기 때문에 아주 싸다. 재워주고 아침까지 먹여주고 두 사람이 겨우 60원이다. 그래서 외국인은 이용할 수 없는 곳이다. 그러나 돈맛을 들인 중국 사람들은 외국인도 적당히 받아주고 돈을 번다. 그런데 홍천의 노인들은 왜 우리를 달가워하지 않는 걸까?
심양에서 연길까지는 기차로 14시간이 걸린다. 장거리 여행이니 만큼 침대차가 있다. 소문으로 듣기는 너무 너무 지저분해서 잠을 자기도 힘들단다. ‘그래. 얼마나 지저분한지 한 번 겪어보자. 그것도 여행의 묘미겠지.’ 아침 일찍 역으로 갔다. 심양 북(北)역에서 연길로 가는 기차는 오후 5시 17분에나 떠나는 Y-253편뿐이다. 그래서 9시간 동안 심양 구경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우선 개찰구나 알아두자고 두리번거리다가 우리와 같이 연길로 간다는 30대 초반의 조선족 부부를 만났다. 그런데 그들은 역구내에서 9시간을 기다린단다. 아니, 도대체 그렇게 긴 시간을 어떻게 역 구내에서 기다린단 말인가? 더구나 침대차도 아닌 제일 싼 일반석에 꼼짝없이 끼어 앉아 14시간을 가야하다니…. 그래도 그들은 젊어서 다행이다.
우선 책방에서 심양 시내 지도를 샀다. 중국에서는 관광지도도 돈 주고 사야한다. 역 앞 Gloria International Hotel에 서 커피를 마시며 계획을 세운다. 어디를 갈까? 우리 쪽을 유심히 지켜보던 멋쟁이 처녀가 다가와 ‘한국에서 오셨어요?’하고 묻는다. 이 호텔에 근무하는 조선족 처녀다. 객실담당 대리라며 당당한 태도가 정말 대견하다. 그녀의 권유에 따라 북능공원, 태원로, 중산공원, 심양고궁을 차례로 돌아보았다. 심양의 중심부 태원로는 가로 정리를 하느라고 온통 파 헤쳐 놓았다.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중국의 모습을 보는 느낌이다. 어디나 길을 넓히고 건물을 신축하고 있다. 동항(東港)도 엄청난 규모로 넓히고 있지 않던가? 옛날과는 정말 딴판이다.
4시 30분, 연길 행 대합실 여기저기서 한국말이 들린다. 한국으로 착각할 정도다. 우리 내외가 평범하게 보이지 않았는지 여러 사람이 말을 걸어왔다. 연길을 오가며 장사를 한다는 김영태씨(016-215-7860)와 친구 따라 연길에 놀러왔다는 정수종씨(02-933-13250)를 만났다. 정수종씨는 서울의 백 병원 옆에서 일식집을 한단다. 한 쪽에서 뭐라고 방송을 한다. 무슨 소리냐고 물으니 5원 더 내고 남보다 먼저 가차에 타라는 안내방송이란다. 자리가 이미 다 정해져 있는데 그럴 필요가 있나? 아무튼 중국은 돈 되는 일이라면 체면이고 뭐고 가리지 않는다. 그야말로 눈이 벌겋다. 늦게 배운 도둑이 밤새는 줄 모른다지 않던가? 기차의 침대는 3층으로 좌우 대칭이다. 제일 꼭대기 3층은 젊은이나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가파르다. 아내와 나는 2층도 간신히 올라갔다. 1층은 더 곤란하다. 2, 3층의 승객이 잠자러 올라가기 전까지는 싫어도 함께 앉아있어야 하기 때문에 드러눕지도 못한다. 중국인들은 이러한 환경에 익숙해서 아주 예사롭다. 열심히 해바라기 씨를 까먹고 술을 마시고 삶은 달걀, 돼지고기, 닭고기를 신나게 먹는다. 먹고 남은 껍질, 뼈다귀 등을 아무렇게나 바닥에 던져버린다. 술병이 이러 저리 뒹굴고 자칫하면 술병을 밟아 넘어지기 십상이다. 장사꾼은 쉴 새 없이 오간다. 참 억세게도 먹는다. 먹지 않을 때는 쉬지 않고 떠든다. 여기저기에서 카드놀이 판이 벌어진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다. 공산주의 사회에서 어떻게 미국의 퇴폐적인 카드가 유행일까?
불행히도 나는 배탈 때문에 술을 마시지 못해서 더 고역스럽다. 차라도 한 잔 하려고 식당차로 가다가 칸막이가 된 4인용 침대차를 발견했다. 외부와 완전히 차단되어 대단히 편안할 것 같다. 아이고. 조금만 미리 알았어도…. 돌아갈 때는 틀림없이 4인용 침대차로 해야겠다. 자리로 돌아오는 도중 심양 역 대합실에서 만난 김영태씨를 다시 만났다. 그에게서 보따리장수의 애환을 들었다. 보따리장수는 크게 두 자지란다. 하나는 한국 사람의 전형적인 스타일로 자기자본을 가지고 자기 판단대로 상품을 사서 중국에 팔아넘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의 상인에게 고용되어 주문 받은 상품을 사다가 전달만 해주는 소위 운반책이란다. 한국 사람들은 중국에 드나들기가 자유스럽지만 조선족은 그렇지 못하단다. 중국 조선족의 최대의 불만은 우리 정부가 유독 그들에게만 가혹하게 입국을 제한하는 것이란다. 그래서 위장결혼을 해서라도 한국 국적을 취득해야만 수시로 드나들며 장사를 할 수 있단다. 그러자면 뇌물을 줘야하는데 중국에서는 평생을 벌어도 어려울 5만원 정도가 든단다. 과거에는 8만원이나 들었는데 경기가 요즈음 나빠져서 싸졌단다. 그나마 한국TV에서 보따리장수를 밀수라고 까발리는 통에 세관검사가 까다로워져서 이제 이 짓도 종쳤단다. 그래도 한국에 가면 한 달에 백만 원, 중국 돈 8천 원 정도는 버니까 기를 쓰고 가려고 한단다. 연길에 사는 교민 중에는 한국에서 돈을 벌어 떵떵거리고 사는 사람도 꽤 있단다. 한국정부는 왜 우리 조선족에게 자유로운 출입국을 허락하지 않을까? 만약 그렇게 해서 연변의 조선족들이 돈을 많이 벌면 한국을 북한보다 더 우호적으로 생각할 텐데…. 높으신 나리들이 다 잘 알아서 하겠지. 초저녁부터 책을 펴들고 잠을 청했다. 시끄러운 소리에 쉽사리 잠이 오지 않지만 잠자리는 생각만큼 지저분하지 않아 다행이다.
우리가 탄 기차는 종점이 도문(圖們)이다. 연길에 내려서 다시 도문으로 갈 바엔 처음부터 도문으로 가야겠다. 여승무원에게 목적지를 도문까지 연장해달라고 했더니 20원을 더 내란다. 그런데 이 여승무원은 우리를 개구멍으로 내보내고 20원을 슬쩍했다. 과연 중국 승무원다운 행동이다. 연길에서 도문까지 기차 삯이 5원이라는데 두 배나 떼어먹은 셈이다. 아무려나 우리는 목적대로 도문에 도착해서 바로 두만강으로 갔다. 강 건너 저 쪽이 북한의 남양이다. 사진을 찍으려니까 5원을 내란다. 자기들이 중국정부로부터 허가를 받았으니 배경료를 내야한단다. 참, 어처구니가 없다. 대동강물 팔아먹은 봉이 김선달 식이다. 20원을 내고 전망대에 오르니 사진도 마음대로 찍고 망원경으로 북한을 바라볼 수도 있다. 북한의 강가에는 압록강에서처럼 사람들이 쪼그리고 앉아 하염없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이제나저제나 중국의 친척이 양식을 가지고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거란다. 친척과 약속은 된 거냐니까 약속은 무슨 약속이냐며 북한을 방문한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편지를 부탁하고 마냥 기다리고 있는 거란다. 참, 한심한 일이다. 그래도 건너편 남양은 나은 편이란다. 왜냐하면 북한으로 들어가는 모든 사람들이 남양을 거쳐 가므로 떡 고물이 떨어지기 때문이란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북한에서 도강한 어린이들이 11명이나 있었는데 모두 잡혀가고 지금은 4명이 남아있단다. 붙잡혀 가면 또 건너오고 다시 붙잡아가고 그렇게 숨바꼭질을 한단다. 아이고. 숨이 막히도록 답답하다.
북한을 방문하는 조선족은 중국 쪽의 세관에서 가져갈 물건들을 검사 받고 등에 지고 머리에 이고 다리를 건너간다. 저런 정도의 양식으로 간에 기별이나 갈까? 전망대를 내려오니 세 명의 어린이가 달려든다. 북한에서 왔다며 보태달란다. 너희가 정말 북한에서 왔는지 어떻게 아느냐고 했더니 옆의 가게 주인이 틀림없는 북한아이들이란다. 50원을 주면서 셋이서 똑같이 나눠 가지라고 했다. 가게에 걸터앉아 잠시 쉬며 차를 마시고 있는데 아까 그 녀석들이 아이스 바를 빨면서 지나간다. 나는 황당한 기분이 들어 ‘야, 임마. 돈을 아껴서 양식을 사야지.’ 했더니 아저씨가 똑 같이 나누라고 해서 잔돈으로 바꾸려고 사먹는 거란다. 아무래도 기분이 개운치 않다. 어쩐지 속은 듯한 느낌이다. 아내는 아이들이 오죽 아이스 바가 먹고 싶으면 그랬겠느냐고 역성을 든다. '그럴 수도 있겠구나.' 차를 마시고 막 일어서려는데 한 사내 녀석이 들어섰다. 옷차림이 깨끗하다. 가게 주인은 〈이 녀석도 북한에서 넘어 온 놈〉이란다. 가게주인은 우리더러 들으라는 듯 ‘오늘이 네 생일이라더니 어디서 옷을 얻어 입었니?’ 라고 묻고 녀석은 ‘한국에서 온 아저씨가 시내에 데리고 가서 사줬다.’고 맞장구를 친다. 나는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마치 짜고 치는 고스톱 같다. 놈에게 10원을 주고도 기분이 찝찝하다. 가게 문을 나서니 저쪽 구석에서 녀석들이 카드놀이를 하고 있다. 황당하다 못해 머리가 혼란스러워져서 어느 게 진실인지 판단이 서질 않는다. 정말 저 녀석들이 굶다 못해 죽음을 각오하고 강을 건너온 놈들일까? 아무리 중국의 공안원이 눈이 멀었다지만 백주 대낮에 불법입국자가 저렇게 버젓이 돌아다니다니…. 더구나 여기는 국경경비대가 상주하는 곳이 아닌가? 녀석들은 그리 겁도 내지 않는 눈치다. 한국의 TV에서 탈북자가 심각하게 보도되고 있지만 여기서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국경을 넘나들 수 있나보다. 중국의 조선족은 똘똘 뭉쳐서 지나치게 북한사정을 과장하고 한국 사람들의 동정심을 이용하여 돈만 우려내려는 게 아닐까?
북한에서 경영한다는 금강산식당엘 갔다. 진짜 평양냉면은 어떤 맛일까? 금강산식당에는 과연 공산당답게 공산혁명탑 방문 기념사진이 걸려있다. 6원, 8원짜리 냉면 중에서 8원짜리를 시켰다. 아내와 나는 이번 기회에 평양냉면의 맛이 어떤지 알고 싶었다. 그런데 처음부터 실망이다. 우선 시원하지도 않고 겨자도 없다. 서울에서는 무채김치와 배 한 쪽이 들어가는데 여기서는 오이채, 토마토, 제육 한쪽과 통 달걀 한 개가 고명으로 얹혀있다. 면발도 쫄깃한 맛이 없다. 한 마디로 기대 이하다. 빌어먹을…. 연길로 가서 백두산 갈 준비나 하자. 조선족 신혼부부와 1인당 20원씩 내고 택시를 합승해서 연길로 왔다. 신랑이 자기는 부산에 사는 ‘우백희’라며 연길에 사는 사촌누이의 소개로 연길의 신부를 맞이하게 되었단다. 젊은이의 장인은 함경도 출신인데 북에서 넘어 온 사람들이 자주 찾아온다며 며칠 전에도 한 사람이 다녀갔단다. 말하자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넘어올 수 있다는 얘기다. 〈그래. 이렇게 어렵지 않게 중국을 드나들 수 있는데 굶어죽고 사람고기를 먹다니 말이 안돼. 우리가 이해 못하는 무언가가 있어. 도대체 어느 쪽이 진실일까? 지나치게 과장된 내용이 우리에게 전해지는 건 아닐까?〉
도문에서 만난 젊은이는 자기 4촌 누이 집에서 민박을 하라고 했지만 이제는 조선족도 못미더워 내키지 않았다. 또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고 푹 쉬고 싶어서 별 3개짜리 동북아호텔에 들었다. 규모는 크지만 공산권의 모든 것이 그렇듯이 관리상태는 그리 훌륭하지 못했다. 새벽 5시 반에 백두산 가는 버스가 있단다. 백두산까지는 6시간이 걸리니까 최소한 12시에 도착하고 다시 오후 4시에 연길로 돌아온단다. 4시간 동안이면 백두산 구경은 충분하니까 잘만하면 하루 만에 백두산 구경을 끝내고 계획보다 빨리 돌아갈 수 있겠다. 단동항에서 목요일과 일요일에 배가 출항하니까 서두르면 목요일(6월 24일)에 출항할 수 있다. 처음 여기에 올 때엔 연길에서 좀 오래 머물면서 조선족과 사귀고 싶었지만 이들의 태도가 어딘가 마음을 열지 않고 속내가 다른 것 같아 정나미가 떨어졌다. 백두산행 버스를 예약(1인당 55원)하고 연길의 명물인 개고기를 먹으러 갔다. 식당이름도 거창하다. 〈연길 개고기 왕〉연길의 보신탕은 마치 설렁탕 같다. 전혀 개고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겨우 20원어치를 먹고 배가 부르다. 저녁 늦게 연길의 야시장엘 갔다. 연길의 야시장에는 없는 게 없다. 굼벵이, 비둘기, 심지어 뱀까지 있다.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몰려 앉아 희희낙락이다. 연길은 밤에 더 활기가 넘친다. 과거에 유행하던 거리의 가라오케는 사라졌다. 전에는 길가에 노래기계를 차려놓고 마이크가 터지도록 노래를 불러댔었다. 한마디로 노래가 아니라 소음 그 자체였다. 그렇게 소란스러워서야 당국에서 그냥 둘 리가 없다. 대신 호텔의 연변TV(YBTV)는 한국의 가요를 계속 방송해서 마치 한국에 있는 기분이다.
백두산행 버스는 16인승 소형이다. 이른 새벽이라서 운전사는 세수도 제대로 하지 않았는지 부스스한 얼굴이다. 버스는 50대의 남자 두 명, 20대의 처녀 관광객 두 명, 20세 전후의 예쁜 조선족 처녀, 우리 내외, 운전사, 아줌마 차장까지 모두 9명을 태우고 출발했다. 좌석이 좁아서 다리도 제대로 펴지 못한 채 6시간이나 견뎌야 하니 정말 고역이다. 백두산에 거의 도착할 무렵, 지프 한 대가 따라붙는다. 우리 차를 가로막아 세우더니 젊은 청년이 올라온다. 불심검문인가? 청년은 1인당 150원씩에 백두산관광을 시켜주겠단다. 백두산 정상에 올라가는데 80원, 입장료가 40원이니 기본이 120원이고 안내비가 30원이란다. 경찰도 아니면서 남의 차를 마음대로 세우느냐고 따져도 운전사는 희죽희죽 웃기만 한다. 다 그런 거지 뭐, 하는 식이다. 50대 신사복이 자기는 교회의 장로라서 신도들을 데리고 백두산엘 여러 번 왔었다며 되느니 안 되느니 말이 많다. 시간은 자꾸 흐르고 결국 나의 분통이 터졌다. ‘150원이건 100원이건 나는 흥미 없다. 빨리 가자.’고 했더니 이 젊은 녀석은 엉뚱한 소리를 한다. 한 사람이라도 빠지면 값이 달라진다나? 이 자식, 참, 웃기는 놈이다.
백두산에 도착해서 우선 10원의 입장료를 내고 천지연폭포엘 갔다. 천지연폭포는 여전히 웅장한 모습 그대로다. 천지로 올라가는 길이 지난해 폭우로 무너졌다니 아쉽지만 어쩌겠나? 온천수로 삶은 계란을 까먹으며 아픈 다리를 쉬었다. 바로 내려다보이는 계곡 옆에 대단한 규모의 호텔이 신축중이다. 한국인이 주인이란다. 공원 내에 저런 규모의 호텔을 지으려면 여간한 로비로는 어림도 없을 터. 저러다 현대에서 추진하는 백두산 관광이 성사되면 이 쪽으로 오는 손님이 확 줄 텐데 걱정이다. 결국 중국 놈 좋은 일만 시키는 거 아냐? 하기야 내가 무슨 걱정이랴. 버스로 돌아오니 또 지프의 청년이 기다리고 있다. 참 끈질긴 놈이다. 50대 신사복이 100원에 흥정하면 어떠냐고 동의를 구한다. 나는 그 신사복도 밉살스럽고 중국청년이 워낙 엉뚱해서 거절했다. 백두산 정상에 올라가는 표를 사러갔을 때 우리는 그 지프의 청년이 사기를 쳤다는 사실을 알았다. 정상에는 허가된 차량만 올라갈 수 있기 때문에 그 청년의 차는 무용지물이었다. 하마터면 돈만 날릴 뻔했다. 더구나 황당한 것은 예약은 3시까지 마감이고 그나마 오늘 치는 다 팔렸단다. 빌어먹을…. 천지연폭포를 나중에 갔어야 했다. 이렇게 되면 백두산에서 하루를 묵어야한다. 역시 목요일 귀국은 포기해야 하나보다. 그러나 중국은 무한한 가능성의 나라다. 공안원(중국경찰)이 다가오더니 속삭이듯 작은 소리로 입장료 80원을 자기에게 주면 자기가 해결해 주겠단다. 얼씨구, 이거야말로 행운이다. 공안원의 차는 순서고 뭐고 없이 일사천리로 백두산 정상을 향해 달려 올라갔다. 그 신나는 기분이라니…. 팔자에 없는 공안원 차를 타고 백두산 정상에 올랐다. 와! 천지다. 다행히 날씨도 좋고 구름도 그리 많지 않아 천지를 환히 볼 수 있었다. 운이 좋다. 남들은 여러 번 오고도 천지를 보기 힘들다던데 나는 두 번 와서 두 번 다 확실하게 천지를 보았다. 부슬비가 내려도 천지의 모습은 너무 너무 깨끗하다.
몇 년 전에는 백두산에서 목이 터져라 ‘우리의 소원은 통일, 동해물과 백두산이…’를 부르고 큰 소리로 기도를 드리는 신도들도 있었는데 이제 그런 광경은 보이질 않는다. 열기가 많이 식었나보다. 백두산! 언제 또 오랴? 뒤를 돌아보며 자꾸만 목이 멘다. 앉은뱅이 백년초가 화려한 꽃망울을 터트리며 웃고 있다.
6월 23일, 오늘은 오후 5시 27분, 밤 세워 Y-254 기차를 타고 심양을 거쳐 단동으로 떠나는 날이다. 그래서 오전에는 용정엘 가기로 했다. 윤동주 시인의 대성중학도 보고 용정도 보고 혜란강이 보이는 일송정도 가보자. 5원짜리 버스로 용정에 도착해서 인력거를 타고 대성중학엘 갔다. 한국에서 온 관광버스가 다섯 대나 있다. 역시 대성중학의 윤동주 기념관도 많이 변했다. 환경도 잘 정리되었고 예쁜 처녀들이 친절하게 안내해준다. 한국의 독지가들이 돈을 많이 희사했단다. 용정(龍井)공원도 한국인이 투자해서 정비를 했기 때문에 명소가 되었다. 오나가나 입장료를 내야한다. 사진을 찍는데도 2원이란다. 중국에서 공짜란 없다. 한국에서 왔다는 30대 초반의 젊은이와 그 젊은이를 안내하는 두 40대의 조선족 여인일행을 만났다. 내가 일송정(一松亭)엘 간다니까 자기들도 같이 가잔다. 운전사까지 여섯이 간신히 끼어 타고 일송정엘 갔다. 또 입장료를 내야했다. 입장료만 안 낸다면 일송정에서 보는 혜란강이 더 아름다울 텐데….
40대의 조선족 여인이 시키지도 않는 말을 한다. 북한의 동포들은 굶주리다 못해 자기 자식도 삶아 먹는다고 했다. 시장에는 인육(人肉)이 공공연히 거래되고 있단다. 훈춘(渾春)의 두만강은 도문보다도 좁아서 다리만 걷으면 얼마든지 건널 수 있는데 왜 미련하게 자기 자식까지 잡아먹으며 사는지, 기왕 죽을 바에야 도망이라도 쳐야지 가만히 앉아서 굶어 죽다니 정말 딱하다고 했더니 그들의 체제를 몰라서 그런 말을 한단다. 조금만 비위에 거슬리거나 의심이 나면 가차 없이 죽이는 판이라며 북한엘 가보면 정말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한심하단다. 그래서 한국에서 온 사람들이 돈을 주면 자기들이 대신 북한에 들어가 그들을 도와준단다. 그것이 진정한 동포애가 아니냐고 반문한다. 어디서 많이 듣던 말투다. 북한의 비참한 생활상을 설명하면서 정말 눈물이라도 흘릴 태세다. 말하자면 우리에게 북한을 도와 줄 의사가 있다면 자기들을 이용할 수 있다는 얘기다. 동행한 젊은이도 2백 원을 냈단다. 도대체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들에게 돈을 주면 정말 북한엘 가서 도와주는지 어떻게 믿나? 나는 용정에서 가장 유명한 개고기 집이 어디냐고 엉뚱한 소리를 했다. 그래서 들른 개고기 식당은 평일인데도 정말 사람들이 많았다. 과연 유명한 집인 모양이다. 양념이 우리와는 영 판 달라서 입에 맞지 않는다.
연길에서 다시 한 번 평양식 냉면을 맛보기로 했다. 이 번 식당에는 8원, 12원, 20원, 30원 짜리 여러 가지 냉면이 있다. 지난 번 냉면은 8원짜리라서 맛이 없었는지 모른다며 이번엔 20원짜리를 시켰다. 그런데 이건 더 엉뚱하다. 꿩고기, 통 새우, 닭고기, 잣, 수박, 토마토, 소고기제육 등 여러 가지 고명을 얹어서 냉면인지 비빔밥인지 분간이 안 된다. 30원 짜리 냉면은 고명이 얼마나 여러 가지일까? 평양냉면이 이런 맛이라면 왜 사람들은 평양냉면, 평양냉면 하는지 모르겠다. 단동의 연락선 사무소에 확인전화를 하려고 했지만 통화가 안 된다. 만약 목요일의 배를 놓치면 도리 없이 단동에서 3일을 죽치고 있어야 할 판이다. 기차가 예정대로 단동에 도착한다고 해도 12시 30분이고 단동에서 동항까지 택시로 40분이 걸리니 오후 3시에 출발하는 배를 타려면 시간이 빠듯하다. 만약 기차가 연착이라도 한다면…. 심양에서 갈아타야 할 기차는 겨우 50분의 여유뿐이다. 연길에서 심양으로 가는 기차가 연착을 해도 문제는 심각하다. 아무튼 조금만 예정에서 벗어나면 만사가 뒤틀리는 판이다. 제기랄. 될 대로 되라지. 연길에서 장춘으로 가서 장춘에서 비행기를 이용하면 장춘마저 구경했을 텐데…. 항공료도 그리 비싼 편이 아니다. 겨우 5만원 차이에 단동으로 다시 돌아가다니 정말 돌대가리 짓이다.
우리가 탄 4인용 침대차는 기대한대로 매우 만족스러웠다. 시트도 깨끗하고 2층으로 된 공간도 훨씬 넉넉했다. 우리 칸에는 20전후의 예쁜 처녀와 30중반의 조선족 젊은이가 함께다. 예쁜 처녀는 일찌감치 2층으로 올라가 나 몰라라 하고 어울리려 하지 않는다. 아주 조용하고 얌전한 처녀다. 젊은 청년은 다소 뻣뻣하고 거만한 인상이다. 알고 보니 이 조선족 청년은 골수 공산당원이며 철저한 북한편이다.
“북한이 몇 년간의 자연재해 때문에 식량난을 겪고 있는 게 사실이지만 사람을 잡아먹을 만큼 곤란하지는 않아요. 사람고기를 먹는 걸 본 사람이 있습니까? 다 거짓말입니다. 악의적으로 과장한 말입니다. 나는 서울에도 금년 봄에 다녀오고 평양에도 수시로 드나드는 사람입니다. 말하자면 가장 객관적으로 양쪽을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이지요. 남한에도 못사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까? 남한이 북조선을 도우려면 불순한 의도를 버리고 진실로 도와야 합니다. 간첩 질이나 하기 위해서 값 싼 동정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놀랍게도 정확한 서울 표준말로 또박또박 말한다. 그렇다면 북한동포의 생활은 어느 정도란 말인가?
“우리는 그저 싸우지 말고 서로 이웃처럼 왕래나 하면서 살자는 거요”
“미군을 먼저 철수시켜야 합니다. 싸우지 않는다면서 왜 미군이 필요합니까?” 갑작스러운 반박에 말문이 막힌다.
“나는 정치인도 군사전문가도 아니라 잘은 모르지만 당신들이 처 들어올까 봐 겁이 나서 그런 거 아닐까? 미군이 있다고 서로 편지도 교환하지 못하고 자유왕래도 못할 이유가 없지 않소?”
“50년의 분단은 짧은 세월이 아닙니다. 따라서 서로의 입장이 다릅니다. 미군이 있는 상태에서 서신교환, 자유왕래는 군사적인 목적에 이용당할 소지가 많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끼리 해결해야지, 외세의 힘을 개입시켜서는 안 됩니다.” 이 친구 말하는 품이 철저한 사상교육을 받았나 보다. 말도 잘 하고 둘러대기도 잘 해서 평범한 상식으로는 대거리하기가 벅차다.
“글쎄 그 말도 일리는 있는데 우선 쉬운 것부터 해야지 않겠소? 이산가족을 만나게 한다든지 하는 일들 말이요.”
“남쪽은 자기들 고집만 내세우고 북쪽의 의견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고려연방제를 하면 모든 일이 다 해결되는데 통일은 하지 않고 그냥 만나기만 하면 뭐 합니까?”고려연방제? 그건 어떻게 하는 거지? 솔직히 고려연방제가 뭐냐고 했더니 남쪽은 남쪽대로 자본주의하고 북쪽은 북쪽대로 공산주의 하는 거란다.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한 개의 나라로 외교권을 행사한단다. 그러면 누가 대표가 되는 거야? 그리고 만약 남북의 의견이 서로 다르면 어떻게 하지? 그때그때 별도로 결정하면 된다며 대답이 옹색하다. 그러나 이 청년의 주장은 나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북조선은 남쪽이 생각하듯 그리 궁색하지 않다. 비록 백화점에 물건을 진열만 시켜놓고 팔지 않아도 북한의 생산품을 전시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금강산 관광도 북한이 베푸는 은혜인 만큼 감사하게 구경하고 다른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한다. 남한이 수해가 났을 때 북한도 쌀을 보내주었으니 남한에서 식량을 원조하는 것은 은혜에 보답하는 차원에서 당연하다. 남한이 잘 살게 된 것도 겨우 70년대 이후가 아니냐? 너무 건방지다. 남한에서도 간첩 질을 하면서 우리 잠수정만 트집 잡는다.〉아이고. 머리야! 이 녀석의 말을 듣다가는 돌아버리겠다. 통일은 고만두고 서로를 인정하고 적대관계만 해소하면 되지 않느냐니까 펄쩍 뛰면서 ‘무슨 소리냐. 이 지구상에 한 민족이 분단되어 있는 나라가 어디 있느냐’며 당연히 통일은 돼야 한단다. 하여간 전쟁만은 피해야한다니까 전쟁이 문제냐며 전쟁을 해서라고 통일은 해야 한다는 논리다. 아이고, 무서워. 공산주의가 이런 거구나. 마침 청년의 친구가 찾아와서 자리를 뜬 사이 아내는 쓸데없는 소리 그만 두라며 눈을 흘긴다. 에라, 모르겠다. 녀석이 돌아오기 전에 이불을 쓰고 누워버렸다.
6월 24일, 아침 8시, 심양에서 기차를 갈아타는 데는 일단 성공했다. 그런데 심양에서 단동까지의 기차가 연착이다. 12시 10분이면 도착해야 할 기차가 1시가 되어서야 도착했다. 서둘러 택시를 타고 동항으로 갔다. 2시가 다 되어 도착한 동항, 이제는 1등석이라도 남았으면 좋겠다. 그런데 이게 웬 떡인가? 꼭 두 자리가 비어있단다. 아! 정말 다행이다. 이로서 백두산 여행은 무사히 끝나는구나.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쉰다. 인천에 도착하면 선창가 횟집에서 매운탕에 소주나 한 잔 걸쳐야겠다.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 얻은 게 뭐지? 그래. 중국이 무섭게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앞으로 멀지 않은 장래에 중국은 그 큰 국토와 12억의 국민으로 우리를 압박해 올 것이다. 연길의 공산당 청년을 보고 통일이 그리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느꼈다. 그들은 우리가 아무리 햇볕정책을 펴도 편견과 고집으로 일관할 것이며 백성들의 고통보다 그들의 체제만을 고수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무리 일방적으로 베풀어도 조금도 고마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최소한의 생존기반만 유지된다면 절대로 타협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북한에게 우리는 계속 짝사랑만 해야 할까? 우리가 만약 너희는 너희끼리 살아라, 우리는 우리끼리 살란다고 도와주지도 말고 만나자고도 말고 금강산도 가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중국의 조선족에게는 햇볕정책이 필요한 것 같다. 그들에게 조국의 넉넉하고 따뜻한 정을 느끼도록 배려하면서 자유롭게 입출국을 허용한다면 그들은 당장 우리 편이 될 게다. 그들과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하고 그들이 우리에게 마음을 열고 진정한 우리 편이 되었을 때 북한도 어쩔 수 없이 굴복하지 않을까?
1999. 6.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