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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 대신들을 잘 대우하는데 만전을 기하도록 하게. 폐하께서 돌아가실 날이 그리 멀지 않을 것이니, 그 때 가서 딴 말을 하지 말도록 말일세.”
“명심하겠습니다. 하오나 이번 재판 말미에서 폐하께서 오가 대신들에게 내리신 유언 같은 어명이 마음에 걸립니다.”
“그건 전혀 염려할 필요 없네. 폐하의 큰 아드님 상황은 어떤가?”
“여전히 방탕을 일삼고 있어서 아무도 그에게 기대감을 가지고 있지 않은 듯합니다.”
“그에 대해서도 그리 염려할 것은 없겠지?”
“네, 그렇사옵니다. 그가 태자 책봉도 받지 못한 이상, 폐하께서 붕어하신다 하더라도 오가 대신들은 결코 그를 추대하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그가 요새 혹시 새로 사귀는 사람들은 없는가?”
“제가 탐문하기로는, 난봉꾼들과 비류들 외에 없습니다.”
“그들이 무기를 든다면?”
“오합지졸에 불과합니다.”
고열가 임금이 정실에서 낳은 아들은 둘 있었으나 작은 아들은 앞서 언급한 대로, 황자들끼리 술에 취해 연무장에서 무예를 겨루다 사고로 죽었고, 나이 많은 큰 아들은 방탕을 일삼았으므로 모두의 눈 밖에 나, 태자 책봉도 받지 못하고 있었다.
단군조선에서는, 군왕의 자질을 매우 중시했기 때문에, 인격적으로나 어떤 면에서 흠이 있는 사람은, 비록 맏아들이라 하더라도 삼정승과 오가 대신들의 지지를 받지 못할 경우, 임금의 자리에 오를 수 없었다.
측실에서 태어난 자녀들은 아직 어리거나 실망을 주거나 이렇다할만한 자질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었고, 정실이 죽은 후 새로 얻은 젊은 황후는 설이매 공주 하나를 자식으로 두고 있었다. 황손들은 아직 나이가 어렸다.
이쯤에서 독자들이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단군조선의 제위계승은 장자 세습이 원칙이었다 하더라도, 제실의 친족들 중에서도 덕망이 높은 이가 있을 경우, 그가 임금의 모든 아들들을 제치고 제위에 오르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는 사실이다.
<단군세기>에 나와있는, 오가 대신 중의 아무개가 제위에 올랐다는 기록 등이 바로 그건 경우에 해당한다.
때로는 근세조선의 세조처럼, 태자의 보위를 찬탈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이래저래, 해로운이 가는 길에 큰 장애물이 될 만한 황가의 인물은 거의 없었고, 지방의 욕살로 나가 있는 황족들은 몇몇을 제외하고 대다수 그의 휘하에 들어와 있었다.
해로운의 곁에 앉아있던 다른 부하 장수가 그에게 듣기 좋은 말을 던진다.
“폐하께서 붕어하시면, 나리께서 만인의 추대를 받는 과정만 남게 될 것 같습니다.”
“더욱 근신해서, 사람들을 잘 관리하고 때마다 선물 챙기는 일에 빈틈없도록 하게.”
“나리, 힘써 준행하겠습니다.”
환화궁은 외견상 아무런 분요 없이 조용한 날들을 맞고 있었다.
해모수 사건이 종결되고 며칠 후 임금은 설이매 공주와 독대한다.
“해모수가 지금 어디 있느냐?”
“영빈관에서 떠날 채비를 하고 있을 것이옵니다.”
“내가 번조선왕 기윤의 협조를 얻어 그를 오열고을(요동성遼東城)로 보내기로 했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오열골은 번조선 경내에 있었다.
“그를 귀양 보내시는 거예요?”
임금은 설이매의 물음에 직접 대답하지 않고 다른 질문을 던진다.
“그를 오열고을로 보내고자 하는 나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너는 알겠느냐?”
“아바마마, 그곳은 장당경에서 너무나 먼 곳이지만, 번조선의 왕험성과, 연나라 왕도인 계성에서는 가깝습니다.”
설이매의 머릿속에는 번조선 왕녀 기진과 연나라 공주 예의 자태가 맴돌고 있었다.
“너도 그를 따라 가겠느냐?”
“······.”
“그가 오열고을의 군사훈련교관으로 가면, 거기서 힘을 기르고 세를 모을 수 있지 않겠느냐?”
“하오나 오열고을은 장당경에서 너무 멀고, 번조선의 고을일 뿐만 아니라, 또 오열고을 성주가 어떤 인물인지 심히 의심스럽습니다.”
“내가 밀지 한 통을 써 줄 테니, 네가 직접 휴대하고 가서 그에게 전달하고 오너라.”
“······?”
해모수가 번조선 땅 오열고을로 가던 날, 그의 모친 묘고미향과 연은소, 백선의, 청아련이 동행하고, 연나라 사절들과 번조선의 기비 기진 일행도 함께 길을 나섰다. 설이매 공주도 천리 길을 마다하지 않고 해모수의 여정에 동참한다. 고열가 임금의 밀서를 지니고.
♬ 아리랑 아리랑 알(심장) 앓이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장당경으로부터 오열고을까지의 일천오백 리 노정은,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는 슬픔의 길이고, 머지않아 정든 이와 헤어져야 하는 이별의 행로였다.
연은소가 이 노래를 부르자 모두 기다렸다는 듯 설이매도 기진도, 삼칠성주까지도 따라 불렀다. 그들은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연속해서 아리랑을 제창했다. 여인들의 눈에는 어느 새 눈물이 그렁그렁해 있다.
이월의 삭풍은 산야를 훑고 일행이 타고 가는 마차의 휘장을 두들겼다. 여인들의 마음도, 찬바람에 나부끼는 오열고을 성루의 깃발처럼 한풍에 휩쓸려 요동하고 있었다.
오열고을이 시야로 들어왔을 때는 이월 상순의 눈보라가 치던 날이다. 장엄한 백악白岳(갈석산)의 줄기가 북에서 남으로 수십 리 뻗어있고, 남쪽 가파른 기슭 아래 둥지를 튼 오열고을은, 비바람의 간난과 폭풍한설의 고초에도 무너지지 않고 의연히 버티고 서 있었다.
성문에 당도하니, 문루 위에 오열고을烏列谷城이라는 현판이 적들을 오시傲視하고 일행을 환영하는 듯, 위엄있게 서 있었다.
아, 오열곡성, 요동성의 옛 자취여, 지금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옛 문인의 시구를 몇 개 간추리고 몇 글자 고쳐, 못내 아쉬운 심사를 달래 보련다.
遼水蕩蕩帶天光 요수탕탕대천광
風林虛谷演舞漾 풍림허곡연무양
雲障元來盡我土 운장원래진아토
朝鮮久鎭飮馬傍 조선구진음마방
英雄不作時事空 영웅부작시사공
何際多勿如懷子 하제다물여회자
今我哀古無限情 금아애고무한정
爲贐日樣萬里也 위신일양만리야
탕탕한 저 요수는 하늘빛을 아우르고
바람 숲은 빈 골에 춤을 추도다
운장은 원래부터 우리네 땅이었네
조선의 옛 군사 말 먹이던 곳이지
영웅은 사라지고 세월만 무심타
언제 다시 자식 품듯 고토를 되찾을까
나 이제 옛일을 무한히 슬퍼하며
천만리 오열성에 해모수를 보내노라
(주: 첫 행의 "요수"는 갈석산 서편에서 흐르는 난하를 가리키며, "운장"은 갈석산 주변의 방어요새였다.)
번조선의 기비, 기진 남매는 왕험성으로 직행하지 않고 해모수를 따라 오열고을까지 왔다. 연나라의 단, 예 왕자 왕녀도 연나라 왕도 계성으로 가기 전, 해모수와 함께 오열고을에 들렀다.
진조선 황가 출신인 오열고을 성주는, 설이매 공주와 삼칠성주, 번조선, 연나라 왕가 일행을 극진히 대접하고, 해모수는 근무에 들어가기 전 휴식 기간 동안, 정다운 이들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해모수와 며칠을 보낸 귀빈들 가운데, 연나라 왕세자 단과 공주 예가 맨 먼저 그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 동안, 함께 지내면서 귀한 가르침을 많이 받았소. 부디 몸조심하시오.”
단이 해모수에게 인사했다.
“공자님의 평안을 빌겠어요.”
예 공주도 고운 얼굴에 섭섭한 기색을 가득 담고 절한다.
“고맙습니다. 미천한 저를 이렇게까지 염려해 주시니, 그저 감격할 따름입니다.”
그들이 해모수와 헤어져 일행을 거느리고 돌아설 때다. 예 공주가 마지막으로 그 아름다운 얼굴을 살짝 돌리더니 해모수를 향해 처연한 웃음을 던진 후 이내 마차 위로 오른다.
바로 그 때다.
‘저 여인을 맘에 두라.’
난데없이 이상한 소리, 소리 아닌 소리가 해모수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해모수는 깜짝 놀랐다. 그 소리가 귀에 들리는 음성은 분명히 아니었다. 다만 마음속에 떠오르는 어떤 생각이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생각이 너무나 선명해서 마치 목소리처럼 들려왔던 것이다.
‘내가 지금 무슨 헛생각을 하고 있는가? 엉뚱하게도 예 공주를 맘에 두라니? 장차 내 아내라도 된다는 말인가?’
해모수는 즉시 그 생각을 떨쳐버리고 뒤돌아섰다.
이월 말에 다다랐을 무렵, 기비와 기진 공주도 못내 아쉬워하며 그에게 작별을 고한다. 작별하기 전, 개인적으로 만났을 때 기진 공주가 간곡한 어조로 해모수에게 부탁했다.
“번조선 왕성은 여기서 이삼백 리 밖에 되지 않으니, 휴가를 얻으면 꼭 왕궁으로 놀러 오셔야 해요, 네?”
“저보다는, 한가하신 공주님이 이곳을 방문하시는 게 더 편리할 것 같습니다.”
해모수가 웃으며 대꾸했다.
그보다 앞서 기비 왕세자는 어느 날 해모수와 단둘이 있는 자리에서 은밀하게 말했다.
“해모수 공자, 지금의 진조선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오?”
“어떻게 생각하다뇨?”
“지난번에 보지 않았소? 대신들이 죄다 한 통속이 되어 공자를 벼랑으로 몰고 가는 걸.”
해모수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상황은 이미 고열가 임금 폐하의 통제 밖에 있는 것 같소.”
기비는 해모수의 기색을 훑어본 후 말을 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돌아보아서 알지만, 진조선 백성들의 상황은 어떠했소? 백악산아사달에서 겪은 황당한 일은 지금도 눈에 선하지 않소?”
그것은, 해모수 일행이 연예단을 가장해 각종 기예를 선보이고 돈을 거둘 때 비류들이 와서 죄다 채어 간 일을 지적한 거였다.
“나라는 날로 쇠약해가고 곳곳에서 어중이떠중이들이 난리 법석을 피우고 있는가 하면, 백성들은 아우성인데, 언제까지 참아야 하겠소?”
기비는 계속해서 해모수의 표정을 살폈다. 해모수는 먼 하늘을 바라보며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이번에 장당경에서 겪은 소송 사건은, 나에게 많은 깨우침을 주었소.”
그가 목소리에 힘을 주어 부언한다.
“하늘의 때는 이미 다가왔소!”
해모수는 여전히 잠자코 있다.
“폐하께서 돌아가실 날은 그리 멀지 않을 것이오. 폐하께서 붕어하시고 나면 때는 이미 늦소.”
해모수는 기비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듣고 해모수는 수년 전 석실에서 들은 음성이 떠올랐다.
‘네가 <행심록>에 기록된 말을 잘 지켜 나를 극진히 섬긴다면, 이 나라 강산을 너에게 주리라.’
해모수는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꿈이라는 것은 현실에서 틀릴 수도 있고, 또 자신이 잘못된 욕망으로 허황한 환청을 들었을 수도 있을 터. 설사 그것이 신인의 계시라 하더라도, “<행심록>에 기록된 말을 잘 지켜 하나님을 극진히 섬기면”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었으므로, 그 일이 반드시 실현된다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기비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내가 적극 협력하리다.”
기비는 말을 꺼낸 후 한 동안 침묵을 지켰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행이 두 사람의 대화 장면을 주시하고 있는 자는 아무데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당하고 있음을 그들은 알 턱이 없었다.
“다만, 내 누이동생을 생각해 주시오.”
그것은, 자신의 누이동생 기진과 혼인하라는 암시였다. 그녀와 연을 맺을 경우, 기비의 협력을 얻는 것은 불문가지다.
그러나 기비의 목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두 사람의 얼굴이 뇌리에 떠올랐다. 하나는 애처로운 미소를 남기고 돌아서던 연나라 공주 예였고, 그리고 연은소다. 이번 역모 모함 사건에서 자신을 위해 애를 써준 설이매의 선연嬋娟하기 짝이 없는 고아高雅한 낯도 아른거린다.
예 공주가 떠날 때 마음속에 들려오던 음성은 자꾸만 그를 성가시게 했다.
‘저 여인을 맘에 두라.’
“왕세자 저하의 친절하신 뜻을 왜 제가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그 두 가지 일은, 제가 쉽사리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닙니다.”
해모수는 번조선 관할의 오열고을 수비대 부장副將으로 들어왔으므로 이제 기비에게 깍듯한 존칭을 사용했다.
두 가지 일이란 거사擧事와 혼사를 이름이다.
“지금 당장 결정하라는 게 아니오. 시간을 두고 잘 생각해보시오. 하지만, 고열가 임금 폐하께서 돌아가시고 나면, 나라를 이어받을 만한 폐하의 자제도 없는 이상, 그 때는 나라가 탐욕으로 가득 찬 무리들에게 집어삼킴을 당할 것이오.”
해모수는 동북의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맑고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이 유유자적 놀고 있다.
‘고향 하늘도 저렇게 맑을까?’
그 동안 질곡의 세월을 보내느라 고향을 떠올릴 겨를이 없었으나, 이제 고향으로부터 머나먼 이곳까지 와보니, 새삼 고향생각이 간절해졌다. 해모수는 지금의 요하와 서요하 남부 일대 고리국高麗國에서 태어나, 웅심산성(길림성 서란)에서 자라났다.
“잘 알겠습니다. 제가 깊이 숙고해보겠습니다.”
“연나라가 우리와 협력하거나 조용히 있어준다면, 우리 번조선이 공자를 적극 지지하고 우리 군사들만 동원하더라도, 장당경의 군사력을 충분히 제어할 수 있소. 그들에게도 협력자가 있겠지만, 백악산아사달 및 영고탑 욕살과 동아리하 십대성 군사들이 우리에게 협조하면 승산은 우리에게 있소.”
기비는 더욱 신중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더구나 그 위에 있는 공자의 고향 웅심산성은, 공자가 군사를 일으킨다면, 공자를 지지할 가능성이 많소. 지난번 우리가 방문했을 때, 그들의 인심을 파악하지 않았었소? 그리고 그 북편에는 공자의 부친 아남성 욕살 여을님이 버티고 계시니, 아사달의 욕살만 설득한다면, 동북부의 중심은 죄다 쉽사리 우리 손으로 들어올 수 있소이다.”
해모수는 여전히 먼 하늘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백악산아사달부터 웅심산성, 아남성, 아사달은 모두, 지금의 송화강 본류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 성들 동편의 영고탑까지 장악한다면, 북동부 전체가 우리 손에 들어올 수 있소. 서남부에서는 우리 번조선 군대가 지지하고, 또 삼칠성과 동아리하 십대성이 좌측(동쪽)을 막아 막조선 맹성의 군사들을 방어한다면, 장당경은 우리에게 에워싸이게 됩니다.”
해모수가 돌연 웃는 낯으로 기비에게 말했다.
“저하, 날씨도 화창하고 쾌청한데다 몸도 찌뿌둥한데 오랜 만에 야외로 나가 말 타고 맘껏 달리며 호연지기를 한껏 발산해 보는 게 어떻습니까?”
기비가 해모수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그거 참 좋은 생각이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지금 즉시 나갑시다.”
해모수, 설이매, 기비, 기진, 묘고미향, 연은소, 백선의, 청아련 여덟 사람은, 신나게 말을 몰고 성 밖으로 나섰다. 여덟 남녀는 오열고을 남쪽 요수(난하)강변의 드넓은 평원을 바다 쪽까지 마음껏 달려보았다. 이월의 바람이 싸늘했지만 한편으로 상쾌하기 이를 데 없었다.
차가운 해풍海風에 검수劍穗가 춤을 추고, 장사壯士의 시위에서 화살이 요동하니, 울고 가는 저 새는 들판에 추락한다. 남녀의 환호소리 아직까지 들리는 듯, 오열고을 벌판에 말을 몰아 달리고, 해모수 일행의 자취가 해변을 따라 아득히 멀어져 간다.
(다음장으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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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2022. 10. 22.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