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의 보고, 대구의 재실
48. 군위군 산성면 화본2리 엄흥도 묘소, 의흥면 금양2리 엄흥도 재실 망월정(1)
송은석(대구향교장의·대구문화관광해설사)
프롤로그
2026년 상반기 대한민국 문화계 이슈는 단연 영화 ‘왕과 사는 남자’였다. 대구문화관광해설사로서 대구 문화관광 분야 최일선에서 뛰고 있는 필자 역시 영화 ‘왕사남’의 인기를 절감했다. 필자가 ‘대구시·대구관광협회’와 함께 전국 시티투어 최초로 기획한 대구시티투어 특별기획코스 ‘충절의 길 역사기행, 왕과 함께 한 사람들’은 시범 투어 포함 총 9회차가 신청 개시 3시간 만에 전석 매진되는 기록을 세웠다. ‘왕사남’과 ‘대구·군위’. 도대체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
엄흥도, 대역죄인에서 충신으로
영화는 차가운 겨울 강물 속에서 엄흥도(嚴興道)가 단종의 시신을 끌어안고 울먹이며 “전하! 많이 추우시죠. 이제 나가십시다”라며 끝이 난다. 이때 화면 아래에 “엄흥도의 묘는 영월에 있다”는 자막이 나간다. 이 짧은 자막 한 줄이 누군가의 역린(逆鱗)을 건드렸다. 바로 영월 엄씨 충의공계(忠毅公系) 군위 문중이었다.
이상하게도 우리나라에는 엄흥도의 묘가 여러 곳에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곳으로는 영월·청주·울산·군위 등이다. 사람은 분명 한 명인데 묘가 여러 곳에 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뭔가 이상하다. 역사 속 비슷한 사례를 참고해 보면 진묘(眞墓)는 분명 하나일 것이고, 나머지는 가묘(假墓)일 가능성이 높다. 왜 이런 상황이 벌어졌을까? 이와 관련해 필자는 이번 투어를 준비하고 진행하는 과정에서 느낀 바가 있다. 570년 전 엄흥도는 역모의 수괴로 죽임을 당한 단종 시신을 수습한 대역죄인이었다. 이런 이유로 엄흥도는 조상 대대로 살아온 영월 땅을 떠나 여생을 숨어 살아야 했다. 죽은 뒤 묘 위치도 비밀에 부쳐졌고(부관참시를 피하기 위해), 심지어 그의 후손들은 엄흥도의 후손임을 숨긴 채 숨어 살아야 했다. 그 세월이 무려 200년이었다.
단종의 죽음이 있고 241년 뒤 1698년(숙종 24). 비로소 단종을 비롯한 사육신, 엄흥도 등이 공식적으로 신원복관(伸冤復官) 됐다. 이후 영조 때는 엄흥도에게 충신 정려와 함께 공조 참판 증직이 내려졌으며, 순조 때는 공조 판서에 증직됐다. 고종 때는 시호 ‘충의(忠毅)’가 내려졌으며 국불천위(國不遷位)를 인정받았다. 이처럼 엄흥도는 사후 무려 200여 년이 지나서야 대역죄인에서 임금에 대한 충절을 지킨 충신이 됐다. 바로 이것이 지금의 이상한 상황을 만든 결정적 원인이었다.
한 인물이 충신으로 인정받고 충신 정려가 내려지면 조정으로부터 ‘복호(復戶)·증직’ 등 여러 은전(恩典)이 내려진다. 당사자는 부·조·조부 3대에 걸쳐 벼슬이 더해지고, 후손들은 세금·부역·군역 등이 면제됐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특혜다. 단종 사후 200여 년 세월 동안 전국 곳곳으로 흩어져 쥐 죽은 듯 숨어 살아야 했던 엄흥도의 후손들. 그중 엄흥도와의 계대(繼代)가 어느 정도 확인된 ‘영월·청주·울산·군위’ 문중 등은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자신들의 마을에 충의공 엄흥도의 묘가 있다는 주장은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것이었다.
영화는 영월에서 끝났지만 이야기는 대구·군위로 이어진다, 엄흥도 묘소
‘영화는 영월에서 끝났지만 이야기는 대구·군위로 이어진다’. 이번 대구시티투어 특별기획코스 캐치프레이즈다. 유림인 필자는 ‘문중’ 문제만큼은 섣불리 시시비비를 따지면 안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래도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왕사남’ 대구시티투어 특별코스를 기획하고 진행하는 입장에서는 적절한 선에서 필자의 생각을 밝힐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왕사남’ 이후 엄흥도 묘 관련 해당 지역들은 방송·지면·유투브 등을 통해 연일 자신들의 주장을 내놓고 있다. 상황이 이러한데 대구·군위인들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현재까지 전해지는 각종 문헌·구전 자료 등을 종합한 군위 문중 주장을 보면, 단종 시신 수습 후 엄흥도의 행적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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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흥도는 (세)아들과 정사종 등과 함께 단종의 시신을 수습해 자신들의 선영인 동을지산에 장사를 치렀다. 이후 멸족을 피하기 위해 엄흥도의 장남 엄호현은 문경으로, 3남 엄성현은 강원도 안변으로, 2남 엄광순은 엄흥도와 함께 지금의 군위군 산성면 화본2리 신남촌에 은거했다. 군위로 내려올 때 공주 동학사에 들러 김시습과 함께 단종의 초혼제(招魂祭)를 지냈다. 군위 화본2리 신남촌 분토골에서 10여 년을 보내고, 1474년 2월 26일 향년 71세로 졸했다. 신남촌 조림산 서쪽 ‘소라게’ 혈(穴)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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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인물을 다룰 때 ‘생졸년’ 확인은 매우 중요하다. 오랜 세월 영월엄씨대동보에는 엄흥도의 생졸년이 등재되지 않았다. 그런데 군위 문중에서 발간한 충의공실기, 충의공행장, 영월엄씨파보 등에서 “1404년생, 1474년 2월 26일 졸”이란 기록이 확인됐다. 이후 간행된 영월엄씨대동보(1979)에는 엄흥도의 생졸 연도와 함께 기존 영월 외 군위군에도 엄흥도의 묘가 있다는 내용이 실렸다.
영월을 그리워하는 정자, 금양리 ‘망월정’
엄흥도 묘가 있는 산성면 화본2리 신남촌에서 동쪽으로 조림산(647m) 진당재(토끼길)를 넘으면, 의흥면 금양2리 검동골(劍洞·儉洞)이 있다. 금양2리는 300여 년 전 화본리에 살던 검와(儉窩) 엄세기(嚴世起)가 이거해 정착한 영월 엄씨 집성촌이다. 이 마을 서쪽 끝자락에 ‘망월정(望越亭)’이 있다. 망월정은 금양리 영월 엄씨 입향조를 기리는 재실이 아닌, 영월 엄씨 충의공계 파조인 ‘엄흥도’를 기리는 재실이다. 재실 이름 ‘망월’은 엄흥도의 고향이자 영월 엄씨들의 고향인 ‘영월을 그리워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130년 전에 창건된 망월정은 현재 보존 상태가 매우 불량하다. 담장도 대부분 허물어졌고, 대문도 문짝 하나가 떨어져 나갔으며, 본채 상태는 더욱 심각하다. 마치 밤새 도깨비들이 한바탕 놀다 간 듯 죄다 엉망진창이다. 정말이지 안타깝기 그지없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