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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철부터 많은 비가 내리고 요새도 때에 맞지 않게, 자연에 변고가 발생한 듯 대우大雨가 작렬하는 바람에 일행은 강변에 이르기까지 비바람을 뚫어야 했다.
선착장에 도착한 조영과 무태후 일행은 싯누런 강물을 바라보고 대경실색했다. 이건 강이 아니라 바다였기 때문이다. 바람까지 세차게 불어 물결도 마치 바다와 같았다.
인마와 짐을 모두 실은 후, 거대한 나룻배가 바야흐로 도도한 황하의 물결을 가르고 때 이른 북서풍을 헤치며 힘겹게 나아가기 시작한다. 바람을 교묘히 이용해 돛을 좌우로 움직이는 사공의 손길이 노련했지만 선척의 속도는 매우 더디어, 배가 앞으로 나아가는지 제자리에 서 있는지 모를 정도였다.
갑판에 나와 찬바람을 맞으며 조영은 불안한 표정으로 사공들의 거동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은 배를 띄우기가 몹시 곤란한 날씨인 것 같은데, 아무래도 우리가 무리하게 출발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군.”
눈을 들어 멀리 탕탕한 강물을 휘둘러보니 배 그림자는 별로 보이지 않았다. 조영의 중얼거림을 후속해서, 뒤에서 노를 젓는 사공들의 노랫소리가 그의 귀에 파고들 때다.
순간, 조영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사공들이 한어가 아닌 고려어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노래를.
아리하 푸른 물은 저리도 서러워서
천만년 쉼 없이 울어 울어 흐르나
백의민족 가슴마다 고인 눈물이
못 견뎌 터져 나와 강수가 되었네
‘그 옛날 다물 임금의 황후 매아리가 지었다는 고려인들의 노래를 어찌 저토록 구성지게 부르고 있는가?’
조영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그들에게 다가가 한어로 물었다.
“이보시오, 아저씨들. 혹시 고려인이시오?”
사공이 조영을 빤히 쳐다보다가 아래 위를 훑어보더니, 조영이 귀족처럼 보였는지라, 좀 공손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렇소. 공자는 뉘신지요?”
“저도 원래는 고려 사람입니다.”
“하지만 신수를 보니 뻔지르르하게 빠진 게 당나라 고관대작의 자제 같구려.”
“그렇게 보였다면 죄송합니다.”
조영은 대답한 후 그 중 나이가 좀 젊어 보이는 사람에게 물었다.
“아저씨는 어떻게 여기까지 와서 사공노릇을 하고 있습니까?”
“여러 해 전 나라가 망하고 이리로 끌려와 아직까지 종노릇하며 입에 풀칠한 지가 어언 십 수 년이 되었다오.”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후 탄식을 쏟아놓았다.
“중국 각지로 끌려온 우리 고려백성들은 당나라 놈들의 등쌀에 하루하루 지옥 같은 삶을 살고 있소. 수년 전 보장태왕께서 머나먼 땅에서 붕어하시고 우린 나라를 찾을 가망이 없는 것 같아 이렇게 강물 위로 한스런 서러움을 토하고 있다오.”
“아니, 아저씨들은 듣지 못하셨습니까? 저 동북쪽 홀한하 가에서 고중상 장군께서 후고구려를 여셨다는 사실을.”
“어찌 듣지 못했겠소?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가는데. 하지만 그의 장자 놈이 무 태후의 치마폭에 싸여 놀고 있다는구먼. 고중상의 부친 고승 대인은 이 땅의 고려백성을 아예 팔아먹었는지, 두문불출하고 계시고. 이래가지고서야 어찌 나라꼴이 제대로 갖추어지겠소? 고승, 고중상, 고조영 삼대가 모두 당나라 아녀자에게 빌빌거리며 칭신稱臣하고 있다니, 부끄러워 하늘을 보지 못하겠소.”
조영은 속으로 소스라치게 놀랐다. 한편으로는 부끄러웠다.
“아저씨는 후고구려 임금 고중상 일가를 어찌 그리 잘 알고 계십니까?”
그가 다시 한 번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대답했다.
“공자가 고려 사람이라고 하니, 내 안심하고 하는 말이오. 우리도 실은 고려 황족 종실이오.”
“그게 사실입니까?”
조영이 놀란 목소리로 묻자 그게 입에 손가락을 댔다.
“쉿! 목소리 좀 낮추게.”
“그렇다면 아저씨들이라도 나서서 세를 규합해 잃어버린 고토를 다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공이 조영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말했다.
“자네 신원부터 밝혀주겠나?”
“죄송합니다. 저는 고려의 일개 평민에 불과합니다. 지금은 큰 집에 들어가 종노릇하며 호의호식하고 있어서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가 말한 큰집이란 당나라 황궁을 의미했다.
“자네 이름이 무언가?”
“조영이라 합니다. 성은 대大 가이고.”
“대조영? 고조영과 성이 다른 동명이인이로구먼. 그리고 대가는 처음 들어보는 성씨인데?”
“저는 어릴 적부터 부친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자라났습니다. 모친의 성은 대하 씨인데, 앞 글자를 따서 제 성으로 삼았습니다.”
“자네 집안도 참 복잡한가 보군. 근데 대하씨는 거란 왕족의 성이 아닌가?”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어머니가 거란 왕족의 종친이라면 자네도 좀 내력이 있는 인물인 것 같은데?”
그 때다. 뒤에서 은방울을 굴리는 듯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맞아요. 저 남자는 좀 내력이 있는 사람이에요.”
조영과 사공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다보니, 보름달처럼 환하게 생긴 한 아름다운 아가씨가 귀티 나는 옷을 입고, 얼굴에 웃음을 가득 담은 채 이쪽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아니, 어떻게?”
“호호호호호! 내가 어떻게 이 배에 타게 되었느냐는 뜻이에요?”
그녀가 간드러지게 웃으며 물었다. 조영이 대답을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을 때, 그녀가 말을 이었다.
“이 추운 날 도대체 무슨 바람이 불고 어떤 굿판이 요란하게 벌어졌기에, 너도 나도 동으로, 동으로 달려가고 있는지, 하도 궁금해서 나도 부랴부랴 쫓아왔습니다.”
조영은 그녀가 행여나 자신의 신분을 밝힐까 두려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었다. 그 때 여인이 대담하게 조영에게 다가와 그의 팔을 붙잡았다.
“이 남자는 제 남편이에요.”
한 마디 말을 남기고 그녀는 다짜고짜 조영을 이끌고 현장을 떠나가는 것이었다. 조영은 잠깐 뒤를 돌아다보다가 아무 말도 못하고 그녀의 손에 이끌려 그들 곁을 떠나야 했다. 고려 황가 종실의 이런 열혈지사들을 만난 것이, 하늘이 주신 행운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여인은 조영의 팔을 붙잡고 마치 다정한 부부처럼 그의 어깨에 머리를 다소곳이 기댄 채 조영을 어디론가 끌고 들어갔다. 조영이 연신 뒤를 돌아다보며 엉겁결에 그녀에게 이끌려 간 곳은, 여러 사람이 모여 앉아있는 작은 선실이었다.
두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실내 모든 사람의 눈이 일제히 그들에게 쏠렸다. 조영은 고려 황족들이라는 사공들 생각에 골똘해 있다가 객실에 있는 사람들 면면을 보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그는 자신의 팔이 여인에게 붙잡혀 있는 게 새삼 거북스러워 팔을 빼려고 했다. 하지만 여인이 그의 팔을 굳게 붙잡은 채 놓아주지 않으며 말했다.
“글쎄, 이 사람이 배의 난간에 서서 물에 빠지려고 하는 거예요. 혼비백산한 제가 이 사람을 붙잡아 왔어요.”
그녀의 태연한 거짓말에 기가 막힌 조영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소곤거렸다.
“당신, 제가 죽을 목숨을 살려 주었으니까,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죠? 그 은혜를 갚아야 되는 거예요. 당신은 평생 나를 모시고 살아야 해요.”
공주와 결혼하는 부마도위는 공주를 “모시고” 살아야 했다. 부부지간일지라도, 그것이 황족에 대한 예의였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조영은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다가 방안의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이루하와 여미아의 놀란 얼굴이 맨 먼저 그의 시야에 잡혔다. 이루하의 눈에서 분노의 기색이 숯불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가 막 입을 열어 변명의 말을 하려고 할 때다. 바깥에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바람이 거세니, 모두들 요동하지 말고 어서 방안으로 들어가십시오. 그리고 제자리에 꼭 앉아계시기 바랍니다.”
초겨울에 막 진입해 날씨가 제법 추운데다가 북서풍이 세차게 몰아치고 있었으므로 배는 강바람에 요동했다. 선실 바깥에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뱃사공들은 선실 속의 사람들을 안정시키고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문을 밖에서 잠가 버렸다.
밖에서 문이 잠기는 것 같자, 방안에 있던 조영 일행의 얼굴이 모두 굳어졌다. 그 때 어디선가 쿵쿵거리는 소리가 잠시 울려오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모두 불안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조영은 맘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를 썼으나 좀처럼 평정을 얻기 어려웠다.
그가 옆을 보니, 자기를 선실로 데려온 태평공주 이영월이 놀란 눈으로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이루하에게 눈길을 돌리니 그녀 역시 그를 바라보고 있다. 이루하 곁에 앉은 여미아는 단정히 앉아 눈을 감고 있었는데, 얼굴이 몹시 평온해 보였다. 실내의 대기에는 불안이 흐른다. 밖에서는 한풍이 연달아 사납게 몰아쳤다.
“이런, 배가 몹시 위험한가 보군요.”
한참 후 이렇게 중얼거리며 일어선 사람은 사비우였다.
“이상한데요? 그렇게 심한 날씨는 아닌데?”
그는 실내의 아주 작은 창문을 열어 젖혀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밖을 살펴보다가 소리를 질렀다.
“아니, 이런! 배가 가라앉고 있소!”
“그게 참말이오?”
신창 이해고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일어서서 사비우 쪽으로 가서 창문 밖을 내다보다가 역시 큰 소리로 사비우에게 물었다.
“어째서 소리 없이 배가 침몰하고 있는 거요?”
사비우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때 화들짝 놀라 소리치는 여인이 있었다.
“그게 사실이란 말이냐!?”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실내의 모든 사람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무 태후였다. 조영이 그녀의 표정을 바라보니, 평소의 거드름피우던 모습은 간데없고 겁에 질려 있다.
“뭘 우물쭈물하는 거요? 지금 즉시 밖으로 나가야 하오. 그렇지 않으면 선실 안에서 모두 죽게 되오!”
이번에 소리를 지른 이는 신창 이해고였다. 그는 출입문 쪽으로 다가가더니 발을 들어 문을 냅다 찼다. 하지만 잠금장치와 문이 얼마나 튼튼한지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해고는 몸을 뒤로 빼서 앞으로 달리며 양발을 위로 띄워 한데 모은 다음 체중을 실어 문을 거세게 내질렀다.
“쾅!”
굉음이 일었으나 문은 열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가 뒤를 돌아보며 소리를 질렀다.
“뭣들 하는 거요? 어서 와서 문을 여시오!”
그 때 방안은 여기저기 비명과 괴성이 울리고 울음소리가 커지며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차라리 창문으로 탈출하는 것이 낫겠소.”
사비우가 말했다.
“제기랄! 말만 하지 말고 어서 빨리 어떤 문이든 부수어 버리시오!”
이해고의 외침에 사비우는 휴대하고 다니던 작은 철퇴를 꺼내 창문을 사정없이 두들겼다. 하지만 창문 역시 얼마나 견고한지 철퇴를 비웃는 것 같았다. 화가 난 사비우는 욕설을 퍼부으며 연신 창문을 내리 패었다.
마침내 우지끈! 퍽! 소리가 나며 창문이 밖으로 떨어져나갔다. 창문 밖에는 격자모양의 쇠 그물이 부착되어 있었는데 쇠 그물도 사비우의 철퇴에 창문과 함께 밖으로 떨어져나갔다.
창문 구멍은 얼마나 작은지 사람 몸 하나가 겨우 빠져나갈 만한 크기였다. 출입문은 아직 부서지지 않고 있었다.
“어서 속히 마마부터 밖으로 모시게!”
“대사께서 밖으로 먼저 나가서 마마의 몸을 부축해 주시오!”
조영이 차분하고도 힘찬 소리로 말했다. 조영의 말에 회의가 성큼 창문 앞으로 다가가 몸을 올리며 머리부터 쉽게 빠져나갔다.
그가 나가서 대기하고 있을 때 태평공주 이영월과 그녀의 시녀들이 무 태후를 안고 머리부터 창문 밖으로 밀어내었다. 참으로 볼썽사나운 광경이었으나 어쩌랴! 밖에 있던 회의가 그녀의 몸을 안아 갑판 위에 안전하게 내려놓았다.
“이 형은 잠깐 이리 나오시오!”
다른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창문으로 하나씩 빠져 나가는 사이, 조영은 출입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이해고에게 말했다. 이해고가 뒤로 물러나자 조영은 벼락같은 기합을 울리며 방금 전 이해고가 시도했던 것처럼 몸을 공중으로 날리며 양발을 모아 문을 들이찼다.
“쾅! 쾅! 쾅!”
그가 세 번이나 같은 동작으로 문을 가격하자 마침내 뒤에서 잠금장치가 부서지는지 우지끈! 소리가 들렸다. 조영은 마지막으로 젖 먹던 힘까지 끌어 모아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콰당!” 육중한 출입문이 마침내 뒤로 넘어졌다. 아직 창문으로 빠져나가지 못한 사람들은 아우성을 치며 밖으로 내달렸다.
조영이 정신을 가다듬고 실내를 훑어보니 여미아는 이 요란한 사태를 알지 못하는 듯, 아직 자리에 앉아서 눈을 감고 있었는데, 그녀의 얼굴이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곁에 있던 이루하가 조영과 눈이 마주치자 여미아에게 명했다.
“여미아! 속히 일어나라!”
이 때 이미 실내는 사람들이 모두 빠져 나가고 세 사람만 남아 있었다. 조영은 이루하와 여미아를 앞세우고 방문 밖으로 나섰다.
밖으로 나와 보니 배는 벌써, 수면 위로 뜬 부분이 삼분지 이 정도 가라앉았고, 사람들은 갑판에 나와 울부짖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서로 껴안고 울고 있는가 하면, 혹자들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하늘로 향해 든 채 소리 질러 빌고 있었다.
“하나님! 살려주시오! 옥황상제님! 살려주시오!”
배가 가라앉으며 한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물이 곧 뱃전 위로 넘어 들어올 것 같았다. 배가 침몰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조영이 사방을 휘둘러보니 배는 아직 강물 한 복판에 있었다. 살을 에는 듯한 찬바람은 매섭게 몰아친다.
\맞은편을 보니, 한 척의 거루에 사람들 십여 명이 타고서 쏜살같이 나룻배로부터 멀어져가고 있었다.
누군가가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이 나쁜 놈들아, 돌아오지 못할까!”
그들은 다름 아닌 나룻배의 선원들이었다. 조영이 짐작해보니, 배의 침몰은 선원들이 파놓은 함정인 것 같았다. 선원들은 의도적으로 배를 침몰시키고 거루에 올라 줄행랑을 치고 있었다.
(다음회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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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2024. 4. 26.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