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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와 엘리사 1
사명을 다하기 가지는 죽지 않는다. (왕상19;15-21)
2015년 5월 17일 스승의 주간
강하고 부유한 나라인 호주 출신으로 고국에서 대학 교육까지 마치고 목사가 된 후, 식인종들이 사는 남태평양의(비누아트) 섬에서 선교하면서도 살아남은 한 이국 선교사가 있다. 그는 그리 잘 알려지지도 않은 작고 가난한 대한민국에까지 와서 한센씨 병(나병) 환자들의 병을 고쳐주고 복음을 전하면서 부산과 깊은 인연을 맺었다.
그가 제임스 노블 맥켄지(James Noble Mackenzie․(1865~1956․)일신기독병원의 대외적 공식 표기를 따름) 한국식으로 매견시 목사다. 그는 호주에서 자라 목사가 된 뒤 뉴 헤브리이즈 열도의 델 에스피리투 산토(Tierra Del Espiritu Santo) 라고 하는, 식인종이 살고 있는 남태평양의 섬(비누아트)에 상륙하여 15년간 선교활동을 했다.
그곳에서 행한 그의 선교활동이 얼마나 힘겨운 것이었는지는 산토 섬에서 쓴 그의 일기 제목을 보면 알 수 있다.
-노고구(Nogogu)에서 야만적인 사람들이 교회 공격
-주일 아침 예배시간에 교인들에 대한 괴한들의 소총 공격
-건장한 젊은이들이 부상자 구제 사업을 벌임
-15년간 정열적인 선교사업 후 아름답고 용감했던 아내가 지독한 열병에 걸려 죽음
-완전히 실망한 '십자군 선교단'의 호주 귀환
그는 고국으로 돌아와서 "한 번 더 주여! 나를 고난과 파멸의 길로 이끌어 주옵소서. 주여! 한번 더!"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이방나라 섬에서 선교하다가 부인을 잃고 고난을 경험하던 맥킨지 선교사가 '호주선교회'의 일원으로서 1910년 한국의 남단 최대 도시인 부산에 도착했다. 곧이어 그는 5년 앞서 온 매리켈리와 1912년 결혼하여 부산에서 두 딸을 낳았다. 그 당시 한센씨 병은 남부지방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는 부산 용호동에 세워진 '나환자의 집' 등지를 돌며 치료를 시작했다.
그가 한국에 들어와서 4녀1남을 낳는다. 아들을 결국 또 열병으로 잃어버린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나병환자를 도우며 복음을 전하는 목사로 살다가 귀국하여 생을 마감한다.
일제시대였던 당시 일본 왕실은 조선총독부의 추천에 따라 1년에 100엔씩을 지원했고, 일왕의 어머니가 500엔의 돈을 '나환자의 집'에 기부하기도 했다. 한센병 환자 치료 사업을 도운 공로로 맥켄지 선교사는 파란색 리본의 훈장까지 수여받았다.
1938년 은퇴해 귀국한 맥켄지 목사는 1956년 호주에서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약속한 것처럼 부산에서 태어나 호주에서 교육을 받은 두 딸을 한국에 보냈다. 큰 딸인 의사 헬렌 맥켄지(한국명 매혜란)와 동생이자 간호사인 캐서린 맥켄지(한국명 매혜영)는 그의 부친이 세상을 떠나기 4년 전인 1953년 9월 부모가 일했던 부산으로 건너와 동구 좌천동에 '일신부인병원'을 설립했다. 이들은 6․25사변이 일어나 우리 민족이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당하고 있을 때 헌신적인 의료사업을 펼쳤다.
이 병원은 국내 굴지 산부인과 병원으로 자리 잡아 1982년 11월 일신기독병원으로 승격했으며 지금은 시설 확장으로 320병상의 종합병원이 되었다. 1999년에는 부산 북구 화명동에 '화명 일신기독병원 분원'을 개설하여 운영하고 있다. 매혜란은 의사로 그의 동생 혜영은 간호사로 평생을 헌신하다가 1972년 병원을 한국 측에 환원하고 호주로 귀국했다.
이방 나라에서 섬에서 선교하던 맥킨지 선교사가 호주에서 한국으로 들어온 배경이 있다. 그를 이 당으로 선교하게 한 선교사는 바로 데이비스 선교사다.
## 조셉 헨리 데이비스는 1856년 8월 22일 뉴질랜드에서 9남 3녀 중 차남으로 출생하였고, 그가 4살 때 부모를 따라 호주 멜버른으로 이주하였다. 대학 재학 중이던 1876년 곧 그의 나이 20세 때 직접적으로 복음을 위해 일할 목적으로 호주 씨 엠 에스(Church Missionary Society)소속 인도 선교사로 자원하였다. 이것은 선교사로서 그의 생애의 시작이었다.
중국에서 선교하던 월푸 (J.R.Wolfe) 선교사가 부산을 방문하여 부산의 실정을 보고 작성한 부산 여행기와 조선에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편지를 멜버른에 보냈고 이를 선교잡지에 본 데이비스 선교사는 조선선교에 마음을 품게 되었다.
데이비스는 누이인 메리 데이비스 선교사와 함께 1889년8월22일 호주 멜버른 항을 출발하여 1889년10월2일 부산에 도착을 하였다. 처음 데이비스에게 보인 부산은 자신이 사역을 하여야 할 곳이라고 믿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사역을 시작하기 전 선교사에게 현지에서 먼저 필요한 것이기에 조선어를 배우기 위하여 3일간 배를 타고 서해안을 거쳐 제물포에 도착하여 서울로 들어가서 5개월 동안 조선어를 공부하니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되어 처음에는 군산으로 생각하였으나 얼마 후 처음 조선 땅을 밟았던 부산으로 자신의 사역지를 정하여 발걸음을 떼기 시작하였다.
데이비스 선교사는 성경, 전도지, 소책자, 의약품을 준비하여 누이는 서울에 남기고 어학선생 및 비서와 함께 부산을 향하여 출발하였으며 수원, 천안, 공주, 남원, 하동, 함안을 거치며 조선의 사람들을 만나 전도지를 나누어주며 복음을 전파하는 전도활동을 하는 중 긴 거리의 도보로 인한 불편하고 긴 여정 끝에 1890년4월4일에 부산에 도착을 하였으나 부산에 도착하기 전 5일 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천연두와 폐렴에 걸려 쓰러지게 되었다.
이를 안 캐나다인 게일 선교사 (J.S.Gale)는 즉시 그가 머문 숙소로 찾아가 자신의 집으로 옮겨 보살피고 일본인 의사인 기타무라(北村)에게 급히 연락 오게 하여 진료하고 바로 병원으로 옮겼으나 그 다음날인 4월5일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는 하나님의 품에 안기게 되었으며 육신은 부산 영선동 복병산 기슭의 묘지에 묻히게 되고 말았다. 그의 묘비에는 “사는 것도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To Live Christ, To Die Gain) 라고 적혔다. 하지만 그간의 관리 부실로 인하여 묘와 비석은 찾지 못하고 아쉽게 사라졌다.
조선에 대한 선교의 꿈을 품고 준비를 하였으나 아무것도 펼쳐 보지 못한 젊은 선교사,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를 그대로 두고 보지 않으셨다. 데이비드의 비보는 그를 파송하였던 호주 멜버른에 있는 호주 빅토리아 선교회에 전해지게 되었으며 많은 이들이 데이비스의 고귀한 순교를 헛되게 하지 않으려 하였다.
데이비스의 순교로 인하여 호주의 조선 그곳도 부산 지역에 대한 선교활동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지고 많은 지원이 시작되었으며 이에 따라 호주의 많은 선교사들이 파송되게 되었다.
데이비스 선교사의 순교의 소식을 들은 멕켄지 선교사도 한국에 들어왔던 선교사 중에 한명이었던 것이다.
바로 데이비스 선교사가 멕켄지 선교사의 스승이자 선배가 된 것이다.
그후 캐나다 장로교회는 데이비스 선교사 소식을 듣고 100명의 선교사를 파견하여 이 땅의 어둠을 파괴하고 빛을 비추는 복음을 전하게 된 결과를 낳게 된다.
이유 없이 스승이 되어버린 선교사 데이비스로 인하여 이 땅에 전해진 복음은, 수많은 그리스도의 일꾼을 낳게 되고 이제 우리 한국은 세계2위라는 해외 선교사 파견국가 되었다. 서로 알지도 못하던 선교사들은 스승과 제자가 되었고 우리는 데이비스의 제자가 된 것이다.
로뎀나무 아래에서 죽지 못해 너무 지쳐 기진하여 간신히 잠을 자던 길르앗 디셉사람 엘리야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온다. 그곳은 하나님이 임재 하시던 호렙 산이었다. 모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그 산에서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가 하나님을 만나고 음성을 듣는다. 전날에 죽는 줄 알았다. 하나님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제사장의 집안도 아니요, 그렇다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사는 집안도 아닌데도 하나님이 극심한 가뭄가운데에도 살려주신 은혜에 늘 감격하면서 선지자의 사명을 완수하고 있었다.
수 년 동안 가뭄에 지쳐가는 이스라엘을 바알의 제사장들과 싸워 이제 가뭄이 그쳐 비를 내리게 하였는데, 아직도 나를 죽이려는 사람들 때문에 도망쳐 다니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이제 나이 들어 행동도 굼뜬 선지자는 정말 하소연밖에 나오지 못해서 하나님께 빌었다. 차라리 죽여 달라고 말이다.
그리고 지쳐 쓰러져 자고 있으면서 죽은 줄 알고 누군가 조용히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떳다. 그곳이 하나님과 함께 사는 천국인 줄 알고 말이다.
엘리야야! 엘리야야! 라고 정답고 부드럽게 부르시는 그 누군가는 바로 밤새 소원하여 죽기를 바라고 만나기를 바랐던 그 하나님이다. 그 하나님의 일을 맡은 천사가 부드럽게 엘리야를 흔들어 깨운다.
일어나 먹으라 하신다. 이러나보니 엘리야의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의 물이 있다.
간신히 일어나 먹고 마시었으나 얼마나 지친 몸인지 가눌 길이 없다. 또 음성이 들리기를 엘리야야! 일어나라 그리고 먹으라 하면서 네가 아직 할 일이 많이 있단다 라고 그 천사는 엘리야를 일으켜 세운다. 그 음성에 선지자는 간신히 일어나 먹고 마신다.
얼마나 지친 심신인지 사십일 동안 간신히 몸을 추스린 엘리야에게 이제 하나님이 말씀 하신다.
이제 몸도 나았는데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아직 할 일이 많은데 늘어져 있느냐 라고 하신다.
어이없고 기가 막힌다. 엘리야 선지자가 하나님께 항변한다.
하나님! 네가 얼마나 하나님의 일로 인하여 얼마나 열심이었던지 하나님이 아시잖아요. 내가 그 많은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선지자와 싸워 가뭄을 그치게 하였지 않습니까? 그 악랄한 선지자들과 싸울 때에 이미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다 죽었고 이제 나만 남았는데 또 사명을 감당하라 하십니까? 라고 항변하였다.
사실 엘리야 선지자는 가뭄이 극심한 이스라엘에서 간신히 하나님의 은혜로 간신히 살아났다.
그를 죽이려는 왕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을 때 악한 왕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기에 엘리야를 죽이려 하였다. 하나님의 징계로 이스라엘은 극심한 가뭄을 겪게 되고 결국 그릿 시냇가에 숨어 까마귀가 가져다주는 음식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었다. 결국 그릿 시냇가가 다 마르자 사르밧으로 가게 하여, 거기에 있던 과부의 도움으로 간신히 연명하기도 한다.
물론 하나님은 그때마다 선지자에게 은혜를 주셔서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리기까지 하셨고 엘리야는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무시무시한 이세벨이 섬기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 일전을 벌여 가뭄을 그치게 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보였지만 악한 아합 왕과 이세벨 왕비는 회개하지 못하고 바알 선지자를 죽인 엘리야를 죽이려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 로뎀나무 아래에서 간신히 목숨만 부지하고 있다.
이런 그에게 이제 하나님의 사명이 떨어진다. 그것도 모세가 사명을 부여 받았던 호렙 산에서 말씀하신다. 네가 비록 지칠대로 지치게 사명을 감당하였지만 아직도 더 할 일이 남았다. 너는 나가서 네 앞에 서라. 내가 너에게 사명을 줄 것 이다. 지진이 날 것 같은 호렙 산에서 하나님의 불이 임하고 엘리야야 무엇하고 있느냐 라고 했을 때 엘리야는 또 항변하였다. 하나님! 내가 하나님 앞에 열심이었기에 이제 쉬려고 하는데 하나님은 나를 사명감당하라 하시는데 나는 죽고 싶지 않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이 말씀 하십니다.
거기서 오늘 본문이 시작 됩니다. 너는 돌아가라. 다마스커스로 돌아가라 하사엘을 세워 시리아의 왕으로 세우고,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세우라. 그리고 이제 하나님은 엘리야를 위하여 쉼을 허락하시려고 한다.
너는 아벨므흘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세워 기름을 붓고 너를 대신한 선지자가 되게 하라. 그가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선지자가 되리라!
아직 너는 죽어야 할 시기가 아니다. 내가 이스라엘을 위하여 칠천 명의 의인을 남길 것이다. 라고 하신 것이다.
이제 생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노 선지자는 더 이상 살 이유를 느끼지 못하고 이제 하나님을 향한 사명을 감당하였다고 생각하였을때 , 마지막이라 여길 때에도 하나님은 선지자에게 사명을 주셨다. 네 사람을 키우라. 네 2인자를 키우라.
그 사람이 바로 너를 대신하여 일으킬 것이다. 꺼져가는 이스라엘을 살리고 그 이스라엘을 하나님을 섬기는 나라로 만들 너의 2인자가 세워져야 만이 너는 사명 감당이 끝나는 것이다, 라고 하신다.
엘리야는 얼마나 지쳤는가? 할 만큼 하였다. 이제는 나이도 들었고 그 수많은 세월 모진 역경과 풍파를 견디어 냈다. 그런데 다시 그 힘든 길을 가라하시는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할 법한 일은 아닌가?
바알 선지자들을 다 죽였다고는 하나 세상은 이 로뎀나무 밑 그늘이 아니다.
서슬퍼런 아합 왕이 살아있고, 여우같이 예쁘면서도 독하고 무서운 여자 이세벨이 살아있다.
그런 그 세상에 다시 들어가라고 하신다. 차라리 이 자리에서 죽음을 맞는 것이 나은데 그 무서운 세상으로 가기는 쉽지 않은데, 그곳으로 가라 하시는 하나님이 원망스럽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엘리야는 하나님의 사람이요 선지자 였다. 그가 맡은 하나님의 사명은 끝나기 전 죽을 수 없을 것이었다. 그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호렙 산을 내려온다.
그리고 아벨무흘라에 도착하여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만나게 된다. 그 엘리사를 불러서 그는 그의 후계자로 삼고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게 한다.
엘리사!
당시 유명한 선지자요. 능력 있는 하나님의 사명자였으며 수많은 기적을 일으키며 백성을 돌보던 당대의 큰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을 키워낸 엘리야는 너무도 모세와 닮은 사람이다. 그는 호렙 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사명을 감당한 선지자였다. 모세와 엘리야는 똑같이 지금도 그들의 묘를 알 수 없으며 엘리야는 하나님께 들림을 받은 자로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특히 이들은 당대에는 요단강을 건너지 않았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요단강을 건너지 못하고 죽었으며 훗날 여호수아가 건넜고, 엘리야는 훗날 엘리사가 요단강을 건너게 된다. 엘리야의 후계자 엘리사가 건너게 되었다는 것은, 요단강 건너에는 북 이스라엘과 대립하는 하나님의 장자의 나라 유다가 있는 곳으로서, 그곳을 건너는 것의 의미는 엘리사가 양쪽 나라에서 선지자로서 사명을 감당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더욱 의미로운 일이 있다.
마17;3에서 보면 두 사람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께서 변화산으로 올라가 만났던 인물이 이 모세와 엘리야라는 것이다. 이는 그들이 천국에 있는 인물임을 말해준 사건이기도 하다.
이제 처음으로 돌아 가보자.
데이비스가 순교하였다. 그 후 호주에서 조선으로 들어와 죽음을 각오하고 선교하고자 하던 멕켄지 선교사로 인하여 부산의 일신병원과 같은 곳에서 한센씨병을 치료하는 기적 같은 선교의 역사가 일어난다.
이 참된 스승이 있었기에 그 스승의 길을 따른 제자가 있었다.
사명을 다하기까지는 죽지 않는 것이다. 아니 육체는 죽었다 할지라도 그들 스승의 뜻은 사라지지 않는다. 스승의 뜻을 이어 하나님의 사명은 이어가는 것이다.
멕켄지를 이어가는 사람이 있었다. 멕켄지가 선교하는 병원에 조수로 있었던 사람이 있었다.
그가 바로 손연준 전도사다.
“한 번 더 주여! 나를 고난과 파멸의 길로 이끌어 주옵소서. 주여! 한 번 더!” 하며 한국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며 선교했던 멕켄지 선교사님의 영향을 받은 사람, 바로 손연준 전도사였다. 그 전도사가 바로 손양원 목사님의 본명이었다. 멕켄지 선교사의 삶을 보고 깨달음을 얻은 사건은 바로 사랑의 원자탄 즉 사랑의 씨앗을 이루게 된다.
우리는 어떤 스승이어야 하는 것인가?
우리 모두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한다. 훌륭한 스승이 훌륭한 제자를 낳는다. 우리에게 사명이 있다. 사람을 키워야 하는 사명이다.
교회는 사람을 모은 곳이 아니란다. 사람을 키우는 곳이라 한단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사람을 키우는 사명을 감당하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키우는 제자를 우리는 어떻게 키워야 할 것인가?
우리는 그 사명을 감당하여야 할 것이다. 그 사명의 주인공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먼저 그 사명의 감당할 제자가 먼저 되어야 할 것이다. 그 제자의 방법을 다음에 설교할 것이다. 그 사명을 감당할 제자가 바로 하나님의 사람인 것이다. 사명이 끝나기 전 죽을 수없는 하나님의 사람이어야 한다.
스승의 주간에 누군가의 스승으로서 나는 잘 감당하고 있다는 말인가?
기도하며 묵상하는 가운데 주의 일 더욱 감당할 수 있는 주의 제자가 되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