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0 양수랑의 유럽여행기
유럽여행1
※ 영국 런던 관광
10월 29일 금요일 흐림
8시 52분 출발과 동시에 유럽 투어가 시작되었습니다.
맨 먼저 우리가 간 곳은 영국 ‘국회의사당’이 건너서 보이는 테임즈강 가였습니다. 왜 굳이 의사당 앞으로 가지 않고 의사당 건너에서 보라고 하였을까? 사진 찍기 좋도록 배려한 것이었지만 우리는 의사당 앞에서 보는 것이 더 의의가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만일 의사당 앞으로 갔더라면 빅벤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을 것을
두 번째 간 곳은 ‘타워 브릿지’였습니다.
타워 브릿지 바로 옆에는 신축한 런던 시청이 있어서 돈을 안 들이고 소변을 보기 위해서 시청 안으로 들어가서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세 번째 간 곳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이었습니다.
영국 성공회의 본부 성당이고 영국왕의 대관식을 올리기도 하였고 유명 인사들의 무덤으로 사용하고 있는 곳입니다.
네 번째 간 곳은 버킹엄 궁전이었습니다.
원래 버킹엄 공작 ‘존 셰필드’의 저택으로 세워진 것을 1761년에 조지 3세에게 양도되어 지금의 모습으로 증‧개축을 한 후 사저로 이용되다가 1837년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식 때에 궁전으로 격상되어 이후 역대 군주들이 상주하였다 합니다.
궁전의 내외 호위를 담당하는 왕실 근위병 교대식은 볼거리로 매우 유명하답니다. 오늘은 영국 국기만 있고 왕실의 깃발을 게양하지 않아서 여왕이 출타중인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다섯 번째 간 곳은 ‘하이드파크’였습니다.
공원의 북동쪽 모퉁이에 있는 대리석 아치 옆에는 가두 연설자들이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언론 자유의 중심지'로 오래 전부터 널리 알려진 '스피커스 코너'(Speakers' Corner)가 있다 합니다. 그 날도 많은 사람들이 이 공원에 와서 휴식을 취하거나 운동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여섯 번째 간 곳은 ‘트라팔가 광장’이었습니다.
영국의 영웅 ‘넬슨’제독이 트라팔가 해전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1841년에 완성된 광장입니다. 실물의 3배 크기인 560㎝의 넬슨 제독의 동상과 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영국의 국가동물인 라이온상, 분수 등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어 영국다운 분위기를 한껏 느낄 수 있었습니다. 라이온 동상은 대승을 기념하는 뜻으로 노획한 프랑스의 대포를 녹여서 만든 것으로 4면의 철판부조에는 트라팔가 해전, 나일강 해전, 덴마크·러시아·에스파냐 연합함대와의 전투기록이 담겨져 있다는데 시간이 없어서 살펴보지 못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대영 박물관’(大英博物館, British Museum)으로 들어갔습니다.
이 박물관의 1,300만 여점의 소장품 중에서는 제국주의 시대에 약탈한 문화재도 적지 않다 합니다.
1753년에 설립되었으나 처음에는 ‘한스 슬론’ 경의 개인 수집품을 전시하였으나, 1759년 1월 15일부터 일반에게 공개하였답니다. 원래 몬태규 저택에 전시관을 지어 2세기 반에 걸친 확장으로 현재에 이르렀다 합니다.
3대 인기전시물은 ‘이집트 미이라’, 엘진 대리석, 5천년의 역사를 느낄 수 있는 ‘로제타 스톤’이며, 앗시리아 라마스 상, 람세스 2세, 파르테논 신전, 네레이트 제전, 아메노피스 3세, 목각의 관 등이 있고, 한국과 관련된 소장품도 250여개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합니다.
다음에 있는 영문 파일을 열어서 실행시키면 이미지쇼를 볼 수 있습니다. 보시다가 어느 장면을 자세히 보고싶으시면 자판의 (긴)'스페이스바'를 누르면 화면이 정지됩니다. 스페이스바를 다시 누르면 화면이 다시 이어집니다. 이 파일을 복사하여 자신의 컴퓨터에 저장할 수도 있습니다.
Europe tour1 London(England)2.exe
유럽여행2
벨기에와 네넬란드
10월 30일(토)
06시쯤 벨기에 브뤼셀의 교외 머큐어 호텔에서 잠이 깨어 창밖을 보니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옷을 따뜻이 입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호텔에서 아침을 먹고 우산을 준비하여 전용버스에 올랐습니다. 오늘부터 우리의 발이 될 전용버스 기사는 이탈리아 출신의 젊은이였습니다.
7시 30분에 출발한 전용버스는 얼마 후 브뤼셀의 중심부로 들어갔습니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언덕위의 고딕 건축 ‘생 미셀 대성당’(현 국왕이 대관식을 올린 곳) 앞에서 멈춘 버스에서 내려 아직도 어두운 아침 길을 찾아 간 곳은 벨기에의 수도이며, 또한 유럽연합(EU)의 본부가 위치한 도시로, 벨기에의 한복판에 위치해 정치, 경제, 문화, 교통의 중심지인 ‘그랑 플라스’였습니다.
그랑 플라스(Grand Place)는 동서로 110m, 남북으로 70m 정도의 중세 유럽풍 광장으로 세계에서 가장 잘 조화된 광장중 하나이며, 이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상인들의 ‘길드 하우스’는 15세기 고딕, 로마네스크, 르네상스 건축 양식 들이며 ‘시청사’(높이 69m), ‘브라반트공작관’, ‘왕의 집’ 등이 있었습니다. 이곳을 빅토르 유고가 "세계에서 제일 아름다운 광장"이라 말했답니다.
광장의 남쪽 오줌싸개 동상으로 내려가는 입구에 있는 건물 벽에 중세 브뤼셀 해방을 위해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하다가 체포된 후 무자비하게 혀가 뽑혀 죽었다는 순교자 '에베라르드 세르클라에스' 청동상이 누운 자세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청동상을 어루만지면 소원이 성취된다는 속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만져서 반질반질 하였습니다.
광장의 남쪽에 있는 이 청동상 앞으로 난 길을 약 400미터쯤 내려가면 유명한 ‘오줌싸개 동상’(Manneken Pis)이 있었습니다. 브뤼셀의 상징인 동상은 높이가 약 60㎝로 현장에서 직접 보니 상상했던 크기보다 너무 작아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우산을 받쳐 들고 관광을 마친 우리는 다시 전용버스에 올라 벨기에 농촌의 한 가운데를 뚫고 난 고속도로를 한 시간 정도 달려 ‘안트와프’로 갔습니다. ‘스헬데강’을 건너 시내 한 가운데 자리 잡은 대성당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성당은 로마 카톨릭을 대표하는 성당이자 ‘앤트베르펜주교’가 있는 ‘성모대성당’(일명 안트와프 노트르담 대성당)이며, 벨기에가 자랑하는 화가 루벤스의 걸작 4점 중의 하나인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라는 그림이 있었습니다. 또 제단에는 루벤스가 그렸다는 ‘성모의 승천’이라는 그림도 있었습니다.
그 대성당의 옆을 지나 성당 뒤로 난 길을 조금 더 갔더니 천재화가 루벤스가 살았던 집이 있고 집 앞에는 그의 동상이 서 있었습니다. 시간에 쫒기고 돈을 받고 있어서 집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우리는 근방의 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다시 전용버스에 올라 3시간이나 고속도로를 달려갔습니다. 아름다운 네델란드의 농촌을 지나는 동안 하늘은 구름을 거두고 빛나는 태양에서 대지에 골고루 빛을 뿌려주고 있었습니다. 도착한 곳은 ‘잔세스칸스’라는 풍차마을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가을하늘과 같은 파란 코발트 빛 하늘에서 비춰주는 조명을 받은 이 마을은 동화 속에 나오는 마을처럼 아름다웠습니다. 눈이 시릴 만큼 푸른 초원에는 하얀 양들이 풀을 뜯고 있었습니다.
옛날에는 바람으로 풍차를 돌려 얻은 동력으로 방앗간이나 제재소 등을 운영하였는데 이제는 편리한 전기에 밀려 거의 다 없어지고 관광용으로 이 마을만 풍차가 남아 있는데 나막신과 치즈를 관광 상품으로 만들어 팔고 있었습니다. 이 마을의 빼어난 경치에 홀리고 말았습니다.
또 한 시간가량을 달려 해수면보다 낮은 지리적 불리함을 당찬 정신력으로 극복한 네델란드의 수도 암스텔담에 도착하였습니다.
상업과 금융의 중심지로 금속 ․ 조선 ․ 차량 ․ 전기 ․ 섬유, 다이아몬드의 연마 공업 등이 발달하였는데, 14세기 이후 해운과 상업 도시로서 번영을 누렸고, 17세기에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설립되어 세계 최대의 상업도시로 성장하였다 합니다.
시내에 들어서니 인공운하를 왕래하는 수상택시가 보이고 회전그네가 끊임없이 돌고 있는 것도 보였습니다. 전용버스가 정차할 만한 곳을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녔습니다. 도심에서는 대형버스가 들어와 정차할 수 없는 교통법규 때문이었습니다. 어렵사리 암스텔담 광장 근처에서 내려 광장으로 갔을 때는 이미 날씨가 어둑어둑해져서 시내 관광을 하기 어려운 지경이었습니다. 간단히 시내 관광을 마치고 근처에 있는 한국인이 경영하는 식당으로 갔습니다. 드디어 우리의 입맛에 맞고 국물이 있는 육개장으로 속을 가라앉혔습니다. 다시 잠 잘 곳을 찾아 버스는 한 시간을 달렸고 ‘칼튼호델’이란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오늘의 긴 하루가 끝이 났습니다.
다음 영문 파일은 2일째 이미지쇼 입니다.
Europe tour2(Belgium&Netherland)2.exe
유럽여행3
독일(쾰른과 프랑크푸르트)
10월 31일(日) 아침 8시 정각
우리 일행은 네델란드의 암스텔담을 출발하여 고속도로를 달렸습니다. 유럽은 섬머 타임을 실시하다가 10월 마지막 일요일에 섬머 타임을 해제하는데 오늘이 바로 그 날이라 우리가 여행하는 데는 도움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전용버스는 네델란드를 벗어나 국경을 언제 지났는지 알 수 없는 사이에 독일의 농촌지역을 달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일요일이어서 농부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3시간 반을 달려 11시 반쯤 우리는 오늘의 목적지 쾰른에 도착하였습니다.
쾰른 대성당
고딕 건축의 화려함과 웅장함을 잘 보여주는 쾰른 대성당. 외부의 아름다움은 물론이거니와 그 규모 또한 웅장한 건축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남북 144m, 동서 86m, 높이 157.38m에 이르는 이 거대한 건축물은 멀리서 보면 마치 견고하게 쌓은 성을 연상케 하였습니다.
공사기간만 무려 632년. 1248년에 처음 공사가 시작되었고 1880년에 이르러 157m 높이 쌍둥이 첨탑이 완공되었다 합니다.
쾰른 대성당의 가장 큰 구경거리는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이며, 스테인드글라스에 담겨진 내용은 구약과 신약에 등장하는 18개 이야기들이라 합니다. 1164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가져온 세 동방 박사 유골함을 안치하기 위하여 이 성당을 짓게 되었다고 합니다.
남쪽 첨탐에 있는 509계단을 하나씩 올라 95m의 첨탑 전망대에 이르는데 쾰른 시내 전경과 라인강의 물줄기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으며, 1996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습니다.
전해오는 이야기로 2차 대전 중에도 연합군의 폭격으로부터 쾰른 대성당이 무사했던 이유가 폭격기 조종사들이 이 탑을 랜드마크로 하여 주변 지역을 보다 손쉽게 폭격하기 위하여 남겨 두었다고 합니다.
쾰른 대성당은 원래 건축 재료인 조면암의 색에 따라 하얀색이었으나 세계 2차 대전 당시 폭격과 매연 그리고 산성비 등으로 검게 변했다 합니다. 쾰른 대성당은 쾰른 역대 대주교들의 마지막 안식처로 성당 바닥과 지하는 대주교들의 묘지로 수많은 신자들의 순례지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가 보았던 쾰른 대성당 서쪽 앞 광장에는 대성당의 크기를 더욱 실감하게 하기 위하여 탑 꼭대기에 놓인 장미석의 실제 크기 모형(높이 9.5m 폭 4.6m)을 전시해놓고 있었습니다.
약 1시간 동안 쾰른 대성당의 관광을 마치고 12시 반에 점심을 먹으려고 식당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런데 예약한 식당을 찾느라고 쾰른 시내를 몇 바퀴나 돌았습니다. 마침내 50분이 지난 오후 1시 25분에야 점심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배가 고픈지라 중국음식이었지만 맛있었습니다.
오후 2시 40분 우리는 프랑크푸르트를 향해 출발하였습니다. 독일의 농촌 풍경을 보면서 우리나라와 다른 점은 끝없이 펼쳐지는 평원의 목초지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소와 말과 양 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산악지대는 전혀 보이지 않고 평지가 아닌 곳에서는 야산 같은 구릉에 숲이 조성되어 있었고, 숲과 숲 사이의 너른 공간에는 녹색 융단 같은 목초지였고, 간간이 전형적인 목가적 정서를 풍기는 깔끔한 농촌마을 풍경이 서양을 소개할 때 보여주는 서양화에 나오는 바로 그런 광경이었습니다.
쾰른이 현대적 산업 도시라면 프랑크푸르트는 독일의 금융1번지인 경제수도이며 박람회가 자주 열리는 유럽 경제의 중심지라고 하였습니다.
약 3시간을 달려 오후 5시 30분에 프랑크푸르트의 ‘뢰머(시청사)광장’에 도착하였습니다. 이미 땅거미가 지고 조명이 없으면 관광을 할 수 없었습니다. 시청사 옆에 있는 대성당의 검은 종탑이 어둠 속에서도 확연히 나타났습니다. 종탑이 있는 건물 뒤로 까만 첨탑 아래 아름다운 조명으로 수놓아진 프랑크푸르트 대성당의 모습이 그 웅장함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뢰머광장에 있는 정의의 여신 ‘유스티아상’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습니다. 어둠 속에서 약 40분 동안 관광을 하고 다시 차에 올라 교포가 운영하는 MJ백화점(쌍둥이 칼과 압력밥솥 등 주방기구 취급)에 가서 6시 반부터 1시간 동안 쇼핑을 하였습니다.
관광을 하면서 가장 기다려지는 것은 역시 식사시간이었습니다. 7시 30분에 교포가 운영하는 불고기 집에 가서 애호박을 썰어 넣은 (무늬만이 아닌) 확실한 된장국에 쌀밥을 먹었습니다.
오늘의 마지막 코스인 호텔에는 9시에 도착하였습니다.
Europe tour3( Koln & Frankfurt)2.exe
유럽여행4
독일 로만팈가도와 인스부르크
11월 1일(日) 맑음
05:30 모닝콜 06:아침식사(호텔식이 아주 좋았음) 07:30 전용버스에 올라 프랑크푸르트에서 출발하여 퓌센(독일의 남부도시)과 인스부르크(오스트리아)로 향하였습니다.
‘로만팈가도(街道)’에 있는 ‘로텐부르그성곽(城郭)’과 ‘노이슈반슈타인성(城)’
독일 고속도로 중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라고 하는 로만팈가도(街道, 원래는 알프스를 넘어서 로마까지 이어지는 통상로여서 ‘로만티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는데, 마임강 유역의 독일 중남부 뷔르츠부르크(Wuerzburg)에서 남쪽 국경 근처 퓌센(Fuessen)까지 약 360km에 이르는 휴양 도로로 중세 때 무역의 길이자 성지 순례길)를 달렸습니다. 끝없이 펼쳐지는 초원과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소떼들, 그 사이 사이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서구 풍 마을들을 뒤로 하고 풍력 발전기의 날개 도는 모습에 이어서 포도밭이 휙 지나가기도 하였습니다.
어느 틈엔가 홀연히 나타나는 차분한 중세분위기의 성채, 벽돌색 지붕의 동화 속에서나 나올 것만 같은 집들이 있고 그 속에서 사람들이 사는 중세의 마을이 있었습니다. 그 곳이 바로 로텐부르그(ROTHENBURGER)라는 성곽 도시였습니다.
‘중세의 보석’, ‘동화 속의 중세’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는 로텐부르그는 로만틱 가도에 있었습니다. 가장 완벽하게 중세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성곽의 도시 로텐부르그는 2차세계대전 때 4할이 파괴되었는데 전쟁 후, 9세기~17세기의 옛 모습으로 완전히 복원된 아름다운 중세의 건물들이 타우버강 위에 우뚝 그 자태를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이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는 중세의 향기가 그윽한 도시, 로텐부르그의 전체 인구는 14,500 명인데 성안의 구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2,500 명 정도라 하였습니다.
성문을 3 개 지나야 중심부까지 들어갈 수 있습니다. 도시의 중심부에는 로텐부르그 시청사가 있었는데, 13세기 고딕양식과 16세기 바로크 양식이 한데 어우러진 건축이었습니다.
로텐부르그에서 우선 손꼽을만한 자랑은 시내 중심지 시장터(Marktplatz – 마르크트 플랏츠)에 있는 ‘마이스터 트룽크’(Meistertrunk) 시계탑이었습니다. 마이스터는 ‘장인’이고, Trunk는 ‘술 마시기’라는 뜻인데, 1618년에 시작된 30년 전쟁이 한창이던 1631년. 로텐부르그는 6만 대군을 거느린 카톨릭계 틸리(Tilly) 장군에 의해 함락되었습니다. 점령군이 무참한 살육을 감행하자 이곳 시장과 관료들이 환영의 뜻으로 틸리장군에게 화려하게 장식된 큰 와인 잔으로 술을 대접하려 했으며, 틸리장군은 의외에도 너희들 중에 이 와인 잔을 단숨에 비울 수 있는 자가 나타나면 모두의 목숨을 살려줄 것이며 도시도 파괴하지 않겠다는 제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도시의 누쉬(Nusch) 시장 자신이 앞으로 나서며 이 믿을 수 없는 임무를 이행함으로써 모두의 목숨과 도시를 구해낸 것입니다. 이 술잔은 Humpen(훔펜)이라고 불리며 정확히 3,25 리터 들이 잔이었습니다.(그 이후 술에 취한 시장은 3일 동안 잠을 잤답니다.)
이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시청 옆 건물에 있는 라츠트링크스튜브(Ratstrinkstube, 시의회 소속 주점) 시계탑에 이 시계를 1683년에 달게 되었는데, 1920년부터 11시부터 오후까지 매 시 정각마다 시계의 양 옆 창문이 열리며 와인 잔을 들고 마시는 누쉬시장의 인형과 칼을 들고 ‘하하’ 웃고 있는 틸리 장군의 인형이 나타나게 하는 퍼포먼스를 행한다고 합니다.
성곽 안의 마을 사람들은 관광객을 상대로 음식점 카페 그리고 가게들을 운영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성곽 안을 구경하는 데는 한 시간 남짓의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약 1시간 동안 관광을 마치고 나니 11시 10분. 다시 ‘로만틱 가도’를 달려 약 3시간 만인 2시에 ‘레히’ 강을 끼고, 알프스 산맥 동쪽 기슭에 있으며, 옛 로마군 국경 주둔지였던 ‘퓌센’(Fussen, 겨울 스포츠의 중심지이자 관광휴양지이며, 인구 13,954명)이라는 작은 도시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었습니다.
오후 2시40분 다시 전용버스를 타고 ‘노이슈반슈타인’ 성이 있는 슈방가우 지역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전용버스에서 내려 여기에서 운영하고 있는 셔틀버스를 타고 성의 뒤쪽 높은 곳에 있는 ‘퓔라트’ 계곡의 ‘마리안느’ 다리로 걸어 올라갔습니다. 거기에서 보면 ‘노이슈반슈타인’ 성의 아름다운 뒷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노이슈반슈타인’ 성 위의 높은 곳에서 저 아래 슈반 호수 위로 높이 솟아 있는 ‘호엔슈방가우’ 성(노란색 성)과 퓔라트 계곡이 깊숙이 내려다보이는 ‘노이슈반슈타인’ 성(하얀색 성)이 한 눈에 들어 왔습니다.
미국 디즈니랜드성의 모델이 된 하얀 노이슈반슈타인성(Neuschwanstein, 新 白鳥의 石城)은 바위산 꼭대기에 세워진, 그 죽음의 배후를 알 수 없는 비운의 루드비히 2세가 직접 설계해서 만든 네오 로마네스크 양식의 대리석조 성곽(城郭)입니다. 이 성이 완성된 비화는 너무 길어서 생략합니다.
노이슈반슈타인 성의 아름다움에 취해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 전용버스에 올랐습니다. 오후 4시 35분 오늘의 마지막을 장식할 인스부르크를 향해 달렸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알프스 산맥의 동쪽 산악지대는 그늘져 더욱 짙은 암록색으로 물든 계곡과 산맥들을 지나가고 있는데 저 멀리 산맥의 끝에 석양빛을 받은 알프스의 만년설이 환하게 눈에 들어와서 우리 일행들의 가슴을 마구 두근거리게 하였습니다. 최세현 가이더가 서울에서 가지고 온 CD에서 흘러나오는 장중한 ‘보리수’ 합창곡이 배경음악으로 흐르는 속에 알프스 계곡과 계곡 사이를 곡예를 부리며 달리고 있는 우리는 마치 좌석까지 움직이는 3D영화관에 앉아 있는 환각에 빠져들게 하였습니다.
알프스의 가을밤은 일찍 찾아왔습니다. 오후 6시 10분 인스부르크에 도착하여 이미 깜깜해져 버린 시내를 거의 달리다 시피하면서 구경하였습니다.
현대와 과거가 공존하는 관광지 '알프스의 장미', 예술과 문화의 나라 오스트리아의 티롤 주(州)의 주도 인스부르크(Innsbruck)는 해발 574m의 고원도시로 인구 14만 명의 작은 도시지만 1964년과 1976년 두 차례 동계올림픽을 개최했던 곳이며 15세기에 합스부르크 왕가의 막시밀리안 대제가 이탈리아의 남 티롤에서 이곳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번영하기 시작하였다 합니다.
볼만한 곳은 많았지만 시간에 쫓겨 먼저 본 곳은 성당이었습니다. 야곱성당(가이더의 설명)인지? 궁정성당 (Hofkitche)인지? 확인하지 못하였습니다. 다음에는 도시의 중심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마리아 테레지아 거리’를 살펴보고 지나면서 구 도시의 막다른 골목 끝에 있는 ‘황금지붕(Golden Dachl)’을 보았습니다. 1494년 막시밀리안 대제가 광장에서 개최되는 행사를 관람하기 위해 만들었으며, 2,657장의 금박동판을 입힌 황금지붕은 인스부르크의 상징적 존재라고 합니다. 이 건물이 지금은 막시밀리안 1세의 보물과 동계 올림픽 자료를 전시하고 있는 막시밀리아노임 박물관(Maximilianeum)으로 이용되고 있답니다.
아주 추운 인스부르크의 밤이라는데 따뜻한 호텔 덕분에 추운지 모르고 잘 잤습니다.
Europe tour4(Romatic street & Innsbruck)2.exe
유럽여행5일째
베네치아(이태리)
11월 2일(화) 흐림(구름과 비)
5시 30분에 모닝콜에 이어서 1시간 후 아침 식사를, 7시 30분에 출발 할 것인데 단체 숙박 요금의 결제방식(현금 또는 카드) 문제로 의견이 엇갈려 10분간 지체하여 출발하였습니다. 5시간을 달려 점심때까지는 베네치아로 가야 하니까 다른 날보다 일찍 출발한 것입니다.
동부 알프스 산악지대인 인스부르크의 아침은 아주 상쾌할 만큼만 차가운 기온이었습니다. 안개가 조금 낀 산과 골짜기를 지나 국경과 재를 넘어 이탈리아의 남 티롤지역으로 가는 동안, 산 중턱에 산재해 있는 인가들이 마을을 이루어 옹기종기 살고 있는 그 아름다운 풍광이 우리 일행들의 눈길을 끌었습니다. 또 산 중턱에는 조그만 성과 수도원도 보였습니다.
기어코 비가 내리면서 빗물이 흘러내리는 차창으로 보이는 넓은 호수가 아름답다기보다는 을씨년스러워보였습니다. 경사진 산비탈에서는 포도밭을, 넓은 평지에서는 수확이 끝난 사과밭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요 근래 이 지역에 폭우가 쏟아져서 홍수로 인해 골짜기의 냇물이 범람하여 길이 유실되기도 하고 많은 비가 내린 때문인지 안개가 날리고 있는 산 곳곳에서 폭포들이 쏟아지고 있는 광경이 장관이었습니다.
비는 개었지만 고속도로도 막혀서 베네치아로 들어갈 수 없게 되었는데 우리가 탄 이탈리아 출신 버스 기사는 휴대폰으로 각지의 교통정보를 입수하여 소도시와 지방도로를 이리저리 빠져나가 11시 조금 넘어 베네치아 변두리의 ‘독도’라는 한국인 식당에 도착하여 점심(한식)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점심을 먹은 식당과 같은 건물에는 관광객을 상대로 올리브 식초를 파는 가게가 있어서 우리도 식초로 버무린 채소를 맛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 후 12시 반쯤 다시 버스를 타고 베네치아의 육지(메스트래지역)에 있는 수상버스(바플레토) 입출항 선착장으로 갔습니다.
오후 1시 30분 우리 일행은 수상버스를 타고 베네치아만(灣) 일명 ‘까날 그란데’(대운하)를 항해하여 ‘물의 도시’ 베네치아 섬으로 향하였습니다. 하늘에는 비구름이 가득하였고 빗방울도 뿌렸습니다. 베네치아만은 바다가 아니라 파도가 전혀 없는 잔잔한 호수였습니다. 그 이유는 만의 북동쪽에서 남서쪽까지 약 51㎞로 뻗은 초승달 모양으로 뻗어 있는 두 개의 기다란 사주(沙洲, 모래톱)가 방파제(防波堤)가 되어 아드리아해(海)의 바람과 파도를 막고 있는 석호(潟湖, lagoon)였기 때문이었습니다.
1,400여 년 전 훈족(몽고족)의 침입으로 이탈리아인들이 피난 와서 깊이가 2~3m인 이 석호(潟湖)의 늪지대에 20여만 개의 통나무 기둥을 박은 다음 격자로 나무를 엮어 흙을 채우고 대리석을 덮어 118개의 인공 섬을 만들고, 1개의 자연 섬과 모든 인공 섬을 연결하는 400여개의 다리를 놓는 대 토목공사로 도시를 건설해 살면서, 아드리아해의 해상 무역 상권을 장악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하여 경제적 정치적 독립을 유지해 온 도시입니다. 그래서 인지 지금 나무가 자라고 있는 지역은 자연 섬이고 인공 섬들에는 나무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또, 이 섬에는 자동차도 다닐 수 없다고 합니다.
수상버스가 베네치아 인공 섬에 우리를 내려 주었을 때, 도시 전체에 차올랐던 물이 다 빠져서 편하게 도시를 걸어 다니며 구경할 수 있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지금 이 섬에는 몇 년 전부터 도시 전체가 물이 차는 현상이 계속되고 있어서 물이 차 있으면 관광을 못하게 됨)
맨 먼저 ‘팔라초 두칼레’(Palazzo Ducale, 도제의 궁전)와 ‘프리지오니 감옥’을 잇는 ‘탄식의 다리’(PONTE DEI SOSPIRI, 두칼레 궁에서 재판을 받고 나오던 죄수들이 이 다리를 건너면 세상과 완전히 멀어지므로 한숨을 내쉬었다하여 붙여진 이름)를 보았습니다. 다리 왼쪽 있는 베네치아 총독관저이면서 의회이자 법원인 정교하고도 기하학적인 무늬의 흰색과 분홍색의 고딕 예술작품 ‘두칼레 궁전’이 끝나는, ‘산마르코 소 광장’ 입구에서 동쪽을 바라보니, 길게 뻗은 넓은 공간의 오른쪽 ‘두칼레 궁전’의 끝에 ‘성 마르코(마가)’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는 사원, ‘산 마르코 대성당(Basilica San Marco)’이 보였습니다. 우리 일행은 두칼레 궁전의 외관만 보고 곧장 산마르코 대성당으로 갔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서 황금색 돔 천장과 제단(祭壇)을 구경하였습니다. 성당에서 나온 우리는 성당 앞인 북쪽으로 툭 트인 ’산마르코 대 광장‘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광장 오른쪽에는 100m가 넘을 정도로 긴 구 시청사 건물과 이어진 종을 쳐서 시간을 알리는 시계탑이, 왼쪽에는 높이 99m인 ’캠퍼닐리 종루‘(등대 구실도 함)와 시의 신청사 건물이 오른 쪽 건물과 ’ㄷ'자로 광장을 감싸고 있었습니다. 대 광장 한 가운데에서 비둘기 때가 관광객들과 서로 어울려 장난하는 모습들이 매우 한가로워 보였습니다.
일정에 쫒긴 우리는 찬찬히 구경할 시간이 없어서 대충 구경을 마치고 곤돌라 타는 곳으로 갔습니다. 폭이 좁고 긴 검정색으로 통일된 곤돌라(길이 10m 이내, 너비 1.2∼1.6m, ‘흔들리다’는 뜻)에 7명이 탔는데 선장이 장대로 수로의 바닥을 밀어서 느리게 움직이는 작은 쪽배였습니다. 이 베네치아를 ‘ㄹ’자형으로 관통하는 수로를 따라 섬의 중심부인 ‘리알토’다리까지 갔다가 되돌아왔습니다.
다음에는 수상택시를 타고 좀 더 빠르게 섬 구석구석을 돌 옵션 차례였는데 참여 인원이 의외로 적어 망설이고 있던 참에 날씨까지 풍랑이 몰아올 것 같아 예정된 옵션을 중단하고, 육지로 돌아올 수상버스 시간까지 기다리면서 무료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마침 시간이 남는 동안 이곳저곳을 더 돌아보았습니다. 그 중에 ‘산마르코 소 광장’ 입구에 있는 2개의 하얀 대리석 원주는 십자군 전쟁 때 동방에서 약탈해 온 것으로 두 원주의 위에 베네치아의 수호신 ‘날개 달린 사자 상’과 악어를 타고 물 위를 건너는 ‘성 테오도르 상’을 관심 있게 볼 수 있었습니다.
저녁 5시 30분 날이 저물어 수상버스를 타고 메스트레 지역 선착장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식당으로 이동하여 6시 반에는 저녁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첨부파일은 9분30초짜리 입니다.
Europe tour5 VENEZIA(ITALY)2.exe
유럽여행 6일째
피렌체(이탈리아)
11월 3일(水) 맑음
오늘도 아침 일찍 기상하여 ‘물의 도시 베네치아(Venezia)’의 루쏘트(Russott) 호텔에서 제공하는 식사를 마치고 전용버스에 올라 7시 30분에 출발하여, 4시간 이상을 가야 하는 ‘꽃의 도시’라는 의미의 ‘피렌체(Firenze)’를 향하여 출발하였습니다.
이탈리아 반도의 북부 아드리아해 연안의 베네치아에서 남으로 방향을 잡아 역시 아드리아해 연안 가까이 있는 피렌체까지 가는 동안 아펜니노산맥을 넘고 인공 운하도 보면서 갔는데 역시 포풀라나무숲과 포도농장과 올리브과수원 등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홍수로 강이나 운하의 물이 불어 있는 것도 보였습니다.
베네치아에서 현지 가이더로 우리를 안내한 김미란씨는 서울에서 명문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이곳에 유학 온 기독교 모태신앙인으로 역사와 문화 예술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이지적 인물이었습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의 입을 통해 풀어 놓은 설명들이 아주 감성적 톤으로 우리의 귀를 사로잡았고, 우리가 관광하러 다닌 곳의 지명을 정확한 발음으로 반복하여 강조해 주어 잊지 않도록 해 주는 특급 안내자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성당을 지을 때, 라틴 십자가의 교차점이 제단(祭壇)이 되고, 제단에서 기둥이 없이 수직으로 중앙 돔이 올라가는데, 십자가의 세로인 주랑(柱廊)과 가로인 익랑(翼廊)이 받치는 상부에 강하고 가볍게 만들어진 돔을 올리고, 돔의 원개(圓蓋, Cupola)에는 채광창을 내어 실내를 밝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돔(Dome)이 올려 진 성당을 보통 두오모(Duomo) 성당이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탈리아 토스칸나주의 중심도시 피렌체는 아르노(Arno) 강변에 위치해 있으며 역사상 중세, 르네상스 시대에는 건축과 예술로 유명한 곳이었고, 중세 유럽의 무역과 금융의 중심지였으며 또,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본고장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오랜 세월동안 메디치 가문이 다스렸고, 한 때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였으며, 오늘날은 매년 수백만이 넘는 관광객들을 끌어 모으고 있는데, 1982년에는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다 합니다.
피렌체의 은행업자들이 성공하면서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된 메디치 가문을 경제적 배경으로 14세기에는 문학과 미술을 중심으로 르네상스(문예부흥, 인문주의)를 꽃피우게 되어 이후 300년 동안, 피렌체는 문화예술의 중심지로 발전하였으며, 15세기 초반에는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를 통치하게 되면서 강한 자치 국가로 발전하였다 합니다.
우리는 12시쯤 피렌체의 미켈란젤로 언덕에 도착하였습니다. 높은 곳에 올라가서 시내를 먼저 내려다보는 것이 피렌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견해에 따른 것입니다. 언덕의 광장에서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복제품)을 구경하고, 붉은 색 지붕이 특색인 피렌체 시내를 내려다보면서 ‘두오모성당’과 ‘베키오궁전’ 그리고 강폭이 그리 넓지 않은 ‘아르노강’ 위의 ‘베키오 다리’ 등을 멀리서 구경하면서 대강의 위치를 가늠해 보았습니다.
미켈란젤로 언덕을 걸어서 내려와 아르노강의 강변도로를 지나 다리를 건너 점심을 먹을 식당으로 갔습니다. 걸어가는 도중에 산타 크로체 교회 (Chiesa di Santa Croce, 미켈란젤로·로시니·갈릴레이 등 유명인들의 묘가 있음)를 지났습니다.
우리 일행은 지치고 발걸음이 느려서 오후 1시 30분쯤 식당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점심 메뉴는 스파게티였습니다.
고색창연한 건물들 사이의 좁은 도로를 지나 드디어 우리 일행은 피렌체의 두오모 (Duomo) 즉 꽃의 산타 마리아 대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del Fiore)에 도착하였습니다. 피렌체의 상징인 두오모는 1296년 공사가 시작되어 1371년에 본당이 완성되었고, 106m의 높이인 원개(圓蓋, Cupola)의 천장에는 미켈란젤로의 불후의 명작인 <최후의 심판>이 그려져 있고, 흰색과 핑크, 녹색의 대리석으로 된 외관은 장엄하면서도 꽃의 산타 마리아라는 명성에 걸 맞는 기하학적인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모습이었습니다.
두오모 옆에 있는 82m 높이의 4각 탑, ‘지오토의 종루(Campanile di Giotto)’ 역시 세 가지 색의 대리석을 사용해 만든 탑으로, 1334년 화가인 ‘지오토’에 의해 설계, 착공되었다가 그가 죽은 뒤인 1359년 ‘타렌티’에 의해 완공되었다고 합니다.
두오모 앞에 서 있는 피렌체의 수호성인 세례자 요한에게 바쳐진 8각형의 ‘산 조반니 세례당(Battistero di San Giovanni)’ 건물이 있었습니다. 세례당은 3개 청동으로 된 문이 있는데 남 ․ 북 ․ 동문 중 북문은 신약성서 내용을 부조로 새겼고, 동문은 ‘로렌초 기베르티’가 1425년부터 28년 걸려 구약성서를 내용을 10개의 동판에 부조로 새겨 황금색 칠을 해 놓았습니다. 미켈란젤로가 이 문을 ‘천국의 문(Porta del Paradiso)’이라고 찬양하였다고 합니다.
다시 좁은 도로를 걸어서 이동하다가 ‘단테의 생가’를 지나가면서 겉모습만 보고 갔습니다.
또, 그 골목의 끝에 있는 ‘시뇨리아 광장(Piazza della Signoria)’으로 갔습니다. 시뇨리아 광장은 13~14세기에 열린 광장으로 피렌체 정치의 중심 무대가 된 곳으로 광장의 한 쪽에는 ‘넵튠의 분수(Fountain of the Neptune, 넵튠이란? 해신 즉 포세니돈(Poseidon)을 말함)’와 메디치(Medicee)가문의 시조인 '코지모(Cosimo)1세의 청동 기마상’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이 광장의 중심 건물인 '베키오 궁(Pallazzo Vecchio, 메디치 가문 소유였는데 기둥과 벽 등이 모두 삼색 대리석에 아름다운 조각을 해 놓아서 그 현란함이 예술의 극치를 자랑하는 듯 하였음, 현재는 일부는 박물관으로 일부는 피렌체의 시청사로 사용되고 있음)’의 입구 좌 ․ 우에는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다비드(David)상’(복제품)과 ‘헤라클레스상’이 있고. 이 광장을 빙 둘러서 '사비니 여인의 강탈(Rape of the Sabines)', ‘메두사의 목을 든 페르세우스 상’, ‘아킬레스와 트로이의 공주 포르세나 상’ 등 많은 조각품들이 있어 야외 미술관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참고로 르네상스 당시 피렌체를 발전시킨 인물들을 적어 봅니다.
※ 로렌초 데 메디치(1449~1492) ‘위대한 로렌초’라 불리는 정치가이자 르네상스 정신의 보호자.
※ 단테(1265~1321) <신곡>을 지은 시인. 베아트리체와의 사랑으로도 유명한 그는 정치 분쟁으로 방랑 도중 사망하는 쓸쓸한 말년을 보냈다. 산타 크로체 성당에는 유해(遺骸)가 없는 단테의 가묘(假墓)가 있다. 단테의 신곡 때문에 피렌체 말이 이탈리아의 표준어가 되었다 합니다.
※ 마키아벨리(1469~1527) 저서 <군주론>으로 근대 정치학의 기초를 확립한 정치가.
※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1519) 르네상스 3대 거장의 하나. 화가, 조각가, 건축가, 시인, 발명가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름을 떨쳤던 르네상스의 천재 예술가.
※ 라파엘로(1483~1520) 르네상스 3대 거장의 하나. 미켈란젤로와 다 빈치를 이어 르네상스 양식을 완성했다.
※ 갈릴레이(1564~1642) 천문학자, 물리학자, 철학자로 ‘지동설’을 주장해 파문을 일으킨 것으로 유명하다. 인근 피사(Pisa)에서 태어나 피렌체에서 연구 활동을 했다.
※ 미켈란젤로(1475~1564) 르네상스 3대 거장의 하나. 조각가, 화가, 건축가로 1501년부터(26세 때) 6년에 걸쳐 제작된 ‘다비드 상’ 등 명작을 남겼다. 사람들이 미켈란젤로의 위대한 업적을 칭찬하자 “내가 그것을 조각한 것이 아니라 내면에 있던 것이 밖으로 나오도록 도왔을 뿐이지요. 즉 이미 그 돌 속에 내재해 있던 것이 나타나게 했을 뿐이지요.”라고 답하였다고 합니다.
9분 30초짜리 입니다.
Europe tour6 Firenze(Italy)2.exe
유럽여행 7일째
로마(이탈리아)
2010년 11월 4일(목) 맑음
어젯밤 늦게 피렌체에서 로마 외곽의 한 호텔에 도착하여 자고, 일어나서 짐을 싣지 않고 전용버스에 올랐습니다. 오늘 밤에도 이 호텔에서 자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바티칸을 구경하려면 서둘러 가야 하기 때문에 7시 45분에 출발하였습니다. 약 1시간 이상을 달려 바티칸 부근에서 내렸습니다. 9시가 넘은 바티칸시 인근은 차량통행이 금지되어 있어서 수많은 인파로 붐볐고, 벌써부터 꼬리를 길게 늘어뜨린 관광객들의 행렬이 바티칸 미술관 입구까지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수신기를 받아 귀에 꽂고 김미란 현지 가이더의 안내 설명을 들으면서, 인파에 밀리면서 미술관을 돌기 시작하였습니다. 사진 찍으랴 설명 들으랴 일행을 놓치지 않으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바티칸 미술관(바티칸 박물관 : Musei Vaticani)’은 원래 교황을 위해 지은 궁전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1506년 1월 14일, 로마의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 인근의 포도밭에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고대 트로이 사람들에게 그리스군이 놓고 간 ‘트로이 목마’를 도시 안에 들이지 말라고 경고했던 성직자 ‘라오콘’을 묘사한 조각상이 발견되었습니다. 교황 ‘율리오 2세’는 포도밭 주인에게서 그 조각상을 사들였고, 바다뱀에 사로잡힌 라오콘과 두 아들을 묘사한 이 조각상을 바티칸에서 진열하여 대중이 볼 수 있게 한 것이 이 미술관의 시초가 된 것이라 합니다. 지금은 세계 최대급 규모의 미술관 가운데 한 곳으로 성장하였고, 광대한 전시관에는 수세기에 걸친 예술품들이 진열되어 있고, 한 해에 4백만 명 이상이 방문하고 있답니다.
오늘날의 바티칸 박물관은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 벽화(최후의 심판)와 천장화(천지창조),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같은 르네상스 시대의 세계 최고 걸작뿐만 아니라 <라오콘>, <벨베데르의 아폴로>와 같은 헬레니즘 시대의 조각과 고대 로마 시대 에트루리아의 문화를 엿볼 수 있는 화병과 일용품, 미이라와 석관으로 대표되는 이집트 왕조의 발굴 유물에 이르기까지 각기 다른 시대의 다양한 예술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세계 유일의 박물관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며칠 동안에 보아야 할 이 박물관을 짧은 시간에 주마간산 격으로 둘러보고 나왔으니 안 들어간 방도 많았고 수많은 소장품들의 이름조차 확인하지 못하고 지나오고 말았습니다. 너무 속상했습니다.
박물관과 연결된 카톨릭의 총본산 세계 최대의 ‘성 베드로 대성당’(성 베드로가 순교한 장소이고 무덤이 있는 곳)을 보고 나와서 눈앞에 전개되는 30만 명이 한 자리에서 미사를 볼 수 있다는 ‘성 베드로 광장’을 보면서 입이 크게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교황선출 방식인 ‘콘크라베’, 이집트에서 약탈해 와 세워져 있는 ‘오벨리스크’, 광장을 둘러쌓고 있는 건물들 위에 세워져 있는 수많은 성인의 동상들을 보면서 우리 일행들이 모이기를 기다렸습니다.
12시 30분에 다시 버스에 올라 로마시의 ‘이조’라는 식당으로 가서 한식 불고기와 찌개로 점심을 먹었습니다.
오후 1시 30분에 다시 이동하여 ‘산타마리아 인 코스메딘 성당’으로 갔습니다. 그 성당 입구 한쪽 벽면에 진실을 심판하는 입을 가진 얼굴인 ‘진실의 입’이 있었습니다. ‘진실의 입(Bocca della Verita, 보카(입) 베리타(진실))’은 영화 ‘로마의 휴일’로 유명해 진 곳입니다.
진실의 입이 달린 얼굴은 강(江)의 신 '홀르비오'의 얼굴을 조각한 것인데, 중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한때는 하수도 뚜껑으로까지 전락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정치적으로 이용을 하게 되기도 하였다 합니다. 곧 상대편 사람을 심문(審問)하게 될 때에 뒤편에 하수인(下手人)을 대기시켜 놓고 심문 받는 사람의 손을 넣은 상태에서 진실을 말하도록 한 뒤, 만일 진실을 말하지 않으면 손이 절단될 것을 서약하게 하고 곧 이어 진실을 말하던 거짓을 말하던 심문자의 맘에 안 드는 사람은 무조건 손을 자르도록 명령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켜보는 사람들은 내막을 모르기 때문에 손을 넣고 심문을 받는 사람이 거짓을 말하여 손목이 잘린 것으로 알고 모두가 두려워하게 하는 정치적(政治的) 이용거리가 된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다음에는 걸어서 시내를 구경하면서 ‘로마시청’, ‘이탈리아 통일기념관’(지하에 무명용사들의 무덤이 있다고 함), ‘폰티피시아 대학’을 지나 ‘트레비 분수’로 갔습니다.
‘트레비 분수’는 나폴리 궁전의 벽면을 이용해 만든 것으로 1726년 완성되었으며, 조각전체가 하나의 원석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바다의 신 넵투누스(Neptunus, 포세이돈)와 부하 트리톤(Tritone)과 해마를 모델로 하였답니다. 트레비 분수는 수로가 끝나는 부분이라 주변보다 지대가 낮기 때문에 물줄기가 강하며 분수 안에는 사람들이 던진 동전이 많은데 일정기간마다 거두어 자선 사업에 사용한다고 합니다. 분수의 오른쪽 거리에는 아이스크림 가게가 줄 지어 있었습니다.
걸어서 발굴 중에 있는 유적지 ‘포로 임페리얼?’을 지나서, 세계 최초로 슈퍼마켓(쇼핑몰)으로 이용되었던 붉은 대리석 건물 ‘SPQR’을 지나가는데, 길 가에는 그것을 만들었다는 ‘트라이아노(TRAIANO) 황제’의 동상도 있었습니다.
역시 고대 로마 유적지인 ‘포로 로마노(Foro Romano)’를 보았습니다. 포로 로마노는 로마 역사의 진원지인데 언덕과 언덕 사이의 분지에 기원전 6세기 무렵부터 293년에 걸쳐 로마의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광장으로 수도 로마에 개설된 최초의 포룸이며, 원로원 의사당과 신전 등 공공기구와 함께 일상에 필요한 시설을 갖추고 있는데 오랜 시간 토사에 묻혀 있었던 것을 발굴 중에 있었습니다.
길 가에는 로마가 발전해 온 역사를 몇 장의 지도로 표시해 알려 주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마침내 오늘의 마지막 관광지인 ‘콜로세움(Colosseum)'에 도착하였습니다. 콜로세움은 고대 로마 시대의 건축물 가운데 하나로 ‘플라비아누스 원형경기장’이 정식 이름이라 합니다. 콜로세움은 네로 황제의 황금 궁전 정원에 있던 인공 호수를 메운 자리에 세워졌고, 72년에 착공되어 4만 명의 전쟁 포로를 동원하여 8년 동안의 기적적인 역사를 거쳐 티투스 황제 때인 80년에 준공되었으며, 높이 57m, 둘레 500여m 등 경기장 내부의 길이 87m와 폭 55m라는, 당시에 건립된 건축물 가운데 최대의 건축물이었답니다. 콜로세움은 검투사들끼리의 싸움이나 맹수들과의 싸움을 시민들에게 구경시킴으로써 한편으로는 일체감과 애국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공포심을 심어주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으로 건립되어, 중세기에는 군사적 요새로 이용되다가 그 이후에는 성당이나 궁전 등의 건축에 사용될 자제의 제공 터가 되기도 하였답니다. 지금 콜로세움의 벽의 구멍들은 그 때 벽에 붙여져 있었던 대리석들을 떼어낸 자국이라고 합니다. 콜로세움 옆에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선문’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이제 해가 져서 땅거미가 질 무렵, 다시 전용 버스에 올라 숙소로 가는 도중 ‘치르코 막시모(Circo Massimo) 경마장’ 옆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로마제국의 가장오래 되고 가장 큰 경마장으로서 약 30만 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으며 2두 전차나 4두 전차의 경주를 했던 곳으로서 이곳은 또한 많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순교를 당하기도 했던 곳입니다. 이 경마장을 가운데 두고 로마 건국 신화에 얽힌 ‘팔라티노 언덕’(오른쪽)과 ‘아벤티노 언덕’(왼쪽)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참고 - 로마 건국 신화(神話)
‘알바 롱가’라는 도시에서 ‘레아 실비아’(Rhea Sivia)라는 처녀 사제가 임신을 하게 되어, 정결의 맹세를 깬 벌로 생매장될 운명에 처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잠이 들자 군신 ‘마르스’가 자신을 범했다며 결백을 주장하였습니다. 이곳 왕인 ‘아물리우스(Amulius)’(형제 중 동생)는 실비아가 자신이 내쫓은 전왕(前王)이자 형인 ‘누미토르(Numitor)’ 왕의 딸이었기 때문에 그녀를 죽이고 싶었지만 일단 감금하기로 하였습니다. 실비아가 쌍둥이 로물루스(Romulus)와 레무스(Remus)를 낳자 숙부인 아물리우스 왕은 갓난아기들(쌍둥이)을 빼앗아 바구니에 담아 테베레 강에 띄워 보냈습니다. 쌍둥이를 담은 바구니는 강가의 갈대숲에 걸려 멈췄고, 때마침 홍수에 새끼들을 잃어버린 한 어미 늑대가 젖먹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자신의 젖을 물려 굶주림에서 구해주었습니다. 얼마 후 늑대 품에서 크는 두 아이를 ‘파우스툴루스’라는 목동이 발견하고 대려다 자식처럼 길렀다고 합니다. 이 쌍둥이가 청년이 되어 형 로물루스가 ‘팔라티노’ 언덕에 집을 짓고 도시를 세웠는데 자기 이름을 따서 ‘로마’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기묘년 원단 여러분의 가정에 행복과 평안이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첨부 파일은 약 11분 동안 실행됩니다.
유럽여행8일째
피사와 밀라노(이탈리아)
11월 5일(금) 맑음
로마 교외의 ‘홀리데이 인’이라는 호텔에서 이틀 밤을 묵은 우리 일행은 이탈리아의 마지막 일정인 피사와 밀라노를 보기 위해서 다른 날처럼 7시 40분에 전용버스를 타고 출발하였습니다.
피사로 가는 동안 최세현 인솔자가 이탈리아 토스카나 출신의 극작가 ‘콜로디’가 지은 동화(피노키오의 모험 : 나무 인형 피노키오가 훌륭한 인간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교훈적인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탈리아의 남북으로 뻗은 아펜니노(Appennino)산맥의 서쪽 기슭을 남쪽(로마)에서 북쪽(피사)으로 달려갔습니다.
이탈리아의 서해(지중해이면서 리구리아해)를 끼고 있는 아름다운 해안의 경치에 취하여 지루한 줄도 모르고 달렸습니다. 신이 내린 선물인 올리브농장들이 끝없이 펼쳐졌고, 가끔은 풀을 뜯고 있는 양 때들도 눈에 들어왔습니다. 도중에 우리는 어느 주유소에서 전용버스가 주유를 하는 동안 무료 용변을 보면서 포도넝쿨로 된 울타리에서 - 주인은 개의치 않았지만 우리는 눈치를 살피면서 - 잘 익은 포도송이를 한 움큼 씩 따서 입에 넣기도 하였습니다. 또, 잘 익은 석류가 벌린 입 속에 알알이 박혀 있는 빨간 보석들을 따서 맛보기도 하였습니다. 아주 달고 맛있었습니다.
마침내 5시간을 달려 12시 40분에 피사의 주차장에 도착하였습니다.
피사는 리구리아 해로 흘러드는 아르노 강변에 들어선 항구 도시로 로마시대에는 해군기지였으며, 11세기경에는 지중해 연안을 모두 장악한 ‘해상왕국’으로 부를 축적하여 번창하였지만 그 후 쇠퇴하여 지금은 작은 도시로 전락하였습니다. 약 10분쯤 걸어서 성벽으로 둘러 쌓여있는 ‘피사의 두오모 대성당 광장’으로 들어갔습니다. 이곳 역시 성벽 안에 대성당과 세례당과 종탑 등 세 건물이 함께 있었습니다. 우리가 보러 온 ‘피사의 사탑(斜塔)’은 바로 이 성당의 종탑(鐘塔)입니다.
피사의 사탑(斜塔, Torre di Pisa, 중세의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은 이탈리아 서부 ‘토스카나’주의 피사에 있는 피사 대성당의 종루(鐘樓)이며 기울어진 탑으로 유명합니다. 공사기간은 제1차가 1173년~1178년, 제2차가 1272년~1278년, 제3차가 1360년~1372년으로 공사기간이 무려 200년이나 됩니다. 특히 제1차 공사 후 탑이 기울기 시작하여 제2차 공사에서는 기울어진 각도에 맞춰 수정을 가한 뒤 건설을 재개했으나 기울기를 멈추지 못했고, 제3차 공사가 끝난 후에도 여러 차례 계속 보수공사를 하여 이제는 기울기의 진행을 멈추게 되었다 합니다.
탑의 높이는 원래 100m까지 올릴 계획이었으나 탑이 기울어진 관계로 계획을 수정하여, 현재와 같이 지상으로부터 55m(8층, 297계단) 원통형 바깥 둘레의 지름이 17m, 전체 무게는 14,000톤이 넘으며, 현재 남쪽으로 약 5.5도 기울어져 있습니다. 지금은 여기에서 인간 낙하 즉 투신 자살자가 많이 발생하여 그것을 막고자 7층에 난간 공사를 마쳤다고 합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이 사탑에서 낙하 실험을 통하여 ‘중력의 법칙’을 발견하였다고 하는데 이 일화는 갈릴레오의 제자였던 ‘비비아니(Viviani)’가 지어낸 것으로, 실제로는 피사의 사탑에서 실험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이 ‘피사의 두오모 대성당(1063년 착공)’을 지으면서 생긴 피사의 ‘기적의 광장’은 나중에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물리학상 중요한 발견을 한 장소가 된 것입니다. 그는 이곳 대성당에 매달린 등불의 움직임에서 ‘진자의 법칙’을 발견하기도 하였습니다.
약 1시간 동안 관광을 마치고 오후 2시경에 사탑 가까이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날씨가 더우니까 식당에서 아이스크림도 주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주차장으로 걸어가서 2시 40분 버스에 올라 밀라노로 향하였습니다. 이탈리아의 북부지방으로 가는 고속도로 주변에는 제법 높은 산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5시간 40분을 달려갔더니 벌써 어둠이 몰려와 있는(저녁 8시 20분) ‘밀라노 대광장’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밀라노는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 지방, 밀라노 주의 수도로서 1870년 이탈리아가 통일된 이후 밀라노 시민들은 여러 역사적인 이유로 밀라노가 이탈리아의 수도로 되어야 한다는 강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으나 결국 실현되지는 못하고 현재 이탈리아 제2의 도시이고 가장 공업화된 경제중심도시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밀라노 대광장’은 1489년에 대성당보다 먼저 건설되었답니다. 광장의 동쪽에는 ‘두오모 대성당’이 있고, 북쪽에는 개선문이 있는데 이 개선문은 ‘비또리오 임마누엘레 2세 갈레리아 입구’입니다. 그리고 광장 안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동상과 웅장한 모습의 통일 이탈리아 초대 황제인 ‘비또리오 임마누엘레 2세’의 기마상이 밀라노의 밤 광장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밀라노에서 가장 유명한 ‘밀라노 대성당(Duomo de Milan)’은 크기로는 유럽에서 3번째(세계에서 4번째, 이탈리아에서 2번째)로 큰 교회로 길이 157m, 폭 92m, 높이 108.5m로 135개의 뾰족한 첨탑과 3,159개의 성자와 사도들의 조각 군(群)이 주변을 둘러보고 있으며, 그 안에 2만 명을 수용할 수 있고, 고딕 건축으로는 세계에서 제일 큰 하얀 대리석 건물입니다. 원래 있던 성당 터에 1386년에 새로운 성당을 짓기 시작하여 5세기에 걸쳐 완성되었는데, 1805년 5월 20일, ‘나폴레옹 본나파르트’가 성당의 건축을 마치도록 명령한지 7년 만에 대성당의 공사가 완성됩니다. 그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나폴레옹의 동상이 뾰족탑 중의 한 꼭대기에 세워집니다. 그런 후 나폴레옹은 이 두오모 대성당에서 이탈리아황제의 왕관을 쓰고 대관식을 하게 됩니다.
광장의 북쪽에 있는 ‘비또리오 임마누엘레 2세 갈레리아’는 유리 돔 밑으로 우아한 카페와 쇼핑의 공간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바닥이 프레스코화로 모자이크된 이곳은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세계 최초의 쇼핑몰로 명품을 전시하고 있는 가게들과 고급 레스토랑이 즐비하였습니다. 유리 천장의 아케이드를 따라 200여m를 걸으면 꿈의 무대인 ‘라 스칼라 오페라 극장’과 만납니다.
‘라 스칼라 극장 박물관(Theatre Museum at La Scala)’은 1776 년부터 건설이 시작되어 1778 년에 완공되었으며 세계적인 오페라 극장으로 푸치니와 베르디가 첫 공연을 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또, 극장 부속 건물에는 박물관이 있습니다.
약 30분 동안의 깜짝 관광을 마치고 밤 9시에 가까이 있는 만진루(萬珍樓)라는 중국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호텔로 가려고 전용버스에 올라 한 5분쯤 가다가 화려한 조명을 발하는 어떤 건물(스포르체스코성) 앞에 우리를 내려놓았습니다.
‘스포르체스코성(城, Castello Sforzesco)’은 두오모 광장 북서쪽 단테 거리의 막다른 곳에 서 있는 성채(城砦)로, 지금은 도시 박물관과 예술품 전시장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본래 비스콘티 가(家)의 성채를 1450년 밀라노의 영주 ‘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 성 베드로 대성당의 설계자인 건축가 ‘브라만테’와 과학자요 군사전문가요 미술가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초대하여 이 성을 개축, 1446년에 완공하여 영주의 궁전으로 사용하였다 합니다.
우리 일행은 밤 10시 20분 호텔에 도착하여 이름처럼 낭만적인 밀라노의 밤을 즐기며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런닝타임은 8분 20초입니다.
Europe tour8 Pisa and Milan(Italy)2.exe
유럽여행9일째
인터라켄과 융플라우(스위스)
11월 6일(土) 맑음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7시에 출발한 우리 일행은 안개 속을 해치고 가다가 뿌옇게 보이는 ‘코모호수(Como lake, 북이탈리아 휴양지)’를 보면서 스위스를 향하여 이탈리아 북부의 산악지대를 달렸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유럽 연합(歐洲聯合, European Union, EU, 27개 회원국) 국가들을 지나왔기 때문에 다음 나라로 이동할 때에도 국경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스위스가 EU국가가 아니어서 국경 통과 절차를 거쳐야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버스 안에 앉아 있고 가이더가 입국 수속을 밟았습니다.
스위스연방(Swiss Confederation)은 유럽 중부에 있는 연방 공화국으로, 1648년 신성 로마 제국에서 독립하여, 1815년 영세 중립국으로 승인을 받았습니다. 알프스 산맥이 있어 경치가 아름다운 국제적 관광지로, 과일과 낙농 제품이 많이 나고 수공업적 기계 공업(특히 시계)이 발달하였으며, 적십자사 따위의 많은 국제기구 본부가 있습니다. 주민은 독일계, 프랑스계, 이탈리아계로 구성되어 있고 주요 언어는 독일어와 프랑스어 입니다. 수도는 베른, 면적은 4만 1,293㎢, 인구는 약 7백만입니다. 1인당 국민소득은 1만 7천 달러로 잘 사는 나라입니다.
7시 30분경에는 스위스로 입국하는 국경을 통과하였습니다. 잠시 후에는 하늘을 덮고 있던 구름도 말끔히 걷히고 이내 해가 떠오르더니, 조명을 받은 눈 덮인 알프스 산맥과 초원에서에서 풀을 뜯고 있는 얼룩소들이 어우러진 스위스의 아름다운 풍광들이 차창 밖으로 다가왔습니다. 우리들의 입에서는 탄성들이 연방 터져 나왔습니다.
9시 20분쯤에는 친환경 철도터널로 건설되고 있는 ‘성 고타르 터널(ST. Gottard tunnel, 현재는 17km, 2017년 준공되면 세계 최장의 57km)’ 부근의 휴게소에서 잠시 쉬었다가 다시 출발하였습니다.
갈수록 끊임없이 이어지는 스위스의 아름다운 풍경들을 즐기고 있는데 이번에는 알프스가 그 속에 잠겨있는 루가노 호수(Lugano lake, 스위스 남부 휴양지)를 보면서 지나게 되었습니다. 얼마를 더 갔는데 이번에는 더 크고 아름다운 호수를 보면서 지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 호수는 브리엔쯔湖水였습니다. 파란 호수가 아스라이 멀어지더니 이내 중앙알프스의 높은 재를 넘게 되었습니다. 그 재를 넘는 동안, 우리는 귀로는 스위스의 요들송이 아닌 최세현 가이더가 서울에서 가져온 CD에서 흘러나오는 양희은의 한계령을 듣고, 눈으로는 알프스 산악에서 골짜기 아래로 전개되는 아름다운 풍경들을 만끽하면서 재를 넘어서 내려갔습니다. 드디어 11시 조금 못되어 오늘의 목적지 인터라켄에 도착하였습니다.
인터라켄(Interlaken)은 스위스 중부 베른 주에 있는 인터라켄군의 해발 570m의 작은 읍입니다. 아레강을 따라 베르네제고원(Bernese Oberland, 해발 568m의 평평한 분지)에 있으며 동쪽으로 브리엔쯔湖(Brienzer See)와 서쪽으로 툰湖(Thuner See)라는 두 호수 사이에 위치한데서 그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이 읍은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한 수녀원을 둘러싸고 발달하여, 스위스에서 가장 오래되고 많은 사람들이 찾는 여름 관광휴양지입니다. 남쪽으로 융프라우峰(4,158m)의 멋진 경치가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있으며, 알프스 유람과 여행을 위한 출발점이 되기도 한, 직물과 시계 제조와 관광숙박업을 주업으로 하고 있는 곳입니다.
일행들이 약 1시간 동안 쇼핑을 하고 있는 사이에 나는 도시의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구경을 하였습니다. 북쪽 높은 봉우리에서 패러글라이딩이 출발하여 청명한 하늘을 가르며 이리 저리 날더니 내 옆에 있는 잔디밭으로 담요 위를 구르듯 착륙하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쇼핑을 마친 일행들과 ‘인터라켄 동역(東驛)’으로 걸어가서 역 바로 옆에 있는 ‘아시아’라는 식당에서 12시에 한식을 먹었습니다.
우리 일행은 ‘인터라켄 동역(Interlaken ost, 567m)’에서 1시 5분에 일반 열차를 타고 출발하였습니다. 열차에서 안내하는 방송이 한국어로도 나왔습니다. 우리나라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 진 것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로터 브루넨역(LauterBrunnen, 756m)’에서 내려 산악열차(경사가 급해 지므로 밀려 내려오지 않도록 양쪽 레일의 한 가운데에 톱니가 달린 레일이 하나 더 있는 열차)를 타고 ‘클라이네 사이덱역(Kleine Scheidegg, 2,061m)’을 지나 아이거봉과 묀흐봉의 석회석 암반 속으로 뚫어진 터널을 통과하여 ‘아이거반트역(Eigerwand)’과 ‘아이스미르역(Eismeer)’을 지나 '융플라우요흐역(Jungflaujoch, Top of Europe이라 불리는 유럽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건물, 해발3,454m)’까지 암반터널만 7km를 거리를 통과하여 도착하였습니다.
융프라우요흐역 건물 밖으로 나갔더니 그곳이 바로 ‘묀흐(Moench, 4,099m)봉’과 ‘융프라우(Jungfrau, 4,158m)봉’ 사이의 오목한 곳에 눈 쌓인 분지 즉 설원(雪原)이었는데 그곳이 바로 ‘융프라우요흐(Jungfraujoch, 3,471m)’라는 곳이었습니다. ‘융플라우(Jungfrau)’란 ‘처녀’라는 뜻이고, ‘요흐(joch)’란 말안장 모습의 U자형 분지를 말합니다. 관광객들은 바람이 쌔고 기온이 너무 낮아 금방 몸이 얼어버릴 것 같은 거기에서 오래 있지 못하고 답사 증명사진만 찍고 바로 역사(驛舍) 안으로 들어오곤 하였습니다.
다시 역사 안으로 들어가서 얼음궁전 속을 한 바퀴 돌고난 다음, 초고속으로 움직이는 스핑크스 리프트(100m)를 타고 ‘스핑크스 전망대(3,571m)’로 올라가서 360도를 다 둘러보며 만년설인 알프스 빙하를 보고 또 보았습니다. 날씨까지 청명하여 눈앞에 전개되는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었습니다. 행운이었습니다. 나의 뇌리에 융플라우의 장관들을 확실히 각인시켜 놓았습니다. 다시 보기 위하여 사진으로도 남기려고 찍고 또 찍었습니다. 산악열차를 타고 올라올 때부터 귀가 이미 먹먹한 상태였는데 기압이 낮고 산소가 희박해지니 이제는 속도 울렁거리고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른바 고산병 증세가 나타난 것입니다. 내가 이번 여행을 온 목적의 하나가 이곳에 올라오는 것이었는데, 이제 그 목적을 달성하고 나니 정말 고통스러움을 견디기 어려워 얼른 내려오고 싶어졌습니다.
우리 일행은 4시 43분 역사 내에 있는 출발역에서 하산 열차를 탔습니다. 암반 터널을 지나 → ‘크라이네 사이덱역’ → 올라갈 때와 반대쪽인 ‘그린델발트역(Grindelwald)’ → 어둠이 깔린 인터라켄 동역으로 내려왔습니다.
저녁 6시 툰호 가까이에 있는 한국인이 경영하는 호텔(DU LAC)에서 비프스테이크로 저녁을 먹고 너무 피곤하여 일찍 잠이 들었습니다.
첨부파일의 실행 시간은 8분 53초입니다.
Europe tour9 Interlaken & Jungfrau(Swiss)2.exe
유럽여행10일째
프랑스 파리(몽마르뜨, 베르사이유궁, 에펠탑)
11월 6일(日)
스위스 튠호숫가의 한국인이 경영하는 호텔에서 새벽2시에 모닝콜로 일어나서 3시에 조반을 먹고 호텔 주인이 인심을 발휘하여 계란과 사과 한 알씩을 손에 쥐어 주는 것을 받아 3시 15분에 버스에 올라 출발하였습니다.
6시 35분, 스위스와 프랑스 국경에 도착하였습니다. 스위스에서 쇼핑을 한 사람은 국경 사무소에 들어가서 영수증을 제출하고 부가세를 환급받았습니다.
6시 50분, 스위스 북부 바젤과 인접한 프랑스 동부 국경도시 ‘물하우스(Mulhous)’역에 도착하였습니다. 벨기에 브뤼셀에서부터 여기까지 버스를 고치려고 하루를 쉰 것을 빼고는 6일 동안이나 우리 일행을 자기 버스에 싣고 다녔던 이탈리아 출신 버스 기사와도 이별을 하였습니다. 한참을 기다리다가 7시 45분에 '물하우스'역을 출발하였습니다. 우리 일행이 탄 열차는 유로스타(특급)이 아니라 프랑스 서민들이 애용하는 일반열차 3등 객실이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 농촌의 풍경을 원 없이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는 예술과 패션, 와인과 축구, 낭만으로 가득 찬 나라이며 뛰어난 과학 기술과 스포츠 강국으로 유럽에서 가장 자신만의 문화를 잘 지켜나가는 자부심이 강한 나라입니다. 총면적이 547,026㎢로 서유럽에서 국토의 면적이 가장 넓으며 EU회원국 전체 면적의 1/5을 차지하고 있으며 넓은 영해를 가진 나라입니다. 전 국토 면적의 2/3가 평야 또는 구릉이며 남쪽으로는 지중해와 접하며 스페인과는 자연적인 국경으로 이루는 피레네 산맥이 있고, 북서쪽으로는 영국과의 사이에 도버해협, 동쪽으로는 알프스 산맥이 있는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와 접하고 있는 농업 강국입니다.
물하우스역을 출발한지 5시간 후인 12시 45분, 파리역에 도착하였습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파리의 거리를 걸어서 식당(Kronenbourg)으로 갔습니다. 기대했던 파리의 대표음식 달팽이요리를 점심으로 주었는데 너무 황당하여 파리의 첫인상을 완전히 구기고 말았습니다. 우리나라의 골뱅이나 우렁이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후 3시 10분, 소설에 자주 나오는 몽마르뜨(Montmartre, 순교자의 언덕)로 갔습니다. 파리의 가로수인 마로니에 나무 잎들이 비바람에 나부끼고 있었습니다. 높은 언덕 위에 순교자의 성당인 샤크레쾨르성당(성심성당)이 웅장한 모습으로 버티고 있고 그 너머에 떼르트르광장에는 화가들이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오후 4시 18분 몽마르뜨를 출발하여 비 내리는 파리 시내를 가로 질러 달렸습니다. 샹제리제 거리를 지나 5시 45분, 도착한 곳은 베르사이유궁전 정문 앞 이었습니다.
마침 파업 중이어서 입장료를 물지 않고 무료로 입장하였습니다. 서쪽을 뒤로 한 궁전 마당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날개를 단 오메가(Ω)모양의 베사이유궁전(Palace of Versailles, 1979년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은 처음에는 사냥용 별장이었으나, 1662년 무렵 태양왕 루이 14세의 명령으로 개축하여 1682년 루이 14세는 파리에서 이 궁전으로 거처를 옮겨서, 1789년 10월 프랑스 대혁명으로 루이 16세와 마리앙트와네트가 이곳을 떠나 콩코드 광장에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질 때까지 프랑스 앙시앵레짐(구체제) 시기 권력의 중심지였으며, 사치와 화려함으로 베르사유 궁을 치장하다 재정 파탄을 가져왔고, 호화로운 바로크 건축의 대표작품으로 광대하고 아름다운 정원으로 유명합니다.
저녁 6시 28분에 한식당 국일관에서 저녁을 먹고, 7시 40분에 세느강의 ‘바토 무슈 선착장’에서 1인당 10유로(16,000원)짜리 매연으로 숨을 쉴 수 없는 크루스 유람선(한강 유람선보다 훨씬 못한)을 타고 1시간 10분 동안 파리 야경을 둘러보았습니다.
밤 9시 20분에 에펠탑으로 가서 40분 동안 줄을 서서 대기한 다음, 밤 10시에 입장에 성공하여 탑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 라운지로 올라가서 파리의 야경을 보고 40분 만에 내려왔습니다.
파리의 상징인 에펠탑(Tour Eiffel, 높이 307m의 강철 철골구조)은 1889년 프랑스혁명 100주년 기념 세계 박람회의 출입 관문으로 프랑스의 건축가 귀스타프 에펠에 의해서 지어진 탑인데, 높이는 324m이며 건립 당시에는 언론인과 지식인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혀 한때 철거될 위기에 놓였었는데, 지금은 연간 백만 명에 이르는 관광객이 몰려드는 돈 덩어리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 탑에는 3개의 전망대가 있는데, 관광객 대부분이 2전망대까지만 올라갑니다. 당시 철거를 주장했던 작가 모파상이 자주 와서 식사를 하였던 레스토랑도 있다는데 어떤 곳인지 들어가보지 못했습니다.
11시 15분에 호텔에 도착하여, 새벽 3시부터 지금까지 21시간의 기나긴 일정을 마치고, 12시에 잠이 들었습니다.
첨부파일의 런닝 타임은 7분 10초 입니다.
Europe tour10 Paris1(France)2.exe
유럽여행11일째
프랑스 파리(노트르담성당과 누브르박물관)
11월 7일(월) 11일째 흐림(구름과 가끔 비)
어젯밤 자정에야 잠이 들었다가 파리에서 강행군에 지친 유럽의 마지막 밤을 비교적 충분히 쉬고 아침 6시 10분에 일어났습니다. 8시에 조반을 먹고 짐을 챙겨서 버스에 실었습니다. 같은 팀이지만 오늘 저녁 서로 다른 비행기를 타야 하기 때문에 탑승 공항도 달라서 짐도 따로 실어야 하였습니다. 9시 15분에 파리 교외에 있는 호텔을 출발하여 파리 도심으로 들어갔습니다. 어젯밤에 세느강 유람선을 탔을 때 보았던 시타섬으로 갔습니다. 거기에는 오늘의 목적지 노트르담성당이 있었습니다.
먼저 성당 앞(서쪽 광장)에 있는 파리시의 도로원표(道路元標, 모든 도로의 기점)에서 안내인의 설명을 듣고 성당 안을 둘러보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성당의 뒤쪽(동쪽) 마당으로 가서 노트르담 성당의 뒷모습을 보았습니다.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Notre-Dame de Paris)은 중세 고딕 양식의 대성당으로 ‘Notre-Dame’(노트르-담)은 ‘귀부인’, 즉 ‘성모 마리아’를 뜻하므로 ‘노트르담 성당’은 곧 ‘성모 마리아 성당’인 것입니다. 동서의 길이 130m, 폭 48m, 그리고 높이 69m의 4각형으로 된 두 개의 탑이 우뚝 솟아 있는 고딕식 건축양식입니다. 전면에 있는 3개의 출입문 중 맨 왼쪽에 있는 ‘성모 마리아의 문’의 벽에 있는 조각품 중에는 로마군에 의해 잘려진 목을 받쳐 들고 있는 파리 최초의 대주교 성자 드니(Saint Denis)가 천사에 의해 부축 받고 있는 모습 앞에서 나는 섬뜩한 전율을 느꼈습니다. 또, 이 성당은 나폴레옹의 대관식(1804), 파리 해방을 감사하는 국민예배(1944. 8. 26) 등 여러 가지 역사적 사건의 무대가 되기도 하였고, 빅토르 위고의 작품 〈노트르담의 꼽추〉의 무대이기도 한 곳입니다.
노트르담 성당 동쪽에 있는 뒷마당을 구경하고 남쪽방향에 있는 세느강 위의 다리를 건너서 기다리고 있는 전용버스를 타고 파리의 이 거리 저 거리를 돌아다니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버스를 탄 채 솔본느대학 거리, 륙상브르 공원, 빤테온 신전, 콩코드 광장 등을 돌아다니다가 버스에서 내려 20m쯤 떨어진 거리에서 ‘개선문’을 구경하기도 하였습니다.
3개의 개선문 중 이 개선문(Arc de Triomphe)은 나폴레옹 1세가 전쟁에서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1806년 이 개선문을 세울 것을 명령하여 새워졌는데, 고대 로마의 개선문의 형태를 본뜬 이 문의 표면에는 나폴레옹 군대의 승전도가 부조로 새겨져 있고, 600여명의 장군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나폴레옹은 죽은 후 관에 누워서 이곳을 통과하였으며, 1차 세계대전 승리 후 이곳을 군인들이 행진하여 지나가기도 하였답니다. 개선문을 중심으로 12개의 도로가 사방으로 뻗어 있으며, 엘리베이터나, 계단을 이용해서 꼭대기에 올라가면 파리 시내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합니다. 개선문 아래에는 1차 대전 때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무덤이 있고 호국영령을 위한 '꺼지지 않는 불'이 언제나 활활 타오르고 있다 합니다.
파리 번화가의 ‘한성’이라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루브르박물관으로 갔습니다. 계속 비는 내리고 있었고 가이더가 티켓을 사온 후에 우리 차례가 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는데 기온이 떨어져서 몸이 으슬으슬할 정도로 추웠습니다.
루브르 박물관(Le musée du Louvre)은 프랑스 파리의 중심가인 리볼리 가에 있는 국립 박물관입니다. 파리의 세느강변과 함께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루브르 박물관 마당에 있는 밑변 35m, 높이 21m의 강철과 유리로 된 피라미드 조형물은 근대에 건설된 것으로 한 때 어울리지 않다는 평이 많았으나 현재는 루브르를 대표하는 조형물로 명분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루브르宮은 12세기 후반 착공 당시만 해도 궁(宮)이 아닌 요새(要塞)였다가 1672년 루이 14세가 베르사유宮으로 이거하면서, 루브르를 왕실의 수집품을 전시하기 위한 장소로 쓰도록 하였고, 1699년에는 첫 번째 살롱전이 개최되었으며, 박물관으로서의 루브르는 1793년 8월 10일 537점의 회화를 전시하며 첫 문을 열었는데, 전시된 작품은 대부분 몰락한 귀족과 교회에서 징발된 수집품 들이었다 합니다. 나폴레옹이 통치하던 시기에 소장품의 규모가 크게 늘었고, 제2제정(나폴레옹 3세 통치기간)중에 20,000여점의 수집품이 더 들어왔고, 제3공화정 이후에도 기증과 선물로 계속해서 규모가 커져 2008년 현재는 8개의 전시관에 약 25만 점을 보유하고 있는데, 이집트 고대유물관 ‧ 근동 유물관 ‧ 그리스와 에트루리아 로마 유물관 ‧ 이슬람 미술관 ‧ 조각 전시관 ‧ 장식품 전시관 ‧ 회화관 그리고 판화와 소묘관 등이 있으며, 소장품의 종류는 미술품, 파피루스 두루마리, 미라, 유물들, 옷가지, 보석, 게임, 악기 그리고 무기 등이며, 그 중에서 <밀로의 비너스> <사모트라케의 니케> <구데아상> <서기좌상> B.미켈란젤로의 <노예>, 성왕 루이를 비롯한 프랑스 왕들의 왕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 P.P.루벤스의 <마리 드 메디시스의 생애> 등 여러 가지 세계적 명품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박물관에서 나와 우리 일행은 가까이 있는 백화점에서 1시간 반 동안 쇼핑을 하고 파리 공항으로 가서, 밤 8시 20분 서울행 비행기로 이륙하면서 11박 13일의 깜짝쇼 같은 유럽 압축 여행을 끝내게 되었습니다. 다음에 다시 온다면 차분하게 여유를 가지고, 눈과 입뿐 아니라 오감(五感)을 다 즐기는 여행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여행을 다녀와서 곰곰이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외국여행이란 것이 대개 장거리를 오고 가다 보니까 비행기 타기가 버거워 여행이 힘든 것이라 하는데 이번 여행은 비즈니스석을 이용하여 아주 편하게 다녀왔습니다. 동행한 친구의 아들이 우리가 지불한 여행비보다 더 많은 비용을 들여 자기 가족 7명뿐 아니라 우리 부부에게까지 왕복 비즈니스석을 마련해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친구 잘 두어 큰 행운을 입었습니다. 친구뿐만 아니라 그 아드님께도 고마운 마음을 어떻게 표해야 할 지 알 수 없었습니다. 정말 고마웠습니다.
오랜 기간 이 재미없는 여행기를 읽어 주신 여러 분 들에게 감사드립니다. 귀하의 건강을 빕니다. 양수랑 배
Europe tour11 Paris2(France)2.ex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