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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더하기 가시리(加時里).
제주도 동남 쪽 서귀포시 표선면 중산간 지대.
드넓은 정석 비행장이 있고 제주의 상징, 유체꽃의 유체프라자가 여행자를 반기고 있다. 수백만 평의 초지에 갑마장 길이 수 십 리이며 그 사이사이에 풍력 발전소가 하늘을 찌른다. 최초의 리립 박물관 조랑말 체험 공원과 유기농업 선구자 오재길선생의 제주생명농업이 따라비 오름의 앞자락에 자리 잡고 있으며 페교 가시리 초등학교가 갤러리로 변신한 자연사랑 하며 리사무소 주변으로 미식가의 입맛을 돋우는 나목도, 가시, 가스름식당이 소문이 났고 육지 젊은이의 의욕인 디자인 센타, 공작소, 동네가게. 그리고 572카페도 특색이 있다. 말과 소등 목축의 본거지 가시리. 육지에서 이주한 예술인이 많이 정착한 곳이다.
아뿔사(我不不寺)!
자기 자신 我!
아닌 것은 아닌 不不! (아니 부가 중복 되어 뿔로 읽는다)
절 寺! (사찰, 아뿔사의 주지스님은 오칠닥이며 유일한 신도 또한 오칠닥이다.)
칠닥이가 아뿔사라는 절을 세우고 스스로 주지에 오른 것은 되도록 이런 저런 인간관계를 멀리하기 위함이다. 즉 새로운 인연은 맺지 않고 맺었던 인연은 가급적 단절하고자 함이다. 속세를 완전히 떠나지는 못했지만 반승반속(半僧半俗)의 상태라도 유지하고자 한 절실한 이유가 있음이라.
임 팀장 소개로 생명농장에서 지낸다는 김퇴군이 승마장 알바로 채용이 되었다. 일단 그는 첫날부터 머리가 아플 정도로 말도 많고 간섭도 많았다. 그러나 어쨌거나 아는 것은 많은 듯하다. 과거가 화려하다고 연신 이빨을 푸는데 그것은 검증이 되지 않는 부분이니 다들 귓전으로 넘겨 버린다.
"아뿔사요? 속세에 있으면서 스님처럼 사시겠다고요. 행님, 이자 내 만났쓰이 아뿔사는 모하니더."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김퇴군이 오칠닥에게 호기롭게 한 말이다. 그는 그렇게 접근 해 들어왔다.
"삼춘, 저 사람 조심해야 해요 사기꾼 같아요."
수진이가 그 말을 하지 않아도 칠닥이는 모양새가 마치 삶은 달걀을 까놓은 듯 재수 없게 뽀얀
김퇴군을 상종할 생각이 애초에 없었다. 가지거나 많이 아는 것이 아뿔사의 주지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오히려 저런 인간일수록 멀리 할 일이다.
옛날 70년대에
조포, 나포, 황포는 칠닥이와 같은 초등학교 같은 학년이었다.나포는 전임 면장인 나면장의 아들이고 조포는 의용소방대장의 아들이며 황포는 현 부면장의 아들인데 이들의 공통점은 뛰어 난 구라쟁이요, 포쟁이라는 거다. 그 중에서 단연 으뜸은 황포이었다.
"우리 마(마을)에, 백 년 묵은 비비 꼬인 느티나무 밑에는 석유가 퐁퐁하고 솟는데이. 그래가꼬 마 사람들이 옹달샘 매치로 요만한 담을 쌓았는기라. 맨날, 맨날 석유가 찰랑 찰랑하이께는 우리 백동사람들은 고 걸로 낮에는 발동기를 돌리고 밤에는 호롱불을 켜가 석유갑슨 한 푼도 안 드는 기라."
열 살 아이의 구라치고는 가히 타고 난 수준에 이른다 하겠다.
나치의 계몽 선전부 장관 괴벨스는 그랬다.
"거짓말은 처음에는 부정되고, 그 다음에는 의심받지만, 되풀이 하면 결국 모든 사람이 믿게 된다."
김퇴군은 두 달 이상을 칠닥이 옆에 바짝 붙어서 괴벨스처럼 나발을 불어댔다.
아뿔사, 그것은 부처를 흉내 내는 어설픈 설계였다. 꿩 놓치고 알도 놓치고 체면까지도 똥칠하도록 그 누구도 그를 부처의 그림자 조차라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가 자아도취 할수록 옆에서는 감나무 밑에서 떨어지는 것을 받아먹고 있는 것이다. 결국 만고의 얼치기는 국 쏟고 뚝배기 깨고 송곳으로 제 눈 찌른 오칠닥이다. 그를 별개 로하고, 찢어진 눈매에 빤질거리는 눈알이 뭇 여자들에게는 또 다른 매력인 갑다. 포주 돈 빌려다 갈보 끼고 잔다더니 쉰내 나고 유통기한이 한 참이나 지나도 가리지 않는 먹새는 논둑 족제비가 까치 잡듯 염치없고 능갈맞은 간릉으로 부박한 삶은 감는 유고림, "형님, 잘 먹겠습니다!" 애당초에 얻어먹어도 돈은 못 내겠다고 뻔뻔함이 남 덕 보자는 데에는 목을 매면서 남을 위해서는 단돈 만 원도 쓰지 않는 거지근성을 지니고서는 밉다 밉다 하니까 분바르고 와서 요래도 밉소 할만치 암팡진 채방관, 그리고 젖은 솔잎 태워서도 꿩 구어 먹는 재간으로다 모기다리에 이빨을 찔러 피를 빨 그런 파렴치가 여물데로 여문, 모래바닥 길 십리 걷다 보면 하나 쯤 기생 하는 눈 찌르는 가시나무 같은 존재 김퇴군과 비정상적인 아내 잔 재주꾼 곤준숙부부.
이렇게 화려한 요원들이 농장에서 터전을 구축한 것이다. 물론 그것이 가능한 것은 오원장의 전폭적인 지지와 기대,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농사일에만 매진하겠다는 칠닥이를 제외한 네 사람은 한동안 농장에 사무실공사하는데 에 사뭇 바빠 보였다.사무실은 꾀 고급스럽게 꾸며졌다. 김퇴군의 안목과 곤준숙의 디자인, 유고림의 재주가 결합한 것이다. 돋보이는 사무실 외형과 함께 퇴군이의 허세도 성장해 갔지만 그에 반해 원장 부인 성권사나 오재길선생 부인 방권사는 그만큼 못마땅해 했다. 오원장은 그런 만큼이나 그들을 이해 할 수 없는 정도로 옹호를 해 주었다.
농장에서 김퇴군은 일부 싸늘한 눈초리에 분노하고 거침없는 말을 내 뱉었다.
“나를 내 쫓은 년, 성권사는 본래 농장 일을 싫어했어요. 이제 칠닥이 형님이 농장을 맡으소. 내 성권사, 저 여자를 내보낼 거요. 나는 이제 이 농장에 올인을 한 거요. 싹 바꿀 거요!”
칠닥이는 순간 머리털이 쭈빗하였다. 마치 점령군처럼 호기로운 퇴군에게서부터 농장의 암울한 장래가 얼핏 비췬 것이다.
잘한다 하면 미친년 요강에 밥한다더니 원장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은 양 온갖 사업을 다 성공시킬 듯한 김퇴군은 불과 몇 달이 못가서 소금에 절인 푸성귀처럼 축 쳐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그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잠적한 김퇴군을 칠닥이는 어렵게 가시식당에서 만났다.
"원장님이 약속을 안 지키는 바람에 이래 된 겁니더."
"원장님과 무슨 약속을 했던가?"
"올랫 길 체험농장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우리 법인체에 1억을 잠시 빌려 주기로 했는데 민원을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고, 어쨌든 제가 일을 크게 벌린 잘못이 있습니다."
"올랫길, 그 건 나중 일이고 자네가 내 앞으로 대출을 내 갈 때는 거액의 부동산 거래를 앞두고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현금으로 200만원 가져간 돈은 내 전 재산이라고 했네. 그 건 언제 줄 건가? 내 망가지는 치아를 치료할 돈일세. 아픈 이로 음식을 씹어 봤겠지? 들어봤자 배도 안 부른 변명 듣자고 하는 게 아닐세. 신뢰는 마분지와 같아서 한 번 구겨지면 아무리 다림질해서 펴도 그 흔적은 남는 걸세. 입으로 임기응변 하는 것으로는 장사는 해도 사업은 못 해. 장사와 사업은 그 깊이가 다르기 때문이야. 피할 수 없는 것이 인연과보라는데 그 과보를 어찌 다 받으려 하는가?"
"면목은 없습니다만 저로서는 원장님에게 야밤중에 섭한 전화를 받기도 했습니다. 제가 원장님을 위해 전국을 돌면서 농장 이사진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사퇴 도장을 다 받아내고 그랬습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인가?"
"농장은 농사 법인체이기 때문에 농사를 짓지 않으면 모든 재산이 사회에 환원 되게끔 되어 있습니다만 제가 그걸 어떻게 해 주려 했던 겁니다. 오재길선생 후손의 입장에서는 어마어마한 아버지의 재산이 마냥 공익에 묶여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이 억울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퇴군이는 알아들을 수 없는 전문 경제용어를 썪어가며 원장과 자신의 사이에 모정의 거래에서 배신
당했다는 듯이 하면서 이야기 요점을 피해 나갔다.
사람이 이게 사기구나 하고 인지하게 되면 바보가 되었구나 싶어서 창피해 누구에게 얘기를 못하게 되거든.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 사기 당한 사실을 부정하고 믿으려고 애를 쓰지. 아니다, 줄 것이다! 그의 사정이 어쩌고, 그러면서 가슴에는 차돌맹이가 박히는 것이지.
사실은 하나씩 들어나기 시작하였다.
원장이 김퇴군으로부터 돈 천만 원을 부탁을 받고는 고민의 모습이 역력하자 칠닥이는 이제는 밝혀야 싶어서 입을 열었다.
"저도 진작에 돈을 해 주었는데 아무래도 못 받을 것 같습니다."
"아이구~ 칠닥씨, 큰 일 났네!"
칠닥이의 실토로 손해를 피할 수 있었던 원장은 칠닥이에게는 오히려 싸늘해지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닭장 안에 족제비를 몰아넣은 이가 원장이라 할 수도 있는데 마치 그럴수록 처럼, 그는 칠닥이에게는 무심하고도 냉담하였다. 불행을 안고 있는 者가 옆에 있다는 건 부담스러운 것이다.
법원에서 서류가 날아오고 칠닥이가 태풍을 맞은 방풍림처럼 흔들리자 농장에서 귀촌 생활하는 정우아빠가 위안을 주며 안타까워했다.
"집에서 기르던 강아지도 말이지요, 어디 나가서 교통사고 당해서 들어와 절뚝거리고 그러면, 첨에는 안타깝고 측은하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그 몰골이 짜증스럽고 바보스러워지는 것이지요."
사람 사는데 고마운 경우가 있지.
근데, 그 고마운 경우가 일상이 되다 보면 당연하다 느껴져.
당연함이 지속되면 고마운 것도 바보스럽고 급기야 에는 미워지기까지 하지.
이왕 하는 거 좀 더 잘하지 하면서.
그 바보스러움이 밉상 받기 전에 관계를 팍 끊어야 미련이 일고 그리워질 수 있는 거야.
그리움,
그리움은 아름답지.
아름다움,
무지하게 어렵다 하지.
칠닥이는 결국은 떠날 수밖에는 없겠구나 하는 생각에 막연하였다. 벌써, 그사이에 싸늘한 눈초리로 철조망을 쳐 두었더군.
제기랄!
농장 설립자, 백세를 목전에 둔
노인은 틈마다 꼬박꼬박 졸았다.
열반을 연습하시는 것이다.
오재길선생은 소파에 몸을 깊게 묻고 머리를 창틀에 기댄 채로 잠들어 있었다.
칠닥은 무릎을 꿇고 노인의 두 손을 가만히 잡았다.
"어르신, 제가 누군지 아시겠니껴? 제가 누구이껴?"
노인은 다소 혼란한 눈빛이지만 지긋하였다.
농장을 떠나기로 결심한 칠닥이가 작별 인사를 고하기 위해서 노부부의 거처로 들어섰다. 선생의 부인, 방권사는 눈물이 흥건해서 제대로 말씀을 못 이었다.
"우리가 덕을 좀 보자고 했는데 이렇게 떠나다니 어쩌우."
노인이 근래 들어 와 부쩍 기력이 떨어 진 상태이었다. 얼마 전만 하더라도 칠닥이가 모시고 나가 목욕도 하고 이발도 하고, 식사와 해변 산책도 했었는데 이제는 배변조절을 못하시니 외출은 언감생심이 되어 버린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그런 일을 가정에서 다 처리를 할 판이다. 농장에서는 담당할 사람이 칠닥이 밖에는 없고 그 자신도 각오하고 있었던 점이다.
"이자는 떠날라니더!"
"떠나? 어디로."
"바람 부는 데로 가겠지요. 지는 어르신 옆에 잠시 머물던 나비일 시더. 그 나비가 바람이 세차서 또 딴 데로 날라 가는 것이더."
"어 허~"
노인의 한 숨은 깊고도 애잔하였다.
칠닥이가 큰 절을 올리고자 두 손을 바닥에 붙이고 엎드리자, 아랫배에서 똬리를 틀고 있던 서러움이 꿈틀꿈틀 위벽에서 회오리를 치는가 싶더니 식도를 타고 목젖을 휘감아 꾸역꾸역 토해졌다. 꺼억 꺼억 늑골이 찡할 정도로 흐느꼈고 할머니 방권사도 연신 눈물을 닦는다.
"내 평생에 이로서 세 번의 빚을 지는 셈이지요. 첫 번째 빚은 결혼 자금이었어요. 팔십 년도 당시에 나나 부모나 장가 밑천을 댈 형편이 못 되었지요. 궁여지책으로 거래하던 음료수회사의 물건을 받아 청량리 경동시장에 덤핑처리해서 현금을 마련한 거지요. 월초에 외상으로 받아서 월말에 갚는 방식인데 한 달간 현금을 이용하는 대가로, 시세보다 싸게 한꺼번에 넘기는 물건은 한 이 할 정도 손해를 봐요. 천만 원치 팔아서 팔백만 원을 손에 쥐고 장가를 들었는데 결혼한 다음 달에는 1250만원의 물건을 받아서 전 달의 1000만원을 갚고 그 다음 달은 1570만 원이 전 달의 1250만 원을 감당하게 되는 거지요. 그 다음에는 1570이 1965만으로, 그렇게 불어난 돈이 한 이천오백은 되었는데 결국 연체이자까지 무려 한 사천을 다 갚고야 빚에서 벗어났어요. 지독하게 몸부림을 친 거지요. 새벽에 우유배달하고 낮으로 자가용기사 하고 밤에는 화물 수송하고요. 그랬는가 하면 버스운전을 할 때는, 교대 하면 곧바로 잡상인으로 변신하여 거리를 헤매고는 했는데 그러면서 후유증이 컸어요. 운명의 여신은 빚이라는 굴레를 벗겨주는 대신에 가시 아픈 이혼이라는 면류관을 씌워 주더군요. 그러니 나아진 것은 없는 셈이지요? 두 번째 빚은 귀농해서 진 농자금입니다. 구십 년도 끝자락에 아이엠프 당시, 이혼하고 방황 끝에 전라도 변산으로 귀농을 결행했지요. 영농조합에 월 팔십만 원을 받기로 하고 농산물 운반차량을 운전하는 일을 맡았는데, 귀농 한 달 만에 무위로 끝났어요. 음주운전에 적발되어 면허가 취소되었거든요. 그래서 억지로 시작한 밭농사가 일 년 순수익이 고작 17만원 불과했지요.
안되겠다 싶어, 한우입식자금 1300만원을 내었어요. 내가 기거하던 농가주택이 그 집에 살던 나이 든 과부가 산래에 있는 새신랑을 얻어 재취로 들어가면서, 무기한에 무료로 빌린 집이었는데 그곳에 우사를 짓는다고 레미콘을 깔고 지붕 덮고 막 그럴 때에 재혼한 과부의 남편이 대들보에 목을 매었지요. 농협에 빛이 많았다나? 하면서요. 집주인은 도로 과부가 되어서는 돌아와 내 살던 집을 비우라 하잖아요? 어쩌겠는가, 우여곡절을 겪은 후에 새 집을 얻었고 그러면서 소 입식자금 1300이 경비로 다 날아갔고 나는 송아지 꼬랑지 한 번 잡아보지도 못한 셈이 되었지요."
묵묵히 듣고만 있던 정우아빠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영농조합일도 못하게 되고 소 사육도 무산되자 동네에 동갑내기 토박이 이백연
가 해변에 포장마차를 해 보라고 권했고, 역시 갑장인 친구 영철이가 마차를 만들어 주었지요. 그 놈을 끌고는 포구에 있는 어촌계 공판장 주차장으로 갔어요. 촌사람들이 인심은 좋아도 일단 이해관계에 얽히면 매서워져요. 어떻게, 어떻게 아부에 아부를 더 해서 인심을 얻어 땅 한켠을 차지하고 시작한 장사가 한 겨울을 연습으로 넘기고 봄을 맞아 성수기에 접어들었지요. 재수 없는 포수는 곰을 잡아도 웅담이 없다고 마침 바로 그즈음에, 2003년 부안핵폐기장 사태가 일고 온 군민들이 엄청난 소용돌이에 휘말렸지요. 동네마다 노란깃발이 내 걸리고 위도를 제외한 부안군민은 핵 반대 투사가 되어 공권력 뿐 아니라 위도 주민조차도 적으로 낙인을 찍고 날로 날로 사나워져 갔지요. 위도는 보상금이 걸려 있으니 그 쪽 사람들은 반대에 반대를 하는 입장이지요. 부안읍에는 까마귀라 불리는 전경 1001부대가 골목까지 장악을 하는가 하더니 수시로 시위와 더불어 최루탄 연기가 자욱했지요. 누가 구속이 되고 누구, 누구가 부상하고 그런 난리가 5.18 때 광주가 이렇겠구나 싶었어요. 한 참 후에나 결국 소요는 가라앉았지만 전망 좋은 해변에 나름대로 우뚝하던 포장마차도 녹슬어 내려앉아 있었어요. 더구나 당시에 나는 뜻하지도 않게 해괴한 삼각관계에 얽혀서 어떤 한 사람으로부터 엄청나게 인간적인 미움을 사고 때로는 살해의 위협까지 받아서 더는 못 버티고 변산을 떴지요. 역시 빈 몸이었어요. 지금 제주도를 뜨는 이 기분이 12년 전 그 때 그 심정이랑 똑같아요."
소나무는 상처로 관솔을 만들고 감나무는 상처로 무늬를 만들며 손톱은 슬플 때마다 돋지만 발톱은 기쁠 때마다 돋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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