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주문진항에서 주문진해수욕장까지
구름을 요동치게 한 바람이 땅 위에도 불어주었더라면 차라리 좋았을 것인데.
그랬다면 아침 일찍 집을 해체해 바로 떠날 수 있건만 비를 내리지 않은 것과 아침해가
쨍쨍한 것만을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천막의 이슬을 씻어내고 햇볕에 말리느라 출발이 늦어졌다.
정자 안에 집을 지으려 하는 이유중 하나가 이 때문인데.
드디어 또 하나의 길 이름이 등장했는가.
해파랑길, 관동별곡8백리길, 평화누리길(고성군토성면에서 내륙으로 방향을 틀었다)에
이어 낭만가도(Romantic Road of Korea).
우리 글과 영어, 중국어, 일본어, 독일어 등의 설명 안내판이 주문진항에 등장했다.
고성에서 속초 ~ 양양 ~ 강릉 ~ 동해 ~ 삼척까지라면 관동별곡과 겹치지 않나?
지자체 강릉인들 잠자코 있겠는가.
'바우길'이라는 이름으로 길 경쟁에 뛰어들었다.
하나의 길이 4개의 이름으로 불리는 어처구니없고 한심한 낭비가 얼마나 지속될까.
경직성 경비마저 조달하지 못하는 지자체들이 벌이는 잔치들을 보며 걷는 동안 회의가
내 안에서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지방자치제가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의 근간이라 해도 우리 국민의 정서에는 재고해야
할 제도라는 위험한 생각이 부쩍 확대되어 가고 있다.
주문진항의 곳곳에 갖가지 형상의 오징어 조형물이 서있다.
오징어가 주문진의 효자 어종이라는 뜻일 것이며 해마다 열리는 오징어축제가 올해로
13번째라는데 이틀 차이로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다.
10월 11일 부터라는데 오늘은 10월 9일 한글날이니까.
간밤에 작업하던 배들이 아직 입항하지 않았는지 경매장이 한가롭고 상가도 문을 열기
전인 아침에 주문진항을 벗어났다.
주문진등대 코너를 돌아 오리나무가 많아서 오리나루가 되었다는 소규모어항 오리진항
(五理津)을 지나면 지방어항 소돌항이다.
마을의 형국이 누워있는 소 같아서, 또는 마을 앞 바닷가의 바위가 소 같다 해서 우암진
항(牛岩津)이었는데 이름을 한자풀이하듯 '소돌'로 바꾼 것은 주민들의 요구였단다.
친숙하고 대중 선호적인 이름이라 해서.
소돌항 아들바위공원에는 전망등대와 소바위, 코끼리바위 등 기괴한 바위들이 있다.
그중에 '아들바위'가 있어 아들바위공원이라 했단다.
"1억5천만년전 쥐라기(Jura紀)에 지각변동으로 바닷속에서 지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바위로 수세기전 무자식 부부가 백일기도 끝에 아들을 낳은 후로 아들을 원하는 부부가
기도하면 소원을 성취한다" 는 전설을 간직함으로서 아들바위가 되었다나.
아들바위공원 끝 소돌해수욕장에는 '아라나비'가 있다.
서해의 대천해수욕장(충남대천), 남해의 덕포해수욕장(경남거제),동해의 소돌해수욕장
(강원주문진)이 각기 서-남-동 해를 대표하고 있나.
'아라나비'는 '바다'의 순우리말 '아라'와 나비의 합성어로 '짚라인(Jipline)'이라는 신종
레포츠다.
열대우림의 울창한 밀림을 이동할 때 뱀, 벌레와 독극식물들을 피하기 위해 큰 나무들
간에 로프를 걸어놓고 이 로프를 타고 옮겨가던 교통수단에서 비롯된.
소돌~주문진~황호 세 해수욕장은 경계선이 없어 하나의 긴 해수욕장에 다름 아니다.
전체를 주문진해수욕장으로 묶어서 관리하면 전국 제1의 해수욕장이 되고 관리 비용도
절감되련만 마을들의 이해관계 때문일까.
동해의 석호 중 하나인 향호(香湖)의 보행자전용 다리(향동교?) 부터는 7번국도가 얼마
동안 나란히 가는데 간밤에 정자를 찾아 여기까지 왔다.
"러일전쟁 직후에 임자 없는 땅이라고 억지로 우기면 정말 곤란해,
신라 장군 이사부 지하에서 웃는다 독도는 우리 땅(5절)"
'독도는 우리땅' 노래를 생각하게 하는 기념비가 강릉시청소년해양수련원 앞에 서있다.
한국해양청소년단 강원연맹은 청소년들에게 우산국(울릉도, 독도)을 복속시킨 신라의
장군 이사부(異斯夫)를 기리게 하려는가 우산국 복속 1500년(2012년) 기념비다.
남애항 추억
청소년해양수련원을 끝으로 강릉시를 떠나 양양군 현남면(襄陽 縣南) 땅에 들어섰다.
현남면의 이름도 기구했다.
혈산현(고구려)에서 동산현(명주의 영현/신라), 익령현(고려), 현남면(이조)이 되었다.
광복은 되었으나 38도선 분단으로 양양군에서 유일하게 남쪽이 된 현남면은 더부살이
하듯 명주군(강릉)에 속했다가 양양군이 휴전선 이남이 됨으로서 환원되었단다.
첫 마을은 강릉과의 경계라 해서 지경리(地境里).
동일 지명으로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전국적인 지명이다.
광역시도계의 어딘가에 꼭 있고 군계에도 더러 있으니까.
내가 걸어온 서-남-동 해안에서 지나온 지경마을만 해도 2자리수에 이른다.
7번국도에서 분기된, 국도에 버금가는 포장도로가 해안에 조성된 우거진 숲 지경공원을
기.종점으로 하여 화상해안길이라는 이름으로 해안따라 북상한다.
낭만가도가 어디를 돌아왔나 나타나서 편승한다.
해파랑길도 뒤질새라 이름표를 달고 나타난다.
지금 내가 걷고 있는 길은 어떤 이름의 길인가.
수시로 자기네의 길과 겹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오직 내 길, 서-남-동 길을 걸어가고 있을 뿐 아무 길도 따르지 않는데 각기 자기
길이라고 우겨대는 형국이다.
화상1교를 건너 화상천변 숲속의 정자로 갔다.
정자 마루에 벌렁 누워 간밤의 한을 잠시나마 달래고 원포 해변으로 돌아갔다.
멀리 바라다 보이는 마을이라 해서 원포리(遠浦)라는 마을 해수욕장과 매바위길로 바뀐
해안길을 따라 남애1리해수욕장 뒤 한굽이를 돌아가면 남애2리의 국가어항 남애항이다.
포매리(浦梅)의 매화열매가 남애지역으로 떨어지는 형국이라 하여 낙매(落梅)였던 마을.
남쪽 바닷가라는 뜻의 남애(南涯)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렀다는 어촌이다.
비록 수년에 한번 들른다 해도 내 단골집인 '바다회집'이 3층 빌딩으로 변했다.
낮은 슬레이트지붕의 전형적 옛 어촌집에 이어넓히기를 거듭한 가건물에 다름아니지만
강릉 이북 동해안에서 가장 신선한 회를 가장 싸게 먹는 3대를 잇는 어부의 집이라 했다.
집과 길, 인심까지도 엄청 변했지만 "해수욕장,방파제와 등대, 바위섬, 고깃배와 횟집 등
바다의 정취를 한꺼번에 모아놓은 집약형 바닷가"라는 표현에 이의 달 생각이 전혀 없다.
양양8경의 하나인 남애항이 삼척 초곡항, 강릉 심곡항과 함께 강원도 3대미항으로 꼽힌
다는 것도 시비하지 않는다.
다만 "강원도의 베네치아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항구"라는 소개에는 울화가
치밀지 않을 수 없다.
과연 베네치아(Venezia/이탈리아)를 제대로 보고 와서 하는 비교인가.
옛 베네치아 공화국의 수도였으며 희곡'베니스의 상인'(The Merchant of Venice/영국
W. Shakespeare)으로 잘 알려진 27만인구의 항구도시(석호에만 3만 이상)와 비교해?
차라리 베네치아를 이탈리아의 남애항이라 한다면 자긍심이라도 인정하지만 관광사대
주의적 자세가 역겨워서 하는 말이다.
우리 보다 일찍 개발된 것은 사실이며 한자리에서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볼 수 있는 항구
라고 감탄하지만 우리나라 해안에도 있다.
아름답기는 커녕 지저분하고 소매치기 천국이다.
내게 어촌 남애와 바다회집을 소개한 분은 강원도의 술이었던 강릉 K소주의 CEO(당시)
C 씨였는데 매번 강릉에서 예까지 오는 그 분의 소박한 성품에 늘 감동했다.
그는 회사의 고급 소주 몇박스를 내차에 싣게 하기를 걸르는 일이 없었다.
이 술을 나눠 마실 때마다 그에게 감사하는 마음이었으며 이 횟집에 들를 때도 그랬다.
강릉 이북 동해에 가면 그의 안내 없이도 찾게 됨으로서 단골집으로 굳어졌으니까.
남애3리해수욕장에 이은 갯마을해수욕장 끝에는 포매호의 하구를 왕래하는 군 순찰용
구름다리가 있으나 군 부대는 철수했건만 다리에 잠겨진 자물쇠를 열 길이 없다.
백로와 왜가리의 번식지라는 포매호의 가장자리로 난 7번국도의 포매교를 통해 건너면
국도 따라 2km에 달하는 긴 남애해수욕장이다.
동해안의 숨은 진주라고 불리는 해변에는 부족한 것도 불편한 것도 없는 것 같다.
큰바다, 광나루로도 불리는 광진리(廣津) 낮은 고개의 앞바다는 막힌다.
펜션의 이미지를 달리 한 마이대니와 관음성지의 이름을 건 휴휴암이 차지했다.
이들이 아니라도 이 일대는 고민해야 할 지역이다.
해안길을 내려는 무리한 욕구에 아름다운 자연이 훼손되기 십상이겠기 때문이다.
내부는 보지 못했지만 동해가 마이대니(MYDANNY)를 위해 있는 것 처럼 바다를 활용
하고 있는 펜션이다.
십수년전(1997년?) 바닷가의 와불상 발견이 동기가 되어 창건되었다는 휴휴암(休休庵).
서-남-동 길에서 들러온 포항 해변의 방생도량 심휴암(心休庵)이 생각났다.
'처처안락 처처불성'을 표방하고 있는, 해변의 찻집같은 방생도량 심휴암.
휴휴암도 백팔 번민을 내려놓고 쉬고 쉬면서 부처님을 기리라는 뜻의 이름이었을 터.
'관음성지' 라는 이름의 거대 사찰로 발전(?)하고 관광명소가 됨으로서 휴휴의 의미는
어디론가 증발해버렸고 또 하나의 사찰 신화가 만들어져 가고 있겠지.
연화도(경남 통영)의 연화사와 보덕암, 기장(부산)의 해동용궁사 처럼.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등장할 날도 멀지 않을 것이고.
땅으로 인한 법정 다툼이 있다는 소문인데 사찰과 재벌의 땅 싸움이 어떻게 끝날까.
가장 쉬운 방법은 부처님의 원력으로 그 재벌을 열성 신도로 만드는 것 아닐까.
죽도 단상
휴휴암 건너편 국도변의 휴휴암쉼터(멧돌순두부)에서 순두부로 아침 겸 점심식사를 한
후 7번국도를 떠나 광진(광나루)해안으로 내려섰다.
해송천(해송교)을 건너면 인구리의 해수욕장과 어촌정주어항 인구항이다.
인구항의 끝이 섬 아닌 섬, 송죽이 사철 울창하다 해서 죽도(竹島)다.
육계도(陸繫島)라 하는 이들이 있으나 확신은 없다.
(육계도란 뭍과 잘록하게 이어진 모래섬을 말하며 목섬이라고도 하는데)
아무튼, 육지와 절로 이어져 섬 굴레를 벗어버린 섬 정상의 죽도정(竹島亭)에 올라섰다.
바다에 연한 바위지대의 잔교를 타고 회랑을 돌면 오르내리는 데크가 있다.
1965년, 현남면 부호들이 주축이 되어 죽도의 해발53m 정상 송림속에 건립했다는 양양
8경의 하나인 정자다.
동편 망망대해의 쪽빛수평선이 상쾌하고 남쪽으로는 남애항과 바다에 점점이 박혀있는
휴휴암 바위들, 북쪽 동산항이 한눈에 잡히고 인구항이 아늑하게 다가왔다.
1km의 짧은 둘레중 2분의 1에 불과하지만 기기묘묘한 형상의 크고 작은 바위들이 산재
하여 걸음을 멈추게 하고 두 눈을 사로잡는 바닷가.
안내판의 귀용바위와 연사대, 석구(石臼/절구바위), 주절암,청허대 그밖의 뜻도 모르는
이름들과 짝맞추기 하느라 애먹게 하는 성의 없는 관계 당국자들이 원망스러웠다.
내력을 모르는 곳에는 으레 등장하는 단골이 마고할매의 전설이다.
죽도의 절구바위를 비롯해 온갖 바위들도 욕심쟁이 마고할매가 무얼 만들다 말았다는
것으로 정리하고 말아야 하다니.
안내판의 '청허대'와 '淸雲臺' 바위는 어떤 관계?
양양군 당국자들에게 관광객은 무엇인지?
죽도 벼랑의 죽도암(庵) 관음전(觀音殿) 앞에서 불자 아닌 길손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해수관음상이 바다를 응시하고 있고 탑도 서있고 자그마한 2층 요사채도 있는 암자.
바다에는 휴휴암 앞바다처럼 와불, 장삼, 가사라 해도 될 만한 바위들도 있다.
휴휴암이 묘적전(妙寂殿)으로 시작했다면 죽도암은 관음전에서 출발했다.
이 관음전이 휴휴암의 묘적전, 굴법당(妙寂殿,窟法堂)이 되지 말란 법 없지 않은가.
그런데 현실은 왜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일까.
이 양극 현상은 사찰뿐 아니라 기독교 교회와 다른 종교들도 다를 것 없다.
이 시점에 석가와 예수가 우리 땅에 온다면 어느 집으로 향할까.
그 때 석가 없는 절, 예수 없는 교회가 판가름나겠지만 단언컨대 당장에도 알 수 있다.
석가도 예수도 부자보다 가난한 집으로 갈 것이다.
"머니 머니(뭐니) 해도 머니(money)가 최고"라는데, 돈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그들은 왜 돈을 비판했을까.
돈(富)은 용도에 따라서 전혀 다른 옷을 입을 뿐 선도 악도 아니지만 부의 축적과정을
문제삼은 것이다.
탐심을 악의 근원으로 본 그들에게 탐심과 탐물은 동의어다.
그래서 백년탐물이 일조진이며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좁은 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했다.
죽도해수욕장에서 동산해수욕장과 동산리(銅山) 지방어항, 동산포해수욕장으로 간 후
해안길이 끊기는 구간을 운 좋게도 여행중인 승용차에 편승했다.
마을 중간으로 흐르는 하천 때문에 잔교가 많다 해서 잔교리(棧橋)라는 잔교해수욕장을
지나 북상한다는 승용차에서 하차한 지점은 현북면(縣北) 기사문리 38도선 휴게소.
반세기에 10여년을 더한 세월이 흘러서 까마득히 잊고 살지만 이 지점 이북은 6.25민족
동란의 의미가 전혀 다른 지역이기 때문에 걸어서 통과하고 싶었다.
걸어가면 발자국 소리가 이상하게 나는 백사장이라 명사(嗚沙)라고 했다는 해변.
분단과 어떤 관계가 있나 싶은 생각이 들게 했는데 기사문리(基士門)로 개명했단다.
일반적으로 양반이 살지 않는 어촌에 양반집 솟을대문이 있어서 양반의 문이 있다 하여
기사문리가 되었다는 마을이다.
7번국도 38선교를 지나 기사문해변으로 내려갔다.
어촌정주어항 기사문항까지 간 후 7번국도를 타야 하는 하조대까지 버스를 탔다.
국도노선 중에 가장 열악한 구간인데 차 없는 길을 걷는 것은 즐거운 생활이지만 공포의
차도로 내몰리는 것은 형벌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었다.
송강 정철도 하륜, 조준을 경원했던가
1975년 영동고속국도의 개통으로 동해안의 교통이 편리해졌다.
서해로 몰리던 수도와 중부권의 피서객들이 물맑은 동해로 틀기 시작했다.
속속 개장하는 해수욕장 대열에 포함된 하조대해수욕장.
1976년(?)에 양양군 현북면 하광정리(下光丁) 해변에 개장된 대형 해수욕장이다.
고려말 문신으로 이성계의 쿠데타에 가담한 이조의 개국공신 하륜(河崙/1347~1416)과
조준(趙浚/1346∼1405)이 만년에 보냈던 곳이라 하여 하조대(河趙臺)라는 곳.
망한지 오래인 서민금융 M무진(無盡)의 자회사 T관광여행사(당시)가 백사장에 무수한
방갈로를 지어놓고 거의 독점 운영하던 때 내 가족 5명이 며칠 보냈던 곳이다.
동연배인 하륜과 조준은 운명적으로 같은 배를 탔고 만년까지 함께 했던가.
고려말 문신으로 출사하여 정몽주와 함께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과 역성쿠데타(易姓)를
반대했던 그들은 결국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지조를 버렸다.
야간에는 해안에 얼씬도 할 수 없어서 불편이 여간 아니었던 그 때, 이즈음과 달리 멀리
떨어져 있던 하조대에 가서 비분강개하며 포은을 기렸던 기억이 새로웠다.
또한, 혈기 왕성했던 그 때로부터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전혀 다름이 없다.
역성이란 세습왕조가 바뀌는 것을 말한다.
평화로운 방법으로 바뀌면 선양(禪讓)이고, 방벌(放伐)은 이즈음의 유혈 쿠데타다.
그러니까, 왕씨의 고려가 이씨의 조선으로 바뀌는 역성 과정은 유혈 쿠데타였다.
이성계가 진정코 우국충정이었다면 최전방 위화도(威化島)를 버리고 회군할 수 없으며
못난 왕이라도 끊임 없이 간언하는 것이 신하의 도리다.
5. 16쿠데타 역시 이성계의 쿠데타와 다르지 않기 때문에 나는 그들을 비판하는 것이다.
진정코 구국의 일념이었다면 출범한지 겨우 9개월인 정권을 총칼로 뺏지 않고 전후방을
철통같이 방비하는데 총력을 다했을 것이다.
이것만이 국군의 사명이이니까.
그들을 증오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자명하지 않은가.
우리나라 명승(제68호)이며 양양8경의 하나인 하조대 일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해수욕장은 물론 주변 환경이 완전히 개조, 개편되었다.
하조대 육모정자에 걸린 택당 이식(본란 2회글 참조)의 시에 "臺名河趙自何年(대명하조
자하년/하조 대이름 시작된지 얼마인가) 形勝兼將姓氏傳(형승겸장성씨전/빼어난 풍광
과 성씨 함께 전해오도다)......" 라 했다.
이로 미루어 여러 하조대 설화 중에 하륜과 조준의 전설이 으뜸인 것 같다.
시판에는 백헌 이경석(白軒 李景奭/1595~1671)의 시도 함께 있다.
백헌은 택당의 10여년 후학이지만 한 시기에 인조의 조정에 있었으며 병자호란때 삼배
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라는 치욕의 삼전도비문(三田渡碑文)을 지었다.
택당이 죽던 1647년에 좌의정에 올랐고 2년 후에 영상이 된 인물이다.
하조대 일대는 명승 답게 절경이다.
"우뚝 솟은 기암절벽과 노송이 어우러진 멋진 풍광 속의" 육모정 하조대에 올라서 망망
대해 동해를 가슴으로 안아 보라.
영혼을 숨막히게 하는 온갖 체증까지도 뻥 뚫릴 것이다.
바닷가 단애에 뿌리박고 200년을 파도와 함께 살아온 미려한 노송(보호수)과 만물상의
축소판에 다름 아닌 바위군, 무인등대와 조형물들까지 매혹적이지 않은 것이 없다.
그래서 였을까 의아한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하조대의 처음 건립시기가 이조2대 정종(定宗/1398~1400) 때였다는데, 그렇다면 14대
선조때 사람으로 관동별곡(관동팔경)을 노래한 정 송강이 왜 빠뜨렸을까.
인위적 설치물들을 다 제외해도 고성 청간정에 뒤질 리 없으며 한 세대 뒤의 택당, 백헌
등도 다녀간 흔적(시)을 남겼건만.
송강은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명승을 두루 섭렵하고 관동별곡을 지었다.
자기의 2세기 전 인물들이라고는 하나 이조 최초의 법전 경제육전(經濟六典)을 펴낸 두
정승을 모를 리 없는 그가 왜 하조대를 제외했을까.
모난 데가 있는 송강이 혹시라도 불사이군의 지조를 버린 두 정승을 경원한 것 아닐까.
당쟁으로 논척을 받아 고향 창평(전남 담양군)에 은거할 때 선조를 기리는 사미인곡을
지을 정도로(아첨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일편단심인 그에게 하. 조가 원망스러웠을까.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