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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성춘 시인을 사랑하는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엽서 한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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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나가자마자 거친 소리를 내며 문이 닫힌다. 걸쇠가 흔들린다. 도둑이라도 들면 큰일이다. 드라이버를 찾아 걸쇠의 나사를 조인다. 현관에서 방까지 아무렇게나 널려있는 물건들 위로 햇볕이 내리쬔다. 아내가 모든 소리를 쓸어가기라도 한 걸까. 집 안은 태풍의 눈처럼 조용하다. 정적 속으로 소리들이 침투한다. 시계초침 소리, 냉장고 소리, 장롱이 몸을 뒤트는 소리. 점점 드세진 소리들이 바보, 등신이라고 나를 비웃는다. 소리는 소리로 몰아내야 한다. 노래를 흥얼거리며 컴퓨터를 켠다. 서둘러 하쿠나마타타 게임을 실행한다. 메인 화면이 열리며 집 안은 다른 소리들로 채워진다. 새 소리, 바람 소리, 풀잎 스치는 소리. 아프리카 초원을 서성이는 얼룩말들을 보며 자연의 소리를 몸 가득히 받아들인다. 하쿠나마타타는 스와힐리어로 '걱정하지 마'라는 뜻이다. 제목이 그래선지 이 게임을 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게임의 기본설정은 게이머가 포토저널리스트나 동물학자가 되어 아프리카를 여행하는 것이다. 다큐멘터리를 찍듯 동물을 관찰하며 고객이 주문한 사진을 찍으면 된다. 내가 이 게임을 좋아하는 이유는 다른 게이머와 경쟁할 필요가 없고 폭력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경쟁이라면 현실에서 경험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베이스캠프로 들어가 노트북을 실행한 뒤메일을 연다. 일이 들어왔다. 네이처 파워 잡지에 실을 산악고릴라 사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어미 고릴라 등에 업힌 아기 고릴라 사진이어야 한다는 까다로운 주문이 붙어 있지만 일을 하게 된 게 즐겁다. 휘파람을 불며 아프리카 필드 가이드에서 고릴라 정보를 모은 뒤 사파리 모드로 들어간다. 차를 빌려 자이르의 비룽가 국립공원으로 향한다. 무리지어 달리는 누(gnou)떼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실제로 사바나 초원을 달리는 것 같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룽가 국립공원 비소케 지역에 도착한다. 고릴라를 찾는 키워드는 '잠자리'와 '베뱐'이다. 우선 산악고릴라가 자주 나타나는 숲우로 향한다. 하게니아나무 아래 이끼가 우묵하게 눌려있다. 제법 큰 것으로 보아 고릴라가 쉬었던 곳이 분명하다. 그 주변에 떨어져 있는 배설물을 따라간다. 숲을 벗어난 배설물은 무성한 잡풀 사이로 이어진다. 통로까지 생긴 걸 보면 무리 전체가 움직인 게 틀림없다. 조심해서 풀숲을 기어간다. 제인 구달이라도 된 듯 온몸이 짜릿해진다. 갑자기 화면 전체에 붉은 비상등이 켜지며 윙윙 소리가 난다. 동물의 비명과 포효가 동시에 들린다. 잽싸게 뒤돌아 줄행랑을 치지만 소리는 점점 가까워진다. 무조건 옆으로 점프하고 보니 하필이면 가시덤불 숲이다. 곧 눈앞에 도망치는 버펄로와 그 뒤를 쫓는 고릴라가 나타난다. 사진을 찍으려고 보니 카메라가 없다. 어딘가에 떨어트린 모양이다. 그제야 주의사항이마리 머리를 때린다. 고릴라가 만들어 놓은 길을 버펄로가 따라갔을지 모르니 특히 조심하라고 했었다. 다시 고릴라를 찾아보지만 이미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화면에서 사라져 0과 1의 형태로 게임 데이터 어딘가에 잠복해 있을 것이다. 게임머니를 벌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아내다. 또 게임 하고 있지? 아내의 목소리에 짜증이 가득하다. 눈치를 살피며 달력을 본다. 말일이다. 이달 보험계약실적이 좋지 않은 걸까. 게임만 하지 말고 친구 좀 찾아봐. 아내의 목소리가 뾰족하다. 우물쭈물 대답한다. 연락이 안 된다는 것을 당신도 잘 알잖아. 그렇게 웅얼거리지 마.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잖아. 아내는 송곳 같은 목소리를 내지르고 신호음 뒤로 사라진다. 아내가 이러는 것은 정말로 친구를 찾아보라는 뜻은 아니다. 어느 날 문득 시작된 푸념일 뿐이다. 나는 2년 전까지 친한 친구가 운영하는 게임회사의 개발팀 팀장이었다. 어느 날 회사에 경찰들이 들이닥쳐 개발팀 직원들을 모두 구속했다. 사행성 게임을 개발했다는 혐의였다. 사장의 지시에 따랐을 뿐이라고 항의했지만 내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경찰은 없었다. 이틀 뒤 아버지가 변호사인 직원의 도움을 받아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풀려나자마자 친구를 찾았지만 그는 이미 해외로 도주한 뒤였다. 친구가 떼어먹은 것은 직원들의 몇 달치 월급만은 아니었다. 회사 지분을 넘겨주기로 하고 내 아파트를 담보로 빌린 돈이 꽤 되었다. 결국 나는 집을 팔고월세 아파트로이사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그가 이럴 수 있느냐며 억울해 하는 내게 아내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적은 늘 가까이 있는 법이야. 당한 사람이 바보지. 사파리 모드에서 나와 온라인 가상사진 코너로 들어간다. 게이머들이 자기가 찍은 동물사진을 올려놓는 곳이다. 정기적으로 사진콘테스트도 열리지만 카메라 사용이 서툰 나로서는 그림의 떡이다. 오늘 올라 사진 중 '자화상'이라는 제목을 클릭한다. 등의 털이 모두 은색인 고릴라가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수줍은 듯 웃고 있다. 고릴라 사진 의뢰를 받은 게 나뿐만이 아닌가 보다. 자세히 보니 게임에 나오는 그래픽 고릴라 사진이 아니다. 고릴라의 주변으로 책상과 책꽂이가 있고 아치형 창문에는 흰색 레이스 커튼지 드리워져 있다. 은색등이란 별명을 쓰는 이가 내게 대화를 신청한다. 고릴라 사진을 올린 사람이다. 착해 보이는 고릴라의 눈을 보며 그의 대화 신청을 받아들인다. 은색등은, 내 별명이 네안데르탈인이어서 대화를 하고 싶었노라고 운을 뗀다. 대화창에 그의 문자가 올라오는 동안 컴퓨터에서 아카벨라 같기도 하고 휘파람 소리 같기도 한 흠이 흘러나온다. 흠은 하쿠나마타타 게임 세계의 언어다. 게임 개발자는 인지고고학자 스티브 미슨의 이론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흠을 만들었다고 한다. 스티브 미슨은 초기 호미니들이 서로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노래 같은 언어를 사용했을 거라고 주장했다. 그는 그 언어를 흠(Hmmmm)이라고 명명했다. 흠은 아기들의 옹알이와 비슷했을 거라고 한다. 그래선지 흠을 들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내 나이를 물어본 은색등은 자기가 몇 살 더 많다며 바로 말을 놓는다. 고릴라와 네안데르탈인이 사촌간이니 자기가 나의 사촌형이라는 것이다. 재미있는 발상이다. 그에게 사진은 어디에서 찍었는지 묻는다. -영국 런던동물원 유인원연구소. 그곳에서 엄마 고릴라와 함께 살았어. 아프리카에서 밀렵꾼들에게 잡혔는데 런던박물관 유인원연구소 소장에게 구출되었거든. 하쿠나마타타 게임에는 동물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기능이 있다. 그는 게임에 빠져 자신이 고릴라라고 착각하는 것 같다. -엄마 고릴라는 지금 무엇을 하나요? -동물원에 온 지 얼마 안 되어서 죽었어. 밀렵꾼 올가미에 걸려서 목을 다쳤거든. 엄마가 죽은 뒤 몸을 웅크리고 아무 것도 먹지도 않는 내게 박사가 말했어. 엄마는 죽은 게 아니라 다른 생명체로 바뀐 거라고. 아마, 엄마는 바람이 되었을 거야. 숨을 쉴 때마다 목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거든. 어쩌면 그는 너무 외로운 사람일지 모른다.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을 때 나도 온 세상이 텅 빈 것처럼 막막했다. 이 세상에서 부는 찬바람이 모두 내게 달려드는 것 같았다. -새 가족을 만들지 그래요. 나는 결혼한 뒤에야 바람막이를 얻은 느낌이었어요. -나도 그러려고 했어. 등의 털이 어른의 성징인 은색으로 바뀌었을 때 암컷을 찾으려고 아프리카로 갔어. 그런데 고릴라 무리에 섞여들 수가 없었어. 동물원에서 사는 동안 너무 인간화됐거든. 친구에게 호되게 당한 뒤부터 나는 사람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내게 친근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일수록 더욱 경계하며 곁을 두지 않았다. 점점 증상이 심해져 대인기피증으로 발전했다. 요즘은 선글라스를 쓰지 않고는 외출할 수도 없다. 사람들과 시선이 마주치면 가끔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 때문이다. 요즘엔 집에서도 환청이 들린다. -인간화되면 좋은 거잖아요. 진화하는 거니까요. -그것은 인간의 입장에서 보는 거고. 나는 수컷 은색등 역할을 학습하지 못했기 때문에 야생생활에 적응할 수 없었어. 고릴라의 관점에서 보면 도태된 거야. -지금은 어디에서 살아요? -5년 전까지 박사의 집에서 살았어. 그가 죽은 뒤로는 여기저기 떠돌아다녔어. 지금은 S동물원 유인원관 근처에서 다시 동물원으로 들어갈 방법을 찾는 중이야. 갑자기 모니터가 꺼진다. 검은 화면에 등을 구부리고 앉아 있는 내 모습이 비친다. 방을 채웠던 흠이 사라지자 팽팽하게 당겨진 정적만 남는다. 정적을 가르고 시계초침 소리가 파고든다. 나의 내부로 침투한 소리가 공포를 불러낸다. 점점 팽창하는 공포를 털어내기 위해 흠을 하며 두꺼비집을 연다. 누전차단기의 스위치가 떨어져 있다. 누전되면 전원이 차단되듯내 삶도 어느 순간 정상 궤도에서 벗어나 버렸다. 집과 직장을 중심으로 순환하던 내 삶의 열차가 일탈해 정체된 공간에 멈춰서고 만 것이다. 시간의 흐름이 멈춘 이곳에서 나는 다시 궤도에 들어설 방법을 찾지 못하고 삶을 잠식하고 있을 뿐이다. 전화 진동 소리에 화들짝 놀란다. 아내에게서 온 문자 메시지이다. 짜증내서 미안하다는 내용이다. 점심 먹고 비타민도 챙겨 먹어. 산책도 하고. 마지막 문장 끝에 찍힌 하트를 본다. 아내는 아직도 나를 사랑하는 게 틀림없다. 2년이 넘도록 재취업이 안 돼 우울해 하는 내게 비타민 B6를 사다 준 것도 아내다. 비타민 B6가 불안감이나 우울증을 줄여준다는 것이다. 하루 종일 종종거리며 고객을 만나러 다닐 그녀를 생각해서라도 빨리 바깥 세상에 적응해야 한다. 비타민 B6 다섯 정을 입에 털어 넣은 뒤, 선글라스를 쓰고 집을 나선다. 막상 지하철역까지 나왔지만 딱히 갈 곳이 없다. 입구 앞을 서성이며 오가는 사람들을 관찰한다. 양복과 서류 가방을 든 사람들에게는 직장인의 오래된 습관이 배어 있다. 그들은 앞을 바라보며 분주히 걷다가 성큼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탄다. 급히 할 일이 있는 그들에게는 주변을 살필 여유가 없다. 예전엔 매일 습관에 의해 움직이는 게 답답했는데 지금은 정상적인 시간 궤도 안에 머문다는 증거 같아 부럽다. 나도 바쁜 일이 있는 것처럼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간다. 급히 개찰구로 향해 걷다가 멈춰 선다. 나는 서둘러 가야 할 곳이 없다. 돌아서려는데 누군가와 부딪친다. 나의 선글라스와 그의 가방이 동시에 떨어진다. 젊은 남자가 인상을 찡그리고 서 있다. 미안하다고 사과하는데 거친 목소리가 들린다. 이 거치적거리는 인간은 뭐야. 놀라 그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는 입을 다문 채 가방을 줍고 있다. 복화술이라도 하는 걸까. 다시 소리가 들린다. 에이, 재수 없어. 여전히 그의 입술은 움직임이 없다. 환청이 더 심해진 것 같다. 숨이 차고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른다. 남자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가 밀치고 지나간다. 사람들이 흘깃거린다. 서둘러 선글라스를 주워 쓰고 사람들 시선을 피해 지하철 노선도 앞으로 간다. 눈앞에 어두운 막이 생기자 호흡이 안정된다. 천천히 지하철역 이름을 읽는다. S동물원역. 그곳에 가면 은색등이 있을 것이다. 그와는 두려움 없이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을 것 같다. 유인원관이 있어야할 자리에 공사용 펜스가 쳐져 있다. 선글라스를 벗고 펜스의 이음새 틈으로 안을 들여다본다. 시멘트 구조물들이 반쯤 허물어지고 고릴라나 침팬지 우리를 알려주던 푯말들이 바닥에서 나뒹군다. 쇠락한 것들이 끌어당기기라도 하듯 사방에서 침묵이 쏟아진다. 그곳 어디에도 은색등이 있을 것 같지 않다. 온라인 게임에서 만난 사람을 찾아 S동물원까지 오다니, 내가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다. 펜스에서 물러나 주위를 둘러본다. 월요일 오전이라선지 관람객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공사용 펜스 중앙에 리모델링중이란 안내문과 조감도가 붙어있다. 조감도 가까이 다가간다. 가운데 건물을 중심으로 각각의 유인원들 정원이 정글처럼 꾸며져 있다. 아시아 오랑우탄, 중앙아프리카 침팬지, 콩고 고릴라, 이집트 망토원숭이, 마다가스카르 여우원숭이, 유인원 종류가 이렇게 많은 줄이야. 새로 개장할 그들의 공간은 내가 사는 아파트보다 넓어 보인다. 볼펜을 꺼내 그들의 우리 옆에 또 하나의 울타리를 그린다. 네안데르탈인의 계곡. 노래를 흥얼거리며 계곡을 꾸미기 시작한다. 당신 네안데르탈인이지?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깜짝 놀라 뒤돌아선다. 멀지 않은 곳에 눈이 쑥 들어가고 인중이 긴 사내가 서 있다. 피부가 검고 머리까지 헝클어져 있어 영락없는 고릴라다. 낙서를 몸으로 가리며 그에게 묻는다. 당신이 은색등인가요?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본다. 요즘 나의 웅얼거림을 정확히 알아듣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한다. 이 시간에 흠을 하며 낙서하는 것을 보면 사촌도 어지간히 할 일이 없나보군. 급히 뒷걸음질하며 선글라스를 쓴다. 그가 윙크를 하며 짓궂게 말한다. 사촌이 매트릭스의 스미스였어? 선글라스 다리를 만지작거리며 그를 살핀다. 몰골은 흉해도 고약한 냄새는 안 난다. 그가 턱으로 조감도를 가리킨 뒤 속삭인다. 낙서에 대해선 비밀 지킬게. 그 대신 점심은 사촌이 사. 이렇게 멀쩡하면서 자기가 고릴라라고 주장하다니, 아무튼 재미있는 사람이다. 봄날 한낮이라선지 대부분의 동물들이 나른하게 늘어져 있다. 참 평화롭지? 그가 숨을 길게 들이마신다. 많은 동물들이 있는 곳이지만 하쿠나마타타 게임에 접속했을 때와는 다르다. 동물의 포효도 긴박한 발자국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하얀 벚꽃이 눈처럼 날린다.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불안하다. 마침 유치원복을 입은 아이들이 소란을 피우며 타조관 앞으로 몰려든다. 타조 한 마리가 아이들 가까이로 다가오더니 다리를 모으고 껑충 뛰어오른다. 아이들이 환호를 지르며 타조를 향해 먹이를 던진다. 은색등이 중얼거린다. 동물원에서 인기를 끌려면 특이한 재주 하나는 있어야겠는걸. 그가 간이음식점으로 들어간다. 김밥과 잔치국수 떡볶이까지 순식간에 먹어치운 뒤 중얼거린다. 이젠 이런 음식과도 이별이야. 포만감에 젖은 그가 목소리를 낮추고 소곤거린다. 당분간 관람객은 유인원들을 보기 어려울 거야. 모두 임시 우리로 옮겨졌거든. 내가 볼 방법을 아는데 함께 갈까? 그와 같이 있는 게 즐거워 고개를 끄덕인다. 앞서 나가던 그가 갑자기 현관 유리문을 들이받는다. 사람들이 황당해하며 그를 바라본다. 그의 입술에서 피가 흐른다. 급하게 휴지로 그의 입술을 누른다. 피는 곧 멎었지만 입술이 부풀어 오른다. 당황한 나와는 달리 그는 담담하다. 놀랐지? 내 문제는 이거야. 유리벽을 볼 줄 모르거든.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벽을 세우는데 나는 매번 맨몸으로 부딪쳐서 많이 다치곤 했어. 나도 나를 보호할 유리벽을 세울 줄 알았더라면 지금처럼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음식점을 나온 그가 동물원 옆 등산로로 접어든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이쪽으로 올라가면 동물원 뒤쪽으로 들어가는 낡은 철문이 나와. 유인원을 보려면 그곳으로 몰래 들어가야 해. 걸음을 멈춘다. 그렇게까지 원숭이를 보고 싶은 건 아니다. 그가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내 대화 신청에 응한 사람도 나를 만나러 동물원까지 온 사람도 사촌밖에 없었어. 그건 사촌이 간절하게 다른 세계로 옮겨가기를 원한다는 증거야.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다. 문 앞까지 가면 내 말을 이해하게 될 거야. 나는 오늘밤에 꼭 동물원으로 들어가야 해. 따라오고 안 오고는 사촌이 결정해. 그는 다시 산을 올라간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의 뒤를 따라간다. 집에 일찍 돌아가도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점점 나무가 울창해지고 등산로 표시도 사라진다. 그가 잡풀이 무성한 곳에서 걸음을 멈춘다. 주변을 살피더니 돗자리를 찾아와 깔고 앉는다. 거친 숨을 가라앉히며 그의 옆에 앉는다. 문은 어디 있어요?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려야 나타나. 무슨 문이 어두워져야 보인다는 말인가. 아무래도 잘못 따라온 것 같다고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본다. 이상하게 그 주변만 하늘이 동그랗게 열려 있다. 불안해 하는 내 감정이 전달되었는지 그가 차분하게 설명한다. 그 문은 보통 문이 아니야. 다른 세계로 옮겨갈 수 있는 통로거든. 그 곳을 통과해서 동물원으로 들어가면 자기가 원하는 동물이 되어 동물원에서 살 수 있어. 그의 표정과 어투에는 깨달음을 얻은 뒤 믿음을 전파하는 선지자 같은 확신이 담겨 있다. 세상에 동물원은 아주 많아. 그 많은 동물원에서 사육되는 동물들이 정말 다 야생에서 포획된 거라고 생각해? 천만에. 그랬다면 야생동물은 벌써 씨가 말랐을 거야. 멸종 위기에 처했던 동물들을 동물원에서 본 적 있지? 그것은 사람들이 문을 통해 동물원으로 들어가서 희귀 동물이 됐기 때문이야. 그런 문이 있으면 재미있을 것 같기는 하다. 은색등은 일주일 전에 S동물원 유인원관 앞에서 동물원으로 들어가려는 사람을 만났다고 한다. 그 사람을 따라서 이곳까지 왔다가 정말 문을 봤다는 것이다. 이곳은 다른 세계로 옮겨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에너지가 고이는 장소래. 에너지가 많이 쌓이면 세계의 경계에 문이 생기고, 문의 기운을 감지한 사람들이 근처로 모여들게 되는 거지. 내가 그를 만나고 사촌이 나를 만난 것도 문의 기운 때문일 거야. 점점 그의 말에 솔깃해진다. 은색등에게 왜 동물원으로 들어가려느냐고 묻는다. 그가 곧 잊을 일을 뭐 하러 이야기 하냐며 심드렁한 표정으로 드러눕는다. 유리벽 이야기와 온라인에서 나눈 대화를 떠올린다. |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재미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