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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스키는 최근 5경기 연속 안정된 모습으로 두산 우승의 희망에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
박찬호가 그 팀에서 뛰던 시절에 니코스키도 두 시즌을 텍사스에 몸담고 있었습니다. 빅리그와 마이너를 오가 자주 접하지는 못했고, 당시에는 누구나 그를 C.J.라고 불렀기에 크리스라는 이름으로 등록이 돼 있어서 금방 떠오르지가 앉았습니다. 아주 독특한 성인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영리하고 선한 인상의 니코스키는 독특한 경력을 가진 선수입니다. 고교 졸업 때는 드래프트에서 뽑히지 못할 정도로 프로팀에서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불과 3년 만에 드래프트 1라운드에, 그것도 전체 9번째로 뽑히는 사건을 만들었습니다. 대부분 유망주가 고교 졸업 전에 드래프트로 찜을 당하고, MLB 드래프트 1라운드에 뽑히는 것은 가문의 영광으로 여기는데, 정말 보기 드문 일입니다. 그렇게 되기까지의 일화도 아주 흥미롭습니다.
금지약물과 관련해 FBI 인터뷰한 일과 아들이 익사 진전까지 갔던 사건을 비롯해 왼손 투수 크리스토퍼 존 니코스키의 삶을 소개합니다.
-크리스라는 이름으로 등록이 돼서 못 알아봤다. 오랜만이다.
▶미국에서는 C.J.라고 부른다. 한국에서는 크리스, 혹은 크리스토퍼로 부르는 팬들도 있지만 시간이 있으면 C.J.라고 불러달라고 설명을 해준다. 어려서부터 C.J.로 불려서 그것이 편안하다.
-프로 선수로 성장하기까지 우여곡절이 있던데.
▶서펀이라는 뉴욕 북쪽의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다. 뉴욕주와 뉴저지주의 경계선 인근의 작은 도시로 거기서 6살 때부터 티볼 야구를 시작했다. 단 바스코 고교에서 본격적으로 야구를 했는데 고등학교 때는 그저 괜찮은 선수 정도였고 프로에 드래프트 되지도 못했다.
졸업 때 1부 리그 대학과 2부 리그 대학 딱 두 곳에서 장학금 제의를 받았고 플로리다에 있는 대학에 갔다가 1년 후에 뉴욕의 세인트존스 대학으로 전학했다.
-고등학교 때는 아무 프로팀에서도 관심을 두지 않다가 3년 후에는 1라운드에 드래프트된 희한한 케이스인데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
▶대학 1학년 때부터 구속이 점차 늘더니 2학년 때는 아주 빨라졌다. 키가 큰 것은 아닌데 친구들과 웨이트 트레이닝은 정말 열심히 했고 체중은 좀 늘었다. 그렇다고 해도 패스트볼이 1년 반 만에 82마일에서 91마일로 늘어난 것은 도저히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가장 빠를 때는 93, 94마일까지 나오기도 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조금 더 설명을 해 달라.
▶나는 고교 시절부터 줄곧 투수였다. 타격은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고등학교 때는 79마일에서 81마일 정도가 패스트볼의 구속이었다. 기교파 투수일 수밖에 없었다. 대학교 1학년 때까지도 구속이 82마일 정도였다.
갑자기 1년여 만에 구속이 10마일(약 16km) 이상 빨라진 이유는 지금도 알 수 없다. 룸메이트 친구들과 경쟁적으로 운동을 많이 하기는 했지만 그 친구들은 나처럼 구속이 빨라지지는 않았다.
구속은 어느 정도까지는 타고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5살 때부터 특수하게 훈련을 시킨다고 스무 살에 95마일을 던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내게도 미스터리다.
-언제부터 MLB 팀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건가.
▶2학년 때 캘리포니아의 토너먼트에 출전했다. 프레스토 주립대를 비롯해 그쪽의 많은 학교와 경기를 하고 돌아왔다. 그 직후에 다저스 스카우트에게 전화가 왔다. 통성명하고 가끔 연락하고 지내자는 정도였다.
그것이 처음 프로에서 관심을 보인 것이었다. 그런데 그 스카우트가 내 피칭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면서 91마일을 찍은 패스트볼도 좋았다고 말해줬다. 나는 깜짝 놀라서 진짜 91마일이 나왔느냐고 물었을 정도였다. 나는 전혀 몰랐고, 정말 놀랐다. 그 후로 많은 팀에서 관심을 보였다.
-1라운드에 드래프트된 소감은 어땠나.
▶이젠 오래전의 일이지만 정말 흥분되는 사건이었다. (1994년 드래프트에서 신시내티 레즈에 1라운드 9번째로 드래프트됐습니다.) 그렇게 1라운드에 그것도 높은 순위에 뽑힐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다.
늘 야구 선수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고 있었지만 고교 시절도 그렇고 내 능력으로는 그 꿈이 조만간 끝날 것이라는 생각을 가끔 하기도 했었다. 그렇지만, 꿈을 버릴 수는 없었고 점점 (투수로서)능력이 좋아지면서 기대를 걸게 됐다. 정말 흥분되고 또한 영광스러웠다. 평생 꿈꾸던 메이저리그 선수가 될 가능성이 열린 순간이었다.
- 그리고 나서 메이저리그로의 승격도 아주 빨랐다.
▶아주 공격적이고 인상적인 짐 보든 단장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를 드래프트 하자마자 곧바로 더블A에서 뛰게 했다.
루키리그와 싱글A의 모든 단계를 건너뛰었는데 정말 드문 일이었다. 1995년에 더블A에서 시작해서 몇 게임 던지고 트리플A로 올라갔고 4게임인가 더 던지고 곧바로 메이저리그에 올라갔다. 프로 데뷔 1년도 안 되서 빅리그로 승격된 것이었다. 물론 그 후에는 마이너리그와 빅리그를 계속 오갔고 마이너리그 경험을 충분히 많이 했다.(웃음)
무명에서 3년만에 MLB 드래프트 1라운드에 뽑혔던 전력의 니코스키는 평탄치만은 않았던, 그러나 만족스럽다는 프로선수 생할을 이야기했습니다. |
-그렇게 일찍 빅리그에 올라간 것이 오히려 해가 되지는 않았는가.
실패를 받아들이고 인정할 준비가 덜 됐던 것이었다. 대학시절부터 처음 프로에 가서 더블A, 트리플A를 거치면서 계속 잘 던지면서 승승장구했기 때문에 실패를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몰랐다.
빅리그에 올라가서도 두 경기인가는 잘 던졌는데, 한 경기에서 완전히 망가졌다. 샌프란시스코와의 경기에서 1회도 못 넘기고 7점인가 주고 강판당했다. 그리고 갑자기 다가온 그 실패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
곧바로 떨치고 다음 경기에 임했어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했고 슬럼프로 이어졌다. 그 여파가 거의 2년 정도 갔던 것 같다. 당시 22살, 23살 때였다.
-그 후 트레이드도 이어졌고, 선발과 구원을 오갔는데.
▶디트로이트로 갔다가 1997년 휴스턴으로 가서 그 해에는 트리플A에서 계속 선발로 뛰었다. 그리고 1998년 스프링 캠프를 하는데 팀에 선발 자리가 없어서 만약 경쟁에서 살아남는다면 구원 투수로 뛰게 될 것이라고 했다.
시범 경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 개막전 로스터에 들어갔고, 그 해에 처음으로 풀타임 구원 투수로 뛰었다. (43경기 3승3패 3.77) 내 성격이나 투구 패턴 등이 구원 투수로 잘 맞는 것 같았다. 선발 투수와는 전혀 다른 준비 과정이나 마음 자세가 필요했지만, 별생각 없이 곧바로 투입돼 타자를 상대하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짧은 이닝 동안에 전력투구를 하는 것도 그렇고. 꼭 선발을 선호하는 투수도 있지만 내겐 구원도 괜찮았다. 켄 그리피 주니어, 짐 토미 같은 왼손 강타자들과 중요한 시점에서 대결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도전을 즐기는 편이다.
-박찬호도 계속 선발을 선호했지만 요즘은 필리스에서 구원 투수로도 잘 하고 있다. 36세라는 나이도 있고.
▶선수 생활을 계속 이어나가는 데는 때론 불펜 투수로 전업이 필수적일 수도 있다. 많은 투수에게 일어나는 현상이다. 거의 모든 투수들이 선발로 시작한다. 그러나 구원으로 더 성공하는 선수들도 많다. 양키스의 마리아노 리베라가 대표적이다.
빅리그에서 선발로도 뛰었지만 전혀 인상적이지 못했다가 구원으로 전업하면서 최고의 마무리 투수가 됐다.
2003년 시즌 스프링 캠프에서 만난 찬호를 기억한다. 당시 찬호와 이스마엘 발데스, 존 톰슨이 선발이었고 남은 두 자리를 놓고 나도 선발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늘 열심히 운동했던 선수로 기억한다.
-오랫동안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다고 들었다.
▶1997년부터 시작했다. 애스트로스 트리플A에서 뛸 때였는데 구단 관계자가 팀 페이지에 소식을 전해줄 수 있겠느냐고 했다. 한 달에 두 번이었는데 과연 누가 관심이나 있겠나 싶었지만 일단 시작하고 나니 팬들의 관심이 꽤 많았다. 이메일 주소를 적었는데 당시 이메일이 보편화하지 않았는데도 많은 분이 메일을 보내왔다.
내용은 나에 관한 것이 아니라 나의 눈을 통해 보는 야구를 소개한 것이었다. 1천 명도 넘는 팬이 고정적으로 뉴스레터를 받아봤다. 그렇게 시작해서 다음해 빅리그에서 뛸 때도 계속 소식을 전했다. 선수들의 생활과 식당, 골프 등 다양한 이야기를 전했다. 내가 의도해 시작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시작이 됐고, 그 후로 계속하고 있다. 일본에서도 계속했고 번역해주는 사람이 있어서 인기가 좋았다.
한국에 와서도 했지만 3주 전쯤에 번역해주는 분을 찾았다. 그런데 요즘에는 트위터를 많이 하기 때문에 홈페이지보다 그쪽으로 야구팬들이 많이 찾아오신다.
-금지 약물 때문에 조사를 받은 적도 있는데.
▶올 초에 FBI 요원과 인터뷰를 했다. 양키스에서 뛸 때 함께 운동했던 로저 클레멘스와 맥나미 트레이너에 대한 질문이었다. 내용을 다 밝힐 수는 없지만 많은 질문을 받았고, 그들이 금지약물을 사용하는 것을 직접 본 적은 없다고 증언했다.
약물 같은 것에 대해 그들과 대화를 나눈 적도 없었다. 클레멘스가 약물을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개인적으로 그들이 약물을 사용하는 것을 본 적은 없었다.
-왜 빅리그에서 그렇게 약물이 남용됐다고 보나. 그렇게 효과가 있나.
▶돈과 직결되는 문제다. 파워가 강해지고 투수는 스피드가 빨라진다. 그러면 자신감도 좋아질 수 있다. 그리고 연봉도 올라간다.
게다가 주변에서 많은 선수가 약물을 사용한다면 유혹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엄연히 불법이고 몸도 망가진다. 이젠 규제와 벌칙도 아주 강화됐기 때문에 금지 약물을 사용하는 선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기독교 신자가 된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들었다.
▶긴 이야기지만 간단히 정리해보겠다. 2002년 스프링 캠프 때였다. 2001년 디트로이트에서 풀타임으로 뛰었고 모든 것이 순조롭게 풀린다고 생각했는데 휴스턴 캠프에서 갑자기 방출되고 말았다. 당황되고 어이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 별생각 없이 TV를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뭔가 뇌를 스쳐갔다. 당시 거실에 집사람과 장인, 그리고 두 살 된 아들과 6개월 된 딸이 함께 있었다. 그런데 돌아보니 아들 매튜가 보이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뒷마당으로 뛰어나갔고, 수영장에 빠진 애를 발견했다. 이미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집사람이 비명을 지르고 소동이 일어났지만 매튜는 괜찮았다. 그 나이면 순식간에 질식해 사망할 수 있지만 곧바로 깨어났다. 불과 몇 초의 사이에 생명을 건진 것이었다.
그 소동을 겪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내가 그날 방출되지 않았으면 집에 있지도 않았다. 그리고 매튜가 방을 빠져나간 것을 아무도 몰랐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어떻게 갑자기 내게 그런 느낌이 전해졌는지도 알 수 없었다.
생을 내가 만들어간다고 생각했는데 당시에는 모든 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았고, 또 그런 일이 발생했다. 마이너리그에서 뛰면서 친한 동료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 친구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그러면서 나의 생을 지배하는 분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신을 더욱 가까이하는 기독교인이 됐다.
그러면서 모든 것이 많이 편안해졌다. 방출되고 새로운 팀을 찾고 마이너와 메이저를 오가는 일이 절대 쉽지 않지만 그런 것들도 다 이유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일본 리그에서도 뛰었다.
▶2006년 피츠버그 트리플A에서 한 해를 보냈다. 그리고 그 겨울에 리 터넬씨가 연락을 했다. 텍사스 트리플A에서 피칭 코치를 했던 분인데 일본 쪽의 일을 하고 계셨다. 내게 일본에서 뛰고 싶은 의향이 있는지를 물었다.
사실 2003년 시즌을 앞두고 긴테츠에서 연락이 왔었다. 그러나 나는 뿌리치고 텍사스와 재계약을 했는데 거의 마이너에서 보냈기 때문에 후회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두 번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소프트뱅크 혹스에서 2년간 85경기를 뛰며 3승5패 2세이브 기록.)
가족들도 좋아했고 지난 2년간 일본리그에서 좋은 시간을 보냈다. 첫해에는 구원 투수로 좌타자 전문상대를 했고, 2년째인 작년에는 중반까지 아주 잘 던지다가 두 경기 정도 망쳤는데 그 후론 기회를 주지 않았다. 6명의 외국인 투수가 있었기 때문에 더 기회가 없었다. 1군에는 3명밖에 못 뛰니 2명은 늘 마이너로 가야했다. 후반기엔 내가 주로 2군에 있었다.
-그리고 올 시즌 한국으로 왔는데 초반에는 잘 풀리지 않았다.
▶SK로 갔는데 뛸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래도 한국 야구의 규정이 내겐 다행이었었다. 일본 같았으면 1년 내내 2군에 머물렀을 것이지만 한국 규정은 뛰든지 방출하든지 둘 중의 하나이고 두산에서 뛸 기회가 생겼다.
-한국 야구에 적응하기가 어려웠는지.
▶나는 선발 투수로 왔는데 딱 한 번 선발 등판했을 뿐이다. 딱 1이닝이었다. 물론 내용이 좋지 않았다. 스프링 때는 꽤 좋았지만 더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2군에 갔다가 다시 올라가 구원으로 몇 번 나가 실점하지 않았지만 다시 2군으로 갔다. 그것으로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도 36세이고 더는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물론 좋은 친구들도 만났고, 2군에서도 좋은 경험을 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모든 것이 잘 풀렸고 두산에서 뛸 기회가 생겼다.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데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두산에 각별한 애정이 있는 것 같다.
▶정말 그렇다. 방출되면서 몹시 어려운 처지에 있었고, 나는 열흘간 일본에 갔었다. 거기서 팀을 알아보고 안 되면 미국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에이전트가 두산이 웨이버에 나온 나를 데려갈지도 모른다는 말을 했다. 처음에는 정말 한국에서 더 뛰고 싶지 않았고, 미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집사람이 서울을 너무 좋아하고 나도 한국 팬이나 한국이 정말 좋았지만 외국인 선수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경기에 뛰는 것이다. 새로운 문화와 팀과 선수들과 모든 것에 적응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선수가 가장 돌아버리는 것은 경기에 뛰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아픈 경험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지 않았었다.
많은 사람이 두산에서는 다른 경험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지만 믿기 어려웠다. 그리고 두산 유니폼을 입고 첫 경기에서 나는 1회에 7안타를 맞고 4점을 내줬다. 그러나 계속 기회를 주었다. 그러면서 점점 적응해갔다. 팀도 그렇고 팬들도 그렇고 분위기가 정말 좋았다. 야구가 너무 즐겁고, 정말 오랜만에 나는 다른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오직 팀의 우승만 바라보며 운동을 하고 있다.
내년이면 또 계약을 해야 하므로 늘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이 선수이고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현재의 나는 전혀 그것에 신경 쓰지 않는다. 물론 두산에서 오래 뛰고 싶지만 혹시 재계약을 하지 못한다 해도 개의치 않는다.
그만큼 요즘 야구가 즐겁고 그리고 의욕이 넘친다. 등판 때마다 전력을 다해 좋은 경기를 하고 코리언시리즈에서 우승할 수 있도록 팀을 돕는 것이 나의 임무다.
-두산의 우승 가능성은 어떻게 보나.
▶우리 타선은 강하다. 투수진만 버텨준다면 충분히 가능하다. 포스트 시즌에 가는 팀들은 모두 강하지만 어떤 한 팀이 특출나게 강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기아도 SK도 상승세를 타기도 하지만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어떤 팀도 꺾을 수 있는 전력이다. 열성적인 팬들을 위해서도 꼭 우승을 하고 싶다.
이 인터뷰를 한 후에 니코스키는 계속 좋은 모습을 보였습니다. 13일 기아전에서는 7이닝 1실점으로 호투했고, 20일 롯데전에서는 오랜만에 등판해 4이닝 동안 1자책점을 내줬습니다. 최근 5번 선발 등판에서 총 자책점이 6점에 불과할 정도로 선발 자리에 적응하면서 국내 프로에서 통할 수 있다는 능력을 과시했습니다.
니코스키가 내년에도 두산 유니폼을 입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현재 그의 목표는 오직 하나, 소속팀 두산의 코리언시리즈 우승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