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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못 이룬 심야의 노트
일생의 소원 중 소원이 성지(예루살렘) 순례였던 중세 유럽의 기독교 수도사와 신도들.
종교적 열정과 속죄, 질병의 치유를 위한 실천이 바로 순례여행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또한 보속(補贖) 차원에서 그들의 마음 속에 하나의 부채로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 성지 순례였다.
이같은 순례 과정에서 겪는 경이와 신기가 모두 신앙의 열정 속에 응집되어 녹아든다는 점이었다.
순례를 통해서 육체적 고통과 속세와 자연이 주는 애로를 겪을 수밖에 없고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신의 섭리와 손길을 느끼게 된다.
즉 순례의 과정 전체가 하나의 종교적 체험이라는 것.
그러나, 11c ~ 14c 동안에 이스라엘을 포함해 중동지역을 장악한 셀주크 제국의 등장으로 예루살렘
순례가 지난하게 되었다.
예루살렘의 대안으로 등장한 곳이 로마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였다.
로마는 사도 베드로와 바울의 순교지지만 313년의 밀라노 칙령(Edictum Mediolanense:라틴어/
Edict of Milan:영어)으로 대박해에서 용인과 옹호, 장려로 돌아선 곳이다.
그 과정이 기독교의 성지순례자들을 사로잡았으며 팔메로(Palmero/예루살렘 순례자)에 이어 로메
로(Romero/로마 순례자)라는 단어가 나왔다.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는 사도 야고보의 무덤이 있다고 알려진 곳.
813년에 은둔 중이던 수도사 뻴라요(Pelayo)가 하늘의 표지(標識/밝은빛,별)에 이끌려 발견한 무덤,
주교 테오도미루(Thedomirus)가 이를 사도 야고보의 무덤이라고 공식으로 인정했다.
이로써 이곳 지명이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Santiago de Compostela)가 되었고 그곳에 까떼드랄
(Catedral de Santiago de Compostela)이 들어섰고 '까미노'라는 이름의 순례길이 탄생했다.
스페인어 까미노(Camino)는 '순폐자의 길'로 쓰이고 있으나 단지 '길'이라는 뜻의 보통명사다.
순례길의 풀네임(full name)은 까미노 데 산띠아고(Camino de Santiago)다.
산띠아고는 'Santo+Iago'(사도 야고보)의 합성어다.
산띠아고 순례자의 표지가 가리비(조가비/concha)라는 데서 꼰체이로(Concheiro/까미노 순례자)
라는 단어도 등장했고.
이 까미노에서 일어탁수 현상이 비일비재하여 가고 있다.
일부 몰지각하고 부화뇌동적인 군상이 까미노(Camino de Santiago)를 유람 또는 관광 대상으로
전락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무리의 지갑을 노리는, 자연 발생적인 악덕 상혼이 날로 확대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기도.
게다가 이베리아 반도의 남쪽으로 갈 수록 홈리스와 도둑이 극성을 부리고 있다.
지브롤터 해협(Gibraltar海峽)을 건너오는 난민들이 늘어가기 때문이다.
심히 우려되는 것은 이들의 상호 작용으로 인한 오염 지수의 급상승 현상이다.
그럼에도, 오늘날에도 죽음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공포의 길(노변에 서있는 사망자의 비표들이 그
증거)이며 고난과 형극의 길인 까미노를 걷는 뻬레그리노스가 날로 더욱 증가하고 있다.
하느님을 만나는 길이라거나 신과 함께 걷는 길이라는 말은 신앙적 수사일 뿐이다
야고보(Santiago)의 선교여행길이라고 하지만 극소한 일부 길일 뿐 후세 사람들이 만들었고 그래서
그들의 이해 관계에 얽혀서 이전하고 개작도 하는 길이다.
이것은 요지부동의 붙박이 1위인 프랑스 길을 비롯해 상위권 길들의 실태다.
이 시대에는 영성수련에 최적의 길이리는 믿음이 신도들(특히 가톨릭)로 하여금 이 길을 걷게 한다.
사도 야고보와 함께 걷는다는 믿음이 이 목적(영성수련)을 보다 더 확고하게 달성하는데 필요하다면
그렇게 믿으면 되는 길이다.
심지어 신이 만들었고 신과 더불어 걸어가는 길이라는 믿음을 주저 없이 가져도 되는 길.
하지만, 영성 수련이 특정 종교(기독교)의 신앙에만 필요하거나 그들의 전유물이 아니잖은가.
기독교 신앙과 무관한 사람들이 걷는 것도 나름의 신앙적 분위기에서 하는 행위다.
그러므로 범 종교적이며, 설영 그 범주에 포함되지 않고 단순한 인성훈련 또는 신체단련이 목적이라
해도 까미노를 걷는 것은 충분히 보람된 일이다.
따라서, 인기도에서 하위권 까미노는 이같은 논란의 대상이 아니다.
양자(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에게 관심의 길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초에 만들어진 루트에 변화가 없다.
까미노를 제대로 걸으려면 이 길들(관심권 밖의 길)을 택해야 함을 의미한다.
(동양 늙은이의 안면을 위한 수에꼬의 고결한 매너도 헛되이 잠 못 이룬 밤의 메모다)
어이없는 링반데룽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던가.
여자를 존중한다는 서양에서도 여자가 많으면 말이 많고 거위가 많으면 똥이 많다(영국).
여자가 있으면 고요함이 없다(프랑스)고 속담으로 경계할 만큼 여자들이 모이면 시끌벅적한다.
끝이 없을 듯 하던 여자들의 수다가 멎는 듯 하기 오래지 않아서 한번 더 떠들썩했다.
곧 썰물 빠져나간 해변처럼 된 이른 아침의 알베르가리아-아-벨랴의 알베르게.
수에꼬(sueco/스웨덴 사람의 스페인어)와 내가 마지막으로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그는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를 향해서 순 방향으로 북상하고,
나는 목표 파띠마, 리스보아의 역 방향 남행 길에 들고.
까미노와 함께 가는 N16-2 도로는 500m 남짓 서남진하다가 지자체와 동명인 소 교구마을 알베르
가리아-아-벨랴의 작은 마을 아씰류(Assilho)에서 둘로 나뉜다.
이 지점에서 안내하던 화살표가 노랑 파랑 가릴 것 없이 모두 감쪽 같이 사라졌다.
갈라졌다가 다시 합치는 두 길을 모두 뒤지듯 찾아보느라 적잖은 시간을 버렸으나 허사였다.
어이없게도, 링반데룽(Ringwanderung/環狀彷徨)에 걸린 듯 돌고 도느라 30여분을 낭비하다니.
이른 아침의 이 꼴은 아마도 전체 까미노, 6.000여km에서 유일한 수치일 것이다.
잠을 이루지 못한 날들의 후유증이 결집되어 표출된 비몽사몽(非夢似夢) 상태였을까.
그러는 사이에 알베르가리아의 보건소(Centro de Saúde) 앞을 지나기도 했다.
이베리아 반도(Spain, Portugal)의 보건소는 우리 지자체의 그것과 사뭇 다른 것 같다.
이름도 건강센터(Centro de Saúde:Portugal/Centro de Salud:Spain)로 되어 있다.
진료를 연달아서 받으며 까미노를 걸은 환자였던 때의 내 느낌은 벽촌의 보건소들이 1차진료기관을
표방하고 있으나 훌륭한 무료 종합병원이라는 것이다.
국내에서도 장거리를 걷는 중에 크지 않은 사고로 시골 보건소의 도움을 더러 받았지만 새내기 의사
의 한심한 진료에 한숨이 절로 나왔는데.
그러나, 내가 진료받은 그들(이베리아반도 시골 보건소 의사)은 경험이 풍부하고 노련한 의사들이며
각 분야에서 유능한 의료진과 종사자들이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병.의원이다.
우리나라의 보건소와 달리 유일하게(?)휴일, 휴무 없는 공공봉사기관인 듯 싶다(지자체에 따라 달리
운영하는 것 같으며 내 체험으로 내린 소견이라 "봉사 코끼리 만지기"일 수도 있을 것이다)
간호사들의 출입만 번거로운 것으로 보아 그들의 근무 교대시간인 듯.
길을 물으려고 해도 이른 아침이기 때문인지 거동자가 없어서 더 난감했는데, 물어볼 상대가 되므로
다행이다 싶었으나 하나같이 까미노에 관해서 무지함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이 고되고 바쁘기 때문에 관심 가질 겨를이 없는 것이 까닭일까.
길이 합치는 로터리와 고요한(일요일이라?/평일에도 이른 아침은 개장전) 대형 슈퍼(Intermarche)
앞을 지나 A25(IP5. E80) 고속도로 위를 입체 통과하기 까지 남남서진하기 800m쯤.
N16-2 도로(R. Dom-Dinis)를 벗어나 남동, 남남동 길(Largo Liz), 비포장 숲길을 걷기 1.7km.
두 지자체 알베르가리아-아-벨랴와 아게다(Agueda)의 경계 지점이다.
소 교구마을 알베르가리아-아-벨랴와 마씨냐따 두 보가(Macinhata do Vouga/지자체 아게다의 11
개 소 교구마을 중 하나)의 경계도 되고.
파띠메로스(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 위에 있는 파띠마)
지자체 아게다로 들어서서 빠우스 길(Estr. Paus)을 횡단하기 까지 1km쯤은 유칼립투스 숲길이다.
비포장 까미노는 빠우스 길을 건너 남동으로 이어지는 포장로(R. Central)를 따른다.
한데, 비포장길 300여m를 지난 후에 쎈뜨랄 길에 합류한다.
어차피, 흡수되는 길인데 왜 무명 비포장 길 300여m를 지나서 그럴까.
어이없게도 역 방향 뻬레그리노스가 이 짧은 구간을 고집하기 때문이란다.
순 방향 길에서는 막판에 쎈뜨럴 길을 이탈하지 않고(이탈을유도하는 안내표지가 없다) 빠우스 길에
당도하는데도 그들(역방향 순례자)이 자투리길을 고집하는 이유가 황당하다.
모든 뻬레그리노스가 애오라지 갈망하는 까미노의 성지.
까미노 순례자의 최종 목적지는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Santiago de Compostela)다.
갈리씨아 자치지방(Galicia/Comunidad Autonoma) 꼬루냐 주(Coruña/Provincia)에 속한 도시.
갈리씨아의 수도(首都)로 유네스코 세계유산(1985년), 유럽 문화수도(2000년)로 선정된 도시다.
지하에 사도 야고보의 성물이 보관 중인 산띠아고 대교회(Catedral de Santiago de Compostela)
가 자리하고 있으며 까미노의 모든 메인 루트(main route)가 완결되는 곳이다.
그러므로 뻬레그리노스라면 시발지와 관계없이 반드시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에 당도해야 한다.
순례자 사무소(Oficina del Peregrinos)에서도 이 곳(Santiago de Compostela)을 시발지로 하는
역 코스 걷기는 순례로 인정하지 않는다.
순례자 사무소는 완주 조건을 완화했다.
직전(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로부터) 100km 이상 걸어온 모든 뻬레그리노스에게 소위 '순례자증서'
(Compostellae/라틴어)를 주지만 전 구간을 완주하고도 역 방향 주자는 이 증서를 받지 못한다.
파띠마 순례자들은 당국의 이같은 처사에 아랑곳없이 역 방향 뽀르뚜 길(Camino Portugues)을 걸
으며 300m에 불과한 자투리길을 고집한다.
그들에게는 파띠마가 산띠아고 위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 여정에도 파띠마가 포함되어 있지만 단지 경유지일 뿐인 나와 달리 파띠마에 열광적인 그들에게
나는 이름 하나를 붙여주었다.
파띠메로(Fatimero/'파띠마순례자'라는 내 新造語)라고.
성지 순례자의 스페인어 호칭이 있다.
예루살롐 순례자는 팔메로(Palmero/팔레스타인의 변형)라 하고 로메로(Romero)는 로마순례자의
호칭이며 산띠아고 순례자는 뻬레그리노(Peregrino)지만 꼰체 이로(Concheiro)라 부르기도 한다.
꼰차(Concha/가리비)의 변형이다.
비중이, 소위 3대 성지(위)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들(파띠마순례자)의 열정이 가상하여 붙여준 것.
파메로가 좋을 듯 하나 발음이 팔메로와 흡사하여 혼동을 막기 위함이었다(복수는 호칭에 s를 추가)
정황으로 보아, 이 일대(유칼립투스 숲)에 집들이 띄엄띄엄 들어서기 전에는 이 비포장 길이 까미노
뽀르뚜게스였기는 해도 무명의 길이었을 것이다.
이 짧은 비포장 길은 주민들의 편의를 위해서 이전 길을 정비, 포장하고 이름(R.Central)을 매길 때
버려진 자투리 길인데 파띠마 순례자들이 고집하는 것이리라.
따라서 파띠마 순례 열기가 시들해지는 때까지는 그 짧은 길이 살아있을 것이다.
무릇 길의 운명은 그 길의 이용자들에 의해서 좌우되기 때문이다.
쎈뜨럴 길(1km)은 꼬르가 길(R. Corga)과의 작은 십자로에서 헤알 길(Est. Real/1.1km)로 바뀌고
2km 남짓의 길가(좌우/Serem마을)는 개발 중이다.
상당 기간 계속될 이 개발이 난(亂)개발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겠다.
여러 형태의 대소 건물들이 자유분방(?)하게 들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전원주택의 모델이 될 만큼 규모있게 잘 꾸며진 주택들이 더욱 돋보이지만 조화롭지 못한 주변으로
인하여 빛이 감쇄되는 것 같아서 무척 아쉬운 마음이었다)
십자로의 좌측(대각선)에 주차중인 여러 대의 차량들이 걸음을 멈추게 했다.
마을 사람들의 관심처가 있음을 의미하는 차량들이다.
직전의 십자 기념비(Cross Monument/Cruzeiro)도 나를 붙들지 못했는데 편의점(Casa Leonel)
과 까페(Café St. António)는 그랬다.
유칼립투스 숲길을 걷다가 간밤에 이딸리아나들이 직접 만든 피자를 아침식사로 먹었기 때문인가.
갈증의 해소가 당면 문제였기 때문이다.
상반된 비극(붕괴된 로마다리, 폭파된 한강대교)
헤알 길(Est. Real)은 곧 N1(IC2) 국도에 합류함으로서 라메이루(Lameiro) 마을을 벗어난다.
국도 따라 남하하기 500m쯤에 총 길이 148km의 보가강(rio Vouga)에 놓인 다리 앞에 당도했다.
실제 강폭은 좁은데 긴 다리다.
강과 도로 간의 고도 차가 많기 때문에 강안(江岸)의 너른 농경지 위로 다리가 놓였음을 의미한다.
까미노는 긴 다리를 건넌 후 500m를 지나 국도를 벗어난다.
그러나, 본래의 까미노는 국도에 합류하지 않고 국도를 횡단하여 농경지로 난 포장로를 따른다.
남동쪽으로 가다가 남서로 돌아 보가 강 낮고 낡은 다리를 건넌다.(R. da Ponte Velha)
다리 이후에는 안띠가(Estr. Antiga)라는 이름의 길을 따라 긴 다리 밑을 통과한 후 보가 강을 건넌
국도 500m 지점에 접근한다.
이것은 2011년에 발간된 까미노 뽀르뚜게스 가이드 북의 안내다.
이 길을 두고 왜 새 루트(국도)가 등장했을까.
오리지널 뽀르뚜게스는 이 새 루트 보다 2분의 3쯤 되는(긴 거리) 길이다.
이즈음의 까미노를 삼각형의 밑변이라면 이전 까미노는 양 빗변이 되는 형국이니까.
현재의 까미노가 다리 양쪽으로 각 500m(500m+다리+500m)라면 오리지널 길은 그 길의 약 1.5배
(1.500+다리)가 된다.
뻬레그리노스에게 거리의 장단과 길 환경의 호오(好惡)가 개의될 조건인가.
이 곳은 이해관계가 얽혀질 일이 없는 강안의 농경지 지역이므로 소위 지역 이기주의의 개입도 있을
수 없는 짧은 구간이다.
그렇다면, 홍수로 강물이 불어나면 다리는 잠수교로 변하고, 농경지가 침수되면 길이 사라지기 때문
에 아예 바꿔버린 것일까.
주기적인 연중 행사도 아니며 희소하게 있는 일이 이유라면 옹색하기 때문에 불가해한 일이다.
길의 운명은 이용자의 선호도에 따라서 좌우된다고 이미 한 말을 상기하여 보았지만 새 루트를 선호
하게 된 이유에 대한 답이 나오지 않아 안타까웠다.
이렇게 투덜거리며 오리지널 길(R. da Ponte Velha)을 따라 다리 입구까지 내려갔다.
다리 입구의 가드레일 기둥에 파띠마 길임을 뜻하는 파랑 화살표가 선명하게 남아있을 뿐 무슨 공사
를 하다 만 형국이라 전진하기가 주저되었다.
곧, 다리 중간쯤의 교각이 사라지고 상판이 마치 톱으로 자른 듯 없어졌음을 알게 됨으로서 불가해
(不可解)로 마무리한 상상과 전혀 다른 실상이 드러났다.
이름을 뜻풀이 하면 "보가의 옛 다리"인 뽄치 벨랴 두 보가(Ponte Velha do Vouga).
해발864m, 라빠산맥(Serra da Lapa/Freguesia Quintela, Concelho de Sernancelhe,Distrito
de Viseu)의 이른바 라빠의 분수(Chafariz da Lapa)에서 발원하는 강에 놓인 다리들 중 하나다.
대서양(Aveiro)에서 여정을 마치는 보가 강의 경유지인 라마스 두 보가(Trofa, Segadães e Lamas
do Vouga/지자체 아게다의 소교구 마을)에 놓인 교량.
'뽄치 두 까베수 두 보가'(Ponte do Cabeço do Vouga)로 불리기도 하는 다리다.
(이 이름은 Ponte Medieval do Marnel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기 때문에 규명이 필요)
13c 후반에 수십 년의 공사로 지어졌다는 이 다리는 애초부터 공사에 하자가 있었던가.
또는 강물이나 강의 구조에 문제가 있는가.
개축에 버금가는 보수를 비롯하여 수리를 거듭했는데도 말썽을 피우다가 결국 2011년 11월 12일에
7번째 교각과 2개의 아치(교각 양쪽?)가 소실(消失)되었단다.
이 사실을 익히 알고 있는 인근의 주민들은 아예 접근하지 않을 테니까 문제될 것이 없다.
이 다리를 포함한 길이 뽀르뚜 길(까미노)이므로 붕괴 사실을 모르는 뻬레그리노스는 당연히 왔다가
가는 헛걸음을 하게 되고, 알고 있다 해도 사고 현장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다녀가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낮시간대라면 염려될 일이 없지만 만에 하나 뻬레그리노스 또는 이 지역에 생소한 외지인이
불가피하여 칠흑의 심야에 이 다리 위를 걷게 된다면 추락의 위험이 절대적일 것이다.
6. 25 민족동란 발발 3일만인 1950년 6월 28일 심야에 발생한 서울 한강대교의 참상이 떠올랐다.
이 날, 한강 이북의 서울이 공산군에게 함락되어 가고 있을 때, 많은 시민이 피난 길에 올랐다.
북동쪽 광나루다리(廣津橋)는 이미 적의 수중에 들어갔고 유일한 탈출구인 한강대교로 몰려들어서
혼잡이 극에 달하고 있는 심야에 우리 군(軍)이 한강대교의 중간을 폭파해 버렸다.
적의 도강 저지를 위한 극단의 조치였다 하나, 이 시각 이후에 남으로의 피난길에 오른 차량과 우마
차, 도보자 행렬이 폭파된 한강다리 아래로 추락하는 아비규환(阿鼻叫喚) 지경이 되었다.
"차량들의 불빛만 요란할 뿐 건너온 차량이 없기 때문에 형언할 수 없도록 괴이쩍고 불안했다"
훗날, 당시의 노량진 고지대 주민들의 증언이었다.
전후 좌우가 숨 막힐 지경으로 빽빽하여 절로 전진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후진은 고사하고 정지도 못
하고 추락만 이어진 것이다.
나는 적치 3개월 중에는 UN군의 격심한 공습을 피해 불암산록의 한 농장으로 피난했기 때문에 한강
쪽으로 간 적이 없다가 UN군(인천에 상륙한)을 막기 위한 한강의 토치카 공사장에 붙들려갔다.
이 때, 사람과 차량, 세간들이 폭파된 다리의 잔해에 걸려 있는 참상을 나도 목도하였는데 이 단절된
보가의 옛 다리가 두세대 + 6년 전의 참상이 아른거리게 했다.
철거와 보수 유지의 주장이 분분하여 고민거리로 전락되었다는 이 다리.
이즈음의 방치 4년(2015년 기준)은 엄청 긴 세월인데 아직껏(2021년) 볼썽 사나운 모습이다.
북북서의 뽀르뚜(Porto)와 남남동의 꼬임브라(Coimbra), 더 멀리는 브라까라 아우구스따(Bracara
Augusta/現Braca縣)와 올리스뿌(Olispo/現Lisboa) 사이의 옛 로마 길을 이어주는 보가 강 옛 다리
(Ponte Velha do Vouga)라는 역사성을 고려하여 철거를 반대하는 명분론.
기능을 대체한 도로와 다리가 있다는 이유로 철거를 주장하는 현실론.
양 주장이 팽팽하기 때문에 망설이기 5년(2015년현재) 세월이었다는데 흉물 신세를 면할 날은 언제?
로마시대 다리의 불명예 제대
갔던 길을 되돌아 나와 국도를 따라서 보가 강의 밋밋하게 긴 다리를 건넜다.
다리 건너 500m, 우측으로 국도를 벗어나는
오리지널 뽀르뚜 길(Camino)을 따른다면 국도에 진입 직전 지점,
이 동일 지점에서, 안띠가 길(Estr. Antiga)의 바뀐 이름인 '프레게시아 산따 마리아 지 라마스 길'
(R. Freguesia Santa Maria de Lamas)을 따라서 언덕을 넘었다.
백색의 공원묘지(Cemiterio de Lamas do Vouga /Igreja Lamas do Vouga)를 우측에 끼고 내려
가는 역 코스 까미노는 좌측의 국도 밑(지층)을 가로지른다.
이어서 보가 강의 지류 중 하나인 마르넬 강(rio Marnel)의 5개 아치(arch)로 된 다리를 건넌다.
강상공원(Parque da Ponte Medieval do Marnel) 내에 있으며 14c 상반기에 축조되었다는 중세
다리(Ponte velha do Marnel)다.
국도가 개설되지 않았다면 휑하게 넓고 좋은 전망일 텐데 유감이다.
'뽄치 노바 두 마르넬'(ponte nova do Marnel/마르넬의 새로운 다리)로 불렸다는 다리.
'노바'(nova/새로운)는 이 다리 이전에 다리가 존재했음을 시사하는 단어다.
최근에 걸어온 길(Portugues) 중에도 지자체 빌라 노바 지 가이아와 산따 마리아 다 페이라 등 도처
에 로마시대의 길이 남아 있으며 아직 걷지 않은 뽀르뚜게스에도 적잖이 있다.
이처럼, 이 중세다리와 보가강의 옛 다리 양편 길이 로마시대의 길(R. da Ponte Romana)임을 감안
하면 그 다리는 로마시대의 다리였음이 분명하단다.
아마도 2c 전후의 다리가 될 것이다.
이같은 추론을 하지 않을 수 없지만 하지 않는 것만 못한, 우매한 작업이었다.
로마시대의 토목기술에 대한 철석같은 신뢰가 그 다리와 함께 붕괴되어버렸기 때문이다.
6.000여km의 까미노에서 확인된 그들의 기술력은 2개의 밀레니엄을 굳건히 지켜냈을 뿐 아니라 종
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초능력적이었건만.
옥에도 티가 있고,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는 속담으로 자위하는 내게 자아비판이 따랐다.
서울의 성수대교가 붕괴되었을 때 신랄하게 비판했던 원죄가 다시 살아났으니까.
2002년, 미국 텍사스주 멕시코만에 위치한 사우스 파드레 아일랜드(South Padre Island)에서 묵은
적이 있는데 우리 가족(부부와 큰딸)이 건넜던 고공 다리가 미구에 붕괴되었다.
그 섬에 들어갈 때는 승용차로 다리 위를 달렸는데 나올 때는 배를 타야 했다(다리가 사라졌기 때문)
는 큰 딸의 전언이니까.
나는 그 다리에 '미국의 성수대교'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우리의 기술력을 비하하는 표현이었다.
대 집단(군대)의 행진으로 발생한 공명(resonance)에 붕괴된 다리(Angers Br./1850 프랑스), 바람
의 공명으로 무너진 다리(Tacoma Br./1940 미국) 기타 알려지지 않은 붕괴다리가 무수한데도 자국
의 사고만 혹평했기 때문일 것이다.(굳이 변명한다면 走馬加鞭의 역설이라 할까)
한 자료의 다리 붕괴 Top4는(逆順) 베리강 다리(Bheri Riv./2007년 네팔), 성수대교(1994년 한국),
모란디교(Morandi Br./2018 이태리), 껀터대교(CanTho Br./2007 베트남) 등인데 공통점이 있다.
신축년대, 건축기간에 관계 없이 개통 후 하자 보수가 잦은 다리는 붕괴 위험이 최악이라는 것.
붕괴 사고가 유보된(?) 상태로 연명하는 다리가 있기는 하나 이미 사형선고를 받고 집행이 미뤄지는
형국이기 때문에 철거 후 신축 외의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붕괴된 보가강의 옛 다리(Ponte Velha do Vouga)도 갖은 노력(보수)을 다하였지만 로마시대 다리
로는 불명예 제대라는 오명을 남기게 되었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