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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쓰는인생(53)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삼하22:1-7
사람이 언제 철이 들까요? 내가 참 힘이 없다는 것을 느낄 때입니다. 내가 정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였구나, 아무 것도 모르고 지금껏 잘난 줄 알고 다할 수 있을 줄 알고 시건방지게 살아왔구나는 것을 깨달았을 때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차갑고 무서운 세상에 발을 디디면서, 얼마나 힘이 중요한 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힘이 없어서 굶주리고, 힘이 없어서 소외당하고, 힘이 없어서 멸시받습니다. 힘이 없어서 인간취급을 받지 못하고, 아무런 권리도 누리지 못하고 박탈당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힘이 없어서 내 새끼를 물속에 꼬박 삼 년을 처박아 두었던 것입니다. 힘이 없어서 우리는 저 중국의 사드보복을 고스란히 당해야 하는 것이지요. 아뇨, 지금 이 순간에도 “아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탕자의 고백을 쏟아놓고 있는 사람들, 그렇게 실제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오늘도 부지기수 인 것입니다. 2011년 대한민국 하루 평균 자살자 숫자가 43명입니다. 2013년에는 조금 줄어서 40명 정도 였는데, 최근 통계는 찾질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믿음 안에 사는 사람들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 왜 내게는 힘이 없습니까? 하나님! 왜 나는 이 사건 앞에 힘이 없습니까?' ‘하나님! 왜 나는 우리 성도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일까요? 왜 나는 힘이 없는 것일까요?’ 이런 고해(告解)는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은 사람이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공통된 절규일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 힘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이해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마저 힘이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에서는 위기감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어느새 우리 믿는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보다 다른 것들을 더 힘으로 여기며, 힘이라 생각하며, 그 힘을 얻고 싶어하는 것이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습니다. 주님 한분만으로 나는 만족해.. 우리 안에 뜨겁게 가득했던 이 고백이 점점 희미해져가고 있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는 오늘 본문이 소개하는, 사무엘서 기자가 빼놓을 수 없다며 기록하고 있는 이 다윗의 시로부터 오늘 우리네 크리스천들이 소유해야하는 힘의 원천이 무엇인가,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확인하고, 오늘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무력감의 문제, 그에 대한 근원적인 해답을 얻어보고자 합니다. 이 답을 우리 모두가 믿음으로 붙잡으실 수 있으시길 축복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한 번 뿐인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서 ‘누가 더 큰 힘을 붙들었느냐? 누가 진정한 힘의 원천을 찾았느냐?’ 하는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 하일교회의 이름 뜻 가운데 하나가 바로 힘(strength)이 아닙니까? 우리 하일교회야 말로 이 힘이 무엇인지, 그 원천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그것을 묻는 이들에게 답을 해 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이 힘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권력을, 명예를, 돈을, 좋은 옷과 좋은 차, 학위를, 자격증을 힘이라고 생각하고 오늘도 그것을 향해 달려갑니다. 주변을 돌아보지 못하고 나로 인해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지 못하고 그들을 잠재적인 적으로 여기며, 도구로 이용하고 짓밟으며, 그렇게 앞만 향해 달려가는 것입니다. 하나도 가지고 가지 못할 것들, 잠시잠깐 누리다가 잃어버릴 것들을 향해서 말입니다. 그것 하나 가지게 되면 뿌듯해하고 든든해하고 어깨와 목에 힘을 주고 으스대면서 말입니다.
여러분, 힘의 원천을 바로 알고 붙잡으시길 축복합니다. 성경은 뭐라고 이야기 합니까? 시편 46편의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시편 46편 1-3절)
오늘 시를 쓰는 인생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살았던 다윗, 오늘 그가 힘으로 삼았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오늘 본문이 바로 다윗이 지은 대표적인 시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 시와 똑같은 고백이 시편 18편에 소개가 되는데, 시편 18편 1절에는 오늘 시에는 기록되지 않은 선언과도 같은 고백이 하나 추가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평생에 힘으로 삼고 살았던 것이 무엇인지를 소개하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 함께 확인해보겠습니다. 시편 18편 1절입니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시18:1)
왜 다윗이 하나님께 주목받고 하나님께 쓰임받았는지, 다른 형들과 그의 중심이 무엇이 달랐는지, 오늘 그의 심장이 어찌하여 하나님의 심장박자에 맞추어 뛸 수 있었는지, 모든 것이 이 한 문장의 고백으로 확인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 한분을,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그의 힘의 원천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세상 그 어떤 것이 아닌, 우리 하나님으로 힘을 삼으시길 축복합니다. 보십시오. 다윗은 하나님을 힘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께 사랑을 고백드렸던 것입니다.
어떤 하나님입니까? 여덟째, 말째아들로 태어난 어린 다윗이 목동에서 시작해서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성군이 되기까지 온갖 어려움과 시련, 여러 가지 모함과 시기 그리고 수많은 생명의 위협 가운데 늘 함께 하시고 지켜주시고 구원해주시고,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신 놀라우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시편8편4절) 다윗이 생각해도 이렇게까지 생각하시고 이렇게 까지 돌보아주실까 싶을만큼 하나님은 그렇게 다윗을 지키시고 함께 하셨던 것입니다.
다윗의 이 고백은 교리적 선언이 아닙니다. 그의 평생에 걸친 신앙체험에서 나온 고백입니다. 사울을 포함한 자신의 원수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찾아다닐 때에 생명의 위급한 순간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을 의뢰하여 기도하였고, 하나님은 다윗의 기도를 들으시고 사망의 위협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시18:3절에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이어지는 4절 이하도 볼까요? “사망의 줄이 나를 얽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스올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시18:4-6)
다윗은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을 뒤돌아보고 그 대적들로부터 구원받은 후에 지켜주신 하나님을 찬양한 것입니다. 삼하22: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다윗을 모든 원수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그 날에”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지난날의 고생스러웠던 과거와 현재의 자신을 생각해 보니 너무나도 감개무량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도 고마운 것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이렇게 서 있을 수 없었음을 고백했던 것입니다.
그가 깨달은 것이 무엇입니까? 원수 골리앗을 이긴 것도 하나님의 힘이요, 십여 년 동안 사울의 칼날에 위협을 당하면서도 생명을 보존한 것도 하나님의 힘이요, 마침내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열방 왕들의 존경을 받는 위치에 오른 것도 돌이켜 보니 모두가 하나님의 힘이요 은혜였던 것입니다. “은혜 아니면 서지 못하네” “나의 나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특별히 사울의 칼날을 피할 때 더욱 하나님의 돌보심을 지키심을 깨달았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군사 3,000명을 거느리고 수색할 때 다윗은 굴속에 숨었습니다. 굴은 입구가 하나여서 도망갈 길이 없습니다. 다윗의 신복들이 그 안에서 두려워서 떨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에 다윗은 기도합니다. 그런데 사울의 군대가 그 굴을 수색하려고 좁혀 들어오는데 갑자기 사울에게 신호가 오게 하십니다. 아오! 나 거기 잠깐, 내가 먼저 들어갔다올게, 임금이 매화틀도 없이 용변을 보신 곳이니 병사들이 들어가서 수색하지 않습니다. 용변을 잘 보고 나오셨으니, 다윗이 숨어있지 않다고 생각하게 하신 것이지요.
또 한 번은 사울과 그 군대가 다윗을 에워쌌습니다. 이제는 정말 독안에 든 쥐였습니다. 그 때에도 다윗은 기도합니다. 그랬더니 한 병사가 사울에게 전갈하기를 지금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전쟁을 시작했다고 알렸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사울은 군대를 철수하여 전쟁터로 나갑니다. 기가 막히지요? 다윗이 기도하기 이전부터 블레셋이 전쟁을 일으키게 하셨고, 사울이 다윗 앞에 당도하기 직전, 전령이 소식을 들고 도착하게 타이밍을 맞추시는 하나님이 말입니다. 다윗은 사울의 군대가 떠난 다음에 그 곳 이름을 '셀라하맛느곳'이라고 이름을 짓습니다. '도피하는 바위'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위기일발 직전에서 구원하여 주심을 드러낸 것입니다(삼상23:24-29).
다윗은 이렇게나 세밀하게 자신을 지키시고 사랑하시는 그의 기도를 즉각 즉각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자기에게는 긴박한 순간이었지만, 이미 다 아시고 모든 것을 준비하시고 역사하신, 그렇게 자신의 기도 기도마다 들으시고 지켜주신 하나님, 그 어려운 순간에 지혜를 주시며, 하나님의 명령과 법도를 인간적인 복수심과 혈기로 깨뜨리지 않도록 늘 섭리해주신 하나님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다윗은 누가 시켜서 고백하는 것도, 배워서 고백하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가 경험한 하나님, 자기가 체험한 하나님, 자기가 누린 하나님을 찬양했던 것입니다. 뭐라구요.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라고요.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도 그러하면 좋겠습니다. 누군가에게서 들어서가 아니라, 배워서가 아니라, 우리의 삶의 순간순간 찾아오시고 역사하시고 개입하시며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놀라운 주님을 경험하시고, 시간 시간 그 은혜를 돌아볼 때마다 감사하여 고백하시는, 오늘 다윗처럼 나의 힘이신 여호와, 나의 피난처이시고 방패이신 여호와, 그 고백의 가짓수가 오늘 다윗처럼 늘 열 가지가 되시는, 아니 그것보다 더 많이 고백하시는 복된 분들이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루 하루가 그렇게 시를 쓸 수밖에 없는 생애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자, 그럼 이제 살펴보시자구요.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라는 다윗의 고백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은 다윗의 어떤 힘이 되셨습니까? 다윗은 힘의 원천이 되신 여호와를 열 가지로 표현했습니다. 간단 간단하게 한번 주욱 살펴보겠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이러한 하나님의 지키심과 돌보심을 누리시길 축복합니다.
⑴ 나의 반석이시오: 반석은 단단한 암반을 의미합니다. 이곳은 폭풍우가 몰아치고 홍수가 나도 그 기초가 무너지거나 흔들리지 않는 안전한 곳입니다.
여러분, 환란은 폭풍우와 같고, 성난 홍수와도 같이 달려듭니다. 그러나 반석 되시는 하나님은 자기를 믿고 의지하는 자들을 이러한 반석 위에 보호하심같이 존귀하게 보호하시며 구원해 주십니다.
⑵ 나의 요새시요: 요새는 사람의 힘으로 짓지 아니한 천연적 지리조건을 갖춘 피난처를 의미합니다. 적군의 동태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어 공격을 피하거나 저지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칼날을 피하여 동굴 속에서 지내기도 했습니다. 이 요새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 주심을 의미합니다.
삼상23:14절 ' 다윗이 광야의 요새에도 있었고 또 십 광야 산골에도 머물렀으므로 사울이 매일 찾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넘기지 아니하시니라'
⑶ 나를 건지시는 자시오: 요새와 같으신 하나님께서는 환란의 늪에 빠져 죽어 가는 당신의 백성들을 건지시는 자로써 절망가운데 처한 성도들을 건져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에서 건지시고, 실패와 좌절과 질병에서도 건져주시는 분이십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어떤 역경과 환란가운데서도 능히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시70:5절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니 여호와여 지체하지 마소서'
⑷ 나의 하나님이시오: 여기 하나님은 엘로힘의 하나님으로 모든 환난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의 공급자가 되시며 한마디로 모든 환난을 극복하는 힘을 주시는 바로 힘의 원천자이시며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롬11:36절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⑸ 나의 피할 (반석)바위시오: 우리는 서부영화에 보면 바위를 지형조물로 삼고 싸우는 모습을 봅니다. 총알을 피하게 하는 바위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바위처럼 우리를 보호해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시89:26절 '그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
⑹ 나의 방패시오: 전쟁에 임한 군사의 몸을 보호하기 위한 무기입니다. 화살을 막아주고 도끼와 칼날을 막아줍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방패와 같이 성도의 육신과 영혼을 상하지 않도록 지켜주신다는 말입니다. 시3:3절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⑺ 구원의 뿔이시오: 하나님의 능력을 의미하는 것으로 환난과 싸워 이기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동물들의 무기는 바로 뿔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이 뿔의 권세로 원수마귀사단의 권세를 꺾습니다. 눅1:69절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⑻ 하나님은 나의 높은 망대시오: 망대는 적의 동태를 살펴 경계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즉 깨어 지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⑼ 피난처: 원어의 의미는 '사막의 모래바람과 폭풍으로부터 보호를 받는다.'는 말로, 연약한 자들이 안전하게 거할 수 있는 곳을 의미합니다.
⑽ 나의 구원자시라: 원어는 '야솨'입니다. 원수의 모든 도전을 꺾고 성도들을 모든 위협으로부터 건져내시는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시106:21절 '애굽에서 큰 일을 행하신 그의 구원자 하나님을 그들이 잊었나니'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시며 원수를 제압하시는 구원자이십니다. 마침내 사울을 길보아 산에서 죽게하시고 다윗으로 진정한 왕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3000년전 다윗은 이렇게 하나님을 고백하고 감사한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생각이 드셨습니까? 다윗왕과 하나님께 좀 송구스럽지만, 에이구 귀엽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에이구 그 정도도 감사했구나 싶었습니다. 제가 왜 이런 무모한 표현을 쓰는지 한번 들어보십시오. 여러분, 다윗이 오늘날 시를 쓴다면 아마 고백하는 하나님의 이름이 백 가지, 천 가지는 되지 않을까요? 우리는 다윗보다 훨씬 더 더 복잡하고 무수한 적들과 유혹과 위협들 앞에서 살아가고 있는 까닭입니다. 학교갔다 오는 길에 동네 언니를 잘못 만나도 죽는 세상이요, 수학여행가는 배를 잘못 타도 죽는 세상이요, 지하철에서 눈만 마주쳤는데도 따라와서 때리는 세상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엊그제는 이미 탑승한 승객들 중에 무작위로 네 명을 뽑아서 때리고 끌어내리는 세상이라고도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서산에는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가만히 신호대기 하고 있는데 레미콘이 차 위로 넘어져서 죽는 것이 아닙니까? 일개 대통령이 회의하다말고 쏴! 그러니까 토마호크 미사일 49발이 공항에 갖다 꽂히는 세상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옥상에 올라가야 어쩌다 딱 한 번 목욕하는 여인이 보이던 세상이 이미 아닙니다. 방에 가만히 누워서도 목욕보다 더한 것을 다 볼 수 있는 세상입니다. 아니 이제는 뭘 굳이 안해도, 온통 주변이 집만 나오면 더럽고 추한 것들이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들려지는 세상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물도 공기도 다 오염되어 있습니다. 먹을 거리가 유전자조작이 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농약과 방부제를 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빙하는 다 녹아 없어지고 있습니다. 방사능이 질질 땅과 바다로 공기중으로 새어나오고, 발암물질을 덕지덕지 바르고 깔고 붙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 달 간격으로 피어나야할 꽃이 한꺼번에 피고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온통 쓰레기를 땅에 바다에 우주에 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힘이 되지 않으시면, 하나님께서 지켜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지경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오늘도 살아 있는 것이 용하다고 해야할만큼 무섭고 두려운 세상인 것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 만드신 세상을 망가뜨리고 부수고 있는지, 지구에 30조톤 구조물이 올려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도로로 지구가 60만 조각이 나 있다는 것입니다. 지구역사를 1년으로 하면, 그 가운데 인류문명은 1분이라는데, 지금 아주 속된 말로 이 지구를 작살내고 있는 것입니다. 화석화된 쓰레기 바다, 정말 우리 딸이 지구상의 마지막 세대가 될 지도 모른다고 했던 그 영화의 광고문구가 정말 피부로 다가오는 시간을 우리는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하나님의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는 분이 우리를 지켜주셔야 합니다. 왜요? 하나님의 힘이 바로 이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다윗이 고백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힘은 어떤 특징이 있는 힘일까요? 원어로 이게 무슨 단어일까 찾아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여러분, 직접 확인하시지요?
이 '힘'이라고 번역된 이 단어가 히브리어로 '게브라'(GEBRA)입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보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럼 제가 찾아본 이 광고자료를 한번 보세요. 1982년도에 유한양행으로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왔더라구요. 오래 전에 전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영양제로 한국에서도 즐겨 복용했던, 우리 말로는 발음이 좀 이상하게 들리는 '게브랄티'라는 종합 비타민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제 친구들이 무엇인가 무거운 것을 들려고 할 때마다 맨날 개부랄티 개부랄티 그러더니만 그게 뭔지 제가 이제야 알았습니다. 그 '게브랄티'는 유대인들이 만든 약품인데 그 이름이 바로 하나님의 힘이라는 '게브라'에서 착안해 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서는 돈도, 건강도, 명예도, 관계도, 학력도, 스펙도, 경험도, 뭐 별의 별 많은 것들이 힘이요, 경쟁력이라고 말하지만 힘의 근본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힘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 '게브라'의 하나님의 힘은 3가지의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 특성은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힘도 영원하지 못합니다. 재물의 힘, 권력의 힘, 명예의 힘, 과학의 힘, 의학의 힘도 유한합니다. 사실 이러한 힘이 있으면 사람들이 앞에서 굽실거리고, 어려운 일들도 쉽게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권력이 얼마나 좋은지 일단 한번 그 맛을 보면 헤어나기 힘들다고 합니다. 뭐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느니 그래서 정권을 유지하려고 연장하려고 법을 바꾸어보려고 기를 씁니다. 그러나 권력은 유한합니다. 權不十年(권력은 십 년을 가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한계가 있습니다. 언젠가 다 사라질 힘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힘만이 영원합니다. 그 힘을 믿으십니까?
두 번째 특성은 '불가능이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불완전합니다. 아무리 인간이 대단하고 놀라운 과학의 혁명을 개발해 낸다 해도 언제나 문제가 부딪힙니다. 인간의 지식, 과학으로 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죄의 문제입니다. 그 외에도 많은 불가능한 것이 앞을 가로막습니다. 그래서 은근히 요행을 바랍니다. 기적을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없습니다. 못하실 일이 없습니다.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으면 영원히 죽지 아니하게 하시는 생명과 부활의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 특성은 '신실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변덕부리지 않는 힘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힘을 가졌다 하면 그때부터 변덕을 부리기 시작합니다. 권력의 힘, 돈의 힘 등 그 힘을 맛보면 그때부터는 변덕을 부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변덕을 부리시지 않는 신실한 힘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 인생들은 변해도 하나님은 결코 변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우리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신 사랑으로 우리를 돌보시는 것입니다(히13:8).
사랑하는 하일교회 성도님들, 이 세상 믿을 것이 없습니다. 하나도 없습니다. 오늘도 영원하고 불가능이 없으시며 신실하신 하나님의 힘을 더욱 의지하시길 축복합니다. 그 찬송이 아주 딱 맞습니다. 이 세상 험하고 나 비록 약하나 주 예수 힘 주사 굳세게 하소서.(새263) 주님 힘 주시지 않으면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 예수 주시는 그 힘으로 세상을 이기며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시는 복된 축복의 통로요 능력의 도구가 되시길 바랍니다.
그렇다면 이 힘은 어떻게 쓸 수 있는 힘일까요? 이 힘은 어떻게 해야 오늘 나에게 주어지는 힘이 되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힘이 있다한들, 내 것이 아니고 내가 쓸 수 없는 힘이라면 뭐 아무리 좋아도 헛것이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예수님께서 그 힘을 나에게 주실까요? 그 비결은 다음 수요일에 이어서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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