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1565년 명종은 모후 문정왕후가 위독할때 왕후의 친정집 동생이자 영의정인 윤원형을 빨리 입궐하라는 심부름을 심의겸에게 시킨다.심의겸이 왕명을 받고 윤원형의 집에 당도하니 거기에 김효원이 기거하고 있는것을 보고 깜짝 놀라 천하의 간흉 윤원형의 문객인 김효원을 마음속으로 경멸한다. 이 짧은 만남의 갈등이 조선 왕조의 黨爭史를 엮어가는 서장이 되었다. 이로부터 7년이 지난 1572년 김효원과 심의겸은 이조정랑 자리를 두고 살인적인 갈등이 시작된다.
심의겸은 청송 심씨로 명종비 인순왕후의 동생으로 퇴계의 문하생이며 외척 출신으로 사림들의 명망이 높았다. 김효원은 선산김씨로 김종직의 후손이며 퇴계와 남명 조식의 문하생으로 1565년 알성 문과에 장원급제한 장래가 촉망되는 선비였다
이때 金孝元이 윤원형의 집에 기거하게 된 이유는 그의 장인 정승계가 윤원형의 아내 요사꾼 정난정(윤원형의 첩실로 들어가 본부인 김씨를 독살하고 본부인이됨)과는 4촌 남매간이 였으므로 장인이 사위 김효원의 공부와 세상 물정을 알기 위해 정난정에게 부탁하여 그의 집에 기거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 33살이였다. 1572년 吳健이 김효원을 이조정랑으로 추대하였는데 이조참의로 있던 심의겸이 간흉 윤원형의 문객이라 하여 반대하여 무산되었다. 李朝正郞은 사간원과 사헌부 관원을 추천하는 인사권을 갖고있는 관직으로 후임자를 자기가 추천하는 요직중의 요직으로 이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이 치열하였다. 김효원은 그 후 1574년 趙廷機의 추천으로 이조정랑이 되었는데 그 후1575년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이 이조정랑에 추천되자 심씨 집안은 외척으로 부당하다며 강력하게 반대하고 李潑 을 추천하였다.이를 계기로 두 사람 사이는 극도로 악화되고 편이 갈리니 김효원의 집이 서울 동쪽 낙산 밑 건천동에, 심의겸의 집은 서울 정능방에 있어서 김효원은 동인, 심의겸은 서인으로 부르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붕당을 우려해 우의정 노수신, 부제학 이율곡이 상소를 올려 김효원과 심의겸을 외직으로 보내도록 하니 김효원은 멀리 함경도로, 심의겸은 개성으로 보냈는데 이 두사림의 임지가 불공평 하다며 동인들은 제차 상소가 올려 심의겸을 전주로 보내고야 조용해졌다.
이율곡은 하찮은 일로 서로를 비방하며 얻는것이 무엇이냐, 여기에 學이있는가,禮가 있는가 탄식하였지만 그 역시 당쟁에 휘말려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버리니 율곡이 떠난 빈자리는 동인과 서인들이 이전투구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엿다.
1584년 이이가 죽고 동인이 득세함에 따라 서인은 몰락하고 심의겸도 파직되고 말았다. 한편 김효원은 함경도 영흥부사로 재직하다 죽고만다. 그의 맏며느리가 허봉의 딸이며 맏사위는 허균으로 동인의 우두머리 초당 허엽과는 사돈이 된다.이들 양천 허씨들은 후일 남인의 강경파가 되어 노론과 치열한 당쟁을 주도하니 혼맥으로 맺은 결속력은 무시할수없다.
서인의 영수 박순과 동인의 영수 허엽은 모두 화담 서경덕의 제자로 이때 노선을 달리 하며 서인으로는 이이, 성혼,홍성민,辛應時,김계휘,정철,윤두수,윤근수,구자맹,이귀등이며, 동인으로는 허엽을 위시하여 류성룡, 김성일,남이공,김우옹,이발,정유길,이산해,이원익 등으로 퇴계와 남명의 제자로 나이가 젊고 학문과 절개를 소중히 하는 사람들이였다.
지금 국회와 정치권의 하는 짓거리와 인맥이 그때와 너무나 비슷하여 자못 흥미롭다.
첫댓글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일깨워주어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