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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영 국방대학교 명예교수/한국시니어과기협 회원 2023년 10월 1일
1. 태조 왕건과 도선(道詵)
태조 왕건은 943년에 붕어(崩御)하면서 후세 왕들에게 남길 10가지 가르침인 『훈요 10조』라는 것을 남겼는데 그중 8번째 훈요(訓要)가 지역감정을 유발할 만한 내용이 담겨 있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차현(車峴) 이남과 공주강(公州江) 바깥쪽(外)은 산과 땅의 형세가 모두 반대 방향으로 뻗었으니 인심 역시 그러하다. 그 아래 지방 사람들이 조정에 들어와 종친이나 외척과 혼인하여 국정을 잡게 되면 혹여 국가를 반란케 하거나, 혹은 통합된 원한을 품고 거동하는 길을 범하여 난을 일으킬 것이며, 또 과거 관청에 예속된 노비와 진(津)과 역(驛)의 잡척(雜尺)에 속하던 무리가 권세가들에 아부해 신분을 바꾸거나 요역(徭役)을 면제받기도 할 것이며, 종실이나 궁원(宮院)에 빌붙어 간교한 말로 권세를 농락하고 정사를 문란케 하여 재앙을 일으키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비록 그가 양민(良民)이라 하더라도 관직에 올려 일을 맡겨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데도 고려 중~후기의 학자들이 도선(道詵, 827~898)의 말을 빌려 태조 왕건이 백두산의 정기를 받아 탄생했다고 기록했다. 도선은 김 씨이고, 827년 무진주 영암군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진주는 지금 광주광역시 지역에 해당한다.
차현 이남과 공주강 바깥 지역은 소위 배산역수(背山逆水)의 지형이라 그곳 사람들 역시 성품이 배역하기 쉬운 성품이므로 널리 등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공주강은 지금의 금강(錦江)을 말하는 것인데 차현은 종래엔 차령산맥(車嶺山脈)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불분명하다(출처 : 굿모닝충청, 문경현: 고려 태조 후삼국통일 연구). 2005년에 국토연구원이 직접 조사한 결과 치악산에서 더 이상 산세가 이어지지 않아 차령산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2. 한 반도 산세와 강 흐름, 그리고 차현(車峴) 이남과 공주강(公州江) 바깥쪽(外)의 지역
산경표(山經表)는 조선 영조 때 여암(旅庵) 신경준(申景濬; 1712년-1781)이 편찬한 것으로 알려진, 조선의 산맥체계를 도표로 정리한 책을 말한다. 박경이 산악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은 “1860년대 이후의 <산경표> 판본은 1대 간 2정 간 12 정맥과 1대 간 1정 간 13 정맥이 혼용되고 이번에 발굴한 <산경표>는 산·강 이름뿐 아니라 위치도 병기하는 등 인문 지리 기록물로서도 가치가 높다고 말하고 있다. 『산경표』 산맥체계의 특징은 대간과 정간을 제외하면 대부분 하천의 수계를 기준으로 산줄기를 분류하고 있다.
백두대간을 이루는 주요 산은 기점인 백두산(2,744m)으로부터 금강산(金剛山, 1,638m, 진부령(陳富嶺, 529m), 설악산(雪岳山, 1,708m), 오대산(五臺山, 1,563m), 대관령(大關嶺, 832m), 태백산(太白山, 1,567m)으로 이어 소백산(小白山, 1, 421m), 죽령(竹嶺, 689m), 이화령(梨花嶺, 548m), 속리산(俗離山, 1,508m)으로 뻗어내려, 덕유산(德裕山, 1,614m), 육십령(六十嶺, 734m), 영취산(靈鷲山)까지 금강의 동쪽 분수산맥을 형성하며 섬진강의 동쪽 분수령인 지리산(智異山, 1,915m)에서 백두대간은 끝난다.
백두대간은 서쪽으로 해안선까지 많은 골짜기와 들을 이루며 뻗어 내려간 13개의 정맥, 즉, 청북정맥(淸北正脈)·청남정맥(淸南正脈)·해서정맥(海西正脈)·임진북예성남정맥(臨津北禮成南正脈)·한북정맥(漢北正脈)·한남정맥(漢南正脈)·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금북정맥(錦北正脈)·금남정맥(錦南正脈)·금남호남정맥(錦南湖南正脈)·호남정맥(湖南正脈)·낙동정맥(洛東正脈)·낙남정맥(洛南正脈)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중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과 금북정맥(錦北正脈) 남쪽으로 공주강(지금 금강)이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읍의 신무산(神舞山, 897m)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흘러 덕유산에서 발원하는 줄기를 합쳐 충북 옥천으로 북상하여 충남 연기군에서 서쪽으로 흘러 공주에서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부여를 지나면서 남하하여 강경(江景)에서 서남쪽으로 흘러 군산에서 서해로 흐른다.
금북정맥(錦北正脈)은 한남정맥에서 갈라져 나와 칠현산(516m), 안성 서운산, 천안 흑성산 (519m), 아산 광덕산(699m), 청양 일월산(560m), 예산 수덕산(495m)을 지나 태안반도 끝 안흥진에서 끝을 맺는다. 한남금북정맥은 속리산에서 상당산, 좌구산, 마곡산, 주걸산(周傑山), 칠현산(七賢山)까지 가서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이 갈라진다.
차현(車峴)은 현재 차령(車嶺)으로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과 공주시 정안면 사이에 있는 고개를 일컫는다. 이 고개는 높이 190m이고 서북쪽에 봉수산(366m)이 있고 동남쪽에 국사봉(國士峰, 403m)이 있다. 북쪽으로 흐르는 하천은 곡교천(曲橋川)에 합류되어 아산만으로 들어가고, 남쪽으로 흐르는 하천은 정안천(正安川)에 흘러들어 금강에 합류한다.
새로운 산수 개념인 정맥을 기준으로 본다면 차현(車峴)은 한남금북정맥과 금북정맥으로 생각할 수 있고 공주강 외는 금강 밖으로 개성에서 보았을 때 금강 남쪽이다. 금강 발현 남쪽으로 금남정맥이 위치하는데, 태조 왕건이 지칭한 차현(車峴) 이남과 공주강(公州江) 바깥쪽(外)은 금북정맥, 북으로 흐르는 금강 그리고 금남정맥 안 지역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면 차현 남쪽과 금강 밖에 속하는 주요 지역은 지금 충청남도 남부와 전라북도 북부이다. 금강 밖이라 해서 전라도 남해안까지로 보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금강은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읍의 신무산(神舞山, 897m)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흘러 덕유산에서 발원하는 줄기를 합쳐 충북 옥천으로 북상한다. 따라서 차현(車峴) 이남과 공주강(公州江) 바깥쪽(外)은 금강 남쪽, 덕유산 서쪽 그리고 금강 발원지 북쪽 지역을 의미한다. 결과적으로 충청남도 남쪽 지역과 전라북도 지역이고 이 지역에서 인물이 나타나 고려를 멸망시킨다고 미리 알고 패역(悖逆)의 땅으로 지칭한 것이다.
3.⌜차현(車峴) 이남과 공주강(公州江) 바깥쪽⌟은 풍패(豊沛)의 터
왕건과 도선이 차현(車峴) 이남과 공주강(公州江) 바깥쪽을 경계한 것은 고려를 멸망시킬 세력이 이곳에 나올 것을 경계하여 여러 악조건을 열거했는데, 결국 전주에서 함흥으로 옮겨 간 집안 중에서 전주이씨 이성계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세웠으니, 왕건과 도선이 우려한 것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다.
1593년에 정철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 서장관이었던 전북 익산 출신 표옹(瓢翁) 송영구(宋英耈;1556~1620)의 문집 ⌜표옹 문집⌟에는 주지번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데, 표옹이 북경에 머무는 동안 숙소의 부엌 아궁이에 불을 때던 청년 하나를 보았다. 그는 불을 때면서도 무언가 끊임없이 읊고 있는 것을 가만히 들어보니, 장자의 남화경에 나오는 내용이었다. 숙소의 잡부가 남화경을 외우는 것이 이상해서 표옹이 그 청년을 불러 물어보니, 그는 남월(南越) 출신으로서 과거를 보기 위해 북경에 왔으나 여러 차례 낙방하여 호구지책으로 객사의 잡부로 지내고 있다고 했다. 표옹이 그에게 과거시험 답안지를 어떻게 작성했는지 종이에 써보라고 하니, 그는 문장의 이치는 많이 깨쳤지만, 답안지 격식에 미흡한 점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표옹은 조선의 과거시험에서 통용되는 모범답안의 작성 요령을 알려주는 한편, 몇 권의 책과 상당한 액수의 돈까지 주었는데, 그 후 과거에 합격한 젊은이가 바로 주지번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주지번이 표옹을 만난 지 2년 뒤인 을미년(1595년)에 과거에 장원급제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1606년 한림학사 주지번이 황태손의 탄생을 알리러 명나라의 정사로 조선에 오게 되었다. 그런 주지번이 공무를 마치고 표옹을 만나러 전라도로 가면서 전주객사에서 풍패지관(豊沛之館)이란 현판 글씨를 써주었다. 이 현판은 새로운 왕조를 일으킨 제왕의 고향이라는 뜻이다. 주지번이 써준 풍패(豊沛)란 한(漢) 나라를 건국한 유방의 고향인데, 전주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고향임을 의미한 것이다. 주지번은 표옹을 찾으면서 서적 80권과 함께 멀리서 스승을 추모하고 있다며 스승의 집을 일컫는 망모당(望慕堂; 전북도 유형문화재 제90호) 이라는 편액과 표옹의 사후 묘지 자리<身後之地, 신후지지>를 골라주었다.
그런데 풍패(豊沛)란 고향을 떠난 사람이 제왕에 오른다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성계가 전주이씨로 함흥에서 출세하여 왕위에 올랐다. 왕건과 도선은 이런 사실이 일어날 것에 대비하여 ⌜차현(車峴) 이남과 공주강(公州江) 바깥쪽⌟을 경계했던 것이다. 그 이후 전주이씨 양녕대군 16대 후손인 이승만 박사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되었고, 김일성은 평안남도 대동군 용산면 외가에서 태어났으며 평양 만경대는 조부모가 살던 집이다. 김일성은 전주김씨로 12대조 김계상이 전라북도 전주에서 평양을 이주하여 살았다. 전주와 김제, 완주에 걸쳐 있는 모악산은 아기를 안고 있는 형상을 띠고 있어 ‘어머니의 산’이라 불리는 산이고 이 모악산은 북한 김일성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전주 김씨' 시조 김태서의 묘가 있는 곳이다. 전두환 본관은 완산(完山)이다. 그는 경상남도 합천에서 4남으로 태어나 5세 때 대구로 이주하였다. 그의 가계는 몰락한 양반으로 13대조인 전제가 임진왜란 때 영산현감으로 일본군과 싸우다, 권율의 명령을 어겼다며 처형당했고 이후 무관이 몇 명 배출됐지만 한동안 벼슬에 나가지 못한 상태였다. 여하튼 전두환도 완산 전 씨로 대통령이 되었다. 그렇다고 보면 전주 살던 사람이 타지역으로 가서 이주하여 사는 사람에게 왕이 될 기회가 온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금강 밖은 우리나라 곡창지대이고 전주는 풍패(豊沛)의 땅이라 좋은 전통을 왕건 태조 입장에서 금강 밖 인물이 고려를 멸망시킬 것을 미리 알고 전라도를 폄하(貶下)했으며, 우리는 조선 시대 전주 이씨를 왕으로 모시면서도 왕건 태조 훈요8조를 따랐던 것이다.
실제로 금강 이남에는 계룡산이 있어서 풍수지리에서 중요성으로 인식되고 있다. 옛날부터 무당들이 정신을 수양하는 곳으로도 유명했다. 계룡은 익룡(翼龍)이 알을 폼고 있는 형상으로 풍수지리 상 명당자리이다. 민간신앙 사이에 정씨가 나타나 도읍한다는 설이 파다했었다.
그런데 현재 차현 남쪽 그리고 금강 밖을 전리북도 그리고 전라남도로 생각하여 전라도 사람들은 울분을 토하고 있다, 더구나 1960년대 박정희 대통령 시절 원자재 돌입이 유리하여 일본에 가까운 경상남도 울산, 창원, 마산 그리고 거제에 공업단지가 치중되어 건설되고 있음을 빗대여, 1971년 대한민국 제7대 대통령 선거 대선 때 김대중 대선 후보가 ⌜전라도 푸대접⌟이라는 구호로 전라도 민심을 잡아 지역감정이 더욱 노골화되어 지금까지 응어리지고 있다.
4. 전라남도는 ⌜차현(車峴) 이남과 공주강(公州江) 바깥쪽⌟과 무관한 지역이다.
그러나 전라남도는 영산강이 서해로 흐르고 섬진강이 남해로 흘러서 금강과 같이 역행함이 없이 순리대로 흐르고 있으며 지리산이 백두대간 끝 지점에 버티고 있고 호남정맥이 영산강과 섬진강을 나누고 있어서 전라북도와 전혀 다른 지세를 보이고 있다.
그런 연유로 삼국시대 장수가야(반파국, 기문국)은 대가야와 금관가야가 신라에 침입으로 멸망했으나 남아서 백제와 연합하여 신라에 끝까지 항전했었고 후 삼국 때 왕건이 수군을 거느리고 나주를 점령한 후 왕건을 지지하여 견훤을 괴롭혔다. 왕건이 달구벌에서 대패하여 간신히 도망갔을 때 견훤이 나주를 점령하는 시간에 개성에서 전세를 회복하여 고창(지금 안동)에 와서 실지를 회복하려 할 때 견훤은 주력을 이끌고 낙동강을 끼고 병산에서 만나 싸웠는데 왕건이 처음에는 불리했는데 김 씨, 권 씨, 장 씨 호족이 왕건 측에 가담하고 유금필이 저수봉에서 견훤 배후를 급습하여 왕권이 승세를 잡아 승리하여 후삼국을 통일 할 수 있었다. 그런 왕건이 ⌜차현 이남과 공주강 밖⌟이라고 했을 때 전라남도는 염두에 두지 않았음이 틀림이 없다. 더구나 풍수지리를 조언한 도선은 영암군에서 태어난 사람이었다. 왕건 태조 중신 중에 영암인 최지몽, 승주인 박영규 그리고 나주인 장화왕후 오씨가 있고, 조선조 초기 전라도 본을 둔 상신들을 들면, 장수 황희, 순천 김종서, 능성 구치관, 광주 김국광, 등이 있고 사륙신 중 한 사람인 박팽년은 순천 사람이며, 문인으로 해남 윤선도가 유명하디.
5. 결론
전라도는 조선의 곡창지대여서 김시민의 진주성 방어와 이순신의 수군이 한산도를 지키고 있어서 임진왜란 때 왜군에게 점령당하지 않아서 조선이 지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묘재란 때 조선 수군이 무너지고 진주성이 왜군에게 점령당하여 전라도가 왜군에게 점령당하고 말았다. 일제 강점기에 토지를 많이 소유한 호남 재벌들이 인재 양성과 독립운동에 많은 지원을 했었다. 광주 학생운동은 애국 학생들의 표본이 되고 있다. 김성수가 양성한 인재들이 한민당 주류를 이루어 초기에 이승만을 지지하여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함으로서 자유민주주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그러나 현재 ⌜차현 남과 공주강 밖⌟ 때문에 그리고 호남 푸대접이라는 구호 때문에 전라남도가 엉뚱한 방향으로 가지 않나 극히 의심스럽다. 전라도가 대한민국 초창기 이승만 초기 대통령을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하여 자유 대한민국의 기초를 닦는 데 성공했다. 전라도 사람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알고 자부심을 품어야 하고, 자유 대한민국의 안보를 위해 자유 우방과 동맹을 맺는데 적극 지지하고, 종북 세력을 자유 대한민국에서 제거하는 데 앞장서야 자유 대한민국의 안보가 튼튼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