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차
展
놀게둬_40.9x31.8_oil on
canvas_2013
2015 8. 13(목) ▶ 2015. 8.
26(수)
서울 종로구 평창동 111-16 | T.02-396-8744
놀게둬2_90.9x72.7_oil on
canvas_2015
실타래 탯줄, 무의식 속 트라우마 치유의
이정표
홍차 작가의 작품은 온통 아이세상이다. 마치 무중력에서
유영(遊泳)하듯, 자유로운 아이들의 모습에서 더없이 큰 평화로움을 느끼게 된다. 그 옛날 '포도넝쿨에 매달려 놀이에 푹 빠져 있는 천진한
동자(童子)들이 등장하는 고려청자 상감포도동자문(靑磁象嵌葡萄童子紋)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유려한 선과 해학적 상감(象嵌)의 조화가 어우러진
고려청자 속의 동자상이나 작가가 그려낸 '아이가 주인공인 세상'은 서로 다르지 않다. 그러고 보면 아이의 웃음소리와 미소를 바라보는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작가의 아이그림에선 좀 특이한 점이 발견된다. 바로 아이 곁에 늘
실타래가 함께 등장한다는 점이다. 얼핏 보면 일반적인 털실을 감아놓은 뭉치 같지만, 자세히 보면 한 올씩 풀려 아이와 연결되어 있다. 정확히는
아이의 배꼽과 맞닿아 있다. 한 가닥의 실을 배꼽에 달고 헤엄치듯 유유히 공중에 떠다니며 놓고 있는 아이들. 이는 다름 아닌 자궁 속에서 노닐고
있는 태아(胎兒)를 묘사한 것이다. 결국 홍채인의 그림은 자신의 집인 어머니의 뱃속에서 평화로움을 만끽하고 있는 태아의 일상을 담아내고 있다.
그런데 작가가 그린 태아의 표정이 이채롭다. 지긋하게 눈을 감고
흥얼거린다거나, 말똥말똥 생기 넘치는 눈으로 이리저리 뭔가를 찾고 있고, 환한 미소로 서로를 마주보는가 하면, 다른 쪽에선 기대앉아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다. 그렇다면 과연 태아도 오감(시각ㆍ미각ㆍ촉각ㆍ청각ㆍ후각)을 느낄 수 있을까? 아기의 모든 감각능력은 자궁 내에서 이미 발달하기
시작한다. 출생 후에 몇 년 동안은 엄마 뱃속에서 익힌 감각에 새로운 자극을 더하면서 조율할 수 있는 자율능력을 길러가는 것이다. 어른의 감각
역시 그런 아기 스스로 타고난 유전적 환경과 외부 자극이 빚어낸 상호작용의 결과인 셈이다.
인생은 꼬이고 꼬인 실타래와 같다는 말이 있다. 인생이 자신의
마음대로만 풀린다면 세상에 무슨 근심걱정이 있겠나? 하지만 실타래는 처음부터 꼬여 있진 않다. 그것을 풀어내는 과정에서 얽히고설킨다. 어쩌면
남들보다 스스로의 판단 때문에 꼬인 것인지도 모른다. 이처럼 녹록치 않은 인생여정을 작가는 탯줄을 달고 있는 아이의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다.
태아는 자궁 속 이리저리를 아무리 헤매고 놀아도 탯줄이 꼬이지 않게 하는 요령과 지혜가 있었다. 하지만 그 탯줄을 끊고 세상에 나오는 순간 그
지혜를 망각하고 만다. 홍작가의 그림은 이 세상의 꼬인 또 다른 탯줄들 역시 태아의 지혜로움을 빌어 풀어보자 말하는
듯하다.
놀게둬_65.1x53.0_oil on
canvas_2015
"인간에 있어 예술 활동은 내면 깊숙이 들어있는 무의식의 기억
이미지라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성장하면서 많은 경험들을 하고 그 중에 여러 종류의 상처를 받기도 한다. 그 상처가 트라우마(trauma)가
되어 오랜 시간 무의식 속에 갇혀 있다가 꿈이나 예술 활동 또는 잘못된 행동으로 반복되어 나타난다. 트라우마는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잘못된
행동으로 나타나는데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실수 아닌 실수를 한다. 본인작품은 프로이트의 이론을 바탕으로 하며
내면 깊숙이 남아있는 무의식속의 불안을 끄집어내어 재구성하였다. 작품 속 이미지로 선택한 아기와 실타래는 트라우마의 기억을 보상 받고자 하는
욕망을 대신한 것이고, 작품의 배경을 보면 시간과 경계가 없는 무한공간이며, 이상화된 초현실적 공간이 펼쳐진다. 이것은
데페이즈망(depaysement)을 통해서 표현된 것이다. 이렇게 확장된 상상적 자연풍경은 서정적이며 편안하면서도 불편한 느낌을 동시에 준다.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을 바탕으로 한 본 작업은 어둡고 소외된 기억을 승화시켜 아름답고 밝은 예술작품으로 재해석하고자
했다."
홍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발달심리학을 주창한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관점에서 해석하기도 한다. 프로이트의 성격발달(정신분석) 이론은 기본적으로 어린애가 태어나서 성장하기까지
나이를 기준으로 '자아개념 형성의 결정적시기'를 살피는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아무래도 '초기 유아기적 체험'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는 맥락에서 '탯줄과 아이'를 등장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자신만의 독립된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곧 프로이트가 말하는
'진정한 자기 이해의 길'과도 같다는 맥락일 것이다.
꼬인 실타래처럼 알다가도 모를 인생의 삶에 뚜렷한 정답은 없다. 내
안에 나 자신도 모르는 내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이런 '마음의 감옥'에도 보이지 않는 층이 있고, 그런 행동의 배후에
무의식(unconscious)이 작용한다고 주창했다. 프로이트는 굳게 잠긴 방문(마음의 감옥)을 열수 있는 열쇠를 찾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그 감옥의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 자아(自我)와 이드(id-개인의 무의식 속에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본능적 에너지의
원천), 초자아(超自我)의 기능으로 나눠보기도 했다.
인간이면 누구나 다 행복한 삶의 주인공이 되길 바란다. 그래서 자기
자신의 실체에 대해 더욱 탐색하게 되는지 모른다. 과연, 나는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는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종교에서 영적 차원의 길을 찾았다면, 프로이트는 심리적인 차원에서 길을 구했다. 자기 자신의 실체에 좀 더 가까워지기 위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무의식 세계에 탐닉한 셈이다. 반면 작가는 꼬인 삶의 장막을 풀어낼 열쇠를 바로 인간이 세상으로 나오는 관문인 태아의 세계에서 찾은
것이다. 그것은 바로 모든 생명의 영원한 고향인 어머니의 뱃속이며, 어머니의 숨결이다.
어머니 뱃속에서 유영하는 아이는 침묵의 여행을 즐긴다. 이곳이야말로
진정 아이들의 천국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만남이며, 경이로운 생명 탄생의 기적을 만들어내는 출발점이다. 홍작가의 그림이 시기에 따라
변화하는 과정을 보면 아이의 성장과정을 쫓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처음엔 탯줄에만 의존해 한정된 공간에서 부유(浮游)하며 노닐지만, 점차
활동범위도 넓어지고, 어느 순간 탯줄이 사라지기도 한다. 이는 뱃속의 아이가 드디어 또 다른 세상과 만나 전혀 새로운 방식의 삶을 시작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태아에게 탯줄을 자른다는 의미는 어머니와 떨어져 한 사람의 완전한
객체로 출발한다는 뜻이다. 길이 60cm에 굵기 1.5cm, 그 아이와 엄마를 연결시켰던 생명의 고리 탯줄이다. 간혹 탯줄을 목에 걸고 태어나는
아이를 ‘부처님의 자식’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만큼 아이가 탯줄을 목에 감을 확률이 적다는 얘기다. 그래서 엄마의 뱃속에서 쉼 없이 움직이는
과정에서도 그 아이를 지켜줬던 탯줄을 신성시 여기기도 한다. 가령 예로부터 아기가 심하게 아플 땐 보관했던 탯줄을 다려 먹이는 관습이 전해져
오기도 했다. 자손의 무병장수를 탯줄과 태반을 간직함으로 기원했던 '태항 풍습'은 삼국시대부터 시작되었을 정도 오랜 전통이었다.
비록 과학적인 증거는 없었지만 탯줄의 신비한 효험을 믿었던 선조들의
의식이나, 초기 유아기적 체험으로 출발한 무의식의 세계로 자아형성의 비밀을 풀어내려했던 프로이트, 순진무구 천진난만한 태아의 세계를 통해
트라우마의 치유를 시도하고 있는 홍채인의 그림은 한 줄기로 여겨진다. 아무리 얽혀있는 실타래일지언정 반드시 시작점과 끝점은 있듯, 홍작가가
보여주는 '실타래 탯줄'은 혼돈 속에 살아가는 우리 삶도 자신의 정체성을 통해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의 빛을 보여 주고 있다. (홍채인
: 홍차로 개명)
글_김윤섭(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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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nvas_2015
작품설명
인생은 꼬이고 꼬인 실타래와 같다는 말이 있다. 인생이 자신의
마음대로만 풀린다면 세상에 무슨 근심걱정이 있겠나? 하지만 실타래는 처음부터 꼬여 있진 않다. 그것을 풀어내는 과정에서 얽히고설킨다. 어쩌면
남들보다 스스로의 판단 때문에 꼬인 것인지도 모른다. 이처럼 녹록치 않은 인생여정을 홍채인은 탯줄을 달고 있는 아이의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다.
태아는 자궁 속 이리저리를 아무리 헤매고 놀아도 탯줄이 꼬이지 않게 하는 요령과 지혜가 있었다. 하지만 그 탯줄을 끊고 세상에 나오는 순간 그
지혜를 망각하고 만다. 홍채인의 그림은 이 세상의 꼬인 또 다른 탯줄들 역시 태아의 지혜로움을 빌어 풀어보자 말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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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홍차
■ 홍 차 | hong
cha
2010년 울산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 2013년 동 대학
일반대학원 미술학과 서양화 석사 | 2013년 모하스트디오 레지던시 울산지원 작가
Personal exhibition | 2015년
금보성아트센타 초대전, 서울 | 2013년 모하창작스튜디오, 울산 | H갤러리 동구, 울산 | 현대중공업한마음, 울산 | 2012년
울산문화예술회관, 울산 | 갤러리놀이터, 울산 | 2011년 무거갤러리, 울산 | 남송국제아트쇼 초대부스전
(성남아트센터,성남)
Group Exhibitions | 약
60여회
첫댓글 2.3년 전에 홍채인 작가와 처음 만났을때의 그림은. 맑고. 순수하고. 따스하게. 밝은 그림으로. 재밌기도 하고. 마치 태교그림처럼. 감상을 하였다면. 지금 현재에 전시하고 있는 '놀게둬' 전시회에서는 깊이가 더해지는 그림을 감상하게 되더군요. ^^
가끔 보게 되는 홍차님은 호감이 가는 작가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