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 사성 정곤(鄭坤)이 상서(上書)하기를, “나라에서 성균관을 설치한 것 이외에도 또 사부 학당(四部學堂)을 설치하여 교수와 훈도를 두었으며 주부군현(州府郡縣)에도 교관(敎官)을 두어 가르치게 하였으니, 학궁(學宮)에 나아가는 전국 자제의 인원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선비를 시취(試取)하는 정원은 문과 이외에 생원 100인뿐이기 때문에 합격하는 자는 겨우 100인에 1인꼴입니다. 그런 까닭에 향교에 있으면서 나이가 4, 5십이 다 된 사람이 오히려 많고, 배우려는 마음이 이로 인하여 나태해져 공부를 그만두고 다른 기예(技藝)에 종사하는 자가 또한 많습니다.
전조(前朝 고려) 때 선비를 시취하는 방법을 말하면, 문과를 보이기 전에 감시(監試)라는 것이 있어서 시부(詩賦)를 시험 보이고 합격한 자를 진사(進士)라고 하였습니다. 문과를 보인 뒤에는 승보시(升補試)라는 것이 있어서 의의(疑義)를 시험 보이고 합격자를 대현(大賢)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후에 생원시로 승보시를 대치하고 감시도 시행하였습니다. 지금 학생은 매우 많은데 선비를 시취하는 길은 넓지 않으니, 진사시를 다시 시행하여 부(賦)와 표(表)를 시험 보여서 많은 선비들의 사기를 진작시키소서.
또 원우(院宇)를 설치한 것은 길 가는 나그네를 맞이하기 위한 것인데, 허물어져도 수리하지 않는다면 비바람이 들이칠 염려가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도둑들이 약탈할 우려도 있습니다. 각 도에 명하여 일을 맡아 관리할 승려를 뽑아 감사에게 보고한 다음 원우의 옆에 살게 하여 때때로 보수하고 길 가는 나그네도 묵게 하소서. 이어 조정에 보고하여 그 원우의 주지로 임명하고, 애써서 잘 보수하고 관리한 자에 대해서는 또한 직임을 제수하여 권면하게 하소서. 각 역(驛)의 관사(館舍)도 감사로 하여금 점검하게 하고 보수하지 않은 것이 있으면 그 역승(驛丞)을 처벌하소서.”하니, 예조에 내려 의정부, 여러 조의 관원과 함께 논의하도록 명하였다.
모두 이르기를, “지금의 생원시는 이미 고려 때 진사시의 예에 따라 시행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1년에 급제시, 생원시, 진사시 3가지 시험을 동시에 시행하는 것은 너무 번거로운 일이니, 《경제육전(經濟六典)》에 따라 예전 그대로 시행하소서. 각 도의 원우가 매우 많은데 모두 주지로 임명한다면 각 종파에 속한 절간의 주지와 혼동될 수 있습니다. 《경제육전》에 따라 원우의 일을 담당하는 승려에게는 잡역을 면제하여 신경 써 주고 잘 보수한 자는 주상께 보고해서 승직(僧職)에 제수하며, 원래 직임이 있을 경우에는 직임을 더 올려 주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세종실록 40권, 세종 10년 윤4월 17일 무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