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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법련사 일요법회 법문(2011.12. 11)-달리는 기차를 어떻게 세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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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파도가 물밀 듯 몰려와 우리의 발목을 적시고 있습니다. 아니 시간의 샘물이 목까지 차올라와 벌써 12월 중순입니다. 이맘 때 쯤 이면 ‘시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레 머리에 떠오르게 됩니다. 1750년경 독일의 가장 동쪽 지방에 위치한 쾨니히스베르크(Konigsberg)에 한 사나이가 매일 정확한 시간에 산책을 다녔어요. 그 도시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하자 소련에게 양도되어 지금은 러시아의 칼리닌그라드(Kaliningrad)가 되어있습니다. 그 당시 쾨니히스베르크에 사는 사람들은 그 사나이가 거리를 지나가는 것을 보고 손목시계의 시간을 맞추었다고 할 정도로 시간을 잘 지켰습니다. 어느 날 지나가는 사람이 그 사나이에게 시간을 묻는 다는 것이 ‘Was ist die Zeit?/What is Time?/시간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었어요. 사실은 ‘몇 시 입니까?/Wie viel Uhr ist es?/What time is it?’이라 물었어야 되는 데 말입니다. 그러자 그 사나이는 ’글쎄,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평생토록 그것에 대해 연구하고 있습니다만....‘ 우문현답이랄까, 동문서답이랄까. ’시간‘이란 것이 지극히 평범하기도 하지만, 과연 그것이 무엇인가 따지고 든다면 막연하고도 추상적인 개념이 되어버립니다. 그 사나이는 바로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1724~1804)입니다.
불교의 세계관에서는 시간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생명이 있거나 없거나 간에-시간의 구속을 받고 있습니다. 만물은 시간의 함수(function)입니다. 존재는 위기의 순간(critical moment)에 살짝 얹혀져 있습니다. 있다고 인식하는 순간 이미 소멸하는 중이죠. 포착하자마자 변해 버립니다. ‘그렇다’고 할 때 벌써 ‘그러함’에서 벗어나 다른 것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모든 현상(諸法/sabbe dhamma)은 오직 한번만 두 번은 없다(Only once never again). 오직 한 순간의 체험일 뿐. 붙잡아 둘 수도 없고 붙잡혀지지도 않는다. 이것이 바로 ‘제행이 무상하다(Sabbe sankhara anicca)’는 부처님의 선언으로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제행무상의 진리를 체득하면 어떻게 되나? 세상에 달관하여 마음이 평안해집니다.
어떻게?
이렇게요. 모든 것이 변해가기에 무슨 고정불변한 실체나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똑 같은 강물에 다시 발을 담글 수 없습니다. 좀 전의 그 강물은 이미 흘러갔기에. 좋았던 것도 나빴던 경험도 다만 흘러갈 뿐입니다. 만상이 변하는 것은 우주의 보편적인 법칙입니다. 그것이 법(Dharma)이고 도(道)입니다. 영원하여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싶은 그 무엇에도 의지하지 말라. 모든 것은 필경 변한다. 영원한 것은 없다. 모든 것을 우주의 법칙에 턱 맡겨 놓고 저항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다가오는 대로 받아드린다. 내 맘에 드는 것은 항상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어 주었으면, 내 맘에 들지 않는 것은 빨리 없어지기를. 내가 바라는 것이 많을수록, 내가 붙잡고 있는 것이 많을수록 내 뜻대로 되지 않아 나는 그만큼 더 괴롭게 된다. 온갖 것을 내 뜻대로 하려는 그 욕심과 열정을 내려놓는다. 내 뜻을 고집스레 주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의 지나친 기대나 욕심에서 내 마음이 풀려난다. 너그러워지고 가벼워지고 부드러워진다. 이것이 심해탈(Citta-Vimutti)-꽉 움켜잡았던 마음이 풀려나는 데서 느끼는 해방감, 내면의 평화입니다.
모든 것이 시간이 감에 따라 필경에는 변하고야 만다. 그래서 내 것이라고, 영원한 것이라고, 절대불변한 것이라고 고집할만한 어떤 것도 없다. 만 가지 현상이 원인과 결과, 앞 찰나(ksana, 1/75sec)와 뒷 찰나의 지속일 뿐이라는 분석의 지혜가 투철해지면 지성이 명료해져서 삿되거나 헛된 것에 의존하지 않고 가야할 길만을 고고하게 간다. 이것이 바로 혜해탈(Panna-Vimutti)-지혜가 밝아짐으로 맛보는 해방감, 내면의 빛, 정광명(Clear Light)입니다.
자, 호흡 알아차리기를 통해서 무상의 진리를 한번 체험해봅시다.
상체를 쭉 펴시고 가슴을 평평하게 하세요. 온 몸을 느긋하게 이완하세요. 어떤 것이 이완(Relax)‘인가? 먼저 온몸에 힘을 잔뜩 넣어 긴장하세요. 숨을 참고, 근육을 빳빳하게 해보세요. 자, 숨을 후, 내쉬면서 근육의 긴장을 완전히 푸세요. 다만 그렇게 그대로 쉬세요. 이것이 ‘이완한다’는 느낌입니다. 자, 허공에 구름이 가벼이 떠있듯이 몸과 마음을 편안히 하여 그 자리에 두세요. 아무런 의도 없이 다만 편히 존재하세요. 잠깐 그대로 계세요. 그리고 숨을 알아차리세요.
숨이 들어오면 들어온 줄 아세요. 숨이 나가면 숨이 나간 줄 아세요.
한 번 더. 다시 한 번 더.
숨이 들어오고 나갈 때 다만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알아차리세요.
나간 숨은 들어오고, 들어온 숨은 나가게 마련. 한 번 들어오면 한 번 나가는 게 호흡입니다. 이것이 바로 ‘호흡은 무상하다’는 것입니다. 나간 숨 다시 들어오지 않거나, 들어온 숨 다시 나가지 않으면 바로 죽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목숨은 호흡지간에 달려 있다’는 진실입니다. 숨은 저절로 쉬어지게 마련이니까 내 할 일은 다만 그것을 알아차리고 있기만 하면 됩니다. 들숨 날숨이 저절로 계속되기에 내 마음은 그기에 집중 되어져 또렷이 깨어 있게 됩니다. 자, 숨이 좀 더 길어지고, 좀 더 깊어지게 됩니다.
나는 숨을 길게 내쉽니다. 나는 숨을 길게 들이 쉽니다. 일어나는 대로 이렇게 알아차립니다. 마음이 점점 깨어납니다. 마음이 맑아집니다.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또 그것을 알아차립니다. ‘알아차림’은 저절로 따라옵니다. 알아차림이 있기에 마음이 밝아집니다.
이것이 바로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을 알아차림으로서 마음의 평화를 회복하는 길’입니다. 일상에 이 수행을 짧게라도 자주 반복하셔서 내면의 평화를 날로 증진시키시기를 바랍니다.
다음은 제가 미국여행을 하면서 보고 듣고 느꼈던 점을 말씀드리면서 이야기를 계속해가기로 하겠습니다.
저는 10월25일에서 11월10일까지 거의 20일간 미국 서부를 누비고 다녔습니다.
여행방식: 렌터카/모텔 숙박/4인조 팀/자연경관-국립공원을 위주로
행선지:뉴욕-몬태너주 보즈먼: Wild Wild Western
-옐로우스톤: 야생동물,Geyser, Roaring Mountain, Mud Volcano, Dragon`s Mouth, Steaming Boat, Old Faithful. Yellowstone Falls
-그랜드 티탄: 쇼쇼니 추장 와샤샤키에의 말,
‘언젠가 나는 해와 달과 별들에 대해 배우기를 희망한다. 그때 우리는 그곳에서 다시 만날 것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에게 친숙한 강과 산들이 보여주는 경계를 갖기를 더 좋아한다.’
-솔트레이크 시티-아치 국립공원: Balanced Rock, Arch Rock
-캐년 드세(나바호 인디언): kokopelli신, Anasazi족, Coquistadores, El Dorado, 막켄나의 황금, Long March 캐년드세(Arizona주)에서 4000마일 걸어서 Fort Sumner(New Mexico주)까지, 4000명중 2000명 사망, 나바호 레져베이션. Hunting Ground 상실-삶의 터전 상실-문화적 박탈감-流民
-석화림 공원: 2억 2500년전 Trias기 백악기/쥬라기 이전
-세도나: 1980년대부터 Spiritual Leisure족 점증
-그랜드 캐년:600만년전에 미대륙 생성/500만년에 걸친 침식작용/콜로라도 강/아봐파이 족
봉우리 이름-Buddha Temple, Isis Temple, Shiva Temple
남북 뷰포인트 사이가 10마일(16km), 깊이가 10마일
-Mohave 사막
-조슈아 트리 공원: 300~500년 선인장나무. Jumbo Rock
-LA관통-산타바바라: Yuppie족, 스페인풍 거리,
-Monterey반도: 유명한 해변골프코스 PGA 결승전.
캐슬 하스트: 랜돌프 하스트(언론재벌), 시민케인(오손 웰즈 소설의 실제모델),오리엔탈 피버
Seventeen Mile Drive, 환상적인 태평양 해안도로
-Big Sur: 1970년대 New Age, Human Potential 실험장
-금문교.1915년 시작 1937완성, Suspension Bridge, ‘쌘프랜시스코에 오면 꽃목걸이를 걸어요‘라는 노래 Flower People, 히피, 영적 부흥운동, 미국불교의 태동
-레드우드 숲:1억6500년전 북미대륙을 뒤덮었던 수풀, 높이 1200m, 둘레 3.3~4.5m
평균수령 600~800년, 2000년 된 것도 있다. 자연의 성스러움. 숲에 희망이 있다. 1860년대부터 벌목 시작
Oregon Trail 1850년대 시작, Gold Rush 1840년대 말, Forty Niner-Clementine
포틀랜드-시애틀-한국-
그리고 지금 여기에! 이렇게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 다시 돌아오기 위해 떠난다. 여기로 다시 돌아오기 위해 그렇게 멀리 떠난다는 것이 여행의 파라독스입니다. 그게 삶이 아닌가 합니다. 관점의 이동. 다르게 보면 다르게 체험된다. 가까이에서 보고, 멀리에서 보고, 안에서 밖을 보고 밖에서 안을 본다. 봄이 넓어짐으로 생각의 울타리도 넓어져 삶이 풍요로워진다. 그래서 저에게 여행이란, 관점의 짐내스틱(Gymnastic)-체조라고 할까, 유심세계 만달라를 감상하는 순례라고 할까, 이런 것입니다. 자, 관점을 바꿔 하늘을 봅시다.
우리가 매일 아침 보는 하늘은 어제의 그 하늘이 아닙니다. 마치 똑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는 것처럼. 왜냐? 지구가 빠른 속도로 허공의 공전궤도를 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구가 자전하는 속도는 지구의 원주율2πR(=6370km)÷24시간=1667km/h=463m/sec입니다. 지구는 초속 463m로 빙글빙글 돌고 있습니다. 어지럽지 않으세요? 우리가 빙글빙글 도는 공위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구의 공전속도는 29.8km/sec=107280km/h입니다. 시속 100km 자동차보다 1000배나 빨리 달려갑니다. 우리가 깔고 앉은 이 지구라는 땅덩이가 어마어마한 속도로 허공을 달리고 있다는 말인데 우리는 둔감해서 느끼지를 못하고 있지요. 그리고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라는 별은 광대무변한 우주에서 보면 은하계의 외진 구석에 위치한 미미한 항성(Planet)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우주의 먼지와 같은 존재이지요. 이 지구라는 우주적 먼지 위에 잠시 살다가 갈 우리입니다. 그러니 누가 누구를 미워하고 누가 잘 났다고 뻐기겠습니까? 100년 후에는 아무도 이 자리에 없을 것입니다. 잠시 동안 서로 같이 모여 살 뿐입니다.
유한한 생명이여, 모두 가련한 인생입니다. 서로가 연민히 여깁시다. 광대무변하고 우주 앞에, 광대무변한 진리 앞에 겸허합시다. 우리는 기차이지 기차역이 아니라고 파울로 코엘료가 ‘알레프(Alef)’라는 소설에서 이야기 했습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기차, 지구라는 기차를 타고 여행하고 있습니다. 그 기차는 어디로 데려갈까요. ‘지금 여기’로 오기 위하여 ‘저 때 저곳’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진정 ‘여기’로 돌아오기 위하여 어디론가 떠나갑니다. 진정으로 ‘지금’ 에 있기 위하여 저곳으로 달려갑니다. 그리하여 모든 곳이 ‘여기’가 되고 모든 때가 ‘지금’이 됩니다. 그래서 이 기차는 앞도 없고 뒤도 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달려갑니다. 이제 이 기차는 당신의 것입니다. 어떻게 운전 하시겠습니까?
1970년대 선방에서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지대방에서 한 스님이 ‘달리는 기차를 어떻게 하면 세울 수 있겠느냐?’라는 문제를 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진한 스님이 이 문제를 풀려고 실제로 달려오는 기차 앞에 뛰어들어 서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죽을 뻔했죠. 다행히 기관사가 급정거를 하는 바람에 목숨을 건졌죠. 달리는 기차를 세우기는 세웠지마는 그것이 답은 아닙니다. 진짜 기차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라는 기차, ‘자기 마음’이라는 기차, ‘자기인생’이라는 기차를 어떻게 운전할 것인가라는 문제인거죠. 과연 자기마음의 주인공 노릇, 자기기차의 기관사 노릇을 할 수 있느냐의 문제인거죠. 어떻게 하면 달리는 기차를 세울 수 있을까요? 하하하. ‘기차’를 떠올리고, ‘달리다’는 것을 생각하고, 그 위에 다시 ‘어떻게 세울까’를 궁리한다면 달리던 기차가 가속을 받아 더 빨리 달리는 꼴이 됩니다. 다른 사람의 연극에 휘말려 들지 마세요. 개그콘스트 ‘애정남’에 과민반응하게 되면 웃음거리가 됩니다. 그냥 텔레비전을 재미있게 보시든지, 채널을 돌리든지, 텔레비를 끄면 됩니다. 당신의 것이니까 당신 마음대로 하세요. 해답을 은근히 드렸습니다. 가시는 길에 곰곰이 생각해보세요.
다음 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의 기도를 다 같이 합송합시다. 합장하시고 따라 하세요.
모든 생명이 행복하며, 행복의 원인을 짓기를.
모든 생명이 고통에서 벗어나며 고통의 원인을 짓기 않기를.
모든 사람이 다른 사람의 행복을 따라서 기뻐하며 시기와 질투심에서 벗어나기를.
모든 사람이 가까이 있거나 멀리 있는 사람을 애착하거나 미워함이 없이 크나큰 평정심에 머물 수 있기를.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어떤스님처럼 저도 달리는기차앞을 막고 세웠을겁니다...ㅎㅎㅎ
모든생명이 행복하며 행복의 원인을 짓기를.
모든생명이 고통에서 벗어나며 고통의 원인을 짓지않기를.
모든사람이 다른사람이 잘되는것을 따라서 기뻐하며 시기와 질투심에서 벗어나기를.
모든사람이 가까이 있거나 멀리있는사람을 애착하거나 미워함이 없이 크나큰 평정심에 머물수 있기를.
사랑합니다.감사합니다.고맙습니다.더불어 행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