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태민안 남북통일 불법중흥 발원하며
소신공양 올린 태고종 승정 충담스님
“나지도 죽지도 않는 도리를 깨달아
무생법인을 성취하리라”
글 ·사기순
언제랄 것도 없이 시끄러운 세상살이, 작년 연말 이후로는 한날 한시도 조용한 날이 없다. 하루가 다르게 팍팍해지는 삶들의 하소연으로 나라 안이 온통 소란스럽다.
숨막힐 듯한 사회상 속에서 번민이 깊어가는 이 즈음, 지난 6월 27일 새벽 경기도 가평 감로사에서 스스로 몸을 불살라 부처님께 공양올린 충담 스님(전 태고종 승정, 세납 86세, 법랍 69세)의 소신공양 열반소식은 길고 음습했던 장마를 거두어간 햇볕과도 같고, 긴 가뭄 끝에 오신 단비와도 같았다. 아니 그에 비유할 바가 아니다. 혼탁한 이 세상을 밝혀 중생을 일깨우는 등불이요, 불꽃 속에 핀 연꽃처럼 희유한 소식이었다.
한국불교 초유의 소신공양
글자 그대로 몸을 태워 부처님께 바치는 소신공양에 대해서는 『법화경』에 설해져 있는데, 충담 스님은 이미 2년 전 정토삼부경을 편역한 「염불」이라는 책을 펴내면서 그 머리말에 소신공양에 대한 생각을 내비쳤다.
“법화경 약왕보살본사품 제23에 희견보살께서 일월정명덕 부처님 회상에서 수행정진할 때 현일체색신삼매(現一切色身三昧)를 증득하여 육신으로 공양함을 서원하고 향유(香油)를 몸에 바르고는 부처님 앞에서 하늘의 보배옷으로 몸을 감아 거기에 향유를 끼얹고 몸을 스스로 태워 공양을 올려 불은(佛恩)에 보답하는 내용이 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로 인하여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온갖 나고 죽는 일과 얽힘으로부터 벗어나 무생법인을 증득하는 것에 나는 크게 감명을 받은 바 있다. 이에 나 자신도 그와 같이 실천하고자 원을 세웠다.”
팔순 노구에도 불구하고 피나는 정진을 한 충담 스님, 그 원력과 정진력만으로도 가슴뭉클한 감동을 주는데 이제 스스로 몸을 불살라 중생구제의 대자비심을 보이셨으니 오늘의 나라사정과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모든 중생들의 병고를 당신이 다 짊어지고, 생사(生死)의 소용돌이 속에서 울고 웃는 중생들에게 불생불멸의 이치를 깨닫게 하는 해탈법문을 보이신 것이다.
한편 인도나 베트남에서는 그 예를 살필 수 있으나, 우리 한국불교사에 있어서는 최초의 소신공양이라 할 수 있기에 더욱 세인들의 마음을 울린다. 50여 년 전 영도사(현재 개운사) 칠성각의 벽봉 노스님께서 소신공양을 시도하였으나 그 손상좌가 끌어내려 결국 깊은 화상으로 일주일 만에 열반에 드셨고, 일제 때 통도사에서 한 스님이 소신공양을 올렸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지만 확인할 바가 없다. 또한 건봉사 사적기에 의하면 ‘만일염불에 참여한 31인의 스님과 소신대에 대한 기록’이 있으나 소신을 했다는 얘기는 없다. 그만큼 소신공양은 희유한 일인데, 이날 충담 스님의 열반을 처음 발견한 감로사 호산 스님의 말은 평소 스님의 신심과 수행력과 원력이 얼마나 높깊은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새벽예불을 마치고 나서 이상한 느낌이 들어 나가보니 스님께서 가부좌를 튼 채로 열반에 들어 계셨습니다. 신이한 것은 그날따라 바람 한 점 불지 않았고, 날씨도 무척 청명했지요.”
불길 속에서 가부좌를 틀고 열반에 드신 충담 스님의 마지막 법구 사진을 보고 전율이 일었다. 누구라도 뜨거운 불길이 닳으면 불길 속에서 뛰쳐나오려 애쓸텐데… 그 모습 속에서 부처님께서 전생에 인욕 선인으로 수행하실 때 가리왕에게 신체를 낱낱이 베일 때에도 이미 성품과 육신이 공(空)한 것을 깨달았고,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을 떨쳐버렸기에 원망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물론이요, 아픔조차도 느끼지 않았다는 경전 말씀을 보았다.
이미 모든 상을 떨쳐버린 충담 스님의 수행력은 우리가 사량분별할 수 없는 것. 삼매 속에서 소신공양을 올린 스님의 수행력은 자못 모든 수행자들, 아니 모든 불자들의 귀감이 될 것이다.
중생구제의 대자비심으로…
도저히 범부로서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일, 모두를 위해 소신공양한 충담 스님의 그 거룩한 보살행을 기리며 생전에 주석하셨던 승가사를 찾았다.
시정에서 중생들의 고난과 함께하던 충담 스님의 삶이 그대로 엿보이듯 승가사는 왕십리의 복잡한 상가와 공장의 소음이 뒤섞인 주택가에 자리하고 있었다. 조금은 비좁아 보이는 승가사 경내에 드니 테이프에 담긴 스님의 카랑카랑한 음성이 풀려나온다.
“아미타불 무량광불 무변광불 무애광불 무대광불 염왕광불 청정광불 환희광불 지혜광불 부단광불 난사광불 무칭광불 초일월광불 아미타불 십이광불 광명을 만나게 되면 탐내는 마음 성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 삼독의 가시가 자연히 소멸되고 몸과 마음이 부드럽고 상냥하고 가슴에서 기쁜 마음이 솟구쳐 나느니라. 진리에 수순하여 유순한 마음이 일어나느니라. 착한 양심을 기쁘게 하려면 연장하는 몸뚱이로 소신공양을 이루어라. 소신공양을 이루었다면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성취하리라. 눈도 허공이요 귀도 허공이요 코도 허공이요 입도 허공이요 몸도 허공이요 마음도 허공이요, 눈도 청정하고 귀도 청정하고 코도 청정하고 입도 청정하고 몸도 청정하고 마음도 청정하고, 눈도 안온하고 귀도 안온하고 코도 안온하고 입도 안온하고 몸도 안온하고 마음도 안온하고, 눈도 훌륭하고 귀도 훌륭하고 코도 훌륭하고 입도 훌륭하고 몸도 훌륭하고 마음도 훌륭하고…”
소신공양을 올리기 사흘 전에 제자를 불러 이와 같은 말씀을 염불조로 녹음해두었는데 이것이 유언이 될 줄은 몰랐다며 은법상좌인 지성 스님(태고종 총무원 총무부장, 승가사 주지)은 아직도 슬픔이 가시지 않은 듯하다.
“십여 년 전부터 법화경 약왕보살본사품과 금강경을 지극하게 지송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몇 해 전부터 소신공양하시겠다는 말씀을 하셨지요. 저는 자식된 도리로서 또 제자된 도리로서 간곡하게 만류했습니다. 세속적으로 말하면 돌아가시겠다는 말씀 아닙니까? ‘만일 불법이 그런 것이고 회향을 그리한다면 중노릇도 그만두겠다’고 강력하게 말씀드렸는데도 뜻을 굽히지 않으셨어요.
하도 소신공양을 한다고 하시길래 일전에는 ‘어디 한 번 손가락이라도 태워봅시다.’며 촛불을 갖다 대기도 했습니다. ‘아이구 뜨거워라. 저리 치워라’하시는 스님께 ‘손가락 하나도 못 태우시면서 어떻게 몸을 불사르신다는 말씀이십니까?’라고 했더니 ‘소신공양은 뜨거운 게 아니다. 그런 걱정일랑 하지 마라’고 하시는데도 저는 그 깊은 뜻을 몰랐습니다.”
그 뒤로도 계속 실랑이를 벌였다고 한다. 충담 스님께서 참나무와 석유를 사놓고, 심지어 불똥이 튈 것을 방지하기 위해 철로 된 커다란 그물망까지 만들어 놓은 것을 다 치우는가 하면, 지난 5월 단오날에도 열반송을 써놓고 소신공양을 시도하려 하셨는데, 미리 발견하고 겨우겨우 말렸단다.
“지난 6월 2일 우리 종단의 승정으로 추대되실 적에도 ‘승정이라면 남의 사표가 되어야 하는데 나는 그럴 자격이 없다’시며 극구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시는데, 종단 종회에서는 이미 결정된 사안인지라 간곡히 청하니, ‘소신공양을 여법하게 할 수 있도록 해준다면 승정을 수락하겠다’고 하셔서 ‘그럼 그만두시라’고 화를 낸 적도 있습니다. 그토록 만류했는데 결행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처음에는 슬픔이 복받쳤는데 저 테이프를 들으면서 이제서야 우리의 생각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스님의 깊은 경지를 이해할 수 있을 듯하고 이왕이면 스님의 뜻대로 여법하게 육신등공(肉身騰空)을 하실 수 있도록 해드릴 걸 하는 아쉬움도 남습니다.”
일제 때 태어나서 일제 식민지하에서 우리 민족을 구하기 위해서는 불법을 흥륭시키는 길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열일곱에 출가하여 올곧게 정진한 일생. 젊은 날 일제의 징용을 피해 만주벌판에서 행각정진하면서 조국의 광복을 기원, 1945년 고국에 돌아오는 길에 형사에게 붙들렸다가 감격스런 해방을 맞이한 기쁨도 잠시 동족상잔의 6·25사변 때는 산더미 같은 시체 속에서 염불 독경으로 고혼을 천도하였다. 또한 휴전이 되어 가장 먼저 한 일 역시 조국의 평화통일과 중생들의 행복을 기원하는 도량(가평 감로사)을 여는 등 격동기 속에서 항상 중생구제와 남북통일이라는 화두 속에 살아온 충담 스님은 『염불』의 머리말에서 가장 가슴아팠던 것은 불교분규였다고 토로한다.
“마음이 그보다 아픈 것은 불교분규이다. 어찌 그럴 수가 있는가. …위정자들의 정쟁 속에 휩싸여 타의에 의하여 흔들린 불교분규이다. 모두 한 부처님 제자가 아닌가. 16개 종단으로 갈라지더니 이제 오십이 넘는 종파가 우후죽순으로 널리어 어찌 승풍을 진작시키고 삼보를 호지하고 정재와 교권을 수호하겠는가.”라고.
헐벗고 괴로운 이 없어지길, 분단된 이 나라가 하나로 통일되어 나라가 온전해지길, 불법이 흥하여 이 나라에 진정한 평화를 가져오길 간곡히 기원하는 스님의 마음은 소신공양을 올리기 전 써놓은 열반송 행간행간마다 담겨 있다.
“호명산 감로사에 구름과 노닐던 이 노승은/본래 서원 성취코자 삼보전에 소신공양 올리나니/이 인연공덕으로 부처님의 자비은혜를 갚고/국태민안하며 불법이 거듭 흥륭하기를 기원합니다./만약 어떤 것이 옳은 것이냐 묻거든/다 응당히 주하는 바 없게 하라.(雲遊虎明山 甘露老衲子 奉獻三寶前 本願燒身供 報佛慈悲恩 以因緣功德 國泰民安而 佛法中興隆 若問如何是 皆應無所住) - 충담 스님의 열반송”
열반 직전까지 일상관을 수행한 염불행자
“아마 신심이 스님만큼 깊은 분도 찾기 힘들 겁니다. 일찍이 청룡 황룡이 승천하는 것을 보셨고, 기도를 할 때는 몸과 마음이 가벼워져 하늘을 나를 듯한 수행체험을 비롯해서 여러 불보살을 친견하는 가피를 입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늘 염불을 쉬지 않으셨고, 틈틈이 참선도 하시고 6년 전부터는 관무량수경에 있는 일상관을 수행하셨지요. 한겨울엔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름날엔 모기에 뜯겨가며 오후 세 시만 되면 밖으로 나가셔서 수행을 하셨습니다.”
충담 스님은 왕십리 승가사에서는 허공을 바라보며 수행하시고, 호명산 감로암에 따로 토굴을 만들어 좌선정진하는 틈틈이 서방극락교주 아미타불을 관하고 염불하면서 정토삼부경 중의 관무량수경 16관법 중 제1관인 일상관(日想觀)을 참구하셨단다. 일상관은 ‘마음을 가다듬고 생각을 한곳에 모아 서쪽을 생각하고, 서쪽을 향하여 단정히 앉아 지는 해를 똑똑히 바라보고나서 마음을 굳게 간직하여 생각을 움직이지 말고, 곧 지는 해를 보고 난 후에도 눈을 감으나 눈을 뜨나 그 모습이 한결같이 보이도록 하는’ 관법이다.
제자들이 오후 세 시쯤부터 자리를 잡고 앉아 해를 바라보고 있으면 눈이 멀 것이라며 말렸으나 충담 스님은 변함없이 정진을 계속했다고 한다.
“평소 ‘계행을 잘 지킴으로써 탐내는 마음이 없어진다. 선정을 닦음으로써 성내는 마음이 없어진다. 지혜를 밝힘으로써 어리석은 마음이 없어진다’는 말씀을 자주하셨습니다.
또한 아미타불 한 번만 생각해도 십억 겁 동안 지은 생사의 무거운 죄가 소멸하고, 중국의 영명연수 선사께서는 ‘참선은 백이 해서 하나 성공하기 어려우나 염불은 만인이 하면 만인 모두 왕생정토하여 부처를 이룰 수 있다’고 하신 말씀이 일리가 있다시며 본래의 참성품인 부처를 증득하는 여러 가지 길(참선, 간경, 염불, 주력) 중에서 특히 염불을 지극하게 하면 여래의 열 가지 원력을 성취할 수 있다고 강조하셨지요. 정토삼부경을 편역하여 「염불」이라 책제목을 지으신 것도 스님의 뜻이고, 스님께서 처음부터 소신공양 후 49재 때 법보시로 나누어주라고 하시면서 만드신 것입니다. 원이 있다면 스님의 유지를 받들어 「염불(정토삼부경)」을 널리 배포하여 이 험한 세상을 염불정토로 일구어 나가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비가 촉촉히 내리는가 싶더니 승가사를 나서는데 햇살이 눈부시다. 흩어지는 빛살과 함께 문득 스님의 염불 소리가 들린다.
“온 세계에 불길이 가득하여도 반드시 뚫고나가 불법을 듣고 모두 다 마땅히 부처가 되어 생사에 헤매는 이 구제하여라. 부처님 광명 눈부시게 비추니 세 번 돌고 정수리로 들어가 온 세계 천상 인간 모든 대중들 환희심에 뛰놀며 즐거워하네… 염불하여 아미타불 만나면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마음 삼독의 가시가 소멸되고 나지도 죽지도 않는 도리를 깨달아 무생법인을 성취하리라.”
충담 스님은 1913년 경기도 가평에서 태어나 출가 전까지 성균관 박사이신 부친으로부터 한학을 수업하였다. 1930년 삼각산 승가사에서 심월 화상을 은사로 사미계를 수지하였다. 1940년 강남 봉은사 강원에서 사미과와 사집과를 수학하였으며 1943년 중국 연변, 장춘, 하얼빈 등을 유행하며 정진하였다. 1944년 서울 종남산 승가사를 창건(주지 취임), 1949년 삼각산 신원사 묵조 스님 문하에서 사교과 및 대교과를 수료하였다. 1951년 관악산 염불암, 삼막사 등에서 수행하였다. 1956년 경기도 가평 호명산에 감로사를 창건하였으며 1982년 불교정신문화원 및 포교사전문대학(현 동방불교대학 전신) 설립공로로 태고종 종정으로부터 공로패를 받았다. 1992년 20하안거를 성만하였으며 1998년 6월 16일 태고종 승정으로 추대된 지 11일 만인 6월 27일 평소의 원력대로 소신공양을 올리고 열반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