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마다 열리는 갈매동 도당(都堂)굿이 생닭을 산신께 바치고 칼을 들어 바가지를 깨뜨리는 뒷전을 끝으로 지난달 31일 막을 내렸다.
주변 산 모습이 칡과 매화를 닮았다거나 풍수지리학상 목마른 말이 물을 찾는 형국이라는 갈마음수(渴馬飮水)에서 유래했다는 경기도 구리시 '갈매동'은 태릉을 경계로 서울과 닿아있고 동남으로는 조선 태조대왕을 모신 검암산 건원릉에 닿아 있다.
갈매동 동민들은 옛날부터 마을을 수호하는 수호신을 모시고 복을 비는 행사로 도당굿을 치러 왔다. 도당굿은 무당이 주재한다는 점에서 동신제와 차이가 있다. 갈매동 도당굿은 농경생활에 기초를 두고 500여 년을 이어온 마을 축제로 공동체의 안녕과 풍요를 빌고 주민들의 화합과 단결을 끌어왔다.
▲ 왼쪽부터 당주.도가.숙수
ⓒ 송영한
갈매동 도당굿은 관련문서의 전승으로 굿의 기원이 정확하게 규명되었고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제의 과정들이 일관성 있게 전해져 전통성을 지니고 있다.
무엇보다 아직도 신심이 뚜렷한 동민들이 마을의 정신적 구심점으로 굿을 대하는 태도가 옛날과 똑같으며 대동단결해 제의에 참여함으로 사라져가는 상부상조의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데 의미가 크다.
신을 부르는 의식(請神), 신을 즐겁게 하는 의식(娛神), 신을 보내는 의식(送神)으로 짜여 있는 갈매동 도당굿은 신과의 관계를 확인하고 신이 보호하는 마을 구성원이 한바탕 질펀하게 논 뒤 신을 돌려보내는 굿판이다.
▲ 왼쪽부터 대잡이.시주.화주
ⓒ 송영한
갈매동 도당굿은 음력 2월 초하루에 굿을 주관하는 다섯 사람(당주·도가·시주·화주·숙수)중 당주와 숙수를 제외한 삼화주(도가·시주·화주)를 선출함으로 출발한다. 도당굿의 최고격인 당주는 굿의 전체를 총괄지휘하며 숙수는 제물을 마련하고 도가는 그 해 회비를 걷어 제비를 마련해 제에 사용할 음식을 준비한다. 시주와 화주는 그 일을 돕는다.
올해 당주는 갈매동 도당굿보존회 회장을 맡고 있는 안창덕(55)씨가 당연직으로 맡고 숙수는 안형식(67)씨가 도가는 박경화(60)씨, 시주는 유기정(69) 화주는 정만술(71)씨로 결정했다.
제주를 선출하면 마을 남자들이 나서 음력 2월10일, 20일, 말일에 벌초와 제기정리, 굿청 만들기, 치성터다지기 따위 당집 청소를 하는데 요즘은 주로 일요일 날에 한다.
당주와 숙수, 삼화주는 음력 3월초 하룻날 제일을 결정한다(보통 삼월 삼짓날로 한다). 이튿날 당집 신단에 촛불을 밝히고 북어와 막걸리 정도로 간단한 상을 올려 치성을 드린다. 이어 선출한 제관 집을 돌아가며 부정을 미리 막는 '집고사' 또는 '가택안방풀이'라는 초부정을 하고 우물물을 맑게 해 마을 사람의 건강을 비는 액막이 우물고사를 지낸다. 이날 사람들은 유가 때 사용할 횃대를 만든다. 갈매동 동민들은 아직도 기름방망이 횃대를 쓰지 않고 관솔과 마른 소나무를 이용해 만든 전통방식의 횃대를 고집하고 있다.
▲ 날짜를 택일하고 초부정을 치른 후 당집과 굿당 주변을 청소한다
ⓒ 송영한
다음 날에는 (음 3월2일) 저녁에 숙수간 마당에 불을 피우고 산치성 우물에서 정화수를 떠다가 콩을 불린 후 맷돌로 갈아 조포(손으로 직접 빚은 두부)를 만든다. 일종의 액막이인 조포는 굿청을 끝내면서 치우는데 올리지 않고 남은 두부는 대동이 나누어 먹는다.
더불어 마당을 얕게 파고 노구솥을 걸어 노구메( 산천의 신령에게 제사 지내기 위하여 놋쇠나 구리로 만든 작은 솥에 지은 메밥)를 짓고 누룩으로 빚은 조라술(산신제나 용왕제 따위에 쓰는 술)은 뒷전을 할 때 산에 뿌린다.
저녁 9시경에 당주 댁 안주인이 도당 터에서 안반고사를 올리는데 이는 유일하게 여성이 올리는 제사다. 올 안반 고사는 21명의 행방불명자와 자식이 없어 제사상을 받지 못하는 영혼들에게 고사를 올렸다.
이어 저녁 10시부터 검암산 중턱에서 산치성을 드리는데 이때는 부정을 피하기 위해 제물에 한지 고깔을 씌우고 참여자들도 입에 한지를 물어 함봉을 한다. 산치성을 끝내고 돌아와서 대를 마당에 세워 놓고 서낭신(토지와 마을을 지켜주는 신)을 맞이하는 서낭맞이를 하는데 이때부터 사람들은 대에 돈을 걸면서 각자 복을 빈다.
서낭맞이 뒤에는 대를 앞세우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는 길놀이의 일종인 유가놀이를 하는데 무당과 당주가 앞장서고 삼현육각을 연주하는 잽이들과 주민들이 뒤따르며 사람들에게 음식을 대접한다. 유가는 공동체의 축제이며 공동체와 집안의 제의가 맞물리는 의식이다. 유가 끝에는 동네 사거리에서 고사를 지내는데 이것은 마을의 편안함을 비는 거리굿이다.
음력 삼월 삼짓날 드디어 본 굿(대동굿)이 펼쳐지는데 오전 9시경 사람들이 굿 당에 자리를 잡으면 대잡이를 앞세우고 무당과 잽이(악사)들이 매우 느린 길 군악에 맞춰 굿 당으로 올라오는데 이를 '장문 밟기'라고 한다.
▲ 왼쪽부터 전통방법으로 횃대를 만드는 동민들. 삼현육각을 연주하는 잽이들. 칼과 창을 세우는 만신
ⓒ 송영한
본 굿은 단골무당이 주재한다. 갈매 도당굿 단골은 굿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됐다. 반드시 신 내림이라는 과정을 거쳐 계승하고 있는 마을 단골은 어느 날 갑자기 도당신이 내려 무당이 되는 독특한 방식으로 이어졌다.
지금까지 4번의 도당굿을 주재한 주무(主巫) 조순자씨는 4대를 모계로 이어온 단골네로 친정어머니 김복동 씨의 외할머니(성명 미상. 검안산 산신이 몸주) 때부터 무업을 이어 왔다. 김복동 만신의 친정어머니인 2대 무당 이천분 만신은 당시 인근에 크게 알려진 만신이었으나 김복동 씨가 14살 때 타계했다. 사람들은 김 만신이 나이가 어려 무업을 잇지 못할 것이라고 지레짐작 무구를 땅에 묻었으나 15살 때 신병을 앓아 내림굿을 하고 무당이 되자 다시 무구를 파냈다 한다.
복댕이 만신으로 유명했던 김복동 만신은 조순이와 조순자 두 딸을 두었는데 첫 딸인 조순이가 잽이 허용업 씨의 부인으로 들어갔으나 무업을 잇지 않고 조순자 씨가 무업을 이어받았다. 단골 조씨는 "무업을 피하려고 국악학원에 다녔으나 1995년에 어머니가 위독해 내 탓이 아닌가 해 내림을 받았다"며 신 내림을 피하지 못한 숙명을 토로했다.
본 굿은 부정거리부터 출발하는데 굿을 하는 중에 부정한 이가 있으면 주당살을 맞아 죽기 때문에 미리 부정을 푸는 의식이다. 이어지는 도당거리는 굿의 중심이 되는 굿으로 오직 주무만이 할 수 있다. 고깔모양으로 접은 백지를 들고 춤을 추며 원한을 품고 죽은 이들의 혼령을 불러 위로하는 가망청배와 조상님들이 강림해 후손을 만나보고 축원해 주는 조상거리가 이어지며 주무는 홍철릭(무관이 입던 공식 제복)을 입고 검은 갓을 쓰는데 굿 내용에 따라 옷을 갈아입는다.
도당거리 다음에는 붉은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천신께 올리는 불사거리와 장군거리, 별상거리, 신장거리, 대감거리로 구성되는 대안주거리가 이어진다. 별상거리는 무당이 붉은 치마를 뒤집어쓰고 호구 마마(천연두)에 걸리지 않게 해달라고 빌고 신에게 술과 안주를 바친 다음, 대를 세우는 사슬세우기를 하는데 굿에 따라 만신들이 협력해서 하기도 한다.
▲ 치성드리는 구리시장과 가망청배 굿을 하는 주무 조순자 만신
ⓒ 송영한
흰 고깔, 흰 장삼, 붉은 띠에 홍 가사를 늘어뜨리고 삼신할머니께 비는 제석거리와 광대신을 불러 즐겁게 노는 창부거리, 집집마다 쌀을 걷어 만든 계면떡을 나눠 먹으며 떡 타령을 하는 계면거리를 지나 군웅거리에 접어든다.
군웅거리는 대잡이와 주무가 같이 진행한다. 소의 머리에 닭을 올려놓고 굿청에 들어오는데 소와 닭은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잡귀를 쫓는 장수신을 의미한다. 대잡이가 굿청에서 재물을 안고 춤을 추면 무당은 그 뒤를 따르며 사방에 활을 쏴 잡귀를 물리치는데 이를 '구능메기'라고 한다.
구능메기가 끝나고 재물을 내려놓으면 무당이 부채로 소머리를 쓰러뜨리는데 마을 쪽이 아니라 산 쪽으로 쓰러져야 복이 있다고 믿는다. 이어 무당이 흰 도포를 입고 한지를 무는데 한지가 입에 붙어 떨어지지 않으면 그릇에 돈을 넣고 절을 하며 한지를 떼는데 정성이 부족하면 떨어지지 않고 억지로 떼면 살갗이 떨어진다고 한다.
군웅거리를 마치면 당집에 북어와 소족을 들고 들어가 무사히 굿을 치렀다고 도당 신에게 고하는 당굿을 하고 날 잡은 날 붙였던 첩을 떼어 소지를 올린다.
당굿을 마친 뒤 도당신을 보내는 마지막 굿판인 뒷전이 벌어진다. 무당은 장고 바라에 맞춰 노랫가락을 하고 한복을 입고 부채를 든다. 음식을 모두 고수레하고 생닭을 산신께 바치며 칼과 북어를 던지는데 칼끝과 북어머리가 모두 밖으로 향해야 길조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칼을 들어 바가지를 깨뜨림으로 갈매동 도당굿 대단원의 막이 내린다.
▲ 조상거리와 불사거리 굿을 하는 만신
ⓒ 송영한
1995년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15호로 지정한 갈매동 도당굿은 원래 산신당이 상당, 도당이 하당격이다. 그러나 검암산 중턱에 있던 산신당은 오래전에 없어졌고 산에 오르는 초입에 도당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모신 도당집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주로 경기 전역을 무대로 펼쳐졌던 도당굿은 10월 추수 뒤에 치르는 것이 보통이나 갈매동 도당굿은 이른 봄에 지낸다. 이에 대해 고준선 구리문화원 사무국장은 "아마 농사를 시작하기 전에 풍년을 기리고 꽃피는 춘삼월에 축제를 열어 마을의 안녕을 빌기 위해서 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무성 구리시장은 "구리에 벌말, 수누피, 갈매 도당굿이 있었지만 다 사라지고 갈매동 도당굿이 이어올 뿐"이라며 "먹을거리가 없던 어렸을 때 굿 날 먹을 것이 넘치던 것과 늘어선 엿장수들이 기억에 남는다"고 회상했다.
당주 안창덕씨는 "굿 덕으로 갈매동이 이태 동안 무병 무탈 편안하고 마을에 경사가 이어졌으면 좋겠다"며 "도지사가 약속한 대로 굿당 건립이 이른 시간에 이뤄져 전통문화가 후대까지 이어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갈매동은 구리시에서 유일한 농촌형 도시지역으로 전 지역이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여 있다가 요즘 일부 지역이 우선해제지역으로 풀린 마을로 안씨, 이씨. 정씨 박씨 등 소수의 성이 아직도 집성을 이루어 살고 있다.
갈매동은 각종 규제와 문화적인 혜택을 충분히 누리지 못한 대신 역설적으로 도당굿과 같은 훌륭한 문화유산을 계승하고 경로효친, 미풍양속이 넘쳐나는 아름다운 마을이다. 이제 단계적으로 개발을 시작하는 갈매동이 도당굿 같은 문화유산을 잘 지켜낸다면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꿈의 전원도시로 새롭게 각광받을 것이다.
2년마다 열리는 갈매동 도당(都堂)굿이 생닭을 산신께 바치고 칼을 들어 바가지를 깨뜨리는 뒷전을 끝으로 지난달 31일 막을 내렸다.
주변 산 모습이 칡과 매화를 닮았다거나 풍수지리학상 목마른 말이 물을 찾는 형국이라는 갈마음수(渴馬飮水)에서 유래했다는 경기도 구리시 '갈매동'은 태릉을 경계로 서울과 닿아있고 동남으로는 조선 태조대왕을 모신 검암산 건원릉에 닿아 있다.
갈매동 동민들은 옛날부터 마을을 수호하는 수호신을 모시고 복을 비는 행사로 도당굿을 치러 왔다. 도당굿은 무당이 주재한다는 점에서 동신제와 차이가 있다. 갈매동 도당굿은 농경생활에 기초를 두고 500여 년을 이어온 마을 축제로 공동체의 안녕과 풍요를 빌고 주민들의 화합과 단결을 끌어왔다.
▲ 왼쪽부터 당주.도가.숙수
ⓒ 송영한
갈매동 도당굿은 관련문서의 전승으로 굿의 기원이 정확하게 규명되었고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제의 과정들이 일관성 있게 전해져 전통성을 지니고 있다.
무엇보다 아직도 신심이 뚜렷한 동민들이 마을의 정신적 구심점으로 굿을 대하는 태도가 옛날과 똑같으며 대동단결해 제의에 참여함으로 사라져가는 상부상조의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데 의미가 크다.
신을 부르는 의식(請神), 신을 즐겁게 하는 의식(娛神), 신을 보내는 의식(送神)으로 짜여 있는 갈매동 도당굿은 신과의 관계를 확인하고 신이 보호하는 마을 구성원이 한바탕 질펀하게 논 뒤 신을 돌려보내는 굿판이다.
▲ 왼쪽부터 대잡이.시주.화주
ⓒ 송영한
갈매동 도당굿은 음력 2월 초하루에 굿을 주관하는 다섯 사람(당주·도가·시주·화주·숙수)중 당주와 숙수를 제외한 삼화주(도가·시주·화주)를 선출함으로 출발한다. 도당굿의 최고격인 당주는 굿의 전체를 총괄지휘하며 숙수는 제물을 마련하고 도가는 그 해 회비를 걷어 제비를 마련해 제에 사용할 음식을 준비한다. 시주와 화주는 그 일을 돕는다.
올해 당주는 갈매동 도당굿보존회 회장을 맡고 있는 안창덕(55)씨가 당연직으로 맡고 숙수는 안형식(67)씨가 도가는 박경화(60)씨, 시주는 유기정(69) 화주는 정만술(71)씨로 결정했다.
제주를 선출하면 마을 남자들이 나서 음력 2월10일, 20일, 말일에 벌초와 제기정리, 굿청 만들기, 치성터다지기 따위 당집 청소를 하는데 요즘은 주로 일요일 날에 한다.
당주와 숙수, 삼화주는 음력 3월초 하룻날 제일을 결정한다(보통 삼월 삼짓날로 한다). 이튿날 당집 신단에 촛불을 밝히고 북어와 막걸리 정도로 간단한 상을 올려 치성을 드린다. 이어 선출한 제관 집을 돌아가며 부정을 미리 막는 '집고사' 또는 '가택안방풀이'라는 초부정을 하고 우물물을 맑게 해 마을 사람의 건강을 비는 액막이 우물고사를 지낸다. 이날 사람들은 유가 때 사용할 횃대를 만든다. 갈매동 동민들은 아직도 기름방망이 횃대를 쓰지 않고 관솔과 마른 소나무를 이용해 만든 전통방식의 횃대를 고집하고 있다.
▲ 날짜를 택일하고 초부정을 치른 후 당집과 굿당 주변을 청소한다
ⓒ 송영한
다음 날에는 (음 3월2일) 저녁에 숙수간 마당에 불을 피우고 산치성 우물에서 정화수를 떠다가 콩을 불린 후 맷돌로 갈아 조포(손으로 직접 빚은 두부)를 만든다. 일종의 액막이인 조포는 굿청을 끝내면서 치우는데 올리지 않고 남은 두부는 대동이 나누어 먹는다.
더불어 마당을 얕게 파고 노구솥을 걸어 노구메( 산천의 신령에게 제사 지내기 위하여 놋쇠나 구리로 만든 작은 솥에 지은 메밥)를 짓고 누룩으로 빚은 조라술(산신제나 용왕제 따위에 쓰는 술)은 뒷전을 할 때 산에 뿌린다.
저녁 9시경에 당주 댁 안주인이 도당 터에서 안반고사를 올리는데 이는 유일하게 여성이 올리는 제사다. 올 안반 고사는 21명의 행방불명자와 자식이 없어 제사상을 받지 못하는 영혼들에게 고사를 올렸다.
이어 저녁 10시부터 검암산 중턱에서 산치성을 드리는데 이때는 부정을 피하기 위해 제물에 한지 고깔을 씌우고 참여자들도 입에 한지를 물어 함봉을 한다. 산치성을 끝내고 돌아와서 대를 마당에 세워 놓고 서낭신(토지와 마을을 지켜주는 신)을 맞이하는 서낭맞이를 하는데 이때부터 사람들은 대에 돈을 걸면서 각자 복을 빈다.
서낭맞이 뒤에는 대를 앞세우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는 길놀이의 일종인 유가놀이를 하는데 무당과 당주가 앞장서고 삼현육각을 연주하는 잽이들과 주민들이 뒤따르며 사람들에게 음식을 대접한다. 유가는 공동체의 축제이며 공동체와 집안의 제의가 맞물리는 의식이다. 유가 끝에는 동네 사거리에서 고사를 지내는데 이것은 마을의 편안함을 비는 거리굿이다.
음력 삼월 삼짓날 드디어 본 굿(대동굿)이 펼쳐지는데 오전 9시경 사람들이 굿 당에 자리를 잡으면 대잡이를 앞세우고 무당과 잽이(악사)들이 매우 느린 길 군악에 맞춰 굿 당으로 올라오는데 이를 '장문 밟기'라고 한다.
▲ 왼쪽부터 전통방법으로 횃대를 만드는 동민들. 삼현육각을 연주하는 잽이들. 칼과 창을 세우는 만신
ⓒ 송영한
본 굿은 단골무당이 주재한다. 갈매 도당굿 단골은 굿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됐다. 반드시 신 내림이라는 과정을 거쳐 계승하고 있는 마을 단골은 어느 날 갑자기 도당신이 내려 무당이 되는 독특한 방식으로 이어졌다.
지금까지 4번의 도당굿을 주재한 주무(主巫) 조순자씨는 4대를 모계로 이어온 단골네로 친정어머니 김복동 씨의 외할머니(성명 미상. 검안산 산신이 몸주) 때부터 무업을 이어 왔다. 김복동 만신의 친정어머니인 2대 무당 이천분 만신은 당시 인근에 크게 알려진 만신이었으나 김복동 씨가 14살 때 타계했다. 사람들은 김 만신이 나이가 어려 무업을 잇지 못할 것이라고 지레짐작 무구를 땅에 묻었으나 15살 때 신병을 앓아 내림굿을 하고 무당이 되자 다시 무구를 파냈다 한다.
복댕이 만신으로 유명했던 김복동 만신은 조순이와 조순자 두 딸을 두었는데 첫 딸인 조순이가 잽이 허용업 씨의 부인으로 들어갔으나 무업을 잇지 않고 조순자 씨가 무업을 이어받았다. 단골 조씨는 "무업을 피하려고 국악학원에 다녔으나 1995년에 어머니가 위독해 내 탓이 아닌가 해 내림을 받았다"며 신 내림을 피하지 못한 숙명을 토로했다.
본 굿은 부정거리부터 출발하는데 굿을 하는 중에 부정한 이가 있으면 주당살을 맞아 죽기 때문에 미리 부정을 푸는 의식이다. 이어지는 도당거리는 굿의 중심이 되는 굿으로 오직 주무만이 할 수 있다. 고깔모양으로 접은 백지를 들고 춤을 추며 원한을 품고 죽은 이들의 혼령을 불러 위로하는 가망청배와 조상님들이 강림해 후손을 만나보고 축원해 주는 조상거리가 이어지며 주무는 홍철릭(무관이 입던 공식 제복)을 입고 검은 갓을 쓰는데 굿 내용에 따라 옷을 갈아입는다.
도당거리 다음에는 붉은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천신께 올리는 불사거리와 장군거리, 별상거리, 신장거리, 대감거리로 구성되는 대안주거리가 이어진다. 별상거리는 무당이 붉은 치마를 뒤집어쓰고 호구 마마(천연두)에 걸리지 않게 해달라고 빌고 신에게 술과 안주를 바친 다음, 대를 세우는 사슬세우기를 하는데 굿에 따라 만신들이 협력해서 하기도 한다.
▲ 치성드리는 구리시장과 가망청배 굿을 하는 주무 조순자 만신
ⓒ 송영한
흰 고깔, 흰 장삼, 붉은 띠에 홍 가사를 늘어뜨리고 삼신할머니께 비는 제석거리와 광대신을 불러 즐겁게 노는 창부거리, 집집마다 쌀을 걷어 만든 계면떡을 나눠 먹으며 떡 타령을 하는 계면거리를 지나 군웅거리에 접어든다.
군웅거리는 대잡이와 주무가 같이 진행한다. 소의 머리에 닭을 올려놓고 굿청에 들어오는데 소와 닭은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잡귀를 쫓는 장수신을 의미한다. 대잡이가 굿청에서 재물을 안고 춤을 추면 무당은 그 뒤를 따르며 사방에 활을 쏴 잡귀를 물리치는데 이를 '구능메기'라고 한다.
구능메기가 끝나고 재물을 내려놓으면 무당이 부채로 소머리를 쓰러뜨리는데 마을 쪽이 아니라 산 쪽으로 쓰러져야 복이 있다고 믿는다. 이어 무당이 흰 도포를 입고 한지를 무는데 한지가 입에 붙어 떨어지지 않으면 그릇에 돈을 넣고 절을 하며 한지를 떼는데 정성이 부족하면 떨어지지 않고 억지로 떼면 살갗이 떨어진다고 한다.
군웅거리를 마치면 당집에 북어와 소족을 들고 들어가 무사히 굿을 치렀다고 도당 신에게 고하는 당굿을 하고 날 잡은 날 붙였던 첩을 떼어 소지를 올린다.
당굿을 마친 뒤 도당신을 보내는 마지막 굿판인 뒷전이 벌어진다. 무당은 장고 바라에 맞춰 노랫가락을 하고 한복을 입고 부채를 든다. 음식을 모두 고수레하고 생닭을 산신께 바치며 칼과 북어를 던지는데 칼끝과 북어머리가 모두 밖으로 향해야 길조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칼을 들어 바가지를 깨뜨림으로 갈매동 도당굿 대단원의 막이 내린다.
▲ 조상거리와 불사거리 굿을 하는 만신
ⓒ 송영한
1995년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15호로 지정한 갈매동 도당굿은 원래 산신당이 상당, 도당이 하당격이다. 그러나 검암산 중턱에 있던 산신당은 오래전에 없어졌고 산에 오르는 초입에 도당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모신 도당집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주로 경기 전역을 무대로 펼쳐졌던 도당굿은 10월 추수 뒤에 치르는 것이 보통이나 갈매동 도당굿은 이른 봄에 지낸다. 이에 대해 고준선 구리문화원 사무국장은 "아마 농사를 시작하기 전에 풍년을 기리고 꽃피는 춘삼월에 축제를 열어 마을의 안녕을 빌기 위해서 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무성 구리시장은 "구리에 벌말, 수누피, 갈매 도당굿이 있었지만 다 사라지고 갈매동 도당굿이 이어올 뿐"이라며 "먹을거리가 없던 어렸을 때 굿 날 먹을 것이 넘치던 것과 늘어선 엿장수들이 기억에 남는다"고 회상했다.
당주 안창덕씨는 "굿 덕으로 갈매동이 이태 동안 무병 무탈 편안하고 마을에 경사가 이어졌으면 좋겠다"며 "도지사가 약속한 대로 굿당 건립이 이른 시간에 이뤄져 전통문화가 후대까지 이어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갈매동은 구리시에서 유일한 농촌형 도시지역으로 전 지역이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여 있다가 요즘 일부 지역이 우선해제지역으로 풀린 마을로 안씨, 이씨. 정씨 박씨 등 소수의 성이 아직도 집성을 이루어 살고 있다.
갈매동은 각종 규제와 문화적인 혜택을 충분히 누리지 못한 대신 역설적으로 도당굿과 같은 훌륭한 문화유산을 계승하고 경로효친, 미풍양속이 넘쳐나는 아름다운 마을이다. 이제 단계적으로 개발을 시작하는 갈매동이 도당굿 같은 문화유산을 잘 지켜낸다면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꿈의 전원도시로 새롭게 각광받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