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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듣느냐?
이렇게 네 이름을 부르는 '이것'은 무엇이고, 내 부르는 소리를 듣는 너의'그것'은 무엇이냐? 너는 죽었고 나는 이렇게 살아있는데, 너의 무엇이 죽은 것이고 나의 무엇이 살아있는 것이냐? 이것들이 대체 같은 것이냐 다른 것이냐? 꿈 깬 자들이 말하기를, 살아도 살아있지 않고 죽어도 죽지 않는 것이 있다는데, 정신 차려 살펴보아라, 그것이 과연 무엇이냐?
한 세상 산다는 일, 그 일장춘몽一場春夢 참 허무하지 않으냐? 너 이제 한 생 다 마쳤으니 대답해 보아라. 산다는 게 무엇이고 죽는다는 건 과연 무엇이냐?
지난 한 세상 꿈속에서 ○○○ 너는 내 사촌동생이었고, 나는 네가 태어나기 4년 전에 네 어머니의 친정집에서 네 외숙, 외숙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니까, 너의 어머니는 내가 갓난아기였을 때 나를 업어서 돌봐주시기도 했던 내 고모이셨고, 산 너머 마을로 시집갔다가, 우리나라가 도시산업화되기 시작하는 초기에 네 아버지와 함께 맨손으로 고향을 떠나 피나는 노력 끝에 일가를 이룬 고된 인생의 반려이셨다.
이미 죽은 지금 네 입장에서 보니, 너와 나는 한 할아버지의 손주, 외손주로, 네 지난 46년 또 한 차례의 꿈속 인생에서 그저 잠시 스쳤을 뿐이로구나. 그저 한번 불어 오가는 바람결 같은 한 세상, 날리는 먼지 같은 우리 만남이란 참 이다지도 덧없구나.
어려서 처음 만나 어울려 놀다가, 나는 너를 어깨에 목마 태우고 뒤로 넘어져 크게 다치게 할 뻔 하기도 했지만, 내가 아는 수십 가지 옛날 얘기를 주저리주저리 들려줄 만큼, 너를 많이 아끼고 좋아했던가 보다. 방학 때 네가 시골 외가에 다니러 왔을 땐, 시골밥상이 변변치 않았을 텐데도 외숙모가 만든 무생채를 몹시 맛있어 하며 매 끼 거기다만 밥 한 그릇을 다 비우곤 하던 생각이 난다.
어린 시절부터, 크면 어딘가로 멀리 떠나 전혀 색다른 삶을 살게 될 것 같은 예감에 젖은 채 성장했던 나. 고모부인 네 아버지께선 내가 대학에 진학하게 되면 너희 집에 와서 지내도 된다 하셨기 때문에, 나는 너랑 같이 살게 된다는 기분 좋은 꿈을 키우며 고등학교를 마친 후, 결국 대학시절은 대부분을 서을 근교의 너희 집에서 지내게 되었었다.
아마도 네 아버님은 한창 공부하며 성장하는 너희 형제에게 내가 뭐든 긍정적인 자극이나 영향을 주지 않을까 기대도 하셨을 법한데, 결과적으로 나는 거기에 크게 부응하지 못했었다.
나이로 보면야 제일 팔팔하고 무서운 것 없을 때였겠지.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의 1980년대 초중반 한국정치경제사회의 현실은 그야말로 암흑이었다. 그 시절 대학생들이 대개 그랬듯이, 나는 비합리적인 현실에 짓눌려 매우 심한 지적 갑갑증이나 절망감에 시달렸고, 그 때문이었는지 한때 폐결핵 환자가 되었었다.
나는 심신을 가둔 그 어두운 덩굴에서 벗어날 출구를 물색하지 않을 수 없었고, 차츰 바쁜 사람들이 몰려가는 방향에서 벗어났다. 주변인이 되어 어둠 속을 서성일 때, 불교수행이나 무술, 요가 등이 마치 멀리서 비쳐드는 빛처럼 암중모색 중인 청춘을 끌어당겼다. 언젠가부터 나는 그동안 몸담아온 학교교육이나 대중이 휩쓸려가는 세속의 길을 서서히 등지게 되었다.
어쩌면 사춘기 전후의 어린 너나 동생들에겐, 통기타를 흉내 내어 치면서 데모가 따위를 목청껏 부르고, 가끔 세상을 잊은 현자인 척 부처님 자세로 앉아있거나, 옥상에 쌓아둔 각목 따위를 고함을 지르며 격파하는 형의 객기나 겉멋이 그럴싸해 보였을지 모르지만, 아버지 눈에는 나의 그런 작태가 결코 곱게 보이지 않고 심히 실망스럽거나 우려스러웠을 것이다.
당연히, 내가 너희들과 같이 지낸 결과는 좋지 않았다. 너는 고등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여 학업을 중단하고 학교에서 자퇴를 하기에 이르렀고, 나는 그로부터 느껴지는 부담이 견디기 어려워 따로 나가 변두리의 낡은 아파트로 방 한 칸을 세 들어 지내며, 대학 졸업 전후로 공사판을 전전하다, 2년 반 가량의 군복무를 마치고, 끝내는 중이 되겠다고 입산하고 말았다.
뭘 찾겠다고 출가의 길을 나섰는지, 나는 세상의 인연들을 다 부정하고 버리려고 했다.
속세의 부질없는 비루한 갈망이나 너절한 가치 따위 뿐 아니라, 온갖 도덕적 책무나 애증으로 얽힌 기억조차 깨끗이 비우려고 했었지. '내가 너희들을 찾을 때까지 나를 찾으려 하지 말라'고 출가할 때 친구들에게 남기고 떠나온 말처럼, 나는 입산 이후 한 20년을 출가 전에 알던 어떤 사람도 일부러 찾지 않았다. 이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이제 와서 비명에 일찍 생을 정리하고 만 너에게 무척 미안하고, 갑작스레 큰 부채를 떠안은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구나.
내 몰인정과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너는 마치 부러진 자리를 스스로 더욱 견고하게 봉합하고 일어선 나뭇가지처럼 한때 매우 성공적으로 홀로서기를 했었지. 일찍이 군대를 다녀와서 뒤늦게 애써 다시 학업을 쌓고 대학에 진학하여 토목공학을 공부했다. 솔직히, 나는 네가 한 인간으로서 빗나가지 않고 꿋꿋이 일어서준 것이 멀리서나마 얼마나 고마웠었는지 모른다. 더구나, 네가 전공을 살려 취직도 잘 하고, 발전소나 댐 공사를 위해 토목 측량 등을 하고 다니며 직장생활을 퍽 원만하고, 결혼해서 아이도 낳고 잘 살고 있으며, 무엇보다 너의 부모님께서 이를 매우 대견스러워하시는 것 같아, 중이 되어 산중에서 떠돌면서도 나는 이런 네 소식에 내 일처럼 기뻐했었다.
그런데, 얼마 전 문득 날벼락 같은 소식이 들려온다. 네가 죽었다고 한다. 그것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무리한 사업을 벌였다 모조리 털어먹고, 끌어다 쓴 은행융자를 갚느라 아버지께서 평생 피땀 흘려 모으신 돈 다 날리고, 동생네 식구들끼리 끌어들여 온통 곤경에 처하게 한 것을 비관해, 한겨울에 외진 숲속에서 나무에 목을 매었다고…….
동생이 와서 울면서 말한다.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웬 사기꾼 같은 사람에게 홀려 동업으로 해외 골프관광 사업을 시작했는데, 동업자는 일만 벌이고 형은 이리 저리 돈만 끌어 대다가 1년도 안 되어 일이십억 가량 되는 돈이 다 거덜났었다고. 그 후 1년여를 은행 부채를 이리 막고 저리 막고 해서 이제 겨우 가닥이라도 잡혀가는 국면인데, 그 사이 형은 너무 지치고, 평생 벌어 갚아도 헤어날 수 없을 듯한 부채의 늪에서 더 이상 아무런 삶의 희망도 보이지 않아,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한 것 같다고. 경찰에서 연락이 와 신원을 확인하라해서 가보니, 목에 새겨진 빨랫줄 자국, 목매달아 죽은 사람의 그 기괴스럽고 어이없는 표정, 시신을 보자마자 실신하시는 아버지……. 모든 것이 너무나 충격적이었다고. 남에게 눈물 한 방울 헤프게 보인 적 없던 아버지가 밤마다 수면제를 드시고도 잠을 못 이루고 땅을 치며 나와 우신다고. 유서에 썼듯이 형은 자신이 죽음으로써 부모님이나 동생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씻으려 했을지 모르지만, 그런 상황에서 자신이 죽으면 자식을 앞서 보낸 부모 마음이 어떨지는 꿈에도 몰랐던 것 같다고.
○○야, 도대체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이냐? 이제 시간이 좀 지나 너의 49재를 준비하면서 묻고 또 묻는다.
맨 먼저, 오늘의 세상을 움직여가는 경제 시스템이 본질적으로 너무나 불완전하고 흠짓 투성이이며, 순진한 사람들을 일거에 도탄에 빠뜨리고 생의 파멸로 몰고 갈 함정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는 점에 생각이 미친다. 산업자본주의가 금융자본주의로 이행하고, 실물경제니 화폐경제가 신용경제로 전환되어가면서, 이 문제는 이미 너무나 심각해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의 재산은 이제 대부분 집에 있지 않고 은행에 있다. 사람들이 장롱이나 지갑속에 가지고 있는 것은 통장 잔고의 숫자들이거나 신용카드 안의 보이지도 않는 디지털 정보신호들일 뿐이다. 그 숫자나 기호들이 사람들을 울고 웃게 하고,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산업자본주의는 노동과 재화로 사람의 인생을 갉아먹고 잠식해갈 수 있지만, 금융자본주의는 단순한 숫자의 장난으로 순식간에 사람의 목숨을 흡입하는 무섭고 흉악한 괴물로 돌변하곤 한다.
인 타임(In Time)이라는 영화 생각이 난다. 모든 사람들이 팔뚝에 심어진 전자 칩이 나타내는 숫자에 따라 살고 죽는다. 일을 하면, 특히 체제 옹호적인 일을 많이 하면 숫자가 올라가 수명이 연장되고, 톱니바퀴같은 체제에 들어가 기계처럼 일하기를 게을리 하거나 체제를 거부하면 숫자가 급격히 줄어들어 0에 근접하고, 정확히 0이 되는 순간 생존권이 박탈당해 죽는다.
호모 이코노미쿠스 Homo Economicus? 경제학자들이 만들어낸 이 개념, 거의 모든 현대인들이 스스로를 규정하여 가두고 있는 이 인간에 관한 정의가 이제 인간을 체제의 형편없는 소모품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어떻게 '경제'가 인간의 모든 것, 혹은 가장 중요한 것이 될 수 있느냐? 경제는 고작 땅 위의 지고의 영靈인 인간이 자신의 발을 보호하기 위하여 신고 다니기 시작한 신발과 같은 것이 아니었더냐? 예사의 동물이 아닌 호모사피엔스는 적어도, '경제'가 삶의 가장 주된 주제가 되는 순간, 자신의 신발을 머리에 이고 다니기 시작한다. 그들의 삶은 동물만큼도 태평스럽지도 않게 되고 식물들만큼도 자연스럽지 않게 된다.
경제를 '생각하는 사람'은 하늘의 태양도 달도 별도 구름도 바라볼 여가가 잘 없다.
봄햇살의 따스함도, 비람결의 감미로움도 느끼지 못하고, 발끝에 피어있는 야생화의 웃음도 듣지 못한다. '생각하는 갈대'가 되어, 바람에 온통 머리칼만 헝클어진다.
'생각하는 사람'은 '호모 이코노미쿠스'가 되면서부터 세상과 우주의 주인이다. 어떻게 인간이 본질적으로 그가 소유한 것들의 소유, 그 노예가 될 수 있다는 말이냐?
사람들은 오늘날, 성실히 일하거나 아껴 모아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머리를 잘 굴리거나 운이 좋으면 일확천금으로 팔자를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돈만 있으면 돈이 돈을 번다고 생각한다. 돈으로 목숨이나 행복도 살 수 있다고 심히 착각한다. 인과를 믿고 선의지와 높은 지향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현실을 모르는 공상가로 치부되며, 돈과 권력과 총부리 따위에서 정의와 명분이 나온다고 믿는다. 이기적 맹목성과 탐욕에서 나오는 온갖 합리적이지 않은 경쟁구도에서 빈익빈부익부를 조장하는 돈놀이나, 투기, 탈법적이고 비도덕적인 상행위나 온갖 이권다툼과 약자에 대한 수탈이 경제활동이나 경영이나 재테크나 투자라는 개념으로 세탁된다.
이 아수라장에서 얼마나 많은 선의의 피해자들이 굶주리고 내쫒기고 생존권을 반납하는지……
그러나 사실 잘 살펴보면, 모든 문제는 밖에 있다기보다는 우리 안에 있다. 이것은 객관세계에 존재하는 숫자의 문제이기 이전에 우리 안의 탐진치貪瞋痴의 문제인 것이다.
우리는 모두 너무 순진하다. 미끼를 무는 물고기들보다, 머리가 더 좋을 것도 없고 자제력이 특별히 뛰어난 것 같지도 않다. 너무 겁 없이 보이지 않는 제도나 거대자본이 우리 삶의 길목 도처에 드리우고 있는 숫자의 낚싯바늘들을 덥석덥석 문다.
사실 플러스 마이너스의 숫자라는 것 자체가 온통 우리 머릿속에 있는 것 아니냐?
숫자는 우리 지고의 내면에도 없고, 백일하白日下의 엄정한 대상세계에도 없다.
여기 돌멩이 하나를 망치로 열 조각을 내어 놓고 그 돌멩이들에게 물어보자. "너희들 몇 개냐?" 그럼, 그 돌맹이들이 입을 모아, "본래는 하나인데 지금은 모두 10개예요."하고 말할까? 그럼 귀엽기라도 하겠다. 또 그 조각들을 다 갈아서 돌가루를 만들어 놓으면 놈들이 "아, 우린 다 없어졌어요."라고 말할까?
어려서 숫자를 배우고 덧셈 뺄셈을 배우기 전에 우리는 먼저 알아차려야 했는지 모른다.
마치 대양의 일렁임처럼 존재계의 모든 것들이 그저 덧없는 흐름 속에 있을 뿐이며, 분별된 대상이나 숫자나 그 계산이란 그저 우리 마음속에 가상으로 존재하는 인식의 틀이나 패턴, 일련의 사고의 흐름일 뿐이라는 것을……
이 세상 '소유'라는 것도 온통 우리 마음의 장난일 뿐. 그게 그 이상의 뭐란 말이냐?
어떤 물건이나 돈이 나의 것, 혹은 다른 누군가의 것이라는 게 뭐냐? 그저 나와 세상 사람들이, 그다지 공정하지도 않고 사실은 온통 모순투성이로 가득 찬 일정한 법질서의 비호 아래서, 그저 그렇게 여기는 것일 뿐 아니냐?
그것은 그저 공공의 약속 같은 것. 어떤 것이 내 소유권 하에 있다는 법적 사실에 다수가 추호의 이의 없이 동의한다 해도, 그것은 단지 우리의 생각이나 의견일 뿐이다. 예컨대, 어떤 사람의 재산이 대략 얼마 얼마라고 할 때, 사실 그것은 우리의 실재 존재와 별 연관도 없는 그저 마음속의 숫자가 아니냐는 말이다.
그 허황된 숫자들 때문에 때론 공연히 기분이 날아갈 듯 하기도 하지만, 간혹 온통 밥맛과 살맛을 상실할 만큼 우울해지기도 한다. 여러 자리였던 숫자들이 갑자기 0에 근접하고 혹은 터무니없이 마이너스가 되었을 때, 그때도 우린 여전히 숨 쉬고 있고, 고개 들어 푸른 하늘을 바라볼 수 있고, 눈 쌓인 산길을 걸을 수 있고, 그리고 무엇보다, 도처에 내가 만일 배고프고 헐벗으면 언제든 밥 한 끼라도 나눠주고 입던 옷이라도 벗어줄 수 있는 이웃들이 있다는 사실은 거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위로가 되기는커녕, 어떤 때는 오히려 조롱받는다고 생각한다.
한 생의 목숨을, 뼈 빠지게 일하고, 죽어라고 모으고, 목숨 걸고 다투는 데 바치다가, 한 순간에, 납득할 만한 순서도 없이, 억울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난데없이, 그저 무의미한 달력의 숫자였던 어느 날이, 바꿀 수 없는 저마다의 제삿날이 된다.
아, 우리는 거대한 이 스키너박스, 이처럼 험한 세상의 도박기계들이 앞에 던져지기 전에 정말 미리 배웠어야 했다. 요즘 우리의 2세들도, 정신없이 버튼을 눌러대는 게임에 노출되어 오래지 않아 하나둘 중독되어가기 전에, 미리 미리 이 정신없는 컴퓨터의 2진법에 걸려들지 않는 연습부터 시켜야 한다.
무엇보다 근원적인 문제는, 인생의 파친코 레버를 잡고 있는 우리의 정신이 치명적인 불완전성이나 약점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나면서부터 천부적으로 마음이 탐진치貪瞋痴의 독에 오염된, 혹은 오염될 수 있는 소리를 타고난다. 이 탐욕과 공격성과 어리석음은, 성장하고 살아가면서, 교육과 사회생활을 통하여 제어되고 승화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치명적이 될 때까지 방치되고 오히려 조장된다. 무한의 경쟁과 적자생존을 가르치는 오늘날의 교육시스템이 그렇게 되어있고, 이것은 컴퓨터나 온갖 전자매체의 놀라운 발전으로 무섭게 가속화되고 있다.
우리나라가 OECD 국가들 가운데 자살률 1위라고 한다. 이혼율, 저출산율도 역시 세계 최고 수준이며, 어떤 학자들의 진단에 의하면 이것들이 국민 1인당 부채율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수치들이야말로 세계를 놀라게 하는 고도성장과 "한류 열풍'따위에 가려진 우리 국민들의 솔직한 현재 표정이며 실제의 행복지수이다. 어쩌면 지금 지구촌 위의 '레 미제라블-Les Miserables('불쌍한 사람들'이라는 뜻)'은 프랑스 혁명 전의 중세 유럽 사람들이나 현대의 아프리카의 난민들이 아니라, 바로 21세기의 대한민국 사람들이다.
우리는 모두 성장의 노이로제에 걸린 채 인생을 살아왔다. 옛사람들은 세상에 바라는 바가 고작 '풍년'이거나 '태평성대'였겠지만, 현대인들에게 그 따위는 그저 미적지근하고 아무런 참신성도 없는 풍월일 뿐이다. 현대사회 전체가 온통 치유되지 않는, 성장이나 발전의 강박증에 시달리고 있으며, 한국사회는 특히 '고도성장', '급성장'의 노이로제에 붙들려 있다.
그러나, 보라. 해마다 몇 퍼센트이 성장이라는 것이 과연 얼마나 우리 내면의 성장과 행복에 기여해 왔는지. 세월이 갈수록 경제지표를 나타내는 숫자들에 우린 그저 익숙해져가고 도리어 더욱 공허해져 가는 것은 아닌지.
산속에 살아도, 경기가 좋지 않다는 말을 수도 없이 듣는다. 밑 빠진 독 같은 우리들의 욕심이나 성장의 노이로제를 생각하면 사실 경기 좋은 시절이란 영원히 잡을 수 없는 무지개처럼 보인다.
대부분의 우리는 민주주의를 믿는다. 그러나 반성적으로 돌이켜보면 그것이 얼마나 얄팍한 믿음이냐? 사회시스템 전체적인 구조나 전혀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선거 때마다 깊은 생각도 없이 한 표를 행사하면서, 우리 사회가 충분히 민주적이고 여러모로 성장하고 이 있다고 믿고 싶어 한다. 그러나, 현실의 일상에서 우리가 피부로 체감하는 사회는 그야말로 거대한 먹이사슬의 피라미드일 뿐이다. 물론 어떤 사회도 그 안에 수직적인 구조는 엄존하며 그것의 효율성 또한 분명히 존재한다. 다만, 민주주의가 진실로 구현되는 사회라면 그 조직이 어느 정도 합리적이며, 그 성원들에게 적정한 수직이동의 기회가 주어져야 하는 것 아니냐? 대부분의 우리들에게, 이 먹이사슬 피라미드의 위로 언젠가 올라갈 수 있을지 모른다는 가정은 허울 좋은 민주주의가 제공하는 '기회'가 아니라, 그저 환상이 아니냐고?
그래서, 지금 나는 생각나는 것은 트리나 폴러스Trina Paulus의 '꽃들에게 희망을 Hope for the Flowers'책이다. 나는 이 책에서 은유적으로 설정한 상황만큼, 현대의 인류사회를 적나라하게 풍자하고 그 속에서 우리의 나아갈 길을 바르게 제시한 이야기는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막 태어난 애벌레 한 마리가 생의 여로에 오른다. 그런데 둘러보니 거의 모든 동료 애벌레들은 어딘가로 서둘러 가고 있다. 뒤질세라, 그 애벌레도 경주 같은 행렬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따라가 보니 그 끝엔 거대한 기둥이 하늘 위로 솟아 있다. 애벌레는 그 기둥 위엔 인생의 빛나는 답이 있을 거라는 기대로, 다른 애벌레들을 제치고 더러는 짓밟기도 하면서, 혈투 끝에 마침내 기둥의 최정상에 선다. 그러나 허탈하게도,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은 온통 무의미하고 맹목적인 추종과 비교와 경쟁과 질주와 환각이었다. 놀랍게도, 그 높이에서 바라본 세상엔 여기 저기 아스라이 솟아있는 애벌레 기둥이 즐비했다.
애벌레는 용단을 내리고 목숨 걸고 올랐던 애벌레 기둥을 내려온다. 다시 기둥 아래서 애벌레는, 한때 자신의 사랑이었다가 기둥에 기어 올라가기를 거부하고 자기 안에서 생의 참 의미를 깨달은 노랑애벌레를 만난다. 그녀는 자신에게서 나온 실로 고치를 만들고 그 안에서 죽음과도 같은 자기침잠을 통해 탈바꿈을 이루어 노랑나비가 되어 있었다. 다행히 이 이야기의 해피 엔당은, 그 애벌레 또한 노랑나비의 인도로 고치가 되는 법을 배워, 아름다운 나비로 다시 태어나 함께 세상을 향해, 꽃들을 향해 날아오른다는 것이다.
○○야, 우리가 한 방에서 먹고 자고 뒹굴던 시간은 불과 3년 정도, 내가 너를 떠나 애써 너를 잊고 지내온 시간은 23년이 넘었구나. 그리고 이제 네가 먼저 이 세상을 아주 떠났다.
이미 8년째 자살률 세계 1위, 아, 대한민국! 연간 1만 5천여 명, 인구 10만 명당 31.2명이 자살. 전직 대통령과 대기업의 총수들과 브라운관의 스타들이 끝도 없이 자살하는 나라.
반만 년 역사 속에서 온갖 외침과 내적 환란 속에서도 웅녀의 '은근과 끈기'를 특유의 저력으로 삼아 꿋꿋이 살아온 피붙이들이 왜, 일제 침략과 복잡한 국제 패권경쟁 속의 동란을 치르고도 눈물겹게 살아온 사람들이 왜, 압제와 가난을 목숨과 청춘을 바쳐 극복해온 사람들과 그 후예들이 왜, 이렇게 좋아졌다는 나라에서 앞다투어 투신하고 목매달고 분신하고 약을 먹고 죽어간다는 말이냐? 모든 일이 원인에 의해 벌어지는 것이라면 이 일은 도대체 어디서 기인하는 것이냐? 살아있는 것들은 살기 위해 세상에 왔고, 살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죽기 살기로 살려고 드는 것인데, 누구라도 그 어려운 자살을 결행하고 마는 데는 한 영혼이 도저히 감당하지 못하는 치명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10대, 20대, 30대 한국인 사망원인 1위는 바로 자살이다. 또 한국인 자살의 가장 큰 원인은 정신질환이며, 구체적으로는 우울증과 불안장애가 주범이다. 이러한 데이터는 한국인의 심리상태가 건강하지 못하다는 뜻이며, 기성사회의 비인격적, 탈자연적 분위기나, 과열된 경쟁주의의 교육풍토나, 현대사회의 전산정보화 등이 온통 사람들의 설자리, 앉을자리, 누울 자리를 뒤흔들고 있다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미쳐가고 있고 자살충동에 내몰리고 있다는 말이다.
물론, 그 근본적인 원인이야 누누이 말한 대로 인간의 탐진치를 벗어나지 않는다. 맹목적 생존의지보다 더 강한 의지는 뭇 생명체들이 가진 쾌락추구와 고통회피의 의지이고, 그것의 모든 뿌리는 바로 자의식인 것이다. 사실 자의식이란 인간 의식의 차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무의식적 생명현상의 배후에까지 뿌리내리고 있는, 몹시 집요한 집착이다. 그리고 그것의 실체는 존재의 진리나 실상에 대한 '무지'인 것이다. 사실 자살충동은 생존의지의 빈곤에서 기인한다기보다는, 고통회피 의지에서 비롯한다. 그리고 그 저변에는 역시, 뿌리 깊은 '자의식'이라고 하는 최초의 병인이 잠복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살은 이 자의식의 방어기제의 일종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한국 사람들이 그렇게 쉽게 자살하는 이유는 그들의 자의식이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보다 상대적으로 높다는 말인가?
그렇다. 내가 보기에는 그렇다.
한국 근·현대사의 질곡과 수많은 파란은 사람들의 심리에 매우 불안정하고 승화되지 않은 자기정체성을 조장해왔다. 불확실성이나 불안정성은 그 자체가 어떤 측면에서는 역동적 에너지이고 사람의 내부에서는 강한 성취동기 따위로 발현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는 바깥의 대상세계나 친소의 타자들과 조화롭고 편안하게 공존하기보다는, 경쟁하고 배제하고 벗어남으로써 자아의 안정을 찾으려 하는 동인을 부여한다. 항상 흑백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당하고 그 가운데 겪는 숱한 갈등과 혼란은, 여리고 흔들리기 쉬운 자아로 하여금 성급한 도박이나 극단적인 선택을 통하여 근원적이지 않은 가짜의 평안이라도 찾고 거기 안주하려들게 만든다. 아마도 이런 심리기 몇몇 군인들에게 쿠데타를 일으키게 했을지 모른다. 경제주체로 급부상하여 한국경제의 급성장을 주도해왔으나 상당히 불명예스럽고 비도덕적인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하는 재벌들을 키워왔을지 모른다. 이렇게 파행적인 정치경제적인 변천사가 세계를 깜짝깜짝 놀라게 해온 것이 사실일지라도, 그 속에서 숱하게 많은 자아들이 내몰리고 박탈당하고 상처받고, 우울하고 비애에 찬 명멸을 거듭해온 것은 어떻게 보상받아야 할까? 아무리 전체 사회에서 개인의 희생이 높이 평가된다 해도, 한 인간의 존재는 신성불가침한 하나의 세계일진대, 누군가가 죽고 잊혀지고 버려질 때 그의 주검 위에 뿌려지는 꽃송이들이 정작 그 자신에게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이냐?
'빨리빨리', '하면 된다', '안 되면 되게 하라', '억울하면 출세하라', '유전무죄 무전유죄 有錢無罪 無錢有罪,'일등', '금메달', '첨단……, 현대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흔들고 풍자해온 이런 말들은 건강하고 평화로운 사회의 용어들이 아니다. 전시체제나 비상시나 군사문화속의 구호나 세뇌어들이다. 이는 아마도, 위대한 고대사로부터 어이없이 패퇴해온 우리 선조들이, 내몰리고 침략당하고 짓밟히면서도 지켜온 염치나 자긍심과, 어질고 선량한 도덕성과, 자연과 보편의 질서에 대한 경외심과, 빛과 웃음을 향한 긍정적이고 여유 있는 해학의 정신과도 한참 동떨어진 것이다. 부모나 가족, 친지나 이웃의 자타를 허무는 사랑 가운데서 태어나, 섬김과 대동大同의 사회관계 안에서 꿈을 펼치고, 산맥, 물길, 바람결을 타고, 춘하추동으로 흐르는 시간의 돛단배를 띄워, 아리랑 스리랑 아날로그의 가락으로 순항해오던 사람들이 왜, 왜, 왜 이렇게 불쌍하게 되었는지, 나는 모르겠다.
죽느냐 사느냐, 언제나 그것이 그들의 문제이다. 사느냐 파느냐, 적이냐 동지냐, 결혼이냐 이혼이냐, 보수냐 진보냐, 영남이냐 호남이냐……. IT 강국인 한국 사람들은 이제 버튼 잘 누르는 사람들이다. 0,1,0,1,0,1…… 컴퓨터의 2진법의 디지털 신호가 뇌 속에 유전인자처럼 박혀가고 있다.
아, 배달의 부모형제여, 전력질주는 이제 그만 하면 어떨까? 조금만 천천히 가면 안 될까?
진 빼지 말고, 아무 일에나 쉽게 목숨 걸지 말고, 그만 이 어리석은 무한경쟁에서 벗어나면 안 될까? 이기려고만 하지 말고 질 줄도 아는, 져도 멋지게 지는 미학을 배우면 안 될까?
지고 살면 어떤가? 결국 덧없고, 몇 푼어치 되지도 않는 이 도박판에서, 2등, 3등이면 어떻고, 꼴찌면 또 어떻다는 말인가?
어떤 아이의 말이 떠오른다.
전에, 어떤 절에, 가히 신동이라 할 만한 총명한 아이가 도반스님 제자라고 와 있었다.
어느 스님이 그 아이, 수동이와 이야기를 나누다, 애가 몹시 영특한 것이 대견해서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고 한다.
"수동아, 너 내년에 학교 가거든 꼭 1등 해라. 알았지?"
그러자 그 아이가 말했다.
"스님, 참 이상하시네요. 어떻게 꼭 1등을 해요? 해 봐서, 나보다 공부 잘 하는 얘가 한 명이면 난 2등 하는 거고, 두 명이면 3등 하는 거고, 애들이 다 나보다 잘하면 난 꼴찌 하는 거지, 스님, 어떻게 꼭 1등을 하라고 하세요?"
그 스님은 그만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정말이지, 오늘날의 한국 사람들 중, 그 누가 이 아이의 논법 앞에서 무너지지 않을 수 있겠느냐?
나는, 처차들의 목을 미리 베고, 지기 위해 전장으로 간 계백장군의 서릿달橒月같은 기상과 초연함이, 한국 역사에 가장 굵은 선으로 새겨진 민족정신이라고 믿는다. 오늘을 사는 우리 겨레는 제발, 질 수도 있고, 져도 괜찮고, 어떤 때는 주저없이 지는 것이 답이라는 것을 배워야 한다.
장부가 없는 세상이다.
두어라, 생사 앞에서 혼비백산하는 오합지졸이 다 무엇이냐. 생사를 초월한 중도中道 위에 열반으로 백천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하는 활로가 있다. 하물며, 개미집 같은 저 세속의 이해타산이 어찌 장부의 눈길이나 한번 끌 수 있으랴?
애벌레들이여, 나비가 되어 날아라.
○○야, 너는 생의 허무를 깨달았으면 그 먹이사슬의 피라미드에서 내려와 고치가 되는 법을 배워 숲속으로 갔어야지, 왜 나뭇가지에 목 매달 생각을 했느냐? 목이 너냐? 목숨이 너냐? 몸뚱어리 하나 죽여서 무엇 하느냐? 몸뚱이가 저 알아서 지은 허물이 어디 있느냐? 그저 이 마음의 그림자일 뿐. 또 마음이 과거와 현재에 짓는 어떤 허물이 있다 해도, 본래 그 바탕은 비고 청정하고 물들지 않는 것이거늘……. 죽어 없어져야 하는 것은 우리 자의식의 환영이고, 매달아 죽여 마땅한 것이란, 결코 만족을 모르는 우리 안의 갈애와, 동료를 경쟁자로 삼아 일으키는 우스꽝스런 적의라는 것을 어찌 몰랐던 것이냐?
왜 그 사이에 가끔이라도 나를 찾아오지 그랬니? 동생이, 출가한 형을 찾아가 상의해보면 어떻겠느냐고 했을 때 네가, "지은 죄가 많아서 그럴 수 없다."고 했다는데, 형이 무슨 죄를 심판하는 사람이냐? 출가한 사람이란, 죄가 있는 사람이라도 그 죄업에서 벗어날 길을 찾아주는 사람이어야지. 부처님의 자비하신 법은 악인을 처단하는 것이 아니라 일체의 생명을 악업으로부터 구원하는 것이 아니냐? 생에서 사로, 사에서 생으로 돌고 도는 중생을 그 생사의 수레바퀴에서 훤칠하게 뛰어나와 열반의 저 언덕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니냔 말이다.
어떻게 이놈의 세상에서 죄 안 짓고 살 수가 있겠니? 모두가 죄업 가운데 있지만, 이 세상 사는 자들의 죄업 가운데 정말 씻기 힘든 죄는 오직 하나, 우리 모두를 이 죄업에서 건질 길이 있음에도 그것을 믿지 않고, 찾지 않고, 가지 않는 것이다.
고해에 빠져 허우적거리면서, 이리 무거운 탐진치의 무거운 돌짐들을 다들 왜 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산 사람이나 죽은 넋이나 괴롭기는 마찬가지. 너 이제 천근만근의 굴레를 풀어헤치고 생사고의 어두운 바다 밑 수압을 벗어나, 어서 그만 물위로 떠오르거나.
앞서거니 뒤서거니 서둘러 저 언덕으로 가자.
물 위로 나와 보면 소승의 뗏목도 있고, 대승의 큰 배도 있다. 우리 다 함께 가자.
못다 간 길 있거든 곧, 우리 다음 생에서 다시 만나자. 모두 다 이 죄업에서, 탐진치에서, 고해에서 하루속히 벗어나지 않으면, 대동강 강물 같은 우리 눈물 언제 마르랴?
마침내 묻노라. 한 세상 끌고 다니던 네 몸뚱이는 이제 한줌 재가 되었다니, 죽었다는 것도 살아있다는 것도 네 마음이 일으킨 한 방울 물거품 같은 생각일 뿐이거니, 이 모든 생각 없을 때 그 무엇이 너이더냐?
한반도는 삼천리, 산은 산, 물은 물.
너의 마흔 여섯 생애에 향 사르고 꽃을 바친다. 술 대신 샘물 끓여 차를 한 잔 따른다.
자, 그만 취생몽사醉生夢死에서 깨어나라.
눈 뒤집어 쓴 아침 소백산도 맑게 맑게 깨어나고 있다. 역사力士가 거친 정으로 암벽을 떨어낸 듯, 선 굵은 저 산경山景을 너도 한번 보아라.
소식지 法華법화 2013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