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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논문은 필자가 1년간 연구한 논문입니다. 그러나 아직 종결처리가 되지 않은 관계로 인용이나 전재를 함에 조금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각주가 나오지 않네요. 사각형은 책이름의 특수문자입니다.
亂中雜錄의 임진왜란 기사서술에 관한 연구
- 전라좌의병을 중심으로-
정구복(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1. 머리말
亂中雜錄은 임진왜란 특히 정유재란 때에 남원의 의병장이었던 조경남(趙慶南 1570-1641)이 쓴 임진왜란과 정묘, 병자호란에 관해 기술한 당대 역사서이다. 이 자료는 임진왜란의 연구자에게는 이미 잘 알려진 자료이고 깊이 있게 이용되고 있는 자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연구하는 목적은 이 자료의 생성 배경과 사료적 신빙성, 기왕의 역사서술에 대해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등에 대한 사학사적인 연구를 함에 주목적이 있다. 전라 좌의병에 관한 자료를 중심으로라는 부제는 특히 호남의병의 자료로서의 성격을 밝히기 위한 편의적인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이 책에 대한 전반적인 문제를 검토하고자 한다. 본 난중잡록에 대한 기왕의 해제 두 편과 문학적 측면에서 연구된 장영희 씨의 연구는 본 연구의 기초가 되었다.
이 책을 연구하게 된 데에는 제석 조원래 교수의 교시를 많이 받았다. 또한 조 교수님으로부터 전라좌의병장이었던 임계영(任啓英 15281597)의 자료를 모아 놓은 삼도실기 (三島實記)라는 자료도 제공을 받았다. 이런 점들에 대해 깊은 감사를 감사드린다.
난중잡록은 국가의 대파국을 예견하게 하는 자연현상의 징후가 나타난 임오년(1582 선조 15년)으로부터 시작하여 왜란의 정국이 일단 정리되는 1610년(광해2년)까지의 전란사를 정리한 4책과 이후 호란사를 중심으로 다룬 속잡록 4책 모두 8책으로 되어 있다. 이 중 임진왜란사는 자기가 직접 체험한 전쟁이었던 데 대해 호란사는 그 전쟁이 호남에 미치지도 않았고 또한 호란사의 자료는 비교적 잘 남아 있기 때문에 이 책이 가지는 자료로서의 가치는 그리 크지 않다고 추측된다.
그러나 임진왜란사의 서술은 그가 전쟁의 발발을 예견했다는 기사에서부터 발발되기까지 그리고 왜군이 경상도와 전라도를 유린한 참상, 그리고 이를 격퇴한 전투상황, 자신이 겪은 전쟁 상황 등에 대하여 사실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더구나 임진왜란의 기본사료인 실록 즉 선조실록의 서술이 대단히 부실할 뿐만 아니라 선조수정실록이 다시 편찬되었고 전라도 지역의 전투는 이에 반영 되었다.
특히 이 자료는 임진왜란시기의 남원지방의 상황을 상세히 알려주는 자료일 뿐만 아니라 전라도 의병이 경상도의 왜병 축출에 기여한 사실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어 임진왜란사의 자료로서는 대단히 중요한 것임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 되었다.
조경남에 대한 귀중한 자료를 남원에 살고 있는 趙庸奭 옹으로부터 차람하였다. 한양조씨산서공파족보와 기타 난중잡록을 문화재로 지정하기 위해서 만든 고 趙炳熙 선생이 만든 전래경위 등에 대한 자료, 조경남의 행장 자료 등을 차람하였다. 이에 대해 감사를 표한다. 역사에서 깊은 조사를 하다보면 후손들이 꾸민 허구가 들어나 자료를 제공해준 후손들에게 대단히 미안스러운 경우가 생긴다. 그러나 이는 학문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목적에서 나온 것임을 양해하여주기 바란다.
2. 조경남(1570-1641)의 생애
난중잡록이 어떤 책인가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저자의 삶에 대한 이해가 우선 필요하다. 그러나 그의 생애에 대한 기술 중 후손이 만든 행장 등은 당대의 원 자료도 아니지만 윤색되거나 잘못된 부분도 있다. 일반적으로 개인의 삶에 대해서는 행장이나 가장 등이 주로 이용되고 있지만 이를 이용할 경우 세심한 주의를 요한다. 본고에서는 조경남 자신에 대한 중요한 기록은 그가 쓴 난중잡록을 통해서 말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그가 남긴 자료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조경남은 1570년(隆慶4년 선조3)에 남원부에서 태어 났다. 그의 아버지 조벽(趙壁 1532- 1575)이 남원의 현감을 지낸 남원 양씨 언호(彦浩)의 딸과 결혼하여 처가를 따라 서울 청파동에서 남원으로 이사한 것으로 이해된다. 아버지의 관직은 부사직(副司直)이었다. 부사직은 오위군의 從5品 군직으로 그 정원은 123명이었다.
조경남의 자는 선술(善述)이고 호는 산서(山西) 또는 주몽당(晝夢堂), 병옹(病翁)으로 자칭하기도 했다. 이 중 산서라는 호가 가장 많이 사용된 듯하다. 이는 방장산 서록 용추동(龍湫洞)에 인조 초년 경에 별장을 마련하여 호를 취한 것이라 한다. 그런데 용추동은 남원읍지인 용성지에 의하면 원촌방(源村坊)에 있다고 하는데 이곳은 그의 외할머니가 살던 곳이고, 원천촌은 현재 남원시 주천면 은송리 내송부락이다. 마을의 전면에는 꽤나 넓은 농지가 펼쳐 있다. 그가 산서라는 호를 사용한 때는 진사시에 합격한 때 전후에 이곳에 별장(별업 別業)을 짓고 일상적인 삶의 근거지로 확정지은 시기일 것으로 이해된다.
그는 현재 한양 조씨라고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그의 후손의 족보가 한양조씨산서공파보라고 간행되었다. 그러나 그 본관에는 약간의 문제가 있다. 그가 갑자년(인조2년: 1624)에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는 바 그 합격자 명단인 사마방목에는 본관이 광주(廣州)로 나오고 있고,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필사본 난중잡록의 서문 중 자신의 서문 말미에 남한(南漢)후학(後學) 조경남이라고 쓰고 있어 여기서 남한은 광주의 별칭이기 때문에 조경남 당대에는 본관을 광주로 인식했음이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후일에 본관이 후손들에 의해 한양으로 바뀌어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재주가 총민하였다고 하며 여섯 살 때에 아버지를 여위었고, 여덜 살 때에 생원 유인옥(柳仁沃 1541-?)에게 수학하여 사략을 읽고, 소학을 외웠으며 9살 때에 통감과 두시(杜詩)를 읽었다. 열세 살 때에 어머니를 여위어 이후 외할머니 허씨에게 의탁하여 살았다. 외할머니는 다른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돌아가실 때까지 모시고 살아서 그가 성장해서도 외할머니를 어머니라고 칭하였다고 한다.
조경남은 15살 때에 안동김씨와 결혼을 했다. 17세 때에 중봉 조헌 선생을 만나 뵙고 사제의 연을 맺어 재능을 인정받았다고 하나 다른 확실한 증거는 찾을 수 없다. 그의 가전(家傳)에 의하면 1592년 그의 나이 23살 때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1533-1592)이 의병을 일으키는 격문을 받았고, 7월에는 조헌의 격문을 받았으나 외할머니의 봉양을 위해서 참여하지 못했다고 한다.
조경남은 임진년 5월 1일에 남원 사람들이 경상도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피난길에 나서자 이를 막은 남원부사 윤안성(尹安性 1542-1615)의 개유첩(開諭帖)을 내렸던 바 이를 인용하여 서술한 뒤에 붙인 세주에서
“남원은 양남(兩南)의 사이에 있는데 내가 본부에 있었기 때문에 양남과 남원의 일을 자못 상세하게 기록한다”
고 쓰고 있다.
그리고 임진년(1592) 7월 2일자 본문기사에서 적병이 오지도 않았는데도 소문만 듣고 사람들이 피난을 가자 남원부사 윤안성은 그에게 “피난간 사람들이 돌아오도록 하는 첩지(牒紙)를 써서 각방에 내리라!”고 명했다. 그가 부사 윤안성과 가깝게 지내게 된 것은 부사가 아버지와 한 동네에서 자란 친구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한 그가 군사 활동을 한 것은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 남원일대에 왜군이 침입한 8월 이후이다. 동년 8월 9일자의 그의 행장이나 가장 등에서는 임진년부터인 것으로부터 왜군을 격살하는 활동을 벌린 것으로 설명하고 있으나 실은 정유재란 때부터임을 난중잡록의 기술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무렵 그는 남원부사의 ‘서기(書記)’로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서기’직이 어떤 신분의 직이었지 알 수 있는 자료는 없다. 단지 글자의 의미로 보아 문사직(文士職)이었던 듯하다. 그처럼 그가 적어도 7년간이나 이 직에 있었다고 하면 이직을 임시직으로 생각하기 어렵다. 서기직이라 함은 부사 밑에서 기록을 남기는 일을 주로 하는 직책인데 주로 향리 계층에서 담당하였던 듯하다. 이런 예를 경주부 경주선생안의 16세기 자료에 정조호장(正朝戶長)이 맡았던 직책 중에 ‘조문기관(詔文記官)’ 또는 ‘조문’, ‘기관’으로 칭해진 직이 있었음을 찾을 수 있다. 남원의 상급 향리는 9명이었고, 하급향리인 서원(書員)은 40명이 이상이었는데 상급 향리 중 글에 능한 사람이 없어기 때문에 그가 서기직에 임용된 것이 아닐가 추정해본다. ‘서기’는 문서기록을 담당하는 직이었음은 틀림없다고 할 것이다. 그가 이 직에 있었던 것은 남원부사에게 전해오는 각종 전쟁 상황을 소상하게 기록할 수 있는 기회였다고 할 수 있다.
정유년 8월 남원일대에 왜병이 나타나기 시작하자 모든 사람이 산으로 피난을 갔고 이를 왜군이 수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친척 80여명을 이끌고 지리산으로 피신을 했다. 1597년 8월 16일 남원성이 함락되어 왜군의 침탈이 극성을 부렸다. 그는 9월 9일 파근사에 숨어 머물고 있을 때 남원의 아전 정대인(鄭大仁)과 배립(裵立) 등이 찾아와 의병을 일으키기를 권유했으나 적세가 너무 강성하여 격문을 보낼 수 없어 포기했다고 하였다. 아마 이때 그를 찾아온 아전들은 상관이었던 조경남을 찾아와 문안을 드린 것으로 이해된다.
그가 의병활동을 임진년부터 했다고 하는 기록이 그의 신도비와 가장 등에 나오고 있으나 이는 잘못된 표현이다. 그가 왜적을 격살한 것은 정유년 9월 22일 부처모퉁이(佛隅)에서 숨어 있다가 5명을 사살한 전투기록에서 부터이다. 이 때 그가 왜적의 목을 베지 않았음을 강조하고 있지만 이는 후속부대가 오고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하며 그의 전공을 과시하려 하지 않았다는 이후에 번복되는 표현과 함께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후 그는 궁장원(弓藏院) 전투(이백면 지역)등에서 적을 사살했다고 하며 이후 5곳에서 왜적을 격살했다고 하여 조경남 장군으로 칭해지고 있다. 이후 조경남은 7-80명 이내의 소규모 의병을 인솔하고 여러 곳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것으로 난중잡록에 기술되어 있다. 그는 무술년(1598) 9월 명군의 4로 부대 장인 유정(劉綎) 막하에서 정예군 선봉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29세 때인 1598년에 외조모상을 당하였고, 과거에 두 차례 응시하여 향시에서는 합격했으나 회시(會試)인 서울의 예조 시에는 합격하지 못하고 있다가 인조 2년(1624) 갑자시의 진사에 합격했다. 그의 나이 54세가 되던 해였다.
그가 그처럼 많은 전투에서 전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8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 1547-1634), 전라감사 한효순(韓孝純 1543-1621) 등과 만나 그의 공을 칭찬받았으나 포상되지 않은 이유를 본인의 사양 때문으로 설명하고 있다. 자신의 공은 그렇다 치더라도 아래 사람들의 전공을 포상하지 않은 이유는 납득하기 어렵다.
그는 선조 임오년(1582)으로부터 광해 2년(경술 1610)까지의 임진왜란사를 난중잡록 4권 4책으로 정리하고 그 자찬 서문을 1618년(무오)에 썼다. 그리고 그는 인조대의 정묘 병자호란의 역사를 4책으로 써서 속잡록이라 칭했다. 원 난중잡록 4책과 속잡록 4책을 합쳐 최시옹이 쓴 서문에서는 산서잡록이라고 칭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정식의 서명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는 1618년에 찬자 자신이 난중잡록이란 서명을 서문에서 분명히 들었기 때문에 호란을 다룬 속잡록을 모두 포함하여 산서공이 편한 책이라고 하여 산서잡록이라고 편의상 칭한 명칭으로 생각된다. 조경남은 50대 후반에 중풍에 걸려 운신에 불편했고, 그 무렵 그는 자신을 ‘병옹(病翁)’이라고 칭했음을 난중잡록의 세주에서 읽을 수 있다. 이는 병에서 회생할 기미를 잃었기 때문에 칭한 자호일 것으로 생각한다. 그는 1637년(인조 17)년까지의 호란 기사를 속잡록 4권 4책으로 썼다. 그는 1641년(인조 19년)에 집에서 졸하였다. 그의 묘소는 남원시 이백면 초촌리에 모셔졌다.
그가 편찬한 다른 자료는 1710년 화재로 유실되었다고 하지만 그가 평생 만든 난중잡록 8책 이외에는 그의 글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가 난중잡록을 편찬한 글 재주로 보면 시와 서간문이 자신의 문집은 아니더라도 다른 학자의 문집에 실려졌을 법한데 아직 그런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앞으로 더 많은 자료가 찾아진다면 새로운 사실을 밝힐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에게 전란의 공을 포상한 것은 당시 사람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후대에 이루어졌다. 이는 난중잡록이 영조 조에 편찬된 대동야승(大東野乘)에 전부 인용 전재되고 실학자인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의 연려실기술에 그의 저술과 임란 때의 전공이 소개되어 공인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 후 남원지방 사림과 후손의 노력에 의해 순조3년 계해년(1803)에 지평, 철종1년 경술년(1850)에 좌승지, 신유년(1861)에 호조 참판직이 증직되었다.
난중잡록의 서문을 써 준 최시옹(崔是翁(1646-1730)은 당시 남원지방의 대학자였다. 그는 1700년에 서문을 쓴 남원읍지인 용성지(龍城誌)에 그가 진사임을 밝혔고 그후 속간된 읍지에서 인물의 보유편에 조경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진사 조경남은 충의롭고, 강개(慷慨)한 사람이다. 호조판서 숭진(崇進)의 증손이다. 문한과 그 밖의 사예(射藝)에 뛰어났다. 정유의 난에 원천(源川)의 산중으로 들어가 적을 유인하여 사살한 것이 헤아릴 수 없다. 포로로 잡혔다가 그에 의하여 풀려난 사람도 많았다. 한 때 시골에서는 무오생으로 이름을 드날린 자가 8명이었는데 세상에서 8무(八戊)로 칭했다. 그가 지은 야사 8권이 세상에 유포되고 있다.”
3.1 난중잡록의 편찬
이 책의 저술 및 편찬에 대한 정보는 다른 자료가 거의 없음으로 그 책 안에 전하는 내용을 가지고 살필 수밖에 없고, 이 자료만이 가장 확실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저자가 직접 쓴 난중잡록 서문과 그의 사후에 받은 서문 2통이 전하고 있다. 우선 저자 자신이 쓴 서문을 통해서 이 책의 편술 편찬에 대한 정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그의 서문은 만력 무오년 추에 써 졌다. 만력 무오년은 1618년(광해군 10년)으로 그의 나이 49세 때이다. 이 저서의 편찬은 임진왜란으로 전국토가 유린되고 왕이 파천하였으며 백성이 전쟁의 희생이 되는 상황에서 전승의 기록과 패전의 기록. 왕의 교서, 의병을 모으는 격문 등을 얻는 대로 수시로 적었다고 한다. 승전의 소식을 들으면 밤새 기뻐했으며, 패전의 소식을 들으면 팔을 걷어 부치고 분함을 느끼고 썼다고 한다. 저자는 이런 국가의 위기 상황에서 치룬 전쟁의 충격에서 이를 기록으로 전해야겠다는 뜻에서 이 책을 편찬하였다고 한다. 이 외침에서 국가를 구하여 유지시켜야 한다는 그의 국가의식이 이 책을 쓰게 된 가장 기초적인 동기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자료 사이에 자신의 말을 넣은 것은 후일 연구자들이 참고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적고 있다. 이런 자신의 말 중에는 그 자료를 어데서 얻었는가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자신의 개인적인 뜻(私意)을 기술한 것은 역사에 대한 자신의 평가인 사론적인 것도 있어 대단히 중요한 내용이며 이는 원문의 내용과는 달리 작은 글씨로 두 줄로 써서 표시했다. 그리고 정유년간의 왜군과 싸운 자신의 기록을 차례에 맞춰 섞었다. 이는 자신의 전공을 기록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음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서문에서는 전쟁의 기미가 시작된 임오년(1582년 선조 15년)부터 전쟁이 겨우 안정기에 접어든 경술년 (1610년:광해 2년)까지 4책으로 묶어 亂中雜錄이라고 서명을 붙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이 원집이고 이후 1611년부터 1638년(인조 16년) 병자호란의 수습까지를 다룬 4책의 속집이 쓰여졌다.
난중잡록의 첫 기사는 다음과 같다.
임오년 겨울 12월 20일 세 태양이 동쪽에 떴다. 쌍무지개가 겹쳐서 관통했다. (冬 十二月 二十日 三陽出東 雙虹疊貫)
이 세 태양의 출현은 정상적인 자연현상이 아니다. 이는 하나의 이변이다. 하나의 태양이 떠야 하는데 남쪽과 북쪽에서 전쟁이 날 것임을 예고해주는 도입 기사로 조경남은 활용하고 있다. 그에게는 자연현상이 인간 역사를 예고해준다고 생각했던 동양의 전통적 믿음이 깊이 깔려 있었음을 말해준다. 즉 북과 남에서 왜와 여진족의 침입으로 국가가 혼란스러운 상황을 당할 것임을 예고해준다고 조경남은 파악했다.
바로 다음해 여진족의 니탕개 종족이 우리나라 북변을 침략했다는 기사가 나오고 있다. 조선의 외침은 북쪽과 남쪽이 항상 경계하는 대상이었다. 이들 외침은 비록 방향이 다르고 다른 주체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이지만 조선에서의 충격은 서로 연결되는 것이었다. 북변의 오랑캐라고 칭하던 여진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파견된 장수들이 왜란을 당하여 다시 남으로 내려와 이를 막으려 했다. 신립, 이일, 이순신등이 모두 북변의 여진족의 침략을 막아냈던 장수였다.
윗 기사의 말미에 두 줄로 쓴 세주를 다음과 같이 붙이고 있다.
이해 내 나이 13세였다. 시국에 대해 느낌이 있어 이때부터 비로소 「일록(日錄」을 쓰게 되었다.(余年十有三矣 因感時事 始修日錄)
‘일록(日錄)’이라함은 후일 어떤 목적을 가지고 한 번에 정리한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의 기록을 정리한 것이라는 뜻이다. 매일 매일의 기록이라고 하여 이는 개인적인 일기자료라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개인적인 이야기가 본문으로 서술된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간혹 본문에 내가 어떤 일을 했다는 주어로 표현된 글귀가 발견되고는 있지만 이는 극히 적은 양이어서 이는 무시해도 좋을 정도이다. 그리고 그는 될 수 있는 대로 사사로운 사적인 이야기는 서술할 것이 못된다고 하였다. 따라서 난중잡록에는 국가적 내지는 공적인 사건만이 연월일에 따라 기록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난중잡록에는 모든 기사가 연월일을 갖추어 쓴 것은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년과 월 다음에 날짜가 없이 서술된 기록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년의 기록 안에 어느 달인지도 모르는 기사가 서술된 경우도 있다.
또한 하나의 사건에 대한 기술이 처음 일어난 시간과 멀리 떨어진 후일의 관련 기록까지를 함께 남기기도 했다. 예컨대 1592년 7월의 고경명의 사망기사에 후일 세운 그의 신도비까지 언급하고 있는 것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사건이 일어난 당시의 기록을 그 때 그때 기록해 놓은 자료와 이와 연결되는 이야기가 간간이 들어가 있지만 이는 개인의 일기라고는 할 수 없다. 국가사에 대한 기록만을 날자 순으로 기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난중잡록이 찬자의 서문에서 ‘일록’이라고 한 것처럼 정확한 날짜로 적은 기사가 「난중잡록의 기본 틀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임진년 4월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4월 중 기사는 일본군이 상륙하기 전에 평수길이 36명의 장수를 동원하여 침락한 개략을 13일 전에 날짜의 기록이 없이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13일 새벽에 부산진에 상륙하여 첨사 정발이 순직한 기사를 싣고 이어서 말일 30일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매일의 날자 아래에 사건을 기술하고 있다. 같은 날짜에서도 내용이 서로 다른 개별기사에는 0표를 하여 구별해 썼다. 이후의 모든 기술이 이처럼 철저하게 날짜까지를 밝혀 서술한 것은 아니다. 그런 기사 중 그 기사의 날짜에 대한 신뢰성을 완전히 보장하기 어려운 것도 있지만 대체로 날짜를 기록한 사건은 사실과 어긋나지 않는다고 판단된다.
이 처럼 날짜별 기록에 뒤에 추가 해 넣은 기사가 많이 있다. 예컨대 4월 13일 기사에 만력 31년(1603) 정발의 처 임씨의 소장(訴狀)에 의해 그 진상을 재조사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경상감사 김수의 보고를 보고 13일 새벽에 부산진이 함락했다는 소식은 당시에 기록한 것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후일(1603) 정발의 처가 상소하여 순찰사 이시발이 재조사하여 보고했다는 기록은 뒤에 추록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15일자의 기사 경상감사 “김수가 진주로부터 반성에 달려와 부산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곧 바로 급히 보고하고 군사를 정돈하여 함안으로 달려갔다가 칠원에 도착했다”는 기사는 본도순영록(本道巡營錄)에서 나온 것이라는 세주를 붙이고 있고 이 기사는 당시에 쓴 일록으로서의 첫 번 기사라고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다. 임금의 교서라던지 의병장의 격문은 보는 즉시 그때 그때 일록으로 기록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후일 강항(姜沆 1567-1618)의 보고서를 여러 곳에 분산해 실어 일본의 지리, 형세 등을 파악할 수 있게 추보하였고, 또한 정유재란시의 자신의 피난생활과 왜적의 격살 등의 기록도 넣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잡록”이라는 책이름을 붙였다. 이는 겸양의 뜻도 담긴 것이지만 왜란 중의 모든 역사를 다 기록하지 못하는 상황 하에서는 가장 적절한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구체적인 날짜 다음에 적은 모든 기사를 그 날짜의 사건이라고 해석되지만 모든 기록의 날짜에 대한 신뢰성은 담보하기 어렵다. 그것은 후일 추보하면서 끼워 넣은 기사가 많기 때문이다. 이는 사관이 매일 매일 기록한 역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난중잡록은 중요한 지역사건에는 날짜를 기록하고 있지만 책의 뒷부분으로 가면서 날짜의 기록이 부실해지고 있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난중잡록 권8 속잡록 4의 무인년(인조 16년 1638) 마지막 기사에 붙인 세주에서 조경남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오랑캐 나라의 일을 전해들은 대로 기록한 것이므로 그것을 모두 다 사실로 볼 수는 없으니 보는 이는 잘 참작할 것이다.
우리는 속잡록의 편찬할 때에 그 사료를 어떻게 확보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이는 앞으로 조경남의 난중일기를 연구할 때에 반드시 천착해야할 문제이다.
3.2 난중잡록의 판본
현재 난중잡록은 인쇄본과 필사본 두 종류가 있다. 우선 인쇄본으로는 1964년 조경남의 후손 조태희 씨가 간행한 석판본 4책과 1907년 조선고서간행회에서 대동야승에 실린 본을 연활자로 인쇄한 본, 이를 다시 영인한 민족문화추진회의 국역대동야승본, 석판본을 영인한 민족문화추진회의 한국고전총서본 3의 난중잡록, 그리고 임진왜란사 부문만의 자료를 석판본 자료에서 다시 영인한 국립진주박물관에서 임진왜란사료총서 역사 7-8책이 있다. 고서간행회에서 인쇄한 대동야승본은 조선총독부에 소장했던 자료를 인쇄한 것이고, 규장각에는 또 다른 필사본의 대동야승이 전하고 있다.
고서간행회본 대동야승은 1968년에 경희출판사에 의하여 영인되어 널리 보급되었는 바 이 본에는 난중잡록 첫 권이 실리지 않았고 서문도 전혀 실리지 않고 오직 조경남 찬으로 인쇄되었을 뿐이다. 7권까지를 난중잡록으로 그리고 마지막 한권을 속잡록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부록으로 「역대요람」이 인쇄되어 있다. 이 「역대요람」은 조경남이 만든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명태조로 등극으로부터 만력 이전인 융경 2년(1568)까지의 중요 사건을 연별로 서술한 것이다.
1964년에 출간된 석판본에서 기정진(奇正鎭1798-1876)이 1856년(崇禎기원후 4丙辰)에 쓴 서문과 최시옹(崔是翁)(1646-1730)의 서문(1726년의 서문 ), 조경남의 자서(自敍)(1618 광해군 10)의 서문이 이 순서로 붙여졌다.
이 서문의 순서는 시대순을 거꾸로 실었다. 자찬 서문이 제일 중요한 것이고, 최시옹의 서문이 시기적으로도 빠를 뿐만 아니라 그 내용이 상세하다. 즉 이 서문은 최시옹 자신이 81세이어서 글을 쓸 수 없음으로 후손이 써 온 공의 행장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약간의 전문한 바를 추가하였다고 하면서 책명을 산서잡록 山西雜錄 8책이라고 하였다. 이 서문에서는 찬자가 충효에 뛰어난 사람으로 국왕이 자신의 죄로 돌린 교서를 읽고는 눈물을 흘렸으며, 충무공의 전사와 삼학사의 순절을 비탄해 하고 국가에 공을 세운 사람을 포창하고 전쟁에서 살기 위해 도망을 친 사람을 징계하는 책을 썼다고 총평하고 있다.
기정진의 서문에서는 이 책이 당쟁의 피해를 극론했다고 하였으나 이는 정곡을 찌른 견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당쟁에 대한 견해가 있지만 19세기 중엽 당쟁의 말폐가 극심했던 상황이 반영된 것이 아닌가 한다. 기정진의 서문을 제일 앞에 내세운 것은 후손들이 보기에 학계에서 기정진의 위치가 높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석판본의 맨 뒤에는 1866년에 써진 한익철(韓翊徹)이 쓴 ‘증판서 산서조선생유사후(贈判書 山西趙先生遺事後)’ 라는 글에서 이책을 “동국춘추”라고 평하고 있으며, 단기 4297년 서기 1964년 갑진에 써진 11대 사손(嗣孫) 조태희(趙台熙) ‘간행사’가 실려 있다. 이 간행사에서는 선고인 심산공(沁山公)이 상해 임정에서 활약할 때에 발간하려다가 재력이 없어 이루지 못한 뜻을 이룩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난중잡록은 후손가에 전하는 원본을 대본으로 하였으나 내외 규모와 잘 보이지 않는 구절은 규장각 소장 총 687판(板)( 1374면)에 따랐다고 한다.
필사본에는 후손이 간직하고 있다는 8책의 원본과 규장각에 원본을 베낀 16책본과 국립중앙도서관에 필사본 1책의 세 종류가 전하고 있다. 조병희 씨가 문화재로 지정하기 위한 전래경위에 대한 상세한 보고서가 있다. 후손에 의하여 정리된 원본의 전래 경위의 중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원본은 인조 시 선조수정실록이 편찬될 때에 중앙에 바쳐졌고, 선조수정실록을 편찬할 때에 표시한 부호가 남겨져 있다. 그리고 이 원본은 효종 9년에 후손에게 반환되었고, 이 때에 국가에서 필사본으로 한 벌 베껴놓은 본이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전하는 본이다. 그리고 1710년 종가의 화재로 중요 저술이 불에 탔으나 최시옹에게 빌려주었던 난중일기만은 온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필사본 중 원본이라고 전해지고 있는 후손의 전래 본은 현재 남원향토박물관에 기탁되어 있다. 필자 등이 원본 조사에서의 중요 관심은 후손들이 전하는 원본의 전래 경위 중에 이 원본을 선조수정실록을 편찬하면서 인용한 부분에 표시가 되어 있다는 것과 한 부를 필사해 놓은 본이 규장각 소장본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이 원본은 8책으로 장정되어 있다. 장정은 최근에 한 것임이 분명하며, 원래의 장정을 개장한 것으로 이해된다. 표지에는 8책 모두 ‘난중잡록’으로 써 졌다. 첫 1책에는 앞 부분 몇 장은 후일 보충된 것이다. 이에는 19세기에 써진 노사 기정진의 서문과 찬자의 서문이 부쳐져 있고, 응당 부쳐져야할 최시옹의 서문은 빠져 있다.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이는 석판본을 출간할 때에 최시옹의 문집에서 서문을 찾아낸 것이고, 이 원본의 장정은 이보다 앞서 된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
이 원본에도 석판본과 같은 두주가 부쳐져 있는 바 이는 글씨의 색갈로 보아 원본 필사 후에 써진 것으로 판단된다. 원본의 지질은 4책까지는 같은 지질로서 이는 16세기말 17세기 초의 종이인 것 같으며, 이는 1610년에 완성된 난중잡록이고 이후 5책부터 8책까지는 속잡록으로 알려지고 있는 부분이다. 제 5책은 목판으로 상단과 하단에 5cm의 검은 색의 판심을 만들고 14행의 줄을 그은 인쇄된 종이였으며 지질도 후대의 것으로 생각된다. 제5책의 판심에 상하 쌍엽의 화문(花紋)을 가운데를 향해 조각하였고, 판심 중간에 잡록이라고 인쇄된 종이에 썼다. 원본의 제5책에는 세로 줄에는 흰 물감으로 선을 지운 표시가 완연히 남아 있어 언뜻 보기에는 줄을 흰색 물감으로 그린 것 같은 착각을 줄 정도이다. 5책 이하의 8책까지의 지질은 앞의 4책까지의 지질보다 후대의 것으로 확인되었다. 제 8책의 한 장에는 산서잡록 山西雜錄이라는 판심을 붓으로 써 넣은 것도 있다. 제 7책과 8책의 판심은 상하에 단선의 검은 색이 찍힌 판심이 새겨져 있으나 이는 훨씬 후대의 양식인 듯하다.
원본의 서체는 원 편찬자인 조 경남의 글씨를 확증할 기본적인 유품이 없기 때문에 편찬자의 친필본 여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전체의 글씨는 세 사람의 서체로 써졌음을 확인했다. 1책의 서체는 제 1책, 제 3책, 제 4책, 제 5책, 6책이 동일 필체이고 제2책이 다른 필체이며 제 7-8책이 또 다른 제3의 서체로 판단되었다.
원본에는 기사가 바뀔 때마다 직경 6mm 내외의 원을 그리고 썼으며 그 원 안에 점을 찍은 것이 1책과 2책이 있는데 이를 두고 실록에 반영하기 위한 표시로 이해한 듯 한다. 또한 제 2책 중에는 인명의 옆에 선을 그은 것도 있는데 이를 포함하여 실록편찬 시에 넣은 부호로 인식하였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선조수정실록에 난중잡록이 어떻게 반영되었는가에 대하여는 뒤에서 다시 검토하겠다. 요컨대 이 원본 8책이 모두 선조수정실록 편찬 시에 실록청에 바쳐졌다가 효종 8년(1657)에 반환된 본이라고 볼 수가 없다. 이는 6,7,8책의 지질이 훨씬 후대의 종이였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이 원본은 후대의 필사본이라고 생각된다.
필사본 중 서울대학교 규장각 본은 16책으로 되어 있다. 이에는 조선총독부의 소장인과 서울대학교의 도서인이 직혀 있을 뿐이다. 이는 사고에 저장된 사고본도 아니고, 어느 관청에 보관되었다는 확증이 없다. 목판으로 찍은 한지에 1면 10행으로 되어 있다. 이는 서지학자의 견해로는 조선 후기의 19세기의 서지 양식이라고 한다. 9책까지가 광해군 2년까지의 기사이고 이후 10책부터 16책까지 7책은 속잡록으로 되어 있다. 글씨는 정갈하게 써졌고, 4명 이상이 쓴 필체로 생각된다. 이 필사본이 언제 베껴졌는지에 대한 판정은 내릴 수 없다. 아마도 후손들이 그의 증직을 요청할 때에 제출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후술하는 바와 같이 영조 22-23년에 20년에 불에 탄 승정원일기를 개수할 때에 이용된 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기 때문이다. 이 규장각 소장 필사본에는 서문이 전혀 실려 있지 않고 있다.
필사본 중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은 1책만이 전하고 있는 영본(零本)으로 소장인은 목전거(睦田拒)라는 도장과 숭원(崇園)이라는 소장자의 도장이 찍혀 있다. 이는 아마도 후손들이 베낀 본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본문 위에 두주를 붙이고 있는 점이 원본 및 석판본과 일치하고 있고 임오년 첫 기사 뒤에 붙인 “山西翁 年十有三矣”라고 하여 다른 필사본에 ‘나’라는 ‘余’자가 산서옹으로 써 있기 때문이다. ‘나’라는 표현을 ‘산서옹’으로 쓴 것으로 보아 찬자의 아들이나 손자 등 가까운 자손이 쓴 것이 아닐까 추정한다. 그런데 이 본의 연대표기는 간지 아래에 만력의 연대와 조선 국왕의 연대를 함께 기록하고 있는 바 선조(宣祖)라는 연대 표기에서 ‘선종(宣宗)’으로 기록되어 있다. 석판본에서는 이를 ‘선조’로 고쳐 쓰고 있다. 선조의 최초의 묘호(廟號)는 처음 선종(宣宗)으로 올려졌으니 현재 영인본인 원문의 실록은 겉 표지에는 선조실록이라 했지만 그 안의 원 자료에는 선종실록 宣宗實錄이라고 인쇄되어 있다. 선종(宣宗)의 묘호가 선조로 바뀐 것은 광해군 8년(1616) 8월 4일이기 때문에 묘호를 선종으로 쓴 것은 아마 찬자가 원집 4책을 마칠 때 쯤 기록한 것이 아닐가 한다. 그렇다면 이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은 최초의 원본의 형태를 가장 많이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이 책의 필사는 최초의 원본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이 필사본에는 찬자의 서문인 산서잡록서(山西雜錄序)만을 붙이고 있다. 찬자 자신의 서문 말미에 「萬曆戊午秋 旣望 南漢後學趙慶南敍」라고 되어 가장 원형의 서문을 보여주고 있다. ‘南漢後學’은 석판본 난중잡록에서는 ‘漢陽人’으로 개서되었다. 본관을 한양으로 칭한 것은 1720년대에 최시옹에게 서문을 부탁한 글에서 최초로 나타난다. 이는 조경남의 손자인 신(愼 1648-1722), 이거나 증손자 종침(宗琛) 대가 아닐까 한다.
그리고 표제는 일기(日記) 임진록(壬辰錄)으로 쓰고 있다. 이 필사본은 표제의 연대에서 선조를 선종으로 표기한 점이나 서문에서 찬자의 글 원형을 보여주고 있는 점에서 최초의 본이거나 아니면 이를 그대로 베낀 본으로서 귀중한 가치를 가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필사본은 권1의 한 책만이 전하고 있을 뿐이다.
3.3 난중잡록의 체재와 이용된 사료
난중잡록의 각 권에서 다룬 시기는 다음과 같다.
권1 임오년(선조 15년 1582)부터--- 임진년( 선조 25년 1592) 7월까지
권2 임진년 8월부터--- 계사년(선조 26년 1593) 6월까지
권3 계사년 7월부터---무술년(선조 31년 1598) 12월까지
권4 기해년(선조 32년 1599) 1월부터 ---경술년(광해 2년 1610) 가을까지
속잡록
권 1 신해년(광해 3년 1611)부터--- 신유년(광해 14년 1621)까지
권2 임술년(광해 15년 1622)부터--- 무진년 상 (인조 6년 1628 11월까지
권3 무진년 하 (인조 6년 12월부터---을해년((인조 13년 1635)까지
권4 병자년(인조 14년 1636)부터--- 무인년(인조 16년 1638)까지
56년간의 역사를 다룬 난중잡록은 크게 구분하여 왜란사와 호란사로 나눌 수 있다. 본집(本集) 4책은 왜란에 대한 기술이고, 속잡록 4책은 호란에 대한 기술이다. 이에는 연월일에 따른 편년체로 쓰면서 당시 보고 들은 것 그리고 기록을 얻은 것 등을 그때그때 기록하였고, 후일 중요한 자료가 얻어지면 당해 연대에 보충해 놓았다. 이 점에서 이는 자료집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또한 역사서라고도 할 수 있다. 대체로 권수는 원고의 양에 따라 나눈 것으로 생각한다. 이는 속잡록 권 3의 경우가 말해준다.
서술 양식은 편년체이나 연월일을 갖추어 쓴 기사도 많지만 단지 어느 해 몇 월등 연월일을 갖추지 못하고 쓴 기사도 상당 수 있다. 이는 사료의 수집에 따라 생긴 결과이다. 그리고 몇 년 후의 기사까지 함께 기술하고 있다.
예컨대 고경명의 전사한 날자의 기록 뒤에 신도비를 기록한다거나 1593년 6월 29일 진주성의 함락 기사에 체찰사 이항복이 후일에 쓴 진주성 함락에 대한 조사보고서를 쓰고 있다. 이는 엄밀한 의미에서 편년체의 서술에 기전체나 기사본말체의 성격을 가미한 것으로 이해된다. 물론 저자 조경남이 이런 주장을 펴지도 않았고, 또 그런 의식을 가지고 쓴 것도 아니다. 이는 관련 자료를 다른 곳에 서술함보다는 이런 방식이 편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편년체의 ‘일록(日錄)’ 자료에 추후의 자료가 보충된 역사서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서술은 자료의 인용기사와 자신의 견해를 구분해 쓰는 전통적 방식을 취했다. 대체로 자신의 견해나 사실의 설명 등에는 본문 글씨보다 두 줄로 쓴 작은 글씨의 세주(細註)를 붙였다. 그의 역사평가도 ‘사론(史論)이라던가 근안(謹按)이라는 형식으로 구분해 쓰지 않고 단지 세주로 쓰고 있다.
본문의 기사는 그가 임진년으로부터 남원부의 서기(書記) 직으로 있었기 때문에 남원부사에게 제공되는 각종 문서를 이용하여 쓸 수 있었다. 이는 임진년으로부터 속잡록의 권4까지 거의 같은 성격의 사료 내용으로 보아 그 때까지 남원부에 서기직으로 종사하였다고 생각된다. 그가 서기직을 그만둔 때는 자료상 확정적인 기록이 보이지 않지만 진사시험에 합격한 무렵 전후로 생각되나 비록 그 직에 종사하지 않았어도 관계 자료를 이용할 수 있는 관계가 유지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가 난중잡록에 이용한 자료에는 문서기록자료와 문헌기록자료, 직접 체험한 사람의 이야기, 소문 그리고 그가 본 사실 등이었다. 특히 대부분의 기록은 자료에 의거하고 있는데 인용된 책은 기사 뒤에 인용전거를 어느 책에서 나왔다라고 세주로 붙이고 있다. 예컨대 경상도순영록에서 나온 것은 ‘出慶尙道巡營錄’’이란 형식으로 전거를 밝히고 있다. 난중잡록과 속잡록에 인용된 책과 인용된 많은 문서 등의 명칭은 다음과 같다.
경상도순영록(慶尙道巡營錄), 고사(攷事), 정기록(正氣錄, 조보(朝報), 서정록(西征錄, 남한일기 南漢日記, 강홍립(姜弘立 1560-1627)의 호중일기(胡中日記, 강항(姜沆1567-1618)의 일본 기록, 윤계선(尹繼先 1577-1604)의 달천몽유록(撻川夢遊錄), 비망기(備忘記), 정원일기 등이고 인용된 형태별 문서로는 교서(敎書), 의병 및 군량을 모으는 격문(檄文), 고목(告目), 통문(通文), 회문(回文), 관문(關文), 명 황제의 칙유조서(勅諭詔書), 상소문, 장계(狀啓) 등이다.
이 자료 중 임진왜란의 서술에 무게를 실어 주는 자료로 경상도순영록을 들 수 있다. 이 책은 현전하지 않으며, 그 내용은 주로 경상도 순찰사가 남원부사에게 보낸 임진년 및 계사년의 경상도 지역의 임란 전투상황이다. 초기의 순영록은 경상감사 김수가 남원부사에 보낸 기록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순찰사(감사) 김수는 임진년(1592) 5월 6일경에 임지에서 도망 쳐 근왕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호남으로 가려다가 운봉(현재의 남원시)에서 초유사 김성일(1538-1593)을 만나 관리가 임지를 떠나서는 안 된다고 충고함에 임지로 돌아갔으나 지방민의 심한 질타를 받고 있었으며 의병장 곽재우(1552-1617)는 이를 성토하는 격문을 보낸 바 있음으로 감사의 일을 난 중 성실하게 수행하지 못한 인물이다.
비록 감사 김수가 이처럼 현지에서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으나 지방행정을 책임지고 있는 감영의 서리[營吏]들은 전쟁 상황을 전라감사에게 통보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는 4월 28일자 경상도 영리(營吏) 이모가 전라감사에게 보낸 고목(告目) 기사라든지 감사 김수가 도망을 쳤다는 기록 등은 영리의 기록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경상도 감사가 영리를 철저히 감독할 수 있었던 것은 김수가 김성일로 바뀐 1592년 8월부터라고 생각된다. 김성일의 관계 기록이 상당히 많이 난중잡록에 수록된 것은 이런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경상우도 중 거창 창령, 단성 등의 7-8개 군현은 임진년에도 치안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는 곽재우, 정인홍, 김면 등의 의병활동에도 큰 힘을 받았으나, 김성일이 초유사로서, 우도 병사, 우도 감사로서 전력을 마쳐 현지 지방관을 임명하고 수습하였으며, 영남과 호남의 전쟁 상황을 서로 주고 받음에 혼신의 노력을 다한 그의 공로에도 기인한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진주 판관 김시민을 목사로 임용하여 진주성을 지키도록 하고 후원군을 동원한 것이 바로 김성일이었다. 그리고 남원은 임진전쟁기 중에 경상도를 가는 중간 통로 지점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남원부사에게는 전쟁의 제반 상황을 상세히 알려주었다고 할 수 있으며, 김성일이 거느린 영리로부터 상세한 전황의 문서를 남원부의 서기직을 맡고 있던 조경남은 받아서 난중잡록에 기술하였다.
경상순영록이 최초로 나오는 기사는 임진년 4월 15일자의 기사이다. 그 내용은 경상감사 “김수는 진주로부터 달려 반성까지 갔는데 그 곳에서 부산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곧 장계를 갖추어 급히 보내고 군대를 정비하여 가지고 함안을 거쳐 칠원에 이르렀다”라는 경상순찰사의 동정을 전하는 기사에 본도 순영록에서 나왔다고 주를 달고 있다. 본도순영록은 慶尙巡營錄으로 나오고 있어 이를 경상순영록이라 칭하겠다. 그 자료의 이름이 최후로 인용된 기사는 1593년(계사) 8월 22일 기사까지이다. 김성일이 1593년 5월에 죽은 후에도 몇 개월간 이런 기록을 보내 준 것은 그 이후 경상도 아전들이 하던 관행이 지속되었음을 뜻한다. 경상순영록의 자료는 임진왜란 전반기의 기사를 일록체로 쓸 수 있었던 중요 문서였다. 임진년 4월28일자 경상도 영리(營吏)가 전라도 감사에게 보낸 왜군의 적정 상황에 대한 보고인 고목(告目)도 경상순영록 자료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이는 특별히 문서명을 인용하여 적었기 때문이지 그 내용으로 보아 경상순영록 자료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경상순영록은 다른 자료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 책이름이다. 감영자료로 현재 남아 전하는 서유구(徐有榘 1764-1845)의 완영등록 完營謄錄이 알려지고 있다. 이는 감사가 수령에게 명령을 내리고 보고를 받은 자료를 감사가 직접 기록해둔 사례이다. 경상순영록은 인용된 자료만을 보아서는 감영(순영)에 보고된 내용과 순영에서 파악하고 있는 도정 일체가 기록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이 자료는 감영의 문서를 정리한 것으로 생각되지만 당대의 자료여서 조경남이 이용한 자료가 원래 책으로 묶여졌던 것인지, 아니면 남원부에서 경상도순영에서 보내온 문서를 묶어두고 이를 남원부에서 붙인 이름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후자의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된다. 왜냐하면 임란초기의 자료로부터 후기까지 경상도 감영에서 이런 자료를 모아서 철해가지고 다른 사람이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다. 또한 경상도지역의 다른 자료에서는 이 자료가 한 번도 인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남원부에서 받은 문서를 철해 묶어 두었던 문서이거나 아니면 비록 철해진 문서 덩어리가 아니더라도 경상도 감영에서 오는 문서를 인용하면서 순영록으로 철해두었을 가능성도 상정할 수 있다. 이 자료는 남원부가 함락될 때에 함께 소실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난중잡록에 인용서목으로 들고 있는 자료 중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적으로 인용된 서적에 고사 攷史가 있다. 이는 명나라와 청나라, 유구국의 외교관계를 다룬 기사에 주로 인용된 자료이다. 고사촬요 (攷事撮要)는 조선조에 선비들이 생활에 필요한 기초상식을 적어 놓은 소형 핸드북이다. 이는 16세기 전반기에 어숙권이 편찬하여 1554년에 간행한 이후 여러 차례 다른 사람에 의해 보충된 책이다. 임진왜란 전의 간본은 그 내용 상 도저히 이용될 수 없고 임진왜란 이후 본일 것이다. 고사촬요는 만력 41년 계축(광해 5-1613년)에 훈련도감본으로 인쇄 반포된 본이 있고, 허봉(許葑 1551-1588)이 선조 18년에 속수하고 승문원 교검 박희현(朴希賢이 만력 40년까지 증수하였고, 인조14년의 이식의 속수본 3권.-상권을 두권으로 나누었다. 난중잡록에 인용된 고사(攷事)는 고사찰요 권2에 써 찐 「기년(紀年」에 나오는 자료일 것으로 추정한다.
정기록(正氣錄)은 고경명(高敬命 1533-1592)의 아들인 유후(由厚)가 편찬하고 그 아우 용후(用厚)가 증보하여 1599년에 목판으로 간행된 고경명의 격문자료가 수록된 책이다. 이 자료를 조경남이 이용하였음으로 1592년 기사는 후일 보충된 것임을 판단할 수 있다.
난중잡록에 인용자료인 「朝報」는 속잡록의 광해군 시기의 기사에 장계, 관직 임명, 자연변이 현상의 기록 등의 기사를 인용한 자료로 보이고 있다. 주로 속잡록에 보이고 있다. 또한 서정록(西征錄), 남한일기 (南漢日記), 강홍립(姜弘立 15601627)의 호중일기(胡中日記) 등은 호란을 다룬 속잡록에 인용된 자료이다.
난중잡록에서 임진왜란에 대한 기사로 인용된 자료에는 강항(姜沆 1567-1618)의 일본 기록, 윤계선(尹繼先 157701604)의 달천몽유록(撻川夢遊錄), 비망기 備忘記) 등이 있다. 강항은 영광 출신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 正字, 박사를 거쳐 형조좌랑으로 재직하다가 1597년 휴가로 고향인 영광에 내려와 있던 중 정유재란이 일어나 분호조참판 이광정의 종사관으로 군량의 수송을 담당하였다. 남원이 함락되자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나 영광이 함락되자 가족을 이끌고 해로로 탈출하다가 포로로 되어 일본 오쓰성(大津城)에 감금되었다. 이때에 出石寺의 중 요시히도(好仁)을 만나 일본의 역사. 지리 관제 등을 알아 적중견문록을 기록해 고국에 보냈고, 이는 1656년 제자들에 의해 간양록 (看羊錄) 1책으로 간행되었다. 난중잡록에서는 일본의 지리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는데 조경남이 1641년에 사망한 점으로 보거나 서명을 기록한 점으로 보아 간양록을 볼 수가 없었고, 이는 적중견문록의 기록을 참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어떤 경유로 이 자료를 입수해 보게 되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난중잡록에서 일본 지리에 대한 장황한 인용은 1600년(경자) 5월 기사에 보이고 있다. 조경남이 이를 서술한 목적은 일본에 대하여 우리가 꼭 알 필요가 있음을 절실하게 의식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윤계선의 달천몽유록은 1600년 5월 기사에 수록되어 있는데 이는 저자가 소설화한 글로써 국문학계에서 이미 연구된 작품이다. 그 요지는 저자가 암행어사로 충주로 나갔는데 임진왜란의 전승을 신립이 패배한 충주 달천에서 꿈을 꾸었다고 빗대서 쓴 소설이다. 임진왜란의 국내 유명장수들이 모여든 잔치인데 그 대장은 이순신이고 이하 명장들이 좌석을 갖추었는데 자기도 말석에 자리를 했으며 원균은 참석하려다가 수문장에게 쫒겨 나 참석하지 못하는 실랑이가 벌여졌다고 하였다. 조경남은 전쟁에서 죽은 원균의 공과를 경시하지만 당시 도망을 쳐 일신을 보존한 사람에 비하면 그 충절의 평가가 잘못된 것이라는 견해를 표하고 있어 윤계선의 평가에 이견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임진왜란 중 신립의 충주전투에서는 뒤에 상세히 인용했다고 하여 달천몽유록 기사를 암시하고 있는데 이는 앞의 부분을 후일 추가해 넣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비망기는 임금의 명령을 기록해서 승지에게 전하는 문서로 알려지고 있는데 어떻게 그가 비망기를 인용했는지 알 수 없다. 이 밖에도 그는 다른 많은 자료를 이용하였을 것이다.
인용서목을 통하여 난중잡록은 그가 편년체로 써서 일기와 같은 성격도 있지만 후일 추가 보완한 자료집이다. 그 서명에서 잡록이라고 한 의미는 이런 것을 의식하여 붙인 서명으로 생각된다.
난중잡록에 인용된 기록으로서 위에 든 것 이외에도 더 있을 것이다. 그 한 예로소 김성일의 해사록(海槎錄)을 들 수 있다. 김성일이 일본에 통신사부사로 가서 서장관 허성에게 준 글은 1590년의 해사록 5권에서 발췌한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난중잡록 중에는 남원 사람의 증언이 여러 곳에 보인다. 즉 진주성 2차 전투에서 남강에 빠졌다가 살아나온 두 사람의 이야기, 남원성 전투에서의 이야기, 호란 중 포로로 잡혀갔다 돌아온 사람의 이야기 등은 자료의 사실성을 높여주고 있다. 또한 왜란 중 가등청정과 심유경 사이의 담판의 이야기를 대화체로 쓴 것은 어디서 전문한 것인지 확인할수 없지만 상당히 자세한 대화 내용으로 보아 우리가 모르는 문헌 기록을 더 참고했을 것으로 이해된다.
3.4. 난중잡록의 자료적 성격
난중잡록의 본집 4권은 임진왜란사에 관한 기록이고 속잡록 4권은 만주족의 침입에 관한 서술이다. 이 중 임진왜란사를 다룬 내용은 저자가 직접 견문한 기록일 뿐만 아니라 이에 관한 중앙의 기록이 부실하기 때문에 자료상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속집의 호란사의 경우 상세한 중앙정부의 기록이 남아 있고 찬자가 역사의 현장에 있었던 것도 아니기 때문에 오늘 날 그 사료적 가치는 거의 없지만 조선조 당시에는 대단히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고 평할 수 있다.
저자가 일생동안 살았던 남원은 전라좌도와 경상우도의 접경지대에 있었던 도호부로서 군사적, 행정적 중요성이 대단히 큰 지역이었다.
특히 전라도는 임진왜란 중 정유재란까지는 직접적으로 일본군의 침략을 면한 지역이었지만 서울 수복을 위한 근왕병을 모집 파견하고 경상우도에 의병을 파견하여 왜군의 격퇴를 했던 지역이었다. 더구나 임란 시의 전라도는 식량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중앙정부에서 경상우도로 연결되는 통로에 위치했던 남원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즉 경상우도에 파견되는 관원도 모두 남원을 거쳐 갔고, 우도에서 중앙정부에 보내는 문서도 상당 부분 남원을 거쳐 가는 길을 택했다. 이는 명군도 마찬가지였다. 난중잡록은 남원을 중심으로 경상우도와 전라좌도 지역에서 벌여진 전투상황을 비교적 소상히 전하고 있다. 난중잡록의 자료적 성격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난중잡록은 의병사 자료만이 아니라 관군의 전투상황에 대한 두 측면의 전투상황에 대한 기록을 전하고 있다. 그 한 실례로 진주성 2차 전투와 남원성 전투에 대한 기록을 들 수 있다. 1차의 진주성 전투가 벌여진 1592년 10월 5일부터 10일까지의 김시민 목사에 의하여 방어된 전투상황을 가장 상세히 전하고 있음은 박성식 교수의 논문에서 이미 입증되고 있으며, 이는 관군의 전투상황을 기록한 것이다.
그리고 진주성 2차 전투인 1593년 6월 22일부터 6월 29일까지의 전투에 참여한 관군과 의병들의 동태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즉 진주성의 일본군 7만 명이 참여한 것이라든지, 호왈 30만 군대가 출동했다고 하는 당시의 풍문과 그 공격이 풍신수길의 명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고, 소서행장 측으로부터 가등청정이 공격할 것임으로 이 성을 비우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심유경을 통해 도원수였던 김명원에게 전달되었다는 소식, 그리고 2차전투에서는 후방 지원군의 공격을 완전히 차단하기 위해 1593년 19일에는 일본군이 단성(丹城), 삼가(三嘉), 곤양(昆陽), 사천(泗川) 등지에 대군을 파견해 지키고 있었다는 사실과 그 결과 1차 전투에서 후원세력으로 큰 도움을 주었던 고성의병장 崔堈 등이 참패를 당하고 고성으로 돌아갔다는 소식, 1593년 6월 21일 이후 27일 사이에 도원수 김명원이 전라순찰사 권율로 직임이 교체되었다는 사실 등 귀중한 사료를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 진주성 전투의 내용은 이항복이 조사한 내용을 중심으로 서술하였기 때문에 그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다. 난중잡록이 남원성 전투기록을 전하는 유일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일본군이 남원에 진입하는 과정을 일자별로 기록하고 있고, 성이 함락된 과정, 명장의 도망친 내용 등이 소상히 기록되었고, 이 기록은 남원부 읍지인 용성지에 그대로 인용되어 서술되고 있다.
둘째 난중잡록은 의병사 자료로서 중요한 점은 의병을 일으키는 격문을 소상히 기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의병의 조직, 군대수, 의병의 장표(章標)를 전라좌도의 경우 빼놓지 않고 기록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어 한국의병사 연구에 새로운 안목을 줄 수 있는 자료라는 점을 그 성격으로 들 수 있다. 그 예로 전라좌의병 관계는 뒤에 상술할 것임으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또한 의병이면서 관의 천거로 관군으로 활동한 김덕령장군의 자료를 상세히 전하고 있다. 정부에서는 전라도와 경상도의 의병을 혁파하여 모든 의병군을 김덕령으로 하여금 총지휘하게 하였으며 그에게는 가장 용맹스럽다는 군호가 주어진 장군이었다. 맨손으로 두 마리의 호랑이를 때려잡은 영웅이었고, 일본군대가 무서워하던 명장이었다. 용맹스런 장수의 진가는 적의 공격을 받을 때에 나타나는데 그는 움츠리고 수비하고 있는 왜군을 공격했지만 공을 세우지 못했다. 그는 1595년 이몽학의 난에 이름이 언급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연루되어 무고하게 고문형을 받다가 죽음을 당한 영웅이었다. 영웅을 홀대하고 이용할 줄 모르는 조선조 지배층은 그가 왕조의 반역아가 될 것이라는 의구심에서 그를 죽인 것이었고 그를 옹호해주는 인사가 없었다는 점은 그의 인간관계가 원만하지 않았던 결과가 아닌가 생각한다.
셋째 난중잡록은 전라도 의병이 경상우도의 방어에 활약한 모습을 소상히 전하고 있다. 전라의병들이 성주성 전투에 참여한 내용은 난중잡록에서 상세히 전하고 있다. 그리고 정철이 전라의병을 빼어 경성수복에 참여케 하려는 조처를 경상도 사림들이 건의하여 막아낸 상세한 내용을 전하고 있다.
넷째 난중잡록은 정유재란 때에 일본군이 民牌를 나누어주어 직접 통치하려한 모습을 전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군의 잔악성에 대한 구체적 서술 등 당시의 사회 상태를 상당히 사실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5. 난중잡록에 실린 그의 사론
전통적인 역사서에서 편찬자는 자료를 충실히 옮기는 작업을 중시하였음으로 그의 역사에 대한 생각이나 사상을 이해하려면 사론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앞에서도 이미 언급하였듯이 그는 사론을 표시하는 용어로 ‘우안(愚案)’이라든가, ‘논왈(論曰)’등으로 시작되는 표현을 써서 쓰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견해를 밝힌 글은 본문과는 달리 2행의 세주(細註)로 붙였다. 이 세주는 모두 사론이라 할 수 있다. 이에는 사료의 이해를 위해서 설명한 세주가 대단히 많다. 그리고 그가 평가를 내린 글도 찾을 수 있다. 그가 특별히 평가를 내린 사론이 아니더라도 본문에서 충실하게 기술한 것 자체가 사론적인 성격을 가진다는 것을 이해하여야 한다. 그가 특별한 사론을 붙인 것은 단지 문장으로 쓰기만 한 것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글을 쓰고 시를 지어 덧붙인 경우도 있다. 사론을 쓴 대상을 유형화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물론 시를 덧붙인 경우가 절실한 감정을 가진 사론이라고 할 수 있다.
제1유형: 임진란 중 인물의 행위에 대한 포폄한 것
제2유형: 외교문제에 대한 것
제3유형: 전쟁의 상황에 대한 것
제4유형: 기타 정쟁에 관한 것
제1유형에 관한 인물평은 그가 직임을 다한 관료와 장수를 높이 평가하고 위기에 도망을 친 장수나 전시에 잘못 처리한 행위를 비판하고 있다. 칭찬과 애도를 표한 인물로는 김성일(1538-1593), 동래부사 송상현(1551-1592), 문경현감 신길원(申吉元), 이원익(李元翼 1547-1634)과 전라감사 홍세공(洪世恭 1541-1598), 곽재우, 이순신이었고, 특히 이원익, 곽재우, 이순신의 경우에는 한 시를 뒤에 붙이어서 최상의 평가를 한 셈이다.
김성일은 “말이 성실하고 신용이 미더우며, 행실이 돈독하고 조심스러우면 미개인도 감동된다. 그의 바름은 임진년 초기에 그 충절을 보였다” 고 쓰고 있다. 동래성을 지키면서 부모에 대한 은혜보다 군신의 의리가 더 중하다는 말을 노비에게 써서 전하게 하고 죽었다는 기사에 부쳐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린 천고 역적들의 마음을 격동시킬만하다”고 쓰고 있고, 반군을 진압하고 홀로 관문을 지키다가 적에게 죽음을 당한 문경현감 신길원을 만고에 짝할 이 없는 충신이라고 평하고 있다.
특히 감사로서 탐관오리를 금한 평양감사를 지낸 이원익과 수령과 아전의 기강을 엄하게 잡았던 전라감사 홍세공이 파직되자 수령과 아전들의 횡렴이 다시 부활했다는 기사에 붙여 서도에서는 이원익이요, 남도에서는 홍세공이 천년동안 유지될 유풍을 남겼다고 오언시를 짓고 있다. 환조하는 이원익이 체찰사로서 각종 부역을 경감시켜 준 처사에 대하여 “이르는 곳마다 백성을 구하니 백성이 살아갈 길을 얻었다. 옛날 사직의 신하라 하더니 이 노인이 이에 가깝다” 라는 칭찬의 사론을 쓰고 있다. 이처럼 지방관으로서 행정의 기강을 잡아 백성 생활을 편안하게 다스린 감사(관찰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곽재우에 대해서도 두 편의 사론을 쓰고 시를 지었으며 이순신의 순절기사에는 시를 써서 슬프고 슬푼 마음을 있다. 전라도 의병장에 대해 사론을 부치고 있지 않아도 본 기사에 충실히 기록한 것이 칭찬한 사론 이상의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비판을 가한 인물로는 도망친 경상좌병사 이각(李珏) , 퇴각하는 아군을 무모하게 죽인 용궁현감 우복룡(禹伏龍1547-1613), 상주에서 척후병의 보고를 받고 민심을 소란시킨다고 척후병을 죽인 순변사 이일(李鎰) 등이고 원균에 대해서는 오히려 우호적인 사론을 쓰고 있다. “그는 패사했지만 불충불의한 사람과는 다르다. 후일 그를 폄하하는 자가 많은데 국가에서 선무1등 공신에 봉한 것은 잘 한 것이다. 만약 그의 불충하다고 논한다면 관망하거나 도망을 침 사람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라고 평했다. 그리고 왜병에 대해서는 가등청정의 잔인한 만행, 요시라의 간사한 간첩 행위을 막지 못함에 “나라에 사람이 없다”는 사론을 썼다
제2유형의 사론인 외교문제에 대한 것으로는 종계변무가 해결되어 선조에게 존호를 올렸다는 기사에 부친 사론, 왜군이 전쟁 전에 허실을 정탐한 것을 막지 못한 것을 논하고, 명나라에서 초기에 조선을 의심한 사건 등에 사론을 붙였다.
제 3유형의 전황에 대한 사론으로는 소수의 왜적을 막아내지 못한 임진년 황간 청산의 전투, 서울 함락 전의 혼란상, 왕이 굶주리고 개성을 떠난 기사, 일본군이 회유책으로 붙인 방에 대해, 환도의 기쁨, 국왕의 자기 죄로 돌리는 교서, 이호민의 영남 호남 사민에 보낸 교서, 일본인의 코베어 가기 등에 붙인 것 등을 들 수 있다. 이에서 왕이 개성에서 굶주리고 파천한 기사에 통분한다는 말을 연발하고 있다. 그리고 국왕이 자기의 죄로 돌린 교서를 인용하고 이를 읽고는 동물곤충도 감격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제4유형의 사론으로 기타 임란 전 서울 민심의 동요, 당쟁에 대한 사론 등을 들 수 있다. 그는 100여명이 모여 부른 둥둥곡이란 곳을 소개하면서 서울의 풍속을 논하면서 당파의 분열도 언급하고 있고, 그밖에도 2-3곳에서 당쟁에 대한 언급을 하고는 있지만 기정진의 서문에서 강조한 것처럼 당쟁 문제를 심각한 문제로 절실하게 강조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의 사론 중 가장 길고 또한 그의 사론적 성격을 가장 총체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는 사론을 소개하여 그의 국가의식과 역사의식을 살펴보겠다.
설명의 편의를 위해서 긴 인용문에 임의로 단락을 짓고 순번을 붙였다.
“(1) 아! 슬프다. 나라 일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임진년 난리에는 비록 관군이 무너졌으나 의병이 구름같이 일어나 혹은 북쪽으로 근왕하러 가고, 혹은 관방(요새)을 지켰음으로 중흥의 공도 또한 이에 힘입었다. 대개 인심이 분발하고, 사기가 강개하여 적을 죽이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고 생각하여 촌구석의 인사들까지도 맨주먹을 쥐고 칼날을 무릅쓰며, 목숨을 바쳐 국가를 보전한 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본도로만 말하여도 이와 같이 한 이가 얼마나 많았던가?
그런데 어찌하여 오늘에 와서는 적이 경내에 침범하기도 전에 먼저 도피할 꾀만 생각하고 의병을 모집한다는 말을 들으면 비방하고, 기롱하고, 징발하라는 격서를 보면 욕설을 퍼붓고, 성내기까지 하며 남의 일보듯이 하고, 백가지로 핑계만 대고 한사람도 선뜻 응하여 출두하는 자가 없으니 이것이 어찌 인심이 순하지 못해서이랴! 국운이 불행한 탓이다. 종묘사직이 바다 가운데의 섬에 부쳐져 있고, 팔도의 생령이 모두 어육(魚肉)이 되게 되었으니 아! 슬프다. 나라 일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2) 병옹이 비록 중풍이 들어 육신이 마비된 사람이지만 병무에 관한 일에 있어서는 익숙하게 연구했다. 우리 젊은이들이 항상 ‘오랑캐 군사가 강하고 말이 날래어 쇠잔한 군사와 약한 말로는 절대 쳐부수지 못한다’고 말하는데 어찌 이처럼 겁이 많은지 모르겠다.
(3) 군의 형세로 말하면 지금 들어온 오랑캐 군대가 비록 십만명이 넘는다고 해도, 임진왜란에 비하면 겨우 10분지 1일 밖에 되지 않으며, 무기로 말하면 오랑캐 군사는 돌격전을 벌려 마구 덤비는 데에만 능할 뿐이오, 예리한 검술을 활용함에는 도저히 왜놈만 못하고, 더구나 왜놈의 변사(變詐)와 흉계란 실로 추측할 수 없었지만 그 예리한 장검도 우리의 강하고 굳센 활과 화살을 못 당했고, 그 변사와 흉계도 우리의 임기응변 앞에는 소용이 없었다. 다만 인심이 해이하여 힘껏 싸우지 않았기 때문에 왜놈에게 패하고 오랑캐에게 패하게 되었다. ...
(4)군사로 말하면 우리나라 군사는 천하의 제일이다. 지금 오랑캐 군사가 왜병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이 이와 같은데 마음대로 승승장구하여 조금도 걸림이 없으니 사람들은 모두 어찌할 방법이 없다고 말하지만나는 그들의 세력이 특별해서 그렇다고는 믿지 않는다.
우리 태조대왕이 건주를 쳐서 함락시켰고, 윤, 어 두 장수가 횡행하니 여진은 무슨 군사로서 방어해야 할지를 몰랐으며, 옛날 당태종이 천하의 10만 대군을 동원하여 요동 전역을 평정하고 석권의 형세로 몰아치다가 안시성에 와서는 한 장수와 수천 군사에게 고욕을 당하여 중국 비단 1천 필을 상주고 물러갔다.
(5)지금으로 헤아려 보면 중국군사와 오랑캐 군사는 10에 1의 차이가 있고, 성지가 견고한 것도 전보다 10배가 더한 데 싸움이 반나절도 못되어 문득 함몰당하니 아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되는 것인가?
맹자의 ‘천시가 지리만 못하고 지리가 인화(人和)만 같지 못하다’ 했으니 이 때문에 병옹은 한 시골에 처해 있으면서도 항상 군사를 위해 통곡한다.
사론 중 (1)의 부분은 서론부이다. 나라가 이런 지경에 이르렀다는 말은 정묘년 여진족이 침입하여 왕은 강화도 피신하였고, 세자는 공주로 내려와 호서 호남의 군사를 모았다. 이에 남원부의 어느 인사가 통문을 발하여 의병을 일으킬 것을 의논하고 여러 날 모집하였는데 겨우 100여명이 되었으나 모두 유생 백도(白徒)로서 쓸모 없는 사람들이라 의병을 규합하여 근왕하기란 백 가지로 생각해도 가능하지 않다. 나라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시 가망이 없다고 쓴 기사 뒤에 쓴 사론이다. 임진왜란 시에는 많은 의병이 호응했는데 이번에는 서로 비방하고, 서로 피하는 현상이 나타날 정도로 인심의 해이했음을 통탄한 것이다.
(2)의 사론에서 병옹이라 함은 병든 늙은이라는 조경남 자신을 칭한 것이고 그가 중풍으로 행동으로 나설 수는 없지만 군사학에 대한 공부를 깊이 했음을 밝히고 앞으로 젊은이들이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을 시정해주려는 뜻이 담겨져 있다.
(3)의 부분에서는 여진의 군대가 10만이라고 해도 왜란시의 10분의 1이며, 돌격전을 장기로 하고 있다고 하나 이를 막아낼 방도가 있다. 이는 왜군의 장검, 변칙과 속임수와 잔꾀를 부리는 왜군을 우리는 물리쳤고, (4)에서 우리 군대는 천하의 제일 군대임을 역사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태조의 건주위 정벌, 고려 예종대 윤관(?-1111) 여진 정벌과 9성축조, 어유소(魚有沼 1434-1489)의 건주위 정벌 등과 당태종에 대항한 안시성주를 들고 있다.
(5)는 결론이다. 전쟁에서 승리를 이끌어냄에는 공격의 적절한 시기 선택, 기후 조건, 척후병의 운용 등의 천시(天時)도 중요하고 또한 지형지물을 이용한 전투로 지리(地理)를 이용함도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함께 생명을 바치려는 마음의 단결 이것이 인화(人和)라는 것이다. 인화는 해이한 인심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길이라고 보고 있다. 인화를 위해서 위정자는 백성을 위한 정치 즉 이원익과 홍세공과 같은 행정의 필요성 당파를 제거하여 합심하는 정치, 자기 소임을 다하여 생명을 바친 사람들에 대한 적절한 포상 등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 물론 당시의 정치에 대한 직접적 견해를 표출하지 않고 맹자의 말을 인용하여 함축된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그는 왜 인심이 해이해졌는가에 대한 구체적 언급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부터 호란에 이어지는 상황에서 국운의 쇠퇴라는 말로 얼버무리고 말았다. 이는 현실을 직시하는 그의 역사관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그런 역사의식은 자신의 공을 내세우지 않는 겸양으로 일관했으나 그의 뜻은 난중잡록이란 책을 통하여 왕과 국가의 유지라는 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일반 성리학자들처럼 임진왜란을 서술하면서 명나라 원군의 고마움을 지나치게 강조하지 않았음을 위의 사론에서 보여주고 있다. 그는 전쟁을 천시와 지리 그리고 인화로 보는 맹자의 총체적 관점을 가지고 전란사 극복을 보았다는 점, 그리고 긴 역사적 맥락에서 우리나라 군인의 성격을 파악하려는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역사의식은 이념적이라기보다는 현실주의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현실적인 사론은 그가 완승을 거둔 소규모 전투방식과도 상통한다고 생각한다.
6. 난중잡록이 후대 사서에 미친 영향
이런 난중잡록이 실제로 선조수정실록에 어떻게 반영되었고 후대의 역사서에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를 검토해보자. 선조수정실록 8권 중 6권(선조 30년(1597)까지는 택당 이식(李植)의 책임 하에 인조 24년까지 수찬한 것이고 이후 2권(선조 31-41)본 2책은 잠곡 김육의 책임 하에 의해 효종 8년(1657)에 완성되었다.
선조수정실록이 편찬할 때에 난중잡록이 춘추관에 받쳐졌음과 이 자료는 綱領조에 활용되었고, 또 효종 년에 편찬이 완료되고 본인의 집에 돌려주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미 연구성과로 밝혀진 바 있다. ‘趙가의 野史’가 선조수정실록 찬수의 강령조에 오른 것은 무엇 때문일까? 조가의 야사라 함은 그 찬자가 누구인지를 소상히 몰랐기 때문일까? 찬수의 강령조라 함은 중심이 되는 줄거리를 말한다. 조가의 야사 즉 난중잡록이 강령조에 오른 이유는 선조가 전라도 및 경상도 사민(士民)에게 내린 교서를 이 책을 통해서 얻을 수 있었던 때문이 아닐까 한다. 난중잡록에서 왕의 교서를 얻어 싣게 되었다면 그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강령조에 이용했다고 할 수 있다. 처음 범례를 만들 때에는 조가의 야사라고 찬자와 책명도 제대로 적지 않았는데 실록의 찬수가 끝난 다음 이를 원 소장자에게 돌려주는 공문을 실은 선조수정청의궤 자료는 다음과 같이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정유 (효종 8년 1657) 9월 13일
전남감사는 꼭 살필 일 실록을 수정할 때에 쓰임이 된 바 도내 남원에 사는 유학 조경남이 바친 난중잡록 4책 속잡록 4책을 되돌려 보내니 관문이 도착하는 즉시 조경남에게 환급한 후에 수령증을 보낼 일
위의 인용문 중 전남감사라 함은 전라도의 수부(首府)인 전주 남원의 칭호를 따서 만든 도의 명칭이고, 이 난중잡록과 속잡록 합 8책이 바쳐졌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고, 이 자료가 바쳐진 것은 언제인지 정확한 기록이 없으나 선조수정실록의 편찬이 시작된 인조 19년 전후일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속집 8책이 인조 16년까지를 다루고 있는 점에서도 인조 19년 이전으로 생각할 수 없다. 그런데 이 때는 조경남이 생존해 있을 때인데 돌려주는 주인을 남원에 사는 “유학(幼學) 조경남”으로 기록하고 있는 점이 이해가 안 된다. 조경남이 “진사(進士)”가 된 것이 인조 2년인데 자신이 진사가 된 후 유학으로 칭했을 리가 없고, 또 중앙 정부에서 그가 진사인 줄을 알면서도 “유학”으로 기록했을 리가 없다. “유학”과 “진사” 사이의 차이는 그렇게 혼동해 쓸 정도의 신분이 아니었다.
그럼 왜 진사인 조경남을 유학 조경남으로 기록했을까?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몇 가지 가정을 할 수 있다. 이는 난중잡록 찬자에 대한 인적 정보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아서 찬자의 서문만을 보았을 가능성이 있다. 즉 무오 추 “남한후학 조경남”이란 칭호를 보고 유학(幼學)이라고 칭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아니면 그가 제출할 때의 기록이 반환할 때에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던 중앙에서의 행정적 착오가 있었던 것인 지도 모르겠다.
원본에 표시된 부호가 선조수정실록을 편찬할 때에 참고한 표시의 부호가 남아 있다고 한 후손가의 말을 확인하기 위하여 구체적으로 살펴보았다. 즉 난중잡록의 기사가 시작할 첫 머리에 마치 붓 뚜껑을 찍은 것 같은 원점이 그려져 있는데 후손가에 전하는 원본에는 동그라미 안에 옆으로 줄을 그어 놓은 것(1유형)과 동그라미 안에 작은 동그라미를 진하게 그려 놓은 표시(2유형) 두 종류가 있다. 이를 인용함에는 면수가 적혀 있지 않음으로 국립진주박물관에서 석판본을 영인한 壬辰倭亂 史料叢書 7, 8책과 비교해 보았다.
1유형의 기사: 7책 223면 ‘敎慶尙道士民等書’ (임진년 8월)
7책 225면 初鄭澈自謫所 蒙恩 扈隨行朝..
7책 225면 以寧海府使 韓孝純爲討捕使 敎旨 ...
7책 240면 慶尙左監司金誠一自居昌移駐草溪
7책 240면 嶺右避難入山之人
7책 240면 ‘錦山留賊四百餘騎 到茂州留云’
7책 293면 ‘聖旨 差遊擊張奇功等 發銀糴買蒭糧 搬到義州 轉運沿路’
2유형 기사 7책 239면 慶尙右道士民 聞金誠一移拜左道方伯..(
7책 293면 ‘請湖南義兵文’ (임진 11월)
7책, 314면 ‘慶尙道 咸昌義兵召募官 前奉敎 鄭經世 檄告于左道列邑守宰及士 林諸君子....’ (임진12월)
7책 316면 ‘慶尙道 安東 前檢閱 金涌募兵通文’(임진년 12월)
7책 318면 ‘宋應昌李如松率大軍自天朝向我國...’(임진년 12월)
위의 난중잡록의 부호표시는 선조수정실록 편찬자가 표시한 내용이라고 딱부러지게 단정할만한 근거는 위의 기호표시 내용과 선조수정실록의 내용을 검토로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 표시가 다른 사람의 표시라고 해석할 만한 근거가 없어 현재는 단정 지어 말 할 수 없다. 단지 綱領이라는 ‘줄거리 기사“의 작성에 다른 기사와 대조해 보았을 가능성은 충분히 설정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 기사는 비록 난중잡록이 아니더라도 다른 자료를 통해서 실었을 가능성이 농후한 중요 기사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용적으로 난중잡록을 통해서 선조수정실록에 반영되었을 내용을 연역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정유년 8월 16일에 남원성이 함락되었다는 기사부터 살펴보자.
선조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왜적이 남원성(南原城)을 공격하여 함락하니 양 부총(楊副摠)이 가까스로 서문을 통하여 빠져 나와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본월 12일에 왜적이 남원을 포위하고 주야로 공격하니 부총의 병마는 화살도 떨어지고 힘도 다하였다. 16일 밤에 적이 남문으로 기어 오르자 부총은 사태가 다급하여 단지 병졸 3백여 명만을 이끌고 서문으로 빠져 나오다가 탄환 두 발을 맞았으며 겨우 10여 명만이 살아 돌아왔다.
이에는 12일부터 왜군이 포위하여 16일 밤에 성이 함락되었음과 단지 부총병 양원(楊元)등 10명이 살아남은 것으로 간략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반하여 선조수정실록에는 9월 1일자의 기사로 다음과 같이 비교적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朔己丑/賊陷南原, 總兵楊元走還, 總兵中軍 李新芳、千總 蔣表ㆍ毛承先、接伴使 鄭期遠、兵使李福男、防禦使 吳應井、助防將金敬老、別將申浩、府使任鉉、判官李德恢、求禮縣監 李元春等皆死之。 初, 賊將行長、義智等, 分道進兵, 圍城數重。 時, 楊元與李新芳在東門, 千總蔣表在南門, 毛承先在西門, 李福男在北門, 相持累日。 賊兵以薪草塡塹, 乘夜肉薄而登, 亂放飛丸, 城中大亂。 元與麾下數人潰圍而走, 堇以身免, 天兵及我師盡被砍殺。 新芳、表、承先、期遠、福男、應井、敬老、浩、鉉、德恢、元春俱死。 南原旣陷, 全州以北一時瓦解, 事不可爲矣。 後, 天朝誅楊元, 徇于我國。
이에서는 남원성의 함락에서 죽은 장수들의 이름을 보충하고 있으며, 양원을 부총병이란 서술을 총병이란 직함으로 수정하고 있다. 양원은 요동군사 3000명을 거느리고 남원에 도착한 것은 1597년 5월 13일이었고, 그의 직함은 총병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는 원래는 부총병이었는데 총병 馬貴가 제독으로 임해지면서 총병으로 칭해진듯 하다. 전쟁사의 기록인데 정확한 날자를 명시하지 않은 것은 선조수정실록 편찬의 공통적인 결함이며, 명나라에서 총책임자로서 자신만이 도망친 양원을 목을 베어 우리나라에 주리를 돌리었다는 새로운 사실을 추가하고 있다.
난중잡록에는 8월 16일 기사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十六日 兇賊陷南原 總兵中軍 李新芳 千總 張表, 毛承先 接伴使 鄭期遠 兵使 李福男 防禦使 吳應井 助防將 金敬老 別將 申浩 府使 任鉉 通判 李德恢 求禮縣監 李元春等 皆死. 楊元 以五十餘騎 出西門 潰圍而走 是日 賊酋等 催楊元出城 元亦知終難免陷 多有棄師之計 城中洶懼 哭聲如雷 賊兵肉薄城下 攻打益急 至二更闌入南門 (或云 由大母泉隅 登城 非是) 承暗亂斫 天兵及 我國將士 驅聚北門內 賊兵揮釰追殺 兩軍盡沒于北門內 城中前後死者 幾至五千餘名 賊盡焚城內外公私家舍(楊元 欲活伴臣期遠 乘箕一騎 與之偕行 期遠不閑馳馬 累次墜馬 不能從一行) 當初 馬貴分付諸將曰 脫有緩急 南原告全州 全州告公州 公州告京城 次次馳援 至時 陳愚衷在全州 不爲來援 又不告急 以致大軍覆沒
是夜 余謁梁兄曰 城已陷矣 人無生道 相與傷歎 梁兄曰 陷城之後 敵必大擧搜山 君須率奴僕 下山運糧 以備留山之資 余卽率十餘蒼頭 上門峴見之 是日 乃淸正兵 自咸陽踰入雲峰峙時也 荒山上下 賊鋒彌漫 夜下高村則 賊兵充斥 勢難越逕 乃空還 卽與梁李諸人 渡黃琉川 入隱身庵舊基(在香爐峰 北麓下) 結幕留住
위에 인용한 정유년 8월 16일자 난중잡록의 기사는 남원성 함락의 공적 기사만이 아니라 그의 일기적 성격을 겸하고 있음은 ‘是夜’ 이후의 기사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이 글에서 양형은 양덕해(梁德海)로 외갓집 형으로 짐작되며, 양이제이(梁李諸人)의 이씨는 백암(白嵓) 이공직(李公直)을 지칭한다. 난중잡록의 일기 기사에서 왜군이 산을 수색할 것을 대단히 걱정하고 있는 기사는 왜군이 성을 공격할 때에 인근의 정황을 살피기 위한 정찰을 이렇게 과장한 것으로 생각된다.
남원성 함락기사는 단순히 8월 16일자의 기록만을 보면 선조수정실록은 난중잡록 이외의 자료를 통해 서술한 것으로 보이지만 선조수정실록의 9월 1일자 기사는 모두 난중잡록에 나오는 기사이다. 즉 난중잡록에는 8월 13일에 행장(行長)과 의지(義智)등이 남원성 아래에 이르렀음을 서술하고 양원이 교룡산성 등을 파하고 남원성을 지키려 한 사실과 각 장수가 성의 어느 곳에 있었는가, 그리고 14일 15일의 전투상황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어 남원성의 함락 기사는 난중잡록의 기사에 의거하되 그 개략만을 합쳐 서술한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1592년 7월 8일에 왜적이 전주를 점령하기 위하여 침입함을 막아낸 이치와 웅치의 전투기록은 선조실록에는 그 정황이 거의 서술되지 않았는데 선조수정실록의 7월 1일자 기사에 상세히 실려 있다. 이는 권율이 문집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조경남의 난중잡록의 기록을 발취한 것으로 이해된다. 단지 웅치를 난중잡록에서는 熊峴전투라고 기술되어 김제 군수 정담, 나주 판관 이복남 김제 군수 정담(鄭湛)의 사수와 나주 판관 이복남를 굳센 전투를 강조하고 있다. 선조수정실록의 6월 1일자 기사는 웅현과 이현 전투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선조수정실록의 7월 1일자 웅치 이치 전투에 대한 기록은 다른 자료를 통해서 보완된 것으로 판단된다. 예컨대 이항복이 지은 권율의 신도비명 등을 이용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7월 8일자의 전투를 6월 달의 전투로 파악했을 까. 이는 왜적이 전라도와 충청도를 침범했다고 기사의 제목을 달았기 때문인 것으로 사료된다. 즉 충청도의 침입은 6월 중에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선조수정실록 선조 25년 8월 1일자 7번째 기사에 김천일이 막하였던 곽현(郭玄)과 양산숙 등을 보내 十生九死로 서해로 행조에 가서 표를 올리고 상이 남방소식을 친문한 다음에 二人에게 賞職을 주었다는 기사와 전라도 사민등에게 내린 선조의 교서와 경상도사민에게 내린 교서는 이 난중잡록을 통해서 실은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교서의 자료를 난중잡록을 통해서 선조수정실록에 기술했기 때문에 난중잡록은 강령의 자료로 인식되었다고 판단된다.
다음으로 김덕령 장군에 대한 기록은 선조실록에도 상세히 언급되었다. 그러나 선조수정실록에 서술된 김덕령에 대한 기술은 거의 난중잡록의 기술을 옮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난중잡록은 선조수정실록 편찬 시에 8책이 바쳐져서 실록의 강령기사를 서술함에 참고하였고, 그가 조경남이 죽은 후 효종 8년 9월 13일에 그의 집에 반환되었으며, 이 때 한 부가 필사되어 승정원일기를 개수한 영조 22-23년 경에 인조 8년 기사로 많이 인용되었고, 실제로 선조수정실록의 기사에도 많은 내용이 이에서 원용하여 서술한 것임을 확인하였다. 선조의 영남 및 호남사민에 내린 교서, 남원부의 함락기사, 이치와 웅치의 전투, 진주성 2차함락 기사, 김덕령의 기사 등은 난중잡록 자료가 이용되어 서술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선조수정실록 편찬자들이 임진왜란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남기려는 데에 목적이 있지 않고 의병장들의 활동의 기록에만 뜻이 있었음을 남원성 함락기사에서도 확인된다. 남원성에서 죽은 자가 5000명이 넘는다는 기록을 쓰지 않은 점으로 확인된다. 이런 실록편수자들의 사림 양반중심의 역사의식은 안방준의 호남의록에 실린 대부분의 의병장에 대한 졸기(卒記)를 서술하면서 조경남 자신의 전투사는 아예 전혀 싣지 않은 것을 이해 할 수 있다. 선조수정실록에는 조경남의 이름조차 오르지 않았다. 또한 선조수정실록에는 난중잡록이란 서명도 나오고 있지 않다. 더구나 난중잡록을 반환하는 이문(移文)에는 그를 유학(幼學)이라고 칭하여 혼란스러움을 보여주고 있다.
난중잡록은 승정원일기에 반영되어 있다. 영조 20년에 승정원일기가 불에 타서 인조로부터 숙종말년까지의 일기가 소실되었음으로 이를 개수하는 작업이 영조 22년(1746)부터 있었는데 이 개수한 승정원일기에 난중잡록이 인용되었다. 즉 난중잡록은 인조 8년조 기사에 27가지의 기사가 인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난중잡록으로부터 승정원일기에 당해 기사를 베껴 넣은 사람은 낭청 이정중(李廷重)이었고 이를 교정본 사람은 낭청 원계영(元啓英)임을 확인할 수 있다. 낭청 원계영과 이정중은 영조 23년에 승정원 가주서에 임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때 이용된 난중잡록이 선조수정실록을 편찬할 때에 필사해둔 본인지 아니면 다른 본을 참고하였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난중잡록은 남원읍지의 편찬할 때에 정유재란 시 남원성의 함락 기사를 서술함에 가장 중요한 자료원으로 이용되었으며, 의병장들의 업적을 후세 자손이 자료집을 만들 때에 이용되었다. 특히 권율의 유고집인 만취당유고에 중요 자료원으로 이용되었고, 학봉 김성일의 문집을 냄에도 인용 자료로 이용되고 있으며, 전라좌도의병장 임계영의 문집인 삼도실기(三島實記에 중요 자료원으로 이용되었다.
난중잡록은 영조 대 누군가에 의해서 편찬된 대동야승(大東野乘)에 전문이 실림으로써 당시의 중앙의 지식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자료가 되었다. 대동야승 권 26으로부터 권34까지 9권으로 실려 있다. 대동야승에는 조경남 찬 난중잡록으로 소개되었으나 제 1권이 탈락되어 있어 임진년 7월부터 실려 있다. 그리고 약간의 체재가 원본체제와 다르다. 즉 본집 4권에 속잡록 2권(광해3년부터 인조 6년 11월까지)가 본집으로 수록되고 있고 속잡록으로 되어야할 인조 9년부터 인조 13년까지가 난중잡록으로 실리는 등 두찬을 일으키고 있는 점이다. 그리고 대동야승 권 32 마지막에는 역대요람」이라는 자료를 싣고 있다.
그리고 조선 후기 조선시대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정리한 실학자의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의 연려실기술에 난중잡록이 여러 차례 인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의병장으로서의 조경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南原儒士 趙慶男避兵于地異山波根寺 慷慨起義 於是 賤人朴彦良等從之 多殺零賊 以求避兵之人 九月 二十二日 斬賊三十六級, 十二月 初七日 一百二十三級于山陰 所領之兵 無有損傷 亦不衒功獻馘 又嘗著亂中雜錄 頗詳 亦多發憤之義” 日月錄
즉 일월록에 의거하여 그의 전공을 소개하고 있으며 공을 자랑하지 않은 미덕을 크게 칭찬하고 있다. 일월록의 찬자는 누구인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1차 사료를 인용하여 연월일 순으로 정리한 자료집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남원 유림들의 청에 의하여 순조대에 증직됨으로서 임란시의 전공이 포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는 정유재란 때에 남원지방을 지킨 장군으로 인식되어 널리 소개되고 있다.
7. 전라좌의병의 조직과 활약
난중잡록은 전라좌우도의 의병에 대한 상세한 초기 기록을 남기고 있는 유일한 자료이다. 전라좌우도란 태종대에 성립되어 군사상의 행정명칭으로 경국대전 兵典에 나오고 있는 칭호이다. 이는 서울에서 내려갈 때에 전주를 중심으로 좌측에 있는 지방을 좌도, 우측에 있는 지방을 우도라고 칭한다. 이는 경상도에는 세 개의 병영과 수영이 있었고 전라도에는 두 개의 병영과 세 개의 수영이 두어졌는데 하나는 관찰사가 겸해가지고 있고 두개는 그 명칭을 좌도수영, 좌도 병영, 우도 수영 우도 병영 등으로 칭해졌다.
전라좌도에 속하는 부,목. 군현은 남원, 담양, 순창, 용담(龍潭 현재 진안군 용담면), 창평(昌平 현재 담양군 창평면), 임실, 장수, 곡성 옥과(玉果 현재 곡성군 옥과면), 운봉(雲峰 현재 남원시 운봉면), 진안, 무주, 광주, 장흥, 남평(현재 나주시 남평면), 순천, 낙안(樂安 현재 순천시 낙안면), 보성, 능주(綾州 현재 화순군 능주면), 광양, 구례, 흥양(興陽 현재 여수시), 동복(同福 현재 전남 화순군 동복면) 화순이었다. 전라우도에 속하는 고을은 전주, 익산, 김제, 고부(古阜 현재 정읍시 고부면), 금산(錦山 현재 충남 금산군), 진산(珍山 현재의 충남 금산군 진산면), 여산(礪山 현재의 익산시 여산면), 만경(萬頃 현재 김제시 만경면), 임피(臨陂 현재 군산시 임피면), 금구( 金溝 현재 김제시 금구면), 정읍, 함평, 고창, 무장(茂長 현재 고창군 무장면), 무안, 진도, 강진, 해남, 제주(현재 제주시의 북쪽), 대정(大靜 현재 제주시 남동) 정의(旌義 현재 제주시의 남서) 등이었다. 전라도의 선비들이 최초의 의병을 일으킨 것은 전라순찰사 이광과의 연계 하에 이루어졌다. 이는 임진년 5월 26일자에 다음과 같은 자료가 보인다.
“전라좌우도의 선비들이 의병을 일으킬 것을 제창했다. 좌도에는 광주인인 전동래부사 첨지 고경명을 대장으로 학유 유팽로, 학관 양대박을 종사관으로 정랑 이대윤, 정자 최상중 양사형, 양희적 을 모량유사(募糧有司)로 삼았다. 우도에는 나주인인 전 수원부사 김천일을 대장으로 삼았다. 담양인 유팽노(劉彭老?-?)가 고경명을 찾아가 제안하여 추성(秋城 담양 )에서 모여 의병의 깃발을 세우기로 약속하였으므로 본도의 의병제창은 팽로들이 첫째였으므로 호남에는 삼창의라는 말이 생겼다.”
위 자료에서 좌우도의 의병을 소개하고 있지만 좌도 의병의 조직에 대해서만 상세한 기술이 있을 뿐 우도의 의병의 조직에 대한 서술은 대장을 김천일을 언급했을 뿐 별다른 서술이 없다. 그리고 의병의 깃발(장표 章表)이나 의병의 숫자에 대한 기록이 보이고 있지 않다. 이 자료는 의병 소집을 위한 상부조직을 마련한 조처라고 생각된다. 전라순찰사 이광이 공주에서 근왕병을 해체한 후 2차 근왕병을 모집하여 수원에 와 있는 이광의 군대에 협조하기 위해서 고경명 등은 의병을 일으켰다. 6월 11일에 모여 출사하기로 알리고 있다. 6월 3일에는 전라 좌의병(左義兵) 진중(陣中)에서 의 돌린 글(回文)에서 장비는 다 구비되었으나 군량이 없음으로 이를 가까운 관내에서 도와 줄 것을 요청함과 동시에 혹 정병, 군마, 짐싣는 말도 협조를 당부하고 있다. 그 책임자로 부전(赴戰)하는 운량장(運糧將)에는 진사 박천정(朴天挺), 유학 양희적(楊希迪)이고, 지방에 있으면서 운량하는 장수로는 정랑 이대윤(李大胤??) 정자 최상중(崔尙重) 등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전라 좌의병이 출발하기도 전인 6월 6일 이광이 거느린 3도의 군대는 용인 전투에서 대군이 궤멸되었으나 이 소식을 바로 알지 못하고 출사표와 각도 의병을 모집하는 격문을 보냄에는 전라의병장이라고 칭하고 있다. 실제 고경명이 이끈 의병은 광주, 담양, 남원 등에서 많이 모집되었지만 학맥과 인맥에 의하여 모집되었기 때문에 엄격히 좌도의병이라고 칭하지 않은 듯하다. 고경명보다 먼저 의병을 일으킨 전 수원부사를 지낸 김천일의 군대는 나주인이 주축이 되었지만 그 의병도 우도의병이라고 칭하였는지는 의문이다. 이는 의병대장을 중심으로 좌도의병, 우도의병이라고 한다면 몰라도 그 모집한 의병의 지역성을 고려하여 전라좌도의병, 전라우도의병이라고 칭하기에는 문제가 있다. 실제로 각도에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격문을 보내거나 군량을 구하는 격문 등에서 좌도의병이라든지 우도 의병이라는 기치를 내걸지 않았다..
김천일은 5월 16일 의병을 일으키는 격문을 제일 먼저 발송했고 실제로도 의병 모집을 제일 먼저 이룩했다. 5월 23일 담양에서 거도적인 의병을 일으키기로 모인 담양(추성 楸城)회동에서 의병을 일으키기로 유지들이 모여 피를 마시며 약속을 했다. 이후 김천일은 창의사(倡義使)라는 직함을 가지고 곧바로 2000명의 의병을 인솔하고 서울 회복을 위해 떠나 용인 전투가 패배하자 돌아오지 않고 강화도로 들어가 강화도를 수비하고 서울에 있는 왜군을 견제하며 파천한 정부와 지방 간의 통신을 통할 수 있는 중요 교통로를 확보했다고 할 수 있다. 1593년 1월말에는 행주산성의 전투를 후방에서 지원했고, 왜군이 서울에서 철수하여 남하하자 그들을 추격하여 경상도 의령에까지 이르렀다가 1593년 6월 제2차 진주성전투를 지휘하게 되었다. 그가 ‘창의사’라는 의명장의 명칭을 가지고 군사활동에 임했지만 관군을 지휘한 점으로 보아 국가로부터 인정을 받아 관군화한 의병이라고 할 수 있다 .
전라도 관찰사 이광이 근왕병을 모아 북상 중 공주에서 서울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해산하자 김천일은 이광을 성토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했으나 고경명의 권유에 의해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 고경명은 서울 수복을 위하여 또 근왕하기 위해서 의병을 일으켜 6월 11일에 출사한다는 계획은 세웠으나 실제 군사의 동원, 군량의 확보 등을 위해 출사하지 못하고 전주에 머물고 있었다. 그 때 임진강 전투에서 관군이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을 더 추가해 모으자는 양대박의 의견으로 양대박은 남원에서 의병을 추가 모집하여 1000여명을 확보했다고 한다. 고경명의 의병은 가장 많았을 때 6000명에 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의병은 숫자보다 유격전투가 장기임으로 군사훈련이 더 중요한바 이제까지의 의병사 연구에서는 모집한 군사를 어떻게 훈련시켰는가에 대한 연구가 거의 없는 형편이다. 이는 물론 자료의 한계점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한다. 양대박의 의병이 전주로 가다가 6월 24일부터 임실 운암계곡에서 왜군을 만나 이를 격파한 전공을 세웠으니 이는 왜군의 전주 진입을 최초로 막은 전투로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전투의 왜병은 실제로 왜병이 아니라 왜병을 가칭한 반란군일 가능성이 높다. 양대박이 이 전투에서 성공한 요인은 우선 이 지역의 지리에 밝아 지형지물을 적절하게 이용한 점이 지적되고 있다.
7월 8-9일에는 전주를 점령하려는 왜군을 완주군 웅치와 이치 전투에서 관군과 의병이 협력하여 막아 냈다. 특히 이 이치전투는 전라병사였던 권율의 지휘 하에 전라도 관군과 의병이 함께 참여하여 왜군을 격퇴한 전투로 전주를 지켜 이후 호남을 군량을 댈 수 있는 기지를 확보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웅치 전투나 이치전투 모두 험한 산을 등지고 싸운 점에서 지리의 장점을 얻은 전투였다. 운암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던 무렵 고경명은 의병을 이끌고 북상하여 전북 여산을 거쳐 충남 은진에 이르렀다. 이 때 금산에 왜군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일본의 본군과 싸워 7월 10일 의병장 고경명, 그 아들 고인후, 유팽로 등 지휘부 인사들과 수많은 의병이 금산에서 희생을 당하였다.
난중잡록」에는 전라좌도 의병과 우도 의병의 활동에 대해 비교적 상세한 기록을 전해주고 있다. 이에 의하면 고경명과 김천일 군대도 ‘좌우도 의병’이란 칭호를 쓰고 있으나 이는 그들을 구분하기 위한 것이고, 그들이 직접 내건 칭호는 아니었던 듯하다. 이들은 전라도 의병이라고 칭했음을 그들이 보낸 통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의병부대명칭으로 칭해진 것은 고경명의 전사로 인해 흐트러진 호남의 의병을 재조직하면서 좌도와 우도의 의병, 복수의병(復讐義兵)으로 분기되면서부터라고 생각한다.
호남의병이 이처럼 좌도의병은 임계영에 의하여 주도되었고 우도 의병은 최경회에 의하여 주도되었으며 고경명의 아들과 그 측근에 의해서 ‘복수의병’이 조직되었다. 이렇게 의병이 분화된 이유는 장기간 의병활동을 하려면 지역적 친근감이 있어야 하지만 근왕이라는 큰 이름 앞에 큰 인물이 이끌던 의병에서 벗어나 그 지도자의 역량이 미치는 지역으로 한계 지워졌기 때문에 이런 의병 조직의 새로운 전기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우선 난중잡록을 통해서 전라좌우의병 조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7월초순 부터 보성에 살고 있던 전 현감 박광전(朴光前1526-1597), 능성현령 김익복(金益福1551-1599), 진사 문위세(文緯世1534-1600)등이 보성 관문(官門) 앞에서 7월 20일 모이기로 통문을 보내었다. 처음의 통문은 근왕병의 모집이었을 것이나 고경명의 사망을 듣고 의병의 조직에 더욱 박차를 가한듯 하다. 이날 보성관문 앞에서 처음에는 전 부사 화동(花洞) 임백영(任百英)을 대장으로 모시려고 하였는데 나이가 이미 70이 넘었기 때문에 동생 삼도(三島) 계영(啓英 1528-1598)에게 양보하였음으로 그를 대장으로 모시었다. 임계영은 6형제로 5번째인데 진보현감을 지낸 경력을 가졌고, 문장을 잘 썼다. 그 때 임계영은 나이가 65세였다. 임계영이 전라좌의병 대장으로 추대되어 등단하여 500여명이 서약을 한 후 조직을 다음과 같이 했다. 의병의 명칭을 ‘전라좌의병’으로 칭하고 의병의 깃발(章表)인 부대 표시를 호랑이를 그리고 도장도 ‘虎’로 표시했다.
부장(副將): 전 만호 장윤(張潤),
종사관 전 정자(正字) 정사제(鄭思悌)
양향관(糧餉官) 진사 문위세,
장표 “虎”旗
이에는 초기 군량은 문위세(文緯世)가 크게 담당하였을 것으로 이해된다. 종사관은 항상 대장을 따라다니면서 중요한 일을 보필하는 직책으로 실제로 격문의 작성 등을 담당하는 중책이었다. 부장 장윤(1552-1593)은 순천 사람으로 실제로 군사를 이끌고 전투에 참여하여 경상도 성주 전투에 혁혁한 공로를 세웠고, 제2차 진주성 전투에 참여하여 전쟁 중 가목사로 활약하다가 그 곳에서 전사한 인물이다. 이런 전라좌의병의 조직에는 박광전이 상당히 주도적 역할을 한듯하다. 전라좌의병은 낙안 순천을 지나면서 남원에 이르렀을 때 1000명에 달할 정도로 확대되었다.
전라우의병은 화순 사람 전 부사 최경회(?-1593)를 대장으로 임진년 7월 26일에 조직을 완료한 것으로 보인다. 전라우의병은 광주에서 발대식을 가졌고, 부장에 고득뢰(高得賚 ?-1593), 장표는 ‘鶻’자로 했다. 그런데 난중잡록 7월 26일자 기록에서는 ‘좌의병’ 陣中의 전사들이 흩어진 군사 800여명을 소집하여 최경회를 추대하여 맹주로 삼고, 광주에서 旗鼓를 세웠는데 ‘鶻’자를 장표로 삼았다고 했다. 우도에서 군사를 모았기 때문에 우의병이라 칭했다, 하여 앞에서는 좌의병 진중에서라고 했고, 뒤에서는 우의병을 칭했다고 하여 얼핏 보면 모순되는 것 같은 서술을 했다. 이는 앞에서 ‘좌의병’ 진중이라 함은 고경명 군대를 김천일 군대와 비견해서 칭한 칭호이고, 뒤의 문장에서 ‘우의병’이라 칭함은 임계영의 의병과 구분해서 칭해진 것으로 이해된다. 전라우의병과 좌의병은 8월 중순에 남원에서 만났다. 이 때 우의병의 최경회는 남원에 이르러 남원부 전 첨사 고득뢰(高得賚)를 부장으로 삼았고 이에서 6-700명을 모집할 수 있었다. 양군이 남원에 함께 이른 것은 금산과 무주에 머물고 있는 일본군을 치기 위해 장수로 옮겨 이들을 공격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8월 27일 금산에서 조헌과 영규의 군대가 왜군에게 패배하여 많은 군사를 잃게 되었다. 이는 호남의병과 충청의병이 서로 연계하여 공동 대응을 하려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전라도 좌우의병에 대한 기술은 선조수정실록에도 반영되었다. 즉 최경회의 졸기에서 임계영은 좌도의병을 이끌었고, 최경회는 우도의병을 이끌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금산의 전투에서 조헌 영규군을 측면지원하려 갔던 전라좌의병장, 우의병장이 무주로부터 남원으로 돌아와 진을 쳤다. 좌의병장은 남원 객사 서헌에 전라우의병장 임계영은 광한루에 진을 치고 거처하였다.
1592년 10월 이후에 전라도 의병은 근왕병으로 활약한 부대와 경상도 지역방어에 활약한 의병으로 대별된다. 김천일은 강화도에 근거지로 수도 탈환을 엿보고 있었고 수원에 진을 치고 있는 권율의 요청에 의하여 남원의 전참봉 변사정(邊士貞)이 남원의 父老 박계성과 함께 관군을 포섭하여 2000명을 수합하여 조직한 ‘敵愾義兵’과 해남 진사 임희진(任希進)은 (장표 ‘彪’) 수원의 독산성을 지키고 있던 권율의 전투를 지원하였고, 영남우도에 초유사로 남아서 이 지방의 왜적 방어를 막음에 중간 역할을 하던 김성일은 전라 감사와 좌우도의병장에게 군사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전라좌도 의병장 임계영과 전라우도의병장 최경회는 10월 초순에 산음, 개령으로 나아가 10월의 진주성을 공격하려는 왜군의 배후를 막는 역할을 했다. 당시 의병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징집할 수 있는 사람과 그에 따른 군량의 확보였다. 임계영의 군량을 모으는 간절한 통문 여러 통이 난중잡록에 실려 있다. 이처럼 전라도의 모든 의병이 좌우도 의병으로 통합된 것은 아니었다. 이는 좌우의병이라 기치에 들어오지 않은 의병집단이 여럿이 있었으나 그들의 활동에 대하여는 잘 알려 지지 않았다. 예컨대 순천무사 강희열(姜希說 ?-1593)의 200명(장표 ‘飛’자), 태인의 전 주부 민여운(閔汝雲?-1593)의 향병 200명‘熊’자로 장표), 영광 전첨정 沈友信 향병 수백명을 모집( 나라국 안의 ‘義’를 장표로 함)의 개별적인 의병이 진주성이 함락될 때에 함께 전사했다.
임진년 겨울부터 일본군은 혹심한 추위와 의병 등의 습격, 그리고 명나라 군의 개입으로 점차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계기는 1593년 1월 6-7, 8일 이여송 군대의 평양탈환이었다. 그리고 이처럼 전세가 뒤바뀜에 불안한 왜군은 강화를 이용하며 후퇴작전을 폈다. 그리고 이여송 군대는 벽제관 전투에서 혼줄이 난 후 의기소침하여 왜군과 직접 싸우려 하지 않았다. 2월 12일의 행주산성 전투는 강화와 수원에 있는 의병이 후방에서 지원함으로써 그 격퇴를 막아낼 수 있었다. 4월 19일에는 명나라 군사와 우리 군대가 서울을 탈환하였고, 왜군은 이에서 철수하여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었지만 국왕의 환도는 계사년 10월 4일에 이루어졌다. 또한 조선 정부는 두 왕자가 포로로 잡히고, 왕릉이 도굴당한 것을 이유로 일본과의 강화를 적극 반대하였다. 한편 조선 정부는 일본과 명나라 사이에 진행되는 강화회담의 내용 파악에 신경을 썼다. 관군과 의병은 일본군의 철수를 뒤따라가면서 전선은 다시 경상도 지역으로 집중되었다.
강화 도중 상호 전쟁은 배제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국지전은 지속되었다. 명나라 군대가 1593년 3월 중에는 남원 상주 일대에 도달하고 있었다. 김천일 황진이 전선을 따라 6월 중순에 진주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이런 와중에서 경상도 의병장 정인홍의 요쳥을 받은 전라좌의병과 전라우의병 은 성주성의 탈환을 위해 몇 차례 출전하게 되었다(1월 15일 탈환). 5월에는 삼도체찰사 정철이 경성회복을 위해서 경상도 지역에 출정 중인 충청 전라좌우의병을 차출하려고 하자 경상도 사림들의 반대, 그리고 학봉 김성일의 반대로 정철을 설득시켜 근왕병에 차출되지 않았다.
6월 20일 전에 일본군은 남하한 전군을 동원하여 전일 패배했던 진주성을 공격해 왔다. 진주목사 서예원이 이에 적극적으로 방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철저한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이에는 창의사 김천일, 충청병사 황진, 경상좌도병사 최경회, 전라좌도의병 부장 장윤, 전라우도의병 부장 고득뢰, 충청도 군현의 여러 수령 등이 대항하였다. 일본군은 이전과는 달리 이웃지역의 지원을 차단하기 위한 조처를 해놓고 공격해왔다. 새로 부임한 도원수 권율도 이를 도와줄 수 있는 방책이 없었고, 명군도 이를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또한 의령의 곽재우도 정규군과 싸우는 것이 무리임을 들어 정면 대항할 수 없었다. 이에 6월 29일 많은 의병장과 진주의 관군이 일반시민과 함께 6만 여명이 처참한 도륙을 당했다. 또한 전라 충청, 경상도의 의병장과 관군지휘관 다수가 전사하여 이후 전라도 의병의 대세가 크게 한 풀 꺾이게 되었다. 이 진주성 함락은 이후 왜병이 전라도에 침입함에 큰 장애물을 없앤 것이었다. 진주성 전투에 참여했던 남원 출신 군사는 300명으로 추산되고 이 중 한 두명이 생환하였다.
2차 진주성 전투의 참패는 왜군이 전라도 지역으로 쳐들어오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호남의 의병세력이 크게 타격을 받았다. 임계영은 계사년(1593) 9월에 남은 군사를 다시 수습하여 훈련봉사 최억남(崔億男)을 부장으로 삼았으나 화의로 인해 전쟁이 소강상태에 이르렀다가 1593년 11월에 전라우의병은 최경회의 형인 최경장이 다시 기치를 세워 ‘계의병(繼義兵)’이라 칭했다. 1593년 12월 15일 모든 의병을 초승군 김덕령군대에 귀속시켰다. 1594년 4월 1일에는 모든 의병의 지휘를 충용장 김덕령에게 통합시킴으로서 의병으로서의 기치를 내리게 되었다. 이는 의병의 관군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8. 맺음말
본 연구에서는 난중잡록 찬자인 조경남에 대해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것을 살펴보고, 난중잡록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를 시도했다. 조경남과 난중잡록에 대한 연구의 1차 자료는 난중잡록일 뿐이다. 난중잡록의 원본인 필사본과 인쇄본에 대한 컴토도 구체적으로 했다.
필자는 조경남이 어떻게 많은 자료를 동원하여 난중잡록을 썼는가와 이 자료는 어디서 얻었는가? 그리고 이런 자료는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그의 역사기술 속에 담겨진 역사정신의 핵심은 무엇이었는가 그리고 이 책은 후대의 역사서에 어떤 영향을 주었가는 중심으로 살펴 보았다.
임진왜란 기사를 주로 다룬 원잡록 4권 2책은 그가 남원부의 서기직에 오랜 동안 근무하면서 임진왜란에 대한 중요한 자료를 얻어보고 이를 매일 매일 기록하였고, 후일 얻어지는 자료를 보충해서 완성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서기(書記)라는 직은 어떤 성격의 직인지 정확히 알 수 있는 자료는 없다. 이는 문서를 다룬 직책이라는 점을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그가 남원부의 서기직에 종사했기 때문에 이 난중잡록이 저술되었다는 결과만을 알뿐 더 이상 이에 대한 설명과 해석이 지금의 자료로는 부족하다.
그는 정유재란 때에 외조모를 모시고 지이산으로 피난을 하다가 왜적을 격살하는 전과를 여러 차례 올렸다. 그러나 그는 그 공을 뽐내지 않고 오직 선비가 국가와 왕실을 위해서 당연히 해야할 일을 했다고 했다.
그가 일생을 공들여 편찬 기록한 난중잡록은 모두 8권 8책이었던 바 원집 4권은 임진왜란의 기사를 주로 다루었고, 속잡록 4책은 호란의 역사를 다루었다. 모두 당시의 1차 사료를 이용하여 사실적으로 기술함으로써 대단히 중요한 역사문헌으로서 기여를 했다. 특히 남원부는 왜란시기 호남 지방의 중요한 행정 군사적 요충지였을 뿐만 아니라 호남과 영남의 관문이었고, 잦은 호영남 인사의 왕래가 빈번하였으며, 중앙으로 통하는 길목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난중잡록의 원본은 후손가에 전해오다가 현재 남원향토박물관에 기탁되었으며, 이중 원잡록 4권은 고본의 자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
난중잡록은 개인의 일기가 아닌 국가의 전란사를 매일 매일 쓴 일록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특히 경상도 감영으로부터 전해진 경상도순영록 자료의 이용은 초기 임진왜란사의 일본군의 침략과 그에 대한 항쟁의 역사, 즉 관군과 의병의 역사를 함께 다룬 역사서로서 중요한 가치를 가지게 하였다. 특히 호남의병의 격문과 의병의 동향에 대한 정확한 서술과 호남의병이 영남의병과 상호 협조적인 전투를 벌린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남원성의 함락서술과 진주성 전투상황, 이치웅치전투, 성주성 전투 등에 대한 정보를 많이 전해주고 있으며, 또한 전쟁기의 사회상에 대한 소중한 정보를 많이 전해주고 있다. 난중잡록은 선조수정실록의 편찬 시에 바쳐져 중요 기사를 다룬 강령(綱領)의 역사자료로 이용되었고, 효종 7년 그의 집에 반환된 문서가 선조실록수정청의궤에 전하고 있다. 그리고 난중잡록은 영조 20년에 불에 탄 승정원일기을 보수함에 인조 8년조에 27개항의 기사가 이에서 인용되어 서술되었다. 또한 남원의 읍지에 임진왜란의 중요한 기사를 서술함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실록이나 중앙의 실록기록에는 그의 이름과 서명이 올라 있지 않았다.
그리고 후손가에 전하는 원본은 선조수정실록의 편찬 시에 바쳤다가 돌려 받은 원본은 아닌듯하다. 가장 원본에 가까운 본이 국립중앙도서관에 전하고 있는 1권의 영본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규장각에 보존되고 있는 난중잡록도 조경남이 증직을 받을 때에 중앙에 바쳐진 본이 아닌가 추정해보았다.
그의 이름과 서명은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실렸고, 의병으로서 전쟁 공로도 밝혀지게 되었으며 영조 연간에 대동야승에 실리면서 자료로서 크게 공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난중잡록에서 본문 서술 외에 사료의 출처, 사료에 대한 해석 그리고 역사적 사건에 대한 자신의 견해는 두 줄로 작은 글씨로 썼다. 특히 그의 견해를 밝힌 내용은 사론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에는 본연의 임무를 잘 수행한 관료, 죽음을 바쳐 싸운 관료를 칭찬하고 도망치거나, 인민을 무고히 살해한 관료를 신랄히 폄하했다. 그리고 국왕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사론은 크게는 유교적 관점을 가지고 있으나 의리나 명분을 따지는 성리학적 이론보다는 현실을 존중하는 현실적 견해를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이런 현실적 역사관과 국왕을 높이고 외적 방어를 중시하는 역사의식은 그가 남원부의 서기직으로 자료를 사실대로 기술한 태도, 그리고 왜적을 천시와 지리, 그리고 인화를 통해서 섬멸한 공적과 궤를 같이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역사관과 역사의식을 보여주는 사론이 정묘년 2월 1일자에 실린 사론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