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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불산 칼등에서 본 폭포골. 베틀바위가 골짜기를 지키고 있다. |
- 난코스 빨치산험로·아찔한 칼등지선 등
- 12개 지선 주로 홍류폭포 일대서 갈라져
- 아슬한 협곡 등 전혀 새로운 발품 맛 줘
올려다보기만 하면 아득한 산이지만 오르면 오를수록 반하는 곳이 신불산(神佛山, 1159m)이다. 심하게 뒤틀린 능선과 주름진 골짜기, 거기다 도처에 칼을 심어 놓은 도산검수의 아찔한 매혹은 산꾼들을 불러들이기에 모자람이 없다.
■물과 불이요 하늘과 땅, 신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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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신불산 주계곡인 성지골의 석간수 모습으로 여기서 발원하는 석간수는 태화강으로 흘러간다. |
자고로 억새명산으로 잘 알려진 신불산 동녘의 열두 도산검수를 두고 '물과 불이요, 하늘과 땅이다'고 외친 선인들이 있는가 하면,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는 성산(聖山)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었다. 이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신(神)과 불(佛)이 함께 한 독특한 지명이라, 그 산세만큼이나 기(氣) 또한 센 의미로 해석하면 된다. 어떻든 간에 신이 되면 신이 보이고, 부처가 되면 부처가 보이는 법. 신의 모습, 부처의 모습, 산할아버지의 모습으로 늘 거기에 있는 신불산은 누운 듯, 폭발할 듯, 감춘 듯, 요동치듯, 저항하듯 하여 불가사의하기만 하다.
■가혹하리만큼 험악한 '열두 도산검수'
열두 도산검수(十二 刀山劍水)란 부챗살처럼 벌어진 신불산 동녘의 열두 험로를 말하는데, 그 지선을 열거하면, 간월재 지선, 빨치산 험로 지선, 성지골 지선, 우 누운등 지선(신불중앙공룡능선), 좌 누운등 지선, 칼등 지선(신불공룡능선), 폭포골 지선, 동자골 지선, 불당골 지선, 갈밭골 지선, 용당골 지선, 가달고개 지선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 중에서 최고의 난코스는 빨치산 험로이고, 아찔하기는 칼등 지선, 신비롭기는 성지골을 꼽을 수 있다. 대표적인 도산검수인 '빨치산 험로'는 한국전쟁 당시 식량 보급에 나섰던 빨치산이 은밀히 쏘다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난리가 끝난 후에는 뱀을 잡는 땅꾼이나 숯장이, 사냥꾼, 약초꾼같이 산에서 입살이를 하는 사람만 드물게 드나들었다. 울창한 밀림에 들어서면 길을 잃기에 십상이었고, 맹수의 소굴이라 늘 두려운 존재였다.
떠돌이 시인의 길잡이가 되어준 사람은 신불산을 매일 오르는 '매일조'였다. 이들이 아니었다면 가혹하리만큼 험난했던 열두 도산검수를 죄다 돌아보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매일조의 베이스캠프는 간월산장. 이곳에서 그날의 목적지를 정하고 산행 점검을 했다. 첫 탐방은 간월잿길을 내처 걸어 신불산 정상을 오르는 비교적 무난한 구간이었다. 하지만 그다음부터는 신불산을 곧장 치고 올라가는 가파른 길이었다. 매일조 산꾼들 대부분은 적게는 수백 번, 많게는 수천 번을 오른 철각(鐵脚)들이어서 떠돌이 시인이 그들을 따라붙기란 여간 버겁질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날고 기는 산꾼들이라도 안개 낀 날이면 매일 가던 길도 못 알아보았고, GPS가 있어도 빙빙 돌다가 조난을 당하기도 하였다. 열두 도산검수의 지선은 일제강점기 때에 벌채한 원목을 모았던 집목장(集木場)이었던 홍류폭포 일대에서 주로 갈라졌다. 화물차(속칭 도라꾸)가 올라와 통나무를 실어 날랐었던 집목장에는 잡목이 무성했고, 화전민이 일구던 5000평 밭뙈기는 석축만 남아 있었다. 당시 조선총독부 영림청의 산림 벌채허가를 받은 일본인들은 신불산 거송을 마구재비로 베어 일본으로 실어 날랐었는데, 얼마나 베어냈던지 '뒤로 빼돌린 나무를 옆구리에 차고 다녔다'는 유행어가 나돌기를 하였다.
■꿈길이 바로 여기요, 실타래 험로
열두 도산검수는 제각기 발품 맛이 달랐다. 창공을 찌르는 칼이 서 있는가 하면, 처녀림 계곡, 실배암 길, 아슬아슬한 협곡이 도처에 숨어 있었다. 신불산 주계곡인 성지골은 올라갈수록 깔끔한 맛이 났는데, 청 이끼 낀 바위틈에서 발원하는 석간수는 태화강으로 흘러갔다. 하늘억새길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은 뭐니뭐니해도 신불산 정상이었다. 맑은 날이면 멀리 지리산도 바라보였다. 요동치는 칼등(칼바위)에서는 울주군 서부 여섯 고을이 한눈에 들어왔고, 누운등(신불중앙공룡능선)에서는 베틀바위와 폭포골이 잘 보였다. 폭포골은 일 년 내내 햇볕이 들지 않아 음산한 곳으로 홍류폭포 와우폭포 미륵폭포 등 크고 작은 폭포가 줄을 이었다.
한 번은 '단지봉 꿀떡띠'를 오르던 중에 불도저 별명을 가진 어느 산꾼이 자갈길에 미끄러졌다. "불도저도 미끄러지나?" 누군가 은근히 부화를 채우자,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선 김 씨는 "너희는 안 넘어지나? 가다가 엎어지고, 잠자다가도 자빠지는 게 인생길이다"라고 말해 한바탕 웃은 일이 있었다. 우스갯소리였지만 생각할수록 새겨볼 말이었다. 말이 쉬워 신불산이지, 태산 같은 열두 도산검수의 도전은 온전히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이 무모한 도전과 타협하기를 몇 차례, 사색이 되어서야 비로소 보보고(步步高)로 걷게 되었다. '아무 생각 없이 걷는 것'이야 말로 산을 오르는 진정한 힘이었다.
# 일년에 등산화 한켤레 닳아내는 신불산 '매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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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불산 '매일조'가 등산로에서 수집한 쓰레기를 담은 봉투를 들고 신불공룡능선을 지나가고 있다. |
떠돌이 시인이 신불산 열두 도산검수를 죄다 돌아볼 수 있었던 것은 '매일조'의 도움이 컸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신불산을 오르는 매일조 산꾼 중에는 인상적인 사람들이 많았다. 도시에서 얻은 병을 산에서 고친 인물이 있는가 하면, 아파트 1층을 오르는 데 1시간이 걸리던 환자가 12년 만에 신불산을 3000번을 등정한 불굴의 의지인도 있었다. 특히 남이 버린 산 쓰레기를 보물 줍듯이 하는 '환경부 장관' 별명을 가진 이완근 씨의 배려는 두드러졌다. 25년간 맨손으로 줍다가 얼마 전부터 집게를 사용해 줍는 쓰레기는 신불산 정상에 오를 때쯤이면 벌써 한 봉지가 가득 찼고, 하산하면서 다시 한 봉지를 더 주웠다. 쓰레기 무게는 무려 5~6㎏, 가을 산행객이 늘어나면 쓰레기도 덩달아 늘어나 팔이 욱신거릴 정도였다.
"가지산은 한두 번만 가도 지겨운데, 신불산은 매일 와도 지겹지를 않은 게 의문이야." 어디에 다녀보아도 신불산만 한 명산이 없다고 잘라 말하는 이유근 산행대장의 열정은 황우고집이었다. 개인택시를 모는 전명석 씨는 "가지산은 싱겁고, 간월산이 간간하다면, 신불산은 제법 짭짜리 하죠"라는 그럴싸한 발품 평을 냈다. 다람쥐 별명을 가진 강길남(여) 씨는 "칼바위를 타야 산을 오른 맛이 난다"며 신불산 칼등 구간을 선호하였다. 부산에서 보험설계사 일을 하는 김경순 씨는 "신불산에 갔다 오면 큰 보험 계약이 성사되는 대박이 터진다"며 신불산의 영험함에 탄복을 자아내기도 하였다. 이틀 사흘 먹지 않고도 묵묵히 걷기만 하는 동천거사는 "신불산은 기(氣)가 어찌나 센지 부처님이 몇 번을 울고 내려갔다"는 설파를 해 주위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산행으로 뇌졸중을 이겨낸 백전노장 김선달 씨는 "뭐니 뭐니 해도 신불산은 운무가 걸작"이라며 대자연 신불산을 경배하는 눈치였다. 이녁들 대부분은 1년에 한 켤레의 등산화를 닳아내었다.
첫댓글 글 잘 읽었습니다 더운데 잘 지내고 계시죠 요즘 얼굴뵌지가 참 오래된것 같습니다,아무쪼록 더운날씨 안전 산행하시고 시간적 여유가 있으면 막걸리 한쭈발이라도 나누어 먹어보도록 하죠.
뵌지가 오랩니다. 건안하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