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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받는 출산과 불온한 출산, 숭고한 모성과 수치스런 모성, 존엄한 생명과 저주받은 생명을 가르는 기준은 도대체 무엇일까? 성인과 청소년을 가르는 진정한 기준은 무엇일까? 그 경계는 누가 왜 가르는 것일까? 그 경계 사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그 경계에 대해서 연극은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수 있을까?
박근형 작.연출의 “빨간 버스”는 위와 같은 묵직한 질문들을 던지고 답하려하는 청소년 연극이다. 국립극단의 “어린이청소년극연구소”가 개소 2주년을 맞아 그동안 공연했던 세 작품(“소년이 그랬다”, “빨간 버스”, “레슬링 시즌”)을 잇달아 공연하는 청소년극 릴레이의 두 번째 작품으로 용산 국립극단의 소극장 ‘판’에서 재공연 되고 있다. 세 작품 중 국내 창작극으로 유일하며 비록 “청춘예찬”이나 “경숙이, 경숙이 아버지”같은 전작들이 청소년 관객층을 대상으로 하기에 충분하다고 할지라도 청소년 극이라는 공식적 타이틀을 달고 공연된 박근형 작,연출의 최초 작품이기도 하다. 그만큼 우리의 이야기, 민낯의 이야기에 천착하는 우리 연극계의 개성있는 박근형이라는 작가이자 연출가가 우리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얼마나 우리답게 풀어낼지, 그가 생각하는 청소년들의 민낯은 무엇일지 주목이 되는 작품이면서 한편 성인극과 다르게 나름대로의 규범이나 문법이 있음직한 청소년극의 한계에 어떻게 도전하고 돌파하는가 하는 지점을 보는 것도 흥미진진한 일이었다.
관객들이 입장하는 동안 무대 바닥엔 교차된 횡단보도 이미지가 고보조명으로 깔리고 무대 코너엔 신호등이 세워져 있다. 무대는 비어있고 무대 전면에는 칠판의 색과 질감을 지닌 교실 공간의 벽과 창문을 연상시키는 벽이 세워져 있다. 변형된 큐빅들이 탁자와 의자, 놀이터 공간을 창조하기 위해 조립되기도 해체되기도 한다. 교실이면서 교차로이기도 한 그 공간에서 미혼모 여고생 세진의 짧은 청춘과 죽음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교내 합창반에서 활동하면서 성적도 좋은 모범생인 세진이는 최근 방과후에 알바하느라 바쁘다. 세진이가 마트에서 분유를 훔친 사실을 경찰서에서 학교로 통보함으로써 사건이 시작된다. 세진을 둘러싼 어른들, 세진을 스토커하는 음악 선생, 경멸하는 2학년주임교사, 동정하는 담임교사, 그리고 세진의 엄마, 그리고 세진이의 친구들의 시선들이 세진을 중심으로 각양의 입장으로 펼쳐진다. 세진이의 징계문제로 세진의 엄마가 호출당해 등장한다. 부모의 이혼과 별거로 혼자 살고 있던 세진은 오랜만에 찾아온 엄마 앞에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혼자 외롭게 아이를 낳고 돌보아 온 시간들의 고통과 슬픔을 들려주지만 엄마는 돈 봉투를 건네 줄 뿐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그런 엄마를 이해한다며 돈 봉투를 돌려준 세진이는 학교에서 자퇴를 당하고 아이를 위해서 돈을 벌어야겠다고 다짐한다.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던 동원이에게 자신의 심경을 토로하면서 아이를 끌어안고 열심히 살아갈 의지를 보이고 헤어진 직 후, 동원의 눈앞에서 세진은 버스에 치여 죽음을 맞이한다. 시작과 같은 그 교차로 조명 아래서 친구들과 교사들의 장례식으로 연극은 끝이 난다.
박근형 작품들이 늘 그렇듯이 서정적이기도 경쾌하기도, 발칙하기도 한 노래와 춤과 더불어 은어와 속어, 욕설, 술과 담배와 같은 금기들을 여과 없이 무대 위에서 노출하면서 청소년들의 일탈과 방황을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청소년들의 민낯의 현실을 보고자 기대하는 관객에게 이런 지점은 박근형 작품다운 도발로 다가서며 청소년극의 금기를 넘어서는 아슬아슬한 불안감과 스릴을 선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작 작품이 흘러가면서 이 연극에서 드러내고자하는 진정한 민낯은 그런 표피적인 행위 너머 더 깊숙한 곳에서 드러난다. 그 진정함 민낯의 정체는 바로 청소년과 성인을 가르는 기준의 맹목성이며, 자기 몫의 고통과 상처, 과제를 끌어안고 인간의 길을 결단한 10대를 배제하고 고립시키는 우리 사회의 편견과 관습, 그 관습의 권위에 기대 자신의 초라한 삶을 정당화하려는 허위의식에 가득 찬 어른들의 무기력함, 그리고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성장을 거세당하는 모순적 현실에 감금당한 청소년들의 삶이다. 그리하여 연극은 질문한다. 청소년이기에 결단하는 인간의 자유의지 같은 건 금지되어야 하는 것인가, 자유의지를 지닌 청소년은 배제되어야 하는 것인가, 우리 교육에 진정으로 잘 살아내기에 대한 사유가 있긴 한 것인가 하고...
미성년들의 출산에 대한 이야기들의 종종 기사화되곤 한다. 으슥한 공원 화장실에서 혼자 출산을 하고 영아가 떨어진 변기의 물을 내리거나 아파트 단지의 버려진 가구에 유기하는 이야기들이 대부분이다. 이 가슴 아픈 기사에 대한 우리 사회의 반응은 무엇인가? ‘순결 교육’을 강화시켜야 한다며 여중고생들한테 은장도 모형을 나눠주는 캠페인을 벌이는데서 부터 콘돔사용과 같은 피임법을 성교육의 내용으로 들여와야 한다는 현실적 대응을 거쳐, 임신이나 출산, 혹은 성적 취향 때문에 학교에서 배제되거나 차별당해서는 안 된다는 곽노현 교육감의 학생인권선언까지 그 스펙트럼이 다양하다. 일종의 성 규범의 문제, 청소년 일탈의 문제, 혹은 소수자 인권문제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 미성년자 출산이라는 소재는 지금까지 진지하게 조명되지 못한 채 공공연한 비밀로 밀쳐두었던, 청소년극에선 다소 낯선 이야기다.
합법적 결혼제도 밖에서 출산과 육아를 감행한 미혼모, 그 중에서도 미성년이자 학생의 신분인 미혼모와 그녀가 낳은 아기는 아감벤의 개념을 빌면 우리 사회의 가장 ‘벌거벗은 생명, 호모 사케르’일지도 모른다. 이 연극에서 주목하는 지점은 바로 타자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지배를 공고히 하는 권력의 내면화된 장치가 어떻게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작동하고 있는가 하는 가이고, 이 문제를 풀어내기 위해서 기존의 청소년극의 문법의 전형성을 빌려온 위에서 전복적 인물을 등장시켜 그 전형성을 깨뜨리는 전략을 동원하고 있다.
청소년의 삶의 현장인 학교의 낯익은 풍경들과 답답한 공기, 전제적인 교장과 그 권력 앞에서 저항하지도 못하고 자동인형처럼 박제가 되어가는 속물적인 교사들, 관습적인 학교의 규율들, 졸업장이 필요해 그 공간을 견디는 여고생들의 적절한 타협과 일탈들, 탈출하고자 하는 무력한 동경, 부모와 청소년들 사이의 불화, 부모들에 대한 경멸과 연민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과 같은 장치들은 청소년극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환경이다. 그러나 기존의 청소년극은 그런 환경을 배경으로 혼란 속에서 자신을 찾아가는 일종의 청소년들의 성장기를 그리고 있으나 이 연극 속의 주인공 세진이는 이미 성장한 채로 등장했다가 성장했다는 이유로 배제당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전복적이다.
세진이가 엄마가 되었다는 이유로 비난받고 학교에서 쫒겨나야 하는 그나마 합당한 이유는 학생이고 미성년이라는 기준 뿐이다. 미성년이란,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자유롭게 선택할 판단력이 부족하고 사회에 나아가 홀로 살아갈 능력이 부족하기에 어른들의 보호 속에서 어른으로서 갖추어야 할 자격조건을 획득할 때까지 일정정도의 의무와 권리를 유보하도록 규정된 20살 이하의 사람을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 기준에 의거해서 세진이를 굴복시킬 현실은 극 속 어디에도 없다. 부모의 이혼으로 그 사이에서 붕 떠버린 세진이는 아무도 돌봐주지 않아서 오래전부터 혼자 살아왔다. 세진이의 자유의지를 저당 잡힐 댓가로 제공되어야 마땅한 부모의 사랑과 돌봄, 모범적 훈육 같은 건 없다면 이 계약은 부당할지도 모른다. 어른들이 이미 미성년자를 돌볼 의지도 힘도 없는 현실에서 미성년자는 스스로 성인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세진이가 빨리 어른이 되도록 몰아댔던 현실이 세진이에게 빨리 어른이 된 것에 대해서 죄를 묻고 있는 현실은 부당하게 다가온다.
그 부당한 잣대를 들이대고 세진이에게 돌을 던지고 있는 어른들의 이중성과 내면화된 권력의 시선은 곳곳에서 드러난다.
“뭐? 외로워서 애를 낳았다고? 걔만 외롭니? 나도 매일 외로워. 나 남편한테 관심도 없고, 사랑 같은 것도 없어... 난 그저 내 딸 경숙이, 경숙이를 위해서 살아. 학생들한테 관심 없어. 그래 나 그런 속물이야. 그냥 난 내 딸 경숙이를 위해서 직장에 다녀. 근데 뭐? 외롭다고 다 그 짓하고 애를 낳아?”
2학년 주임교사가 세진이를 비난하는 대사이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그 사람을 사랑했어요. 오래 함께 있고 싶어 내가 먼저 자자고 했어요. 그 사람 살 냄새가 좋았어요... 그 뒤 그 사람은 떠나고 난 아이를 가졌지요. 낳고 싶었어요...아이를 낳았는데 아이가 오래 목욕탕에 있었던 것처럼 쭈글쭈글해서 웃겼어요. 그 아이가 근데 나오자마자 내 젖을 찾아 무는 거예요. 그런데 그 순간 정말 행복했어요.... 난 돈을 벌거야. 무조건 돈을 벌거야. 아이를 지키려면 돈이 있어야 해.”
세진이의 이야기다.
미성년자라는 잣대를 강요할 수 없다면 과연 그 뒤에 남는 이 두 여성의 모성의 차이는 무엇일까? 왜 한 사람의 모성은 자랑스러운 것이고 한 사람의 모성은 수치스러움을 강요받아야 하는 것일까? 둘이 돈을 벌고자 하는 의지에서 누구의 의지가 더 정당한 것인가를 가릴 수가 있을까? ‘그 짓’과 무관하게 태어나는 생명이 있을까? 자신의 일부이기도 한 ‘그 짓’이 왜 세진를 배제하는 이유가 되어야만 하는 것인가?
“아이 아버지가 누구야?”
“왜 사람들은 예외 없이 그걸 묻는 거죠? 왜 아기가 딸인지 아들인지는 묻지 않죠?”
세진이의 아이는 축복받는 생명의 무게로 존재하지 않는다. 세진이의 출산은 생명의 탄생이라는 존엄한 사건이 아니라 관음증적 시선 앞에 노출된 부끄러운 스캔들로 취급당한다. 그리고 가부장적 부권사회의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운 이는 아무도 없다. 친구들 역시 그런 세진이의 현실을 우정의 울타리 안으로 포옹하지 못함으로써 그들의 날고 싶다는 욕망조차 길들여진 것임이 드러난다. 아이 아버지가 누구인지 세진이는 끝까지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진정 자유의지로 내린 결정에 대해 책임을 지는 태도와 능력이 어른의 자격이라면 이 연극에서 가장 어른은 세진이다. 가정주부의 역할은 내팽개치고 하루 종일 등산인지 외도인지를 즐기는 친구의 엄마, 바람을 피운 경력 때문에 찍소리도 못하면서 명목뿐인 결혼생활을 지지부진하게 끌고 가는 친구의 아버지, 모성의 의무보다는 어린 남자와의 사랑을 선택해서 딸을 버리고 이혼한 엄마, 제자에게 연정을 구걸하는 스토커 음악 선생, 교장의 권력에 적당히 아부하면서 맘에도 없는 선생질을 하는 학년 주임... 이들의 군상은 결단과 책임이라는 인간의 자격에 함량 미달이다. 그러나 세진은 자신의 삶으로 걸어 들어온 사랑을 재지 않고 과감히 수용해 버리고 그 댓가로 치루어야 할 상처와 불행도 감당하려 한다. 또한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자신을 버리고 집을 나간 엄마의 선택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관대함까지 획득한다. 그렇게 성장하기까지 세진이 감당해야 했던 두려움과 고통이 시간들은 절절하다. 그러나 세진은 투덜대지도 항변하지도 변명하지도 않는다. 그저 자신의 삶의 조건들을 받아들이고 그 조건 속에서 자신이 살고 싶은 삶을 선택하고 살아낸다. 닥치고 갈 길을 가는 것이다.
“돈을 마련해서 바닷가 옆 콘도에 갔어, 아기 물품은 진통이 오기 전에 다 장만해 뒀어. 혼자서 아기를 낳고 혼자서 태반도 꺼내고 탯줄도 잘랐어. 혼자서 아기 낳는 법은 인터넷에서 다 가르쳐줘... 엄마도 나 낳을 때 그렇게 하늘이 노랬어? 아이를 낳고 아기랑 단 둘이 콘도에서 지내는 데 철썩, 철썩 하던 파도 소리가 그르렁, 그르렁 하고 변하는 거야. 무슨 기계 소리처럼, 근데 그 소리가 점 점 더 가까이 와, 나를 삼켜버릴 것처럼...”
“내 아기는 내 상처고 내 검은 미래야. 그렇지만 그 아이를 끌어 안는 게 그렇게 싫지만은 않아.”
결국, 이 연극은 답한다. 미성년과 성년을 가르는 진정한 기준은 연령에 따른 법적 관습적 규정이 아니라 결단과 책임, 그리고 자신의 고통의 몫을 감당하는 마음의 힘이라고... 그런 의미에서 어른이라고 완전히 성장한 것도 아니고 청소년이라고 해서 완전히 미성숙한 것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청소년에게 자신의 삶을 살 권리를 교육과 보호라는 허울 아래 박탈하지 말라고, 청소년이라는 정체 불명의 허울 아래 자신을 감금하지도 안주하지도 말고 사람의 길을 용기있게 걸어가라고... 여기서 청소년극이라는 타이틀을 빌어 박근형이 말하는 청소년이라는 존재는 실체가 없어진다. 이 점이 이 작품이 기존의 우리 청소년극과 다른 전복적 지점이다.
자퇴를 당한 후 아이와 함께 할 미래에 대한 의지와 꿈을 안고 교실 문을 나서는 세진은 그러나 버스에 치여 죽음을 맞이한다. 그렇게 세진의 꿈도 의지도 스러져 버린다. 세진의 죽음은 어쩌면 너무 일찍 성장했다는 이유로, 너무 일찍 학교 밖으로 나오고 너무 일찍 엄마가 되었다는 이유로, 사회로 진입한 순간 살아 있지만 죽어 있는 육체 ‘호모 사케르’가 되어 버리는 사회적 죽음을 상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세진을 치어 죽인 버스는 세진의 독백 속에 등장하는 버스와 오버랩 된다.
“매일 아침 우린 노란색 스쿨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향해서 가는데, 실은 그 버스는 상큼한 노란 버스가 아니라, 불타고 있는 채 나갈 문은 닫혀 있는데, 멈추지도 않고, 학교로, 사회로 막 질주하는 미친 버스가 아닐까.”
세진이의 용기를 통해서 보여주었던 비젼과 희망에도 불구하고 세진의 죽음이라는 비극적 결말을 통해서 그런 존재를 수용하지 않는 우리 현실의 어두움을 나란히 강조함으로써 이 작품은 관객들에게 묵직한 현실적 과제를 던지며 다시 우리의 어두운 현실을 직시하게 한다.
교차로와 신호등, 그리고 빨간 버스는 이 작품의 주제 의식을 담고 있는 중요한 상징들이다. 거기에는 지배와 통제, 규율과 폭력의 이미지가 있다. 그러나 연극의 플롯이 세진이라는 영웅적 주인공의 이야기 선을 따라 흘러가면서 빨간 버스의 상징으로 드러나는 우리 교육의 어두운 현실이 플롯 안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지는 않는다. 학교를 자퇴한 뒤, 비로소 떠나온 세계를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된 세진이가 극의 말미, 죽음 직전에 던지는 대사를 통해서 던지는 빨간 버스 이야기는 세진이의 이야기의 개별성을 보편성으로 확대시키며 세진이의 뒤에 놓인 우리가 넘어야할 거대한 벽 앞으로 관객들을 데려다 놓는다. 그래서 관객은 세진이의 이야기는 끝날 지라도 그렇게 계속 질주하고 있는 버스를 상상하게 되면서 연극의 시공간은 극장을 너머 현실로 확대된다. 교차로와 신호등이라는 무대 장치도 극 중에서 실용적으로 사용되지는 않고 막간 어둠 속에서 깜빡일 뿐이다. 이런 상징들은 세진이의 이야기의 사회적 배경을 시적으로 드러내 줌으로써 관객에게 사색의 공간을 열어주고 있는 한편, 세진이 이야기 너머의 깊이를 끊임없이 암시하고 있다.
뜨거운 이야기를 담담하고 절제된 연기를 통해서 오히려 호소력 있게 표현한 신사랑의 연기가 자칫 비현실적 거리감이 느껴질 수 있는 세진에게 무리 없이 공감할 수 있게 하는 데 기여했다. 반면 미혼모가 된 딸에게 지나치게 냉담한 엄마 캐랙터가 우리 관객에게 낯선 만큼 설득력 있게 전달되지 못한 점은 아쉬웠다. 세진이의 엄마와 세진이의 만남은 학교 교사들과의 갈등과 다른 질을 지닌 장면이다. 빠르던, 늦던 자신에게 충실하게 살아가려는 두 개인으로 관계를 전향하는 모녀의 자리매김은 아직은 우리 사회에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어쩌면 청소년들의 자기 성장을 위해서 한번쯤은 진지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지점은 아닐까 생각한다.
소수자는 발언하지 않기 때문에, 기록하지 않기 때문에, 말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소수자가 된다고 했다. 서울대학교에 입학하는 아이들도 지극히 소수이지만 그들은 공적영역에서 이미 다수이다. 그들은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라는 책을 쓰고, 인터뷰를 하고 기사거리가 된다. 세진이와 같은 처지의 청소년들의 숫자는 한 해 서울대에 입학하는 아이들과 비교하여 어느 정도나 될까? 그들은 존재하지만 우리 사회의 공적 영역에서 지워진 존재, 존재하지 만 죽은 존재이다. 하지만 공원 화장실에서 두려움과 죄의식으로 홀로 몸을 풀고 생명을 유기하거나 살해하는 공포와 고통, 그 후 남을 상처의 아픔은 지독히도 현실적이다. 누가 그런 일에 관심을 두고 있을까? 연극이 이들의 이야기를 한다. 박근형의 마음을 빌어 밝은 곳으로 나와서 그들이 말을 한다. 커튼콜에서 맨 앞으로 나온 세진이 역의 배우에게 박근형 연출은 마지막으로 아주 밝은 조명을 비추어 그녀의 모습을 우리에게 오래 오래 각인시킨다. 그 조명에 담긴 박근형의 마음이 두고 두고 따뜻하고 절실했다.
이번 작업이 앞으로 관록만큼이나 삶과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과 예술적 경험을 성취한 많은 연극인들이 청소년극에 관심을 기울이고 작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그럴 때, 우리 나라의 청소년극의 깊이가 깊어지고 외연이 넓어지고 많은 청소년 관객과 성인 관객들이 함께 모여 앉아 연극을 통해서 사유하고 성장하고 현실을 개선해 나갈 길을 모색하는 현장이 풍성히 펼쳐질 수 있을 것이다. 아직도 말을 갖지 못한 청소년들이 많기 때문이고 연극은 바로 그 말을 위한 자리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