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대기》에 말한다.
고구려 "태조 융무 3년 요서에 10성을 쌓아 한의 10성에 대비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 10개의 성은
첫째, 안시는 개평의 동북 70리에
둘째, 석성은 건안의 서쪽 50리에
세째, 건안은 안시의 남쪽 70리에
네째, 건흥은 난하의 서쪽에
다섯째, 요동은 창려의 남쪽에
여섯째, 풍성은 안시의 서북 100리에
일곱째, 한성은 풍성의 남쪽 200리에
여덟째, 옥전보는 한성의 서남쪽 60리에(옛 요동국이라함)
아홉째, 택성은 요택의 서남쪽 50리에
열째, 요택은 황하의 북안 왼쪽에 있었다.
또, 5년 봄 정월엔 또 백암성과 용도성을 쌓았다. 고 했다.
《삼한비기》에서 말한다.
옛 책에선 〈요서에 창요현이 있다〉고 했는데 당나라 때 요주라고 개명했다.
남쪽에 갈석산이 있고 그 밑은 곧 백암성이다. 역시 당나라때의 암주가 그것이다. 건안성은 당산의 경내에 있다. 그 서편을 개평이라 한다. 일명 개평이요, 당나라때에는 개주라 한곳이 이것이다.
드디어 고대 지명의 핵심 비밀이 밝혀졌다.
고구려때 수나라 양광과 당나라 이세민이 고구려를 공격할때면 항상
요택을 지니는데 그 요택이 바로 황하의 만곡부분이었던것이다.
고구려사를 보면 수隋의 양광(양제)이나 당나라 이세민은 탁군涿郡에서 군사를 모아 고구려로 출발 하는데, 일군은 육로로 항상 요택을 지나 공격해 온다. 또한 군사는 동래(등주)에서 해로로 패수로 들어온다.
그 탁군은 지금의 북경으로 그들의 본거지인 하북성 에서 산서성에 가로막힌 태행산맥을 우회하여 내몽고 요택이 가장 가까운 거리이며, 또 한 길은
동래로 부터 황하를 거슬러올라 패수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게다가 한단고기는 또 하나의 중요한 지명을 설명 하였다.
바로 갈석산의 위치이다.
갈석산은 요택의 서남에 있다 했으니 바로 지금 녕하 회족자치주의 하란산을 말한다.
하란산옆에 석각산시가 있다. 이곳이 바로 석성이었던 백암성이 있던곳이다.
바로 지금 황하가 휘감아 돌아가는 녕하회족자치주와 감숙성 남부와 섬서성이 요동이고, 낙랑군 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묘한것은 이 곳이 요서도 된다는 것이다.
분명 고구려 초기 3대 대조대왕시 이곳에 요서 10성이 위치 했는데, 고구려말 수, 당이 침입하면서 공격한 요동성과 안시성도 이곳 요하를 건넌곳, 즉 황하의 만곡내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아래 지도는 수나라 군사가의 고구려 를 공격하던 길을 표시 하였다.
황하의 북안 오르도스.
첫댓글 요택의 바른 위치비정이 문제라고 봅니다. 요동은 2회에 걸쳐 남쪽으로 이동하게 됩니다.따라서 갈석산도 이동을 하고 서안평도 지명이동을 하게 됩니다.재야 사학의 일반적인 요동은 산서성 태원옆에 요동으로 비정하고 있더군요. 요동은 즉, 갈석산이 있어야 하는 것으로 연구과제로 봅니다.
고구려 초기 평양성은 지금 장안근처로 비정하고 있던데 저도 동감합니다.환도성과 국내성등을 고려 해 보면 요택은 하북성 끝언저리로 부터 동북에 위치해야 갈석산이 서남에 위치하게 되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