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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신학 정리
1. 종말론의 개념, 신학적 위치와 기능
A. 종말론의 개념
1) 개신교회 정통주의 신학 시대의 루터교회 신학자 칼로프(A. Calov)의 저서 『신학체계』에서 종말론 개념 처음 사용
2) “마지막 일들”(ta eschata) : 모든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죽음, 죽음 후의 상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다시 오심), 모든 죽은 자들의 부활, 모든 인간에 대한 최후의 심판, 하나님 나라의 완성과 새 창조의 시작, 영원한 생명
3) eschaton : “마지막”, “끝남”(finis)을 뜻하는 동시에 “목적”(telos)를 뜻함 → 종말 : 죄와 주검의 세력이 지배하는 현세계의 “끝남”, 역사의 궁극적 목적 곧 하나님 나라의 완성과 새 창조의 시작, 영원한 생명
4) 종말론 : 하나님 나라의 완성과 새 창조의 영원한 생명에 관한 이론, “종말론적 존재”로서의 그리스도인들과 그들의 공동체의 실천에 관한 이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일회적으로 일어났고 지금 그리스도인들과 그들의 공동체 안에서 앞당겨 일어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약속과 이 약속에 대한 희망, 그리고 이 희망으로부터 생성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선교적 실천에 관한 이론
5) 포어그림러(H. Vorgrimler)의 정의 : “기독교 종말론은, 이미 온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장차 올 것, 새로운 것, 궁극적인 것을 성찰하고, 이것으로부터 현재를 해석하며, 현재의 활동에 대한 자극들(Impulse)을 중재하고자 추구하는 점에서, 기독교 신학이다.”
6) 종류 : 개인적[인격적] 종말론, 보편적[우주적] 종말론
B. 종말론의 신학적 기능
1) 죽음이 무엇인가를 해명함, 삶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올바른 태도를 정립하는 기능
2) 인간의 세계와 역사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해명함, 세계와 역사에 대한 기독교 신앙의 올바른 태도를 정립하는 기능
☞ 그것은 역사에 대한 무관심 대신에 관심을, 인간과 세계에 대한 냉소주의 대신에 사랑을, 체념과 좌절 대신에 희망과 용기를 심어줄 수 있으며, 역사적 현실로부터의 도피 대신에 현실에 대한 개입과 참여를 가능케 한다. 이를 통하여 종말론은 기독교 신앙을 역사적인 신앙, 참여적인 신앙으로 변화시키는 기능을 가진다.
3) 삶과 역사의 목적에 대한 방향감각의 상실 → 목적이 없을 때, 모든 활동과 삶의 의미가 사라진다. → 기독교 신앙에 근거하여 삶과 역사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제시함, 혼돈과 무의미에 빠진 오늘의 인간과 세계가 지향해야 할 목적과 방향을 제시
4) 교회의 본래성을 회복시키는 기능
☞ 몰트만 : 종말론을 가리켜 “모든 기독교적 선포와, 모든 기독교적 실존과 모든 교회의 성격”이라 규정
C. 종말론의 출발점
1) 죽음 후의 생명에 대한 종말론적 질문, 죽음 후에 당할 심판에 대한 생각
2) 블로흐(E. Bloch)
가) 하나님은 미래적인 존재 혹은 미래를 그의 존재규정으로 가진 존재
나) 희망의 원리 : 보다 나은 내일과 이상적 미래를 희망하며 이 희망 때문에 주어진 현실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것은 단지 기독교 종말론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보편적 성향이다.
3) 하나님은 그의 미래로부터 “오시는 분”이다. 그가 오실 때, 그의 나라가 온다. 그의 나라는 악의 세력들에 대한 심판으로서, 그들에 대한 승리로서 온다.
4) 스토아 철학의 창시자 제논(Zenon) : 신은 모든 존재자들을 분만하고 그들을 자기 안에 포괄하며, 벌이 공간을 지나가듯이, 신은 모든 사물들을 삼투한다.
5)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kus Aurelius) : 신은 이 세계의 모든 사물들 속에 현존한다. 따라서 모든 사물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신성을 가지며, 신의 존재를 비추어준다. 전체로서의 우주는 그의 합목적적 질서와 조화 속에서 신의 계시이다.
6)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 신은 제1원인이요, 세계의 모든 사물은 제1원인으로부터 시작하는 인과의 관계 곧 원인과 결과의 고리 속에 자리 잡혀져 있다. 이 고리 속에서 그들은 신의 존재와 결합되어 있고, 신은 그들 안에 현존한다. 이 우주 전체는 신적질서와 조화를 가진 하나의 “신적 세계”로 설명된다.
7) 기독교 종말론의 궁극적 근거 내지 출발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곧 그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일어난 하나님의 자기계시에 있다.
8) 기독교 신앙은 희망의 근거를 인간과 모든 사물들의 내적성향에서 발견하지 않고,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일어난 하나님의 약속에서 발견한다.
D. 종말론에 대한 오늘의 관심
1) 발타자르(H.U. von Balthasar) : “종말론은 우리 시대의 신학에 있어서 ‘태풍의 중심’이다. 여기에서부터 신학의 온 땅을 유익하게 뒤흔드는 뇌성벽력이 일어난다. 우박이 내려서 피해를 입든지, 아니면 온 땅이 신선하게 된다. 19세기의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트뢸치(Troeltsch)의 다음과 같은 말이 타당할 수 있었다: ‘종말론의 사무실은 대부분 닫혀있다.’ 이와 반대로 19세기에서 20세기로 전환되면서 이 사무실은 초과근무를 하고 있다.”
2) 오늘날 기독교 종말론에 대한 관심을 자극하는 요소 : 미래학, 뉴에이지 운동, 마르크시즘, 오늘의 묵시사상적 세계상황과 사이비 종말신앙
가) 오늘날 인류의 미래는 세계인구의 급속한 증가, 점차 고갈되어 가는 천연자원,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전, 과학무기 특히 핵무기의 위험, 경제적 불의, 환경오염과 환경파괴, 생태계의 파괴와 생태학적 위기, 유전공학의 발전과 생명복제 등으로 인하여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나) 오늘날 인류의 미래는 인류가 예측할 수 없는, 지금까지 경험해본 적이 없는 전혀 새로운 것을 가져올 수 있는 미지의 것으로 다가오고 있다.
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기독교 종교에 대한 투쟁은 기독교가 믿는 피안의 환상적 세계에 대한 투쟁이다.
라) 남정우 : 사이비 종말신앙 혹은 “말세의식은 개인주의적이며 현실도피적이지만, 기독교의 종말의식은 공동체 지향적이며 현실참여적이다. 말세의식은 노출된 불의와 부패에 대해서 무관심하지만, 기독교의 종말의식은 지금 여기에서 회개하고 책임적인 존재가 되게 한다... 말세의식은 조만간 절망에 빠져서 허무와 퇴폐주의로 나아가지만, 기독교의 종말의식은 절망적 현실 속에서도 희망을 가지며 변화 속에서 의미를 찾게 한다.”
3) 오늘날 종말론을 기술함에 있어서 유의할 점
가) 종말론은 오늘날 인간과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모든 현실적 문제들과 갈등들을 무시하고, 단순히 역사의 종말에 오리라고 기다리는 피안의 세계를 다루는 이론이 될 수 없다.
나) 종말론은 이 세계가 하나님과 완전히 화해되었다는 환상이나 열광주의를 피해야 할 것이다.
다) 종말론은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인간의 무책임성과 도피를 정당화시키지 않는 동시에, 인간의 행동이나 프로그램을 하나님 나라의 오심과 동일시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할 것이다.
3. 종말론의 역사
A. 초대교회 시대의 종말론
1) 종말에 대한 회의 : “이것을 우리는 이미 우리 조상들의 시대에 들었다. 그러나 보라, 우리는 늙어졌고, 아무 것도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았다.”(클레멘스 서신) “희망을 붙들고 끈기 있게 견디라.”(제2클레멘스 서신)
2) 임박한 종말에 대한 기다림의 새로운 해석
3) 주후 2세기 후반기에 일어난 몬타누스 신도들과의 논쟁
4) 성서의 종말신앙의 우주적, 물질적, 차안(此岸)적 측면은 약화되고, 개인적, 영적, 피안(彼岸)적 측면이 더 큰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5) 제국종말론=정치적 종말론(유세비우스) vs. 땅의 도시와 하나님의 도시의 병행 내지 대립(아우구스티누스)
6) 아우구스티누스 : 현재화, 심령화, 교회론적 종말론
B. 중세 스콜라 신학의 종말론
1) 종말론의 개인적 차원 : 영혼불멸, 연옥, 각 개인이 당하게 될 지옥과 천국
2) 아퀴나스
가) “죽음 속에서 인간은 존재하기를 중지한다. 인간으로서 그는 무에 떨어진다. 이리하여 중세 스콜라 신학은 이러한 관점 하에서 총체적 죽음을 가리킨다. 몸과 영혼의 살아있는 통일성만이 인격과 인간이기 때문이다.”
나) 인간을 하나의 총체적, 통일적 존재로 보는 성서의 이원론, 그러나 썩어 없어지는 몸과 영원히 불멸하는 영혼의 그리스적 이원론이 완전히 극복되지 않음
3) 연옥 문제
가) 파샤시우스 라드벨투스(Paschasius Radvertus) : “그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마 3:11)이라는 말씀에 나오는 불을 연옥의 불로 파악함
나) 라바누스 마우루스(Hrabanus Maurus) : 최후 심판 이전, 인간은 연옥의 불의 세례를 받음으로써 경미한 죄들로부터 정화된다고 말한다.(근거구절 – 고전 3:12-15)
다) 휴고(Hugo von St. Viktor) : 죽음 다음에 정화의 벌이 있으며, 영원한 생명을 얻기로 예정된 자들은, 이 벌을 통하여 죄로부터 정화된다.
라) 페트루스 롬바르두스(Petrus Lombardus) : 고전 3:15에 나오는 “마치 불 속을 거쳐서” 얻게 되는 “구원”을, 연옥의 불을 통한 죄의 정화로 파악함
마) 토마스 아퀴나스 : 영혼은 죽음 다음에 연옥에서 정화의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다.
4) 요아힘 폰 피오레(Joachim von Fiore) : 종말론의 메시야적, 세계사적 차원을 재활시킴
가) 13-14세기 프란시스파 영성주의자들이 교회를 비판하는 근거가 됨
나) 토마스 뮌처와 재세례파에게 큰 영향을 줌
C. 종교개혁 신학의 종말론
1) 루터
가) “어디서나 종말이 바로 앞에 있으며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을 기다리는 강한 종말론적 태도”
나) “정신적 존재들 곧 천사들과 인간들 외에 이 세계에 속한 모든 것은... 불을 통하여 소각되어 무로 폐기될 것이다.”(Destructio, dissolutio, conflagratio, abolitio, annihilato, reductio in nihilum)
2) 게르하르트 : 종말론은 개인의 미래와 관계된 것으로 나타남(개인의 시간적 죽음, 죽은 사람들의 부활, 최후의 심판, 세계의 마지막, 지옥 아니면 영원한 주검, 영원한 생명)
3) 후터(L. Hutter) : 중간상태에서 경건한 자들의 영혼은 하나님의 손 안에, 하나님 없는 자들의 영혼은 고통의 장소에 거하며, 거기서 완전하고 영원한 저주를 기다릴 것 → 최후의 심판
D. 계몽주의 시대의 종말론
1) 종말론의 차안(此岸)화, 세속화, 탈종말론화
2) 레싱(G.E. Lessing) : 낙관적 세계발전 사상 → “철학적 천년왕국설”
3) 칸트(I. Kant) : 종말론의 역사철학적 세속화
4) 헤겔 : 기독교 종말론의 메시야적, 천년왕국적 차원을 세계사에 적용하여, 그것을 세계사 속에서 실현하고자 하였던 위대한 시도
5) 슐라이어마허 : 인간의 영혼과 하나님의 현재적 결합이 마지막 일들보다 더 중요하다.
6) 하르낙(A. Harnack), 트뢸취(E. Troeltsch) : 영혼의 무한한 가치 앞에서 종말론을 포함한 신학의 모든 것은 이차적인 것이다.
7) 포이어바흐(L. Feuerbach)와 칼 마르크스(Karl Marx)의 물질론 : 기독교의 종말론을 관념주의처럼 탈종말론화 시킬 뿐 아니라, 그것을 제거하고자 한다.
가) 포이어바흐 : “영혼불멸”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신앙은 하나님의 존재와 마찬가지로 영원히 살고 싶어하는 인간의 소원을 투사시킨 것에 불과하다.
나) 마르크스 : 종말론이 약속하는 피안의 세계를 차안 속에서 실현하고자 한다.
E. 현대신학의 종말론
1) 철저종말론
가) 슈바이처(A. Schweizer)
(1) 예수는 당시의 묵시사상가들처럼 세계의 대재난과 멸망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초월적으로 돌입할 것을 기다리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였다.
(2) 묵시사상적 광신 속에서 실패로 끝난 역사의 예수를 버리고, 그의 종말론 속에 숨어있는 “윤리적 의지”와 “세계의 윤리적 마지막 완성”에 대한 예수의 희망을 찾음
나) 바이스(J. Weiss)
(1)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에 의하여 실현되어져야 할 윤리적 가치들의 나라라는 리츨(A. Ritschl)의 입장에 반대함
(2) “이 세계에 대하여 철저한 대립 가운데 있는 초세계적인 것”
2) 영원의 종말론
가) 칼 바르트(Karl Barth)의 『로마서 강해』 제2판(1922)
(1) 종말은 현재의 순간 속에 있는 영원의 현재임
(2) 역사의 종말은 영원히 역사의 미래에 숨어있는 현재의 순간 속에서 경험될 수 있다.
(3) 1940년대 : 자신이 목적론적 종말론을 간과하였음을 인정
(4) 판넨베르크(W. Pannenberg)의 평가
(가)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종말론적 메시지를 현재의 인간에게 해당하는 것으로서 적절하게 해석할 수 있었다.
(나) 종말론적 미래에 관심이 없음 : 『교회교의학』에서 특수한 미래의 구조, 미래의 완성을 향한 긴장 상실
나) 파울 알트하우스(Paul Althaus)의 『마지막 일들』
(1) 순간 속에서 종말을 발견 : 세계의 초시간적이며 현재적인 상태
(2) 가치론적 종말론 → 목적론적 종말론
다) 브룬너(Emil Brunner)의 『미래와 현재로서의 영원한 것』
(1) 종말은 “실존적 결단의 시간”과 같은 성격을 가짐
(2) “역사의 종말”은 “영원한 것”으로서 “공간적 시간의 틀을, 다시 말하여 역사적인 것의 구조를 깨뜨려버린다.”
(3) 불트만이 말하는 세계의 종말의 “비신화화”, “실존론적 해석”은 내용 자체의 변질(Substanzverwandlung)을 가져올 수 있으며, “무시간성과 비인격적 절대자의 철학”으로 전락할 수 있다.
3) 실존론적, 현재적 종말론
가) 불트만(Rudolf Bultmann)
(1) “종말론적 현재” : 종말을 현재의 순간 속에 있는 것으로 생각함
(2) “모든 순간은 종말론적 순간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 가능성은 기독교 신앙 안에서 실현되었다.”
나) 하인리히 오토(Heinrich Otto) : 종말론에서 실존론적 방법을 따름, 그러나 시간적 과정을 순간 속으로 폐기하는 것을 반대함(불트만과 다른 점)
다) 단점 : 객관적 역사의 지양, 순간 속으로의 폐기를 초래함
(1) 슈미트(H.W. Schmidt) : “옛 신학은 과거 속에서, 현재 속에서 그리고 미래 속에서 구원과 계시를 발견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변증법적-종말론적 신학은 시간 내의 어떠한 구원의 현재도 알지 못한다.”
(2) 판넨베르크 : 키에르케고르의 영향을 받은 변증법적 신학은 “무역사성”에 빠져버렸다.
4) 구원사적 종말론
가)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 : “이미-아직 아님”의 긴장관계(D-Day vs. V-Day)
나) 한계 : 세계사의 과정 자체가 구원의 역사와 동일시 될 수 있는 위험성, 그리스도의 사건은 세계사를 해석하는 “역사의 술어(Prädikat)”이지, 새로운 역사를 열어주는 동인이 되지 못한다.
5) 보편사적 종말론
☞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
(1) “성서의 증언들에 의하면 하나님의 자기계시는 직접적으로, 신의 현현(Theophanie)의 방법으로 일어나지 않고, 간접적으로, 하나님의 역사행위들을 통하여 일어났다.”
(2) 세계사의 모든 사건들은 하나님의 자기계시이며, 신적현실의 흔적이다.
(3) “하나님의 신성의 보편적 계시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실현되지 않고, 나사렛 예수의 운명 속에서 실현되었다. 그 안에서 모든 사건의 종말이 미리 일어났기 때문이다.”
(4) 하지만 종말론의 사회-정치적 기능을 간과하지 않음 : 부활의 영원한 삶의 현실 곧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적인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서 현재적이다.
6) 메시야적 종말론
가)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
(1) 복음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약속된 미래를 현재적으로 경험하는 동시에 그것의 궁극적 완성을 기다리며 희망한다.
(2) “종말론의 시간화(Verzeitlichung)” : 아직 있지 않은 것이 시간의 과정 속에서 형성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희망하는 것(17세기 “예언자적 신학”, 알버트 슈바이처의 철저종말론, 오스카 쿨만의 목적론적 종말론)
(3) “종말론의 영원화(Verewigung)” : 종말을 “순간 속에 있는 영원한 현재”로 보는 바르트, 알트하우스, 불트만의 종말론을 비판함
(4) 성령의 능력 가운데서 그의 미래로부터 “오시는 하나님” : 종말은 하나님의 미래(Zukunft)와 오심(An-kunft), “하나님의 오심과 함께 더 이상 죽지 않는 존재가 오며, 더 이상 지나가버리지 않는 시간이 온다.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시간이 온다.”
7) 진화적 종말론
☞ 샤르댕(Teilhard de Chardin)
(1) 물질은 끊임없이 나누어지는 가운데서, 모든 부분들이 완전한 일치와 조화와 아름다움에 도달하는 중심점을 향하여 움직인다. 이러한 동인(動因)과 목표가 그리스도
(2) 단점 : 세계의 악의 현실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으며 역사의 과정을 낙관적으로 봄, 묵시사상은 무의미하며 예수의 십자가는 “진보의 한 표징”으로 이상화됨, 우주의 진화와 하나님의 종말적 구원이 동일시 됨
8) 해방신학의 종말론
가) 구티에레즈(G. Gutierrez) : 종말론은 “철저히 미래를 지향하는 구원사의 엔진”,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
나) 레오나르도 보프(Leonardo Boff) : 세계의 종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되었고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성취
4. 죽음의 문제
A. 삶의 지혜의 교사로서의 죽음
B. 죽음에 대한 태도
☞ 동물과 인간의 한 가지 차이는, 인간은 살아있는 동안 자기의 죽음을 미리 의식할 수 있고, 죽음을 준비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1) 오늘날 현대인에게서 나타나는 가장 대표적인 죽음에 대한 태도 : 죽음을 잊어버리고, 마치 죽음이 없는 것처럼 사는 태도
가) 에피쿠로스(Epikuros) : “가장 치가 떨리는 악 곧 죽음은 우리에게 해당되지 않는다.”
나)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 : “죽음은 삶의 사건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체험할 수 없다.”
다) 이 세계와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삶을 전부라 생각하고, 주어진 삶에 탐닉하는 삶의 태도
라) 현대사회는 죽음과 죽은 사람들을 사회의 변두리로 배제하여버리고, 보다 더 많은 기능과 이익과 소유와 향락 중심의 비인간적 사회로 변모한다.
마) 죽은 사람에게 냉담한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들, 특히 병자들, 불구자들, 노인들에게 냉담할 수 밖에 없다.
2) 현대인에게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죽음에 대한 다른 한 가지 태도 : 죽음을 의식하지만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태도, 죽음에의 익숙과 이를 통한 죽음에 대한 무관심
가) 텔레비전에 자주 방영되는 폭력물도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나) 다른 사람의 생명에 대한 무관심과 냉담함
3) 죽음은 사실상 일어나지 않는다고 봄으로써, 죽음의 심각성을 약화시키는 태도
☞ 영혼불멸설, 윤회설
(1) 죽음의 심각성을 약화시킴으로써, 죽음의 불안과 공포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도를 보여준다.
(2) 영혼불멸설 : 죽음은 영혼이 육체의 감옥과 땅 위의 무의미한 삶에서 해방되어, 자유와 진리가 있는 영원한 본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3) 현재의 삶에 대한 무관심을 초래, 죽음의 치명성을 약화
C. 삶 속에서 경험되는 죽음
1) 죽음의 의식(Todesbewusstsein), 죽음을 향한 존재(Sein zum Tode, 하이데거) : 인간은 삶 속에서 죽음을 의식하며 죽음의 현실을 경험하게 된다.
2) 하나님 없는 삶의 현실 속에 있는 죽음의 실재는 신약성서에서 더욱 주체화 : 바울은 하나님의 부재와 죽음의 연관성을 깊이 파악함
가) 죽음 : 하나님을 떠나 죄 가운데 사는 인간과 세계의 현실
나) 성서에서 죽음은 단지 삶의 시간의 마지막에 일어나는 생물학적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 없는 인간과 이 세계의 현실 속에 현존한다.
다) 죽음은 삶의 사건이요, 삶 속에서 하나의 현실로 경험된다. 삶은 모든 사랑하는 것들로부터의 분리, 그들과의 이별에 대한 슬픔 속에서 진행된다. 그러기에 삶은 더욱 소중하고 귀하게 느껴진다.
3) 죽음의 슬픔과 치명성은 사랑하는 사람의 마지막 죽음에서 비로소 경험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 사랑의 깊이 속에서 경험된다.
가)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깊이 속에서 죽음의 무성(無性)과 치명성을 경험한다.
나) 사랑의 깊음 속에서 죽음으로 말미암은 사랑의 유한성을 경험하는 것은 고통스럽다.
다) 죽음의 현실을 망각하는 것은 삶을 위하여 지혜롭지 못하다.
4) 자기의 죽음을 수용하고 삶 속에서 죽음을 의식하며 산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삶의 진리에 눈을 뜨게 할 수 있다.
가)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찾아오는 공동의 운명이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한계상황이다.
나) 고통을 당해본 사람이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고, 굶주림을 당해본 사람이 다른 사람의 굶주림을 이해할 수 있다.
다) 삶의 유한성과 제한성을 의식함 : 죽음에 대한 의식은 이웃의 죽음과 고통에 대하여 “무감각한 사람”을, 감각이 있는 사람, 이웃의 죽음의 고통을 함께 아파할 수 있는 “동정적인 사람”(homo sympatheticus)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D. 죽음이란 무엇인가?
1) 인간존재의 궁극화(Verendgültigung)로서의 죽음
2) 삶의 완성으로서의 죽음
3) 하나님의 영원으로 돌아감
☞ 죽음의 긍정적 의미를 택하는 사람은 세속을 허탈한 도사처럼, 모든 것에 달관하는 평안한 모습으로 자기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E. 자연적 죽음과 비자연적 죽음(죄로 말미암은 죽음)
☞ 죽음은 피조물의 창조질서에 속하는가, 아니면 아담의 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있게 된 죄의 결과인가?
1) 성경에 이러한 두 가지 전승이 있음
2) 아우구스티누스
가) 육체의 죽음(mors corporalis), 영원한 죽음(mors aeterna)
나) 죽음의 세 단계 이론 : 죽지 않을 수 있는 존재(posse non mori) → 죽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을 상실하고 사멸의 상태로 빠짐(non posse non mori) → 하나님의 은혜는 그의 선택된 자들에게 죽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을 줌(non posse mori)
3) 17세기 정통주의 신학 : 영적 죽음(mors spiritualis), 육체적 죽음(mors corporalis), 영원한 죽음(mors aeterna)
4) 슐라이어마허 : “자연적인 악은(곧 죽음은)... 죄로부터 생성하지 않는다.”
5) 칼 바르트 : 슐라이어마허의 입장을 따르지만, “죽음 그 자체”와 “사실상의 죽음”(죄인의 죽음=하나님의 심판)을 구분함, “비자연적인 죽음으로부터의 이 해방은 영원한 생명으로서의 해방이기 때문에 자연적인 죽음으로의... 해방을 의미한다.”
6) 알트하우스 : 신학은 인간의 신체적, 생물학적 죽음을 죄로부터, 또는 죄의 타락으로부터 인과론적으로 연역할 수 없으며, 그리하여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벌로 보아서는 안 된다.(브룬너, 틸리케 등도 같은 입장)
7) 헤겔
가) 죽음은 인간과 이 세계를 위한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생각
나) 죽음은 다음 세대의 인간들의 삶을 가능케 하는 긍정적 측면을 가진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다) 죽음은 사회 모든 영역의 노화와 정체를 방지하고 그것을 갱신시키는 긍정적 측면을 가진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8) 죽음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할 때 발생하는 위험성
가) 많은 사람이 죽음을 당해도, 그것을 피할 수 없는 자연적인 것, 당연한 것으로 생각함으로써, 죽음에 대하여 무감각해질 수 있는 위험성을 가진다.
나) 자연적 죽음에 대한 생각은 죽음의 현상과 싸우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생물들을 죽음에 쉽게 방치할 수 있는 위험성을 가진다.
다) 죽음에 대한 무감각은 생명에 대한 무감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라) 죽음을 자연적인 것으로 생각할 때, 죽음을 야기하는 원인들과 상황들을 쉽게 방치할 수 있다.
9) 비자연적인 죽음을 그래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위하여 누리는 충만한 삶
가) 물질적 결핍이 없는 삶, 생명을 유지하고 자기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충분히 실현할 수 있으며 수(壽)를 누리고 죽을 수 있는 물질적 조건이 갖추어져 있는 삶
나) 올바른 사회적 관계들 속에서 이루어지는 삶
다) 목적과 의미가 있는 삶, 무엇을 위하여,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는지가 분명한 삶
라) 충만한 삶은 삶의 시간이 하나님의 은혜로 경험될 때, 가능할 것
마) 부활을 통한 영원한 생명의 약속을 믿고 희망하는 삶
F. 안락사와 생명의 인위적 연장의 문제
1) 안락사(Euthanasie)의 태도 : 죽음의 순간을 인위적으로 앞당겨 옴으로써, 가능한 고통 없이 생명을 끝내는 태도 → 생명의 시간을 인위적으로 단축시키는 것은, 생명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
2) 다른 사람이 어떤 어려움과 희생을 당하든지, 모든 수단과 방법을 최대한 동원하여, 생명의 시간을 인위적으로 연장시키는 태도 → 다른 생명들에 대한 고려와 경외심 결여
5. 죽음과 부활 사이의 중간상태
A. 영혼불멸설
1) 플라톤의 영혼불멸설과 그 이후의 발전
가) 생성 소멸하며 변화무쌍한 세계 속에서 인간의 영원히 변하지 않고 소멸하지 않는 본성적 정체성과 영원한 존재를 보장
나) 죽음에 대한 인간의 자유와 세계의 모든 사물들에 대한 인간의 숭고함을 보장
다) 죽음은 그의 치명성을 상실
라) 영혼불멸설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비로우심과 신실하심이 보장된다.
2) 영혼불멸설의 문제점
가) 교회는 인간의 실존을 위하여 없어서는 안 될 문제들, 정치, 경제, 사회의 문제들에 대하여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게 된다.
나) 현실에 대해 등을 돌린 삶의 태도(Weltabgewandtheit)를 조장
다) 이 세계를 지배하는 악의 세력을 방치하고, 방치함으로써 방조하는 기능을 행사
라) 칼 라너 : 우리의 삶의 현실이 죽음을 통과하여 곧장 계속된다는 것은 생각될 수 없다.
마) 에밀 브룬너 : 플라톤적인 영혼불멸 거부, “오직 하나님의 창조적 말씀 속에” 근거한 참으로 “기독교적인, 성서적이며 그리스도론적인 불멸의 사상” 인정
3) 영혼불멸설과 죽은 자들의 부활
가) 부활신앙 : 없는 것을 있게 하며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신뢰함
나) 단 한 번뿐이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의 삶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고, 진지하게 그리고 열심히 살려는 삶의 의욕을 가질 수 있다.
다) 이 세계의 현실에 대한 관심과 사회적 현실 속으로의 개입, 의의 사랑과 자기희생, 죽음의 세력의 극복을 기다림
B. 연옥설
1) 연옥설의 유래와 내용
가) “purgatorium” : “정화의 장소”(Läuterungsort), “정화시키는 불”(Fegefeuer)
나) 1336년 교황 베네딕트 12세의 교서를 통하여 가톨릭교회의 공적교리가 됨
(1) 죽은 자들은 잠자는 상태에 있다는 교회의 전통적 이론을 거부하고, 죽은 자들은 죽음과 동시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고 주장
(2) 자기의 죄에 상응하는 벌을 받지 않았고, 이리하여 자기의 죄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 → 죽은 자들은 그들의 죄를 완전히 벗기까지, 연옥의 불 속에서 정화되어야 한다.
다) “정화의 불 곧 벌과 정화의 상태가 있다. 짐스러운 죄들과 시간적인 죄의 벌에 묶여있는 영혼들은, 이 상태 속에서 정화된다.” : 연옥은 믿음 가운데서 죽은 신자들을 완전히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이다.
라)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는 모든 신자들은 횡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죽은 자들을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기도할 수 있고,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에게 제물을 바침으로써, 정화의 과정이 빨리 끝나도록 도와줄 수 있다.
마) 죽은 자들을 위한 성찬 곧 죽은 자들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희생제물을 바치는 미사
바) 연옥의 장소와 시간적 길이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그것은 신적 신비에 속한다.
2) 연옥설의 타당성과 문제점
가) 살아있는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의 연대성과 사귐을 말하는 타당성
☞ 그리스도를 만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모든 사람들을 만난다. 이 만남은 죽음의 한계를 넘어선다. 그는 살아있는 사람들은 물론 이미 죽은 사람들과도 만난다. 살아있는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 모두가 그리스도의 몸에 속하기 때문이다. 죽은 사람들과 살아있는 사람들의 이러한 연대성 속에서 살아있는 사람들의 중보의 기도를 통하여 죽은 사람들은 망각의 세계로 빠지지 않고, 살아있는 사람들이 의식 안에 현존한다.
나) 하나님의 조건 없는 은혜(sola gratia)와 절대적 사랑에 모순됨
(1) 죽음 후에도 하나님의 죄의 용서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무조건적 은혜와 사랑으로 말미암아 가능하지, 인간이 연옥에서 벌을 당함으로써, 혹은 살아있는 사람들이 죽은 사람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바치는 기도나 헌물의 업적을 통하여 가능하지 않다.
(2) 종교개혁자들 : 우리 인간은 자신의 능력이나 공적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때문에 믿음을 통하여” 의로워질 수 있다.
(3) 루터 : 1530년 「정화의 불에 대한 항의서」 발표, 「슈말칼덴 조항」에서 “정화의 불의 미사 대목장(Messejahrmarkt)”이라고 비난
(4) 칼뱅 : “정화의 불은 파멸을 가져오는 사탄의 조작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공허하게 만들며, 하나님의 자비를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럽게 하며, 우리의 신앙을 동요시키고 그것을 뒤집어버린다! 가톨릭교회의 이론에 의하면, 정화의 불은 죽은 사람들의 영혼들이, 그들의 죽음 다음에 그들의 죄를 위하여 행할 수밖에 없는 보상(Geneugtuung)에 불과하지 않은가? 죄를 보상하는 벌을 우리가 받아야 한다는 망상이 깨어졌다면, 정화의 불도 그 뿌리에서부터 깨어졌다! ... 그리스도의 피가 신자들의 죄에 대한 유일한 보상이요... 유일한 속죄이며 유일한 정화이다... 정화의 불은... 그리스도에 대한 무서운 모독이다.”
(5) 알트하우스 : 연옥설이 말하는 죄의 면제는, 죄책과 벌이 유한하며 그 마지막에는 구원이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 곧 면제를 통하여 필연적으로 구원이 온다는 생각을 전제하고 있다.
다) 성서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기도와 참회의 실천」에 근거함
(1) 레오나르도 보프가 제시하는 성서적 근거 : 마카베오 후서 12:39-46, 고전 15:29, 고전 3:11-15
(2) 슈마우스(M. Schmaus) : 예수는 연옥에 대한 유대인들의 생각을 이미 잘 알고 있었으며, 그는 이것을 전제하였기 때문에, 연옥에 대하여 특별히 말할 필요가 없었다고 주장
라) 영혼불멸설에 근거하고 있음 : 연옥설은 몸 없는 영혼의 영원한 존속을 전제한다. 영혼불멸설은 연옥설과 결합하였다.
마) 일련의 가톨릭 신학자들도 연옥을 하나의 특정한 공간으로 표상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 “피안에 있는 일종의 강제 수용소”와 같은 것으로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
3) 연옥의 현대적 해석
가) 오늘날 일련의 가톨릭 신학자들은 연옥을 죽음 다음에 마지막 부활이 있을 때까지, 인간의 영혼이 불을 통하여 정화되는 장소 내지 시간적 과정으로 보는 전통적 이론을 거부하고, 연옥을 “죽음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마지막 정화와 완성의 사건으로 해석한다.
나) 레오나르도 보프 : “죽음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마지막 정화와 완성의 사건(“장소”가 아닌 “인간의 상황”으로 이해)
다) 연옥은 죽은 다음에 오는 특정한 장소나 시간의 과정이 아니라, 죽음의 과정 속에서 일어나는 마지막 회개와 정화의 과정을 가리킨다. 이 과정을 거친 사람에게 있어서 죽음은 마지막 자기완성이요, “사랑의 가장 숭고한 형식”으로,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로 경험된다.
라) 라칭어(J. Ratzinger) : 특정한 장소나 시간적 길이로서의 연옥을 거부, “주님 자신이 인간을 변화시키고, 그의 영광스럽게 된 몸과 ‘일치하게’(konform) 만드는 심판하는 불”이다.
마) 그닐카(J. Gnilka) : 연옥의 정화하는 불은 오시는 주님을 가리킨다. “자기를 계시하는 하나님... 지극히 거룩한 그분의 접근할 수 없음에 대한 상(Bild)”
바) 그레스하케(G. Greshake) : “우리는 ‘연옥’이란 표현을... 피하고, 그 대신 하나님과의 만남의 요소로서 정화와 정결에 대하여 말해야 할 것이다.”
사) 한스 큉(H. Küng) : “연옥은 그의 은혜의 진노 안에 계신 하나님 자신이다. 정화는 사람을 심판하고 깨끗케 하고 해방하며 계명하고 치유하고 완성케 한다는 뜻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아) 죽음을 눈 앞에 둔 사람의 내적과정을 적절히 해석한 것 : 우리는 이 과정을 가리켜 반드시 “연옥”이라 부를 필요는 없을 것이다.
C. “죽음 속에서의 부활”
1) 동기와 내용
가) 인간은 영혼과 육체의 통일체로서 세계사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며 자기를 완성하여 나간다.
나) 한 인간의 죽음의 순간은 종말의 마지막 시간의 앞당겨 일어남[先取]이요, 역사의 종말에 있을 죽은 자들의 부활의 순간이다.
다) 불트만의 실존론적 해석의 영향 : 종말은 역사의 미래가 아니라, 개인의 죽음 속에서 앞당겨 일어난다. 죽음은 시간의 영역에서 영원 속으로, 영원한 현재 속으로 들어감을 뜻한다. 그러므로 죽음과 부활 사이의 “중간상태”는 사실상 있을 수 없다. “중간”이란 말은 인간의 물리적 시간의 개념에 속한다.
라) 장점
(1) 영혼과 육체의 이원론을 버리고, 인간존재의 불멸과 몸의 부활을 결합시킨다.
(2) 종말의 마지막 완성을 단순히 역사의 미래에서 찾지 않고, 역사의 현실과 과정 속에서 찾는다.
(3) 육체 없는 영혼이 잠정적으로 머무는 중간상태 곧 연옥에 대한 생각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연옥에 대한 생각이 철폐될 경우, 연옥에 머무는 사람들을 위한 미사와 면죄가 불필요하게 된다.
다) 가톨릭교회는 1979년 “죽음 속에서의 부활”을 거부함 : 그것은 가톨릭교회의 기초를 흔들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라) 칼 라너는 이 교리를 인정함 : “‘몸’과 ‘영혼’을 동시에 가진 인간의 단 하나의 그리고 전체적 완성이 죽음과 함께 직접 일어나고, ‘육의 부활’과 ‘보편적 심판’이 세계의 시간적 역사를 ‘따라’(entlang) 일어나며, 양자가 각 사람들의 개별적 심판들의 총화와 일치한다”는 생각은, “이단이 아니다.”
마) 레오나르도 보프는 이 교리를 거부함 : “죽음은 영원 속으로 인간의 넘어감(Übergang)이다.” 부활은 바로 여기에 있다. 죽음 속에서 일어나는 “영원 속으로 넘어감”이 곧 부활이다. 이러한 생각은 부활의 새로운 실존방식에 상응하지 않는 “의인론적 상”(anthropomophisches Bild)
2) 문제점
가) 우리는 이것을 가리켜 보편적 부활이라 말할 수 없다.
나) 슈마우스 : 얼마나 많은 죽음 속의 부활들이 궁극적이며 보편적인 부활과 일치할 것인가?
다) 부활이 개인의 죽음 속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할 때, 보편적 부활과 함께 올 죽음의 마지막 극복, 이 극복과 함께 올 하나님의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메시야적 전망과 희망이 약화되거나 사라질 수 있다.
라) 핫트루프(D. Hattrup) : 금방 죽은 남편이나 부인의 시체가 굳어지고 식어져 가는데, 그들이 완전한 완성에 도달하였으며 부활하였다는 것을 해명하기 어려울 것
마) 라칭어 : “죽음 속의 부활”에 있어서 인간의 영혼과 육체의 “비분리성”(Unteilbarkeit)과 인간의 신체적 결합성은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한다. “죽음 속의 부활”은 “영혼불멸설의 숨은 회복”을 초래할 수 있다. “죽음 속의 부활”은 그 속에서 완성되었다고 보아야 할 역사와, 완성되지 않은 채 계속되는 역사의 간격을 해명하지 못한다.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한 개인의 삶의 시작과 현재의 미래, 그리고 죽음 저 너머에 있는 초개인적인 역사의 완성의 관계를 설명하지 못하며, 어떤 의미에서 개인의 죽음과 함께 역사 전체가 이미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는지 납득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다.
바) 판넨베르크 : 성서에 있어서 죽은 자들의 부활은 “구원의 미래로서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과 결합되어 있으며, 이 미래는 세례 받은 자들과 신자들의 현재 속으로 이미 들어와 작용하고 있지만, 그리스도인들의 기다림은 이것을 지향한다. 부활의 사건이 근본적으로 개인의 죽음의 시점에 일어나는 것으로 파악하고,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과 결합하여 일어나는 것으로 파악되지 않을 때, 이 사건의 신체성(Leiblichkeit)이 생각되어질 수 없으며, 이리하여 개인의 구원의 완성은 폐기되고, 인류의 완성과 관계없는 것으로 독립되어질 것이다.”
D. “전적 죽음”과 그 문제점
1) “전적 죽음”(Ganztod, total death) : 영혼의 죽음
2) 칼 바르트 : 죽음 다음에 인간의 영혼이 남아서 “나비처럼 무덤 위를 날아다니다가, 어딘가에 보존되어 죽지 않고 계속 산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교적인 것이다.
3) 엘러트(W. Elert) : 부활은 완전한 “새 창조”이다. 그것은 “지상에 살았던 실존의 완전한 끝으로서의 죽음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4) 드 퓌리(R. de Pury) : 만일 죽음이 전적인 것이 아니라면, 부활은 하나님의 전적 사역이 아니라 절반 사역일 것이다. 우리가 영혼과 몸에 있어서 전적으로 죽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몸과 영혼에 있어서 전적으로 다시 살리실 것이다.
5) 윙얼(E. Jüngel) : 영혼불멸설과 부활은 철저히 대립한다. 죽음은 “삶의 상황들을 전적으로 중지시키는 무관계성(Verhältnislosigkeit)의 사건”이다.
6) 하인리히 오토 : 죽음과 함께 인간의 존재는 완전히 폐기되고, 죽음과 부활 사이의 중간시간에는 하나님만이 유일한 “의미의 담지자(Sinn-Träger)로 계신다.
7) 알트하우스 : 인간의 전적 죽음과 함께 죽은 자의 “새로운 현존의 형태” 주장
8) “전적 죽음설” : 인간의 구원의 가능성을 인간 자신 안에 주어져 있는 인간의 본성(Natur)이나, 인간존재 자체의 능력에 있는 것으로 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에 있는 것으로 보는, 변증법적 신학의 구원론적 입장에서 유래한다.
9) 죽음 후에도 죽지 않고 존속하는 것이, 인간에게는 아무 것도 없다. 몸의 죽음과 함께 영혼도 죽는다. 죽음은 인간의 전적 폐기(Annihilation)이다. 죽음 후에도 남는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 뿐이다. “인간에게서 남는 것은, 신적인 그 무엇도, 피조물적인 그 무엇도 아니다. 그것은 피조물에 대한 창조자의 행위와 관계이다.”
10) 하나님과 인간의 질적 차이와, 부활에 있어서 하나님의 전적 활동을 드러내는 점에서 타당성을 가짐
11) 문제점 : 만일 죽음을 통하여 인간의 존재가 폐기되었고 완전히 무로 돌아갔다면, 마지막 부활에 있어서 그의 정체성은 어떻게 회복될 수 있고 또 확인될 수 있는가? 그리고 인간의 그 무엇이 부활하게 되는가? 인간이 완전히 죽어버렸다면, 그리하여 그의 정체성을 나타내어 줄 수 있는 그 무엇도 남지 않는다면, “과연 누가 부활되는가?” 만일 죽음과 함께 인간의 존재가 완전히 폐기되어 버리고 없었떤 것처럼 되어버린다면, 살아있는 인간의 윤리적 책임성이 파괴되어버리지 않겠는가? 우리는 삶의 의미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9) 바흘(G. Bachl)의 반박 : “만일 주검이 모든 사람에 대하여 무(無)라면... 죽음은 결코 모든 인간에 대한 위대한 의를 뜻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무죄나 유죄를 무로 만들 것이며, 이 세계 속에서 무섭게 갈라져 나오는 차이를 완전히 무의미한 것으로 전락시킬 것이다.”
E.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상태(영혼수면설)
1) 루터
가) 죽은 자들의 상태를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벗어났으며 의식과 지각이 없는 깊은 잠으로 생각함
나) “그가 오셔서 무덤의 문을 두드리고, 마르틴 박사, 일어나거라! 하고 부를 때까지, 우리는 자야 한다. 그러면 나는 한 순간에 일어날 것이며, 영원히 그와 함께 기뻐할 것이다.”
다) “눈이 닫히자마자 너는 부활할 것이다. 수천 년이 너가 잠깐 잠잔 것과 같을 것이다. 우리가 밤에 시계소리를 듣지만, 얼마나 오랫동안 잠을 잤는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죽음 속에서는 수천 년이 이보다 더 빨리 지나갈 것이다.”
라) 죽음이 인간에 대한 그의 힘을 잃어버렸다는 것
2) 신약성서에 의하면 죽은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바울의 대표적인 개념인 “그리스도 안에”는 살아있는 자들과 죽은 자들을 포괄한다.
3) 이종성 : 그리스도인들은 죽은 다음에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으로 이해함, “죽음은 생의 마지막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의 시작을 의미한다.”
4) 죽은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상태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 죽음을 통하여 인간은 무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주권과 사귐 속으로 들어가며, 마지막 부활이 일어날 때까지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상태에 있다. 잠자는 상태 가운데서 그들은 살아있는 자들과 “그리스도의 몸”을 형성한다. 그리스도의 몸은 살아있는 자들로써만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들과 죽은 자들로 형성된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로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교통 안에 있다. 물론 그들의 실존방식은 다르다. 그러나 죽은 자들은 무의 세계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상태에 있으며, 살아있는 자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교통을 이룬다.
5) 일련의 신학자들은 수면설을 거부한다.
6) 오늘날 많은 학문의 영역에 있어서 육체 없는 하나의 독립된 실체로서의 영혼이란 인정되지 않는다.
7) 성서에는 죽음 후의 중간상태에 대한 일관된 이론이 없다. 그 속에는 중간상태에 대한 다양한 진술들이 있으며, 이 진술들 가운데는 모순되는 것들도 있다.
☞ 죽음 후에 인간은 수면상태에 있다고 보는 진술들이 있는가 하면, 의인은 하늘나라에 있고 악인은 지옥에 있다는 진술들도 있다. 따라서 수면설은 “성서적 근거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 구약에 나타나는 “스올”은 죽은 자의 상태를 잠자는 상태와 비슷한 것으로 나타낸다.
8) 수면설은 결코 “생명의 중단”을 뜻하지 않는다.
☞ 죽은 자들은 잠자는 상태 속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살아있는 자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형성한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결합되어 있으며 그리스도의 우주적 교통 안에 있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자들은 죽은 자들을 잊어버릴 수 없다.
F. 영혼의 인격적 이해
1) 푈만(H.G. Pöhlmann) : “영혼”을 “인간의 자아”(Ich des Menschen)와 동의어로 사용함
2) 라칭어 :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존재, 주검 속에서도 파괴될 수 없는 인간의 인격의 존재의 담지자(Träger)”
G. 윤회설과 “죽음 후의 생명”
1) 윤회설의 내용과 문제점
가) 죽은 자의 영혼이 그의 친족이나 부족의 구성원 속에서 다시 태어난다고 믿는 형태, 영혼이 식물이나 동물 혹은 벌레 속에서 완전히 변형된다고 믿는 형태
나) 문제점 : 영혼불멸설을 전제함. 자기의 과거에 대해 아무 기억도 없고 의식도 없는 영혼이, 어떻게 자기의 과거를 윤리적으로 책임질 수 있으며 자기를 실현시킬 수 있겠는가?
2) “죽음 후의 생명”의 문제
가) 생물학적 죽음, 총체적 죽음을 당한 것이 아니라, 의료학적 죽음의 상태에 있다가 재활한 사람들
나) 영혼과 육체의 이원론을 전제함 → 이 세계의 삶을 또다시 하나의 일시적 “통과과정”에 불과한 것으로 보게 하며, 이로 말미암아 삶의 유일회성과 진지성을 약화시킬 수 있는 위험성
7. 그리스도의 재림
A. 재림의 의미와 성서적 배경
☞ 역사의 종말에 권능과 영광 가운데서 다시 오시는 것 → “다시 오심”
1) 파루시아(parousia) : 통치자 혹은 높은 지위를 가진 관리의 방문, 황제의 영광스러운 도착 → 오심, 도착 / 현재, 현존, 임재(presence)
2) 나타나심(epifaneia) : 그리스도의 두 번째 오심이 더 이상 곧 일어날 것으로 생각되지 않았음을 시사하는 단어
B. 재림 지연의 문제
1) “재림의 지연”(Parusieverzögerung, 슈바이처)
가) 첫 번째 “재림의 지연” : 예수는 제자들의 복음전도여행이 끝마치기 전에 종말론적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오지 않았고, 예수는 자기가 실수하였다는 것을 알게 됨
나) 예수는 자신의 메시야적 고난과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도래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나라는 오지 않음
2) 재림의 지연을 주장하는 이들은, 초대 기독교 공동체가 묵시사상적 언어로써 묘사하는 예수의 신화적이며 환상적인 재림을 더 이상 기다리지 않는다.
3) 오스카 쿨만, 베르너, 큄멜(Werner Kümmel) :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지만, 예수는 그의 조속한 재림을 예고함에 있어서 착오를 일으켰다고 주장
4) 후크마, 래드(G.E. Ladd)의 반박
가) 공관복음서에서 ① 임박한 재림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구절, ② 재림이 시간적으로 먼 미래에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일련의 구절들, ③ 재림시기의 불확실성을 강조하는 말씀들과 비유들 분석
나) 이 본문들은 예수의 재림의 시간적 임박성 자체를 강조하려는 데 그 목적을 가진 것이 아니라, 깨어서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고 모든 시련과 고통을 참고 견디며, 빛의 자녀로서 살 것을 강조하는 데에 그 목적을 가진다.
C. 지금 오고 계시는 주님 : 재림의 현재와 미래
☞ 오토 베버(Otto Weber) : “파루시아”는 지금 전혀 계시지 않는 예수가 역사의 먼 미래에 “다시 오신다”(Wiederkunft)는 것을 뜻하지 않고, “언제나 가까이 앞에 서 있는 ‘도착’(Ankunft)을 말하는데... 메시야적 영광 가운데서 일어나는 그리스도의 오심(Kommen)”을 뜻한다.
D. 재림의 목적은 무엇인가?
☞ 부활과 함께 시작된 “사람의 아들”의 메시야적 사역 곧 하나님의 우주적 통치 완성
8. 천년왕국의 희망
A. 성서적 근거
1) 직접적 근거 - 계 20:1-6
2) 1,000 : 하나님은 일곱째 날 곧 나머지 1,000년 동안의 통치를 메시야에게 맡긴다. 메시야 왕국은 1,000년 동안 존속할 것이라 생각되며, 이 기간 동안 사탄은 결박되어 있을 것이라는 사변에서 나온 것이 소위 천년왕국의 비전이다.
3) 이사야서에 의하면 이 하나님의 왕국은 시온에 중심을 둔, 모든 민족들을 위한 메시야적 평화의 왕국으로 표상된다.
4) 바울은 천년왕국에 대하여 직접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천년왕국적 기다림은 그의 서신 도처에 나타난다. :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구원과 통치를 기다리고 있다.
5) 성서는 천년왕국에 대하여 직접 말하지 않지만, 천년왕국설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차안적, 현실적 통치에 대한 암시와 기다림을 도처에 말하고 있다. 사실 성서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 위에 세워지기를 동경하는 천년왕국적 기다림과 희망으로 가득하다.
B. 천년왕국설의 역사적 발전 : 요아힘 폰 피오레의 천년왕국설
1) 주후 70년 예루살렘 성전 파괴 전후에 천년왕국설은 주로 유대인 계통의 그리스도인들과, 예수의 인간적 본성을 강조하는 에비온주의자들 사이에 퍼져 있었다.
2) 기독교가 로마의 박해를 받던 시대에 등장한 천년왕국설은, 당시의 유수한 신학자들의 환영을 받았다. : 2세기의 파피아스, 유스티누스, 이레네우스, 몬타니스트들, 터툴리아누스, 3세기의 히폴릿, 율리우스 아프리카누스 등
3) 기독교가 로마의 제국의 제국종교 내지 국가종교가 되면서, 천년왕국설은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사탄의 상징이었던 로마황제들이 이제는 하나님의 사자(使者)로 생각되었고, 로마제국이나 로마가톨릭교회가 천년왕국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서구의 국가종교가 된 기독교는 하나님의 미래에 대한 천년왕국적 희망을 상실하고, 개인의 영혼이 영원히 거할 피안에 대한 희망을 가르치면서, 국가종교의 특권을 누리는 역사가 전개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천년왕국설을 교회론적으로 해석하여, 교회를 땅 위에 있는 천년왕국과 동일시함으로써, 천년왕국에 대한 종말론적 희망은 크게 약화되었다.
2) 요아힘 폰 피오레(Joachim von Fiore)
☞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가종교가 된 후 약 1,000년 동안 거의 망각상태에 있던 천년왕국의 희망을 재활시킨 인물
가) 시대구분
(1) 성부의 시대 : 율법, 두려움, 종의 신분 → 율법 아래 있는 결혼한 자들의 질서
(2) 성자의 시대 : 은혜, 믿음, 자유인의 상태 → 성자의 은혜 가운데 있는 제사장들의 질서
(3) 성령의 시대 : 더 풍성한 은혜, 사랑, 친구의 상태 → 성령의 자유 아래 있는 수도사들의 질서
나) 교회의 계급제도(Hierarchie)는 있겠으나, 성령으로 충만하여 완전히 다른 다른 모습을 가질 것이다. 교회는 “성직자의 교회”에서 “요한의 교회”, “영적 교회”로 변모할 것이다.
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지금 곧 1260년에 임박하였다고 믿었다. 두 번째 “교회의 시대”와 세 번째 “성령의 시대”가 완전히 단절된 것으로 보지 않았다.
라) 요아힘 폰 피오레의 영향을 받은 이들 : 13-14세기 프란시스파의 영성주의자들(Franziskaner-Spirituale), 토마스 뮌처, 재세례파
(1) 프란시스파의 영성주의자들은 당시 가톨릭교회의 계급제도와 세속화를 비판하고, 요아힘의 역사해석에 숨어있는 유토피아적 천년왕국 사상을 가톨릭교회에 대한 비판의 근거로 삼았다.
(2) 프란시스파의 영성주의자들이 교회와 국가의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마) 블로흐의 평가 : 요아힘은 “빛의 나라” 곧 하나님의 나라를 “비록 역사의 마지막 상태이긴 하지만, 피안과 피안의 거짓위로에서 역사 속으로” 옮겼다.
3) 루터, 제2스위스 신앙고백 : 천년왕국설의 유토피아적 사상을 거부함
가)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 신앙고백 : “죽은 자들의 부활 이전에 성자들과 경건한 자들이 (땅 위에) 세속적인 왕국을 가질 것이며, 모든 하나님 없는 자들을 제거할 것이라고 이제 다시 강조하는 일련의 유대교적 이론들을 배격한다.”
나) 루터는 농민전쟁에 참가한 농민들을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단죄
4) 코메니우스(Joh. Amos Comenius) : 천년왕국설을 기독교와 동일시함
5) 18세기 경건주의(스페너, 벵엘, 외팅어), 19세기 자유주의(로테, 폰 바더, 블룸하르트, 라가츠) : 천년왕국설 부활
C. 천년왕국설의 종류들
1) 전천년왕국설(Prämillenarismus) : 먼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신 다음, 천년왕국이 올 것이라는 주장
가) 계 20장에 묘사되어 있는 천년왕국을 문자적으로 이해
나) 세계사에 대한 비관주의적, 결정론적 해석에 있어서 후기 유대교의 묵시사상적 구조를 받아들임
다) 계 20:4의 첫째 부활(천 년 동안 그리스도의 통치에 참여할 성도들의 육체적 부활)과 20:12의 둘째 부활(천년왕국이 끝난 후 모든 악인들의 육체적 부활)을 동일한 유형의 부활 곧 육체적 부활로 해석함
라) 세대주의적 전천년왕국설은 휴거가 대환난 전에 있으며, 교회는 대환난을 통과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반해, 역사적 전천년설은 휴거는 대환난 끝에 있으며 교회는 환난을 통과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2) 세대주의적 천년왕국설=세대주의(Dispensationalismus)
가) 영국의 넬슨 다르비(Nelson Darby)에 의해 처음으로 시작
나) 성서는 그 전체에 있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대한 증언의 책인데,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곧 구원사는 성서가 증언하는 여러 가지 시대들(dispensations)을 통하여 진행된다.
다) 시대구분 : ① 무죄(innocency)의 시대(타락 이전 아담의 시대), ② 의식(conscience)의 시대(아담에서 노아홍수까지의 시대), ③ 인간통치(human reign)의 시대(바벨탑 이후의 시대), ④약속(promise)의 시대(아브라함에서 모세까지의 시대), ⑤ 모세율법의 시대(모세에서 그리스도까지의 시대), ⑥ 은혜의 시대(그리스도 이후부터 공중휴거까지의 시대), ⑦ 천년왕국의 시대
☞ 은혜의 시대 마지막 7년 : “야곱의 수고의 시간”
라) 세대주의 신학 : 우리시대의 세계사적 사건들이 성서에 문자적으로 예언되어 있다고 주장
마) 그리스도인의 공중 휴거설 : 휴거, 환난
☞ 휴거 :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살아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를 공중에서 영접하기 위하여, 땅에서 구름 속으로 들리워 올려진다는 설
바) 주장한 이들과 배격한 이들
(1) 주장한 이들 : 왈부드(F.J. Walvoord), 『스코필드 주석 성경』, 『Bibliotheca Sacra』, 린지(Hal Lindsey)
(2) 무디(D. Moody)는 배격함
(3) 최근 한국사회에 큰 폐해를 남긴 시한부 종말론과 공중휴거설은, 역사적 전천년왕국설과 세대주의적 전천년왕국설에 근거한다.
(4) 한국의 초기 선교사들과 조직신학자들은 역사적 전천년왕국설과 세대주의 신학을 가르쳤고, 이것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교회 안에 보편화되어 있기 때문에, 시한부 종말론과 공중휴거설이 등장할 수 밖에 없었다. 평양신학교의 조직신학 교수 이율서(W.D. Reynolds) 선교사, 박형룡 박사는 전천년왕국설을 가르쳤으며, 그 뒤를 이어 현재 총신대학교의 조직신학 교수들은 역사적 전천년왕국설에 머무르고 있다.(정일웅의 주장)
사) 문제점
(1) 천년왕국과 관련된 성서의 기록들, 예를 들어 구원받을 사람의 수 144,000, 7, 천년, 666, 열 뿔 등은 상징적 의미로 해명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점
(2) 기독교의 종말신앙이 “이 땅의 인간적 삶과 문화에 대하여는 언제나 문화비관주의적 입장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며, “극단적으로는 삶과 문화를 부정적으로 볼 뿐 아니라 현실문제에 무관심과 도피적 신앙의 모습을 지니게” 한다는 점
(3) “특히 이원론적 세계관(세상은 악하다는 이해)의 이해 속에서 세상문화를 적대시하는 모습은 특이한 신앙성격이라고 할 것이다.”
3) 후천년왕국설(Postmillenarismus) : 천년왕국이 세워진 다음, 그리스도께서 재림할 것이라는 신앙, 이 세계 안에 있는 것들에 대하여 낙관적 입장
가) 특징
(1) 성서를 상징적 또는 영적으로 이해
(2) “낙관주의적 세계관과 역사관”에 기초를 둠
(3) 천년왕국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이 세계 속에서 이미 시작하였다고 봄
(4) 천년왕국은 현재의 시대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음
나) 문제점 : 천년왕국을 세울 수 있는 인간과 이 세계의 가능성을 신뢰하면서 하나님의 능력과 개입을 배제하며, 마지막 때의 징조들을 과소평가 할 수 있는 문제점
4) 무천년왕국설(Amillenarismus) : 모든 종류의 천년왕국을 부인한다는 인상을 주기 쉽다. 그러나 이 인상은 잘못된 것이다.
가)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천년왕국이 역사적 미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에서부터 시작하여 지금 실현과정 속에 있다는 것
나) 아담스(J. Adams)는, 무천년왕국설이란 용어는 “실현된 천년왕국설”(realized millenialism)이라는 표현으로 대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 “하나님의 왕국은 승리하신 그리스도가 말씀과 성령으로 자기 백성들을 통치하심으로써 지금 이 세상 속에서 나타나고 있다고 주장한다.” 예수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서 우리는 이미 천년왕국 안에서 살고 있다.
라) 무천년왕국설과 후천년왕국설의 차이는 분명하지 않다. → 한 가지 차이점 : 후천년왕국설은 예수의 재림을 기점으로 세계의 점진적 변화와 발전을 통하여 발전되다가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에 천 년 동안 있을 완전한 형태의 천년왕국을 믿는 반면, 무천년왕국설은 천년왕국을 예수의 초림을 기점으로 확장되어 가다가 그의 재림과 함께 완성에 이를 하나님의 나라로 이해한다.
마) 대표적 학자 : 벌코프(L. Berkhof), 카이퍼(A. Kuyper), 바빙크(H. Bavinck), 렌스키(Lenski), 영(E.J.Young), 보스(G. Vos)
5) 요한계시록 20장에 기록되어 있는 천년왕국의 이야기를 글자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우리는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들에 부딪히게 된다. 왜 하나님께서 1,000년 동안만 사탄을 옥에 가두어 두시는지, 사탄이 갇혀있을 감옥이 우주 어디에 있는지, 왜 하나님께서 사탄을 다시 풀어주시는지, 우리는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6) 천년왕국설의 기록된 동기 내지 목적
가) 요한계시록은 기독교가 외적으로는 박해를 당하고 내적으로는 이단의 유혹을 받는, 그리하여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용기를 잃고 실의에 빠지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기록되었다.
나) 역사의 종말에 대한 객관적 정보(Information)를 주려는 것이 아니라, 로마사회에서 추방을 당하고 박해와 순교를 당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땅 위에 세워질 그리스도의 통치를 제시하면서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한 것
7) 성서의 빛에서 볼 때, 후천년왕국설과 무천년왕국설이 성서의 종말론적 희망에 더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메시야적 왕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이기고 역사 안에서 이미 시작하였으며,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의 믿음과 희망과 사랑 속에서, 또 이 세계의 변화를 통하여 앞당겨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8) 중요한 문제는 계 20장은 물론 성서의 많은 본문들이 시사하는 천년왕국의 메시야적 정신을 파악하고, 그 정신을 실천하는 일이다.
D. 천년왕국적 희망의 의미
1) 천년왕국의 희망은 현실의 시련과 고난과 역경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궁극적 승리를 약속한다.
☞ 불의의 세력이 아무리 강할지라도, 의의 세력이 이길 것이다. 악의 유혹과 억압과 핍박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에게 충성하는 성도들, 그리스도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릴 것이다. 역사는 결국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역사의 주관자는 악의 세력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2) 천년왕국의 희망은 세계의 대파멸을 기다리지 않고, 온 세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통치를 기다린다.
☞ 세계의 종말은 우주적 대파멸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다스리는 그리스도의 나라 곧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있다. 천년왕국의 희망은 세계와 역사에 대한 좌절과 후퇴와 무관심을 거부하고, 희망과 용기와 새로운 관심과 개입을 조장한다.
3) 천년왕국의 희망은 마귀의 세력들로 가득한 현 세계의 철저한 변화에 대한 요구이다.
가) 세계를 파멸로 이끌고 가는 마귀의 세력들이 감금되어야 한다. 천년왕국의 희망은 마귀의 세력들과 그들이 지배하는 세계현실에 대한 부정이요 비판이며,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에 대한 꿈과 동경이다.
나) 오토(H. Otto)
(1) “현재 속에서 폭발력이 되는 미래의 꿈이요, 압박(Drängen)으로 되는 기다림”
(2) “하나님과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는 초월적 이상이 아니라, 하늘과 그리고 땅에 대한 진리이며, 이 진리는 일상의 행동 속에서 개입하는 사람들만이 인지할 수 있다는 것”
다) 케엘(M. Kehl) : “세계의 종말이 오기 전 땅 위에 있을 그리스도의 평화의 나라에 대한 그것의 이상에는, 특별히 기독교인 것이라 불릴 수 있는 유토피아적 잠재력의 커다란 부분이 수렴되었다.”
4) 천년왕국의 희망은 역사의 종말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차안성을 시사한다.
☞ 이종성 : “하나님의 사역은 우리의 역사에 대하여 긍정하신다. 그 점에 있어서 천년왕국설은 타당성을 내포하고 있다. 환상적 천년왕국설은 거절되어야 한다. 그러나 상징적으로는 그것이 옳다. 그것은 구체적이고 역사적 상황과의 관계를 말하며, 지상에 현재 여기에 있는 모든 것을 오고 있는 왕국과 연결시킬 것에 관심을 가진다.”
5) 하나님의 통치의 현실성과 물질성을 시사
가) 하나님의 주권이 온 세계 안에, 이 땅 위에 세워져야 한다. 이리하여 천년왕국의 희망은 “종말론에 있어서 땅을 포기하는 도케티즘을 방지한다.”
나) 벌코프 : 천년왕국은 교회의 심령주의(Spiritualism)을 거부한다.
다) 오트 : “천년왕국설의 메시지는 케리그마적 무게를 가지고 있다.”
라) 청년 바르트 : “천년왕국설이 없다면... 도덕적 인격성의 이념이 없을 때나 마찬가지로, 윤리가 없을 것이다.”
마) 하르낙(A. von Harnack) : “소위 천년왕국설은 복음이 헬레니즘화 되지 않은 곳에서는 어디서나 발견되며, 가장 오래된 선포의 주요 부분으로 인정될 수밖에 없다.”
E. 천년왕국적 희망의 역사적 형태들
1) 정치적 형태 : (로마제국 하의) 천년왕국적 제국신학, 18-19세기 그리스도의 왕국의 선교, 미국의 천년왕국적 이상
2) 종교적 형태 : 티코니우스(Ticonius), 아우구스티누스, “교황 왕정제도”(Papstmonarchie)
3) 세속적, 무신론적 형태 : 근대의 고전적 유토피아 사상(토마스 무어, 캄파넬라, 프란시스 베이컨), 계몽주의(레싱, 칸트, 헤겔), 휴머니즘,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이론
9. 죽은 자들의 부활
☞ 기독교는 역사의 종말에 일어날 모든 죽은 자들의 부활을 믿는다. : 인간의 생명은 이 세상에서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역사의 종말에 다시 살아나서 각자의 행위에 따라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무책임하게 살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부활과 최후심판을 믿으면서 하나님의 계명에 따라 바르게 살아야 한다.
☞ 기독교의 신앙은 성서의 인간관에 기초한다. 성서에 의하면 인간은 영혼과 육체가 하나를 이루고 있는 전체적 존재이다. 인간은 육체 없이 완전할 수 없다. 본래 인간의 육체는 허무하고 무가치하는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에 포함된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육체(sarx)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육체를 긍정하시고 그것을 받아들이시며 그의 구원의 사역에 포함하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사도신경에서 영혼불멸을 고백하지 않고 영혼과 육체가 하나를 이루고 있는 인간의 몸의 부활을 고백한다.
A. 죽은 자들의 부활의 시작인 예수의 부활 : 부활의 현재성과 미래성
1)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명백하고 직접적인 진술이 구약성서의 초기문서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본래 구약성서는 죽음과 죽음 후의 문제에 대하여 거의 관심을 갖지 않는다. 이방민족의 억압과 박해와 순교를 당하는 역사적 과정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죽음의 문제와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하여 눈을 뜨기 시작한다.
2) 죽은 자들의 부활의 묵시사상적 틀 속에서 일어난 그리스도의 부활이, 이제 모든 죽은 자들의 부활을 근거시키는 출발점이 된다. : 그리스도는 부활의 “첫 열매”
☞ 그리스도의 부활과 죽은 자들의 부활이 하나의 전체를 형성한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시작한 구원의 과정은, 죽은 자들의 부활 속에서 진행되고 완성될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을 바울은 아담-그리스도의 유형론을 통하여 설명한다(고전 15:22).
2) 죽은 자들의 부활의 미래성(바울서신) vs. 현재성(바울서신, 요한복음)
☞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열광주의자들에 반하여 죽은 자들의 부활의 미래성을 주장한다. 다른 한편 바울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지연됨으로 말미암아 회의와 실망에 빠진 사람들에 대하여 죽은 자들의 부활과 새 창조의 현재성을 주장한다. 그것은 단순히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지금 일어나고 있다. 예수의 부활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은 깨어지고(고전 15:54-55), 하나님의 새로운 생명의 세계가 이미 지금 여기에서 열려진다(롬 5장, 특히 5:18).
3) 크렉(W. Kreck) : “죽은 자들로부터 예수의 몸의 부활은 우리들에 대한 귀결을 가지며, 그것은 우리의 부활을 포괄한다.”
B. 영적인 몸으로의 부활 : 부활한 생명의 정체성과 상이성
1) 부활 이전의 인간과 부활 이후의 인간 사이의 “정체성”(Identität) vs. 죽음 이전의 몸과 부활한 몸의 철저한 “상이성(相異性)”
2) 바울이 사용하는 대조 : 썩을 것과 썩지 않는 것의 대조, 욕됨(atimia)과 영광(doxa)의 대조, 약함과 강함의 대조, 육적인 몸과 영적인 몸의 대조
C. 인간의 무엇이 부활하는가? : 몸의 인격적, 사회적 이해
1) 인간은 죽지만, 자신의 삶의 역사를 통하여 형성되어진 그의 자아, 그의 인격은 죽음과 함께 사라지거나 소멸되지 않는다.
2) “몸의 부활” : 그의 모든 삶의 역사, 이웃과의 만남과 교통 속에서 형성되어진 인간의 자아 곧 그의 몸이 새로운 존재 곧 “영적인 몸”으로 철저히 변화되는 것
3) 몰트만 : 부활은 죽음을 전제하지만, 죽은 자들의 정체성의 폐기를 전제하지 않는다.
D. 불멸에 대한 새로운 이해
1) 자기의 삶의 역사를 가진 인간의 자아, 그의 인격의 불멸
2) 알트하우스 : 기독교가 받아들인 고대의 “불멸”이란 개념은, “하나님은 인간을 취소할 수 없이 자기와 관계 속에 세우셨다는 것, 인간은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 취소할 수 없이 인격이며, 하나님을 위한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이라는 것, 육체적 죽음도 인간 현존의 이 결정적 현실을 파괴하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표현이다.”
3) 인간의 부활을 말하는 인격적 종말론(personale Eschatologie), 모든 피조물들의 변화와 새 창조를 말하는 우주적 종말론(kosmologische Eschatologie)
E. 죽은 자들의 부활의 현재적 의미
☞ 매주일 사도신경을 통하여 우리가 고백하는 “몸의 부활”은 현대인에게 아무 의미도 없는 초대 기독교의 신앙유산에 불과한가? 그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
1) 죽음의 한계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능력과 의로움에 대한 확신과 희망
2) 우리는 “나의 모든 생각들과 행위들, 나의 사람됨, 나의 모든 것이 하나님과 증인들 앞에서 되살아 날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계명에 복종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
☞ 우리는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끝나겠지” 생각하면서 무책임하게 행동할 수 없다. 오히려 우리는 “나의 모든 생각들과 행위들, 나의 사람됨, 나의 모든 것이 하나님과 증인들 앞에서 되살아 날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계명에 복종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3) 신약성서 : 죽은 자들의 부활은 단순히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오심 가운데서 지금 앞당겨 일어나고 있다.
☞ 죽은 자들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의 부활과 함께 하나님의 능력이 죽음의 우주적 지배를 깨뜨렸으며, 하나님의 승리가 시작되었음을 믿는 것을 뜻한다.
4) 몸의 부활은 인간의 몸이 그 안에서 살 새로운 피조물의 세계의 새 창조를 전제한다.
가) “한편으로 새 창조의 물질성(Materialität)을 지키며,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의 통치는 신체적인 것과 손으로 붙들 수 있는 것을 탈락시키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변화시키면서 완성한다는 점을 지킨다.”
나) 몸의 부활은 인간중심적 세계관을 거부하고, 인간과 자연만물이 평화 가운데서 함께 사는 “생명공동체”를 지향하며, 삶의 모든 영역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형성될 것을 요구한다.
다) 몸의 부활을 믿는 기독교의 종말론은 몸 없는 영혼의 부활을 말하는 심령주의적, 영적 부활의 표상을 거부하는 동시에, 자연 없는 인간 중심주의적 부활의 표상을 거부한다. 그것은 인간의 몸과 함께 모든 피조물들이 새롭게 변화되어 하나님의 창조의 공동체를 이루는 우주적, 생태계적, 신체적 변화를 시사한다. 이리하여 기독교의 종말론은 육체를 영혼의 지배에서 해방시키고, 물질을 정신의 지배에서, 자연을 인간의 지배에서 해방시키고자 한다. 그것을 인간의 영혼과 육체, 물질과 정신, 인간과 자연이 각자의 가치와 존엄성을 인정받으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함께 사는 새 창조의 세계를 히망한다.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희망은 세계의 모든 사물들과 상황들의 우주적 새 창조에 대한 희망의 시작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종말론은 인격적 종말론으로 끝나지 않고 우주적 종말론으로 확대된다.
라) 몸의 부활은 인간의 육체와 물질과 자연에 대한 긍정이다. 하나님의 마지막 구워너은 인간의 영혼의 영역에서는 물론 육체와 물질과 자연의 영역에서도 실현되어야 한다. 모든 “육”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아야 한다. “몸과 영혼의 통일성 안에 있는 인간의 부활된 생명, 하나님의 길의 목적은, 하나님 자신과 이웃사람들과 온 우주와 깊은 사귐 속에 있는 젊은 육체이다.”
10. 최후의 심판
A. 최후의 심판에 대한 기다림의 동기 : 하나님의 의에 대한 기다림
1) 구약성서의 의의 개념 : 생명의 보호와 장려에 초점, “행위와 결과의 연관성”
2) “야웨의 날” : 힘 없는 자들에 대한 권력층의 불의와 착취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강조
3) 묵시사상 : 역사의 마지막에 일어날 “최후의 심판”
B. 십자가에 달린 세계 심판자 : 심판의 기준
1) 심판의 기준 : 인간의 행위
2) 문제점
가) 그것은 세속의 법적사고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나) 심판에 대한 성서 본래의 동기가 간과된다.
다) 여기서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과 그의 하나님 되심은 제한된다.
3) 최후의 심판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자 되심 → 예수의 사랑에 근거한 이웃사랑이 심판의 일차적 기준임
가) 어떤 삶의 방식이 삶의 완성을 가져오며 또 삶의 좌절과 실패를 가져오는가에 대한 기준이 제시된다.
나) 예수가 최후의 심판자요 그의 사랑이 심판의 기준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다.
다) 예수가 심판자이기 때문에, 세계사의 마지막은 예수의 의도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C. 구원의 약속과 심판의 경고
☞ 임박한 하나님 나라 앞에서의 새로운 결단과 회개로 부르시기 위하여 심판을 경고하심
D. 최후 심판의 현재성과 미래성
1) 믿음 :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현재적 경험
2) 심판 : 인간이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그의 거짓되고 악한 행위들과 삶을 통하여 스스로 초래하는 인간의 자기심판
3) 최후의 심판에 대한 현재적 이해가 가지는 문제점
가) 최후의 심판을 현재의 순간 속에서 일어나는 실존적, 개인적, 내면적 사건으로 위축시키는 문제점
나) 하나님의 심판을 죄된 인간의 상태로 위축시키는 문제점
4) 성서는 최후의 심판을 현재적인 것으로 나타내는 동시에 미래적인 것으로 나타낸다.
E. 심판의 다양한 측면들
1) 개인의 내면적, 현재적 측면
2) 미래적 측면
3) 사회적 측면
4) 보편적, 세계사적 측면
5) 창조론적 측면
11. 최후의 심판의 결과 : 만유회복설의 문제
☞ “심판의 두 가지 결말”(doppelter Gerichtsausgang) : 의로운 자들은 하늘나라의 영원한 안식과 열락을 누리게 되는 반면, 불의한 자들은 영원히 지옥의 불에 타는 형벌을 받게 되는 것이 최후의 심판의 결과이며 이것이 역사의 마지막 곧 종말이라고 주장
☞ 만유회복설 : 최후의 심판의 궁극목적은 심판의 두 가지 결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과 모든 피조물들의 회복에 있다고 주장
☞ 하나님의 세계창조와 구원사는 최후의 심판과 함께 실패로, 아니면 적어도 부분적 실패로 끝날 것인가, 아니면 최후의 심판을 거쳐 만물의 회복과 완성에 이를 것인가?
A. 문제의 역사
☞ 만유의 회복(apokatastasis panton) : 죄인들과 저주받은 자들과 사탄을 포함한 모든 창조가 타락 이전에 있었던 완전한 열락의 상태로 회복될 것임
1)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Clemens)의 문헌에서 발견됨 : 선하신 하나님이 영원한 벌을 내린다는 것은 생각될 수 없다. 죽음 이후의 벌을 영원한 형벌로 해석하지 않고 회복을 위한 일시적 정화의 과정으로 해석함, 이리하여 그는 연옥설을 준비하는 동시에, 모든 영적 존재들의 종말론적 구워너 곧 회복을 처음으로 제시한다.
2) 오리게네스 : 만유의 회복에 대한 생각을 체계 있게 서술한 최초의 신학자, “(모든 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그리스도에 대한 복종과 성령 가운데서의 일치를 토하여 시작과 동일한 끝에 이를 것이다.” → 초대교회의 많은 교부들에게 영향
3) 니싸의 그레고리(Gregor of Nyssa) : 하나님의 계획은 모든 피조물들 안에서 실현될 것이다. 지옥의 벌을 받은 자들도 회복될 것이다.
4) 암브로시우스(Ambrosius) : 구원의 확실성은 모든 사람들에게 확대된다.
5)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 보편적 구원에 대한 오리게네스의 생각을 지지(초기) → 마귀들과 그리스도의 적들이 받게 될 영원한 벌을 강조(후기)
6) 아우구스티누스는 심판의 두 가지 결말을 주장함 : 소수의 선택받은 자들(numerus electorum)만이 구원을 받을 것이다. 회개의 가능성을 거부하는 모든 죄인들과 천사들은 영원한 벌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그(오리게네스)의 이론은 모든 한계를 넘어서며, 마지막에는 악의 원인자인 악마까지 (회복에) 포함시키기 때문이다.”
☞ 오리게네스의 만유회복설은 하나님의 의와 벌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벌을 회복에 이르는 교육학적 통과 과정으로 생각한다는 이유로 543년 그가 속한 지역의 교구에서 이단으로 배척당하였고, 553년 제5차 콘스탄티노플 공회에서 유스티니안 황제의 이름으로 배격되었다.
7) 루터교회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날에 심판하러 오셔서, 모든 죽은 자들을 부활시키시고, 신자들과 선택된 자들에게는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기쁨을 주실 것이며, 하나님 없는 자들과 마귀들을 영원한 형벌로 저주하실 것이다. 마귀들, 그리고 저주받은 자들이 영원한 고통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가르치는 재세례론자들은 거부된다.”
8) 개혁교회 : 헬베티아 신앙고백,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서 만유회복설 거부
9) 초기 경건주의자 알브레히트 벵엘(Albrecht Bengel) : 천년왕국설과 더불어 만유회복설 재등장, 하나님이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때, 지옥은 더 이상 있지 않을 것이다.
10) 외팅어(Fr. Chr. Ötinger) : 천년왕국설과 만유회복설을 한 걸음 더 발전시키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통일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그의 종말론을 전개하였다.
11) 슐라이어마허(Fr. Schleiermacher) : 하나님의 예정은 소수의 사람들에 대한 악의 승리를 거부한다.
12) 블룸하르트 부자 : 만유회복설=“희망의 고백”
13) 헤르만 쿠터(Hermann Kutter), 레온하르트 라가츠(Leonhard Ragaz) : 모든 인간의 마지막 구원은 물론, 자연의 모든 사물의 회복을 주장함(종교사회주의 운동)
14) 칼 바르트 : 블룸하르트의 영향을 받아 후기에 구원의 보편주의(Heilsuniversalismus)로 기울어짐, “만유의 회복을 믿지 않는 사람은 황소이고,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은 당나귀이다.”
15) 투르나이전(Eduard Thurneysen) : 그리스도는 “만물의 화해자”로 선포되어야 한다.
16) 에밀 브루너 : “마지막 심판과 만유의 화해라는 이 두 개념들 안에서 거룩한 자로서의 하나님이 자기전달과 사랑하는 자로서의 하나님의 자기영화가 완전하게 표현된다.” 최후의 심판에 대한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이요, 만유의 화해와 회복에 대한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는 이 양자의 완전하고 논리적인 균형이나 일치를 시도해서는 안 된다.
17) 알트하우스 :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신실하심을 믿는 사람은, 기도 가운데서 세계심판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만유의 회복을 희망할 수 있다.
18) 퀸네트(Walter Künneth) : 만유회복설은 “시대들(Äonen)의 이론의 마지막 귀결로서의 신학적 필연성”이다.
19) 틸리히(Paul Tillich) : 인류의 역사가 구원과 멸망의 두 가지 결말로 끝난다는 이론은, “피조된 모든 것이 존재의 영원한 근거에 뿌리박고 있다”는 진리에 모순된다.
20) 에벨링(Gerhard Ebeling) : 심판의 두 가지 결말을 주장함, “성서는 하늘과 지옥의 상징 하에 마지막 사건의 두 가지 결과에 대하여 명백하게 말한다... 만유의 구원, 만유의 회복에 관한 생각은 하나님 앞에 있는 상황으로부터 구체적으로 진술될 수 있는 것을... 넘어선다. 악의 마지막이 어떠한가는, 그것이 근원에 대한 설명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닫혀져 있다.”
21) 라쵸프(C.H. Ratschow) : 에벨링과 동일한 입장, “심판으로서의 심판은 한편의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의 영광으로 들어가고, 다른 한편의 사람들은 영원한 불로 저주를 받을 때에만 의미를 가진다.”
22) 몰트만(J. Moltmann) : 만유회복설을 십자가의 신학의 필연적 귀결로 봄
23) 슈바르츠(Hans Schwarz) : 마지막 결론 보류, “우리는 온 인류가 구원되기를 뜨겁게 희망하고 기도하지만, 그것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자명한 것으로 생각할 수 없으며, 하나님이 이 목적을 이룰 수밖에 없는 길을 제시할 수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때문에 구원받을 수 있따는 것을 안다.”
24) 하인리히 오트(Heinrich Ott) : 명확한 결론 보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존재가 종말에 사실상 있을 수 있는가의 문제에 대한 답변은 신학이 대답할 수 있는 한계 밖에 있는 문제이다.”
25) 칼 라너(Karl Rahner) : 구원과 멸망의 두 가지 결말을 가져오는 최후의 심판은 하나의 “가능성”으로 생각되어야 한다.
26) 발타자르(H.U. von Balthasar) : 구원과 멸망의 두 가지 결말을 가진 심판의 가능성과 만물의 화해에 대한 희망이 성서에 공존한다.
27) 트라웁(T. Traub) : 만유의 회복 부정 → “전적 폐기설”(Vernichtungshypothese) 주장
B. 만유회복설에 대한 찬반의 성서적 근거
☞ 행 3:21, 엡 1:10, 골 2:10, 고전 15:24-28, 구약성경 여러 곳
C. 두 입장의 신학적 논증
☞ 만유회복설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 4:8, 16)라는 하나님에 대한 성서의 기본적 인식에서 출발한다. 그는 무한한 사랑이시기 때문에, 인간의 죄보다도 그의 은혜가 더 크다.
D. 이중예정인가, 보편적 은혜의 선택인가?
☞ 전통적 이중예정설은 인간의 회개와 믿음과 의롭게 살고자 하는 노력은 물론 복음의 선포를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가) 바르트
(1) 예정론을 “선택론”(Erwählungslehre)으로 전개함
(2) “하나님의 영원한 의지(Wille)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에 있어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선택(Erwählung)을, 축복과 생명을 돌리셨고, 자기 자신에게는... 버림(Verwerfung)을, 저주와 죽음을 돌리셨다.”
(3) 구원에로의 “제안”(Angebot) :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선택은, 모든 인류가 믿음이 있든 없든, 이미 구원을 받았음을 뜻하지 않는다.
(4) “불가능한 가능성”, “객관적 불가능성” : 인간이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 불신앙의 가능성
나) 아버지 블룸하르트(Ch. Blumhardt) : 보편적 은혜의 선택에 관한 바르트의 생각을 이어감, “선한 것이 영원하다면, 악한 것이 영원하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구원이 영원하기 때문에, 비참함이 영원할 수 없다... 하나님의 구원이 있기 때문에 구원이 아닌 모든 것은 중지된다.”
E.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1) 하나님의 은혜의 우월성인가 아니면 인간의 믿음의 결단인가, 하나님의 보편적 은혜인가 아니면 인간의 믿음과 행위인가의 문제
2) 블로흐 : 죄에 대한 책임은 단순히 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의 체제와 역사적 상황에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죄에 대한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며 그의 죄에 대한 최후의 심판을 선언한다.
3) 바흘(G. Bachl)
가) 영원히 구원받을 자와 영원히 저주받을 자의 분리를 말하는 신학에 반대함
나) “그리스도께서 성취한 화해의 사역은 그의 효과에 있어서 제한되며, 인류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헛된 것으로 되어버린다.”
다) “그보다 더 큰 것이 생각될 수 없고 있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은, 희생자에게 보상을 주고 살해자를 용서하여, 양자가 각자의 방법으로 새로운 의에 참여하게 할 수 있다.”
4) 판넨베르크 : 두 가지 결말의 최후심판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모든 인간의 화해와 구원이 최후심판의 마지막 결과임을 조심스럽게 시사
가) “우리의 구원과 하나님과의 화해를 위하여, 사람이 되었고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 그리스도가 심판의 기준일 것이므로, 신자들은 신뢰하는 마음으로 심판을 향하여 나아간다.” 아버지 하나님의 창조의 의지와, 세계를 하나님과 화해시키고자 하는 아들의 의지는, “심판이 인간의 폐기를 일으키지 않을 것임을 보증한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심판자이든, 아니면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이든 간에, 심판의 집행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나타나셨고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그 분의 손 안에 있다.”
나) 끝까지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의 제안을 거부하고 스스로 지옥의 심판에 머물고자 하는 인간의 가능성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시고 그의 자유의사를 존중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을 강요할 수 없다.
5) 유의할 점
가) 우리는 그리스도의 세계 심판을 약화시키거나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나) 세계의 심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에 따른 심판이요, 그것의 마지막 결과는 인간의 행위에 대한 응보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완성과 만물의 회복이다.
다) 만물의 회복 : 예수의 부활과 함께 시작한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만물이 새롭게 변화되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새 창조에 참여하는 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