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년 전 쯤에 이 책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 책의 부제는 ‘다석사상으로 풀이한 도마복음이다. 제목대로 거추장스런 신화의 옷을 벗어도 예수는 충분히 위대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불신자의 신분으로 살다보면 미래의 터전이 될 지옥이 연상 될 때가 있다. 파스칼은 끝까지 패는 쥐고 있으며 베팅을 하라고 했지만 어짜피 배타적인 종교들 속에서 '있다/없다의 차원'으론 부족하다. 개신교와 카톨릭이 다르고 장로회냐 성공회냐, 동방정교냐에서도 갈릴 것이니 확률이 낮아졌다. 도마복음의 발견은 내가 쥐고 있던 지옥행 특급열차 티켓을 발급 오류로 하고 새 판을 짤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아브라함의 종교의 특징으 코브난트(계약)이다. 신과 인간사이의 신성한 동의와 약속의 바탕인데 나는 몇 가지 조항에 문제가 생겨 끝까지 싸인을 버티고 있었다. 도마복음은 내가 문제삼았던 조항들을 모조리 삭제한 (원본)계약서였다. 새 계약서엔 죽은사람이 살아나지도, 물위를 걷지도, 맹물을 포도주로 만들 조항이 없다. 인물이 위대해 지는게 무엇을 해서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지 않아서인 것이 아이러니하지만, 진실로 윤색이 없는 예수의 실체를 알고 싶었다. 기존의 복음서는 뭔가가 뒤 섞여 있는 느낌이었다. 직업적 습벽으로 순도높은 데이터를 좋아한다. 항상 거짓인 명제는 뒤집으면 순도 백퍼센트의 정보가 되기에 논리적으로 항상 참과 가치가 같다. 문제는 진실과 거짓이 양념 반 후라이드 반처럼 섞여 있는 경우처럼, 내일은 비가 올수도 있고 안 올 수도 있다고 들렸다. 도마복음은 백퍼센트 순살치킨처럼 보인다. 뼈나 가시를 바를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다시 양이 너무 작다. 한 마리를 배달시켰는데 한 입씩 먹으니까 없어진 것처럼. 그래서 사가(史家)들은 실제의 예수를 알기에 가장 중요한 문헌은 여전히 마태, 마가, 누가의 공관복음으로 여긴다. 가시가 있어도 바르면 먹을게 많다는 것이다.
박영호는 ’메타노에오, 신화를 벗은 예수'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마태오복음서를 5장 21:48을 인용하여 해석한다. 탐진치를 배격하고(5병) 진리(얼나)와 원수를 사랑하여 솟나는 것이(2어) 예수가 말한 오병이어라고 주장했다. 안타깝게도 나는 이런 해석에는 오류가 있다고 생각한다. 듣기에는 좋은 해석이지만 실체의 예수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아서이다. 우리 스승님의 뜻은 그게 아니라 이거라고 하는데, 가장 깔끔한 건, 스승님의 입으로부터 가타부타 말을 한 일차사료이다. 오병이어 이야기는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에 등장한다 (도마복음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소스가 다른 개별적 문서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이야기이는 실제적 사건일 확률이 높다. 세례요한의 이야기와 더불어 오병이어의 이야기는 축자적 해석인 기적을 논외하고 실제로 있었던 사건일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마태복음 5장의 이야기와 사복음서의 오병이어이야기는 별개로 다뤄야 하는데 박영호선생은 이 둘을 버무려 말이 되게 묶어버렸다. 다석사상으로 넣기에 애매한 부분을 욱여넣으면 아전인수가 된다. 게다가 알프레드 화이트헤드의 영향으로 보이는 ‘예수의 영성신앙을 기복신앙’으로 폄훼했다는 사도바울에 대한 비판도 동의하기 힘들다.
박영호는 메타노에오를 '회개'로 번역하면 안 된다고 하였다. 뉘우침과 반성의 뉘앙스에 매몰되면 놓치는 것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는 종말론적 관점을 가진 유대인이었다. 쿰란지역의 에세네파일 가능성이 크지만 바울이 확실한 바리새인인것 같이, 혹은 가롯유다가 열심당인것 같이 못박을 증거는 아직은 없다. 임박한 하늘의 나라, 아버지의 나라에 가기 위해서 조건들을 예수는 제시했다. 마테오복음서의 5장처럼 수성의 탐진치를 버리는 것도 중요하고 나아가 결국 사람이 바뀌어야 갈 수 있는 곳이 예수가 말한 나라이다. A.J.크로닌은 천국의 열쇠라는 제목으로 썼지만, 임승원 작사의 '돈으로도 못가요'라는 어린이 찬송처럼 한 단어로 못박는데는 실패했다. 천국의 열쇠는 '회개'가 선행되야 할 지는 모르나 중요한 건 '거듭'나야만 갈 수 있다.
흔히 흠정역이라 부르는 KJV, 킹제임스본 성경,은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더불어 현대 영어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이다. 에라스무스의 헬라어 표준원문을 중역하고 번역였는데 웨스트민스터, 케임브리지, 그리고 옥스포드의 세 그룹이 정경의 순서대로 번역을 맏았고, 신약의 사복음서와 사도행전, 묵시록은 마지막 옥스포드그룹이 맡았다. 킹 제임스 성경이 영어에 끼친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대중들의 일상 어휘, 표현, 문체 그리고 문화에 킹 제임스 성경이 녹아있다. 번역은 쉬운일이 아니다. 양쪽 언어의 이해를 바탕으로 발화자의 의도를 손실이 적게 독자에게 전달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의미에서 한글성경은 거의 무손실로 번역을 한 느낌이다. 손실이 없는대신 가독성을 희생한 느낌이다.
1611 완결한 흠정역에 등장한 '희생양', '피스메이커'같은 신조어는 현대에도 널리 쓰이고 있지만 '거듭나다'는 '회개'나 '승리하세요' 처럼 한국의 일부종교계층에서만 사용되는 것 같다. '거듭나다'는 성경의 우리말 번역에서 생긴 조어로 생각된다. 현대어 성경(NIV)에선 단순히 메타노에오를 '다시 태어나다(reborn)'로 번역했지만, 헬라어의 원문은 γεννηθῇ ἄνωθεν" (gennēthē anōthen) (게네쎄이 아노쎈)인다. 게네이쎄이(γεννηθῇ )는 이견이 없이 '태어나다'는 것인데 아노쎈은 두가지 중의적 의미가 있다. 하나는 NIV대로 '다시'의 의미와 다른하나는 '위로부터'라는 뜻이 있다. 다시 태어나는 '재생하다, 중생하다, 혹은 더 익숙한 갱생하다'라는 뜻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듭난다'라고 한 의미는 아노쎈때문이라고 보여진다. 위로부터 다시태어나다의 의미를 포함시키려면 새로운 용어가 필요했을 것 같다.
도마복음이 발견된 지 칠십년 가까이 지났다. 이 귀한 발견을 소홀히 하는 것은 여전히 못마땅하다. 마치 예수의 육성이 담긴 테이프를 외면하는 건 (단테의 신곡에서처럼) 지옥에서 가장 뜨거운 곳은 중요한 위기에서 침묵했던 그대들을 위해 예비하였다!는 격이라 생각했던 적이 있다. 지금은 스스로도 도마복음이 근대 독일신학자이 가정했던 큐문서이거나 2세기 이전에 쓰여진 복음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도마복음이 영지주의서적들의 그득한 나그함마디 문서들 속에서 발견된 건 부인 없는 사실이지만 (개인적으로) 도마복음에서 영지주의가 보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여전히 들여다 볼 가치가 있고 권위가 있는 것은 도마복음보다 사복음서가 아닌가 한다. 베드로복음서나 유다복음서, 빌립복음이나 나자렛복음서를 가지고 예수를 이해하기엔 무리가 있고, (동의를 얻기도 어렵듯이 도마복음서 또한 게임의 판도를 바꾸지는 못했다. 도마복음의 가치는 로마제국에서 주객이 전도된 기독교가 어떻게 이단을 만들고 박해하는, 특히 영지주의자들을, 역사속에서 살아남아 변천하는 과정에서 이데올로기의 우월이나 철학적 진화보다 지리정치학적인 요소, 초기교부들의 신념과 이해관계, 정적을 축출하는 과정속에서 절름발이가 된 예수의 말을 복구해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 그래서 박영호의 도마복음을 다석사상으로 과제를 풀이한 것이, 한계가 분명한 상황에서 유의미한 시도임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