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알고 있는 범위에서 한국 개신교에서 공동체 생활의 시작은 70년대에 문동환 목사가 우이동에서 시작했던 ‘새벽의 집’이였다. 물론 그 이전에 동광원, 일가원 등의 수도공동체가 있었지만 순수한 생활공동체로서는 첫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문 목사는 한국 신학대학의 교수로 계시면서 수유리 방학동에 몇 가정과 함께 공동체를 만들어서 8년을 지속하였다. 한국이 민주화가 된 사회였다면 ‘새벽의 집’도 외국에 있는 역사 깊은 공동체처럼 발전이 되었을 터인데 문 목사의 민주화 운동으로 감옥을 들랑거리는 통에 공동체 구성원들이 고통을 많이 겪고 끝내는 지속될 수가 없었다.
나는 평생의 꿈이 공동체 생활을 하는 것이어서 호주에 와서도 기회가 닫는데로 공동체를 방문해서 체험해 보기도 했다. 나는 공동체 생활을 하는 사람은 무조건 존경한다. 왜냐하면 보통 사람들은 죽어서나 이룰 수 있는 공동체(공동묘지)를 살아서 이루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은 죽어서 가는 공동체도 들어가기 어려워져서 한 줌이 재가 되어 바다로 강으로 뿔뿔이 흩어져 뿌려지고 있다.
호주 대륙에서 시드니의 정반대편인 동부 해안에 있는 자연주의자들이 사는 공동체를 방문했었다. 공동체의 리더의 집에서 하루 밤을 묵게 되었을 때 놀란 것은 그들의 집 바닥이 카펫이나 마루가 아닌 흙 바닥이었다. 그들은 그냥 맨 땅에다 침대와 가구들을 놓고 살고 있었다. 자연을 해치지 않고 최대한으로 보존하면서 살자는 원칙을 철저히 실천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공동체는 호주의 공산주의자들이 냉전체제에서 호주 정부가 공산당을 불법화 해서 함께 모여 살기 시작해서 건설된 공동체였다. 제일 먼저 지어졌다는 회당으로 쓰이는 건물에 갔더니 벽이 이상하게 두꺼웠다. “전쟁 준비하려고 이렇게 두껍게 지었느냐?”고 물었더니 군청에서 자기들을 달갑지 않게 생각해서 건물이 약하다고 계속 문제를
삼아서 그렇게 됐다고 나름 박해(?) 받은 스토리를 소개했다.
17년 전에 지인이 이상한 사람들이 운영하는 카페가 있다고 해서 같이 가보았다. 외형적인 모습은 영락 없는 히피인데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알고 보니 '12지파'라는 구약적 전통을 철저히 지키는 기독교공동체였다. 그들을 알기 위해서 그들이 사는 공동체를 자주 찾게 되어 친해지게 되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완전 공산사회인 12지파는 잘 나갈 때나 못 나갈 때나 완벽한 공동체의 삶을 살아간다. 처음 방문했을 때 가정을 이룬 멤버들은 각자의 방에서 살고 싱글들은 한 방에 2층 침대를 놓고 4명이 사는 모습을 보고 놀랐었다. 군대도 싱글룸에서 사는 호주 사회에서 사생활이 전혀 없는 2층 침대라니? 개인적, 사회적, 경제적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함께 사는 그들의 철저한 삶은 참으로 존경스럽지만 신앙의 내용이 너무 단순하게 보수적이어서 나에게는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이다. 그러나 나는 12 지파가 한국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을 계속 찾고 있다. 왜냐하면 입으로만 신앙생활을 하는 대부분의 한국 기독교인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훌륭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히피처럼 외형적으로부터 분명히 표가 나서 어디에서나 눈에 띄게 될 것이어서 한국에 가서 그들의 대표적 사업인 유기농 카페를 열면 면 광고 효과가 클 것 같다.
한 번은 방문했을 때 기독교에서는 보통 초막절이라고 하는 숙곳 축제를 하고 있었다. 숙곳행사는 유대인들이 광야에서 고난의 행군을 하던 때를 기념해서 야외 생활을 하는 것이다. 구약적 전통을 따르는 12지파는 고난을 체험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마당에 텐트를 치고 캠핑을 하면서 즐기는 셈이었다. 지금도 정통파 유대인들은 마당이 없는 아파트에 살면 하다 못해서 방에서 자지 않고 베란다에 텐트를 치고 잔다.
그들은 어떤 문제를 결정할 때 합리적이기 보다는 그들 나름의 신앙적으로 결정하는 것이다. 마치 순복음 경향의 신자들이 삶을 투기적으로 살아가듯이 신앙으로 결정한다. 예를 들면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고자 할 때 시장조사 보다 기도부터 한다. 그러나 합리성 보다 신앙으로 한다는 것은 좋은 것 같지만 결국은 영향력 있는 한 개인이 결정한다는 의미가 될 수 있다. 물론 비즈니스를 하기 때문에 돈 계산은 철저히 한다.
그들은 안식일이 시작 돠는 금요일 저녁마다 환영해 보아야 오는 사람도 별로 없지만 오픈을 해서 방문객을 환영한다. 식사시간에 회중이 앉아 있으면 당번이 된 사람이 마치 웨이터처럼 서빙을 한다. 처음 갔을 때 인상적인 것은 4, 5세 된 아이가 내프킨 박스를 들고 다니면서 사람들이 한 장씩 집도록 하는 모습이다. 10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 아이가 현관을 정성껏 쓸고 있기도 했다. 그 곳에서는 어렸을 적부터 공동체 안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훈련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시드니의 대표적 관광지인 블루 마운틴에서 ‘The Yellow Deli’ 라는 까페를 운영한다. 세계적인 완전 유기농 브랜드인 ‘The Yellow Deli'는 최소한 밖에서 30분은 기다려야 자리가 나는 명소이다.
내가 이 공동체에 특별한 인연을 맺는 것은 어머니가 미군과 결혼해서 미국에서 태어난 절반 한국인인 세라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과는 전혀 인연이 없이 살다가 공동체에 들어왔고 공동체에서 뉴질랜드 원주민인 마오리족의 피가 섞인 남자와 결혼을 해서 4 자녀를 낳았다. 세라의 유일한 한국인들과의 관계는 우리 부부가 유일하다. 이 정도가 공동체 갈 때마다 내가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 하는 틈틈이 아내가 세라와 대화해서 알 수 있었던 내용이다. 이러한 배경을 가진 세라로서는 한국에 공동체가 진출한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가능한한 모든 것을 공동체 안에서 해결을 하려고 노력을 한다. 새 것을 사는 것 보다는 돈을 들이지 않고 남들이 못 쓰는 것을 가져다가 고쳐서 사용한다. 한 번은 1000불을 주고 중고차를 사서 여러 명이 고쳐서 타고 다니는 것을 보기도 했다. 가장 최근에 방문했을 때는 직경 1M 높이 30M의 나무를 전문가의 도움 없이 베어서 쓰러트려서 잘라 놓은 것이었다. 엔진 톱으로 밑은 자른 다음 밧줄을 묶어 아이들까지 온 공동체가 잡아당겨 나무를 쓰러트렸다고 자랑을 했다. 1년 동안 공동체의 특성답게 돈을 들이지 않고 자기들 힘으로 싸우나를 비롯해서 여러 가지 시설과 구조물을 지어 놓았다. 나의 지인의 공장이 이사를 가면서 처분해야 할 자재들이 있어서 가져다가 부엌을 새로 만들기도 했다.
시드니에서 800 KM나 떨어진 곳에 전원이 미국인들인 부루더후프에 공동체가 있다.
신학 대학 합창단이 호주에 순회공연을 왔을 때 학생들에게 공동체 맛이라도 보여주어야겠다는 생각에서 무리를 해서 데리고 갔다. 저녁 집회 시간에 공연을 했는데 첫 곡이 끝났는데 아무도 박수를 치지 않았다. 합창단원들은 조금 당황했지만 두 번째 곡을 불렀는데도 여전히 아무 반응이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들은 손바닥에 곰팡이가 날지라도 인간을 향해서 박수를 치지 않는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박수를 치지 않는 까닭은 인간들에게는 영광을 돌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작업시간에 몇 명씩 조로 나뉘어서 일터로 가는데 공동체의 3 청년과 함께 연장을 싣고 밭으로 갔다. 작업은 삽으로 밭의 고랑을 파는 아주 단순한 일이었다. 학생들에게는 평생 동안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밭일도 낯설지만 말없이 일만 하는 것도 생소한 일이었다. 한 시간 정도 지나서 슬슬 지루하기 시작하자 복학생이 내 옆으로 슬그머니 다가오더니
“목사님! 오늘 작업량이 어디까지인지 물어봐 주세요.”
“왜 하기 싫으냐?”, “아니 그런 게 아니고요. 우리 목표량을 정해주면 빨리 끝내고 자유 시간을 갖게요.”
내가 공동체 식구에게 물었더니 “작업량 같은 거 없다.”고 대답을 했다.
합창단원들은 할 말이 없어져서 또 다시 일을 해야 했다. 조금 있다가 작전을 바꾸었는지 복학생이 학생들을 집합 시켜서 뭐라고 지시를 했다. 흩어지더니 3 명이 한 팀이 되어서 한 사람이 고랑을 파면서 앞으로 나가면 양 옆에서 두 사람이 흙을 긁어서 이랑을 만들어나갔다. 작업이 훨씬 효율적으로 이루어졌다. 학생들이 열심히 땀을 흘리며 한 고랑을 끝내고 나고서 공동체 청년들에게 “어떠냐? 잘되지?”하고 물으니까 그들은 무표정하게 “너희들이 좋아하면 됐다.”라고 대꾸해서 학생들이 무색해졌다.
요즘 같은 첨단 시대에 공동체 청년들은 묵묵히 원시적인 방법으로 삽으로 밭고랑을 파나갔다. 그들은 어떤 효과도 생각하지 않고 하루 종일 말없는 소처럼 우직하게 똑 같은 동작으로 긴 밭고랑을 한 삽 한 삽 떠내어 가고 있었다. 그렇다. 그것은 노동이 곧 기도라는 것을 실천 하고 있는 것이었다.
2009년 갑작스런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마음이 허전했던 40대들 몇몇이 찾아와서 이대로는 못살겠으니 무엇인가를 해보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가능한 한 많은 것을 함께 하기로’ 하고 8 가정이 모여서 ‘시드니 큰 가족’을 시작했다. 처음 모였을 때는 마치 첫 사랑을 하듯 서로 간에 상대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2 주에 한 번 토요일에 전 가족이 모였는데 함께 할 일이 많아서 토요일이 모자랄 지경이다. 또 모두가 토요일에 시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서 중간에 틈틈이 만남을 가졌다.
외로운 이민 사회에서는 이런 저런 이유로 몇 가정이 아주 친밀하게 지내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가족적’ 분위기가 ‘가축적’ 분위기로 변해서 찢어지고 갈라져 싸우고 원수 되는 경우가 흔했다. 그래서 우리의 가족모임은 몇 가지 원칙을 정했다.
첫째. 명분이나 이념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서 움직이자.
둘째. 골치 아프게 신경 쓰지 말고 재미로 하자.
셋째. 갇혀 있는 생각의 족쇄를 풀고 서로 배우려고 노력하자.
넷째. 물건뿐만 아니라 지식, 기술, 등 서로 나누는 것을 배우자.
물론 ‘다른’ 사람들이 모여 ‘같이’ 하기는 쉽지 않다. 왜냐하면 모든 동물은 자기와 다른 것에 대하여 본능적으로 방어적 태세를 취하는 본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와 생각이 다른 것조차도 경계하는 유일한 동물이다.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만날 때 어떨 때는 한 공간에서 같이 숨을 쉬는 것도 어려울 때도 있다. ‘같은 생각을 가지고 함께’하기는 쉽다. 그러나 ‘다른 생각을 가지고 함께’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민 생활에서는 그것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우선 주거 형태만 하더라도 큰 집이 얼마든지 있고 이민자의 생활이란 것이 비교적 단순하고 투명하기 때문이다. 우선 무엇보다도 함께 모여 살면 모든 것이 경제적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 모두가 서로가 함께 살만한 인간이 되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즉 개인주의가 발달해서 참고 인내할 줄 알고 항상 남을 배려하는 공동체적 정신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큰 가족은 어차피 남의 땅에서 살다가 죽을 팔자이니 살아서 가족 같이 살고 죽을 때 서로 관을 들어 줄 사이가 될 수 있는 짝퉁 가족을 이루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그것이 그저 되는 일이 아니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고 좋은 것일수록 지불해야 할 대가가 높은 법이다. 생긴 데로 놀고 자기 하고 싶은 데로 해서는 될 일이 아니고 서로가 다듬어지고 훈련하고 닦여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나를 중심으로 해서 모였고 내가 목사이고 나이가 제일 많다고 해서 큰 가족에서 어떤 지도적인 입장에 있지 않았다. 한 가지 예를 든다면 나는 3년간 지속된 모임에서 한 번도 5분 이상 이야기를 해 본적인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다른 사람 보다 더 많은 책임감을 느끼고 배려를 더 많이 해야 하고 아이디어를 내는 정도이었다.
같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같이 하면서 창조적이고 재미있고 뜻있는 아름다운 시간을 보냈다. 예를 들면 휴가를 같이 보내고 누가 집을 사면 모든 가정이 달라붙어서 집수리를 했다. 그러나 이런 저런 이유로 3 년 만에 콩가루 가족이 되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누구 탓이라고 할 수 없는 ‘인사 사고’ 때문이었다. 원래 무슨 사고든 사고가 나면 보험으로 처리할 수 있지만 인간관계의 사고는 보험이 없는 법이다.